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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六年丁卯</연도>正月初二日<인명>崔永心</인명>前明文右明事段傳來畓數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지명>弓月里</지명>西坪乃字畓九斗落所耕宮結二十九負二束㐣價折錢文㱏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他畓倂付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인명>辛寬玉</인명>[着名]證筆 <인명>金致化</인명>[着名](背面)<지명>弓月里</지명>竹薪後下星西九畓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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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李宗愿) 실기(實記)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李宗愿 李宗愿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이다. 그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종원의 자(字)는 사근(士謹)이며, 1712년(숙종 38년)에 태어나 1792년(정조 16년) 80세에 세상을 떠나 부안현 자미동(慈尾洞)에 묻혔다. 부인은 담양전씨(潭陽田氏)이다. 그는 겨우 10여 세 나이에 집안의 조부모와 부모를 2년에 걸쳐 연이어 돌아가시게 되는 아주 혹독하고 큰 화를 당하여 한 가문의 애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린아이 나이로써 화를 피하러 혹은 남원 외숙에게 가서 의지하거나 혹은 서울 일가들에게 가서 머물거나 하면서 시일을 보낸 지 10여 년 후에는 부안에 사는 이종사촌 성만통(成萬統)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33세에 비로소 혼인을 하고 돌아와 부안에 의탁하며 살게 되었다. 그는 자제(子弟)들을 가르치는데 애써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예를 부흥시켜 종가(宗家)를 위하고 별도로 조상의 제사를 위하는 터전을 두어서 이미 무너진 문벌(門閥)이 다시 창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의 효성과 우애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아주 순진한 어렸을 때이지만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였던 것이 평생토록 고통이 되어 매번 돌아가신 임계(壬癸)년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부모의 기일이 되면 문과 뜰 안팎으로 물을 뿌리고 쓸어내고 청소하며 일체 외부인이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제사에 쓰는 음식은 반드시 넉넉하게 하고 또한 지극히 정결스럽게 하였다. 저녁에는 엄숙하게 의관을 정돈하고 바르게 앉아 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도록 잠깐이라도 곁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가 제사 때에 이르면 슬피 부르짖으며 절도의 한계를 넘었다. 그의 나이 80에 가까이 되자 병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사에 빠진 일이 없었다. 그리고는 옛날 부모의 상(喪) 때 연이은 상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실패하였기 때문에 초종(初終) 제사에 한치의 비단도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오늘날 비단으로 짠 옷을 입고 스스로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면서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에게는 둘째와 셋째 동생이 함양(咸陽)에 살고 있었는데, 둘째 동생은 가난하며 자식이 없었고 셋째 동생은 일찍 사망하였고 3명의 자식은 모두 어렸다. 그가 중년에 모두를 데리고 와서 집과 밭을 사서 나누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 우애가 융성하고 돈독하였다. 고을 사람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며 물질로써 은혜를 베풀고 모자람이 없이 지극하여 인근 마을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흠모하였다. 그가 일찍이 바쁘게 피해 다닐 때 학문에 마음을 쏟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이제 그 어려운 때를 벗어나 많은 순수한 서책을 가지고 두문불출하고 정좌하며 깊이 빠져 반복하여 읽으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문장의 뜻이 막히면 그 뜻이 해석될 때까지 깊은 곳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해득하였다. 음양술수(陰陽術數)에 관한 서적도 또한 모두 통달하였는데, 특히 역서(易書)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에 ?험역방(驗易方)?이라는 책 2권을 후세에 남겼다. 그 사이에 또한 필적에 뜻을 두고 한 자 한 획을 반듯하게 써서 해정(楷正)의 주동자가 되었고 초서(草書)도 또한 이와같이 베껴 쓴 서편(書篇)이 매우 많아 후세 사람들의 모본(摹本)이 되었다. 그의 성품은 밖으로는 엄격하고 안으로는 관대하여 보통 사람이 처음 가까이할 때도 늠름하지만 무시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온화하여 춘풍에 따스한 기운이 도달하고 있어 사람들이 처음에는 두렵게 여기지만 나중에는 기뻐하였다. 그의 가정과 일의 성취에 대하여 말한다면 어려운 형편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학문에 대하여 말한다면 은덕(隱德)의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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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이주봉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가대(家垈)인 상서면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어자(於字) 초가 3칸과 모시밭 7 대락(隊落), 콩밭 1석 등을 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추기로 시중의 이자(利子) 예에 따라 7월 그믐 안에 빚을 갚을 시 집과 토지를 도로 물릴 수 있다고 하였으며 93냥 6전 속에 3냥 6전에는 이자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이 문서는 매매명문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상 가대와 밭을 전당 잡히고 돈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래 당시 가대 주인 이주봉은 상을 당하여 거래에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강영기(姜永氣)와 김기종(金基鐘)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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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隆熙三年</연도>閏二月右票事擔內堤下鳴字西庫六斗落男字畓五斗落放賣於右宅是乎所雖無證明一無有獘之歎而設或有後獘自己擔當之意如是成票事票主 <인명>李碩奇</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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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이석기(李碩基)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年丙午三月初二日 李碩基 大韓光武十年丙午三月初二日 이석기 전북 부안군 [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 3월 2일에 이석기(李石奇)가 부안 남중작(南中作) 담내제(擔內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 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6년 3월 2일에 이석기(李石奇)가 부안 남중작(南中作) 담내제(擔內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 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석기는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세를 받아오다가 형펀이 좋지 않아 담내제 아래에 있는 남자답(南字畓) 5두락을 37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2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이석기와 증인으로 오양숙(吳良淑)이 거래에 참여하여 날인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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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光武十年</연도>丙午三月初二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收稅是如可勢不得而夫伏在<지명>南中作擔內堤</지명>下男字畓五斗落只所耕十六負五束㐣價折錢文參佰柒什兩依數捧上是遣以舊文記二丈新文一丈果合三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 <인명>李碩基</인명>[印]證人 <인명>吳良淑</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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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장진홍(張辰弘)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九年癸巳 畓主 幼學 張辰弘 光緖十九年癸巳 張辰弘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1.0*1.0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3년(고종 30) 1월 17일에 장진홍(張辰弘)이 토지를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 1893년(고종 30) 1월 17일에 유학(幼學) 장진홍(張辰弘)이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문서 첫머리에는 본 문서를 작성한 해가 적혀 있는데, 이를 보면 광서(光緖)라는 중국 측의 연호(年號)가 적혀 있다. 우리나라에서 작성되는 문서에 중국의 연호를 적은 것은 본 문서를 작성할 당시만 해도 아직 우리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만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이었다. 이 해 사용한 연호는 건양(建陽)이었다. 정진홍이 팔고자 한 논은 남중작(南中作) 담내제(擔內堤)에 있던 남자(男字) 논 5두락이었다. 매매 대금은 200량이었다. 하지만 정진홍이 누구에게 위 논을 팔고자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매수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진홍이 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단순히 돈이 필요해서라고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었다. 한편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정진홍은 본 논의 이전 매매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 2장을, 새로운 매수자에게 넘겨 주었다. 한편 본 문서를 작성한 정진홍은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유학(幼學)이라는 칭호를 쓴 점으로 알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증인이나 또는 본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모두 정진홍과 마찬가지로 양반이었는데, 어떤 거래 과정에서 양반이 직접 참여하는 예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개는 자신 집에서 부리고 있는 노(奴)를 대신하였는데, 그런 점에서 본 문서는 조금 특이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6년 이석기(李碩基)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이자, "1879년 오화영(吳和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신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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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隆熙四年</연도>三月初五日前明文右明文事當此窮春勢不得而耕食田夫伏在<지명>萬頃南一面竗羅洞</지명>場字田四斗落只所耕九負㐣価折捌拾兩依數捧上爲遣旧文幷付他卷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四表東<인명>姜興叔</인명>田 南<인명>任昌叔</인명>田西路 北<인명>任文淑</인명>田田主 <인명>任道淑</인명>[印]證人 <인명>姜興叔</인명>[印]里長 <인명>任殷淑</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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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이공필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隆熙二年戊申二月二十二日 李公弼 隆熙二年戊申二月二十二日 전북 부안군 [印], [着名] 2개 1.3*1.3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8년(융희 2) 2월 22일 이공필(李公弼)이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도하리(道下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8년(융희 2) 2월 22일 이공필(李公弼)이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도하리(道下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이공필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 만경군 남일면 도하리 제방 아래 정자전(貞字田) 12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7부(負) 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40냥이다. 도하리는 오늘날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매도인(賣渡人) 이공필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이공필과 증인(證人) 서민택(徐敏澤), 증필(證筆)은 임은숙(任殷淑)이 참여하였다. 임은숙은 상중(喪中)이어서 도장을 찍었고 답주와 증필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문서 뒷면에는 '萬頃石洞李公弼十二斗落文券' 만경현 석동에 사는 이공필의 12두락지 문권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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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三年甲戌</연도>十月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지명>東道面澤上洞</지명>前坪伏在玄字畓八斗落所耕拾扒卜壹束庫果柴場貳拾同落庫叱折價錢文壹佰玖拾兩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以此新旧文記憑考事畓主幼學 <인명>辛敬重</인명>[着名]證人幼學 <인명>金利仲</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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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拾柒年壬申</연도>二月初九日<인명>朴生立諸子孫</인명>等處明文右明文爲臥乎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如可<지명>一道面</지명>壹作伏在務字畓拾伍斗落只所耕參拾柒負庫乙捧價錢貳百兩依數交易捧上爲遣右人前本文記二丈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良中同生子孫中如有雜談之弊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인명>李大建</인명>[着名]證人 <인명>鄭禿邑山</인명>[着名]筆執 <인명>金鳳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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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황찬성(黃贊成)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黃贊成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황찬성은 긴히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은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2두락지(斗落只) 밭이며 부수(負數)로는 4부(負) 1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7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황찬성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전답(田畓)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황찬성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는 유학(幼學) 조백현(曺伯賢)이 참여하였다. 조백현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이 문기에서는 매매 대상이 논인지 밭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 기재된 '傳來畓'을 통해 보면 논이 분명하지만, 마지막 부분 '田主 黃贊成'을 통해 보면 본 문기의 매매 대상은 밭이 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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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三年</연도>丁亥三月初二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伏在<지명>下西老道</지명>前坪佳字畓玖斗落只所耕十七負七束廤乙以要用所致価折錢文陸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一張果舊票一張幷新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爻象之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金殷淑</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高壽敏</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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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八年<연도>壬辰六月晦日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勢不得已草家四間舍太田三斗落只所耕 㐣折價錢文肆拾陸兩依數捧上是遺旧文記中間流失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丈右處永永放賣爲去乎日后若有他說則以此文記告官憑爲乎乙事家垈主 <인명>林自雲</인명>[着名]證人 <인명>金益化</인명>[着名]筆執 <인명>金道範</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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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강치언(姜致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三月二十二日 姜致彦 光緖四年戊寅三月二十二日 姜致彦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3월 22일에 강치언(姜致彦)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평(長水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3월 22일에 강치언(姜致彦)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평(長水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상동면 장수평의 궐자답(闕字畓) 3두락지로, 부수로는 11부 7속이 되는 곳인데, 이 중 3복이 진탈(陳頉)로 빠져 실제로는 8부 7속이며, 매매가격은 25냥이었다. 진탈은 경작하지 않고 묵혀둔 곳으로 조세 대상에서 제외된 곳을 가리킨다. 강치언은 구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강치언이 문서를 자필로 작성하고 서명하였으며, 염석철(廉碩澈)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상동면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에 해당하지만, 장수평이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문서는 "1887년 김인숙(金仁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 즉 1887년(고종 24) 12월에 김인숙(金仁淑)이 같은 곳의 논을 팔면서 매입자에게 건네준 구문기 중 하나이다. 같은 3두락지인데도 9년 만에 논값이 25냥에서 30냥으로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 또다른 구문기 "1858년 이시용(李時容)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에 따르면, 이 논은 1858년 당시에는 50냥으로 거래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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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四年戊寅</연도>三月二十二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지명>上東長水內坪</지명>闕字畓三斗落卜數十一負七束內三卜陳頉實八卜七束庫乙價折錢文貳拾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丈並以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筆<인명>姜致彦</인명>[着名]證人 <인명>廉碩澈</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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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이시용(李時容)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八年戊午二月二十日 幼學李時容 咸豐八年戊午二月二十日 幼學李時容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8년(철종 9) 2월 20일에 유학(幼學) 이시용(李時容)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내평(長水內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8년(철종 9) 2월 20일에 유학(幼學) 이시용(李時容)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장수내평(長水內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경작해 왔으나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은 상동면 장수내평의 궐자답(闕字畓) 3두락지로, 부수로는 11부 7속이 되는 곳인데, 이 중 3복이 진탈(陳頉)로 빠져 실제로는 8부 7속이며, 매매가격은 50냥이었다. 진탈은 경작하지 않고 묵혀둔 곳으로 조세 대상에서 제외된 곳을 가리킨다. 이시용은 구문기가 다른 전답의 문서에 함께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만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유학(幼學) 이시백(李始白)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상동면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에 해당하지만, 장수평이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문서는 "1878년 강치언(姜致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887년 김인숙(金仁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이기도 하다. 즉 1878년이 강치언이 같은 논을 팔 때, 그리고 1887년(고종 24) 12월에 김인숙(金仁淑)이 같은 논을 팔 때 매입자에게 건네준 구문기였다. 진탈로 3복이 빠진 것도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같은 논이 1858년에는 50냥이었지만, 1878년에는 25냥으로, 그리고 1887년에는 30냥으로 거래가격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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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豐八年戊午</연도>二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傳來耕食是如可要用所致伏在<지명>上東長水內坪</지명>闕字畓三斗落卜數十一負七束內三負陳頉實八卜七束庫乙價折錢五十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他田畓幷付故未得出給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日後如有異說持此文相考事畓主幼學<인명>李時容</인명>[着名]證筆幼學<인명>李始白</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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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弓月里坪太石尤畓 三夜伊 十六斗落 鳥字三十七卜僧畓 三夜伊 十二斗落 官字二十八卜六束柳亭畓 四夜伊 九斗落 官字二十一卜六束崔石尤畓 一夜伊 九斗落 乃完結二十九卜二束下崔石尤畓 二夜伊 十二斗落 乃三十五卜五束石橋畓 二夜伊 十二斗落 又渠永一斗落 服之三十卜一束長夜伊 五夜伊 八斗落 服之二十卜一束居賣 <인명>金元謙</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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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八年己巳</연도>十一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移買次伏在<지명>上東肇開洞</지명>村前官字畓玖斗落所耕二十四負六束庫乙折價錢文㱏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段幷付他畓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是去等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筆幼學<인명>崔錫萬</인명>[着名]己巳十一月二十五日 前受記右標事段無他九斗落畓放賣而旧文記幷付他畓故不得出給之意新文中筆之更有疑訝故以手記一丈幷給若有他說以此手記告官卞正事標主幼學<인명>崔永壽</인명>[着名](背面)韓木亭本里<인명>崔永壽</인명>橋洞里前九斗落文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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