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기우만(奇宇萬)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未四月晦日 奇宇萬 安碩士 辛未四月晦日 奇宇萬 安碩士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1년(고종 8) 4월 30일에 기우만(奇宇萬)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 1871년(고종 8) 4월 30일에 기우만(奇宇萬)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안의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뜻밖에 상대방 동생의 방문과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갈증에 물을 마신 것처럼 위로되었고 편지를 통해 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조부의 병환이 20일경에 심해져 다급했으나 지금은 차차 나아졌다고 하였다. 지난번 상대방이 왔을 때 가져간 책자는 되도록 빨리 보내 달라. 고증할 곳이 있으면 매번 먼데 사람들이 찾는데 집에는 초본만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상대방의 동생이 말로 다 전할 것이며, 더위에 먼 길을 가니 작별이 더욱 안타깝다고 하였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할아버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고 아버지는 기만연(奇晩衍, 1819-1876)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881년(고종 18)에 참봉(參奉)의 신분으로 김평묵(金平默),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렸다. 1895년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울 때 비문의 내용을 지었고, 을미사변 후에 단발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오자 광주향교에 들어가 일제에 맞설 것을 의논하였고, 기삼연(奇參衍)이 이끄는 장성의 300여 의병이 합류하자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고종이 신기선(申箕善) 등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해산할 것을 명하자 이에 따랐다. 5월에 다시 기병하였으나 10월 16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908년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려고 모의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유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