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8년 이인제(李仁濟) 의송(議送)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六月 日 李仁濟 巡察使 戊戌六月 日 李仁濟 全羅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着名] 남원 둔덕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全北大 博物館,『朝鮮時代 南原屯德坊의 全州李氏와 그들의 文書(Ⅰ)』, 1990. 全北大 博物館,『박물관도록 –고문서-』, 1999.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13_01_A00004_001 1658년(효종 9)에 이인제(李仁濟)가 작성하여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 1658년(효종 9) 6월에 남원부(南原府) 둔덕방(屯德坊)에 거주하던 이인제(李仁濟)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게 제출한 의송(議送)으로, 도망노 옥상(玉上)과 차산(次山) 등의 처벌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문서의 사진에는 작업연도와 소지를 제출한 곳이 나와 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문서가 훼손되기 전에 탈초한 부분이 있어서 원문텍스트에는 이를 삽입하였으며, 해제 또한 이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인제가 남원부사에 제출한 소지(1658년 이인제(李仁濟) 소지(所志))를 함께 참고하여 살펴보면, 그의 조부 이유형(李惟馨)에게는 옥상(玉上)이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3년 전인 1655년에 노 차산(次山)과 후산(後山) 등 6명과 함께 이웃 고을인 임실현(任實縣)의 관노(官奴)로 투속하였다가 뒤에 도주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유형이 위 옥상과 차산 등을 널리 수소문하여 보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유형은 노 차산과 후산 소유의 전답을 몰수하였는데, 그것은 도망간 노비들이 모두 조상사위(祖上祀位) 노비여서 이들로부터 신공(身貢)을 받지 못하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데 여러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유형은 차산과 후산의 전답을 몰수하여 여기에서 얻어지는 소출(所出)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뒤에 차산이 옥상과 더불어 그의 소유였던 전답을 찾기 위해서 한성부(漢城府)와 형조(刑曹) 등에 갖가지 거짓말로 탄원하여 형조의 관문(關文)을 얻어냈으며(이 관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 관찰사(觀察使)에게 소지를 올려 이유형이 차산의 처인 애덕(愛德)과 그의 자인 생용(生龍)을 살해하였다고 무고하였다. 따라서 이유형의 손자인 이인제는 당시 상중(喪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원부사와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려 그간의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옥상과 차산 등을 엄히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이인제의 나이는 16세였다. 그의 조부인 이유형과 부(父)인 이문주(李文冑)가 모두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그가 직접 소지를 작성하였다.) 이 의송이 바로 그 때 전라관찰사에게 제출된 것이다. 의송은 소지의 일종으로서 관찰사에게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의송에서 이인제는 차산을 그의 사환노(使喚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위노(祀位奴)의 오자(誤字)로 추정된다. 차산은 사위노였으며 그의 모 속비(俗非)도 역시 사위비(祀位婢)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