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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이섭규(李燮奎)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十四年六月 日 李燮奎 光緖十四年六月 日 高宗 李燮奎 서울특별시 종로구 1개(적색, 정방형) 임실 범오 홍주이씨가 전주 덕진 홍주이씨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20-01-000001 1888년(고종 25) 6월에 고종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감찰(行司憲府監察)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88년(고종 25) 6월에 국왕이 이섭규(李燮奎)를 통훈대부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문신 품계이며, 감찰은 정6품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붙였다. 사헌부는 감찰 행정을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감찰은 관리들의 비위 규찰, 재정 부문의 회계 감사, 의례 행사 때의 의전 감독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이섭규의 본관은 홍주(洪州)이며 자는 서오(瑞五)이다. 1817년(순조 17)생으로 합격 당시 임실(任實)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양부는 이병균(李秉均)이며, 생부는 이진균(李珍均)이다. 이섭규는 1852년(철종 3)에 식년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음관(蔭官)으로 관직에 들어가 사헌부 감찰, 돈녕부 판관, 공주 진관, 장악원 주부, 상서원 주부 등을 역임했다. 그의 고신 12점이 홍주이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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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황헌주(黃憲周)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九年六月 日 黃憲周 光緖九年六月 日 高宗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01 1883년(고종 20) 6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선략장군(宣略將軍) 행훈련원판관(行訓練院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83년(고종 20) 6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선략장군(宣略將軍) 행훈련원판관(行訓練院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선략장군은 종4품 무신의 품계이며, 훈련원판관은 종5품 관직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관직명 앞에 붙였다. 훈련원은 군사(軍士)의 시재, 무예(武藝)의 연습(練習), 병서(兵書)의 강습(講習)을 맡은 관아이며, 판관은 행정실무를 지휘,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과 군정에 참여하였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황헌주는 조선 말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877년(고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강화도 출신이지만 1894년 동학 농민의 봉기를 계기로 전라도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1894년(고종 31) 4월 강화도 수비를 맡은 총제영의 중군으로 있었다. 동학 농민군 토벌 임무를 띠고 전라도에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증원군 파견 요청에 따라, 황헌주는 총제 영병 4초(400명)를 거느리고 4월 19일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출발하여 4월 23일 법성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4월 21일 장성 황룡촌에서 벌어졌던 경군(京軍)과 동학 농민군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에서 홍계훈 군과 합류하였다. 그는 그 뒤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9월 동학 농민군이 재기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해 겨울에 황헌주는 그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태인현 종송리(種松里)에 숨어 있는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男)을 체포하였다. 황헌주는 그해 12월 임실현감(任實縣監)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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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황헌주(黃憲周) 고신(告身) 3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九年十二月 日 黃憲周 光緖九年十二月 日 高宗 黃憲周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1개(적색, 정방형) 강화 대산 창원황씨가 강화역사박물관 전북향토문화연구회편, 『全北地方의 古文書』1․ 2․ 3, 1993․1994․1995.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HIKS_OD_F1001-01-000001 1883년(고종 20) 12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첨정(行訓練院僉正)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 1883년(고종 20) 12월에 국왕이 황헌주(黃憲周)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훈련원첨정(行訓練院僉正)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어모장군은 정3품 당하관이며, 훈련원첨정은 종4품 관직이어서 '품계가 높은 데 비해 관직이 낮음'을 의미하는 '행(行)'을 관직명 앞에 붙였다. 훈련원은 군사(軍士)의 시재, 무예(武藝)의 연습(練習), 병서(兵書)의 강습(講習)을 맡은 관아로 첨정은 이곳의 책임자였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황헌주는 조선 말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877년(고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강화도 출신이지만 1894년 동학 농민의 봉기를 계기로 전라도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1894년(고종 31) 4월 강화도 수비를 맡은 총제영의 중군으로 있었다. 동학 농민군 토벌 임무를 띠고 전라도에 파견된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증원군 파견 요청에 따라, 황헌주는 총제 영병 4초(400명)를 거느리고 4월 19일 기선 현익호(顯益號)로 인천을 출발하여 4월 23일 법성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4월 21일 장성 황룡촌에서 벌어졌던 경군(京軍)과 동학 농민군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에서 홍계훈 군과 합류하였다. 그는 그 뒤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9월 동학 농민군이 재기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해 겨울에 황헌주는 그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태인현 종송리(種松里)에 숨어 있는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金開男)을 체포하였다. 황헌주는 그해 12월 임실현감(任實縣監)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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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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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영록(申永祿)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同治十年正月日 申永祿 同治十年正月日 高宗 申永祿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당곤 고령신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3-01-000767 1871년(고종 8)에 고종(高宗)이 신영록(申永祿)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한 교지(敎旨). 1871년(고종8) 1월에 高宗이 申永祿을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한 敎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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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4년 오현의(吳顯義) 자매명문(自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자매명문 경제-매매/교역-자매명문 光拾四年甲午六月二十七日 姜日魯 水旨化民吳顯義 光拾四年甲午六月二十七日 姜日魯 吳顯義 證人前風憲李東近[着名], 筆洞有司 金得光[着名], 使[着押] 5개(적색, 정방형)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OD_F1014-01-000003 1834년(순조 34) 6월에 사노(私奴) 강일로(姜日魯)가 딸 봉덕(奉德)을 남원 수지방(水旨方)에 사는 오현의(吳顯義)에게 85냥을 받고 팔면서 작성한 자매명문(自賣明文). 1834년(순조 34) 6월에 사노(私奴) 강일로(姜日魯)(37)가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양처(良妻)와의 사이에서 난 딸 봉덕(奉德)을 남원 수지방(水旨方)에 사는 오현의(吳顯義)에게 85냥을 받고 팔면서 작성한 자매명문(自賣明文)이다. 이 명문에는 강일로가 우장(右掌)으로 문서에 서명했으며, 풍헌(風憲) 이동근(李東近)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유사(洞有司) 김득광(金得光)이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명문에 이어 오현의가 관에 올린 소지가 점련되어 있는데, 남원부에 노비를 매입한 사실을 입지성급(立旨成給), 즉 관에서 공증하여달라고 청하는 문서이다. 이에 대해 남원부사는 입지를 발급한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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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一 李鎭明 嗚呼。天生斯人於斯世。欲使道脈不墜耶。早歲悅蘆沙先生之道。徙宅而從之。專門五十年。獨被獎詡。不有實見而能如是乎。所見實。而所造亦深。將使蘆翁之道不墜。蓋有不得辭者。而天何奪之速也。公哭者然爾。而繼哭吾私。則道我如瞽相。扶我如麻蓬。十載接隣。百年許心。至於萬里之行。身後之托。不於他而於我。則其相信有如此。而遽然一別。遂成千古。一聲長吁。我淚如傾。況我久不負楚人之托。亦未可知也。單觴薄奠。庶其歆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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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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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신준극(申俊克)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康熙二十四年六月十九日 申俊克 康熙二十四年六月十九日 肅宗 申俊克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당곤 고령신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3-01-000767 1685년(숙종 11)에 숙종(肅宗)이 신준극(申俊克)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한 교지(敎旨). 1685년(숙종11) 6월 19일에 肅宗이 申俊克을 通政大夫에 임명한 敎旨. *방서: 大王大妃殿周甲誕日後年 八十以上加資事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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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舍記 湯盤銘云。苟日新。日日新。蓋新者。革其舊之謂也。湯以生知之聖。無舊染之汚。而其自警自新。猶如此。況衆人乎。柳君悅卿氏。以靑舍扁楣。其有意於自新者歟。客舍靑靑柳色新。是唐人詩句。而村塾初上學兒。猶能誦知。知其歸重在一新字。雖稱老宿。恐或鮮能矣。噫。本心之德。何嘗不明。或泥滯於氣質。或紛挐於物欲。闇然如明珠之汨泥水而蔑其光也。所以中人以下新之之工。不得不然。彼渭城之柳。亦何嘗不靑靑。而或困於風霜。或厄於樊圃。蕭索久矣。纔霑一朝之微浥。忽見萬條之靑靑。乃其本色然耳。凡待雨而新者。植物皆然。而奚取於柳。蓋姿質纖軟。春氣纔到。到則輒榮。而況嫩金白綿。烟絲風葉。豈凡卉木之可比者耶。夫人之生質之美者。從善如流。聞義則服。若時雨化之。亦若是矣。然植物之雨露在天。而人身之雨露。只在方寸間耳。操則存。思則得之。如斯而已。旣存旣得。睟於面盎於背。其色也溫溫。其文也郁郁。日新月盛。粲然可觀。則其自新也。奚止於柳色之靑靑而已哉。且舍有止舍之義。則此亦非所謂止於至善而不遷者歟。靑舍乎靑舍乎。洗心去舊。如盤沐之皎皎。進德自新。若渭柳之靑靑。則可謂無嫩於聖學日新之工。而於是乎不負其號矣。走將刮目而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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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友人奇允左 黃雲城邊路。逢君還送君。君行千里去。天際是輕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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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年三十二見鬢髮白莖。自歎吟 十載希顔淵。一分做未至。鬢邊出二毛。歲晏更何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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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客 有客今天下。疏狂放厥情。不問人間事。浪遊送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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窮達 窮達問何事。死生不復知。一點浮雲影。往來無盡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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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居 林壑十年養不才。竹陰深處蓽門開。雲邊小圃三分石。山下淸溪太半苔。無端隨柳經深巷。因復訪花上絶臺。更把瑤琴閑自娛。此時不妨少年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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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雙槐李丈【晉秀】壽席韻 六十一翁更少春。胚胎舊日卽今辰。傳家餘祿令孫肖。祝壽遐誠孝子仁。弧矢門前隱逸士。豆籩席上速諸親。引酌太和和氣醉。融融樂意滿庭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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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舜卿 省禮言。光陰迅逝。先師老先生練朞已過。如新之痛。兄我何殊。謹未審歲籥載新。侍棣候履元元吉。盛工日進。仰溯不任。弟慈候常在失寧。時時奄奄。私悶曷喩。同門諸公。老成宿德。俊譽英才何限。而顧如錫龜之愚陋放倒。不得齒數於諸公之末。厥已久矣。而惟蒙兄不我遐。則弟之向往於吾兄者。夫豈淺淺也哉。然而區區之向往。非特蒙不我遐。而別有攸在。願益加努力。無負初心。則溯從之地。何但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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暮春對雨 壓地山齋近隔墻。靜中春色雨中芳。綠苔階面斑斑濕。靑草池邊細細長。名花着樹分紅錦。嫰柳浮溪滴翠香。松扉盡日無人到。只有冠童繞几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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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朴景有【準基】五難韻 斗覺人生涉世難。出門一步上天難。板橋氷雪千傾倒。平地風波幾險難。予奪非常翻覆易。炎涼無定趁趨難。中間稍有寬閑處。事事啞聾却避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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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3년 김인석(金潾錫)의 처(妻) 숙인신씨(淑人申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光緖十九年十二月日 淑人申氏 光緖十九年十二月日 高宗 淑人申氏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적색, 정방형) 고흥 두원 경주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5-01-000647 1893년(고종 30)에 고종(高宗)이 숙인신씨(淑人申氏)를 숙부인(淑夫人)으로 봉한다는 교지(敎旨). 1893년(고종30) 12월에 高宗이 淑人 申氏를 淑夫人으로 봉한다는 敎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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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모년 오병숙(吳秉淑) 원정(原情)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心元面守巖里化民吳秉淑 城主 吳秉淑 전라북도 고창군 남원 둔덕 함양오씨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모년에 전라도 무장군 심원면 수암리에 사는 오병숙(吳秉淑)이 수령에게 올린 원정(原情). 전라도 무장군 심원면 수암리에 사는 오병숙(吳秉淑)이 수령에게 올린 원정(原情)이다. 문서에 작성연대가 적혀 있지 않은 데다 수령의 제사(題辭)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원정의 초안(草案)으로 추정된다. 오병숙은 지난 기사년에 심원면 우습치 오른쪽 기슭에 조모의 무덤을 써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38년 동안이나 정성껏 관리해 왔다. 이곳은 오병숙의 아버지가 생전에 임용수(林用水)로부터 매입한 땅으로, 오병숙은 그 매매문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임성묵(林性黙)이라는 자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곳을 자기네 방조(傍祖)의 산소라고 주장하면서 읍에다 상소하고 관부에도 상소를 하였으니, 이것은 선조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남의 산지를 빼앗으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에는 수령이 명쾌하게 판결하여 임성묵은 산송에서 패소하였다. 그 뒤 이해 윤4월에 누군가가 임성묵의 방조의 산소 섬돌 아래와 오병숙의 조모 산소 용미(龍尾) 바로 위에 해당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에는 몇 사람이 몰려와 투총에 흙을 쌓아올렸다. 오병숙이 그들을 향해 임자 있는 산지에 무슨 짓이냐고 크게 꾸짖자,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청해면(靑海面) 안산(安山)에 사는 이석규(李錫圭)라고 말하고, 이 산지를 임성묵의 아들 임판돌에게서 매입하였다고 대답했다. 오병숙이 전후 사정을 자세히 얘기하자 이석규는 감히 산일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오병숙은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관에 소를 올렸으나, 관에서는 더위가 가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심리를 하겠다고 하여 잠자코 물러났다. 그 뒤 팔월 초10일에 오병숙이 안산에 가보았더니 한중오(韓仲吾)라는 자가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오병숙에게 이르기를, 자신의 선산도 오씨네 선산에 같이 있다면서, 금년 윤4월에 이주사(李主事; 이석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가 이곳에 투총을 했다고 하니, 오씨의 무덤을 먼저 파낸 뒤에 이씨의 무덤을 파낼 수 있다는 뜻으로 강제로 수기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이석규가 재물을 간취하려고 한중오에게 사주를 하여 농간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한 오병숙은 수령에게 소지를 올려, 이석규의 투총을 즉각 파내게 하는 한편, 임판돌이 주인 몰래 산지를 매매한 죄와, 한중오가 강제를 수기를 작성해 받게 한 죄를 다스려달라고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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