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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豐四年甲寅</연도>閏七月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要用處自己買得畓伏在<지명>一道定只堤</지명>下履字畓拾陸斗落只所耕參拾柒負庫乙折價錢文貳百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舊文記五張新文記一張並以永永放賣爲乎乙事畓主 <인명>金應浩</인명>[着名]證筆 <인명>金汝赳</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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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신관문(辛寬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三十年庚戌五月二十三日 辛寬文 道光三十年庚戌五月二十三日 辛寬文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0년(철종 1) 5월 23일에 신관문(辛寬文)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0년(철종 1) 5월 23일에 신관문(辛寬文)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관문은 긴히 돈을 쓸 일이 있어서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이자답(履字畓) 16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7부가 되는 곳을 2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4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분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관문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으로 조인혁(趙寅爀)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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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一年壬申</연도>三月初二日 右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之致勢不得已伏在<지명>一道後山下里</지명>前坪浮字丁陸斗落所耕拾貳負庫果據字丁壹斗伍升落所耕貳負伍束㐣折價錢文貳百兩依數捧上是遣陸斗落旧文一張幷付於他畓故以壹斗伍升落旧文一張果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姜永達</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韓世敎</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崔汝心</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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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二月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지명>東道仙隱洞</지명>伏在草家四間垈田二斗落所耕七負五束㐣價折錢文拾貳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中間閪失故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憑考事家垈主 幼學 <인명>田明汝</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溶德</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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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강영달(姜永達)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一年壬申三月初二日 姜永達 同治十一年壬申三月初二日 姜永達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2년(고종 9) 3월 초2일에 유학(幼學) 강영달(姜永達)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후산리(後山里)에 있는 토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2년(고종 9) 3월 초2일에 유학(幼學) 강영달(姜永達)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후산리(後山里)에 있는 토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강영달은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토지를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후산리에 두 곳이다. 첫 번째 토지는 전평(前坪) 부자(浮字) 정(丁)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2부(負)인 곳이다. 두 번째 토지는 거자(據字) 정1두(斗) 5승락(升落)으로 부수로는 2부 5속인 곳이다. 이 두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20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강영달은 6두락지 토지의 구문기(舊文記) 1장이 다른 논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1두 5승락지 토지의 구문기 1장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토지의 주인 유학 강영달과 증필(證筆)으로는 유학 한세교(韓世敎), 증인(證人)은 유학 최여심(崔汝心)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문서에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각각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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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김순길(金順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捌年甲辰七月十八日 金順吉 光武捌年甲辰七月十八日 김순길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 7월 18일에 김순길(金順吉)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 7월 18일에 김순길(金順吉)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순길이 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부안현 상서면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목화밭(綿田) 2두(斗) 5도락(刀落)을 36냥에 팔기로 하였다. 매매 당시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면서 만약에 나중에 시비가 있거든 이 문서로 사실을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주인 전순길과 집필(執筆)로 김성옥(金成玉), 지인(知人)으로 송명삼(宋明三), 정복동(鄭福童) 등 4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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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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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捌年</연도>甲辰七月十八日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故綿田二斗伍刀落伏在<지명>縣地上西露積里</지명>右伻乭遣以山稅所畊 㐣新文記一丈右宅折価錢文參拾陸兩依數捧上永永放賣是爲去乎若有是非則以此文記憑告事田主 <인명>金順吉</인명>執筆 <인명>金成玉</인명>[着名]知人 <인명>宋明三</인명><인명>?福童</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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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안병순(安秉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三年丁亥十一月十八日 安秉淳 光緖十三年丁亥十一月十八日 안병순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7년(고종 24) 11월 18일에 유학 안병순(安秉淳)이 부안(扶安) 매산(梅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87년(고종 24) 11월 18일에 유학 안병순(安秉淳)이 부안(扶安) 매산(梅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안병순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논을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형편이 좋지 못하여 부안 매산(梅山)의 전평에 있는 방자답(傍字畓) 7두락 2야미를 60냥에 값을 정하고, 5년 안에 다시 환퇴(還退)하기로 하였다. 만약에 기한을 넘기면 논은 영원히 매수자 차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구문기는 중간에 유실되었으므로 새로 신문기 1장을 넘겨 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신문기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안병순과 증인으로 유학 고응진(高應鎭), 증필로 유학 박정여(朴正汝)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매산(梅山)은 현재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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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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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三年</연도>丁亥十一月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지명>梅山</지명>前坪傍字畓七斗落二夜味所耕十二負七束㐣価折錢文陸拾兩依數捧上而限五年還退是矣若過限則永永放賣爲去乎舊文記中間遺失故以新文記一張右人前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安秉淳</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高應鎭</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朴正汝</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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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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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一 土地表示은<지명>全羅北道扶安郡下西面晴日里</지명>坪[檢証濟][印]暉字七八五号畓一夜味貳斗落結五負貳束一 賣買代金은參拾円也一 賣渡人은右賣買代金을凖領ᄒᆞ고前記土地所有權을買受人의게轉渡홈一 保証人은右賣買의 確的홈을認호고左에 署名捺印홈<연도>大正二年</연도>三月五日<지명>扶安郡下西面元中里</지명>一統九戶賣渡人 <인명>高濟英</인명>[印]<지명>扶安郡東道面仙隱洞</지명>二統五戶買受人 <인명>李樂善</인명>[印]<지명>扶安郡下西面元中里</지명>一統三戶保証人 <인명>李益三</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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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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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咸豐三年癸丑</연도>三月初七日<인명>黃永中</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大無之年納稅無路自己買得<지명>安德</지명>前坪扶字畓六斗落所耕 庫乙價折錢文參什仇兩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本文記段前年火災繞燼是遣只以新文一丈成給爲去乎日後如有雜談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 <인명>柳生員</인명>自筆[着名]證人 <인명>崔汝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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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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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3년 유삼기 (柳三基)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三年癸巳十一月十六日 高時大 柳三基 道光十三年癸巳十一月十六日 高時大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3년(순조 33) 11월 16일에 고시대(高時大)가 부안현(扶安縣) 안덕동(安德洞)에 있는 논을 유삼기(柳三基)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3년(순조 33) 11월 16일에 고시대(高時大)가 부안현(扶安縣) 안덕동(安德洞)에 있는 논을 유삼기(柳三基)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고시대는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아오던 안덕동(安德洞) 앞들의 부자답(扶字畓) 6마지기를 유삼기에게 5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일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고시대 본인이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증인(證人)으로 이양연(李良連)과 유광옥(柳光玉)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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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7년 전용진(田溶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四月初四日 田溶鎭 光緖三年丁丑四月初四日 전용진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4월 4일에 유학 전용진(田溶鎭)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4월 4일에 유학 전용진(田溶鎭)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용진은 긴요하게 돈을 사용할 일이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일도면 선곡평(仙谷坪)에 있는 임자(臨字) 태종전(太種田) 3두락을 9냥에 팔았다. 나중에 만약 이 밭을 두고 말썽이 있을 때에는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주인 전용진과 증인으로 유학 이규환(李奎煥)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 말미에 구문기(舊文記)는 중간에 유실되었기 때문에 출급하지 못한다는 주기가 있다. 한편 문서 뒷면에 선곡평(仙谷坪) 임자전(臨字田)에서 농사지어 7부 1속 3두를 수확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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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75년 동도선은동(東道仙隱洞)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亥三月 日 李奎煥 城主 乙亥三月 日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6.50*6.5 4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5년(고종 12) 3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75년(고종 12) 3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자신의 돈을 빌려간 뒤 갚지 않고 있는 김치서(金致西)를 처벌해달라면서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이규환이 김치서와 관련하여 관에 올린 소지가 이 문서 외에 몇 건 더 있는데, 이를 함께 참고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계유년, 즉 2년 전인 1873년 12월에 부안현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翼上里)에 사는 김원숙(金元淑)이라는 자가 여러 차례 이규환을 찾아와서 큰 이익을 보게 해줄 터이니 30냥을 꾸어달라고 하였다.(金元叔으로 나오는 문서도 있다.) 김원숙은 바로 김치서의 아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요호(饒戶)로 분류되어 30냥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 수표(手標)를 받고 김원숙에게 30냥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김원숙은 시간을 끌면서 돈을 갚지 않았다. 이에 이규환은 관에 소지를 올려 제사(題辭)를 받고 김원숙으로부터 돈을 갚겠다는 수표(手標)를 다시 받았지만, 갚기로 한 기일이 지나도록 돈을 받지 못했다. 그 뒤 김원숙은 서울에 가서 살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규환은 김원숙의 동생 김성숙(金成叔)과 부친 김치서(金致瑞)를 여러 차례 집으로 찾아가 수표를 보여주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치서는 상당한 재력가이면서도 돈을 갚기는커녕, 자식이 누군인지도 모르면 30냥 또한 모르는 돈이라고 우겼다.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간 뒤에 이처럼 사람을 기망하고 윤리를 그르치고 의리를 멸시하는 이들을 가리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관에 김치서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려달라고 탄원하였다. 이규환은 소지를 올리면서 이전에 올렸던 소지들을 점련하여 함께 제출했다. 부안현감은 관에서 제사(題辭)를 내려 신칙(申飭)했는데도 갚지 않으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추급(推給)하기 위하여 김치서를 잡아서 대령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본문에는 작성연대가 을해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이규환이 전답을 사들이면서 작성한 명문(明文) "1873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을해년을 1875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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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75년 동도선은동(東道仙隱洞)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3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亥正月 日 李奎煥 城主 乙亥正月 日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6.50*6.5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5년(고종 12) 정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75년(고종 12) 정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환(李奎煥)이 자신의 돈을 빌려간 뒤 갚지 않고 있는 김치서(金致西) 부자(父子)를 처벌해달라면서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이규환이 김치서 부자와 관련하여 관에 올린 소지가 이 문서 외에 몇 건 더 있는데, 이를 함께 참고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계유년, 즉 2년 전인 1873년 12월에 부안현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翼上里)에 사는 김원숙(金元淑)이라는 자가 여러 차례 이규환을 찾아와서 큰 이익을 보게 해줄 터이니 30냥을 꾸어달라고 하였다.(金元叔으로 나오는 문서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요호(饒戶)로 분류되어 30냥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 수표(手標)를 받고 김원숙에게 30냥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김원숙은 시간을 끌면서 돈을 갚지 않았다. 이에 이규환은 관에 소지를 올려 제사(題辭)를 받고 김원숙으로부터 돈을 갚겠다는 수표(手標)를 다시 받았지만, 갚기로 한 기일이 지나도록 돈을 받지 못했다. 그 뒤 김원숙은 서울에 가서 살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규환은 김원숙의 동생 김성숙(金成叔)과 부친 김치서(金致瑞)를 여러 차례 집으로 찾아가 수표를 보여주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치서는 상당한 재력가이면서도 돈을 갚기는커녕, 자식이 누군인지도 모르면 30냥 또한 모르는 돈이라고 우겼다. 이규환은 남에게서 돈을 빌려간 뒤에 이처럼 사람을 기망하고 윤리를 그르치고 의리를 멸시하는 이들을 가리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엄한 제사(題辭)를 내려 관에서 김치서를 잡아들이는 한편, 본전과 이자까지 계산하여 관에서 추급(推給)할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고 하였다. 이규환은 소지를 올리면서 전표(錢標)를 점련하여 함께 제출했다. 부안현감은 자세히 조사하여 추급(推給)해 주겠다면서 김치서를 잡아서 대령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본문에는 작성연대가 을해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이규환이 전답을 사들이면서 작성한 명문(明文) "1873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을해년을 1875년으로 추정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59년 김덕현(金德現)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九年己未十一月十八日 金德現 咸豊九年己未十一月十八日 김덕현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9년(고종 10) 11월 25일 김덕현(金德現)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사창리(社倉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9년(고종 10) 11월 25일 김덕현(金德現)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사창리(社倉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김덕현은 자신이 매득하여 농사를 지어먹던 논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사창리 전평(前坪) 누자답(樓字畓) 11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3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35냥이다. 사창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김덕현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2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김덕현과 증인(證人)으로는 임기환(林琪煥)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手標右手標事段生之親山入於<인명>李丈</인명>先山百餘步之地耳<인명>李丈</인명>今此遠來雖爲督掘山地極貴猝難移葬故萬萬哀乞則<인명>李丈</인명>特垂慈悲之澤以求山後移緬之意許諾故可勝咸服玆成手標以納事手標主 <인명>權秉澤</인명>[着名]<연도>壬午</연도>十月卄二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二月 李周胤 光緖十六年庚寅二月 李周胤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2월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2월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주봉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거석리 전평(前坪)에 있는 어자(於字) 모시밭 1.5 대락(隊落)을 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본래 없었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일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추기로 3월 그믐 안으로 돈을 갚는다면 되살 수 있다는 환퇴(還退) 조항을 삽입하였다. 거래 당시 모시밭 주인 이주봉은 상을 당하여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강인숙(姜仁俶)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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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六年庚寅</연도>二月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伏在<지명>上西擧石里</지명>前坪於字苧田一帶半直㐣價折錢文五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本無故以新文一丈成文事日後若有爻像則以此文記憑考事此亦中右錢三月晦內以報後還退事苧田主 童蒙 <인명>李周鳳</인명>[喪不着]證人 幼學 <인명>姜仁俶</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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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二十年</연도>甲午二月初十日 前明文右明文事段有移畓次伏在本<지명>上東堤內村</지명>前畓九斗落稱字丁所耕十八卜五束㐣価折錢文貳佰貳拾伍兩依數捧上是遣幷旧文壹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告事此亦中<지명>金堤</지명><인명>金玉玄</인명>新文一張他畓幷付故不得出給事畓主 幼學 <인명>高德仁</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沈元仲</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沈文京</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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