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9년 전주유생(全州儒生) 조영성(趙榮成)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己丑十月 日 儒生幼學趙榮成 鄭 淙 任基白 繡衣閤下 己丑十月 日 趙榮成 暗行御史 전라북도 전주시 暗行御史[着押] 3개(원형,적색) 전주 구석 인동장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2-01-000001 1829년(순조 29) 10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조영성(趙榮成) 등 20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9년(순조 29) 10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조영성(趙榮成) 등 20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들은 전주에 살았던 고(故) 장유혁(張有爀)의 처 이씨(李氏)의 뛰어난 열행(烈行)을 조정에 알려 정려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기축년으로 되어 있으나 관련문서로 미루어 이를 1829년으로 추정하였다. 전주의 유생들은 이미 2년 전에도 같은 내용의 소지를 전주부윤(全州府尹)과 순상(巡相) 즉, 전라관찰사에게 올렸었는데, 이번에는 암행어사에게 상서를 올린 것이다. 상서의 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18세에 장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도리를 다하여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두 현부인(賢夫人)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불행하게도 남편이 이상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의대(衣帶)도 벗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부축하며 병 구환을 하였으며, 직접 죽을 끓여 대접하고 침과 약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남편이 운명하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며칠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이 깊어 좋은 의원을 구할 길이 없어 마침내 남편이 운명하자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것은 유복자인 어린 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3년이 못되어 요절하자 이씨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는 곡기를 끊고 채 열흘이 못돼서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씨의 행실에 감동하고 부녀자들 또한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에 조영성 등 전주의 유생들은 공의(公議)를 다시 수렴하여 이씨의 열행 실적을 모아 조정에 아뢰어 이씨에게 포양(褒揚)을 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암행어사는 정성을 다하여 병 구환을 하고 마침내는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으니 그 탁이한 열행이 참으로 가상하기는 하지만, 조정에 아뢰는 일이니 마땅히 공의를 다시 수렴하라는 제사를 내렸다. 그 뒤 1830년에 이르러서는 전라도의 유생들이 함께 같은 내용의 상서를 순상에게 올렸다. 한편 1932년 이후로는 장유혁의 아버지 장문택(張文澤)의 처 구씨(具氏), 즉 위의 이씨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되는 장유혁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며느리와 함께 정려를 청하는 유생들의 상서가 전주와 감영, 그리고 암행어사에게 계속 올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