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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捌年戊子</연도>正月十八日<인명>崔甲斗</인명>前明文右明文事傳來耕食是如可伏在<지명>扶東道</지명>雇馬堤下島字畓拾陸斗落只所耕三十七負一束庫乙錢文貳百二十五兩依數交易捧上是遣右人前本文記二丈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是去等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幼學<인명>尋昌仁</인명>[着名]證 喪人<인명>尹台相</인명>[着名]筆 幼學<인명>李得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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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평렬(平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九年己未十一月初四日 同姓三寸 平烈 咸豐九年己未十一月初四日 同姓三寸 平烈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9년(철종 10) 11월 초4일에 평렬(平烈)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9년(철종 10) 11월 초4일에 평렬(平烈)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다른 전답을 사기 위하여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상동면 궁월리 전평(前坪) 방하교(坊下橋)의 관자답(官字畓) 17두락, 부수로는 39부 8속이 되는 곳과, 포평(浦坪)의 조자답(鳥字畓) 16두락, 부수로는 37복 1속이 되는 곳과, 포평(浦坪)의 관자답(官字畓) 12두락, 부수로는 28부 6속이 되는 곳 등 모두 4석 5두락으로, 매매가격은 550냥이었다. 구문기 1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방매자는 매입자의 3촌으로 조카에게 논을 팔았으나, 성은 명문에 기재하지 않았다. 평식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증인은 동성(同姓) 4촌인 영직(永直)이 거래에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상동면 궁월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편 이 문서의 중간에는 "官字畓十七斗落所耕三十九卜八束庫"라는 부분을 선으로 그어 표시하였고, 우측에 "十七斗落己丑二月二十九日賣買印"라고 기재해 놓은 점이 눈에 뜨인다. 뒷날 기축년에 가서 이 부분의 논을 매매하면서 이제는 구문기가 된 이 명문에 매매사실을 효주(爻周)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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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상필 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十一年丁未三月初六日 李相弼 裵閏國, 光武十一年丁未三月初六日 전북 부안군 [印]3개, [着名] 2개 2.0*2.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3월 초6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3월 초6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개자답(盖字畓) 9두락지(斗落只) 결수(結數)로는 21부(負) 7속(束)인 곳과 백자답(白字畓) 15두락지 결수로는 35부 2속인 곳이다. 이와 함께 백자답(白字畓) 6두락지 결수로는 10부 2속인 곳과 수자답(樹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23부 9속인 곳이다. 또 명자답(鳴字畓) 9두락지 결수로는 17부 7속인 곳과 명자답(鳴字畓) 18두락지 결수로는 40부인 곳이다. 마지막으로 봉자답(鳳字畓) 10두락지 결수로는 23부 9속인 곳이다. 네 곳의 토지는 모두 80두락지로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5950냥이다. 묘라리는 오늘날의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매매 명문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면적을 표기하는 방법은 조선 시대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필은 답안(畓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 배윤국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경평동(京平洞) 이상필과 매수인 배윤국, 임은숙(任殷叔), 집필(執筆) 오양숙(吳良叔), 증인(證人)은 임도형(任道亨)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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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김원겸(金元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四年庚子十二月初九日 金元謙 光武四年庚子十二月初九日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광무 4) 12월 초9일 김원겸(金元謙)이 쌍구제(雙口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0년(광무 4) 12월 초9일 김원겸(金元謙)이 쌍구제(雙口堤)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김원겸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쌍구제 아래에 있는 기답(基畓) 개자답(芥字畓)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5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600냥이다. 쌍구제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에 있는 저수지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김원겸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구문기(舊文記)를 합쳐 모두 2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논의 주인 김원겸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않았다. 증필(訂人)은 남여순(南汝順)이 참여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본 문기의 김원겸은 "1905년 김원겸(金元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에서도 토지 매도자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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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二年癸亥</연도>四月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移買次<지명>一道松串</지명>前坪禽字畓二斗落只所耕五卜五束二斗落只二卜七束四斗落只十卜九束三斗落只九卜四束二斗落只四卜五束價折錢文一百柒拾兩依數捧上爲遣本新記三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筆幼學<인명>金龍述</인명>[着名]證人幼學<인명>吳相文</인명>[着名]證人幼學<인명>金慶玉</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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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인명>言金</인명>處無他卽有萬萬緊急事耶當此歉年窮春凡節握過之道末由故勢不得已伏在下西尤谷坪字畓三斗落所耕八負二束廤乙從時価三十五兩斥賣於於願買入處俾無葛藤之意宜當事此亦中旧文中間閪失故不得幷給耳畓主 <인명>鄭</인명>[着名]<연도>丙戌</연도>三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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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八年</연도>己巳四月十七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故<지명>黃盖山定只堤</지명>下臨字墓畓四斗落只所耕十一負㐣折価錢文八十七兩依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門中相左之端則以此文記告 官卞考事畓主 幼學 <인명>朴受繪</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廉在祐</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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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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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9년 신보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五年己卯十二月日 辛普亨 光緖五年己卯十二月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9년(고종 16) 12월에 신보형(辛普亨)이 서도면(西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9년(고종 16) 12월에 신보형(辛普亨)이 서도면(西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보형은 자기가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본 문기에는 매도 사유를 밝히지 않고 있는데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서도면 정지제 아래에 있는 임자답(臨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1부(卜) 1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5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보형는 구문기(舊文記) 2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보형과 증인(證人) 염치화(廉治化)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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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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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五年</연도>己卯十二月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지명>西道定只堤</지명>下伏在臨字畓四斗落只所耕十一卜一束㐣価折偂文五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二丈新文一丈永永放賣爲乎乙事畓主 <인명>辛普亨</인명>[着名]證人 <인명>廉治化</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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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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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연도>戊申</연도>至月十七日票右票事切有緊用處故伏在<지명>上東中里</지명>後坪太田一斗五升落所耕三負六束庫乙典執於右人前是遣錢文捌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則十月晦內竝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若過限則右㐣永永差持爲乎事票主 <인명>金成彦</인명>[着名]舊文記一張留置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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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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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 土地의 表示左記와 一通함-. 賣買代金 七円也-. 賣渡人은 前記賣買代金을 愼領하고 左記 土地의 所有權을 買受人에게 轉渡함-. 保證人은 右契約을 確實히 認하고 左記名 調印함<연도>大正貳年</연도> 九月 卄七日<지명>扶安郡上東面新后里</지명>二六戶賣渡人 <인명>金明燮</인명>[印]<지명>扶安郡上東面卜星里</지명>二四戶保證人 <인명>金奉三</인명>[印]買受人 <인명>李孟三</인명> 殿左記<지명>扶安郡上東面卜星里</지명>陶 一00七 二田 一味一斗落結貳負五束也余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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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4년 고덕인(高德仁)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十年甲午二月初十日 高德仁 光緖二十年甲午二月初十日 고덕인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4년(고종 31) 2월 10일에 유학 고덕인(高德仁)이 부안 상동면(上東面) 제내리(堤內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4년(고종 31) 2월 10일에 유학 고덕인(高德仁)이 다른 곳의 전답을 매입하기 위하여 부안 상동면(上東面) 제내리(堤內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거래가 된 논은 부안 상동면 제내리에 있는 촌전답(村前畓) 9두락, 칭자정(稱字丁) 18복 5속으로, 225냥을 받고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1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문서 말미에 김제(金堤) 김옥현(金玉玄)의 신문기 1장이 다른 논과 붙어 있기 때문에 부득이 본문기를 출급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고덕인과 증인으로 유학 심원중(沈元仲), 증필로 유학 심문경(沈文京) 등 3명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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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五十八年癸丑</연도>四月初六日<인명>辛命直</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矣兩親過葬次外家衿得是在扶北一作伏在<지명>一道之飛里</지명>前坪溫字畓八斗落只所耕二十四卜六束庫及同畓七斗落只所耕二十一卜八束庫果又同畓六斗落只所耕十八卜七束等庫良中折價錢文參百拾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七張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族屬中如有雜談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呈事畓主喪人<인명>金履直</인명> 喪人證人<인명>崔德寬</인명>[着名]筆執幼學<인명>金廣履</인명>[着名]定只堤下三巨里梁俠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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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二十一年丙子</연도>十二月初八日幼學<인명>金昌海</인명>前明文右明文爲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耕食是在<지명>之飛里</지명>前坪一作溫字畓捌斗落只所耕貳拾伍卜參束庫乙價折錢文玖拾伍兩以交易依數捧上爲遣右人前本文記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良中同生子孫中如有雜談隅是去等此文記內兒爲告官卞正事畓主故<인명>金明輝</인명>妻<인명>朴召史</인명>[右掌]證 <인명>金仁才</인명>[着名]筆執幼學 <인명>孫萬雄</인명>[着名]新明文中稱八斗落只今量所耕二十四卜六束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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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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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고(故) 김명휘처(金明輝妻) 박소사(朴召史)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十一年丙寅十二月十六日 李夏悅 故金明輝妻朴召史 乾隆十一年丙寅十二月十六日 李夏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左寸]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46년(영조 22) 12월 16일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이하열(李夏悅)이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고(故) 김명휘(金明輝)의 처(妻) 박소사(朴召史)의 전답과 상환(相換)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46년(영조 22) 12월 16일에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중방리(中方里)에 사는 이하열(李夏悅)이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고(故) 김명휘(金明輝)의 처(妻) 박소사(朴召史)의 전답과 상환(相換)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하열은 전답의 위치 때문에 농사 짓기가 어렵자 지비리 전평(前坪)에 있는 온자답(溫字畓) 25부 3속이 되는 곳을 박소사 소유의 근처 임자답(臨字畓) 12두락지와 맞바꾸기로 하였다. 상환하는 대신에 박소사에게는 40냥을 주기로 하였다. 거래하면서 박소사로부터 본문기 2장을 받았으며, 자신은 박소사에게 이 명문과 패자(牌子) 등 11장을 넘겨주었다. 만일 차후에 자손들 중에게 이 거래를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官)에 알려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 이하열은 외손가락 마디를 그려 서명을 대신하였으며, 증인으로는 무학(武學) 김초상(金楚相)이, 필집(筆執)으로는 유학(幼學) 최석귀(崔碩龜)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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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3년 진제택(陳濟澤)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四月十四日 陳濟澤 光武七年癸卯四月十四日 陳濟澤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 4월 14일에 진제택(陳濟澤)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 4월 14일에 진제택(陳濟澤)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진제택은 혼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삼현동 앞들에 있는 논 6마지기를 260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17부 4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4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진제택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장내성(張乃成)과 유학 홍석교(洪石喬)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武七年癸卯</연도>四月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以婚用處故伏在<지명>下西三賢洞</지명>前坪字畓六斗落只所耕拾柒負四束㐣價折錢文貳佰六十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四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인명>陳濟澤</인명>證人 幼學 <인명>張乃成</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洪石喬</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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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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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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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6년 김성운(金成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三月初八日 金成雲 光緖十二年丙戌三月初八日 金成雲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3월 8일에 김성운(金成雲)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3월 8일에 김성운(金成雲)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성운은 자신이 매득한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賢洞) 앞들에 있는 부자답(扶字畓) 6마지기를 27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3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성운과 증인(證人)으로 하자중(河子中)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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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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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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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二年丙戌</연도>三月初八日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伏在<지명>下西三賢洞</지명>前坪扶字畓六斗落只所耕十七負四束㐣價折錢文二十七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三丈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端則持此文記告官卞政事畓主 <인명>金成雲</인명>[着名]證人 <인명>河子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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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武四年</연도>庚子十二月初九日 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雙口堤下基畓芥字畓玖斗落所耕十五負五束庫乙価折錢文陸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言持此文記憑考事畓主喪人 <인명>金元謙</인명> 喪不着訂人 <인명>南汝順</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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