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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기(葬擇記)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계미생 망인(亡人)의 장지(葬地)와 장일(葬日)의 선택과 관련하여 각 절차의 방위 등을 기록한 장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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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化命癸未木 祭主子癸亥水 孫戊子壬辰坤生命壬辰水 婦己巳木 甲午葬山辛兌龍辛入首辛坐乙向運正戊辰木 泊 令辛金洪同開土七月十八日壬辰巳時穴深從地宜取土丙丁方安葬同月二十四日戊時下棺申時啓殯冲壓癸卯甲辰甲戌戊辰生少遜停立丙丁方諸條擇根甲午金丁巳苗壬申金庚壬花戊戌木辛丁戊實庚申木庚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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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9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鄭壽富 鄭壽富<着名>, 張仁行<着名>, 李柱錫<着名>, 金應道<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9년(고종26) 정수부(鄭壽富)가 밭 7두락지를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889년(고종26) 정수부(鄭壽富)가 자신이 매득하여 수년간 경작해오던 밭 7두락지를 꼭 써야할 곳이 있었던 까닭에 전문(錢文) 13냥 3전을 받고 방매하였다. 매매 대상인 땅은 도내(島內) 서면(西面) 신리(新里)의 주을로변(注乙路邊)에 있는 금자(金字) 자호의 밭이다. 구문기(舊文記)의 교부는 없이 신문기(新文記) 1장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장인행(張仁行)과 이주석(李柱錫)이 증인으로, 김응도(金應道)가 필집(筆執)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각각 착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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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光緖十五年己丑三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段矣自起買得田累年耕食是如可要用所致故不得已島內西面新里注乙路邊伏在金字丁七斗落負數卜束廤折價錢文拾參兩參戔交易依數捧上爲遣以新文一章右人前永爲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則以此文記相考事田主鄭壽富[着名]訂人張仁行[着名]李柱錫[着名]筆 金應道[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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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九年甲子正月 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單子第一統統首裵呟新第四戶幼學白慶玉年六十一甲子本水原父學生 昌潤祖嘉善大夫僉知中樞府事 敏徵曾祖學生 信憲外祖學生 金壽龍 本光山妻張氏年五十五庚午籍仁同父學生 天翼祖學生 漢佑曾祖學生 善長外祖學生 朴師德本密陽婢{又+叱}尙年二十二外居婢申良逃亡辛酉戶口相準者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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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九年甲子正月 白慶玉 行郡守 嘉慶九年甲子正月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04년(순조 4)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04년(순조 4)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61세로, 처(妻) 장씨(張氏)(55)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22살 먹은 계집종 얼상이 있었으며, 외거비 신량이 있었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辛酉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신유년, 즉 1801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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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박병해(朴炳海)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炳海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5월 20일, 박병해가 노진영에게 아버지 상에 위문해 준데 대한 감사를 전한 서간. 1942년 5월 20일, 박병해(朴炳海)가 노진영(盧軫永)에게 아버지 상에 위문해 준데 대한 감사를 전한 서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흘러 상일(祥日)에 이른 상황을 전하고 이때 위문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전했다. 여기에서 언급한 상은 소상(小祥, 돌아간 지 만 1년 기일) 혹은 대상(大祥, 돌아간지 만 2년 기일)으로 보인다. 발신자 박병해의 거주지는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源泉里)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충신 증승지, 증호조참판 박지수(朴枝樹)와 효자 주부(主簿) 박천주(朴天柱)가 11대조와 12대조이다. 7대조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박필운(朴必運)이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준각(朴準珏)의 손자이다. 1918년에 그의 생전 거주지인 원천리 1구에 세워진 '사인박병해행의송덕비(士人朴炳海行義頌德碑)'에 의하면 그는 훌륭한 명문의 후손으로 남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했고, 1916년에 많은 돈을 내놓아 마을을 돕고, 1918년에도 돈을 내놓아 100호를 도왔기에 마일이 모두 칭찬하여 인인(仁人)이라 칭찬했다고 했다. 송덕비는 남평(南平) 문제보(文濟普)가 글을 짓고 광산(光山) 이철호(李喆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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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순(李鎔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鎔淳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이용순(李鎔淳)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안부를 전하며 지난번 지은 시에 대해 의견을 말한 간찰 모년 6월 14일에 이용순(李鎔淳)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낸 간찰이다. 담제(禫制) 중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와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지난번에 지은 〈소해정(蘇海亭)〉이란 시 가운데 초연(初聯)은 바쁜 가운데 잘못 쓴 것이라서 그렇다며 '원량(元亮)' 두 글자를 '연명(淵明)'으로 고치는 것이 보기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자신은 더위를 먹었는지 수마(睡魔)를 벗 삼아 지낸다고 하였다. 이용순이 지은 〈소해정〉 시는 《蘇海遺稿附錄續集》에 실려 있는데, '원량' 두 글자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실려 있다. 시의 전문은 "主翁亭子適成時, 三角山高必式宜. 滿庭趣癖元亮宅, 聯壁眞圖摩詰詩. 完蘇無恙安身策, 觀海爲工涉世期. 不市經綸開前業, 以淸養德恐人知."이다. 담제는 삼년상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인 담제(禫祭)를 지낼 때까지를 가리킨다. 소해정은 소해(蘇海) 노종용(盧種龍 1856~1940)이 1930년에 세웠으며 그의 아호에 따라 이름을 지은 정자다. 노종용은 원풍정(願豊亭) 건립자인 농암(聾岩) 노재규(盧在奎 1836~1920)의 아들로서, 그의 선조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행적을 본받아 은둔소요(隱遁逍遙) 하였다. 노종용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한말 우국지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송병선이 자결하고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광주 일곡동에 내려와 도의의 교를 맺어 학문을 논하고 전념하며 후진양성에 힘쓴 인물이고, 《소해유고(蘇海遺稿)》'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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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박태경(朴泰慶)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泰慶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음력 1월 17일, 제 박태경이 노진영에게 소작문제로 보낸 서간. 1942년 음력 1월 17일, 제(弟) 박태경(朴泰慶)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소작(小作)문제로 보낸 서간이다. 새해를 맞아 상대와 그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주요내용은 전년도에 광주를 떠나 고향으로 이거할 때 자신이 짓던 소작 3두락은 동정 상 계속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달 임오년을 만나 역시 잊지 않고 있다며 올해도 소작을 전과 똑같이 받을 수 있는지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발신자 박태경이 있는 발신지 주소는 진도군 조도면(鳥島面) 창유리(昌柳里)의 정기복(鄭基福)씨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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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後得問에侍重體候萬福하심을仰祝 弟如前하오니幸耳 陳者네의 垈地事件에 對하야 여러가지 方面으로 주션을 하되 每事가 如意치못하와 不得한 形便으로 貴兄의게 通知하오니 海諒하시와 金六百円가령만 借用하여 주면 六百円에 對한 利子은 兄我■의 세이에 말할수엇고 每年土稅와 갓치 四石식 ᄒᆡ줄터이고 그러치안하면 八百五十円가령이면 賣買을 하것스니 貴兄게세 바로賣買을하시든지하여야만 나의 근심을 덜것스니 貴兄게셔 엇터한 주션으로 하시든지 이시기만 안일토록 ᄒᆡ주셔야하것ᄂᆡ 兩端間에이리위착안되도록 하기은 貴兄게 매여스니 兄의遠諒마바례ᄂᆡ 그러나안되게되면 엇절수나잇는가만은 만약주션을못하은날이면 네이리말이안이니 從速히 回示하심을 伸伸히바래ᄂᆡ 나문말은 日後相面時에 李峯燮上[印][印]再告日前에 畓六斗落그만두라고한 것은 다음이안이라 세에 선사람만 밥분드 고상만시길것길ᄂᆡ 그맨두라고 한거시네【피봉】〈前面〉日谷里盧軫永氏宅〈後面〉緘 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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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三十六年 月日康津縣考辛卯成籍戶口帳內古今島鎭里第 統第 戶待變軍官張大允年二十六乙丑本仁同奉父折衝將軍武良年六十八甲申祖學生弘曾祖學生德龍外祖學生金愛賢本金海母金氏故妻徐姓年二十六乙丑本利川父日泰祖元迪曾祖啓軸外祖李諳極本完山率弟大雲年二十一庚午等前准印行縣監[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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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二十四年 月日康津縣考己卯式成籍戶口帳內古今島鎭里第 統第 戶張指誠年三十一己酉本仁同父大運祖折衝武良曾祖學生弘外祖嘉善大夫秋尙連本羅州率女阿只年五等印行縣監[押][帖][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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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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標右標事譜冊價五十五兩捧上印辛丑八月十四日 標主■■志學[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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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장대운(張大運)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大運 康津縣監<着押>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92년(정조16) 강진현(康津縣)에서 장대운(張大運)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792년(정조16) 강진현에서 임자년(1792)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대운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대운은 현재 43세이고 직역은 대변군관(待變軍官)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장무량(張武良), 조부는 장홍(張弘), 증조부는 장덕룡(張德龍), 외조부는 본관이 김해인 김애현(金愛賢)이다. 아내인 나주추씨(羅州秋氏)는 43세이다. 이어서 나주추씨의 사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추상련(秋尙連), 조부는 추명금(秋命金), 증조부는 추송이(秋松伊), 외조부는 본관이 평산(平山)인 조봉이(趙奉伊)이다. 그리고 아들 장계손(張啓孫)은 19세로 기재되어 있는데, 관련 호구문서로 보아 장계철(張啓哲)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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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五十七年 月日康津縣考壬子式成籍戶口帳內古今島鎭里第 統第 戶待變軍官張大運年四十三庚午本仁同父折衝武良祖學生弘曾祖德龍外祖學生金愛賢本金海妻秋姓年四十三庚午本羅州父嘉善大夫尙連祖命金曾祖松伊外祖趙奉伊本平山子啓孫年十九甲午等印行縣監[押][周挾字改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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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장지성(張指誠)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指誠 康津縣監<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19년(순조19) 강진현(康津縣)에서 장지성(張指誠)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819년(순조19) 강진현에서 기묘년(1819)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지성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지성은 현재 31세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장대운(張大運), 조부는 절충장군 장무량(張武良), 증조부는 장홍(張弘), 외조부는 가선대부 추상련(秋尙連)으로 본관은 나주이다. 처(妻)에 대한 정보는 없으며, 5살이 된 딸 아지(阿只)가 기재되어 있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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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 고문서-치부기록류-지도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정유년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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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장무량(張武良)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武良 康津縣監<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47년(영조23) 강진현(康津縣)에서 장무량(張武良)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747년(영조23) 강진현에서 정묘년(1747)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무량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무량은 현재 44세이고 직역은 군관(軍官)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장홍(張弘), 조부는 장덕룡(張德龍), 증조부는 장구전(張九田), 외조부는 김선안(金善安)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처 김소사(金召史)는 44세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김소사의 아버지는 김애련(金愛連), 조부는 김실(金實), 증조부는 김연삼(金延三), 외조부는 김원병(金元炳)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어머니 김소사는 89세이고, 아들 태언(泰彦)은 14세, 둘째 아들 대언(大彦)은 6세, 셋째 아들 성언(聖彦)은 2세이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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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十二年 月日康津縣考丁卯成籍戶口帳內古今島第一鎭里第 統第 戶軍官張武良年四十四甲申本仁同父弘祖學生德龍曾祖學生九田外祖金善安本金海妻金召史年四十四甲申本金海父愛連祖實曾祖延三外祖金元炳本金海率母金召史年八十九己亥率子泰彦年十四甲寅次子大彦年六壬戌次子聖彦年二丙寅等甲子戶口相准印行縣監[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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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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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 장대운(張大運)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張大運 康津縣監<着押>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83년(정조7) 강진현(康津縣)에서 장대운(張大運)의 인적사항을 호적대장에서 베껴 발급한 준호구 1783년(정조7) 강진현에서 계묘년(1783)의 호적대장을 참고하여 발급한 장대운의 준호구이다. 고금도(古今島) 진리(鎭里)에 거주하는 호주 장대운은 현재 34세이고 직역은 대변군관(待變軍官)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어서 사조(四祖)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장무량(張武良), 조부는 장홍(張弘), 증조부는 장덕룡(張德龍), 외조부는 본관이 김해인 김애현(金愛賢)이다. 아내인 나주추씨(羅州秋氏)는 34세이다. 이어서 나주추씨의 사조가 기재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추상련(秋尙連), 조부는 추명금(秋命金), 증조부는 추송이(秋松伊), 외조부는 본관이 평산(平山)인 조봉이(趙奉伊)이다. 그리고 아들 장계철(張啓哲)은 10세인데, 장대운의 호구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맨 뒷부분에 행현감(行縣監)의 압(押)과 관인(官印)이 찍혀 있고, 장방형의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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