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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同治八年</연도>十一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不得已天字垈田一斗落只所耕二負九束庫乙幷化穀價折錢文肆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有失故新文記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인명>田仲三</인명>[着名]證人 <인명>具俊化</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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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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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3년 김성채(金成彩)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 金成彩 大正二年 전북 부안군 [印] 0.8*0.8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4월 20일에 김성채가(金成彩)가 토지를 매도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3년 4월 20일, 김성채(金成彩)가 전북 부안군(扶安郡) 서면(西面) 돈지리(頓池里) 들판에 있는 황자(荒字) 답(畓) 4738번 3두락(斗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계약서(賣買契約書)이다. 매매 대금은 80냥이었다. 위 논은 김성채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김성채는 위 논을 매도하면서 위 논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있었던 문서를 본 문서와 함께 주었다. 한편 문서 마지막에 나오는 "再郡廳連名簿金成彩名下로在하니 陰四月晦日內異動ᄒᆞ을 事"라는 표현은 현재 이 논이 군청의 명부에는 김성채(金成彩)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음력 4월 안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이다. 이 가운데 "재(再)"는 추가할 내용이라는 의미이다. 군청 장부에는 아직 김성채의 소유로 되어 있으니, 소유권자의 이름을 매수자인 이경백으로 바꾸라는 뜻인 듯하다. 김성채가 방매한 위의 논은 문서의 소장처로 미루어 볼 때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에서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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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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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契約書右契約事ᄂᆞᆫ貴殿에土地를賣渡이온바保存證明件提出ᄒᆞ기가遲緩ᄒᆞᆫ故로今年陰三月十五日로期於提出ᄒᆞᆷ을意로如是契約홈 再若違限境遇면 移轉證明費를擔ᄒᆞᆯ事<연도>大正五年</연도>陰二月三日<지명>扶安郡上西面龍西里</지명>契約人 <인명>朴均碩</인명>[印]<지명>扶安郡山內面蓮洞里</지명>保證人 <인명>金俊相</인명>[印]<인명>李承冕</인명>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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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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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領收證一金은貳百円也右金은畓土價格中으로正히領受候也<연도>大正五年</연도>二月十五日領收印 <인명>朴均碩</인명>[印]<인명>李承冕</인명>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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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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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16년 박균석(朴均碩) 영수증(領收證) 2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大正五年陰二月三日 朴均碩 李承冕 大正五年陰二月三日 朴均碩 전북 부안군 [印]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6년 2월 3일에 박균석(朴均碩)이 이승면(李承冕)으로부터 토지거래 대금 220원을 받고 써준 영수증(領收證). 1916년 2월 3일에 박균석(朴均碩)이 이승면(李承冕)으로부터 토지거래 대금 220원을 받고 써준 영수증(領收證).이다. 박균석은 이 해 2월 13일에 부안군(扶安郡) 산내면(山內面) 연동리(蓮洞里)와 보안면(保安面) 만화동(萬化洞)의 논을 이승면(李承冕)에게 420원을 받고 팔기로 하는 내용의 매도계약서를 체결하였다. 아마 220원은 그 중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논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만화동은 부안군 보안군 신복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입자인 이승면은 이 문서의 소장처인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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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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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4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申 東道仙隱洞化民李奎煥 甲申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7.5*7.5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 21) 4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사는 이규환이 부안현감에게 올린 소지 2 1884년(고종 21) 4월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화민이란 교화된 백성이라는 의미로서, 양반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규환이 본 소지를 올리게 된 이유는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益上里)에 사는 김성숙(金成叔)과의 채무 관계 때문이었다. 이규환이 김성숙으로부터 추심해야 할 돈이 있는데, 김성숙이 이를 거부하자 소지를 올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이규환의 본 소지에 대해 부안현감은 김성숙이 갚기를 기다려보자는 조금은 유보적인 답변을 내 주었다. 한편 이규환은 김성숙과의 채무 관계 때문에 소지를 올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소지를 올렸고 또 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규환이 김성숙으로부터 추심해야 하는 것은 어떤 성격의 돈이었을까. 개인적으로 빌려준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세금과 관련한 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김성숙이 당사자는 아니었다. 김성숙의 아버지 김치서(金致西)가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은 개인적으로 착복하였고, 그로 인해 김치서가 감옥에 갇혔고, 이에 김치서의 아들인 김성숙이 그 돈을 대신 내도록 한 것이었다. 김성숙이 돈을 지금하면 아버지 김치서가 감옥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는데, 김성숙이 계속 돈을 갚지 않고 있자 결국 부안현감에게 소지를 올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 것이었다. 이규환의 소지에 대해 부안현감은 이규환에게 김성숙이 갚기를 기대해 보고 또 김성숙이 갚을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답을 내려 주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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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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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同治九年</연도>庚午五月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移買次<지명>上東面堤內里</지명>村前稱字丁九斗落所耕二十負二束庫果雙雇堤下醎字丁十三斗所耕三十負四束庫果馬尾山▣前翔字丁四斗落所耕十三負四束庫果師字丁五斗落所耕十三負四束庫果同字丁三斗落庫合五庫斗數三十四斗落廤折價錢文陸百玖拾肆兩依數捧上而旧文書四庫秩付在於他畓文券故只以一庫旧文二張與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以此憑考爲乎乙事畓主 <인명>辛在英</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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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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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康熙四十五年丙戌<연도>十一月二十七日<인명>金海萬</인명>處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以家夫生時衿得耕食是在北一作溫字畓貳拾㱏負庫良中價折錢文伍拾兩捧上爲遣右人處本文記一丈幷以許給永永放賣爲去乎日後家夫同生及子孫中如有雜談者是去等將此文告官卞正事畓主<인명>金氏</인명>[右掌]筆家夫同生弟<인명>金偉器</인명>[着名]證人家夫同姓姪<인명>啓亨</인명>[着名]新明文中稱六斗落只今量所耕十八卜七束庫二十四卜六束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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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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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康熙十一年壬子</연도>三月二十日<인명>金後磾</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以買得耕食爲如乎扶北一作溫字畓貳拾壹負庫良中價折常木伍同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後次雜談爲去等持此文告官卞正事畓主自筆<인명>金後宗</인명>[着名]證同生弟<인명>後柱</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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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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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康熙六十一年壬寅</연도>十二月二十七日<인명>姜奉鳩</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移買次以自己買得耕食累年爲如可末子碩輝衿付載錄爲有是乃矣身谷字成文爲臥所北一作溫字畓旧量二十四卜四束今量則貳拾壹負捌束庫乙勢不得已錢文參拾兩依數捧上爲遣右人處永永放賣爲乎矣本文記一丈?許給爲遣衿付都文記段他田畓並付仍乎不得許給爲去乎日後子孫中如有雜談爲去乎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인명>金先興</인명>[着名]證人 <인명>鄭日伊</인명>[左寸]筆執 <인명>金謂相</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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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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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康熙二十七年戊辰</연도>二月十六日<인명>金先龍</인명>處明文右明文爲臥乎事段貧寒所致祖上傳來衿得耕食爲是如可扶北一作伏在溫字畓貳拾肆負四束庫乙價折而白米貳百伍拾伍斗以依數交易捧上爲遣右人處本文記幷永永放賣爲去乎後次同生子孫中如有雜談爲去等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故<인명>崔承腋</인명>妻<인명>陳召史</인명>[右掌]證人出身<인명>呂仙吉</인명>[着名]證保<관직명>兼司僕</관직명><인명>鄭士宏</인명>[着名]筆執出身<인명>金文弼</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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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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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13년 김화서(金化西)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丑五月卄九日 金化西 李議官 癸丑五月卄九日 1913 金化西 전북 부안군 [印] 3개 1.2*1.2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5월 2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의관(李議官)에게 보낸 서간(書簡). 1913년 5월 29일에 김화서(金化西)가 이의관(李議官)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엊그제 약속한 볏섬 1석 10두를 이번에 의심하지 말고 출급(出給)하라는 것과, 정공인(鄭公仁)의 도장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이 편지는 정공인이 부안의 전주이씨가에 전답을 방매한 거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화서는 이 거래에 증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이씨가를 대신하여 정공인으로부터 거래금액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정공인(鄭公仁) 영수증(領受証) 1", "1913년 정공인(鄭公仁) 영수증(領受証) 2", "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1", "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2", "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3", 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4", "1913년 김화서(金化西) 영수증(領受証) 5" 등이 바로 이와 관련된 문서들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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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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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六年丁卯十月初十日 韓用夏 崔永心 同治六年丁卯十月初十日 韓用夏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7년(고종 4) 10월 10일에 한용하(韓用夏)가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을리(弓乙里)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7년(고종 4) 10월 10일에 한용하(韓用夏)가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궁을리(弓乙里) 전평(前坪)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이 논들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으나,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논을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대상이 된 논들은 복자답(服字畓) 7두락, 부수(負數)로는 20부 4속인 곳으로 매매가격은 70냥이었다. 구문기는 다른 논문서에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만 매입자인 최영심에게 건네 주었다. 뒷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논 주인인 한용하가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한용익(韓用益)이 문서를 작성하고 증인으로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논이 있는 상동면 궁을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장등리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최영심은 같은 해 11월 초2일에도 상동면(上東面) 궁월리(弓月里) 동평(東坪) 통수동(通水洞)에 있는 의자답(衣字畓) 5두 5승락을 78냥에 팔았다. 최영심은 이 해 정월에도 같은 지역의 논 9두락을 1백냥에 샀다. "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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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六年丁卯</연도>十月初十日<인명>崔永心</인명>前明文右明事段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지명>上東弓乙里</지명>前坪服字畓七斗落所耕二十負四束廤価折錢文柒拾兩依數捧上是遣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談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此亦中旧文記他畓倂付故不得出給事畓主 <인명>韓用夏</인명>[着名]證筆 <인명>韓用益</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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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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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二年丙子</연도>十二月初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食以多可不得已伏在<지명>立下面</지명>▣…[荷字苧田二斗五升落]職字太種田四斗落果苧▣…所耕六負九束㐣果▣…十同㐣価折錢文▣…捧乙以遣以新文▣…之放賣爲去▣…說卽以此▣…田主▣…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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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東道面仙隱洞里</지명>幼學<인명>李養灝</인명>年七十二壬午本全州父學生 <인명>宗愿</인명>祖學生 <인명>師閔</인명>曾祖學生 <인명>萬齡</인명>外祖學生<인명>田宜秋</인명>本潭陽妻<인명>申氏</인명>歲七十甲申籍平山父學生 <인명>光佑</인명>祖學生 <인명>㫾</인명>曾祖學生 <인명>思齊</인명>外祖學生<인명>李翼臣</인명>本延安子幼學<인명>翼容</인명>年三十二壬戌婦<인명>趙氏</인명>歲三十二壬戌籍漢陽孫<인명>甲吉</인명>年十二壬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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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김성채(金成彩)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金成彩 金成彩 전북 부안군 1.0*1.0 1개(흑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0년(순종 4) 2월 10일에 김성채가 논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일본과의 합병이 이루어지기 얼마 전인 1910년 2월 10일, 김성채(金成彩)가 오래 동안 경작해 오던 자신의 논 2마지기를 매도 방매(放賣)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매수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조선시대, 혹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작성된 명문을 보면 매수자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예는 많았다. 그것은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매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었기 때문이다. 김성채가 매도하고자 했던 논은 전북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 앞 들판에 있던 것이었다. 문서를 보면 4738번(畓)의 황자(荒字)라고 나오는데, 이러한 표기 방식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새로운 지번(地番)이 만들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매매 금액은 60냥이었다. 한편 김성채는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황자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만들어졌던 문서들도 함께 매수자에게 주어야 했다. 그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 옛 문서를 중간에 분실하였기 때문이다. "구문기중간서실(旧文記中間閪失)"라고 한 대목이 바로 그와 관련한 내용이다. 위의 논을 매입한 곳은 문서의 소장처로 미루어 볼 때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로 추정된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 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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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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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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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二年</연도>丙子十月二十九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當此荒年村中所用萬分時急故不得已三十餘年村中傳來伏在<지명>鳳山</지명>後坪興字畓七斗落只所耕二十一負㐣折価錢文五十二兩依數捧上是矣旧文段年久所致某某處探覓永無踪跡故以此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是乎矣日後若有村中他說則以此新文一張當告官卞正事洞中 <인명>金順五</인명>[着名]<인명>姜治賢</인명>[着名]<인명>李聚五</인명>[着名]<인명>田云仲</인명>[着名]<인명>廉錫九</인명>[着名]<인명>蔡春彦</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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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9년 오순주(吳淳周)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己丑七月十九日 吳淳周 光緖十五年己丑七月十九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6) 7월 19일에 오순주(吳淳周)가 초가(草家)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89년(고종 26) 7월 19일에 오순주(吳淳周)가 초가(草家)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가대(家垈)의 주인 오순주는 자신이 매득하여 살던 초가(草家)를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문기에는 가대의 방매(放賣) 사유, 위치 등을 밝히고 있지 않다. 매매의 대상이 된 가대는 4칸 초가로 매도 가격은 15냥이다. 매도인(賣渡人) 오순주는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신구(新舊)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가대의 주인 오순주와 증인(證人)으로는 김원기(金元基)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지명>東道仙隱洞</지명>化民<인명>李奎煥</인명>右謹言情由事民以<지명>上東益上里</지명><인명>金成叔</인명>處捧債納稅事前已呈訴就卞至於其父致西之杖囚是乎矣所謂成叔不念其父之困狀無憚 官令之截嚴小不蕫念頓無報意豈有如許無據之習乎究底事面痛憎莫甚是如乎洞燭敎是後同金成叔卽爲捉上嚴懲牢囚債錢則一一計邊推給俾納 王稅而其父<인명>致西</인명>卽爲放釋之地千萬望良爲只爲行下 向敎是事城主 處分<연도>甲申</연도> 四月 日官[署押](題辭)<인명>金成叔</인명>期給於待後當有決處之道向事十七日 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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