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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송세호(宋世浩)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豊十一年九月日 宋世浩 咸豊十一年九月日 哲宗 宋世浩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여산송씨 송세호후손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7-01-000775 1861년(철종 12)에 철종(哲宗)이 송세호(宋世浩)를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임명한 교지(敎旨). 1861년(철종12) 9월에 哲宗이 宋世浩를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으로 임명한 敎旨. *배면: 兵政吏金鳳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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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송세호(宋世浩)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咸豊十一年九月日 宋世浩 咸豊十一年九月日 哲宗 宋世浩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여산송씨 송세호후손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7-01-000775 1861년(철종 12)에 철종(哲宗)이 송세호(宋世浩)를 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한 교지(敎旨). 1861년(철종12) 9월에 哲宗이 宋世浩를 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에 임명한 敎旨. *배면: 兵政吏金鳳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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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황헌주(黃憲周) 고신(告身) 1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十年三月 日 黃憲周 光緖十年三月 日 高宗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01 1884년(고종 21) 3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첨정(行訓練院僉正) 진무신영영관(鎭撫新營營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84년(고종 21) 3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첨정(行訓練院僉正) 진무신영영관(鎭撫新營營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어모장군은 정3품 당하관이며, 훈련원첨정은 종4품 관직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관직명 앞에 붙였다. 훈련원은 군사(軍士)의 시재, 무예(武藝)의 연습(練習), 병서(兵書)의 강습(講習)을 맡은 관아로 첨정은 이곳의 책임자였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황헌주는 조선 말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877년(고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강화도 출신이지만 1894년 동학 농민의 봉기를 계기로 전라도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1894년(고종 31) 4월 강화도 수비를 맡은 총제영의 중군으로 있었다. 동학 농민군 토벌 임무를 띠고 전라도에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증원군 파견 요청에 따라, 황헌주는 총제 영병 4초(400명)를 거느리고 4월 19일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출발하여 4월 23일 법성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4월 21일 장성 황룡촌에서 벌어졌던 경군(京軍)과 동학 농민군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에서 홍계훈 군과 합류하였다. 그는 그 뒤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9월 동학 농민군이 재기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해 겨울에 황헌주는 그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태인현 종송리(種松里)에 숨어 있는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男)을 체포하였다. 황헌주는 그해 12월 임실현감(任實縣監)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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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황헌주(黃憲周)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十年七月 日 黃憲周 光緖十年七月 日 高宗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01 1884년(고종 21) 7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 1884년(고종 21) 7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통정대부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근무일수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가자(加資) 또는 가계(加階)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녹봉(祿俸)을 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이때 황헌주는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김윤식(金允植)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도감동(都監董)으로 가자(加資)의 특전을 받았다. 『승정원일기』 고종 21년 3월 기묘일, 즉 같은 해 3월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부유수 김윤식이 장계를 올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황헌주를 영관(領官)에 임명하여 군무(軍務)를 감동(監董)하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아마 이때의 공적으로 황헌주는 가자의 특전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황헌주는 조선 말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877년(고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강화도 출신이지만 1894년 동학 농민의 봉기를 계기로 전라도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1894년(고종 31) 4월 강화도 수비를 맡은 총제영의 중군으로 있었다. 동학 농민군 토벌 임무를 띠고 전라도에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증원군 파견 요청에 따라, 황헌주는 총제 영병 4초(400명)를 거느리고 4월 19일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출발하여 4월 23일 법성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4월 21일 장성 황룡촌에서 벌어졌던 경군(京軍)과 동학 농민군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에서 홍계훈 군과 합류하였다. 그는 그 뒤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9월 동학 농민군이 재기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해 겨울에 황헌주는 그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태인현 종송리(種松里)에 숨어 있는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男)을 체포하였다. 황헌주는 그해 12월 임실현감(任實縣監)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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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谷遺稿序 聖賢之於傳道。其憂之也。可謂遠矣。姑以太極圖說言之。惟兩程得聞焉。吾於大谷之納涼私議亦云。蓋無極而太極一句。濂溪夫子說出人不敢說底。以開百世淵源。理一分殊四字。蘆沙先生看出人不得看底。以闢諸家繳繞。向所謂私議者。爲是而作也。而金錫龜鄭載圭鄭義林三子者與有聞焉。大谷卽錫龜之號也。蓋人物之性。湖曰異。洛曰同。而其以理一屬之理。分殊歸之氣。則同一關棙也。蘆沙先生之言曰。分非理之對。分殊二字。乃對一者也。發前未發。折衷群言。非是之謂歟。然則雖謂三子者之於私議。亦猶兩程之於太極。未爲不可也。不寧惟是。蘆翁嘗許大谷曰。夫人不言。言必有中。觀於所編師門問答一書。可見矣。其雅言亦曰。職未辭之前。君命恒在我身。未死之前。天命亦在我。如視聽言動。皆天職之縻我者。忽之於此。則非知道者也。若公者。眞可謂嫡傳於蘆翁。而觀於此言。亦見其發未發之一端矣。嗚呼。天之生是師是弟。而有所授受。亦豈偶然乎哉。苟能不私一家之見。而公天下以爲心。則始信吾言之不誣。而其蘊奧。則有兩賢遺集。在百世之下。知言者知之。山石子金君顯玉。於公同姓又同門。蓋嘗編輯遺文。而公之族人昌宇昌玟。與其門人奇東老李學淳。將刊行于世。問弁卷於余。請書此以爲之序。上之三十八年歲次辛丑至月日。月城崔益鉉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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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閑 日晏虛堂和氣多。東風無際竸年華。溪柳林花在在好。百般春意一般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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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月 先天明月滿空山。人坐窮廬分外閑。眼前物物皆奇玩。疑是蓬萊在此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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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夜 閑中夢罷武夷仙。特地氷壺月萬川。淸虛一氣無邊畔。半夜精神太古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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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寂 遊客年年賤且窮。此時此意與誰同。自笑由來還自慰。終朝山色水聲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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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吾南致容【漢燮】 向拜得於忽遑之中。未得穩承緖論。以滌塵冗。而且賤軀方在痛瘧。未覺尊駕之南歸。不得以拜別。悵然如結。不能以已也。曾聞於士友間。皆以爲今日南州高士。惟有吾南金丈。而知見之崇博。踐履之篤實。無愧於古人。倡學南方。多士受業。蔚然有興起斯文之漸。而吾道不寂寞矣。區區每欲納拜軒屛。得陪一夜之款。以爲十年之讀。而顧此愚陋。耳目聾瞽於內。身已蹩躄於外。末由償志。是知獲拜有道。亦有數存。徒切景仰。伏惟卽間日氣漸熾。德業有相。尊體崇安。錫龜本以下鈍之根。才氣昏濁。見聞孤寡。坐在黑窣窣地。枉費時日。外馳心志。於窮格存省之功。未嘗一日着力。而日用常行之道。未有分毫得力。在人指目中。三十年半上落下。滅裂鹵莽。蒲柳之質。未老先衰。鼎器已弊。補苴無策。永作無聞而歸。則決矣。但欽仰有道者。一念未嘗不耿耿於明滅之中。如蒙高明之不遐不棄。因風垂誨。以爲下駑之警策。而庶幾一步之進。則愚生之幸。孰有甚焉。餘惟臨風悵望。企祝循序增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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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月坡伯彦【時林】 向於抵書墨溪便。兼封一幅。仰塵尊鑑。想已入照矣。際玆歲色垂窮。經候百福。德業日懋。回顧此世。特立獨行如吾兄者。幾人也。其窮益甚。其志益固。足令吾黨增氣。仰賀仰賀。弟慈幃常在欠攝。伏悶。賤軀三年痁瘧。日與撕殺。雖其氣焰不如舊時之熾。自家氣力。摧剝日甚。難於抵敵。身計無端。虛度少壯時節。雖有一念耿耿於明滅之中。而振發無策。坐見歲月如駛。可歎可歎。士不幸而不生於洙泗之門。幸生於程朱之門。又不幸而不生於程朱之門。幸生吾先師門下。而如錫龜者。出入門下。不可謂不久矣。但朽木非時雨之所化。未有所聞。奄遭山頹。撫躬自悼。罪咎山積。每欲向同門先覺如老兄者。合席聽緖論。以爲桑楡之計。亦未之得。奈事不從志何。尊兄姿質深沈。志氣剛猛。心地細膩。益加勉旃。仁聲所及。如錫龜者。聞風而有所興起。則頑廉懦立。不啻在百世之下。聞百世上人而已。是或爲振作之一道耶。雖不面承提喩。受賜弘多。是企是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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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月坡 日月迅駛。先師終祥已過。罔極之痛。兄我何殊。更伏問履玆新元。兄體崇安。盛工日新。仰溯不任。弟親候常奄奄。私悶。身家自昨年七月。困於瘴瘧。今尙圉圉苦哉。離群索居。心地益蕪。志業益頹可歎。先師文集開刊。係是斯文大事。吾儕當均齊用力。而如錫龜者。心力俱短。未有分毫之助。吾兄高明精微。不得不賁臨看檢耳。設役自今月十六日始。已聞知耶。兄問目冊子。厚允歲末袖來。今留置月松爾。同門俊譽。能文章有器局者。何限。而迂疏乖拙。不得齒數於衆人。惟兄與季方及弟耳。同病之憐。豈他人比也。奉拜動經歲年。世故之沮戲人事。果若是耶。餘在早晏奉候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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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舜卿 向拜只看面貌。別後悵然與未拜時同。瞻望耿耿。徒勞我心。恭問天序變換。侍中棣候。茂膺萬祉。溯仰區區。盛工想於力行之餘。讀書窮理。足目俱到健羨。天理無一日間斷。吾道無一時空闕。若於一日不有一日工夫。一時不有一時工夫。則吾事敗闕。塡補無期。此古人所以孜孜勉勉。不敢少懈。願當惜時日。無或虛度也。吾兄豈待人言而知此。但恐不如枉過一生。悲歎窮廬底人。知之甚審。故妄語及之。弟親候常凜綴。私悶。自家亦以瘴瘧餘毒。眼昏氣顫。精神㬻。長在身熱頭痛坂上苦哉。會一兄正月二十四日。遭季弟喪。今初三葬于家後。情境不忍言。兄已聞之否。想不能無驚怛之歎。餘祝侍下隨時康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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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氏派譜跋 右我曺氏世譜。所譜止於直學公一派。直學派之於全曺。一支也。雖然賴此而吾一派明吾所本。非徒一派之見存者明吾所本。而子孫之繼今而生者。亦得以明其所本。則古人所謂孝悌之心。油然而生者。不待求之於全譜矣。豈非幸耶。第所慨恨則有之。吾曺全譜。凡三四修。而出於丁亥以前者。今皆編帙散逸。丁亥譜時。吾五代祖同樞公。實主吾派之事。鳩財收單。勤勞備至。而以居地之僻遠。竟致單子之後於剞劂。僅爲編末之錄。此同樞公未了之志事也。今日則全譜分爲派譜。嗣是而復爲全譜。未可期也。始親漸疎。理數之必至。亦將如之何哉。毅坤以眇末。猥當校正之事。略識所感於末端。以竢後之續修者考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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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畏隱齋【梁永漢】家訓詩帖後 梁生子克。從吾遊年所。示余以長篇詩三十二句。乃其王大人畏隱翁拈出古詩中四八字句。附成詩。訓其家庭也。余素昧於詩。詩之工拙。雖不敢妄評。而玩味其義。無非警策人語。足見立懦之風。不覺斂衽。噫。近世衰薄。年力富强之人。鮮有有志於此。而始或有之。克其終者。亦幾希。畏隱翁年邁昃嗟。深恨聞道之不蚤。而俛焉孶孶。又以其出於情性者。欲仁其家而勵後孫。尙悳哉若人。矍鑠哉是翁。翁以是傳之子。子以是傳之孫。奕葉勿墜。則將見不食之果矣。其爲肯構也。孰大於是。余感其志而書其尾。以付子克。子克勉之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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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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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上箚錄【遺稿將梓。就箚錄中。拈出師席訓誨言行答問及他藏否之及於耳目。足以勵世者分爲四彙。編之卷後。其餘隨聞雜記。以備遺忘者。亦不爲無助於後輩。而稍涉繁冗。故淨寫以藏其家云。】 余初名以溢。蓋惑於造名之說也。日先生問余名何以溢。爲器滿則溢。溢非嘉字。余以實對。先生哂曰。造命禍福之說。豈有是理。宜取平正字名之。余歉然而愧。幡然而悟。請名焉。先生曰。若從水邊。則洛河漢等字。皆可也。取洛字爲名。因問名以洛。旣聞命矣。字當何爲。先生曰。初字云何。曰士弘。先生曰。洛出書洪範作。代弘以洪。無妨乎。他日先生於人書牘中。見余字。因曰。士洪是子之字耶。有任士洪者奸人也。見之輒覺礙眼。初未之思也。因請改之。先生拈出敍九二字命之。蓋以禹敍九疇。應洛字之義也。余自後於術數之說。不之信焉。噫。先生敎術不一。每對人諄復剴切以義喩之。類如此。君子愛人以德。信哉。稟於先生曰。小子柔有餘。而毅不足。請改名以毅。以爲顧名思義之資。先生曰。可也。士弘二字。亦合乎。先生曰。子之齒幾何。對曰。三十有五。先生誦離騷經日月忽其不淹兮。春與秋其代序。又誦古詩請君莫惜金縷衣。請君須惜少年時。又曰。士弘乎。耳目非不聰明心地非不正也。年近四十。如無所成名。可不惜哉。此宜所警省處也。問書法。先生曰。程夫子與人書云。曾見有善書者知道否。蓋言專攻乎此。則有不暇及他故也。又曰。學書者。日書百字。不如此。便不熟。是豈易言哉。但儒者書拙構。何傷乎。又曰。尤庵先生。初不藝於書。日謁愼獨齋。適有人印七書。請書題目。顧謂尤庵曰。君若善書。可代此勞。尤庵退以葛筆習書於庭畔石面。法旣就。謁愼齋。印冊尙在。請書題目。愼齋哂之。遂抽筆書之。筆法甚健古。愼齋許之。先生發此言。以手畫地。作揮灑樣。甚有筯力。若目覩焉。余與晉錫侍先生。先生曰。爲男子處世。雖泰山崩於前。色不變。麋鹿興於左。目不瞬可以濟事。先生曰。世間橫逆之來無限。纔聞逆耳之言。便塞胸臆。安能處事得宜哉。又曰。責人過。吾當先立於無過之地。然後。可矣。若自身先立於汚穢之中。而責人之不潔。可乎。蓋有爲而發也。先生曰。敎兒若泰和家兒。則可敎也。長子子每受書退讀。有疑晦必發憤。少子子窮尋細究云。余曰。小子自兒少時數十年工夫。都歸虛事。先生曰何。對曰。但隨敎隨讀。無一分商量意思。旣長。强引思索。每欲細究。則未及解得。便覺煩鬧。先生然之。先生曰。士弘乎。世間疑事。亦多般樣子。無疑問。得非少思量乎。對曰自知病根在裏許。而改之未能。敢問如何。則祛此病乎。先生曰。磨劒必以礪。非礪而望其鋒者。末矣。古人之書。其吾心之礪乎。先生曰。人有思索而後有成。余對曰。思索亦屬於才也。曰。然。子見蘇君明乎。曰。未也。曰。斯人也有思量才。孶孶焉須臾不忘乎思量。吾見斯人也。不幸短命死矣。又曰。三嘉鄭生載圭。慧而多思量。其有望乎。先生曰。士弘乎。敎與學相長。不其信乎。此雖小事。輤之爲載柩車。蓋因敎賢而詳乎。輤倉甸切。音倩廣韻載柩車。蓋禮雜記。諸侯之輤有裧。大夫以布。士以葦席。註輤載柩。將殯車飾也。殯謂之輤。葬謂之柳翣。玉篇或作倩。集韻通作?。先生問。業何書。未及對。先生曰。大凡看書。常須照顧後面。頃年鄭載圭問讀書法。吾答凡看文字。常須照顧後面。切忌貪前云。若閱眼忘了。如老人破寂樣。則末矣。先生曰。國有大慶。慶科將設。有觀光意否。對曰。淡淡。先生曰。同慶之義。不可坐定。所欠者裹糧也。是夜未半。先生起坐曰。士弘乎來。凡科宦。孰不欲。雖至愚者欲之。至奸者欲之。能安分竢命者。其惟哲人乎。向也予言淡淡而吾言似謾沖起。心有所不安。故復告賢也。對曰。非安分竢命。自知所持者挾。不足以耀人眼目。必無可得之理。故意思從以淡淡。非本無欲也。豈敢曰安分也。先生曰。自知其不足。不妄生意思。便是安分。惟賢所安。先生以朱夫子答孫敬甫書示之。卽論山家說也。蓋其議論。參酌節中。過者抑之。不及者引之。使人觀之。足以爲懲爲法。先生問曰。子多夢乎。對曰。不多。或有之而不能記。先生曰。心地恬淡。自然少夢也。先生曰。士弘乎來。進就底人多思想。凡進就之工。自思念中出來。朱夫子感興詩云。玄思徹萬微之句。亦可見其思想也。余自少時。性多思想。或終夜不能眠。食不甘味。反覺苦惱。乃以强制己十年矣。又曰。吾之發此言。非他。子有志於學有年。而思想不多故也。先生曰。人之有文名。甚不幸。余對曰。自古英雄烈士大人君子。豈有不文而聞人者乎。先生曰。爲士者。博古通今。免無識則可矣。文名則不可。子聞諸葛孔明范文正公有文名乎。然而下筆便成珠玉。如此方可。昔劉摯云。一號文人。餘不足觀。許衡謂姚燧曰。非其人而與之。罪也。皆爲此也。吾於人無所恩怨。而每以文字多見負於人。若非此名。豈至於此。先生曰。士弘乎。試問太極之理。立於陰陽未行之前。陰陽之氣。行於太極已立之後。此說何如。余起對。小子未有宿講於此。雖不敢倉卒答述。而以臆見料度。則太極中已自有陰陽。而陰陽亦不離於太極。則太極與陰陽。恐不可以先後論也。若如此說。則是今日有太極。明日生兩儀。又明日生四象。而乾坤或幾乎息矣。似不成說。未知何如。先生曰。子之言雖未瑩。似近之。因曰。綾州文生年纔十八。以其所記來示。乃一幅長書也。輒看第一起頭有此語。余不復掛眼。責而歸之。【已上十七條。記先生敎訓及答述。】丙寅九月。洋夷犯江都。人情汹汹。余時陪先生。李南坡孝一氏亦在座。時前兵使李承淵。奉命南下。號召義士。使人請檄文於先生。是夜夜將曙。先生曰。起起孝一乎。余夢與人過靑嚴驛。其人落後。且呼且行。忽有一人牽黑獸而至。視之脅折而肺肝露。怪問曰。何獸也。曰。羊也。夢也不偶。子其占之。南坡曰。洋其滅乎。洋登陸失水則羊也。脅折而肺肝見。羊其死乎。先生曰。然。吾亦以爲然也。洋之所爲。如見其肺肝。然彼必不能肆其伎倆乎。不幾日。鼎足一捷。江都復淸。噫。自洋夷之侵擾沿海。先生寢食不自安。對人輒告以洋夷之凶醜。且有爲文召同義之擧。聞召募使南下而止。以其文小改其末段。應召募使之請。蓋其忠義所發。滅洋之兆。已驗於夢寐也。先生曰。秋收橡子讀書者。世或有之。蓋歎時人食粟而不能讀書也。先生敎人書法曰。以指書之。不以臂。以毫體畫之。不以毫端。此所以不成也。先生則操筆。必擧肱不貼地。戊辰冬至夜。先生曰。起起士弘乎。新陽已回。吾年已七十二矣。少孔子一年。多朱子一年。因問子之親年幾何。對曰。六十八歲矣。氣力何如。對曰。自來康健矣。年來衰敗特甚。先生曰。七十老人矣。安得不然。親年益邵。爲子者誠爲可喜。而年迫朝暮。寧不可懼乎。先生敎訓諄切。無所不至。見爲子弟者。則勸以孝弟。爲學業者。則勸以文學。爲産業者。則勸以作業。見年少輩。則必戒以酒色。常曰。雖非現然爲祟。已自津液涸渴。精神耗損。受傷多矣。纔被他所祟。浸成難救之症也。先生曰。古人於無可奈何處。必曰命。今人於禍福。必曰山驗地理。非曰無有。而先有天理然後。地理隨之。若掘親骸。累年不葬。妄求福地。以覬其驗。則天理已違。安有地理。蓋時有如此者。故發之也。先生曰。凡父母之喪三年後。緬禮尸柩。當奉于其家。如初喪時。朝夕哭上食。但設虛位可也。今人拘於俗忌。或尸柩過門不入。而殯于山野。經宿乃葬。其可乎。先生曰。大舜好察邇言。顔子以能問於不能。以多問於寡。諸葛孔明曰。諸有忠慮於國者。但勤攻吾之闕。則事可定。賊可死。功可蹻足而待矣。自聖人以下。常有自不足底意。然後方寡過。又曰。人常自以爲不足。則萬善從此生矣。自足則知日蹙矣。先生曰。吾聞諸泰和。素灘有金氏兄弟。光山人也。家貧分居。兄之田未糞。不敢先己之田。耕耘收穫。亦如之。兄有田而欲賣之。聞之賣己田而止其兄。凡事繫其兄者。無不盡心努力。此可謂天性也已矣。先生曰。余小科時。監試官柳楚山致明。會試官洪相奭周也。且曰。洪相爲雜科試官。副試官將有所私。而洪秉公不敢犯手。思百端不已。直告于洪。洪不答。小頃謂曰。同爲試官。我獨賢勞乎。因推委之。副試官遂容其私。洪不犯自家手。時人謂之難。蓋有爲而發也。先生召其孫宇萬曰。祖先文字。留子孫家。以爲子孫觀。未爲不可。切不可刊行于世。辱先大矣。何者。今俗有祖先文字。則刊板爲多帙。無論知不知家。皆送之。受以爲壁塗者。吾嘗目焉。秤重而送紙房。作還紙者。吾亦耳焉。此皆非君子之所爲。而槪不如留子孫篋笥而自珍之爲愈也。丙子正月二十五日。先生遭子喪。着平凉子。布纓衣中單絞帶。二十七日小斂。先生曰。得無速乎。吾聞古人有四日復生者矣。一日扶杖登古城峯。營掩竁也。顧謂宇萬曰。吾於無遑未及矣。乃以北布製中單耶。此乃南中人之華服也。當喪者。豈可服乎。如有生綿一端。則更製可也。奇正言陽衍免喪後。其親盡神主。將遞遷于先生宅。以長房也。先生將秖迎于中路。着黑笠。衣布道袍服帶。出門外數馬場。諸行當到。先生小止。轝者伏地再拜。因隨行從者請乘轎。先生不許。至家行祭。更無告辭了後。巾服乃復如初。先生遭服。常着布巾。遂發頭風。至於喎斜。更着布梁冠。正月以來。倭擾汹汹。先生雖在憂慽之中。不勝憤惋。逢人輒語到。辭色必勃如也。一日座首李一煥來謁。先生又問時耗如何。李答。近聞倭下陸已多日。自廟堂和論流行。而但順適其意。日日饋餉。至於以我人爲倭供薪水之役。聞之不覺氣塞。先生曰。今日始聞快心語也。人不當若是耶。蓋傷恬戲日久。賊情方叵測。人無敵慨之義。而晏然如處堂之燕雀也。先生曰。中國人素該音律。故出言屬文。文從字順。無不諧音。所以詩文雖得刱出。亦皆合律。東人不解音律。故但效華人文字耳。先生曰。人必多與於人。方是做好人。於德操文饒。跡其數件事。則餘可類推。若不如此。豈足爲二人。司馬徽德操。襄陽人。嘗有人亡猪。妄認徽猪便推之。後得亡猪。以猪還。因叩頭自責。徽厚致謝。劉寬文饒。弘農人。嘗行。有失牛者。乃就車中認之。寬無所言。解與之。下車步歸。有項。認者得牛還。叩頭謝曰。慚負長者。隨所刑。劉曰。物有相似。事容脫誤。幸勞見歸。何爲謝之。先生命其孫宇蒙曰。拜始於鞠躬。非始於跪膝。故肅拜與公拜。唱笏鞠躬拜興平身云。今人拜時。先跪膝後拜首。殊失拜儀。仍起躬拜示之。且敎曰。拜時爲先鞠躬義手。却先據地。脚不要跪而自跪。且拜不容不速。不可緩慢也。先生喟然發嘆曰。善乎任丈之觀化也。余對任丈之春秋。尙未洽七旬。而且其家事聊落。豈曰善乎。先生曰。自今以後。喜怒哀樂都不知。寒暑飢飽亦相忘。豈不善乎。坡詩云。大患由有身。古詩云。蓋棺事已定。蓋棺已前。百事終未定貼。而以後方見都無一事。先生曰。趙重峯家貧好讀。牽犢而牧。必抱書隨讀。親堂然柴。亦照而讀。若是則貧如人何。且曰。自古賢儒。稟得一種別性。重峯幼時與兒輩。戽野水將捉魚。水未涸日已暮。諸兒皆散歸。獨重峯涸水得魚。此在通津時事。後居湖中。出入必載松明而行。止宿處輒燃而讀書。一日夜逢一人語曰。子見擊蒙要訣乎。曰。未也。曰。爲士者。可不知乎。卽夜燒松。書而與之。以凡人之性。豈如是乎。先生曰。商辛以天子爲象箸。箕子嘆曰。稱此以求。雖天下不足。漢文帝欲起臺。謀諸工。工曰。可費百金。帝曰。百金。中人十家之産。遂罷之。又聚上書囊以爲帷。曹操雖小兒斥以巧詐多謀。而及其卒也。史述其行曰。軍勞宜賞。千金不惜。無功妄施。一毫不與。宋仁宗夜思燒羊。欲求之。復止之曰。如是則天下受其害者必多。此皆帝王家謹財用。猶如此。楊萬里之子長孺。號東山。爲河南刺史。仇泰然爲四明太守。泰然才識了了。每與欣接。一日泰然言家用不贍。東山怪然曰。方爲外任。何用不贍。泰然曰。食口四十餘。每日晩飯具小肉。夕不具肉。猶爲不足。東山曰。我爲刺史。有不能食肉。子爲太守。猶食肉耶。遂疏泰然。今之人無捧祿。而或有殺牛置酒。無事燕樂。可惜。先生曰。人若要快心。後必有殃。且曰。昔郭子儀威權莫比。時盜發子儀父塚。捕之不獲。人以魚朝恩素惡子儀。疑其使之。子儀入朝。朝廷憂其爲變。及見上。上語及之。子儀流涕曰。臣久將兵。不能禁暴。軍士多發人塚。今日及此。乃天譴。非人事也。朝廷乃安。亦有爲而發也。丙子十二月五日曉。先生曰。起起士弘乎。夜夢作歌三闋。只記得首句曰。功名도너ᄒᆞ여라。豪傑도나스르여。語短意長。天然成章。無乃吾命辭歟。對曰。此闋深寓避世之意。乃先生志事也。因請足成。先生曰。恐製作之不似天然耳。俄而續之曰。門다드니深山이오。冊펴니師友로다。오라난ᄃᆡ업건마난。興다ᄒᆞ면갈가ᄒᆞ노라。【已上二十三條。記先生雅言及庸行。】問今云壬辰後。始有倭關是否。先生曰。壬辰前已有之。蓋兩國關市處也。今雖朝籍之士。或不免於云云。一笑。又問俗行壬辰錄。多有不經之說。似是好事者爲之。先生曰。若據此而爲言。則烏得免無識也。因言日本大姓膝橘源平。所以關伯不出此四姓。秀吉非平氏。而因冒托爲關伯。又所謂小西飛。卽姓小西。而守飛彈也。故謂之小西飛彈守。而俗訛如是。又有要時羅者。倭國諜使也。今云要時郞者。亦俗訛也。問大練之練。先生曰。麤帛也。因問於何見之。曰。於馬后事見之。又曰。此后甚賢。明太祖后馬氏亦賢。奇事。問我國有關王廟。未知何也。先生曰。關王。中國人皆尊崇之。至有疾病亦禱之。海商船入。抱塑像而行。故天將始出我國。立廟於京城東門外。劉綎於南原立之。陳璘於水營立之。蓋欲祈福勝戰也。問今人有役鬼之說。往往有學之者。似甚無據。先生曰。此或有之。康節云。鬼之畏人。有甚於人之畏鬼。凡人爲善。則陽日盛而鬼畏之。爲惡。則陰日盛而鬼狎之。詩云。神之格思。不可度思。矧可斁思。殷人尙鬼。皆敬畏鬼神。今人不知有鬼神。若使知有鬼神。則必不甚作惡。問沙麓。先生曰。春秋書沙麓崩。以爲災異。漢孝元皇后王氏。生沙麓之下。漢儒以爲沙麓之崩。應今日沙麓之慶。問或云朱夫子九遷其墓。是否。先生曰。否。恐至三矣。問京在所。先生曰。古有其制。如今留鄕也。蓋以朝官中姓貫於此鄕者爲之。如安東京在。則安東金氏。爲之類也。問古有戊巳校尉。戊巳何意歟。先生曰。干支各有定位。而唯戊巳則無矣。校尉亦有定數。而此校尉在定數之外。若方位之戊巳歟。問近來人家有神主繼后。何如。先生曰。子不看買土買婢乎。新主舊主對坐。與之受之而後可也。繼后何等重事。而以黃泉冥漠之魂爲之乎。與之者誰。受之者誰。古有冥婚。何異於是。問性情意義。先生曰。性字看其爲字。則可知也。從心從生。是心之生理也。余曰。性之爲生理。旣聞命矣。情字從心從靑。豈非生理之發者爲苗之靑者乎。先生哂之。問今俗於昏家稱査。或稱記下。未知如何。先生曰。査字無出處。乃俗稱也。記下之稱。似無不可。又曰。梅山丈於其繼母之父。稱侍生云。余對爲汲也妻者。爲白也母。則雖繼母之父。直稱侍生。似涉未安。先生曰。直敎嘗以此問余。答何叔京非鄧氏外孫。而稱鄧舅。則以此推之。似不可以侍生自稱。且服制與稱號。亦相不同。旣爲其母之黨。則不爲繼母之黨矣。又問爲其繼外祖者。亦當何稱。曰。以尊侍禮處之。不可以外祖自處也。問幼而不能服其母之黨。長而遭繼外黨之服。服之否。先生曰。雖外黨。禮無二統。幼而未服。與服何異。問婦人不得已主祭。則改題當如何。先生曰。夫之祖父曰大舅。曾祖曰曾大舅。高祖曰大曾大舅。因曰。妻之祖父。稱外大舅。自稱彌甥。問孟子曰。乃若其情。則可以爲善也。又曰。若夫爲不善。非才之罪也。不言性。而言情與才。何也。先生曰。性者無形可據。故言情與才。以其形著而然也。問井田畝。先生曰。廣一步長百步爲一畝。百畝則長廣皆百步。以今較之。似優數石地。問延年仕宋。恐非淸流。淵明友之。何歟。先生哂曰。此事甚難。在晉名士頗多。惟不仕。稽康阮籍若箇人而已。問駔僧俗音低快。何如。先生曰。古音長灰。當以古音爲正。因敎凡字之音。多不可從偏傍解之。詩不云乎。以薅荼蓼薅音好。心嘗疑之。近按說文。薅字從女。是好者省。故音好。可呵。問書多方。陳新安疏所謂成王政序。多方序何在。先生曰。成王政。是逸書也。無其書。而篇名則傳之。序卽小序也。朱子已刪定。故今不載見耳。問有族人身死無子。只有老母寡妻。議立后而無許入者。取降族家兒繼之。今年將冠。諸議以爲不可升孼爲嫡。固知此議之無據。而喩之莫曉。奈何。先生答。其云不可者。使無所歸之窮人。必絶其香火然後。快於其心乎。問書云。天惟時求民主。乃大降顯休命于成湯。刑殄有夏。又曰。非天庸釋有夏。非天庸釋有殷。又曰。天惟式敎我用休。簡畀殷命。天旣降休于成湯。殄滅有夏。則恐不可謂非天庸釋有夏。式敎周王。畀付殷命。則亦不可謂非天庸釋有殷。但天道爲福善禍淫之理。而惟在自取之如何。且庸字有心之謂。則非天偏有心之謂歟。先生答。此說然。問喪禮云。姑母之子曰外從。表叔之子曰內從。此從內外親之屬之意。而俗則反是。先生答。俗稱果相反。問母之兄弟曰內舅。亦內親之屬而謂歟。表內之意相反而同稱。未解。先生答。對父族而言。則凡異姓皆外也。而異姓又自有內外。問妻之父曰外舅。自稱曰外甥。外字初無親屬之分。而以其相外之義而稱歟。舅甥之說。亦無所據。而或云朱文公與蔡沈。以舅甥而爲翁壻故云是否。先生答。外字所以別於內舅。或說非也。問逸民不言泰伯大連。小大連先小後大。何也。先生答。泰伯之不言於逸民。泰伯君於句吳。不可謂逸民。不言大連。未詳。小大先後。或有俗說。而不見的據。問詩鳥覆翼之覆字反切。與今行諺解不同。先生答。反切甚當。諺解之音不可曉。叶音乃古韻。今音不用。問易三十六宮。先生答。三十六宮之說。有數般。而其不易反易之說。最明白。蓋六十四卦。不易者乾坤坎離中孚頤大小過八卦。其外五十六卦。乃二十八卦之反易也。合不易八。爲三十六。六十四卦。其實三十六宮而已。問周尺著於圖式者。長短不齊。當誰適從。先生答。此非攷定鍾律。則長短不必深計。但以廟中前代神主爲準。使無長短不齊之患則可矣。問內艱陷中不書貫鄕。而今多書之。有第幾而今則不書。先生答。陷中貫鄕。俗禮之無妨者也。第幾。其族中行第。今俗所無。不必論。【已上二十八條。記問答】奇慶衍知其安穩平淡。又有志於學勤篤甚。先生每稱之。及丁憂。不食肉醯。與人言。未嘗見齒。其天性篤至。豈易得哉。時年二十六。眞畏友也。同副承旨崔益鉉上疏略曰。三公六卿無建白之議。臺諫侍從避好事之謗。朝廷之上。俗論恣行而正議消。諂佞肆志而直士藏。彛倫斁喪。士氣沮敗。賦斂不息。生民魚肉。以致天災見於上。地變作於下云云。聖批優容。至有戶參除授之命。以彛倫斁喪四字。大臣聯箚。三司交章。泮儒捲堂以至前啣散官。攻崔日急。竝皆嚴譴斥罷。玉堂權鼎鎬於經筵奏對之際。極口巧辭。百道攻崔。小人陷人之情狀。醞釀平日者。綻露無餘。聖敎有曰。漢之汲黯。至有陛下內多慾而外施仁義之語。今此崔疏。有何過重哉。毒藥苦口利於病。忠言逆耳利於行。若鞫如此忠直之人。則載之史冊。天下後世。謂我何如主耶。司諫吳慶履。修撰權益洙。上疏言事。末攻權鼎鎬。上嘉納焉。權鼎鎬卽命刊削。時論快之。戶參崔益鉉又辭疏。尾伸前疏未盡之意。凡六條。復廟設院罷胡錢息賦斂禁鬼神出後追律國賊。辭甚切直。不避時諱。疏將上。告其父。父曰。自爾登第之日。委身於君。事君盡忠。更復何言。乃謂其子曰。吾呈此疏。首領難保。語到身後事。其妻曰。丈夫爲國盡忠。死猶榮焉。更有何瑣瑣身後語效兒女之爲也。乃決意呈疏。待罪樓院。疏上有多有語逼之批。攻箚劾章。急於向時。不得已有拿鞫竄配之命。就鞫上使武臺監視。蓋慮其有酷刑也。纔施刑。卽命撤鞫。方其囚禁府也。其子待罪門外。日寒甚。廛人各以裀席覆籍防風。又買溫湯饋之。相續於道。及其發配也。餞迎擁路。自是言事。投疏相繼而起。崔實倡之也。掌令洪時衡。繼崔上疏。切中時弊。上嘉納。卽除修撰。有一臺諫構誣疏。沮以爲洪宰康津時。父死不發喪。幾日磨勘云。蓋應署吏詬罵之說也。洪時衡之父。死於康津。洪以箋文使赴京。返至公州聞喪。噫。古有讒第五倫笞其婦翁者。何代無賢。司直洪萬燮上疏。以爲崔益鉉其家傔之外戚。家世寒微。而揚揚於士大夫之列。噫。崔乃孤雲之後。文獻可徵。而構誣如是乎。設是寒微。寒微者不得正言直諫乎。渠以不寒微而所言乃如是乎。曾有權貴者之妾。祈子于名山。而洪隨跟而至。遙立十步許。彼一拜。已亦一拜。祝曰。願使此夫人生好男子云。竟取富貴。其汚行素如此。聖敎與奇趙竝稱。不可以人類責之者。可見魑魅鬼蜮無所逃於白日之下也。趙愿祖竝攻崔洪。辭甚醜陋。槪與萬燮一口也。會一進士。今番慶科東堂將左赴束裝矣。左試官韓章錫。歷謁先生。會一謂有隨行之嫌。更赴右策土場由。府內人張文逸請小間。會一曰。有所欲言則言之。何必屛人。張曰。今幕裨聞執事綴策如流。願一見之。而不能造館者。恐礙人耳目。請屈營下不敢望也。所以坐鄙舍要見之以僕紹之云。會一遜辭謝之。張固勸之。會一曰。吾無片技寸長。誤承垂勤。愧恧不勝。且以應試之士。往見幕裨。恐非體面。善爲我謝之。竟落山外人或惜其未參。余曰否否。會一之此一事。足以激厲一世。以正士習。其得失豈足欣戚哉。顧此世降。士習浮薄。狗苟而蠅營。得之則喜。非但自喜之也。相知者亦爲之喜。不得則憂。非但自憂之也。相知者亦爲之憂。擧世滔滔。莫知爲非。哀哉。奇正言陽衍。出仕路而不失讀書時氣像。余甚敬之。南坡李丈。年洽八耋。嗜書如土炭。對冊必整冠端坐。不以老少懈讀了。亦必奉于尊閣。正其部帙。不使亂錯。嘗曰。夫聖賢之書。其可慢忽乎。其抱負甚博。先生每許之。【已上八條。記藏否得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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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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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附錄 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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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鄭周允贈別 吾輩常戒謹。毫釐或差移。譬若一點錯。誤了全局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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