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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二年</연도>丙戌十一月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傳來畓伏在<지명>扶安下西老谷</지명>前坪 字廤所耕四負一束貳斗落価折錢文貳拾柒兩依數捧之是遣永永放賣于 右宅爲去乎旧文段他田畓幷付故只以新文成文爲去乎日後如有爻象之端是去等持此文憑考事田主 <인명>黃贊成</인명> 喪不着證人 幼學 <인명>曺伯賢</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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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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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二年陰五月十一日 金化西 李承冕 大正二年陰五月十一日 金化西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1*1.1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음력 5월 11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고 받아야 할 논값의 일부를 김화서(金化西)가 대신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受証). 1913년 음력 5월 11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고 받아야 할 논값의 일부를 김화서(金化西)가 대신 받고 작성해 준 영수증(領受証)이다. 정공인은 노곡리 벌판에 있는 논 1석(石) 3승(升)을 이승면(李承冕)에게 총 460원에 팔았는데 그 중 200원(円)을 정공인을 대리하여 김화서(金化西)가 받고 영수증을 써 준 것이다. 거래 당시 보증인으로 이경백(李京白)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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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受証一金貳百円也右本郡<지명>下西面老谷坪</지명><인명>鄭公仁</인명>畓土一石0三升落價肆百陸拾円內에爲先右金額을領受홈<인명>鄭公仁</인명>畓土價額은<인명>金化西</인명>으게領受긔로委任홈<연도>大正二年</연도>陰五月十一日領受人<지명>扶安郡上西面老谷里</지명>二統五戶<인명>金化西</인명>[着名]證人仝 仝 <지명>頓池里</지명>十二統六戶<인명>李京白</인명>[着名]<인명>李承冕</인명>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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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정공인(鄭公仁) 영수증(領受証)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二年陰五月二十日 鄭公仁 李承冕 大正二年陰五月二十日 鄭公仁 전북 부안군 [印] 4개 1.2*1.2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음력 5월 20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고 돈을 받으면서 작성한 영수증(領收證). 1913년 음력 5월 20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팔고 돈을 받으면서 작성한 영수증(領收證)이다. 정공인은 노곡리 벌판에 있는 논의 값으로 460원을 받았다. 관련문서 "1913년 정공인(鄭公仁) 영수증(領受証) 1"에 따르면 460원 중 200원을 그해 5월 11일에 김화서(金化西)가 대신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잔금까지 다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거래된 논의 규모는 1석(石) 3승(升)이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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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신명직(辛命直)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1년(고종 8) 4월 4일에 김창희(金昌禧)가 신명직(辛命直)에게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1년(고종 8) 4월 4일에 김창희(金昌禧)가 신명직(辛命直)에게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창희는 긴요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지비리 아래 사창평(社倉坪)에 있는 일작 청자답(凊字畓) 16두락을 130냥에 신명직에게 팔았다. 이 문서를 작성할 때 이후 10년 안에 위 금액대로 환퇴(還退)할 의사가 있음을 기입하였다. 또한, 원래 문서는 세월이 오래 흘러서 중간에 유실되어 출급할 수가 없으나 나중에 이 문제로 말썽이 생기면 이 문서로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김청희가 직접 자필로 작성하여 문기를 처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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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嘉慶二十二年</연도>丁丑四月初四日 <인명>辛命直</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急用處祖上傳來是在<지명>扶北一道之飛里</지명>下社倉坪伏在一作凊字畓十六斗落只所耕三十五負三束㐣折価錢文壹百三十兩依數捧上爲遣放賣爲乎矣日後十年內凖本価還退之意如是成文爲旀本文記段代遠所致中間閪失故不得出拾日後某人中如有雜談之弊是去等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茟 <인명>金昌禧</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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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전경홍(田京洪)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拾年丙午 田主 幼學 田京洪 光武拾年丙午 田京洪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 12월 20일 전경홍(田京洪) 이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906년 12월 24일 전경홍(田京洪) 이 태전(太田)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밭의 일도면(一道面) 선곡리(仙谷里)에 있었으며, 임자(臨字) 밭 3두락이었다. 매매 대금은 30량이었다. 그리 규모가 큰 거래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규홍은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본 콩밭과 관련된 기존 문서, 그러니까 본 콩밭은 사면서 썼던 문서도 함께 주었다. 문서에 구문기(舊文記)라고 적힌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를 준 이유는 콩밭을 소유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음은 물론이다. 문서를 소지한 것으로 그 소유권을 인정받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전규홍은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이는 스스로를 유학(幼學)이라고 칭한 점을 알 수가 있다. 유학이란 관직이나 품계를 같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사실 양반이 논이나 밭의 거래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으레는 자신이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양반이 돈과 관련한 일에 관여한다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행은 갑오경장 이후가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는데, 전규홍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리인으로 내세울만한 노복이 없어서였는지 혹은 이제는 신분이라는 것이 무색한 것이 되어 비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877년 전용진(田溶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신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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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隆熙二年</연도>戊申二月二十二日 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夫伏在萬頃<지명>南一面道下</지명>堤下坪十二斗落只貞字畓所耕二十七負㐣価折錢文捌佰肆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倂付他卷故以新文記壹丈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인명>李公弼</인명>[着名]證筆 任喪制<인명>殷叔</인명>[印]證人 <인명>徐敏澤</인명>[着名](背面)<지명>萬頃石洞</지명><인명>李公弼</인명>十二斗落文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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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丁未</연도>六月初九日<지명>大石</지명>前坪太田四斗落每年元稅十九斗恒定而日後若有他說則至此本票憑考事<인명>吳明集</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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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최인언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十一年丁未六月初八日 崔仁彦 光武十一年丁未六月初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6월 초8일 최인언(崔仁彦)이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대석리(大石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6월 초8일 최인언(崔仁彦)이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대석리(大石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최인언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밭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 만경군 남일면 대석리의 4두락지 밭이며 부수(負數)로는 8부(負) 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3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인언은 구문기(舊文記)가 중간에 유실(遺失)되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최인언과 증인(證人)은 최영숙(崔永淑) 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一張)은 일장(一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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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二十四年</연도>甲辰六月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畓世不得是稅積〖債〗許多故<지명>下西</지명>伏在老谷前坪誡字六斗落只所畊十三負三束㐣価折文一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本文記二丈幷禾穀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談是去等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 <인명>宋月柱</인명>[着名]證人 <인명>金尙華</인명>[着名]茟 <인명>李元槇</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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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송순남(宋舜男)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五年庚申十一月十八日 李六孫 宋舜男 嘉慶五年庚申十一月十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1.2*1.2 1개(적색, 원형), 1.0*1.0 1개(적색)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00년(정조 24) 11월 18일 이육손(李六孫)이 송순남(宋舜男)에게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00년(정조 24) 11월 18일 이육손(李六孫)이 송순남(宋舜男)에게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이육손은 올해 생활이 너무 극난(極難)해서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계자답(誡字畓) 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3부(負) 3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15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육손은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이육손과 증인(證人) 송봉이(宋奉伊), 필(筆)은 이평언(李平彦)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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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연도>丁丑六月初七日<인명>李生員</인명> 前明文右明文事錢文十一兩貸去矣當此大無之年無一分報給至於流移之境宅上洞坪天字田一斗五升落所畊三負五束果天字苧田五升落所畊一負㐣右宅前永永次持而以後若有異說則持此文憑考事田主 閑良 <인명>房致安</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溶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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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김도현(金道賢)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三月二十八日 金道賢 光緖三年丁丑三月二十八日 金道賢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28일에 유학(幼學) 김도현(金道賢)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3월 28일에 유학(幼學) 김도현(金道賢)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도현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상서면 거석리(擧石里) 촌전에 있는 어자답(於字畓) 2마지기를 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일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도현과 증필(證筆)로 동몽(童蒙) 최원백(崔元白)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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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三月二十八日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지명>擧石里</지명>村前於字畓二斗落庫乙價折錢文三十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舊文二章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定事畓主 幼學 <인명>金道賢</인명>[着名]證筆 童蒙 <인명>崔元白</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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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午十月卄二日 權秉澤 李丈 壬午十月卄二日 1882 權秉澤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이다. 권병택은 자신의 친산(親山)이 이씨가의 선산에서 불과 100여보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묘를 파가라는 요구를 이씨가로부터 계속 받았다. 그러나 권병택은 산지가 매우 귀한 데다가 갑자기 이장(移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씨가에 통사정을 했다. 권병택은 다행히도 이씨가에서는 산을 구한 뒤에 이장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에 권병택은 이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여 이씨측에 주었다. 이 문서에 기재된 이장(李丈)은 곧 부안의 선은동에서 세거하였던 전주이씨문중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임오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관련문서를 통해 임오년을 1882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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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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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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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咸豐九年己未</연도>十一月初四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移買次伏在<지명>弓月里</지명>前坪坊下橋官字畓十七斗落所耕三十九卜八束庫果【十七斗落己丑二月二十九日賣買印】浦坪鳥字畓十六斗落所耕三十七卜一束庫果又浦坪官字畓十二斗落所耕二十八卜六束㐣合四石五斗落價折錢文伍百伍拾兩侄許永永放賣爲去乎旧文記一丈幷新文記一丈日後若有爻象之弊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自筆同姓三寸 <인명>平烈</인명>[着名]證人同姓四寸 <인명>永直</인명>[着名](背面)坊下橋三寸畓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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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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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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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연도>戊申</연도>三月初十日<지명>弓新里</지명>前坪<지명>仙洞</지명><인명>李議官</인명>宅畓土<인명>韓文淑</인명>所納結十八卜一束<인명>張守山</인명>所納結十五卜四束<인명>李文兼</인명>所納結十一卜四束合肆拾肆卜玖束庫叱入於陳浦秩永勿擧論次錢文玖拾伍兩酌定推捧爲去乎目今秋如有賭稅與結稅間還出之端右錢以每朔伍分例備報之意如是成票事舍音票主<인명>辛玉鉉</인명>[印]證人 <인명>韓辰碩</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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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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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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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建陽二年丁酉</연도>二月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耕食是多可要用所致故伏在<지명>上東弓月里</지명>東坪服字畓六斗落只所耕十五負庫乙價折錢文㱏佰十兩依數捧上是遣幷以新旧文記二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幼學 <인명>李慶槇</인명>[着名]證筆幼學 <인명>林文白</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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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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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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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六年庚寅</연도>十一月初二日 明文右明文事段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伏在<지명>上東面弓月里</지명>東坪通水洞衣字畓五斗五升落所耕司卜十一卜一束 民結五卜一束庫叱乙價折錢文七十八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他畓幷付故不得出給是遣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談則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嘉義<인명>崔永心</인명>[着名]證人幼學<인명>韓應化</인명>[着名](背面)山內畓五斗五升落所耕司卜十一卜一束 民結五卜一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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