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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전라도유생(全羅道儒生) 이중희(李重曦)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申七月 日 道內儒生幼學李重曦任基白李祜永 巡相閤下 丙申七月 日 李重曦 全羅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着押] 2개(적색, 정방형) 전주 구석 인동장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2-01-000005 1836년(헌종 2) 7월에 이중희(李重曦) 등 전라도 내 각 지역의 유생들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上書). 1836년(헌종 2) 7월에 이중희(李重曦) 등 전라도 내 각 지역의 유생들이 순상(巡相) 즉, 전라도관찰사에게 올린 상서이다.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병신년으로 적혀 있으나, 관련문서를 통해 이를 1836년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문서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왼쪽 면이 잘라져 있어서 연명자들의 이름을 대부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유생들은 이 상서에서 전주(全州)에 사는 고(故) 동지(同知) 장문택(張文澤)의 처 구씨(具氏)와 그녀의 며느리 이씨(李氏)의 열행(烈行)을 조정에 알려 정려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상서의 내용에 따르면, 구씨는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장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부도(婦道)를 공경히 지키고, 예(禮)로써 제사를 받들고 집안에서는 그 범절이 뛰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년 정월에 남편이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구씨는 애통한 나머지 남편을 따라 순절하고 싶었지만 애써 슬픈 마음을 감추고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상례를 다 갖추어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구씨는 쑥대처럼 된 머리를 빗질조차 하지 않았으며, 새까만 얼굴도 씻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한 순간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처음에는 5월 보름날에 죽기로 작정하였지만 때마침 시숙(媤叔)의 상(喪)을 당하자 장례를 치르고, 다시 6월 7일로 날짜를 잡은 다음에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목욕재계한 뒤에 침방에 들어가 끝내 독약을 마셨다. 구씨는 곧바로 즉사하지 않자 망부(亡夫)를 부르짖으며 저세상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기원하였고, 말이 끝나자마자 이내 죽고 말았다. 그리고 장문택의 며느리 이씨(李氏)는 18세 때 장문택의 아들 장유혁(張有爀)에게 시집을 와서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도리를 다하여 집안을 다스렸다. 뒤에 불행하게도 남편이 이상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부축하며 병 구완을 하였으며, 남편이 운명하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며칠을 연명할 수 있었다. 남편이 운명하자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것은 유복자인 어린 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3년이 못되어 요절하자 이씨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는 곡기를 끊고 채 열흘이 못돼서 죽고 말았다. 지난 정해년에 도읍(道邑)에서 장계를 올려 정려를 청한 문서들이 쌓여서 두루마리가 될 정도에 이르렀으니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태인, 고부, 곡성, 옥과 등 전라도 내 각 지역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순상에게 글을 올려 두 사람의 열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를 받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순상은 이에 대하여 고부의 열행이 참으로 가상하지만, 다시 널리 열행을 모아 관에 알리라는 제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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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박홍진(朴洪鎭)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一月日 朴洪鎭 郡守 李範喬 光武六年一月日 朴洪鎭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박홍진(朴洪鎭, 53세)이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에 朴洪鎭(53세)이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表. *주소: 全羅南道 興陽郡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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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송익호(宋益浩)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一月日 宋益浩 郡守 李範喬 光武六年一月日 宋益浩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송익호(宋益浩, 48세)가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에 宋益浩(48세)가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表. *주소: 全羅南道 興陽郡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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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이승겸(李承謙)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李承謙 趙性喜 李承謙 趙性喜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모년 12월에 장전(長田)에서 이승겸(李承謙)이 조성희(趙性熹)에게 보낸 서간(書簡). 모년 12월에 장전(長田)에서 이승겸(李承謙, 1862-1864)이 소아선생(小雅先生) 조성희(趙性熹)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눈이 쌓인 12월에 편안하다니 매우 위로가 되며, 담(痰) 결리는 것은 한때 지나는 병이니 약 없이도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세밑에 정신없이 바쁘고 몸에 병도 많다고 하였으며 보내준 물건이 비록 과일이지만 받기에 편치 않다고 하였다. 그믐이 머지않았으니 해를 보내고 맞는 때에 복 많이 받기 바란다고 하였다. 피봉(皮封)에 적힌 소아선생(小雅先生)은 조성희(趙性熹)이다. 고종 때에 동복현감(同福縣監), 임실현감(任實縣監 1886-1889 재임), 태인현감(泰仁縣監), 옥천군수(沃川郡守), 무주부사(茂朱府使) 등을 지냈다. 이승겸은 본관은 한산, 자는 경익(景益)으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장전(長田)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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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기우만(奇宇萬)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未四月晦日 奇宇萬 安碩士 辛未四月晦日 奇宇萬 安碩士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1년(고종 8) 4월 30일에 기우만(奇宇萬)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 1871년(고종 8) 4월 30일에 기우만(奇宇萬)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안의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뜻밖에 상대방 동생의 방문과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갈증에 물을 마신 것처럼 위로되었고 편지를 통해 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조부의 병환이 20일경에 심해져 다급했으나 지금은 차차 나아졌다고 하였다. 지난번 상대방이 왔을 때 가져간 책자는 되도록 빨리 보내 달라. 고증할 곳이 있으면 매번 먼데 사람들이 찾는데 집에는 초본만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상대방의 동생이 말로 다 전할 것이며, 더위에 먼 길을 가니 작별이 더욱 안타깝다고 하였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할아버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고 아버지는 기만연(奇晩衍, 1819-1876)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881년(고종 18)에 참봉(參奉)의 신분으로 김평묵(金平默),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렸다. 1895년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울 때 비문의 내용을 지었고, 을미사변 후에 단발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오자 광주향교에 들어가 일제에 맞설 것을 의논하였고, 기삼연(奇參衍)이 이끄는 장성의 300여 의병이 합류하자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고종이 신기선(申箕善) 등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해산할 것을 명하자 이에 따랐다. 5월에 다시 기병하였으나 10월 16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908년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려고 모의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유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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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송중호(宋重浩)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壬寅月日 幼學 宋重浩 行郡守 壬寅月日 宋重浩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송중호(宋重浩, 65세)가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902년에 宋重浩(65세)가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單子. *주소: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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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송한호(宋漢浩)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壬寅月日 幼學 宋漢浩 行郡守 壬寅月日 宋漢浩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송한호(宋漢浩, 41세)가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902년에 宋漢浩(41세)가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單子. *주소: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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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송동면(宋東勉) 서간(書簡)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旧十二月二十一日 宋東勉 旧十二月二十一日 宋東勉 柳瑩業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2년 12월 21일 송동면(宋東勉)이 딸 사돈 류형업(柳瑩業)에게 보성 벌교 류봉환을 방문한 일 등을 전한 간찰. 1932년 12월 21일 송동면이 딸 사돈 류형업에게 보성 벌교 류봉환을 방문한 일 등을 전한 간찰. *추기: 昭和七年一月二十九日【會辛未臘卄七日入來而未納金六錢卽給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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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조달원(趙達元)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丑正月 日 趙達元等 府官主 乙丑正月 日 趙達元 全州府尹 전라북도 전주시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6-01-000012 1865년(고종 2) 정월에 부동면(府東面) 표석리(表石里)에 사는 조달원(趙達元) 등이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등장. 1865년(고종 2) 정월에 전주부 부동면 표석리에 사는 조달원 등이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올린 등장이다. 이 문서에는 조달원과 함께 문서를 작성하여 연명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다. 이들은 전주류씨 시조비 삼한국대부인 묘 아래에 사는 산지기와 접인(接人)들로, 자신들의 환곡(還穀)과 연호(烟戶) 잡역(雜役)에 대한 면제를 영부(營府)에서 절목(節目)으로 엄히 내려준 바가 있는데도,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뒤섞여 똑같이 환곡을 받기에 이르렀고 단지 산지기 3호(戶)만 면제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환곡을 면제할 때에 담당 가좌색리(家座色吏)가 고등(高等)으로 등급을 매기면서 환곡을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기왕에 고등으로 등급을 받은 것을 빌미로 환곡을 받게 하는 등 공정하게 호역(戶役)을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만일 이번에 여러 가좌(家座)에서 환곡을 받아 촌락 전체가 흩어져버리게 되면 누구도 이곳에서는 발을 붙이고 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부윤에게 호소하기를 가좌색리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다른 촌락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호역을 집행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윤은 공정하게 호역을 집행하여 호소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가좌색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을축년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문서를 토대로 위의 을축년을 1865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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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1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子十月十八日 査侄○○ 三千浦 丙子十月十八日 柳瑩業 柳龜桓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6년 10월 18일에 류형업(柳瑩業)이 삼천포에 머물고 있는 숙부 류구환(柳龜桓)에게 안부와 묘제(墓祭) 등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간찰. 1936년 10월 18일에 류형업이 삼천포에 머물고 있는 숙부 柳龜桓에게 안부와 墓祭 등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한 편지이다. *추기: 丙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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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1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子十一月初八日 內侄○○○ 薪田 丙子十一月初八日 柳瑩業 外舅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36년 11월 8일에 류형업(柳瑩業)이 곡성군 신전(薪田)에 사는 외삼촌에게 그 둘째 아들 이중옥(李中玉)의 혼사를 중매하는 문제로 보낸 편지. 1936년 11월 8일에 류형업이 곡성군 薪田에 사는 외삼촌에게 그 둘째 아들 李中玉의 혼사를 중매하는 문제로 보낸 편지이다. *추기: 丙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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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류증효(柳曾孝) 서간(書簡)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辰八月五日 迷子 曾孝 父 戊辰八月五日 柳曾孝 柳瑩業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28년 8월 5일에 류증효(柳曾孝)가 아버지 류형업(柳瑩業)에게 소식을 전하고 귀환일정을 전해 드린 간찰 1928년 8월 5일 류증효가 아버지 류형업에게 소식을 전하고 귀환일정을 전해 드린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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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8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酉七月念午 服査弟 柳瑩業査生 辛酉七月念午 柳瑩業 崔公彧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21년에 류형업(柳瑩業)이 사돈 최공욱(崔公彧)에게 안부를 묻고 음식과 의복 등에 대한 감사 간찰 1921년에 柳瑩業이 사돈 崔公彧에게 안부를 묻고 음식과 의복 등에 대한 감사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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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류기(柳記)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九月 日 柳記 柳浡 柳讙 觀察閤下 戊戌九月 日 柳記 全羅道觀察使 전라북도 전주시 使[着押] 4개(적색, 정방형)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주 인후 전주류씨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6-01-000012 1898년(광무 2) 9월에 전주(全州)의 유생 유학(幼學) 류기(柳記) 등 10명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올린 상서. 1898년(광무 2) 9월에 전주의 유생 유학(幼學) 류기(柳記) 등 10명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올린 상서이다. 이들은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있는 시조비(始祖妣)의 묘답(墓畓)과 관련된 일로 기왕에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려, 조사를 하여 다시 보고하라는 제사[題辭]를 받고 전주부윤에게 이를 올렸다. 전주부윤은 종답(宗畓)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류씨 종중의 유사(有司)에게 잠시 이를 맡기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시조비의 제삿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전주류씨 종중의 입장에서는 상부의 명백한 판결이 없으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관찰사께서 특별히 명백한 판결을 내리셔서 류씨 종중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관찰사는 경계선 밖에 있는 전답에 대해서 일체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미 고을에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의 제사를 내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같은 달 전주류씨 종중이 관에 올린 문서들이 이 문서를 포함하여 4건이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시조비의 묘답 1석 7두락이 건지산에 대한 관의 측량에서 건지산 경내(境內)의 것임에도 묘답으로 잘못 들어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묘답의 소출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전주류씨 종중은 제삿날 전에 이 묘답에 대한 관의 분명한 판결을 바랐기 때문에 계속 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무술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연명자의 한 사람인 진사(進士) 류호양(柳浩養)이 1849년생으로, 1882년(고종 19)의 증광진사시에 합격한 점으로 미루어, 무술년을 1898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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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송동면(宋東勉) 서간(書簡)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巳正月十五日 弟宋東勉 己巳正月十五日 宋東勉 柳瑩業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29년 1월 15일에 송동면(宋東勉)이 딸 사돈 류형업(柳瑩業)에게 손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사위 류증효(柳曾孝)의 병환 소식을 물으면서 쓴 간찰과 피봉. 1929년 1월 15일에 송동면이 딸 사돈 류형업에게 손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사위 증효 의 병환 소식을 물으면서 쓴 간찰과 피봉. *추기: 己巳正月十五日出同念二日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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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김인석(金潾錫) 관고(官誥) 1 고문서-교령류-관고 정치/행정-임면-관고 光武五年六月日 六品金潾錫 光武五年六月日 高宗 金潾錫 서울특별시 종로구 勅命之寶(9x9, 적색, 정방형) 고흥 두원 경주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5-01-000647 1901년(광무 5)에 고종(高宗)이 김인석(金潾錫)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한 칙명(勅命). 1901년 6월에 高宗이 金潾錫을 正三品 通政大夫로 임명한 勅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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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30년 오현봉(吳顯奉)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庚寅三月 日 南原山民吳顯奉吳顯義 谷城城主 庚寅三月 日 吳顯奉 谷城縣監 전라남도 곡성군 谷城官[着押] 5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14-01-000005 1830년 3월에 남원에 사는 오현봉(吳顯奉)과 오현의(吳顯義)가 곡성현감(谷城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 1830년 3월에 남원에 사는 오현봉(吳顯奉)과 오현의(吳顯義)가 곡성현감(谷城縣監)에게 올린 산송 소지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경인년으로만 기재되어 있지만, 소를 올린 오현의가 1834년에 계집종 1구를 매입하면서 작성한 명문으로 미루어 보건대, 위의 경인년은 1830년으로 추정된다. 오현봉 등 함양오씨 일가는 곡성현 오지면 불가동(谷城縣 梧支面 佛袈洞)에 조모의 산소를 매입하여 산지기를 두고 이곳을 수호해 왔다. 그런데 그곳 산지의 단백호(單白虎) 외변에는 도상면(道上面)에 사는 배가(裵哥)의 산소가 있었다. 경계를 나누어 보니, 백호등(白虎嶝)의 안쪽은 오씨가 수호하고 바깥쪽은 배가의 산소가 차지하고 있음이 확실하고, 이것은 매매문기에도 분명히 기재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오씨네 선산에는 대송(大松)이 빽빽하게 들어찬 반면, 배가의 산소에는 어린 소나무(稚松)만 자라고 있었는데, 지난 신유년에 배가가 자신들의 송추를 팔면서, 오씨네 대송과 치송들을 마구 베었다. 이에 오씨측에서 관에 소를 올리자 그 배도인(裵道仁)이 백방으로 애걸하면서 소나무값을 지불하겠다는 수기(手記)를 작성해 주었기 때문에 그 선에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르러 오씨네 사촌동생의 아이가 갑자기 병을 얻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오씨측은 위 선산의 백호 안 단록(短麓)에 아이의 무덤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배가가 그 단록을 장석윤(張錫潤)이라는 자에게 이미 몰래 팔아버렸다. 이에 오씨측은 배가로부터 받은 수기와 선산을 사면서 받은 매득문기를 첨부하여 곡성현감에게 소를 올려, 남의 선산 부지를, 그것도 아이의 무덤을 쓴 곳을 몰래 팔아먹는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며 탄원하면서, 배가는 물론, 남의 선산을 몰래 매입한 장석윤도 잡아들여 엄정하게 법에 따라 처리하여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곡성현감은 남의 선산을 몰래 판 배가의 행위가 괴이하다면서 배가와 장가를 잡아들여 조사하고, 해당 면의 존임(尊任)과 동행하여 산의 경계를 자세히 그려오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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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903년 김전(金佺)의 처(妻) 남양송씨(南陽宋氏) 관고(官誥) 고문서-교령류-관고 정치/행정-임면-관고 光武七年十月日 南陽宋氏 光武七年十月日 高宗 南陽宋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勅命之寶(9x9, 적색, 정방형) 고흥 두원 경주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5-01-000647 1903년(광무 7)에 고종(高宗)이 남양송씨(南陽宋氏)를 숙인(淑人)으로 추증한 교지(敎旨). 1903년 10월에 高宗이 南陽宋氏를 淑人으로 추증한 勅命. *방서: 依從夫職 *추기: 金佺之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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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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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송이권(宋以勸)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幼學 宋以勸 宋以勸 宋以勸[着名], 柳淙成[着名], 金廷錄[着名]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모년에 송이근(宋以勸)이 누군가와 논을 판매한 매매명문의 일부분. 宋以勸이 누군가와 논을 판매한 매매명문의 일부분. *筆: 幼學 柳淙成 *證: 幼學 金廷錄 *특징: 문서 앞 부분이 누락되어 문서 발급시기와 買受人 및 거래 내역을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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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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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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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송주익(宋柱翼)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五年辛丑十二月十六日 幼學 張斗鎬 幼學 宋柱翼 大韓光武五年辛丑十二月十六日 張斗鎬 宋柱翼 張斗錫[着名], 宋柱億[着名], 宋秀浩[着名]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1년에 장두호(張斗鎬)가 송주익(宋柱翼)에게 논을 판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901년에 張斗鎬가 宋柱翼에게 논을 판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거래토지: 豆上谷 古實坪 3斗落 *거래금액: 價折錢文 壹百玖拾兩 *新舊文 二丈 *證人: 幼學 宋柱億 *筆: 幼學 宋秀浩 *특징: 문서의 가운데 부분이 누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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