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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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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二年丙子</연도>四月二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移去此傳來伏在<지명>宅上洞</지명>前坪玄字畓四斗落只所耕八負二束庫乙折價錢文一百卄一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是乎矣旧文記四丈並以出給爲去乎日後若有爻象是去等以此文記憑考事畓主自筆<인명>廉圭錫</인명> 喪不着證人幼學<인명>金昌玘</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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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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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大正元年</연도>陰九月十日 前明文右明文事ᄂᆞᆫ自己賣得累年耕食이다가勢不得已伏在<지명>上東面卜星里</지명>坪乃字四九九号太田一片壹斗落結一負五束庫果同坪字四六二太田二片壹斗落結一負五束庫을倂折錢文壹佰兩依數捧上이고舊文은幷付他文券故로以新文一張으로右人前永永放賣ᄒᆞ거은日後에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太田主 <지명>上東面卜星里</지명> <인명>金奉俊</인명>[印]證人 仝里 <인명>金光燮</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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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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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㱏佰貳拾円也右ᄂᆞᆫ 族弟<인명>奉俊</인명>田土山坂賣渡代金을正히領收홈再文券与配達証的圖本二張은限陰七月初六日로準數轉渡次로契約홈<연도>大正元年</연도>陰七月四日契約主 <인명>金光燮</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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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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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2년 이맹삼(李孟三)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十月二十日 金奉俊 李孟三 大正元年十月二十日 金奉俊 전북 부안군 1*1 2개(적색, 정방형), 1.2*1.2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10월 20일에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이맹삼(李孟三)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10월 20일에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이맹삼(李孟三)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대금(賣買代金)은 모두 90원이다. 매도인(賣渡人)은 매매대금을 받고 토지소유권(土地所有權)을 매수인(買受人)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보증인(保證人)은 대정원년 10월 20일에 계약 사실을 확인하고 서명하였다. 이 거래에는 매도인(賣渡人)으로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2통 5호에 사는 김봉준과 부안군 상동면 신후리(新后里) 1통 6호에 사는 보증인 김광섭(金光燮), 그리고 매수인(買受人) 이맹삼이 참여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모두 네 곳이었다. 첫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97호에 있는 3야미(夜味), 4두락지(斗落只)로 부수로는 3부(負) 8속(束)인 곳이다. 두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99호에 있는 1야미, 1두락지로 1부 1속인 곳이다. 세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복성리 462호에 있는 2야미, 1두락지로 1부 5속인 곳이다. 네 번째 밭은 부안군 상동면 신후리(新后里) 509호에 있는 1야미, 3두락지이며 3부 8속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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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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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12년 김봉준(金奉俊)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陰九月十日 金奉俊 大正元年陰九月十日 金奉俊 전북 부안군 [印] 2개 1*1 1개(적색, 정방형), 1.2*1.2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9월 10일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2년 음9월 10일 김봉준(金奉俊)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복성리(卜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김봉준은 밭을 스스로 매입(買入)하여 경작해오다가 부득이하게 부안현 상동면 복성리에 있는 콩밭 2곳을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내자(乃字) 499호 태전(太田) 1편(片) 1두락지(斗落只)로, 결수(結數)로는 1부(負) 5속(束)인 곳과 462호 태전 21편 1두락지 결수로는 1부 5속인 곳이다. 두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10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봉준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매입자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만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상동면 복성리에 사는 김봉준과 증인(證人)으로는 같은 동네 사는 김광섭(金光燮)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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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三月十七日 李周鳳 光緖十六年庚寅三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3월 17일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초가(草家)와 전답(田畓)을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3월 17일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초가(草家)와 전답(田畓)을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가대와 밭의 주인 이주봉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살아오던 초가(草家)를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가대와 전답이다. 부안현 상서면 거석리에 있는 초가 4칸과 행랑(行廊) 2칸, 그리고 밭 2두락지(斗落只)와 저전(苧田) 9두락지이다. 이와 함께 태종전(太宗田) 18두락지, 면전(綿田) 4두락지, 옥답(沃畓) 3두락지, 시장(柴場) 50동(同), 배나무 1주(株), 감나무 6주(株)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250냥이다. 거석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주봉은 신구문기(新舊文記) 3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가대주(家垈主) 동몽(童蒙) 이주봉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않았다. 증인(證人)은 강영기(姜永氣), 증필(證筆)은 이영의(李瑛儀)가 참여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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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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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辛士賢賣票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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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7년 전명여(田明汝) 방매(放賣) 가사매매명문(家舍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二月十九日 田明汝 光緖三年丁丑二月十九日 田明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2월 19일에 유학(幼學) 전명여(田明汝)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2월 19일에 유학(幼學) 전명여(田明汝)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전명여는 선은동에 있는 초가 4칸과 텃밭 2마지기를 22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는 중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을 때에는 이 문기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가대(家垈) 주인인 전명여와 증인(證人)으로 유학 전용덕(田溶德)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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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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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稷字畓十二斗落果農字畓三斗落果穡字畓五斗落果鹿字畓四斗畓合四庫舊文券遺失未得出柳給以此知悉勿爲□□也畓主 <인명>柳</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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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추수기(秋收記) 일편(一片) 고문서-치부기록류-추수기 경제-농/수산업-추수기 全州李氏家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의 추수기(秋收記) 일편(一片).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작성한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의 추수기(秋收記)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전주이씨가의 전답을 경작했던 의복동(衣服洞) 내 각 마을의 소작인들과 전답 규모 등이 마을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촌전(村前) 최지문(崔只文) 3마지기, 정영최(鄭永最) 4마지기, 선현환(宣懸完) 5마지기, 윤현원(尹懸寃) 5마지기 함박골 고홍서(高洪西) 12마지기, 최지문(崔只文) 7마지기 평지리 촌전(平池里村前) 김순복(金順卜) 5마지기 길을이골 김동업(金同業) 4마지기 합 2석(石) 5두(斗)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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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6년 염규석(廉圭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四月二十八日 廉圭錫 光緖二年丙子四月二十八日 廉圭錫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喪不着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4월 28일에 염규석(廉圭錫)이 부안현(扶安縣) 댁상동(宅上洞) 전평(前坪)에 있는 논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4월 28일에 염규석(廉圭錫)이 부안현(扶安縣) 댁상동(宅上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4두락지를 121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현자답은 부수로는 8부 2속이 되는 곳이었다. 거래시 매입자에게 구문기 4장을 함께 넘겨주었으며, 뒷날 이 논에 대하여 논란이 생긴다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답주 염규석은 이사를 하기 위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당시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유학(幼學) 김창기(金昌玘)가 증인으로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거래된 논이 있는 댁상동은 현자답의 구문기에 선은평(仙隱坪)으로 기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안현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는 "1820년 김방혁(金邦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828년 김방혁(金邦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에 해당한다. 다만, 이 두 문기에는 현자답 외에 1두락지의 논이 더 있어서 모두 5두락지가 거래되었다. 거래가격은 45냥이었다. 약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논들 중 일부가 121냥으로 거래되었으니 논값이 크게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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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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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6년 남계욱(南啓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十月初九日 南啓旭 光緖二年丙子十月初九日 南啓旭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0월 초9일 남계욱(南啓旭)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10월 초9일 남계욱(南啓旭)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남계욱은 돈이 급히 필요한 데가 있어서 밭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 동중(洞中)의 천자(天字) 저전(苧田) 2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1부(負)인 곳이다. 저전은 모시밭을 말한다. 방매(放賣) 가격은 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남계욱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함께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남계욱이 자필(自筆)로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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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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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嘉慶二十五年庚辰</연도>正月十一日<인명>金邦爀</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急用處自己買得縣內一作<지명>仙隱坪</지명>伏在玄字丁畓四斗落只所耕八卜二束庫及黃字畓一斗落只所耕三卜二束合五斗落只本文記二丈幷以右人前捧価肆拾伍兩依數捧上爲遣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如有相左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閑良<인명>金允周</인명>[着名]證人閑良<인명>金泓吉</인명>[着名]筆執閑良<인명>姜有輔</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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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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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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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4년 서준오(徐俊五)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三年甲戌六月十九日 徐俊五 同治十三年甲戌六月十九日 서준오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12월 31일에 서준오(徐俊五)가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74년(고종 11) 12월 31일에 서준오(徐俊五)가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서준오가 긴급하게 쓸 곳이 있어서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황가산(黃可山) 북쪽 기슭의 명자전(命字田) 5두락지를 21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 7부가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 1장을 아울러 매수자에게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자손 가운데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관에 고하여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주인 서준오와 증필로 남녀흥(南汝興), 증인으로 김치도(金致道)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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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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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三年</연도>甲戌六月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急爲緊用處伏在<지명>一道黃可山</지명>北麓下命字田五斗落只所耕七負㐣折価錢文貳拾壹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丈倂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異端之說則以此文記告官卞庭事田主 <인명>徐俊五</인명>[着名]證筆 <인명>南汝興</인명>[着名]證人 <인명>金致道</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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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년 정걸(鄭傑)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二十年戊寅 田主 金振興 鄭傑 乾隆二十年戊寅 金振興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58년 3월 19일에 김진흥(金振興)이 정걸(鄭傑)에게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 문서 1758년 3월 19일 김진흥(金振興)이 정걸(鄭傑)에게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 문서이다. 문서 처음에 나오는 건륭(乾隆)이라는 단어는 중국 황제(皇帝)의 연호(年號)이다. 문서에서는 이를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건륭 20년으로 적고 있는데, 당시에는 조선의 독자적 연호가 없었기에 중국 연호를 차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서의 작성연대를 원문에는 "乾隆二十年戊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무인년은 건륭 20년이 아니라 건룡 23년이다. 여기에서는 연호가 아니라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건륭 23년, 즉 1758년(영조 34)으로 추정하였다. 김진흥이 정걸에게 팔고자 하는 논은 다자(多字) 전(田) 7복(卜) 7속(束)이었다. 매매 가격은 7량(兩)이었다. 거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진흥이 팔기로 한 논은 김진흥 본인이 이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들인 것이었다. 이는 문서 안에 보이는 "자기매득(自己買得)"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마련한 논을 김진흥이 이번에 팔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그러나 알 수가 없다. 그저 필요한 데가 있어서라는 말만 적고 있을 뿐이다. 김진흥은 위 논을 팔면서, 이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 즉 구문서와 이번에 작성하는 문서, 즉 신문서를 함께 주었다. 그러면서 훗날 이번 거래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이번에 주는 문서를 지참하고 관(官)에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사실 조선시대의 토지 거래 과정에서는 원래 관이 개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 복잡하여 개인간 거래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거래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관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점은 지금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본 거래의 증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모선대(李毛善大)가 논의 임자나 또는 필집(筆執)과는 달리 수결(手決)이 아니라 자신의 손마디를 그려 넣은 점이 눈에 뜬다. 추정컨대 이모선대의 신분이 천민(賤民)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필집이란 본 문서를 작성한 자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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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二十年戊寅</연도>三月十九日<인명>鄭傑</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是在扶北一作多字田七卜七束庫乙折價錢文柒兩依數交易?之爲遣右人前本文記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同生子女中若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官卞正事田主 <인명>金振興</인명>[着名]訂人 <인명>李毛善大</인명>[左寸]筆執 <인명>朴愚春</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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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三十年庚戌</연도>五月二十三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傳來是在伏在<지명>一道定只堤</지명>下履字畓拾陸斗落只所耕參拾柒負㐣折價錢文貳百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四丈幷以右人前放賣爲去乎日後若紛紜之端則以此新舊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 <인명>辛寬文</인명>[着名]證人 <인명>趙寅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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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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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年甲申</연도>九月晦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買得伏在<지명>一道定只堤</지명>下履字畓拾陸斗落只所耕參拾柒負㐣價折錢文貳佰伍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七張果新文一張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是去等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朴文永</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李文善</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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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김응호(金應浩)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四年甲寅閏七月十九日 金應浩 咸豐四年甲寅閏七月十九日 金應浩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7월 19일에 김응호(金應浩)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7월 19일에 김응호(金應浩)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응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이자답(履字畓) 16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7부가 되는 곳을 2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5장과 신문기 1장을 건네주었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응호와 증필로 김여규(金汝赳)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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