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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신사명(辛士明)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四年庚子十一月二十四日 辛士明 大韓光武四年庚子十一月二十四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2.5*2.5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광무 4) 11월 24일 신사명(辛士明)이 쌍괴제(雙塊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0년(광무 4) 11월 24일 신사명(辛士明)이 쌍괴제(雙塊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사명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기 매득하여 경작해 오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쌍괴제 아래에 있는 지답(至畓) 개자답(芥字畓)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5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600냥이다. 쌍괴제는 쌍구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쌍구제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에 있는 저수지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사명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사명과 증필(證筆)은 이행신(李行辰)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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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김인숙(金仁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三年丁亥十二月晦日 金仁淑 光緖十三年丁亥十二月晦日 金仁淑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7년(고종 24) 12월에 김인숙(金仁淑)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천(長水川)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7년(고종 24) 12월에 김인숙(金仁淑)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천(長水川)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상동면 장수천의 궐자답(闕字畓) 3두락지로, 부수로는 11부 7속이 되는 곳인데, 이 중 3복이 진탈(陳頉)로 빠져 실제로는 8부 7속이며, 매매가격은 30냥이었다. 진탈은 경작하지 않고 묵혀둔 곳으로 조세 대상에서 제외된 곳을 가리킨다. 김인숙은 구문기와 신문기 등 모두 3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방매자는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않았다. 유학 염도여(廉道汝)가 증필(證筆)로, 유학 전복여(田卜汝)가 증인으로 각각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상동면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에 해당하지만, 장수천이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방매자 김인숙이 매입자에게 넘겨 주었던 구문기는 현재 모두 남아 있는데 "1858년 이시용(李時容)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878년 강치언(姜致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바로 그것이다. 진탈로 3복이 빠진 것도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같은 논이 1858년에는 50냥이었다가 1878년에는 25냥, 그리고 1887년에는 30냥으로 거래가격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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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김방효(金邦孝)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二年壬子十一月十三日 幼學金履勳 幼學金邦孝 咸豐二年壬子十一月十三日 幼學金履勳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2년(철종 3) 11월 13일에 유학(幼學) 김이훈(金履勳)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전평에 있는 논들을 유학 김방효(金邦孝)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2년(철종 3) 11월 13일에 유학(幼學) 김이훈(金履勳)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전평에 있는 논들을 유학 김방효(金邦孝)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이훈은 이 논들을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다른 전답을 사기 위하여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일도면의 송곶(松串) 전평(前坪)에 있는 금자답(禽字畓) 2두락지로, 부수로는 3부 3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2두락지로, 부수로는 5부 2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5두락지로, 부수로는 13부 3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1두락지로, 부수로는 4복 5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1두락지로, 부수로는 2부 7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3두락지로, 부수로는 6부 7속이 되는 곳 등 여섯 곳에 걸쳐 있는 14두락지의 논이었다. 매매가격은 19냥이었다. 그는 구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김이훈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유학 김석태(吳相文)과 유학 김석태(金錫泰)가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송곶평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거래의 대상이 된 논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문서는 "1863년 김용술(金龍述)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본문기의 하나로 추정된다. 즉 1863년에 김용술이 전주이씨가에 논을 팔면서 넘겨 주었던 구문서의 하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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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豐二年壬子</연도>十一月十三日幼學<인명>金邦孝</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耕食是多可移買次伏在<지명>一道松串</지명>前坪禽字畓二斗落只所耕參負參束庫果同字畓二斗落只所耕伍負二束㐣果同字畓五斗落只所耕拾參負參束庫果同字畓一斗落只所耕四卜伍束庫果同字畓一斗落只所耕貳負柒束同字三斗落只所耕陸負柒束庫叱價折錢文拾九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二張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論是去等以此文記憑考事畓主自筆幼學<인명>金履勳</인명>[着名]證人 幼學<인명>金錫泰</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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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拾伍年乙未</연도>十二月 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自己買得<지명>一道坪</지명>禽字畓三斗落三卜三束二斗落只二卜七束四斗落只七卜九束二斗落只五卜二束二斗落只四卜五束二斗五升落只五卜二束庫乙捧價柒拾捌兩永爲放賣爲去乎日後以此文記卞正爲乎乙事 旧文記陸張亦爲粘付事畓主自筆 <인명>金致相</인명>[着名]證人幼學 <인명>金養坤</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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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十一年丙寅</연도>十二月十六日故<인명>金明輝</인명>妻<인명>朴召史</인명>前明文右相換明文事段矣亦居在<지명>中方里</지명>而<지명>之飛里</지명>前坪良中一作溫字畓所耕二十五卜三束庫及同作臨字畓十二斗落只三十二卜六束庫興父子各買得耕食是如乎此里作農甚▣右人畓十二斗落只果彼此從其取近添給錢文四十兩依約相換而右人畓本文二丈捧上爲遣矣畓西庫本明文牌子幷十一丈幷以永相換成文爲去乎日後子孫中如有雜談是去等持此文告 官卞正事西畓主<인명>李夏悅</인명>[左寸]證武學<인명>金楚相</인명>[着名]筆幼學<인명>崔碩龜</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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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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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右契約事自己土地在於<지명>扶安下西面</지명>老谷坪日字四八0六畓四㽝十一斗落結三十負五束庫果同坪月字四八五0畓一㽝三升落結六束庫果同坪盆字四九二八畓四㽝三斗落結九負㐣代金肆佰陸拾円依數領受ᄒᆞ고以新文一張永永賣渡ᄒᆞ거온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憑考ᄒᆞᆯ事<연도>大正二年</연도>陰五月十日<지명>扶安郡下西面衣服洞</지명>一統四戶賣渡人 <인명>鄭公仁</인명>[印]證人 <인명>金化西</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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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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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3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陰五月十日 鄭公仁 李樂善 大正二年陰五月十日 전북 부안군 [印]3개 1.2*1.2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5월 11일에 정공인(鄭公仁)이 이낙선(李樂善)에게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3년 5월 11일에 정공인(鄭公仁)이 이낙선(李樂善)에게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군 하서면 돈지리에 있는 네 곳의 논이다. 첫 번째 논의 지번호(地番号)는 현(玄)4364이고, 두 번째 논의 지번호는 주(宙)4493이다. 세 번째 논의 지번호는 황(黃)4380이고 네 번째 논의 지번호는 황(黃)4376이다. 돈지리는 오늘날 부안군 계화면 돈지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네 곳의 매매 가격은 모두 400원이다. 매도인(賣渡人) 정공인은 매매대금을 수령(受領)하고 매수인(買受人)에게 토지소유권(土地所有權)을 전도(轉渡)하였다. 보증인 박태환(朴泰桓)은 이 매매(賣買)를 확인하고 이를 인정하며 서명을 하였다. 매매에는 부안군 하서면 의복동(衣服洞)에 사는 매도인 정공인, 부안군 동도면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매수인 이낙선, 부안군 하서면 삼현동(三玄洞)에 사는 보증인 박태환이 참여하였다. 매도인, 매수인, 보증인은 매매계약서에 서명, 날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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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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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3년 정공인(鄭公仁) 영수증(領受証) 1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二年陰四月十五日 鄭公仁 李樂善 大正二年陰四月十五日 鄭公仁 전북 부안군 [印] 4개 1.2*1.2 4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음력 4월 15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이낙선(李樂善)에게 팔면서 작성한 영수증(領受証). 1913년 음력 4월 15일에 정공인(鄭公仁)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이낙선(李樂善)에게 팔면서 작성한 영수증(領受証)이다. 정공인(鄭公仁)은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 벌판에 있는 논 네 곳을 합한 18마지기를 이낙선(李樂善)에게 400원(円)에 팔았다. 거래 당시 보증인으로 김화서(金化西), 이경백(李京白), 박태환(朴泰桓)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 말미에 논 네 곳의 구문서는 곧바로 찾아서 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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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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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3년 황영중(黃永中)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三年癸丑三月初七日 柳生員 黃永中 咸豐三年癸丑三月初七日 柳生員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3년(철종 4) 3월 7일에 유생원(柳生員)이 부안(扶安) 안덕동(安德洞)에 있는 논을 황영중(黃永中)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3년(철종 4) 3월 7일에 유생원(柳生員)이 부안(扶安) 안덕동(安德洞)에 있는 논을 황영중(黃永中)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생원이 이번에 큰 흉년을 당하여 세금을 낼 길이 없자 자신이 매득한 안덕(安德) 앞들에 있는 부자답(扶字畓) 6마지기를 황영중에게 39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작년에 화재로 인하여 다 타버려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주며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유생원 본인이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증인(證人)으로 최여일(崔汝一)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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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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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九年癸巳</연도>正月十七日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南中作擔內堤之男字畓五斗落所耕十六負五束㐣価折錢文貳百兩依數捧上是遣幷新舊文二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明文告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張辰弘</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李俊善</인명>[着名]筆執 幼學 <인명>洪士元</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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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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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9년 오화영(吳和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五年己卯二月初七日 吳和泳 光緖五年己卯二月初七日 吳和泳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9년(고종 16) 2월 7일에 유학(幼學) 오화영(吳和泳)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남중리(南中里)의 담내제(擔內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9년(고종 16) 2월 7일에 유학(幼學) 오화영(吳和泳)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남중리(南中里)의 담내제(擔內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오화영은 여러 해 동안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지만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담내제 아래에 있는 남자답(男字畓) 5마지기를 130냥에 팔았다. 남자답은 부수(負數)로는 16부 5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잃어버려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혹시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오화영, 증인(證人) 유학 김운경(金云敬), 필(筆) 유학 김내홍(金乃弘)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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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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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五年己卯</연도>二月初七日 前明文右明文事段累年耕食是多可有用所致夫伏在<지명>南中</지명>作<지명>擔內堤</지명>下男字畓五斗落所耕十六負五束庫乙價折錢文壹百參什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段中間閪失故以新文記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以此文憑考事畓主幼學 <인명>吳和泳</인명>[着名]證人幼學 <인명>金云敬</인명>[着名]筆 幼學 <인명>金乃弘</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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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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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四年</연도>庚子十一月二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自己買得畓伏在雙塊堤下基畓芥字畓玖斗落所耕拾五負五束㐣価折錢文陸佰兩依數捧上是遺旧文記他文券倂付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以此文記以此憑考爲乎乙事畓主 <인명>辛士明</인명>[着名]證筆 <인명>李行辰</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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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4년 신원첨(辛源瞻)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一年甲申十月初四日 辛源瞻 光緖十一年甲申十月初四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 21) 10월 초4일 신원첨(辛源瞻)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 21) 10월 초4일 신원첨(辛源瞻)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원첨은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 제방 아래에 있는 화자답(畵字畓) 20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52부(卜)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5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원첨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원첨과 정필(訂筆)은 박공거(朴公擧)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㱏張)은 일장(㱏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44년 송월주(宋月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二十四年甲辰六月十六日 宋月柱 道二十四年甲辰六月十六日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21) 6월 16일 송월주(宋月柱)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21) 6월 16일 송월주(宋月柱)가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송월주는 세금이 많이 밀려서 물려받은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계자답(誡字畓) 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3부(負) 3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0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송월주는 구문기(舊文記) 2장(丈)과 화곡(禾穀) 그리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송월주와 증인(證人) 김상화(金尙華), 필(筆)은 이원전(金尙華)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연도>乙亥</연도>十一月十八日 前標右標事右人債徵給退未報矣至於以生庭親字卸擧狀之境是如乎來月十五日內自當報給之意如是成標事標主自筆 <인명>金仁相</인명>[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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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嘉慶九年甲子</연도>十月十五日<인명>辛命直</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所負債錢許多不得已自己買得是在扶北一作<지명>之飛里</지명>前坪梁傍伏在溫字畓四斗落只所耕十七卜四束庫乙価折錢文伍拾伍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一丈及牌子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屬人中如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인명>李仁芳</인명>[着名]證保 同姓四寸<인명>玉南</인명>[左寸]筆 <인명>金致鎰</인명>[着名]定只堤下梁俠三巨里下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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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嘉慶五年甲辰</연도>六月初九日<인명>李仁芳</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矣上典宅牌子據扶北伏在梁傍溫字畓肆斗落只所耕貳拾負庫乙禾穀幷以價折錢文肆拾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本文記段他田畓幷付仍乙又不得出給爲去乎日後如有雜談是去等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 金奴<인명>角金伊</인명>[左寸]證筆 <인명>李古邑同</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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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奴<인명>角金伊</인명>處無他宅矣急有緊用處<지명>扶安之飛里</지명>前坪伏在溫字畓肆斗落只庫乙某人處從時價放賣以納宜當事上典<인명>金</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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