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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乙巳</연도>八月初三日 前明文 太三斗右明文事以急用處伏在<지명>乾川里㫌門嶝坪</지명> 字田五斗落只山稅四負五束庫果柴場五同㐣価折錢文五拾兩依數捧上是遺舊文記中問有失故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他說則以此文憑考事太田主 幼學 <인명>金處一</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金暢學</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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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乙巳年) 최치삼(崔致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乙巳七月二十日 崔致三 乙巳七月二十日 최치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을사년 7월 20일에 유학 최치삼(崔致三)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을사년 7월 20일에 유학 최치삼(崔致三)이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건천리(乾川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최치삼은 곤궁한 시절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자신이 매득한 건천리 전평에 있는 태종전(太種田) 5두락을 50냥에 팔았다. 만일 나중에 이 밭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문서 끝에 구문기가 다른 논에 붙어 있기때문에 신문기 1장만을 넘겨주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거래 당시 밭주인 유학 최치삼과 증필로 유학 강봉국(姜奉國)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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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乙巳</연도>七月二十日 前明文 大三斗右明文事段當此窮節生活無路故自己買得伏在<지명>下西面乾川里前坪</지명>太種田 字五斗落山稅十一負四束㐣価折錢文五十兩依數捧上是召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若有日後他說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 此亦中旧文他田畓並付故以新文一章永永放賣田主 幼學 <인명>崔致三</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姜奉國</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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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이생원(李生員)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六月初七日 房致安 李生員 光緖三年丁丑六月初七日 방치안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6월 7일에 한량 방치안(房致安)이 이생원(李生員)에게 부안 택상동(宅上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6월 7일에 한량 방치안(房致安)이 이생원(李生員)에게 부안 택상동(宅上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방치안은 이전에 이생원에게 11냥을 빌렸는데 대흉년을 당하여 한 푼도 갚지 못하고 떠돌아 다닐 지경에 이르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택상동 들판에 있는 천자전(天字田) 5승락과 천자저전(天字苧田) 5승락을 이생원댁에게 대신 넘겨 주었다. 빚 11냥이 밭값이 된 것이다. 거래 당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주인 방치안은 상중이어서 서명하지 못하고 증인으로 유학 전용진(田溶鎭)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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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五年</연도>己丑七月十九日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草家四間折価錢文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永永放賣爲去乎以此新舊文憑後之地爲乎乙事家垈主 <인명>吳淳周</인명>[着名]證人 <인명>金元基</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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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임자운(林自雲)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八年壬辰六月晦日 林自雲 光緖十八年壬辰六月晦日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9) 6월 30일에 임자운(林自雲)이 초가(草家)와 태전(太田)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賣買明文) 1889년(고종 29) 6월 30일에 임자운(林自雲)이 초가(草家)와 태전(太田)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가대(家垈)의 주인 임자운은 자신이 매득하여 살던 초가(草家)와 태전(太田)을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문기에는 가대와 태전의 위치를 밝히고 있지 않다. 매매의 대상이 된 가대와 밭은 4칸 초가와 태전 3두락지(斗落只)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6냥이다. 여기서 태전은 콩밭을 말한다. 매도인(賣渡人) 임자운은 구문기는 유실(遺失)되어 내어 줄 수가 없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가대의 주인 임자운과 증인(證人) 김익화(金益化), 집필(筆執)은 김도범(金道範)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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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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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32년 정읍(井邑) 여산송씨(礪山宋氏) 민하동(民賀洞) 선산사건(先山事件) 비용기(費用記) 고문서-치부기록류-회계기 경제-회계/금융-회계기 壬申三月初二日 壬申三月初二日 礪山宋氏宗中 전북 정읍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32년 10월 9일에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민하동(民賀洞) 선산사건(先山事件)을 해결하는데 지출한 비용의 내역을 작성한 문서. 1932년 10월 9일에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민하동(民賀洞)에 있는 선산(先山)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는데 지출한 비용의 내역을 작성한 문서이다. 차압(差押) 문제를 해결하고 선산을 이장하는데 드는 비용, 민적(民籍) 정리, 취득세, 선산 송추(松楸) 벌금(伐金) 등의 내용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민하동은 원래 태인군 산외이변면에 속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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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정읍(井邑) 여산송씨(礪山宋氏) 계전부(契錢簿) 고문서-치부기록류-회계기 경제-회계/금융-회계기 礪山宋氏宗中 전북 정읍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계전부(契錢簿)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계전부(契錢簿)의 일부로 추정된다. 금렬 등 4인이 납부한 12원과, 복만 등 8명이 납부한 27원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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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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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갑자년(甲子年) 이돈선(李暾善)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子 弟李暾善 甲子 李暾善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갑자년(甲子年) 이돈선(李暾善) 서간(書簡) 갑자년(甲子年) 이돈선(李暾善)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초행일(初行日)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혼인식과 관련된 편지였음을 알 수 있다. 초행일이란 신랑(新郞)이 혼례식(婚禮式)을 치르기 위해 신부집으로 가는 혼례 의식을 말한다. 발행일시(發行日時)과 입문일시(入門日時)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데, 발행일시와 입문일시가 같은 날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랑집으로부터 신부집까지의 거리가 아주 먼 거리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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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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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36년 허순환(許順煥) 차용증서(借用證書) 고문서-증빙류-차용증 경제-회계/금융-차용증 昭和拾壹年旧十月七日 許順煥 昭和拾壹年旧十月七日 전북 고부군 1.5*1.5 1개(적색, 타원형)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36년 음10월 7일에 허순환(許順煥)이 작성한 차용증서(借用證書) 1936년 음10월 7일에 허순환(許順煥)이 작성한 차용증서(借用證書)이다. 허순환은 36원을 빌리고 1937년 음10월 30일까지 원리금(元利金) 전부를 상환하기로 약속하며 차용증서를 작성했다. 상환기간 내에 상환(償還)하기가 불가능하면 상환기일부터 납부 완료 때까지 지체 이자를 더하여 상환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채무자(債務者)나 연대채무자(連帶債務者)가 동등한 책임을 갖고 있다고 명시했다. 본 계약과 관련하여 소송(訴訟)이 발생하게 되면 채권자(債權者)의 주소지 관할 재판소에서 집행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본 차용증서는 작성이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자율이나 보증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을뿐더러 인장이 찍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채무자 허순환은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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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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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武六年壬寅</연도>二月日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南一作小石後坪鳴字畓三斗落所耕六負七束庫乙価折錢文壹百陸拾五兩依數捧上是遣永永放賣而旧文記段並付他畓以新文一丈出給日後若有異說則以此證考事畓主 <인명>郭允擧</인명>[着名]證人 <인명>成明叔</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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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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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2년 곽동서(郭東瑞)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八年壬辰 畓主 郭東瑞 光緖十八年壬辰 郭東瑞 전북 부안군 [着名] 1.0*1.0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2년 곽동서가 토지를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 1892년(고종 29) 곽동서(郭東瑞)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남일면(南一面) 소석리(小石里) 들판에 있는 빈자(賓字) 답(畓) 6두락과 명자(鳴字) 답 3두락과 봉자(鳳字) 답 8두락 등 세 곳이었다. 매매 가격은 250량으로, 상당한 규모의 거래였다. 곽동서는 본 논들을 매도하면서, 이 논의 이전 매매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들은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본 거래에서 곽동서로부터 논을 사들인 사람, 즉 매수자(買受者)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는데, 매매 명문에서 매수자의 이름을 적지 않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명문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매수자의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2년 곽윤거(郭允擧)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906년 이석기(李石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6년 함공수(咸公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등의 구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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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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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崔永心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7년(고종 4) 정월 초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서평(西坪)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7년(고종 4) 정월 초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서평(西坪)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논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내자답(乃字畓) 9두락, 부수(負數)로는 29부 2속인 곳으로 매매가격은 120냥이었다. 구문기는 다른 논문서에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만 매입자인 최영심에게 건네 주었다.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인 신관옥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김치화(金治化)가 문서를 작성하고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을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최영심은 같은 해 1867년 10월 10일에 상동면(上東面) 궁을리(弓乙里)에 있는 논 7두락을 70냥에 샀다.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참고. 최영심은 그 뒤 1890년 2월 17일에는 같은 지역에 있는 논 아홉 곳을 600냥을 받고 팔았다. "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참고. 최영심은 1890년 11월 초2일에는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동평(東坪) 통수동(通水洞)에 있는 의자답(衣字畓) 5두 5승락을 78냥에 팔았다. "1890년 최영심(崔永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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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六年丁卯</연도>正月初二日<인명>崔永心</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畓數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지명>弓月里</지명>西坪乃字畓九斗落所耕二十九負二束㐣価折錢文㱏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他畓倂付故未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인명>辛寬玉</인명>[着名]證筆 <인명>金治化</인명>[着名](背面)<지명>弓月里</지명>竹藪後下歲西九畓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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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최용갑(崔龍甲)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年壬午十月初五日 幼學 韓守光 崔龍甲 道光二年壬午十月初五日 幼學 韓守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2년(순조 22) 10월 초5일에 한수광(韓守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후평(後坪)에 있는 논을 최용갑(崔龍甲)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2년(순조 22) 10월 초5일에 한수광(韓守光)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후평(後坪)에 있는 논을 최용갑(崔龍甲)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을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사는 게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논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내자답(乃字畓) 12두락, 부수(負數)로는 35부 5속인 곳으로 매매가격은 85냥이었다. 본문기 1장을 매입자인 최용갑에게 건네 주었다. 뒷날 동생(同生) 자손(子孫)들과 족속 중에서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논 주인인 한수광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이득량(李得良)이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월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문서의 배면(背面)에 "仙洞李議官券 二丈"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에서 선동의 이의관은 이 문서는 소장처인 선은동의 부안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아마 이씨가에서 매입했던 논의 구문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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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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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丁未</연도>十二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移居次伏在<지명>中里</지명>俗坪 字太田㱏斗伍升落只所耕三負六束㐣価折錢文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他文倂付故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事田主 <인명>崔潤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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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염석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元年乙亥二月二十三日 廉錫龜 光緖元年乙亥二月二十三日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5년(고종 12) 2월 23일 염석귀(廉錫龜)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5년(고종 12) 2월 23일 염석귀(렴석龜)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염석귀는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황개산 정지제 아래에 있는 임자답(臨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1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9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염석귀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염석귀가 참여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一張)은 일장(一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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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8년 곽동홍(郭東洪)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隆熙二年 畓主 郭東洪 大韓隆熙二年 郭東洪 전북 부안군 [印], [着名] 0.9*0.9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8년(순종 2) 2월 24일에 곽동홍(郭東洪)이 작성하여 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8년(순종 2) 2월 24일에 곽동홍(郭東洪)이 남일면(南一面) 다복리(多福里) 앞의 양릉제(陽菱堤) 아래에 있는 유자답(有字畓) 15두락과 상자답(裳字畓) 4두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 가격은 1,400냥이었다. 매매 가격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토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곽동홍은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토지들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되었던 문서들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였다. 중간에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중간서실 고미득출급이(旧文記中間閪失故未得出給耳)"이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 내용이다. 곽동홍이 방매한 위의 논은 문서의 소장처로 미루어 볼 때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에서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大韓隆熙二年</연도>二月二十四日明右明文事以要用所致故傳來畓伏在<지명>南一面多福</지명>前坪陽菱堤下有字畓十五斗落只所耕二十九負二束庫果裳字畓四斗落所耕九負二束讓字畓三斗落所耕五負五束庫乙価折錢壹仟肆佰兩右前永永放賣爲去乎旧文記中間閪失故未得出給耳 日後若有他言則以此文憑考事畓主 <인명>郭東洪<인명>[印]證人 <인명>任成玉<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元年</연도>乙亥二月二十三日 右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지명>黃盖山定只堤</지명>下臨字畓四斗落只所耕十一負㐣価折錢文玖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一張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所若有異說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인명>廉錫龜</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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