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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장【인동】에게 답함 答朴善長【仁東】 그대 조부의 상기(祥期)가 갑자기 이미 지난달에 지났던가? 나는 웅크리고 막혀 있어 정신이 혼미하여 전혀 기억하지 못하여, 결국 달려가 위로하는 의식도 빠뜨렸으니, 이것이 어찌 서로 두터이 지내던 사이의 정의이겠는가? 매우 부끄럽고 부끄럽네. 모르겠으나 춘부장의 기력은 상을 당한 슬픔 속에 손상됨은 없으신가? 그리운 마음 감당할 수 없네. 그대는 《서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고, 즉이재(則以齋)121)에서 종유하고 있어, 이른바 방도가 있고 일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니, 어찌 매우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고인이 말하기를 "우물을 아홉 길을 팠더라도 샘물에 미치지 못하면 오히려 우물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122) 선장(善長)은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힘써 우물을 판 날이 아님이 없었네. 만약 원천이 솟아나는데 미치지 못하고서 퍼먹는 것을 남이 사용하도록 맡겨둔다면 전날의 공이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물을 판 것이 아홉 길이라면 원천이 솟아나는 것은 또한 한 길이나 반 길에 불과하여 반드시 장차 원천이 솟아나는 것을 볼 것이니, 힘쓰고 힘쓰시게. 목마를 때 임하여 우물을 파려고 하지 말고, 또 남의 문을 두드려 구하려 하지 말게. 尊王庭祥期。遽已經過於去月中耶。跧滯昏妄。都不記得。竟闕趨慰之儀。此豈相厚之誼耶。愧愧負負。未審春府氣力慨廓之中。不有損節。馳溯不任。盛課在書經云。而遊從於則以齋。所謂有方有業者此也。曷不慰慰。古人有言曰。掘井九仞而不及泉。猶爲棄井。善長自童丱以後。孜孜矻矻。無非所以掘井之日也。若不得源泉湧出。酌之挹之。任人所用則前日之功。豈不可惜。然所掘者九仞。則源泉之出。亦不過一仞半仞。而必將見之矣。勉之勉之。勿爲臨渴而掘之。又勿爲叩人之門而求之也。 즉이재(則以齋) 박인진(朴麟鎭, 1846~1895)이 강학하던 재사이다. 박인진의 자는 학중(學仲), 호는 우인당(愚忍堂),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저서로는 《우인당유고》가 있다. 고인이……하였으니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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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칙【성휴】에게 답함 答文元則【性休】 전번에 믿을 확실한 인편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상황이 너무나 촉박하여 새해 문안 인사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뒤미쳐 생각하니 잊히지 않은 채 아쉽기만 하였습니다. 뜻밖에 보내신 서찰을 받을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노형(老兄)의 마음은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정도 이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하여 경서를 익히는 일상과 지내는 안부가 더욱 편안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궁금하고 그립던 마음에 부합하였습니다. 치관(緇冠) 1건(件)을 이미 선물로 보내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만들어 양식이나 생김새가 매우 치밀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보내신 편지에 이르기를, "머리에 얹고 거울을 비춰보니 완연히 학문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고(上古) 시대에 삿갓이 없고 이 같은 치관만 있을 때는 치관을 쓴 사람들이 모두 학문을 하는 사람이었겠습니까. 껄껄 웃을 일입니다.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학문을 익힌다."라는 말씀 역시 좋았습니다.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면 감히 입지를 않고 선왕의 법행(法行)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114)라는 것은 평생에 걸쳐 몸에 지니면서 잠시라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형께서 관(冠) 하나를 보고 감복하여 미루어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의(義)에 밝은 군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向也見有的便。而倥偬太劇。未修新歲之問。追念耿缺。謂外得承辱訊。其與人不較之意。非夷所思感感。因審經體震艮增康。允符懸仰。緇冠一件。雖已呈似。而忽卒裁作。制度體格。不甚詳緻。不安不安。來喩云。加頭照鏡。宛是學問人樣子。然則上古無笠子。只有此冠時。人人皆是學問者耶。奉呵奉呵。冠其冠。學其學。此語亦好非先王之法服。不敢服。非先王之法行。不敢行。此是終身佩服。不容頃刻放捨者也。老兄見一冠。而感誠推諭。至於如此。可見君子之喩於義也。甚盛甚盛。 선왕(先王)의 ……않는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나오는 말이다. 다만 '비선왕지법행(非先王之法行)'이 《효경》에는 '비선왕지덕행(非先王之德行)'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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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여【병헌】에게 답함 答趙平汝【秉憲】 서한을 받고 기억이 아득하여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연월이 적힌 행을 읽고 평여(平汝) 두 자를 보고서야 나도 모르게 병든 눈이 갑자기 떠졌습니다. 아, 평여(平汝)이십니까. 젊은 나이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에 시문(詩文)과 술로 얼마나 가까이 어울렸건만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고 지낸 것이 몇 년이었습니까.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되어서야 비로소 서한 한 장을 볼 수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취정(翠亭)에서 학문을 닦고 송사(松寺)에서 잔치를 벌이던 것이 옛날 언제였습니까. 백현(柏峴)과 호산(虎山)에서 함께 하던 노성한 유덕자들은 모두 이미 아득한 옛날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벗들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온갖 고난과 세상의 두려움이 또 뒤따라 사람을 어지럽혀 생각할 때마다 마치 선천(先天)의 뜬구름같이 아득하여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따금 남쪽을 바라보면 그저 멍하니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서한을 통해 형께서는 여전히 부모님을 모시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커다란 복입니다. 다만 그사이 공부는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살아온 과정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형을 향해 치닫는 그리움이 끊이지 않아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아우의 처지는 서로 만났던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와 판이(判異)합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떠돌아다니며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만년에 이르러서도 남은 재앙이 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렇게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참혹한 상황을 만나니 차라리 잠들어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탄식만 간절할 뿐입니다. 得書茫然。不知爲誰。讀到年月。行見平汝二字。不覺病眼忽醒。嗚呼。乃平汝耶。少年盛時。文酒遊從。何等密勿。而江湖相忘爲幾年耶。至於老白首。而乃始得見其一紙心劃。一悲一喜。不知所以措辭也。豈惟是也。翠亭絃誦。松寺樽俎。昔何時矣。柏峴虎山諸芒長德。皆已千古。而其餘知舊。亦皆落落。都不知存沒與否。風霜世㥘。又從而撓攘。每念之。如先天浮雲。冥漠不可爲象也。有時南望。只有曠然發唏。因審兄尙在侍省之下。洪福拱福。但未知其間盛課造諸何如。調度經過何如。馳溯懸懸。不在遠情。弟狀與少壯相見時。辦若二人。風樹孤露。流離貪病。至於晩暮。餘殃未盡。又遭此窮獨之悿。只切尙寐之歎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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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상봉】에게 답함 答金聖彦【相奉】 고질병으로 폐인이 되어 이웃 마을의 친구도 만날 수 없는데, 오직 어진 그대가 나를 버리지 않고, 시절마다 안부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주시니, 지극한 마음에 매우 감사하나 우러러 인사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귀댁의 아들 형제가 영광스럽게 찾아줬는데 그대의 편지를 전해줘서 더욱더 감사했습니다. 편지를 받고서, 일상생활에 연이어 잘 계시고, 둘째 아들의 길례(吉禮)가 잘 행해졌음을 알았습니다. 집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화락한 군자를 천지신명이 돕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러러 부러워하는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저는 항상 질병이 오래 계속되어 날마다 숨이 끊어질 듯하나, 형편이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친한 벗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외로움은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번 그대의 거처를 찾아가 마주보고 울적한 감회를 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마음을 따르지 못해서 아직 실행하지 못했는데, 병마【二竪子】115)가 끝내 관용을 베풀어줄지 모르겠습니다. 貞疾自廢。隣里知舊。猶不可得以見之。惟賢爲之不棄時節存訊。種種不置。感感至意。不知所以仰謝令郞兄弟賁然入門。袖致華函。尤極感感。因審體度連膺休謐。二郞吉禮利行。人家所望。此外何有。愷弟神相。固應如此。爲之艶仰不已。義林一病支離。日就奄奄。勢也何爲。朋知零散。踽凉難狀。而尋常一念。切欲一就仙庄。對敍積鬱之懷。而脚不從心。因仍未就。未知二竪子終有以寬恕否也。 병마【二竪子】 《春秋左傳》 成公 10년 조에, 진(晉)나라 경공(景公)의 꿈에 질병이 두 명의 어린 아이로 변해 고황(膏肓)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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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일전에 자인(子仁)과 여러 사람들이 우봉(牛峯)에서 와서 그대가 근래 자춘(子春)의 낙상(落傷)하는 우환32)을 겪었다는데 과연 그러한지요? 놀랍고 큰 걱정이 됩니다. 듣자하니 간행하는 사업은 끝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후를 도모하는 약속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아직 한 집안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천하와 국가의 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옛날부터 지사(志士)들이 뜻을 품고 커다란 탄식을 하였던 부분입니다. 다만 저의 분수 상으로 자신에게 말미암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일단의 일이 있습니다. 힘쓸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자신의 한 마음이 만약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말미암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따르지 않는 것은 나의 성의(誠意)에 따른 감동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옛 사람이 감히 다른 이에게 허물을 탓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바라건대 나의 벗께서는 우선 이 일을 제쳐 두고, 앞으로 예전에 배운 학업에 대해 날마다 과정을 세워 힘쓰십시오. 의림(義林)은 날마다 쓸데없이 분주하게 지내고 있어서 조금의 겨를도 없습니다. 다만 밤중에 촛불 아래에서 이처럼 적은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어찌 충분히 보충하겠습니까? 가련하고 또 가소롭습니다. 경립(景立)은 시간을 잘 도모하여 이 사람과 같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日昨子仁諸人。自牛峯來。爲傳左右近有子春下堂之憂。果爾否。驚慮爲多。聞刊事且未免終見緯繣。未知有後圖之期耶。此是何等好事。而尙未能見行於一門之內。況於天下國家之事乎。此自古志士所以齎志浩歎處也。但於吾分上。有由已而不由人一段事。所可勉者。只此而已自家一箇心。若不由自家。則何望其他人由自家意乎。又安知人不見從者。非我誠意之感。有未至乎。此古人所以不敢尤人者。願吾友姑爲倚閣此事。將來舊業。逐日作課程也。義林日日紛冗。無些少暇隙。只於夜中燭下。看得些少文字。此何足有補。可憐又可笑。願景立及時圖之。勿有後悔如此漢也。 자춘(子春)의 낙상(落傷)하는 우환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나오는 말로,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이 "당(堂)을 내려가다가 발을 다쳤다.【下堂而傷其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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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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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김채상(金彩相)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종교/풍속-관혼상제-혼서 崇禎後丁卯四月十三日 金彩相 崔生員宅 崇禎後丁卯四月十三日 1867 金彩相 崔生員宅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7년(고종 4) 4월 13일에 부안에 사는 김채상이 최생원댁에 보낸 혼서. 1867년(고종 4) 4월 13일에 부안(扶安)에 사는 김채상(金彩相)이 최생원댁(崔生員宅)에 보낸 혼서(婚書)이다. 김채상은 자신의 둘째 손자 낙항(洛恒)의 신부 집에 이 문기를 예단과 함께 보냈다. 김채상은 손자 김낙항의 혼사를 치루기 위해 이 문기를 작성하여 신부 집에 보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상대방은 부령김씨 즉 부안김씨와 함께 부안의 유력 씨족의 하나인 전주최씨(全州崔氏)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씨족은 산송(山訟)으로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지만,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 혼인을 맺었던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崇禎後丁卯四月十三日'으로만 되어 있으나, 다행하게도 김채상이 도광(道光) 26년, 즉 1846년(헌종 12)에 논을 매입하면서 작성한 명문(明文)이 전하고 있어서(1846년 김채상(金彩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이를 토대로 위 정묘년을 1867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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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곡 선생113)【운】의 시에 뒤미처 화운하다 追和成大谷先生【運】詩 구절산 서쪽에 지은 한 초당엔 (九節山西一草堂)새로 돋은 죽순과 어린 버들 모두 줄을 이루었네 (新篁稚柳摠成行)천년의 수석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고 (千年水石襟期穩)만권의 시서를 읽으니 사업이 바쁘네 (萬卷詩書事業忙)객이 온 작은 길엔 푸른 이끼 미끄럽고 (客來小徑蒼苔滑)새가 내려앉은 깊은 정원엔 해가 길기만 하네 (鳥下深園白日長)「자지가」114) 그치자 자지 캐는 사람이 없으니 (紫芝歌罷無人釆)춘심을 머금은 채 다만 절로 향기롭네 (涵蓄春心只自香) 九節山西一草堂。新篁稚柳摠成行。千年水石襟期穩。萬卷詩書事業忙。客來小徑蒼苔滑。鳥下深園白日長。紫芝歌罷無人釆。涵蓄春心只自香。 성대곡 선생(成大谷先生) 성운(成運, 1497~1579)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이다. 중종(中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지만,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겼다. 자지가(紫芝歌) 진(秦)나라 말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은거했던 네 사람의 은자, 즉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가 한 고조(漢高祖)의 초빙을 거절하고 자지(紫芝)를 캐 먹으면서 부르던 노래이다.『史記 留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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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은【재훈】의 시에 화운하다 歩和鄭臺隱【在勳】韻 누대가 천태산 한 줄기의 동쪽에 있으니 (臺在天台一脈東)선생은 일찍 속세를 버리고 산수와 벗하였네 (先生早謝拾靑紅)베갯머리에 흐르는 물은 졸졸졸 옥 소리 울리고 (枕邊流水淙淙玉)헌 아래 뭇 산들은 볼록볼록 줄지어 솟았네 (軒下群巒立立童)솔개 날고 물고기 뜀166)은 모두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고 (魚躍鳶飛皆活面)용이 잠기고 자벌레 웅크림167)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네 (龍潛蠖屈爲存躬)만년에 서로 따를 것 계속 계획하였으니 (晚年從逐源源計)내가 이곳에 살아서가 아니라 이 옹이 살고 있기 때문이네 (非我卜居卜此翁) 臺在天台一脈東。先生早謝拾青紅。枕邊流水淙淙玉。軒下群巒立立童。魚躍鳶飛皆活面。龍潛蠖屈爲存躬。晚年從逐源源計。非我卜居卜此翁。 솔개……뜀 연비어약(鳶飛魚躍)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어 이치가 환히 드러남을 형용한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솔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다. 용이……웅크림 『주역』「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웅크리는 것은 장차 펴기를 구해서요, 용과 뱀이 숨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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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어른을 뵙고 작별할 때 지어 올리다 2수 拜悅齋丈, 臨別有呈【二首】 가을 내내 뵙지 못하다가 문에 이르렀는데 不見三秋始造門병이 난 동인을 걱정할 줄 어찌 알았으랴 美疴豈料慮同人담론은 절로 은하수를 걸어 놓은 듯하고 談論自若懸河漢필치는 오히려 귀신의 경지에 들 수 있네 筆翰猶能入鬼神말년에 한 해 저무는 것을 한탄하지 말게 休歎桑楡云歲暮응당 약물에 참된 처방 얻을 줄 알겠네 應知藥餌得方眞하늘 재앙의 회복이 더딘 게 한스러우니 天瘥定恨遲平復작별할 때 막막하여 눈물이 수건 적시네 臨別茫然淚滿巾들어가 돌아갈 곳도 나갈 문도 없으니 入無歸處出無門천지를 방황하는 우리 백성들 가련하네 天地彷徨哀我人말이 금화235)에 미쳐도 끝내 대책이 없고 語到金華終沒策꿈속에 봄물을 찾으니 문득 혼미해지네 夢尋桃水却迷神깊은 근심은 부질없이 마음의 병이 되지만 深憂徒爾爲心病통분함이 성품의 참됨 드러냄과 무슨 상관이랴 痛憤何妨發性眞천지간에 스스로 만족해 부끄러움 없으리니 俯仰自多無愧怍분명하게 머리 위에 유건을 쓰고 있네 分明頭上戴儒巾 不見三秋始造門, 美疴豈料慮同人?談論自若懸河漢, 筆翰猶能入鬼神.休歎桑楡云歲暮, 應知藥餌得方眞.天瘥定恨遲平復, 臨別茫然淚滿巾.入無歸處出無門, 天地彷徨哀我人.語到金華終沒策, 夢尋桃水却迷神.深憂徒爾爲心病, 痛憤何妨發性眞?俯仰自多無愧怍, 分明頭上戴儒巾. 금화(金華) 신선의 석실(石室)이 있다는 금화산(金華山)을 말한다. 황초평(黃初平)이 15세에 양을 치다가 신선술을 닦으러 도사(道士)를 따라 금화산 석실(石室) 속에서 수도하였는데, 40년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황초평이 형과 함께 그곳에 가서 백석(白石)을 향해 "양들아, 일어나라!"라고 소리치니, 그 돌들이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는 질석(叱石)의 전설이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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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묘소를 참배하며 拜先師墓 의지할 데 없어 깊어진 슬픔313) 금할 수 없어 痛深安放未能禁바로 무덤으로 달려가니 눈물 절로 흐르네 却走玄阡淚自滔십삼 년이 지나고 나니 시든 풀도 우거졌고 歲閱十三衰草宿천백의 많은 제자 중 몇 명이나 찾았을까 弟多千百幾人尋어찌 오직 서원 세운 것만 공업을 삼으랴 豈惟建院爲功業무엇보다 진심314) 다해 모함을 밝혀야 하리 最可明誣盡膂心아스라한 구천에서 다시 일으키기 어려우니 漠漠九原難復作산 가득한 근심스런빛이 저녁 구름에 잠겼네 彌山愁色暮雲沈 痛深安放未能禁, 却走玄阡淚自滔.歲閱十三衰草宿, 弟多千百幾人尋?豈惟建院爲功業? 最可明誣盡膂心.漠漠九原難復作, 彌山愁色暮雲沈. 의지할……깊어짐 스승이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이 없어진 데 따른 아픔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진심 원문의 '여심(膂心)'은 가슴과 등뼈라는 뜻으로, 임금의 곁에서 보필하는 중신(重臣) 또는 진심어린 마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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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제생들에게 주다 제생은 낙춘ㆍ재용ㆍ동선이다. 贈書社諸生【洛春、載鏞、東宣】 현명하고 용기있고 순진한 제자들 一明一勇一淳眞모두 단정하고 온화하며 옥과 같은 모습이네 俱是端溫玉立身긴긴밤 글 읽는 이 누가 그대들과 같겠는가 永夜讀書誰若子젊어서 학문에 뜻을 둔 이 이제 다신 없으리 少年志學更無人태평시대는 정녕 말이 서책에 드리워져 있으니 開平定在言垂簡세상에 상심하여 눈물로 수건 적실 필요없네 傷世不須淚滿巾세 명의 수재376)가 함께 유익한 세 벗377)이 되리니 三秀同成三益友많이 듣고 절차탁마378)하면 가난하지 않으리라 多聞麗澤不爲貧 一明一勇一淳眞, 俱是端溫玉立身.永夜讀書誰若子? 少年志學更無人.開平定在言垂簡, 傷世不須淚滿巾.三秀同成三益友, 多聞麗澤不爲貧. 세 명의 수재(秀才) 원문의 '三秀'는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는 것으로 영지(靈芝)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낙춘(洛春)ㆍ재용(載鏞)ㆍ동선(東宣)을 가리킨다.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캐 먹고 살았다는 영지초(靈芝草)의 별칭이다. 1년에 세 번 꽃이 핀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유익한 세 벗 세 가지의 유익한 벗을 말한다.《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 셋이 있으니 정직한 벗, 신실한 벗, 식견이 많은 벗이다."라고 하였다. 절차탁마(切磋琢磨) 붕우가 서로 절차탁마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의 "두 개의 못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 태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서 붕우와 함께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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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가을 남종재에서 돌아오다 早秋 歸自南宗齋 남쪽 와서 오래 여행할 줄은 생각 못했는데 不想南來久旅遊하늘 가에 대화(大火)가 서쪽으로 흐르는 때46)라 時當天畔火西流이옹의 옛 학문은 귀양의 집에서 익혔고 頣翁舊學龜陽宅방장의 신선 인연은 해상의 섬에서 맺었지47) 方丈仙緣海上州멋진 유람에 세속의 더러움 잊을 수 있지만 勝觀縱宜忘俗累부질없이 보내 세월만 허비함이 되려 부끄럽네 浪過還愧費春秋누구인가 좋은 일로 이 모임 이끌어 誰歟好事將此會또한 산중에 옛 자취 남긴 이는 也作山中故蹟留 不想南來久旅遊, 時當天畔火西流.頣翁舊學龜陽宅, 方丈仙緣海上州.勝觀縱宜忘俗累, 浪過還愧費春秋.誰歟好事將此會? 也作山中故蹟留. 대화(大火)가……때 7월을 말한다. 대화는 이십팔수 가운데 하나인 심수(心宿)의 별칭이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7월에 대화가 서쪽으로 내려가거든, 9월에 옷을 만들어 주느니라.[七月流火, 九月授衣.]"라고 하였다. 이옹(頣翁)의……맺었지 이옹은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을 말하고, 구양(龜陽)은 황윤석이 거처하던 집이자, 황서구(黃瑞九)가 그의 선조인 황윤석과 황전(黃㙻)의 문집을 편찬한 곳이다. 황윤석의 8대조 만은(晩隱) 황전(黃㙻)이 선포(仙浦)의 구양에 은거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後滄集 卷12 晩隱遺稿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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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에게 보여 주다 示子貞 인생은 늘그막에 가장 부지하기 어려운데 人生晩節最難持더구나 인륜이 부모 스승과 관계됨에랴 況復彝倫係父師백세의 옳고 그름은 일월처럼 분명하나 百世是非明日月한때의 은혜 원망은 털끝만큼 자잘하네 一時恩怨細毫絲긴 행랑의 기둥 다시 세어도 끝내 잘못되었고188) 長廊再數終歸失계자처럼 세 번 생각하면 다시 의혹 일으키네189) 季子三思更起疑그대의 바르고 곧아 길한 복을 축하하노니 奉祝君身貞吉福옛것을 먹을 수 없다면 다시 어디로 갈까 不能食舊更何之 人生晩節最難持, 況復彝倫係父師?百世是非明日月, 一時恩怨細毫絲.長廊再數終歸失, 季子三思更起疑.奉祝君身貞吉福, 不能食舊更何之? 긴……잘못되었고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을 다시 공연히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장안(長安)의 창고 안에 한가로이 앉아서 긴 행랑의 기둥[長廊柱]을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 그 숫자를 세어 보고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세어 보니 숫자가 맞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서 일일이 소리 내어 세어 보게 한 결과, 처음에 마음속으로 세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存養)〉에 나온다. 계자(季子)처럼……일으키네 어떤 일이든 지나치게 생각하면 도리어 미혹된다는 말이다. 노(魯)나라 대부 계문자(季文子)가 세 번이나 생각한 뒤에야 실행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서는 "두 번만 생각하면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이(程頤)는 두 번 생각하는 것은 신중히 살피는 것이지만, 세 번 생각하면 사사로운 생각이 일어나서 도리어 현혹된다고 풀이하였다. 《論語集註 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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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윤형 도병 에게 드리다 呈潁下尹兄【道炳】 모양246)의 영하옹은 얻기 어려우니 難得牟陽潁下翁느긋한 심사는 옛 사람의 기풍이네 休休心事古人風행실은 마을에 높아 모범이 되었고 行高州里爲模範학문은 가정에서 익혀 야궁 이었네247) 學襲家庭繼冶弓서하에 이치 어긋나248) 변수로 돌아갔으나 理逆西河歸變數수성이 남극에 밝아 어진 몸에 보답했네 壽明南極報仁躬처음 만난 날에 속마음을 모두 토로하다 吐傾方寸初逢日창 앞에 저녁노을이 붉어진 줄도 몰랐네 不覺牕前夕照紅 難得牟陽潁下翁, 休休心事古人風.行高州里爲模範, 學襲家庭繼冶弓.理逆西河歸變數, 壽明南極報仁躬.吐傾方寸初逢日, 不覺牕前夕照紅. 모양(牟陽) 전라남도 함평군의 옛 이름이다. 야궁(冶弓) 이었네 자식이 훌륭한 부친의 가업을 잘 이었다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하였다. 서하(西河)에……어긋나 자식을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하'는 공자의 제자 자하가 제자를 가르쳤던 곳인데, 《사기(史記)》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죽자 통곡하다가 눈이 멀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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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신해년 최공진(崔拱辰)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亥四月 崔拱辰 城主 辛亥四月 崔拱辰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신해년 4월에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사촌 동생 내집(乃集)이 빚진 경채(京債)를 모두 갚았으니 이에 사실을 증빙하는 입지를 성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신해년 4월에 상서면 다회리(上西面 多會里)에 사는 화민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장이다. 최공진은 자신의 사촌동생 내집(乃集)이 빚진 경채(京債)를 이번에 간신히 마련하여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차 어떤 후환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앞으로 혹여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상납전의 경우 상납전을 건 낸 담당색리에게 추급할 것이며, 경채 또한 경채를 건 낸 경저리(京邸吏)에게 징급하고, 자신에게 횡징하지 못할 뜻으로 입지를 성급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소장을 접한 부안현감은 위의 내용으로 입지를 성급해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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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179) 어른의 세 아들을 방문하다 訪小心齋丈三子 십년 만에 목산 동쪽을 재차 방문하니 十年再訪鶩山東세 옥수180)가 우뚝 솟아 부친의 풍모를 볼 수 있네 三樹亭亭見父風간특함을 어찌 유학의 세계에 용납하리오 奸慝寧容儒學界춘추 의리는 본디 성인의 경서 속에 있다네 春秋自在聖經中천 가닥 흰 귀밑머리를 함께 가련히 여기고 共憐鬢髮千莖白한 조각 붉은 마음181)만을 오직 믿을 뿐이라오 只信靈臺一片紅이별의 눈물 흩뿌려 흐르는 강물을 더하는데 別淚揮添江水去변함없는 경색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구나 依然景色舊時同 十年再訪鶩山東, 三樹亭亭見父風.奸慝寧容儒學界, 春秋自在聖經中.共憐鬢髮千莖白, 只信靈臺一片紅.別淚揮溙江水去, 依然景色舊時同. 소심재(小心齋) 황종복(黃鐘復, 1858~1935)으로, 소심재는 그의 호이다. 충청도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세 옥수(玉樹) 황종복의 세 아들을 가리킨다. 옥수는 남의 집의 훌륭한 자제를 비유하는 말로,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과 옥수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마음 원문의 영대(靈臺)를 번역한 것이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영대 속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不可內於靈臺]"라고 하였는데, 곽상(郭象)이 주(註)에서 "영대는 마음이다."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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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군 정호 찬문 의 〈선고 묘소의 석물〉 시에 차운하다 次趙君正豪【燦文】先考墓石儀韻 소나무 가 무덤 풀이 여덟 번 새로 났는데 松儂墓草八番新돌 깎아 석물 만드니 사방에서 흠모하누나 伐石成儀歆四隣후손에게 복을 끼칠430) 훌륭한 계책은 세속의 모범 되었고 裕後嘉謨曾範俗선친을 계술하는431) 어진 아들은 또한 진세를 벗어났도다 述先賢子亦超塵산은 길지를 고르니 유택을 마련하고 山惟吉地占幽宅때는 좋은 시절이니 중춘에 해당하네 時適良辰屬仲春평소 교칠처럼 굳었던432) 우의를 추억하니 追憶平生膠漆誼이날 지은 시를 보고 자주 감탄한다오 題詩此日感歎頻 松儂墓草八番新, 伐石成儀歆四隣.裕後嘉謨曾範俗, 述先賢子亦超塵.山惟吉地占幽宅, 時適良辰屬仲春.追憶平生膠漆誼, 題詩此日感歎頻. 후손에게 복을 끼칠 원문의 유후(裕後)는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써 일을 제재하고 예로써 마음을 제재해야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울 것이다.[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선친을 계술(繼述)하는 《중용장구》 제19장에 "무릇 효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며 부모의 일을 잘 조술하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교칠(膠漆)처럼 굳으며 후한(後漢) 때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은 젊어서부터 우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그 향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와 옻칠이 견고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의 사이만은 못하리라.[膠漆自謂堅, 不如陳與雷.]"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1 陳重雷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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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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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김응상(金應相)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 道光五年 幼學金應相 道光五年 金膺相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行縣監[着押] 6.5*6.5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돈계 김응상 후손가 부안 돈계리 김응상 후손가 1825년(순조 25)에 부안현 남하면 둔계리에 거주하는 김응상이 작성하여 부안현에 제출한 호구단자. 1825년(순조 25)에 부안현(扶安縣) 남하면(南下面) 둔계리(遯溪里)에 거주하는 김응상(金應相)이 부안현(扶安縣)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김응상의 본관은 부령(扶寧)으로, 당시 50세였다. 그는 아내 남원양씨(南原梁氏, 31세)와 아들 성묵(聖黙, 21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기재된 문서에 의하면 외조가 2명인 것으로 보아 양씨는 후처(後妻)로 추정되며, 성묵은 나이로 미루어 볼 때 전처(前妻) 소생으로 보이며 3년 전 관련 문서에 의하면 이때 전처의 부(父)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아들 성묵은 초명(初名)이 귀묵(貴黙)으로 추정된다. 데리고 살았던 노비가 2명이 있었는데 1명은 도망갔다고 나와 있다. 부안현 남하면 둔계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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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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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사종제(四從弟) 김병수(金炳琇)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同治十年辛未四月初九日 四從弟炳秀 同治十年辛未四月初九日 金炳琇 四從兄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71년(고종 8)에 김병수가 10촌 형에게 3냥을 받고 묘전을 넘기면서 작성한 수표 1871년(고종 8)에 김병수(金炳琇)가 10촌 형에게 3냥을 받고 묘전(墓田)을 넘기면서 작성한 수표이다. 그는 고조와 증조 이하 선대의 묘가 있는 종산(宗山)의 묘전 4복 7속을 경작해 왔으나 금년에 가뭄이 들어 세금을 낼 길이 없자 3냥을 받고 10촌 형에게 묘전을 넘겼다. 타향에 있으면서 경작해야 할 묘전이 있다면 산소를 쓴 사람이 맡는 것이 현재 통용되는 정식(程式)이며, 더구나 묘가 1기도 아니고 7기나 계장(繼葬)한 형편이면 더더욱 그렇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김병수는 타향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에는 초목 하나라도 간섭하지 않겠으며, 경작물에는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뒷날 자손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을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의 대상이 된 종산의 묘전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문서에 적혀 있지 않지만, 고조대 이래의 종산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안(扶安) 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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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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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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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2년 박덕유(朴德裕)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戌正月晦日 朴德裕 壬戌正月晦日 1862 朴德裕 [着名] 2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2년 정월 그믐날에 박덕유가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 1862년 정월 그믐날에 박덕유(朴德裕)가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매달 5부 이자로 20냥을 빌렸으나 돈을 갚지 못한 지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채권자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자 그는 내년 12월 20일까지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수표를 작성하여 넘겨주었다. 만일 약속한 기한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이 수표를 가지고 증빙을 삼으라고 하였다. 증필(證筆)에는 강정심(姜正心)이 맡아 거래에 참여하여 문서에 서명하였다. 박덕유는 부안김씨소장 문서에 몇 차례 더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문서로 미루어 보건대 작성연대로 나오는 본문의 임술년은 1862년로 추정된다. 임술년 그 다음해 즉 1863년에는 세금을 낼 수가 없어서 6냥 7전을 빌리면서 수표를 작성했는가 하면, 누군가가 작성한 문서에는 이 계해년부터 갑자년, 을축년, 병인년, 정묘년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180냥이 넘는 돈을 빌리고 일부를 갚은 내역이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상당히 빚에 쪼들리며 살아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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