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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황헌주(黃憲周) 시권(試券) 1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乙丑二月初十日 黃憲周 乙丑二月初十日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18 1865년 2월에 실시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황헌주(黃憲周)가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 1865년 2월에 실시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황헌주(黃憲周)가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이다. 문서의 작성자와 그 4조가 적힌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하게도 외조가 본관이 은진(恩津)인 송한정(宋漢鼎)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응시자를 황헌주로 확정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황헌주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성균생원 황두희(黃斗熙)이며, 생부는 강화도분교관(江華島分敎官) 황익희(黃翼熙), 조부는 황윤식(黃允植), 증조는 황순(黃洵), 외조는 송한정(宋漢鼎)으로 나와 있다. 이때 실시된 시험은 2월 초 10일에 1소에서 열린 초장(初場)으로, 상시관(上試官)은 참판(參判) 박규수(朴珪壽), 부시관(副試官)은 참판(參判) 이승익(李承益)이며, 참시관(參試官)은 승지(承旨) 김세호(金世鎬)였다. 시험과목은 시(詩)로, 시제(試題)는 "자로증석염유공서화시좌(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였다. 이 제목은 『논어(論語)』 22 선진편 하(先進篇下)에 나오는 소제목으로, "자로와 증석, 염유, 공서화가 시좌(侍坐)하였다."는 뜻이다. 황헌주는 이 시험에서 차하(次下)의 성적을 받았으며, 이 해의 시험에서는 낙방하였다. 황헌주는 1877년(고종 14)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 출세한 인물이지만, 이 시권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문과(文科)를 통하여 관로 진출을 모색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무과를 통해 입사(入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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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황헌주(黃憲周) 시권(試券) 2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乙丑二月十二日 黃憲周 乙丑二月十二日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18 1865년 2월에 실시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황헌주(黃憲周)가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 1865년 2월에 실시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황헌주(黃憲周)가 작성하여 제출한 시권(試券)이다. 문서의 작성자와 그 4조가 적힌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하게도 이보다 이틀 전에 작성한 다른 시지를 통해 외조의 본관이 은진(恩津)이며 송한정(宋漢鼎)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응시자를 황헌주로 확정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황헌주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성균생원 황두희(黃斗熙)이며, 생부는 강화도분교관(江華島分敎官) 황익희(黃翼熙), 조부는 황윤식(黃允植), 증조는 황순(黃洵), 외조는 송한정(宋漢鼎)으로 나와 있다. 이때 실시된 시험은 2월 초12일에 1소에서 열린 종장(終場)으로, 상시관(上試官)은 참판(參判) 박규수(朴珪壽), 부시관(副試官)은 참판(參判) 이승익(李承益)이며, 참시관(參試官)은 승지(承旨) 김세호(金世鎬)였다. 시험과목은 예의(禮疑)로, 시제(試題)는 "이삼시년지통제국용(以三十年之通制國用)'이었다. 이 제목은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에 나오는 구절로, "30년간의 수입을 통산하여 10년분의 잉여가 있을 수 있도록 국가의 비용을 책정한다."는 뜻이다. 황헌주는 이 시험에서 차하(次下)의 성적을 받았으며, 이 해의 시험에서는 낙방하였다. 황헌주는 1877년(고종 14)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 출세한 인물이지만, 이 시권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문과(文科)를 통하여 관로 진출을 모색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무과를 통해 입사(入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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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송주성(宋桂星)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壬寅月日 幼學 宋桂星 行郡守 壬寅月日 宋桂星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송계성(宋桂星, 26세)이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902년에 宋桂星(26세)이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單子. *주소: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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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김전(金佺)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二十年正月日 學生金佺 光緖二十年正月日 高宗 金佺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두원 경주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5-01-000647 1894년(고종 31)에 고종(高宗)이 김전(金佺)을 통훈대부 사헌부장령(通訓大夫 司憲府掌令)으로 추증한 교지(敎旨). 1894년(고종31) 1월에 高宗이 金佺을 通訓大夫司憲府掌令으로 임명한 敎旨. *추기: 嘉善大夫敦寧府同敦寧金潾錫曾祖考依 法典追 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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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3년 안정태(安貞泰) 소장(訴狀)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장 법제-소송/판결/공증-소장 癸卯正月 日 南原郡居安貞泰 光陽城主 癸卯正月 日 安貞泰 光陽郡守 전라남도 광양시 光陽官[着官] 5개(적색, 정방형)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OD_F1019-01-000010 1903년(광무 7) 정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정태(安貞泰)가 자신의 선산 인근에 투장하고 송추를 베어낸 정선유(鄭善有)를 광양군수(光陽郡守)에게 고발한 소장. 1903년(광무 7) 정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안정태(安貞泰)가 광양군수(光陽郡守)에게 올린 소장이다. 자신의 형이 살아 있을 때인 지난 기묘년(1879) 겨울에 정석규(鄭錫奎)에게 광양 골약면 용소동에 있는 산지를 사서 입산하고 수호하기 시작하였으니 벌써 20여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정석규가 죽은 뒤에 그의 동생 정선유가 마치 주인이 없는 물건처럼 이곳의 소나무들을 마구 베어내고는 자기 어머니의 묘까지 투장(偸葬)하였다. 이에 안정태는 소를 올려,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산을 사서 입장한 곳을 벌거숭이산으로 만들고 투장까지 한 정선유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투총을 파게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해 광양군수는 이미 팔아버린 산에 멋대로 투장을 하니 그 마음이 불량하다면서 보수(步數)와 도형을 소상히 급히 보고하여 양자를 대질할 수 있게 하라고 집강에게 제사를 내렸다. 이와 아울러 "관정(官庭)에서 대질한 결과 안가가 매득한 문적이 확실하고, 입장(入葬)한 지 수 십년 동안 송사를 제기한 일도 없었으니, 정석규가 팔고 안정회가 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형이 판 땅을 동생이 몰래 다시 판 것은 그 곡직이 본디 있으니 정선유로 하여금 투총을 즉각 파서 옮기게 하여 번거롭게 송사하지 않도록 하라"는 제사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문서의 뒷면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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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박중희(朴重熺)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壬寅月日 幼學 朴重熺 行郡守 壬寅月日 朴重熺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박중희(朴重熺, 65세)가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902년에 朴重熺(65세)가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單子. *주소: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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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903년 박유안(朴有安)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卯四月日 朴有安 城主 癸卯四月日 朴有安 珍島郡守 전라남도 진도군 官[着押] 4개(적색, 정방형) 진도 동외 밀양박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7-01-000001 1903년(광무 7) 4월에 진도군(珍島郡)에 사는 박유안(朴有安) 등 20인이 연명하여 진도군수(珍島郡守)에게 올린 상서로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과 그의 어머니 진주하씨의 효열을 건의하는 내용. 1903년(광무 7) 4월에 진도군(珍島郡)에 사는 박유안(朴有安) 등 20인이 연명하여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올린 상서이다. 박유안 등은 사인(士人) 박창준(朴昌俊)과 그의 어머니 진주하씨의 효열을 포창해 주기를 건의하였다. 진주하씨의 남편은 나병을 앓은 지 3년이나 되자 진주하씨는 자신의 살을 도려내어 남편에게 먹여 병을 완치시켜 해로하였다. 그의 아들 박창준도 효행을 다하니, 온 마을에서 그들의 효열을 칭송하였다. 이에 박유안 한 가문에 효열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들에 대해 포양의 은전이 내려주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대해 27일에 진도군수는 "어미가 열행과 자식의 효행은 세상에 드문 일이니 감탄할 만한 일이다. 마땅히 감영에 알려 천양을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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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한양오(韓養吾)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康熙二十七年十二月二十七日 韓養吾 康熙二十七年十二月二十七日 肅宗 韓養吾 서울특별시 종로구 1개(적색, 정방형) 임실 용정 청주한씨가 전주 덕진 청주한씨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1-01-000005 1688년(숙종 14) 12월 27일에 숙종이 한양오(韓養吾)를 조봉대부행광릉참봉(朝奉大夫行光陵參奉)으로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敎旨). 1688년(숙종 14) 12월 27일에 임금이 한양오(韓養吾)를 조봉대부행광릉참봉(朝奉大夫行光陵參奉)에 임명하면서 내려 준 교지이다. 조봉대부는 종4품 하계(下階)요, 참봉의 품계는 종9품(從九品)이었다. 따라서 '품고직비(品高職卑)'의 규정에 따라 광릉참봉이라는 직명(職名) 앞에 '행(行)'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한양오가 광릉참봉으로 제수된 때는 이 교지를 받기 1년 전인 강희(康熙) 26년(1687년, 숙종 13)이었다. 다만 당시에 한양오가 지닌 품계는 정5품(正九品) 상계(上階)인 통덕랑(通德郞)이었다. 따라서 이번 교지는 한양오의 품계를 올려주기 위해 발급해 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문서 맨 왼쪽을 보면 '무십이별가(戊十二別加)'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한양오가 무년(戊年) 12월에 받았던 별가(別加)의 혜택을 이번 인사조처에 반영하였다는 의미이다. 무년 12월은, 바로 이 교지가 주어진 때와 동년동월(同年同月)이었다. 따라서 한양오는 별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교지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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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45년 신양우(申亮雨) 부의단자(賻儀單子) 고문서-치부기록류-물목 종교/풍속-관혼상제-물목 乙酉八月十四日 生 申亮雨 宋生員宅 護喪所 乙酉八月十四日 申亮雨 宋生員宅 護喪所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45년에 점암면(占岩面) 용두(龍頭)의 신양우(申亮雨)가 동강면(東江面) 마수(馬輪)의 송생원댁(宋生員宅) 호상소(護喪所)에 보낸 부의단자와 피봉. 1945년 占岩面 龍頭의 申亮雨가 東江面 馬輪의 宋生員宅 護喪所에 보낸 부의단자와 피봉. *본문: 燭代金三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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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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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김수의(金守毅)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辛酉式 金芝榮故代子幼學履禧改名守毅 辛酉式 [1801] 金守毅 興陽縣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 화장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9-01-000718 1801년(순조 1)에 김수의(金守毅, 26세)가 흥양현(興陽縣)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01년(순조1)에 金守毅(26)가 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戶口單子. *주소: 大西面 禾場里 *기타사항: 金履禧에서 金守毅로 改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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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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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27년 이용묵(李容默)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丁亥十一月 日 化民 幼學 李容黙 柳錫祚 任信白 城主 丁亥十一月 日 李容黙 全州府尹 전라북도 전주시 [着押] 1개(적색, 정방형) 전주 구석 인동장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22-01-000001 1827년(순조 27) 11월에 전주의 화민(化民) 유학(幼學) 이용묵(李容黙) 등 15명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7년(순조 27) 11월에 전주(全州)의 화민(化民) 유학(幼學) 이용묵(李容黙) 등 15명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들은 전주에 살았던 고(故) 장유혁(張有爀)의 처 이씨(李氏)의 뛰어난 열행(烈行)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이씨에게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려주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정해년으로 되어 있으나 관련문서로 미루어 이를 1827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서의 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18세에 장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도리를 다하여 집안을 다스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모두 현부인(賢夫人)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불행하게도 남편이 이상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의대(衣帶)도 벗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부축하며 병구완을 하였으며, 직접 죽을 끓여 대접하고 침과 약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남편이 운명하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며칠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이 깊어 좋은 의원을 구할 길이 없어 마침내 남편이 운명하자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결국 마지막 남은 것은 유복자인 어린 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3년이 못되어 요절하자 이씨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는 곡기를 끊고 채 열흘이 못돼서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씨의 행실에 감동하고 부녀자들 또한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에 이용묵 등 유생들은 이씨의 열행 실적을 모아 감영(監營)을 거쳐 조정에 아뢰어 이씨에게 포양(褒揚)을 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주의 수령은 그 열행이 참으로 가상하기는 하지만 마땅히 널리 공의(公議)를 수렴하고 사적을 모아 위에 아뢰겠다는 제사를 내렸다. 전주의 유생들은 같은 내용의 상서를 같은 달 순상(巡相) 즉, 전라도관찰사에게 올렸으며, 2년 뒤인 1829년에는 암행어사에게 올렸다. 그리고 1830년에는 전라도의 유생들이 함께 같은 내용의 상서를 순상에게 올렸다. 한편 1932년 이후로는 장유혁의 아버지 장문택(張文澤)의 처 구씨(具氏), 즉 위의 이씨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되는 장유혁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며느리와 함께 정려를 청하는 유생들의 상서가 전주와 감영, 그리고 암행어사에게 계속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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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송세호(宋世浩)의 처(妻) 유인신씨(孺人申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豊十一年十一月日 孺人申氏 咸豊十一年十一月日 哲宗 孺人申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여산송씨 송세호후손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7-01-000775 1861년(철종 12)에 철종(哲宗)이 유인(孺人) 신씨(申氏)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임명한다는 교지(敎旨). 1861년(철종12) 11월에 孺人 申氏를 淑夫人으로 임명한 敎旨. *추기: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宋世浩妻依法典從夫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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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박문언(朴文彦)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一月日 朴文彦 郡守 李範喬 光武六年一月日 朴文彦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박문언(朴文彦, 79세)이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에 朴文彦(79세)이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表. *주소: 全羅南道 興陽郡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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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송세호(宋世浩) 녹패(祿牌) 고문서-교령류-녹패 정치/행정-임면-녹패 同治二年十二月日 兵曹 宋世浩 同治二年十二月日 兵曹 宋世浩 서울특별시 종로구 行判書參議參判臣林[手決]參知正郞, 佐郞??李[手決]??李[手決] 兵曹之印(적색, 정방형) 고흥 여산송씨 송세호후손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7-01-000775 1863년(철종 14)에 병조(兵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송세호(宋世浩)에게 발급한 녹패(祿牌). 1863년(철종14) 12월에 兵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宋世浩에게 발급한 祿牌. *상태: 녹표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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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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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2년 송안오(宋安五)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一月日 宋安五 郡守 李範喬 光武六年一月日 宋安五 興陽郡守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송안오(宋安五, 62세)가 흥양군(興陽郡)에 제출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에 宋安五(62세)가 興陽郡에 제출한 戶口表. *주소: 全羅南道 興陽郡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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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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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72년 기우번(奇宇藩)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申正月二十一日 奇宇藩 安碩士 壬申正月二十一日 奇宇藩 安碩士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임실 관기 순흥안씨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1872년(고종 9) 1월 21일에 기우번(奇宇藩)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 1872년(고종 9) 1월 21일에 광양(光陽) 옥곡(玉谷)에서 기우번(奇宇藩, 1842-1872)이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안의 안석사(安碩士)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는 지난해 만났을 때와 다른지 궁금하고, 사두(沙頭)를 바라만 보았는데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져 오니 위로가 된다. 다만 상대방의 행차가 늦어 걱정이었는데 평안하다니 멀리서 기도하던 바였다. 상대방은 나이를 더 먹으면 한 단계 성장하는데 자신은 한층 누추해진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작년 겨울부터 몸이 편치 않더니 해가 바뀌어서는 의관이나 침식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뿐이라면서 날이 따듯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내준 물건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하였다. 기우번의 자는 진석(晉錫)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며 만연(奇晩衍)의 둘째 아들로, 우만(宇萬)이 그의 동생이다. 1872년 9월에 사망하였다. 옥곡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 옥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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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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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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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임인년 전치준(田致準)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寅二月十四日 標主 幼學 戚弟 田致準 壬寅二月十四日 田致準 田致準[着名], 林德默[着名], 宋仁燮[着名]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임인년에 전치준(田致準)이 작성한 표(標). 임인년에 田致準이 작성한 標. 선산이 있는 興陽縣 豆原面 鶴林里 古谷에 驪山宋氏의 묘를 조성하는데 60냥을 받고 허가했음을 증명함. *증인: 幼學 林德默 *필집: 宋仁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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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기유년 전태준(田太俊)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己酉二月初五日 標主 田太俊 己酉二月初五日 田太俊 田太俊[着名] 李鎭斗章(적색, 정방형)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기유년에 전태준(田太俊)이 작성한 표(標). 기유년에 田太俊이 작성한 標. 豆原面 鶴林里 古谷에 있는 묘의 石物이 무너졌기 때문에 석물 값의 30냥을 전하여 주었음을 증명함. *증인: 李鎭斗 *배면: 丁未十一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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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860년 이섭규(李燮奎)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豊十年二月初十日 李燮奎 咸豊十年二月初十日 哲宗 李燮奎 서울특별시 종로구 1개(적색, 정방형) 임실 범오 홍주이씨가 전주 덕진 홍주이씨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20-01-000001 1860년(철종 11) 2월 10일에 철종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돈녕부판관行敦寧府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60년(철종 11) 2월 10일에 국왕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돈녕부판관(通訓大夫行敦寧府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문신 품계이며, 판관은 정5품의 관직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붙였다. 돈녕부는 조선 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이섭규의 본관은 홍주(洪州)이며 자는 서오(瑞五)이다. 1817년(순조 17)생으로 합격 당시 임실(任實)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양부는 이병균(李秉均)이며, 생부는 이진균(李珍均)이다. 이섭규는 1852년(철종 3)에 식년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들어가 사헌부 감찰, 돈녕부 판관, 공주 진관, 장악원 주부, 상서원 주부 등을 역임했다. 그의 고신 12점이 홍주이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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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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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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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23년 류형업(柳瑩業) 서간(書簡)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月正念五日 罪弟 柳瑩業 癸亥月正念五日 柳瑩業 黃瑗 구례 오미 문화류씨 운조루 구례 운조루유물전시관 1923년 1월 25일에 류형업(柳瑩業)이 황현(黃瑗, 1870-1944)에게 안부를 묻고 소작증(小作證)을 전달하며 보낸 간찰 1923년에 1월 25일에 류형업이 石田 黃瑗(1870-1944)에게 안부를 묻고 小作證을 전달하며 보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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