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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全羅北道 古阜郡</지명><지명>宮洞面 靑良里</지명> 洞第 統苐戶籍表第 號 註明戶主 <인명>宋馹淳</인명> 年四十七 本礪山 職幼學 業農 前居地 移居月日父 學生 <인명>鎭龜</인명>生父祖 學生 <인명>培</인명>曾祖 學生 <인명>奎燦</인명>外祖 學生 <인명>黃永煥</인명> 本<지명>紆州</지명>同居親屬妻 <인명>丹陽禹氏</인명>歲四十八子 幼學<인명>榜玉</인명>年二十九婦 婦<인명>興城張氏</인명>歲二十八寄口 : 男 口 女 口雇傭 : 男 一口 女 口現存人口 : 男 二口 女 二口 共合 : 五口宅家 : 己有 瓦 間 草六間 借有 瓦 間 草 間 共合 : 間<연도>光武八年</연도>二月 日 郡守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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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기묘년(己卯年) 준여(俊汝) 분급기(分給記)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경제-상속/증여-분재기 己卯十月十八日 全州李氏家 己卯十月十八日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기묘년(己卯年) 10월 18일에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분급기(分給記). 기묘년(己卯年) 10월 18일에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유사(有司) 준여(俊汝)가 작성한 분급기(分給記)이다. 종중에서 추강(秋講) 행사에 필요한 자금을 삼도종인(三道宗人)에게 분배하면서 작성한 문서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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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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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지명>全羅北道 古阜郡</지명><지명>宮洞面 靑良里</지명> 洞第 統苐戶籍表第 號 註明戶主 <인명>宋馹淳</인명> 年四十七 本礪山 職幼學 業農 前居地 移居月日父 學生 <인명>鎭龜</인명>生父祖 學生 <인명>培</인명>曾祖 學生 <인명>奎燦</인명>外祖 學生 <인명>黃永煥</인명> 本<지명>紆州</지명>同居親屬妻 <인명>丹陽禹氏</인명>歲四十九子 幼學<인명>榜玉</인명>年三十婦 婦<인명>興城張氏</인명>歲三十寄口 : 男 口 女 口雇傭 : 男 口 女 口現存人口 : 男 一口 女 二口 共合 : 三口宅家 : 己有 瓦 間 草 二間 借有 瓦 間 草 間 共合 : 間<연도>光武十年</연도>二月 日 郡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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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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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지명>全羅北道 古阜郡</지명><지명>宮洞面 靑良里</지명> 洞第 統苐戶籍表第 號 註明戶主 <인명>宋馹淳</인명> 年四十六 本礪山 職幼學 業農 前居地 移居月日父 學生 <인명>鎭龜</인명>生父祖 學生 <인명>培</인명>曾祖 學生 <인명>奎燦</인명>外祖 學生 <인명>黃永煥</인명> 本<지명>紆州</지명>同居親屬妻 <인명>丹陽禹氏</인명>歲四十七子 幼學<인명>榜玉</인명>年二十八婦 婦<인명>興城張氏</인명>歲二十七寄口 : 男 口 女 口雇傭 : 男 一口 女 口現存人口 : 男 二口 女 二口 共合: 五口宅家 : 己有 瓦 間 草 六間 借有 瓦 間 草 間 共合 : 間<연도>光武七年</연도>二月 日 郡守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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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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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全羅北道 古阜郡</지명><지명>宮洞面 靑良里</지명> 洞第 統苐戶籍表第 號 註明戶主 <인명>宋馹淳</인명> 年四十三 本礪山 職幼學 業農 前居地 移居月日父 學生 <인명>鎭龜</인명>生父祖 學生 <인명>培</인명>曾祖 學生 <인명>奎燦</인명>外祖 學生 <인명>黃永煥</인명> 本<지명>紆州</지명>同居親屬妻 <인명>丹陽禹氏</인명>歲四十四子 幼學<인명>榜玉</인명>年二十五婦 婦<인명>興城張氏</인명>歲二十四寄口 : 男 口 女 口雇傭 : 男 一口 女 口現存人口 : 男 二口 女 二口 共合 : 五口宅家: 己有 瓦 間 草 六間 借有 瓦 間 草 間 共合 : 間<연도>光武四年</연도>二月 日 郡守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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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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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受証一金壹百七拾七円貳拾戔也右<지명>衣服洞</지명><인명>鄭公仁</인명>畓土價金으로正히領受홈<연도>大正二年</연도>陰五月二十七日<지명>下西面老谷里</지명>二統五戶領受人 <인명>金化西</인명>[印]再異動은今陰六月十日로홀事<인명>李承冕</인명>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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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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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4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二年陰五月十九日 金化西 李承冕 大正二年陰五月十九日 金化西 전북 부안군 [印] 1개 1.2*1.2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음력 5월 1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승면(李承冕)에게 논값을 받았다고 써 준 영수증(領受証). 1913년 음력 5월 1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승면(李承冕)에게 논값을 받았다고 써 준 영수증(領受証) 영수증(領受証)이다.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사는 김화서가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정공인(鄭公仁)의 논값으로 50원(円)을 잘 받았다고 이승면에게 써 준 영수증이다. 김화서는 정공인에게 위임받아 일을 처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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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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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9년 전인봉(田仁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八年丁巳 田仁鳳 同治八年丁巳 田仁鳳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9년(고종 6) 2월에 전인봉(田仁鳳)이 논을 팔면서 작성한 문서 1869년(고종 6) 2월에 전인봉(田仁鳳)이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임자답(臨字畓) 8두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매매 금액은 150냥이었다. 금액으로 부아 논의 크기가 상당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논은 전인봉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들인 후 경작해 오던 것이었는데, 이번에 팔게 된 것이었다. 전인봉은 이 논을 팔면서, 이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되었던 문서들도 함께 새로운 매수자에게 내 주어야 했었다. 그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구문일장 병이신문기(以舊文一張倂以新文記)"라고 적은 부분이 바로 그와 관련한 내용이다. 한편 전인봉은, 문서 "1870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에 의하면 부안군의 서원(書員)을 지낸 자였을 가능성이 많다. 서원이란 중앙과 외방의 관아(官衙)에서 주로 행정 실무를 담당한, 바 이속(吏屬)이었다. 이른 바 중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양반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전에 사용하던 유학(幼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전인봉이 원래는 양반의 신분이었는데 서월을 지낸 것인지 아니면 중인들도 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852년 강주환(姜周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신문기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위의 논을 거래하면서 전인봉이 매입자에게 건네 주었던 구문기가 위 강주환의 문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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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八年丁巳</연도>二月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食矣伏在<지명>一道</지명>定只堤下臨字畓八斗落所耕十八負八束庫乙価折錢文㱏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而以舊文一張倂以新文記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則持此文憑考事畓主 自筆 幼學 <인명>田仁鳳</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崔恒厚</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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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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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三年癸未</연도>三月 日 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窮節生道極艱自己買得是在伏在<지명>東道面擇相洞</지명>玄字畓八斗落只所耕六束庫乙捧價錢柒拾兩是遣旧文書貳丈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間如有異談是去等以此文記告官卞政事畓主自筆 <인명>金致珪</인명>[喪人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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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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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十年丙午</연도>十二月初八日 明文右明文事當此窮節錢政葛藤故不得已伏在<지명>仙隱</지명>村中字苧田一隊落所耕一負五束㐣折価錢文貳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苧田主自筆 <인명>李勉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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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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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五年己丑</연도>十二月十四日 前明文右明文事有緊用處伏在南中作<지명>竗羅坪</지명>食字田四斗落所耕九負盖字田四斗落所耕十負庫乙價折錢文捌拾陸兩依數捧上是遣並舊文二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記憑考事田主<인명>鄭順翼</인명>[着名]證人<인명>朴成老</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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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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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十年丙午</연도>十一月初九日 明文右明文事當此窮節錢政葛藤故不得已伏在<지명>仙隱洞</지명>村前 字畓苧田一隊落所耕 㐣折価錢文伍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苧田主自筆 <인명>李勉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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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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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6년 이면수(李勉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年丙午 苧田主自筆 李勉秀 大韓光武十年丙午 李勉秀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 12월 8일 이면수(李勉秀)가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1906년 12월 8일 이면수(李勉秀)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이 밭은 선은동(仙隱洞)에 있었는데, 크기는 1대락(隊落)이었으며, 매매 대금은 20냥이었다. 밭의 크기를 재는 단위 가운데 대락은 매우 생소하다. 고문서에서 대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도 거의 없는 듯하다. 따라서 1대락이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면수가 위 모시밭을 팔게 된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였다. 아마도 올해 가을 작황(作況)이 좋지 못하였고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곡식을 살 정도의 돈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면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위 모시밭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들도 같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전 문서를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중간유실 고이신문일장 우전영영방매위거호(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라고 말한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그런데 본 문서의 내용은 바로 앞서 소개된 "1906년 이면수(李勉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의 문서와 그 내용이 같다. 모시밭의 위치나 크기도 동일하다. 틀린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매매 가격인데, 그렇다면 앞서 거래한 모시밭과 이번에 거래한 모시밭을 동일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같은 지번에 있는 모시밭을 두 차례로 나누어 매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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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연도>明治四十四年辛亥</연도>正月十六日土地賣買契約書右契約事以要用所致故夫伏在<지명>萬頃郡南一面竗羅里</지명>後坪場字田三斗落只食字田㱏斗落只結兩合三負五束廤価折錢文玖拾伍兩右前依數捧上是遣租稅每年牟太㱏石酌定則旧文一丈果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홈四標東 <인명>金春三</인명>家 南 <인명>崔乃元</인명>田西 <인명>金益弘</인명>畓 北 <인명>姜興淑</인명>田住所 竗羅田主 <인명>任道淑</인명>[指掌]保證 <인명>姜興淑</인명>[印]里長 <인명>任公烈</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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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下西面老溪洞前坪自己買得太種田九斗落所耕十三負二束㐣価折前文一百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段家垈文書並付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若有日後他說則持此文憑考事田主 幼學 徐乃烈[着名]證筆 幼學 姜奉國[着名]此亦中 文書債三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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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七年辛巳</연도>十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傳來苧田一斗落所耕八束㐣伏在<지명>東道仙隱洞</지명>村中而價折錢文拾伍兩依數捧上是遣以舊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端以此憑考事苧田主幼學<인명>田仁厚</인명>[着名]證筆 幼學<인명>田溶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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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11년 전공칠(田公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辛亥正月晦日 幼學田公七 辛亥正月晦日 幼學 田公七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1년 정월 그믐날에 전공칠(田公七)이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있는 채전(菜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1년 정월 그믐날에 전공칠(田公七)이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있는 채전(菜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이 밭을 팔았다. 매매 대상이 된 밭은 제자(帝字) 90경(頃)이 되는 곳의 채전 1두락으로, 부수로는 1부(負)가 되는 면적이며, 거래 가격은 27냥이었다. 그는 신문기와 구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유학 강화옥(姜化玉)이 필집(筆執)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년대가 신해년으로만 적혀 있지만, 강화옥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한 또다른 문서, "1904년 전재열(田在悅)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을 통해서 신해년을 1911년 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문서에 매입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밭의 소재지이자 이 문서의 소장처인 선은동에 살았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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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3년 김용술(金龍述)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二年癸亥四月十六日 幼學金龍述 同治二年癸亥四月十六日 幼學金龍述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3년 4월 16일에 유학(幼學) 김용술(金龍述)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전평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3년 4월 16일에 유학(幼學) 김용술(金龍述)이 부안현 일도면 송곶전평에 있는 논들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다른 전답을 사기 위하여 팔게 되었다고 매매 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일도면의 송곶 전평(松串前坪)에 있는 금자답(禽字畓) 2두락지로, 부수로는 5복 5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2두락지로, 부수로는 2복 7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4두락지로, 부수로는 10복 9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4두락지로, 부수로는 10복 9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3두락지로, 부수로는 9복 4속이 되는 곳과, 같은 금자답 2두락지로, 부수로는 4복 5속이 되는 곳 등 여섯 곳에 걸쳐 있는 17두락지의 논이었다. 매매가격은 120냥이었다. 그는 구문기와 신문기 등 3장을 매입자에게 넘겨주면서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김용술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유학 오상문(吳相文)과 유학 김경옥(金慶玉)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송곶평은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일대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문서에 매입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문서의 소장처인 선은동에 살았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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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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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嘉慶五年</연도>庚申十一月十八日<인명>宋舜男</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棄年生道極難故<지명>下西</지명>伏在老谷前坪誡字畓六斗落所耕十三負三束㐣價折錢文壹百拾伍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本文記一丈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談是去乎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 <인명>李六孫</인명>[着名]證人 <인명>宋奉伊</인명>[着名]筆 <인명>李平彦</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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