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전주향교(全州鄕校)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孔夫子誕降二千四百九十四年癸未三月日 直員 李光烈 齋長 李炳泰 掌議 李子煥 各郡校院 孔夫子誕降二千四百九十四年癸未三月日 李光烈 各郡校院 전라북도 전주시 1개(적색, 정방형) 전주역사박물관_불명처3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9006-01-000001 1943년 3월에 전주향교(全州鄕校)의 직원(直員) 이광렬(李光烈) 등 24명이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서원에 있는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 1943년 3월에 전주향교(全州鄕校)의 직원(直員) 이광렬(李光烈)과 재장(齋長) 이병태(李炳泰), 장의(掌議) 이자환(李子煥) 등 24명이 여러 고을의 향교와 서원에 있는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이다. 전주에 살았던 백인당(百忍堂) 강신창(姜信昶)의 처 김해김씨(金海金氏)의 효열(孝烈)을 널리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씨는 순릉참봉(順陵叅奉)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오른 김성태(金性泰)의 여식으로, 열다섯 살에 진주강씨(晉州姜氏) 집안에 시집온 뒤에, 일찍 아들을 낳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으며, 남편을 예로써 공경하였고, 친척들과는 우애로 대하였으며, 이웃과는 화목하게 지내 모두가 김씨를 칭찬하였다. 남편이 갑자기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조리하여 다스렸으나 침약(鍼藥)이 효험이 없고, 무의(巫醫)로도 다스리기 어려워 급기야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씨는 곧바로 자결을 하여 남편을 따라 가고자 하였으나, 돌이켜 곰곰이 생각하니 자신이 죽으면 칠순의 시부모와 어린 자식을 돌볼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차라리 살아서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교육하느니만 못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하여 지극한 고통을 감내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맹모(孟母)의 가르침을 본받아 어린 자식에게 예절을 먼저 가르친 다음에 글을 배우게 하였다. 다행히도 아이가 총명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며, 과부의 절개 또한 굳건하여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열행을 보였으니 같은 고을에 사는 유생들로 어찌 김씨에게 포양을 받을 수 있도록 천거하지 않을 수 없겠느냐면서 전주향교의 많은 유생들이 한 마음으로 각 고을의 유생들에게 이 일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효자와 열녀의 효열(孝烈)에 대하여 정려의 특전을 내려달라는 상소와 소지, 그리고 서원과 향교의 유생들이 발문(發文)하여 이에 동참하는 일은 조선 후기에 특히 많이 일어나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것도 광복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여전히 서원과 향교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