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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기 霞山記 하(霞)는 멀다는 뜻이다. 연기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며 아지랑이도 아니고 안개도 아니면서 연기와 구름, 아지랑이와 안개 위에 멀리 솟아 있으니, 이것이 영대(靈臺)167)가 관측하는 것이고 신선이 깃들어 지내는 곳이다. 천하의 산은 연기와 구름, 아지랑이와 안개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없는데 여기에 유독 '하(霞)' 자로 이름하였으니, 그 고상(高爽)하고 청수(淸秀)한 모습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라는 사물은 걷었다 펼치는 것이 일정함이 없고 숨었다 드러나는 것이 방소가 없어 아침저녁으로 모습이 다르고 흐리고 맑음에 따라 기후가 달라 오색의 문양을 토해내고 사시의 경치를 제공함에 자욱하다 흩날려 천만 가지로 변화하지만 산은 실로 여전하다. 대개 지극히 고요하여 바뀌지 않는 체(體)가 그 가운데 보존됨이 있으면 절로 지극히 움직여 쉬지 않는 용(用)이 밖으로 드러남이 있으니, 이것이 천지 만물의 실정이고 학문(學問)과 인도(人道)의 떳떳함이다.나의 벗 김백현(金伯顯) 군은 그 산에 사는 사람으로 은거하며 뜻을 구하였는데, 그 마음 속 생각을 보건대 마음이 초연하여 만 길 멀리 솟은 기상이 있으니, 대개 그 풍기가 도와 드러내 준 것은 우연이 아닌 점이 있다. 그렇다면 동정 체용(動靜體用)의 이치에 또한 묵묵히 이해하여 가만히 수양하는 것이 있는가? 궁구하지 못한 것을 더욱 궁구하고 부지런히 하지 못한 것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본원의 바탕으로 하여금 정정(定靜) 순고(純固)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굽힘이 없게 한다면 사위(事爲)의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장차 천만 가지 변화에 응수해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영대(靈臺)의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들어와서는 신선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 같은데 이르러서는 오직 만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霞。遐也。非烟非雲。非雺非霧。而遐擧於烟雲雺霧之上。此靈臺之所俟望。仙翁之所棲息也。天下之山。未有不在於烟雲雺霧之中。而此獨以霞名。其高爽淸秀之容。槩可想也。然霞之爲物。捲舒無常。隱現無方。朝暮殊象。陰睛異候。吐五色之文。供四時之景。氤氳飄颻。千變萬化。而山固自如矣。蓋有至靜不易之體。存乎其中。則自有至動不息之用。著見於外。此天地萬物之情。學問人道之常也。余友金君伯顯。其山人也。隱居求志。而見其懷想。衿抱超然。有遐擧萬丈之像。蓋其風氣助發。有非偶然者耳。然則其於動靜體用之理。亦有所黙會而潛修者否。益窮其所未窮。益謹其所未謹。使本源之地。定靜純固。無一毫撓屈。則其發於事爲之間者。將酬千變應萬化而有餘矣。至若出而呈靈臺之祥。人而同仙翁之樂。則惟在所遇之如何耳。 영대(靈臺) 중국 고대에 제왕(帝王)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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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기 黙庵記 공자께서 위인(爲仁)의 물음169)에 답한 것 가운데 "인자는 그 말하는 것을 참아서 어렵게 한다."170)라고 한 것이 있고,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진심행기(盡心行己)의 질문에 답하기를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하였고,171) 정자(程子)는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언잠(言箴)〉에서 "말을 낼 때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여야 중심이 이에 고요하고 전일해 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마음을 보존하고 덕에 나아가는 요체는 '묵(黙)'이라는 한 글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능히 침묵하여 스스로 지켜 조급하고 경망한 실수가 없으면 존양(存養)이 순수하고 견고하여 대본(大本)이 확립될 것이다. 학문 사변(學問思辨)과 성찰 천리(省察踐履)의 갖가지 공부가 어찌 일찍이 이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옛날 말에 이른바 "연못처럼 고요히 있는 것이 도리어 우레 소리를 낸다."라는 것172)이 이것이다.묵암(黙庵) 주인 김찬배(金燦培)가 90리 길[三舍]을 산 넘고 물 건너 가천(佳川)의 내 집을 방문하여 인하여 한마디 말을 청하기에 감히 과루(寡陋)하다고 스스로 도외시 할 수 없어 그저 들은 것을 외워 나를 멀리하지 않은 뜻에 보답할 뿐이다. 孔子答爲仁之有曰。仁者。其言也訒。司馬溫公答盡心行己之問有曰。自不妄語始。程子非禮勿言箴有曰。發禁躁妄。內斯静專。蓋存心進德之要。莫有先於黙之一字矣。苟能沈黙自持。無操妄之失。則存養純固。而大本立矣。學問思辨。省察踐履。種種功夫。何嘗不從此中出耶。古語所謂淵黙却雷聲是也。黙庵主人金燦培。跋涉三舍。過我佳川敝廬。因有一言之請。不敢以寡陋自外。聊誦所聞。以塞其不遐之意云爾。 위인(爲仁)의 물음 원문의 '答爲仁之'는'答爲仁之問'의 오류로 보고 풀이하였다. 인자(仁者)는……한다 사마우(司馬牛)가 인에 대해 질문한 것에 답한 말로,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하였고 《심경부주》 권2 〈성의장(誠意章)〉에 "유 충정공[유안세(劉安世)]이 사마 온공을 뵙고는 마음을 다하고 몸을 행하는 요점 중에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공은 '성일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이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 可以終身行之者, 公曰其誠乎! 又問行之何先? 公曰自不妄語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옛날……것 《장자》 〈재유(在宥)〉에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며, 못처럼 고요히 있다가 우레처럼 큰 소리를 낸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라고 한 것을 변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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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김양묵(金養默)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道光十一年十二月 日 吏曺 權知承文院副正字金養黙 道光十一年十二月 日 純祖 金養默 서울특별시 종로구 8.0*8.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31년(순조 31)에 이조(吏曺)에서 국왕의 명을 받아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양묵(金養黙)을 선무랑(宣務郞) 행승문원부정자(行承文院副正字)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첩(敎牒) 1831년(순조 31) 12월 25일에 이조(吏曺)에서 국왕의 명을 받아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양묵(金養黙)을 선무랑(宣務郞) 행승문원부정자(行承文院副正字)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첩(敎牒)이다. 발급 일자 위에 이조의 관인이 답인(踏印)되어 있고, 이조 판서(判書)와 이조 참판(參判) 이조 참의(參議)가 모두 서압(署押)하였다. 권지(權知)는 과거 합격자로서 성균관·승문원·교서관·훈련원·별시위 등에 분관(分管)되어 임용 대기 중인 견습 관원이라는 뜻으로, 고신을 받을 당시 김양묵이 승문원 부정자의 직을 수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문원은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고 이문(吏文)의 교육을 담당한 관서로 부정자는 종 9품의 관직이다. 선무랑은 종 6품의 문관에게 주던 품계로 관직인 승문원 부정자의 품계보다 높았기 때문에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명 앞에 행(行)자를 표기하였다. 한편, 문서 배면(背面) 좌측 하단에는 '吏吏亨福'이라고 적혀있다. 吏吏는 고신을 작성한 이조의 서리이며, 김형복은 서리의 이름이다. 부안 김씨 김양묵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고신의 배면을 보면 김형복뿐만 아니라 김정호, 김정익 등의 김씨 성을 가진 서리의 이름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조에 근무하는 서리 가운데 김씨 성이 대를 이러 부안 김씨 가문의 단골 서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양묵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1829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받았던 고신(告身)들이 그의 후손 가에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가 문과 응시 당시 작성했던 시권(試券)과 급제하여 받았던 홍패(紅牌)를 비롯하여, 고신 16점, 차첩 2점 등 20점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김응상(金膺相)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할머니, 고조와 고조할머니 등이 받았던 고신 20점이 전하고 있는데 대부분 추증교지(追贈敎旨)이다. 이 추증교지는 김응상이 고신을 받을 때마다 함께 받았던 것들이다. 고신 외에 김응상이 1819년부터 1855년까지 작성했던 호구단자(戶口單子) 7점도 전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응상은 생전에 부안현 남하면 돈계리에 내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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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曺道光十二年七月二十八日奉敎承文院著作金養黙爲通德郞行承文院博士兼奉常寺直長者道光十二年七月 日判書 參判 參議[着押] 正郎 佐郞[官印]吏吏金貞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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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어른이 전날 작별하고 돌아갈 때 읊은 시를 부쳐왔기에 화답시를 드리다 悅丈以前日別歸吟寄來 和韻以呈 뜨락 오동나무는 그늘 엷어 빗소리가 가늘고 庭梧陰薄雨聲微적막한 서재에는 하는 일마저 드문드문하네 涔寂芸牕事事稀어디선가 부는 맑은 바람이 좋은 소식 전해주고 何處淸風傳信好지난밤에 뜬 밝은 달은 돌아간 사람 기억하리라 前宵明月憶人歸주옥같은 시를 보내주니 백붕83) 같아 고맙고 百朋多謝投瓊什갈옷을 갈아입으니 이별한 듯해 깜짝 놀라네 一別飜驚易葛衣멀리서 형문84)의 고요한 땅을 부러워하니 遙羡衡門閑靜地갈매기와 사슴들도 모두 기심을 잊었으리85) 潁鷗峴鹿共忘機 庭梧陰薄雨聲微, 涔寂芸牕事事稀.何處淸風傳信好, 前宵明月憶人歸.百朋多謝投瑗什, 一別飜驚易葛衣.遙羡衡門間靜地, 潁鷗峴鹿共忘機. 백붕(百朋) 많은 재물을 뜻한다. 고대(古代)에 패각(貝殼)을 화폐로 사용할 때 오패(五貝)를 일관(一串), 양관(兩串)을 일붕(一朋)이라고 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군자를 만나 뵌 이 기쁨이여, 마치 보화(寶貨)를 나에게 내려 주신 듯하도다.[旣見君子, 錫我百朋.]"라는 말이 나온다. 형문(衡門) 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보잘것없는 문으로,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은자(隱者)의 거처를 뜻한다. 《시경》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여, 쉬면서 노닐 만하도다.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굶주림을 즐길 만하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泌之洋洋, 可以樂飢.]"라는 말이 나온다. 기심(機心)을 잊었으리 원문의 '망기(忘機)'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꾀하는 마음을 잊는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살면서 매일 갈매기와 놀았더니, 갈매기들이 그를 피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갈매기를 한 마리 붙들어 가지고 오너라.'라고 하여 다음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갈매기가 멀리 피하고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갈매기를 잡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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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의태자 유허를 보고 느낀 바 있어서 觀新羅麻衣太子遺墟 有感 울며 간하고 돌아와 이곳에 들어 숨었는데 泣諫歸來入此逃지금까지 유적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구나 至今遺跡未全消동경96)의 왕의 기운 천 년 만에 다했으나 東京王氣千年盡북지97)의 영웅의 기풍은 만 장이나 높네 北地英風萬丈高삼베옷 입고 풀에 앉아 홀로 고심하고 坐草衣麻心獨苦보루 쌓고 군영 바라보며 헛수고했구나 望軍築壘力徒勞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추모하며 슬퍼했나 幾多行客追傷感후손98)은 갑절이나 깊은 수심에 잠기네 一倍忉忉後裔苗 泣諫歸來入此逃, 至今遺跡未全消.東京王氣千年盡, 北地英風萬丈高.坐草衣麻心獨苦, 望軍築壘力徒勞.幾多行客追傷感, 一倍忉忉後裔苗. 동경(東京)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慶州)를 가리킨다. 북지(北地) 촉한 후주(蜀漢後主) 유선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을 말하는데, 위(魏)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후주가 항복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후주가 끝내 항복하자 유비(劉備)의 사당에 사실을 고하고 처자를 죽인 다음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志》 태자의 후손 김택술이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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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폭동 萬瀑洞 조각조각 유리요 많고많은 진주들이라 片片琉璃斛斛珠여기저기 못과 폭포가 새 그림 펼치네 潭潭瀑瀑展新圖많은 이의 마음과 눈을 씻고 깨우치니 洗醒多少人心目이를 만든 조물주가 어찌 뜻이 없으랴 作此天工意豈無 片片琉璃斛斛珠, 潭潭瀑瀑展新圖.洗醒多少人心目, 作此天工意豈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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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명17)에게 답함 答姜子明 생각을 지극히 하여 마음이 상해 무근(無根)의 화(火)18)가 날마다 가슴속에 성하게 생긴다고 하니, 이것은 알지 못하겠네. 만약 태사공(太史公)이 빌미를 만든 것19)이 아니라면 혹 사마자휘(司馬子徽)의 좌치(坐馳)20)를 범한 잘못일 것이네. 저것 때문이든 이것 때문이든 모두 좋은 의사는 아니네. 지금 사람은 대부분 단계를 뛰어넘고 쉽게 여겨 망령되이 행동하여 고생만 하고 실득이 없어 이런 병을 초래하네. 만일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말하자면 마땅히 일상의 평이한 곳에서 그 사물을 변별하여 곧 공사(公私)의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또렷하고 분명하도록 하고, 만일 실천을 말하자면 마땅히 어묵(語默)과 동정(動靜)에 십분 힘을 붙여 성(誠)을 기르고 진(眞)을 쌓아 오래 되어 절로 편안히 쉬는 날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요, 흐릿하고 아득한 곳에서 탐색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보존하고 지키는 공부에 안배하고 조작하여 마음이 수고롭고 기가 부족하도록 하여 병폐를 생기게 해서는 불가하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창포(菖蒲)나 복령(伏令) 등으로 효험을 바랄 수 없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마음을 보존한다는 '존심(存心)' 두 글자는 실로 창편(倉扁)21) 집안 제일의 법문(法門)이 되니, 모름지기 허다한 생각과 허다한 수고와 분주한 것을 쓸어내어 어린아이가 처음 학교에 갈 때의 모양을 하여 쇄소응대(灑掃應對)와 사친종형(事親從兄)을 하는 것에서부터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성심(誠心)이 날마다 자라도록 힘쓴다면 사의(私意)는 사라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사라질 것이니, 반드시 채워지지 못한 힘으로 갑자기 배척하고 공격하다가 스스로 낭패를 취하지 않을 것이네.〔문〕심술(心術)의 사이에 염려의 은미함이 조금이라도 미진한 것이 있는 것 이것이 안자(顔子)의 비례처(非禮處)이니, 시청언동(視聽言動) 상에 무슨 비례(非禮)가 있어 사물(四勿)22)로 알려준 것입니까?〔답〕심술염려와 시청언동은 비록 내외의 구별이 있지만 그 작용은 서로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심술에서 잃고서 시청에서 얻는 자가 있겠는가?〔문〕쇄소응대(灑掃應對)는 효제(孝弟) 가운데 한 가지 일이고, 효제는 성명(性命) 가운데 한 가지 일이라면 쇄소응대의 소이연(所以然)은 효제이고, 효제의 소이연은 성명입니다.〔답〕실로 그러하네.〔문〕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을 적에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음에 비견된다고 하였는데,23) 병들어 침상에 누운 사람은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모와 자식을 말하는 것입니까? 허씨(許氏)의 설24)로 보면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으며, 진씨(陳氏)의 설25)로 보면 부모와 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답〕허씨 설은 조금 상고하였다고 하겠지만 끝내 진씨 설이 평온한 것만 못한 듯하니, 율곡(栗谷)이 진씨 설을 따랐던 이유이네.〔문〕"사람이 능히 이와 같지 못한 것은 단지 실리(實理)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 실리라는 것은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는 것이다."26)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실리(實理)와 실견(實見)은 같지 않으니, 아마 기록할 때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理)는 실하지 않음이 없고 다만 보는 것이 실하지 않음이 있는데, "실리라는 것은 실제로 옳음을 보고 실제로 그름을 보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보면 실제로 봄이 있은 뒤에 실리가 있는 듯하기 때문에 주자가 "기록할 때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 것입니까?〔답〕실리는 천연적으로 절로 인력(人力)과 상관이 없으니, 어찌 사람이 보는 것의 실불실(實不實)이 어떠한가를 기다리겠는가? 만약 수양하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실제로 본 뒤에 실리가 있는 것이네. 致思傷心。無根之火。日熾于中。此則未喩。若非太史公作祟。則或犯司馬子徽坐馳之失耶。以彼以此。皆非好意思。大抵今人。多是躐易忘作。徒勞無得。致有此病。如言窮理。則當於日用平易處。辨別其物。則公私天理人欲之分。使之了了分明。如言踐履。則當於語默動靜上。十分着力。使之養誠積眞。久自有稅駕之日。不可探索摸想於悅惚渺茫之地。安排造作於操存持守之功。使心勞氣乏。以生病敗也。然則此非菖蒲伏令等所可責效。來喩所謂存心二字。實爲倉扁家第一法門。切須掃却許多思量。許多勞攘作小兒子初上學時模樣。自灑掃應對事親從兄上。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務使誠心日長。則私意不期消而自消。不必以未充之力。遽加排攻。而自取狼狽也。心術之間。念慮之微。少有未盡者。是顔子之非禮處。則視聽言動上。有何非禮。告之以四勿。心術念慮。與視聽言動。雖有內外之別。而其用。則未嘗不相須。豈有失於心術而得視聽者哉。灑掃應對。是孝弟中一事。孝弟是性命中一事。則灑掃應對所以然。孝弟是也。孝弟所以然。性命是也。固然。病臥於床。委之庸醫。比之不慈不孝。病臥於床者。以身之謂耶。以父母與子之謂耶。以許氏說觀之。則非以身之謂耶。以陳氏說觀之。則非以父母與子之謂耶。許氏之說稍考。終不似陳說之爲平穩也。所以栗谷從陳氏之說。人不能若此者。只爲不見實理。實理者。實見得是。實見得非。朱子曰。實理與實見不同。恐記錄漏字。蓋理無不實。但見未有實。而以實理者。實見得是。實見得非之文。觀之。則似有實見然後。有實理。故朱子言記錄之漏否。實理。是天然自有不犯人力底。何待乎人之見實不實如何也。若以修爲上言之。有實見而後實理者。 강자명(姜子明) 강진섭(姜晉燮, 1870~?)을 말한다. 자는 자명,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문인이다. 무근(無根)의 화(火) 명문(命門)과 원양(元陽)의 병 기운으로 되는 화를 말한다. 허해서 생기는 화〔虛火〕라고도 한다. 《국역 동의보감》 태사공(太史公)이……것 지나치게 책을 읽어 병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주자대전》 권47 〈여자약에게 답함〔答呂子約〕〉26서에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보면 수고롭게 심력을 소비한 소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벗들의 편지에서도 독서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들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슨 책을 읽는지요? 성현이 남긴 말들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일이 아님이 없으니, 결단코 도리어 병을 생기게 하는데 이르러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태사공이 병의 빌미를 만들었을 것입니다.〔但來書以爲勞耗心力所致, 而諸朋友書亦云讀書過苦使然, 不知是讀何書? 若是聖賢之遺言, 無非存心養性之事, 決不應反至生病. 恐又只是太史公作祟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사마자휘(司馬子徽)의 좌치(坐馳) 조용히 앉아 있는 듯해도 마음속으로는 온갖 번뇌가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좌치는《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저 비어 있는 공간을 볼지어다. 텅 빈 방에 햇살이 비치니 길상은 고요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한 (길상이 머물지 않는 것은) 마음이 고요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치닫는다고 한다.[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 夫且不止, 是之謂坐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송(宋) 나라 사마자휘(司馬子徽)가 《장자》에 나오는 '좌망(坐忘)'의 설을 좋아하여 〈좌망론(坐忘論)〉을 짓자, 정자(程子)가 "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좌치(坐馳)에 떨어진 것이다."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近思錄 卷4 存養》 창편(倉扁) 한나라 때 창공(倉公)과 전국 시대 편작(扁鵲)으로, 모두 명의(名醫)로 일컬어진다. 사물(四勿) 《논어》 〈안연(顏淵)〉에서 공자의 제자 안연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 것을 말한다. 병들어……하였는데 《소학》 〈가언(嘉言)〉에 나오는 정이(程頤)의 말이다. 허씨(許氏)의 설 병상에 누운 사람은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자신이 병들어 누운 것이라고 하였다.《소학집주증해》에서 이 문장의 고증(攷證)에 나온다. 허씨는 허형(許衡, 1209~1281)을 말한다. 진씨(陳氏)의 설 이 구절 주석에 나오는 진순(陳淳, 1159~1223)의 설을 말한다. 사람이……것이다 《근사록》 권7 출처(出處)에 나오는 정이(程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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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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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63) 【기현】에게 보냄 與朴世顯【冀鉉】 지지난 달에 그대 집을 들러 숙원을 푼 것이 실로 적지 않았네. 다만 돌아오는 길에 장애가 생겨 지나쳐 오게 되었으니, 뒤에 생각함에 매우 서글프고 서운하였네. 이후 가을이 겨울로 교체되어64) 햇볕이 차가워져 가는데, 당상(堂上)의 병환은 원기를 회복하였는지 모르겠지만 금옥 같은 형제들의 지극한 정성과 효성에 어찌 감응하여 변화하는 기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항상 축원하며 멀리서 생각하는 마음 감당할 수 없네. 의림(義林)은 옛날 그 쪽에서 돌아 온 뒤로 아들이 죽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거듭 백모 상을 당하였으니, 인가(人家)의 화액(禍厄)은 늘 있는 일이지만 어찌 이와 같이 참혹하단 말인가? 슬프고 애통하여 차라리 덜컥 죽어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네. 지난 갑오년(1894, 고종31)에 그대 4촌이 순절한 위대한 사적은 접때 그 쪽으로 갔다가 비로소 그 상세한 내용을 알았는데, 나의 고루함이 심함이 부끄러웠네. 지척의 이웃 고을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천하의 선비와 벗하여 위로 만고의 선을 논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 순절한 전말 및 동시에 화약고에서 분사(焚死)한 사람은 성은 김씨인데 이름은 무엇인가? 또 중군(中軍)의 성명을 상세히 기록하여 보내주기를 바라네. 이것은 어찌 비바람 속에 닭이 울고65) 큰 물결 속의 지주(砥柱)66)로 만세에 불후할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덕문(德門)의 행의(行義)는 실로 감탄하며 우러를 만하네. 그대 4촌은 이미 이와 같은 위대한 절의가 있고, 그대 형제는 또 효우의 행실로 사림에 자자하니, 고인이 이른바 "비록 깎아 내어 다하는 날에 있어도 양(陽)은 다 없어질 이치가 없다."라고 한 것67)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再去月。歷進仙庄。獲償宿願。實不淺淺。但廻程有礙。未免戛過。追切悵缺。伊後金水交遞。日色向寒。未審堂上愼節。有臻天和。金昆玉季。至誠至孝。安得無感應轉移之機也。常常顒祝。不任遠情。義林昔自那上還。遭家兒化逝。又未幾日。荐遇伯母喪事。人家禍厄。未或不有。而豈有若是之慘酷耶。悲霣痛怛。寧欲溘然而無知也。往在甲午。令從氏殉節偉蹟。向日那邊之行。始得其詳。可愧固陋之甚也。咫尺隣壤。猶尙如此。況敢望友天下之士。尙萬古之善乎。其殉節顚末。及同時焚死火藥庫者。姓金氏名云誰也。且中軍姓名。詳悉錄送爲望。此豈非風雨雞鳴。洪流砥柱。而爲萬世之不朽者乎。大抵德門行義。實可歎仰。從氏公。旣有若是之偉節。左右兄弟。又以孝友之行。藉藉士林。古人所謂雖在剝盡之日。而陽無可盡之理者。豈不信然耶。 박세현(朴世顯) 박기현(朴冀鉉, 1864~?)을 말한다. 자는 세현, 호는 강재(剛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가을이 겨울로 교체되어 원문의 '금수교체(金水交遞)'를 풀이한 말이다. 오행(五行)의 금(金)은 가을에 해당 되고 수(水)는 겨울에 해당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비바람……울고 《시경》〈정풍(鄭風) 풍우(風雨)〉에 "비바람 자욱한데, 닭소리 그치지 않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風雨如晦, 鷄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남녀 간의 풍속이 문란한 시로 보았으나 고주(古註)에 "풍우는 군자를 생각함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군자를 생각하여 그 법도를 바꾸지 않는다.[風雨, 思君子也. 亂世則思君子, 不改其度焉.]"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뜻을 취한 것이다. 지주(砥柱)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三門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黃河) 강줄기 안에 서 있었다. 《水經注 河水4》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그 형상으로 인해,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인용하는 말이다. 고인이……것《주역》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나오는 말인데, 변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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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일【창규】에게 답함 答文斗一【昌奎】 보내온 말이 끊임없이 이어져 편지에 가득한 하였는데 말과 의리가 모두 지극하였으니, 성대한 학업의 조예가 범상치 않음이 있을 뿐 아니라 분을 발하고 사려를 격동시켜 용감하게 곧장 나아가는 뜻이 말 밖에 은연중에 드러났는지라, 여러 차례 읽어봄에 감격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어찌 내 자신이 그렇게 한 것과 다르겠는가? 문목 한 통은 단지 어리석은 나의 견해에 의거하여 가부를 질정하니, 바라건대 회답하여 가르쳐 주시게. "삼년칭고(三年稱孤)……"라 한 것은 제가의 설이 같지 않으니, 혹 장사 뒤에는 효자라고 일컫는다고 하며, 혹 졸곡(卒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부제(祔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연제(練祭)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며, 혹 대상(大祥) 뒤에 일컫는 것이라 하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부제 뒤에 효자라 일컫는 것이 합당할 듯하니, 선유의 설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네. "친진(親盡)69)……"이라 한 것은 이미 친진하였다면 종자(宗子)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하니, 최장방(最長房)70)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 못하네. "질명(質明)……"이라 한 여기에서의 '질(質)'은 질정(質定)의 뜻이네. 무릇 동이 틀 무렵은 모든 사물의 형상을 질정할 수 있는 때이니, 마치 여러 신하가 조회할 때 색깔을 구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조정에 들어간다는 뜻과 같네. 이미 "날이 샐 무렵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한 밤중이 아님이 분명하네, 선유 또한 "5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읍(揖)은 붕우와 빈주가 서로 만났을 때의 의식이고 존자(尊者)에게는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마 또한 그러한 듯하네. 來喩娓娓盈幅。辭義俱到。不惟盛業造詣。有不草草。而所以發憤激慮勇往直前之意。隱然於言外。三復感仰。奚異在已也。問目一紙。只據愚見。以質可否。幸以回敎之也。三年稱孤云云。諸家之說不一。或云葬後稱孝。或云以卒哭後。或云以祔祭後。或云以練後。或云以祥後。然以愚見。則祔後稱孝。似爲得中。先儒說亦多如此。親盡云云。旣已親盡。則用宗子之名。不可不如用最長房之名。質明云云。質是質定之義。夫欲明未明。凡物形可質之時。如群臣之朝。別色始入之義。旣曰質明行祀。則非夜半明矣。先儒亦不曰五更行祭非禮也乎。揖是朋友賓主相接之儀。而於尊者無之云。恐亦然矣。 친진(親盡)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최장방(最長房) 4대 이내의 자손 중에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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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백에게 답함 答安慶伯 뜻밖에 심부름꾼이 와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더구나 어버이를 모시는 절도가 알맞고 넉넉한 줄 알았으니, 더욱 듣고 싶었던 마음에 부합하네. 의림(義林)은 명승지에서 여러 뛰어난 분들을 따라 열흘 동안 마음을 펼칠 수 있었으니, 박한 운명에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선장(先丈)께서 이미 돌아가시어 함께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네. 지금 면암(勉庵) 어른75)이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귀정(詠歸亭) 주인 안모(安某)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은 지 오래 되었네. 지금 세상에 이 같은 선인(善人)이 있는데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애통하고 한스럽네. 자제는 몇이며, 또 모두 혼사를 치렀으며, 또 모두 학문하여 족히 가업을 전술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생에게 추중 받은 것을 볼 수 있고, 나의 마음에 또한 위로되는 사사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네. 바라건대 경백은 이 뜻을 헤아려 더욱 힘쓰시게. 돌아오는 길에 작별할 때 애장(艾丈)76)이 경백이 오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책망하는 말을 하였고, 나를 위해 경백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네. 料外伻來。得奉惠書。感沃曷量。矧審侍節沖裕。尤副願聞。義從諸名勝於名勝之區。以得旬日之暢。誰知薄命有此好事耶。但恨先丈已故。不與之俱耳。今者勉庵丈謂余而言曰。詠歸亭主人安某不淑之報。聞之久矣。今世有如此善人。而未得其壽。誠可痛恨。子弟幾人。又皆成娶。又皆向學足述家業否。此可見見重於先生。而於鄙心。亦不自勝其慰感之私矣。幸慶伯諒此意而加勉焉。回路相別也。艾丈以慶伯不來。亦有致責之言。而爲我言於慶伯云云耳。 면암(勉菴) 어른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군과 싸우다가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애장(艾丈)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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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0 卷之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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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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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에게 화답하다 2수 和剛齋【二首】 뜨락 오동에 바람 일어 잎이 막 떨어지는데 風動庭梧葉落初꿈속 생각 뒤에 새 시가 날아와 떨어졌네 新詩颺墜夢思餘금석처럼 사귀는 정이 두터움을 알고 있으니 已知金石交情重깊은 산에 발걸음 드물어도 한스럽지 않다오 不恨雲山足跡疏인간 만사는 평소의 뜻과 어긋나는 법이니 萬事人間違素志평생토록 서책을 편안한 거처로 삼는다오 百年卷裏作安居푸른 솔과 초록 대가 나뉘어 자라는 곳 蒼松綠竹分棲地조용히 앉아 외로이 의지함은 일반이라네 淸坐孤依一樣如구산7)의 대의는 시종 한결같았으니 臼山大義一終初《춘추》에서 유래한 지 백대 지났네 來自麟經百世餘속임수가 지척에서 일어날 줄 어찌 생각했으랴 豈意謬誣生肘腋마침내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 의심하게 하였네8) 遂令觀聽轉疑疏천 사람의 거짓말이 사실이 되었으니 참으로 염려되고 千人成實誠爲慮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으니9) 누구와 거처할까 七聖皆迷孰與居그대의 정교하고 곡진한 시평에 힘입었으니 賴子詩評精且盡명공의 혜안은 세상에 짝할 이 없다네 明公隻眼世無如 風動庭梧葉落初, 新詩颺墜夢思餘.已知金石交情重, 不恨雲山足跡疏.萬事人間違素志, 百年卷裏作安居.蒼松綠竹分棲地, 淸坐孤依一樣如.臼山大義一終初, 來自《麟經》百世餘.豈意謬誣生肘腋? 遂令觀聽轉疑疏.千人成實誠爲慮, 七聖皆迷孰與居?賴子詩評精且盡, 明公隻眼世無如.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또 다른 호이다. 속임수가……하였네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사망할 때 일제 치하에서는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고 유지를 내렸는데, 문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은 이를 어기고 전우의 문집을 간행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택술은 동지 59명과 함께 오진영을 성토하였다. 일곱……잃었으니 일곱 성인은 황제(黃帝)ㆍ방명(方明)ㆍ창우(昌寓)ㆍ장약(張若)ㆍ습붕(謵朋)ㆍ곤혼(昆閽)ㆍ활계(滑稽)를 가리킨다. 황제가 대괴(大隗)를 구자산(具茨山)에 가서 보려고 방명(方明) 등 6인을 데리고 떠났는데, 양성(襄城) 들판에 이르러 방향을 몰라서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七聖皆迷]는 말에서 온 것이다. 《莊子 徐無鬼》 여기서는 전우(田愚)의 학문이 방향을 잃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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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재12)에 이르렀다가 오씨 여러 벗과 함께 읊다 到禮川齋 同吳氏諸友吟 우연이 명승지에 이르러 멋진 유람하니 偶到名區獲勝遊옛 벗들은 모두 다 백발이 되었구나 舊朋盡是雪莖頭푸른 오동에 바람 일어 책상에 서늘함 생기고 碧梧風動涼生榻높은 산에 구름 걷혀 누대에 푸른 빛 떨어지네 喬岳雲晴翠滴樓술 기울이니 그야말로 근심 씻기에 좋고 傾酒端宜憂慮滌시 지으니 광경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네 題詩不爲景光收서로 보며 이별 아쉬워 돌아갈 것을 잊었는데 相看惜別忘歸去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해가 지는구나 冉冉西天白日流젊어서 글로만 보다가 비로소 여기에서 노니는데 少爲看書始此遊지금까지 아직도 단두13)를 보지 못했다오 至今尙未見丹頭세상의 새로운 풍속에 이미 놀랐지만 已驚世上新風俗산중의 오래된 누각에는 아무 탈 없네 無恙山中舊閣樓사모는 머나먼 길을 달리지 못하고 四牡脩途靡騁走만우는 기울이진 형세를 회복하지 못하네14) 萬牛傾勢莫回收한가한 틈 내어 한 번 모임은 일이 아님이 없으니 偸閒一會無非事서로 이끌어 사류가 되는 것을 잊지 말게 不忘相將作士流 偶到名區獲勝遊, 舊朋盡是雪莖頭.碧梧風動涼生榻, 喬岳雲晴翠滴樓.傾酒端宜憂慮滌, 題詩不爲景光收.相看惜別忘歸去, 冉冉西天白日流.少爲看書始此遊, 至今尙未見丹頭.已驚世上新風俗, 無恙山中舊閣樓.四牡脩途靡騁走, 萬牛傾勢莫回收.偸閒一會無非事, 不忘相將作士流. 예천재(禮川齋) 전라북도 고부(古阜)의 예천(禮川)에 소재한 오씨(吳氏)의 묘재(墓齋)를 가리킨다. 《艮齋先生文集前編續 卷4 贈吳景現》 단두(丹頭) 도가(道家)에서 정련(精鍊)하여 완성한 단약(丹藥)을 가리킨다. 사모(四牡)는……못하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사모는 네 필의 수말이라는 뜻으로, 왕명을 받들어 사신 가는 것을 말한다. 《시경》 〈사모〉에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을 위로하여 "네 필의 말이 끊임없이 달려가니, 큰길이 구불구불하도다. 어찌 돌아가길 생각지 않으랴마는, 왕사를 견고히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내 마음 서글퍼하노라.[四牡騑騑, 周道倭遲. 豈不懷歸, 王事靡盬, 我心傷悲.]"라고 하였다. 만우(萬牛)는 일만 마리의 소처럼 힘이 엄청나게 센 것을 표현하는 말인데, 소식(蘇軾)의 시에 "만우가 땀을 흘리며 힘을 써도 끌어낼 수가 없다.[萬牛喘汗力莫牽.]"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9 咏怪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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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 惺齋記 심(心)은 본래 광명(光明)한 물이니, 어떤 미미함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어떤 그윽함도 비추지 않음이 없어 밝음은 일월과 나란하고 광채는 우주에 통한다. 다만 품부 받은 기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려지게 되면 혹 그 밝음을 훼손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마치 거울에 먼지가 끼면 아름답고 추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물이 흙탕물이 되면 작은 티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른바 광명보장(光明寶藏)173)이라는 것은 한 구역의 암흑 속174)이 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밝음을 회복하고 그 광채를 되돌리는 것은 그 방법을 장차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175) 상채(上蔡) 사 선생(謝先生)이 말하기를 "경은 성성(惺惺)하게 하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176) 이것은 만고 유가의 단전(單傳)177)과 요결(要訣)이다. 그러나 '성성' 두 글자는 갑자기 형성하기 어려운데, 급하게 하면 어지러워지고 느슨하게 하면 폐하게 되니, 반드시 과정과 절도를 두기를 마치 궁격(窮格)178)의 공부와 실천의 실상을 좌우에서 견지하고 안팎으로 서로 기른 뒤에야 조성할 수 있는 것과 같고, 하나의 '성성'자만 지켜서 명료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나의 벗 성재자(惺齋子)가 이것으로 정법안장(正法眼藏)179)으로 간주하여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 대개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고생스럽게 이미 시험하여 마음에 묵묵히 계합한 것이 있을 것인데, 모르겠으나 나의 이 말이 자신이 평소 경험한 것과 더불어 크게 어긋남이 있는 데는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글을 남겨두어 성성(惺惺)의 주해(註解)로 삼고 그렇지 않다면 육정(六丁)180)에게 맡겨 혹여 도를 어지럽히는 군더더기 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心是箇合下光明底物。無微不顯。無幽不燭。至於明並日月。而光徹宇宙。但爲氣禀所拘。物欲所蔽。則或不能無虧損其明。如鑑被塵垢而姸媸無分。水攬泥滓。而纖芥不露。所謂光明寶藏者。不過爲一區黑窣窣地耳。然則所以回其明而反其光者。其道將何以耶。程子曰。入道莫如敬。上蔡謝先生曰。敬是惺惺法。此是萬古斯門單傳要訣也。然惺惺二字。猝難湊泊。急之則錯。緩之則廢。必有課程節度。如窮格之功。踐履之實。左右夾持。內外交養。而後可以有造。非守一惺惺字而謂可以了了也。余友惺齋子。以此看作正法眼藏。孜孜用力。蓋已久矣。必有辛苦已試黙契於心者。則未知愚之此言。與自己平日經歷。不至有大悖否。然則留之爲惺惺之註解。不然。付之六丁。無容爲亂道贅言如何耶。 광명보장(光明寶藏) 광명은 불지혜(佛智惠)를 의미하고, 보장은 귀하게 간직된 보물이다. 이 말을 주자가 차용하여 "배우는 사람은 공부를 할 때 반드시 분발하여 마치 안타깝게 무슨 물건을 잃은 사람이 그것을 도로 찾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예컨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하나의 커다란 빛나는 보물[一大光明寶藏]을 다른 사람에게 도둑맞았다면 이 마음에 그냥 버려두고 말겠는가. 반드시 훔친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본성이란 뜻으로 쓰였다. 《朱子語類 卷121 訓門人7》 암흑 속 원문의 '흑솔솔지(黑窣窣地)'를 풀이한 말인데, 한밤중처럼 빛이 전혀 없어 새까만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주자가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 이 이치를 갖추어 태어나는 법이다. 단지 사람으로서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온통 암흑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人之生, 各具此理. 但是人不見此理, 這裏都黑窣窣地.]"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朱子語類 卷31 論語13 雍也篇2》 정자(程子)가……하였고 《근사록》 권4 〈존양(存養)〉에 나오는데, 정이(程頤)의 말이다. 상채(上蔡)……하였으니 《심경부주(心經附註)》 권1에 나온다. 상채 사 선생은 북송(北宋) 때의 학자 사양좌(謝良佐)를 말한다. 단전(單傳) 불교 선종(禪宗)의 교리 전수 방식으로, 문자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여 전수하는 것을 가리킨다.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한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정법안장(正法眼藏) 학문의 핵심이자 정수라는 의미이다. 원래 불가의 말로 석가가 깨달은 최고의 묘리를 가리킨다. 우주를 밝게 비추는 것을 안(眼), 모든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하며, 정법(正法)은 이 안과 장을 구비하는 것이다. 육정(六丁) 도교(道敎)에서 이른바 정묘(丁卯)·정사(丁巳)·정미(丁未)·정유(丁酉)·정해(丁亥)·정축(丁丑)의 여섯 정신(丁神)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본래 천제(天帝)의 부림을 받는 신들이다. 《後漢書 卷50 梁節王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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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은곡 처사 배공 유사장 隱谷處士裴公遺事狀 공의 휘는 상섭(相涉), 자는 군방(君邦), 호는 은곡(隱谷)이니, 배씨는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조에 휘 현경(玄慶)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서 벼슬은 태사(太師)이고 시호는 무열(武㤠)이다. 휘 운룡(雲龍)은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서 해동 군자(海東君子)로 일컬어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니, 자손들이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정지(廷芝)68)는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쳐서 물리쳤고, 탐라(耽羅)를 쳐서 평정했으며, 벼슬은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원우(院宇)69)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성경(成慶)은 벼슬이 통판(通判)인데,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모두 홍의적(紅衣賊)과 싸우다 목숨을 바쳤고, 휘 문우(文祐)는 벼슬이 흥위위(興威衛)이고 호는 회은(晦隱)인데, 고려말에 망복(罔僕)70)하였다. 휘 두유(斗有)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察訪)이고 호는 우재(寓齋)인데, 단종(端宗) 말에 능성(綾城)에 은둔하였으며,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휘 윤덕(允德)은 호가 빙연(冰淵)인데, 효행으로 천거되어 어필 서명(御筆書名)의 포상(褒賞)이 있었고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며, 휘 경생(慶生)은 진사(進士)로 호가 후송(後松)인데, 인조 갑자년(1624)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종영(宗泳), 증조의 휘는 득효(得孝), 조부의 휘는 이현(以絢)이고 부친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찬지(李贊之)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를 잘 갖추었고, 순조 경인년(1830) 윤4월 20일에 능주(綾州) 대곡리(大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얼굴빛이 좋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온량(溫良)하고 화락(和樂)하여 온화한 기운이 사람을 감화시켰다.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을 사랑하는 한 이웃 노인이 공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를 속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이웃 노인이 부끄러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지만 온화한 얼굴빛으로 봉양하는 것[色養]을 모두 지극히 하였고,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고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했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치재(致齊)71)하고 산재(散齊)72)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형제 3인 가운데 공이 둘째인데, 위로 공손하고 아래로 우애하여 화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년에 수동(壽洞)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두문불출하여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췄으며, 식구 수를 계산하여 밭을 경작하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한가한 날에는 시가를 읊고 서적을 스스로 즐겼다. 겸손하고 온화함으로 몸가짐을 하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친척을 구하여 도와주고 친구를 찾아가 안부 전하는 것을 제때에 빠뜨림이 없었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시문(時文)73)을 지어 벼슬을 구하려는 계획은 하지 않았다. 후생 가운데 초학자들을 보면 매번 묻기를 "《대학》은 읽었느냐? 이는 학문하는 전지(田地)이고 수신(修身)의 본령이니,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맹자》의 '잡으면 보존된다.74)'라는 일구(一句)는 성현(聖賢)이 열어 보인 긴요한 말이니, 세상에서 무슨 일이건 마음이 보존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평소에 무당을 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대하지 않았으며,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고 권귀(權貴)를 만나보지 않았으며, 함께 종유(從遊)한 자들은 모두 향리(鄕里)에 사는 약간의 가난한 벗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대학》 및 《논어》 몇 편 읽기를 마치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면전에서 경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 손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되는 도가 있으니 그 도를 잃으면 사람이 아니고, 선비에게는 선비답게 되는 업이 있으니 그 업을 잃으면 선비가 아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75)'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밥 한 끼를 먹는 사이에도 인(仁)을 떠나서는 안 된다.76)'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음에 잘 새겨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오려 할 때 갑자기 병에 걸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베개에 누웠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무술년(1898) 9월 13일이다. 장사를 지냈다가 한천면(寒泉面) 산음(山陰) 증봉(甑峯)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익충(文益忠)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2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경묵(慶黙)과 흥묵(興黙)이고, 딸은 문재황(文載璜)·정석규(鄭錫圭)·이계환(李桂煥)·이병채(李秉采)·임노성(林魯成)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동향(同鄕)에 있었기에 외람되이 알게 되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면서 마음을 터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그 용모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그 말은 자상한 것을 보았고, 남에게 이익을 주고 사물에 은택을 끼치는 뜻은 성대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천진한 성품에 맡겨 분수를 지켜 담박하게 영위(營爲)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義理)의 소재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탐하고 사모하며 욕심내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였다. 이해득실을 따질 때에 묵묵히 분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일의 실정에 익숙하고 세상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용(援用)하여 헤아려 의논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때와 어긋나 자신의 포부를 시험한 적이 없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종신토록 빛을 감추었으니, 공의 입장에서야 본래 유감이 없겠지만 식자(識者)의 한은 어떠하겠는가. 공의 손자 규덕(奎悳)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고금의 감회가 깊은 나머지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相涉。字君邦。號隱谷。裴氏以文讓公諱祇沱爲始祖。麗朝有諱玄慶。以開國元勳。官太師諡武㤠。諱雲龍聘上國。稱海東君子。封達城君。子孫仍貫焉。諱廷芝。擊却哈舟。討平耽羅。官戶部尙書密直副使。配食院宇。諱成慶官通判。與子光裕。並殉於紅衣賊。諱文祐官興威衛號晦隱。麗季罔僕。諱斗有文科察訪號寓濟。莊陵末。遯居綾城。諱尙絅文科定州牧使。燕山朝。觧印歸鄕。諱允德號冰淵。以孝薦剡。至有御筆書名之褒。除齋郞。諱慶生進士號後松。仁廟甲子擧義旅。於公爲八世祖也。高祖諱宗泳。曾祖諱得孝。祖諱以絢。考諱廷綵。妣完山李氏贊之女。閫範甚備。純廟庚寅閠四月二十日。生公于州之大谷里第。好容顔。美鬚髥。溫良愷悌。和氣薫人。自幼不好戱狎。有隣老愛之。有戱語。公曰。幼子常視無誑。豈長者而誑幼子乎。隣老慚之。家貧躬耕。色養備至。執喪哀毁。一遵禮制。遇忌日。致齊散齊以致如在之誠。兄弟三人。公居其中。上恭下友。未嘗失和。中年移寓壽洞。杜門斂迹。深自韜晦。計口而田。度身而蚕。暇日諷詠書籍以自娛。持身謙和。御家勤儉。親戚賙恤。知舊問訊。隨時無闕。敎子孫必以義方。不爲做時文干祿計。見後生初學。輒問讀大學否。此是爲學田地。修身本領。不可不讀也。又曰。孟子操則存一句。是聖賢開示切要之言。曾見世間甚事有心不存而可爲者乎。平居不用巫覡。不對博奕。不入店肆。不見要貴。所與遊從。皆鄕里多少寒友生也.一日未明而起。讀大學及論語數篇訖。招家人而面戒喩。又招孫兒軰曰。人有爲人之道。失其道則非人也。士有爲士之業。失其業則非士也。孔子曰。朝聞道夕死可矣。又曰。君子無終食之間違仁。此言爾其服膺爲平生家計也。日將明。忽遘疾。左右扶之。就枕而逝。時戊戌九月十三日也。葬而移窆于寒泉面山陰甑峯下艮坐原。配南平文氏益忠女。有婦德。二男五女。慶黙興黙。文載璜鄭錫圭李桂煥李秉釆林魯成。嗚呼。余在同鄕。猥荷辱知。源源相尋。開懷話心。積有年所。每見其容也溫溫。其言也諄諄。利人澤物之意藹然可掬。任眞守分。澹然若無所營爲。而至有義理所在。則耽慕嗜欲。如恐不及。利害得失之際。默然若無所分辨。而練熟事情。曉解世故。所以援引而擬議者。皆鑿鑿有據。入與時違。未有所試。而婆娑林下。潛光沒齒。在公固無憾焉。而識者之恨爲何如哉。奎悳公之抱孫也。持家狀。託以不朽之文。緬古感仐。不敢以非其人辭。 배정지(裵廷芝) 1259~1322. 본관은 대구(大邱),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1291년(충렬왕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다. 1318년(충숙왕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목사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원우(院宇) 고려 중기 이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등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殷)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치재(致齊) 산재에 이어 안에서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산재(散齊) 제사 며칠 전에 밖의 일에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잡으면 보존된다 마음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군자는……된다 《논어》 〈이인〉에 나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동중추 고공 유사장 同中樞高公遺事狀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시련(時連), 자는 학천(學天), 호는 침암(沈庵)으로 계통은 장택(長澤 장흥(長興))에서 나왔으니, 제봉(霽峯) 충렬공(忠烈公) 휘 경명(敬命)77)은 공의 8대조이다. 증조 휘 한대(漢大)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는데, 광주(光州)에서 남평(南平) 국사봉(國師峯) 아래 침동(沈洞)으로 우거(寓居)했고, 조부 휘 폭(曝)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정흔(廷欣)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지린(金之麟)의 딸이니, 순조 갑자년(1804) 4월 2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골격이 훌륭하고 신체는 매우 크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영리하여 범상(凡常)한 사람과 크게 달랐다. 6세에 입학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7, 8세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뛰며 울부짖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자, 본 자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하여 믿을 데가 없이78) 외롭고 쓸쓸하게 되자,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품팔이하면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무리 지어 땔나무하고 가축을 먹였는데, 장난치며 노는 것을 하지 않고 가요(歌謠)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비린내 나는 물건은 입에 넣지 않고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한겨울 심한 추위에 알몸과 맨발로 품팔이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겨 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 하나를 주었는데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님의 체백(體魄 시신(屍身))이 아직 천토(淺土 임시로 매장한 무덤)에 있는데, 제가 어찌 차마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하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자, 마을의 장로들이 모두 찬탄해 마지않고 서로 다투어 의연금을 내어 장례(葬禮)를 맡아서 해주었다. 제삿날이 돌아와 제사 지낼 집이 없자 제수(祭需)를 갖추어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밤새도록 울부짖고 곡하기를 한결같이 처음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처럼 하였고79), 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위해 보호하고 따라가서 밤을 꼬박 새웠다. 가정을 이루자 또 내규(內規)를 두었고, 힘써 부지런히 일하여 사력(事力 사세(事勢)와 물력(物力))이 조금 넉넉해졌다. 일찍이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하루도 봉양한 적이 없다가, 이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그런대로 의식을 댈 것이 있는데 봉양할 계책이 없으니, 이는 평생의 한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는 뒤늦게 봉양할 수 없고,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사 지낼 때 그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사판(祀板)을 추조(追造)하고 사당을 세워 봉안(奉安)하여, 초하루와 보름, 봄과 가을, 비 오고 이슬 내리며, 서리 내리고 눈 올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회갑 생일날이 돌아와 여러 자식이 헌수(獻壽)의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된다80)는 것은 옛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냐.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죽지 않고 오늘을 보니, 그 비통함이 어찌 다만 마땅히 배가 될 뿐이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만류하였다. 향리(鄕里)에서 그의 효에 감동하여 관사(官司)에 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실상 없는 이름으로 남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면, 이는 나의 불효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힘써 저지하였다. 항상 일찍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열고 서책을 쌓아 두었으며, 여러 자손을 가르칠 때에 과정(課程)의 법을 두었고, 안팎의 족척(族戚)은 화목으로 풍습을 이루었으며, 원근의 친구들은 신의(信義)로 행실이 드러났고, 우환으로 병든 친척은 구휼(救恤)하기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때와 절기, 춥고 더울 때 변함없이 안부를 물었고,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어 도와주었으며, 매장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관곽(棺槨)을 갖추어 부의(賻儀)를 보내주었다. 늘그막에 능주 서쪽 봉학동(鳳䳽洞)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사랑하여 한가롭게 지내면서 노년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임오년(1882) 4월 8일에 세상을 떠나 국사봉 좌측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동유(金裕女)의 따님이고 진사(進士) 김사직(金思直)의 손녀로 4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진(弼鎭)·국진(國鎭)·영진(永鎭)·봉진(鳳鎭)이고, 딸은 정신규(鄭信奎)·문원보(文元保)·조사민(趙士玟)·구모(具某)·이규헌(李圭憲)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제운(濟雲)과 홍우환(洪佑煥)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제방(濟邦)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제형(濟珩)과 제일(濟日)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제신(濟紳)은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훼치(毀齒)81)의 나이로 부모를 모두 잃어 외롭고 고달프며 어리고 약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정경(情景)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험난하고 질색(窒塞 막힘)한 곳에서 스스로 벗어나 능히 가계(家計)를 수립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계승했다. 이에 집안에는 자손의 번성함이 있었고 자신은 장수와 건강의 복을 누렸으며, 노인을 우대하는 은총과 영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높은 관직과 높은 품계로 마을을 빛냈으니, 그 심력(心力)의 규범(規範)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는 하늘이 효성스럽고 유순한 사람을 도왔고, 신이 화락한 군자를 위로해주었기에 만년(晩年)의 복록이 이처럼 흘러넘친 것이다. 증손 익주(翊柱)는 넷째 아들이 낳은 손자로 나와 종유(從遊)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공의 덕행을 후세에 영원히 전할 계획을 세웠다. 公姓高氏。諱時連。字學天。號沈庵。系出長澤。霽峯忠烈公諱敬命。其八世祖。曾祖諱漢大司僕寺正。自光州寓居南平國師峯下沈洞。祖諱曝贈左承旨。考諱廷欣贈戶曹參判。皆以公貴也。妣贈貞夫人光山金氏之麟女。以純祖甲子四月二十三日生。公骨骼埈茂。身體碩大。聰敏潁悟。大異凡常。六歲入學。文理日就。七八歲連遭內外艱。擗踊啼呼。幾絶復甦。見者莫不濳涕。靡怙靡恃煢煢孤孑。遂托身人家。賣傭資食。日與村兒樵牧爲群。而不作嬉戱之遊。不聽歌謠之聲。腥躁之物。不入於口。溫厚之衣。不着於身。隆冬盛寒。裸跣行傭。有人憐之。賜一綈袍。公泣曰。二親體魄。尙在淺土。吾何忍爲自身安便計乎。固辭不受。里中長老。皆嘖嘖歎賞。競相出義。以營其葬。遇忌諱之辰。無室屋可以行祭。具祭品。尊於墓前。終夜號哭。一如袒括。傍人多爲之護行以守其夜。及其有室。又有內規。辛勤拮据。事力稍饒。嘗謂諸子曰。吾早孤。未有一日之養。今賴先蔭。粗有衣食之資。而逮養無計。此是終天之恨也。又曰。已沒之親。不可追養。所可追者。惟祭盡其誠而已。遂追造祀板。立廟以安之朔望春秋。雨露霜雪。怵惕悽愴以盡如在之誠。遇回甲晬日。諸子欲設獻壽之宴。公曰。富倍悲痛。非古人之訓乎。余早孤不死。得見今日。其爲悲痛。豈但當倍而已乎。固止之。鄕里感其孝。將聞于官司。公曰。以無實之名。欺人欺君。是重吾不孝也。遂力沮之。常恨早孤失學。開塾儲書。敎諸子孫。克有課法。內外族戚。雍睦成風。遠近知舊。信義著行。憂患疾戚。周恤備至。時節寒暄。問訊不替。有不能婚娶者。輒具資粧以助之。有不能葬埋者。輒其棺槨而賻之。晩年卜築于綾西之鳳䳽洞。愛其山高谷邃。爲養閒終老計。以壽陞同中樞。壬午四月八日考終。葬國師峰左麓艮坐之原。齊慶州金氏東裕女。進士思直孫也。擧四男五女。男弼鎭國鎭永鎭鳳鎭。女鄭信奎文元保趙士玟具某李圭憲。孫男濟雲。女洪佑煥。長房出。濟邦二房出。濟珩濟日三房出。濟紳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毁齒之年。俱違怙恃。孤苦稚弱。情景難狀。而自拔於險難窒塞之中。能樹立家計。紹述世業。家有嗣續之蕃。身享壽康之福。優老恩榮。有隕自天。而嵬秩崇品。光輝閭里。其心力規範。非有以過人。何以致此。此所以天相孝順。神勞愷悌。而晩祿之津津有如是矣。曾孫翊柱四房孫也。從余遊有年。一日以其家狀過余。爲不朽計。 고경명(高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에서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저서로는 《제봉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부모를……없이 대본의 시(恃)와 호(怙)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믿는다는 뜻으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겠는가.〔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처음……하였고 대본에 '단괄(袒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단(袒)은 한쪽 어깨의 옷을 벗는 것이고, 괄(括)은 머리를 묶는 것이다. 이는 처음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하던 예법으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주인이 소렴을 마치고 한쪽 어깨의 옷을 벗고 머리를 묶는다.〔主人旣小斂, 袒括髮.〕"라고 하였다. 마땅히……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 사람은 생일에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되는데, 다시 어찌 차마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更安忍置酒張樂以爲樂? 若具慶者可矣.〕"라고 한 데서 나왔다. 훼치(毀齒) 젖니가 빠지는 7, 8세쯤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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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초은 손공 유사장 楚隱孫公遺事狀 공의 성은 손(孫), 휘는 승경(承憬),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으로, 계통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시조 휘 구례마(俱禮馬)82)는 바로 모량(牟梁) 육부(六部) 대인(大人) 가운데 한 명이다.83) 신라부터 고려까지 유명한 재상과 대신이 빛나게 서로 이어졌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계경(季敬)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의화(義和)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민(敏)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비장(比長)84)은 호가 입암(笠巖)이고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세기(世基)는 덕릉 참봉(德陵參奉)을 지냈고, 조부 휘 중로(重老)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부친 휘 홍적(弘績)85)은 호가 도봉(道峯)으로 한림(翰林)에 있다가 대교(待敎)로 벼슬이 올랐는데, 을사년(1545)에 안명세(安名世)86) 공과 사국(史局)에 있을 때, 시사(時事)를 직필(直筆)했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위원(渭原)으로 유배당하여 졸하였다.87) 그러나 선조(宣祖) 3년 경오년(1570)에 신원(伸冤)되고 복직되었으며, 부안 옹정원(甕井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모친 공인(恭人) 우주 황씨(紆州黃氏)는 진사 황언규(黃彦珪)의 따님으로, 곧고 조용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규문의 예의가 매우 잘 갖춰졌으니, 가정(嘉靖) 경자년(1540)에 부안 요촌(蓼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매하고, 재능과 국량, 뜻과 기개가 뛰어나고 출중하였다. 약관에 종숙 한계공(寒溪公)과 함께 일재(一齋)88)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을 때, 선생이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화(史禍) 뒤에 깊이 통한(痛恨)을 품어 모친을 모시고 초산(楚山) 동쪽에 은거하면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서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세로(世路)에 출신(出身)하여 나아가 벼슬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참봉(參奉)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년(1592)의 난에 적의 우두머리가 장차 전주(全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한계공 및 물재(勿齋) 안의(安義) 공과 함께 경기전(慶基殿)89)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이안(移安)하였는데, 조중봉(趙重峯)90)이 금산(錦山)에서 해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격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에 적의 세력이 다시 거세지자, 공이 한계공과 물재공에게 이르기를, "어진(御眞)의 봉안(奉安)을 내 장차 공들에게 맡길 것이니, 공들은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병 수천 인을 모아 행군하여 양성(陽城)에 이르러서 적을 맞아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다. 가동(家僮) 차곡석(車曲石)과 이악금(李惡金) 등이 공이 순절(殉節)한 것을 보고 모두 적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으니, 바로 9월 5일이었다. 묘소91)는 정읍 용호동(龍虎洞) 앞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있고 묘갈(墓碣)이 있다.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참봉 나응기(應箕)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익정(金益精)의 따님이니, 아들 한 명은 진종(振宗)이고, 딸은 오충갑(吳忠甲)과 김지영(金地英)에게 출가했다. 손진종의 5남은, 영엽(永燁)·통훈(通訓) 영욱(永煜)·영환(永煥)·영형(永炯)·영위(永煒)이다. 영엽의 1남 처유(處裕)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영욱의 2남은, 참의(參議) 세유(世裕)와 태유(泰裕)이며, 영환의 계자(系子)는 필유(必裕)이고, 영형의 2남은 필유와 후유(後裕)이며, 영위의 3남은 계유(繼裕)·성유(聖裕)·혜유(惠裕)이다. 4세손 봉문(鳳文), 5세손 연(縯), 6세손 경엽(景曄), 7세손 철우(哲宇)와 석량(鍚亮)은 모두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정려(旌閭)를 하사받았으니, 이는 공이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계책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공은 가학과 법불(法拂)92)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도덕과 연원이 있는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니, 평소에 영향받은 것이 있고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데에 방도가 있었다. 이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떠돌아다니는 상황에 있었지만 향상하는 일념(一念)은 단(丹)과 같이 환하였고, 자신이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으로 달려가는 데에 이르러서도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여93)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다만 후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아직도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그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8세손 종순(鍾純)이 흰 머리에 늙은 나이로 고생스럽게 멀리서 건너와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姓孫。諱承憬。字士悟。號楚隱。糸出密陽。姓祖諱俱禮。卽牟梁六部大人之一也。自羅至麗。名公鉅卿。煒燁相承。入我朝。有諱策牧使。是生諱季敬。隱德不仕。是生諱義和縣監。是生諱敏縣監。是生諱比長號笠巖。文科重試副提學。卽公之高祖也。曾祖諱世基德陵參奉。祖諱重老忠順衛。考諱弘績號道峯翰林陞待敎。乙巳與安公名世在史局。以眞書時事。見忤群壬。竄渭原卒。宣祖三年庚午。伸枉復職。享扶安甕井院。妣恭人紆州黃氏進士彦珪女。貞靜柔嘉。壺儀甚備。嘉靖庚子生公于扶安之蓼村。天稟甚高。才局志槩穎脫不群。弱冠與從叔寒溪公。受業于一齋李先生之門。先生以遠器期之。史禍後。深懷痛恨。奉母夫人。隱居楚山之東。漁樵耕稼以奉其旨。未嘗出身世路以有干進之心。宣祖朝。以參奉屢微。不就。壬辰之亂。聞賊酋將犯全州。與寒溪公及勿齋安公義奉肇慶廟御眞。移安于井邑內藏山龍窟庵。聞趙重峯錦山被害。不勝憤激。丁酉賊勢更熾。公謂寒溪勿齋曰。御眞奉安。吾將委之於公。公其勉之。募義旅數千人。行至陽城。遇賊力戰。不屈而死。家僮車曲石李惡金等。見公殉節。皆赴賊而死。卽九月五日也。衣屨之藏。在井邑龍虎洞前麓巽坐原。有碣配羅州羅氏參奉應箕女。系配光山金氏益精女。一男振宗。女適吳忠甲金地英。振宗五男。永燁永煜通訓。永煥永炯永煒。永燁一男。處裕武科宣傳官。永煜二男。世裕參議。泰裕。永煥系子必裕。永炯二男。必裕後裕。永煒三男。繼裕聖裕惠裕。四世孫鳳文。五世孫縯。六世孫景曄。七世孫哲宇鍚亮。命以孝行聞。旋閭。此非公之貽謨攸及耶。公生於詩禮法拂之家。遊於道德淵源之門。擩染有素。充養有方。是以雖在顚沛流離之地。而向上一念。炳然如舟。至於身赴湯火。會魚取熊。使百世綱常。不墜於地。曷不偉哉。但雲仍零替。尙未蒙褒贈之典。其爲識者之恨何如哉。八世孫鍾純。白首頹齡。艱關遠涉。托以不朽之文。辭不獲已。謹據家狀。爲之修潤焉。 구례마(俱禮馬) 신라 시대에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을 말한다. 대본에는 구례(俱禮)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시조……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사로국(斯盧國)에는 원래 6촌이 있었는데, 그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인 구례마가 처음에 이산(伊山)에 하강하여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부안 출신이다. 1469년(예종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世祖實錄)》 및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1485년(성종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손홍적(孫弘績) 1510~1549. 자는 언선(彦善), 부안 출신이다. 1540년(중종3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승정원 주서 등을 지냈다. 안명세(安名世) 1518~154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을사년(1545)에……졸하였다 1548년(명종3)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 등의 무고에 의하여 안명세사초사건(安名世史草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안명세는 1545년(인종1)에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1548년(명종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명종실록(明宗實錄)》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기전(慶基殿) 대본에는 '肇慶廟'로 되어 있는데, 태조의 어진은 경기전에 있었으므로 바로 잡아 번역하였다.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이고 중봉은 그의 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묘소 대본의 '衣履之藏'은 시신을 거두지 못했을 때, 초혼장(招魂葬)을 하고 의복 등의 유품으로 장례을 치르는 것으로, 유골은 없다는 뜻이다. 법불(法拂) '법가불사(法家拂士)'의 줄임말로,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말이 나온다. 물고기를……취하여 초은 손공이 정유재란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했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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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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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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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효자 최공 정려기 孝子崔公旌閭記 효자 최공(崔公)의 휘는 시달(時達), 자는 경숙(敬淑), 호는 모와(慕窩), 본관은 해주(海州), 문헌공(文憲公) 휘 충(沖)의 후손이고, 학생 휘 득준(得俊)의 아들이다. 모친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니, 순조 병자년(1816) 9월 14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성정과 기질이 온량(溫良)하였다. 이를 갈 나이의 어릴 때부터 받들어 순종하고 응대하여 한 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와 드렸고,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여 지물(志物)181)이 갖추어 지극하였다. 병을 시중들 때는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아 차도를 점검하였고,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이 너무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3년 동안 여묘 살이 하며 조석으로 절하며 곡하여 묘소 앞의 무릎이 닿는 곳에 풀이 시들었다. 전후의 부모상에 모두 이와 같이 하였으니, 향리에서 찬탄하며 한결같은 말로 칭찬하였다.기묘년(1879, 고종16) 9월 18일에 돌아가셨고, 그 뒤 기축년(1889)에 유림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수령의 보고가 이어져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명하여 정미년(1907)에 정려각이 비로소 이루어졌다.오호라! 사람의 떳떳한 본성은 하늘이 다하도록 실추됨이 없어 양지(良知)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니, 경금(褧錦)의 문장182)과 고학(皐鶴)의 들림183)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정려각을 지나는 자는 마땅히 공경할 줄 알아 사모하는 마음 일으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孝子崔公。諱時達。字敬淑。號慕窩。本海州人。文憲公諱沖後。學生諱得俊子也。妣宜寧南氏。以純祖丙子九月十四日生公。天姿穎悟。性氣溫良。自在髫齡。承順唯諾。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袖而供之。朝耕夜讀。志物備至。其侍疾也。嘗糞甛苦。以試差劇。執喪。哀戚過甚。幾於傷生。廬墓三年。朝夕拜哭。墓前當滕。草爲之枯。前後喪皆如之。鄕里嘖嘖。一辭稱賞。己卯九月十八日卒。後己丑。儒論齊發。剡報相續。贈童蒙敎官。命旌閭。丁未棹楔始成。嗚乎。人之秉彝。極天網墜。有其良知。好是懿德。褧錦之章。皐鶴之聞。其不以是耶。過此閭者。宜無不知欽而興慕也。 지물(志物) 지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경금(褧錦)의 문장 비단옷의 문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홑옷 안에 은은하게 감추는 것을 말하는데, 군자의 도리가 날로 은은하게 빛남을 비유한다. 《중용》에서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쳐 입는다'고 하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한 것이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中庸章句 第33章》 고학(皐鶴)의 들림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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