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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六年丁卯</연도>十二月初二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傳來畓伏在<지명>二道松串</지명>前坪禽字畓十六斗落所耕四十二負八束庫叱價折錢文貳百參十兩依數捧上是遣舊文一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乎日後若有紛紜之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自筆 幼學 <인명>金源達</인명>[着名]訂人 幼學 <인명>金文化</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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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박홍혁(朴洪奕)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己亥正月二十一日 朴洪奕 己亥正月二十一日 朴洪奕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9년(헌종 5) 1월 21일에 박홍혁(朴洪奕)이 부안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수기(手記). 1839년(헌종 5) 1월 21일에 박홍혁(朴洪奕)이 부안(扶安)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박홍혁은 부안에 있는 청자정(淸字丁) 12마지기를 저렴한 가격으로 팔 생각이 있었는데 본문기가 없어서 살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표를 작성하여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1839년 김연일(金演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에 기재된 김연일이 바로 그 매입자이다. 두 문기가 점련되어 있어서 이 문기에 기재된 기해년이 도광 19년 기해, 즉 1839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홍혁은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툼이 생기면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박홍혁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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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明治四十三年庚戌</연도>十月二十六日 明文右明文事段有要用所致故伏在<지명>扶安郡下西靑林</지명>右谷墨方坪永字綿田四斗落㐣果下坪同字三斗落㐣果<지명>上西露積里</지명>上坪賊字太田一斗落㐣山稅合五負價折錢文㱏佰貳拾兩依數捧上是遣幷新舊四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田主 <인명>黃圭燮</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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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庚子</연도>九月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妻曾祖母山在於<지명>靑林</지명>西麓而墳墓頹敗改莎次直田於字四斗落 㐣價折錢文參拾捌兩依數捧上而舊文記遺失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是去䓁以此憑考事田放賣主 <인명>金元三</인명> 喪不着名證保 <인명>金弼仲</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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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진영규(陳榮奎)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七年八月十二日 陳榮奎 大韓光武七年八月十二日 진영규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 8월 12일에 유학 진영규(陳榮奎)가 텃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 8월 12일에 유학 진영규(陳榮奎)가 텃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진영규가 긴요하게 쓸 데가 있어서 마을의 왼쪽에 있는 대전(岱田) 1두락을 50냥에 팔기로 하였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중간에 유실되었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썽이 생기면 이 문서를 증거로 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주인 진영규가 단독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매매 대상이 있는 위치는 이 문서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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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五年丙寅</연도>正月二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지명>上西舊基坪</지명>太田壹斗落價折錢文貳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本無也只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則以此文憑考事太田主 幼學 <인명>曺瓛坤</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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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辛亥年) 이승희(李承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辛亥閏六月二十一日 金永根 李承曦 辛亥閏六月二十一日 金永根 전북 부안군 [指章] 2개, [署押] 1개 3.5*4 1개(적색, 정방형), 1*1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신해년(辛亥年) 윤 6월 21일에 김영근(金永根)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이승희(李承曦)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신해년(辛亥年) 윤 6월 21일에 김영근(金永根)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이승희(李承曦)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영근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노적리 상평(上坪)에 있는 적자(賊字) 48차 밭 1마지기 5승락, 결부(結負)로는 2부 5속이 되는 곳을 이승희에게 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만약 나중에 다른 말이 있거든 이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 주인 김영근과 증인(證人)으로 이장(里長) 송성옥(宋成玉)이 참여하였다. 이때 인주를 찍은 지장과 "상서노적리장지장(上西露積里長之章)"이라는 인장이 보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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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建物賣買契約書右契約書<지명>扶安郡東津面鳳凰里</지명>男字一九三八垈八升落結四負六束庫果建物七間을價折錢文六百五拾兩依數捧上이고舊文記 張右宅前에永永放賣거논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再異動証明費은舊家垈主가擔當事<연도>大正四年</연도>陰正月二十六日<지명>扶安郡東津面鳳凰里</지명>三統七戶家垈主 <인명>金昌稀</인명>[印]<지명>扶安郡東津面鳳凰里</지명>三[印]統五戶保證人 <인명>李官汝</인명>[印]<지명>扶安郡扶寧面仙隱洞</지명>證人 <인명>金昌云</인명>[印]<인명>李議官</인명>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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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전옥여(田玉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八年甲辰正月三十日 田玉汝 大韓光武八年甲辰正月三十日 田玉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광무 8) 1월 30일에 전옥여(田玉汝)가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광무 8) 1월 30일에 전옥여(田玉汝)가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 쪽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옥여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임자답(臨字畓) 1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1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0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전옥여는 새로 작성한 매매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전옥여와 증인(證人) 전사흠(田士欽)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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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김창희(金昌稀)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大正四年陰正月二十六日 金昌稀 李議官 大正四年陰正月二十六日 金昌稀 전북 부안군 [印]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5년 음력 1월 26일에 김창희(金昌稀)가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토지와 건물을 이의관(李議官)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 1915년 음력 1월 26일에 김창희(金昌稀)가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토지와 건물을 이의관(李議官)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土地建物賣買契約書)이다. 김창희는 부안군(扶安郡) 동진면(東津面) 봉황리(鳳凰里) 남자(男字) 집터 8승락(升落)과 건물 7칸을 이의관에게 총 650냥에 팔기로 거래하면서 작성한 토지건물매매계약서이다. 당시 매매계약할 때 구문기를 건네주면서 나중에 다른 말이 있을 때 이 문기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가대(家垈) 주인 김창희와 보증인(保證人) 이관여(李官汝), 증인 김창운(金昌云)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의 중간에 재이동증명비(再異動証明費)는 구가대주(舊家垈主), 즉 방매자가 담당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대부분의 명문들이 착명(着名)으로 서명한 것과는 달리 인장(印章)을 찍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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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縣內群嶺里</지명><인명>辛元凱</인명>右謹陳情由事段矣身<지명>東道仙隱洞</지명><인명>李聚五</인명>處畓庫還退事向有所呈訴至承分半之 處分而畓庫賣買辜限自在宜其全退이되伏不勝感激之 分付以其辭而往言<인명>聚五</인명>則全退半退之間俱不請從惡言悖說奪取狀題豈有如許無法之民乎緣由仰訴自 官別般處分俾爲奠接事 處分伏望行下向敎是事官司主 處分<연도>戊戌</연도>四月 日官[署押](題辭)旣爲越價成文之地何如是更訴耶無奈於彼隻之不應向事卄二日告<인명>朴載勳</인명>[官印][官印][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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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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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戊戌年) 신원개(辛元凱)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戌三月 日 縣內九英里辛元凱 官司主 戊戌三月 日 縣內九英里辛元凱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官印] 1개 4.0*4.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무술년 3월에 현내(縣內) 구영리(九英里)에 사는 신원개(辛元凱)가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무술년 3월에 현내(縣內) 구영리(九英里)에 사는 신원개(辛元凱)가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신원개는 바로 다음 달인 4월에도 같은 내용으로 소지를 올렸다. "무술년(戊戌年) 신원개(辛元凱) 소지(所志) 1"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의 소지를 토대로 하여 그 내막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원개는 이사를 가기 위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논 13석 3두락을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이취오(李聚五)에게 7천냥을 받고 팔기로 하였다. 그러나 7천냥 중에서 4천냥만 먼저 추심한 신원개는, 이 돈을 가지고 타지에서 논을 사려고 하였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평생 농사밖에 할 줄 몰랐던 신원개는 전답을 팔고나서 20여명이 넘는 식솔들을 먹여 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취오를 찾아가 4천냥을 주고 전답을 환퇴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취오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신원개는 부안현감에 소를 올려 논을 되사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 3월의 소지에서는 부안현감이 자세히 조사하여 공결(公決)을 내리고자 하니 이취오를 데려오라는 제사를 내렸다. 그러나 다음달인 4월의 소지를 보면 그 사이에 조금 다른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원개는 관으로부터 판 논의 반절을 되살 수 있다는 수령의 처분을 받았다. 게다가 고한(辜限)에는 반절이 아니라 전부를 환퇴할 수 있다는 수령의 처분을 받았다. 고한은 보고 기한(保辜期限)의 준말로, 남을 상해(傷害)한 사람에게 대하여 맞은 사람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처벌을 보류하는 기간을 말한다. 아마도 환퇴 문제를 놓고 신원개와 이취오 사이에 물리적인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원개는 이취오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으나, 이취오는 반퇴든 전퇴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나쁜 말과 패악스런 말을 하면서 수령의 제사(題辭)를 탈취하였다. 이에 신원개는 수령에게 소지를 올려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수령의 판결은 천만 뜻밖에도 신원개를 낙담케 하였다. 이미 돈을 받고 문서까지 작성한 마당에 무엇 때문에 다시 소를 제기하는가라고 반문하고는, 상대방이 불응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 수령의 대답이었다. 이 소지에는 신원개가 살고 있는 곳이 현내(縣內) 구영리(九英里)로 나오지만, 4월의 소지에는 현내(縣內) 군령리(群嶺里)로 나온다. 이곳이 오늘날 부안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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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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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77년 답주(畓主) 유생원(柳生員)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柳 1877 柳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에 유생원(柳生員)이 부안현 하서면 의복동에 있는 전답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수기(手記). 1877년(고종 14)에 유생원(柳生員)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전답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직자답(稷字畓) 12마지기, 농자답(農字畓) 3마지기, 색자답(穡字畓) 5마지기, 녹자답(鹿字畓) 4마지기 등 모두 4곳의 구문권이 유실되어 출급하지 못하니 그렇게 알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 작성연대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관련문서 "1877년 유생원댁노(柳生員宅奴) 옥봉(玉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를 통해 작성연대를 1877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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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39년 김연일(金演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拾玖年己亥正月二十一日 朴洪奕 金演一 道光拾玖年己亥正月二十一日 朴洪奕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9년(헌종 5) 1월 21일에 박홍혁(朴洪奕)이 부안(扶安)에 있는 논을 김연일(金演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9년(헌종 5) 1월 21일에 박홍혁(朴洪奕)이 부안(扶安)에 있는 논을 김연일(金演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홍혁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상동면(上東面) 지비리(之飛里) 행금평(行禁坪)에 있는 청자정(淸字丁) 논 12마지기를 김연일에게 100냥에 팔았다. 청자답은 결부(結負)로는 29복 4속 되는 곳과 3복 2속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다른 전답과 함께 붙어 있으므로 출급을 하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혹시 이 논을 두고 문제가 생기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박홍혁은 상을 당하여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필(證筆) 김두일(金斗一)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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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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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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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明治四十五年</연도>壬子陰四月初九日 <인명>李樂善</인명>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以要用所致伏在<관직명>古阜郡巨麻面桂洞</관직명>前坪邙字三畓九斗只二片結三十負三束廤乙価折錢文柒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二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抾文記憑▣(告)考事畓主 <지명>古阜巨麻桂洞</지명> <인명>朱正執</인명>[印]證人 <지명>古阜巨麻桂洞</지명> <인명>朱相淑</인명>[印]<지명>桂洞</지명><관직명>里長</관직명> <인명>朱益餐</인명>[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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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一年</연도>丙戌九月初一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是多可要用所致伏在<지명>扶安下西面宜服洞</지명>前坪稷字畓十二斗落所耕二十二負㐣果藝字七斗落所畊十四負一束㐣果農字三斗落所畊七負三束庫果農字四斗落所耕十負七束庫果農字伍斗落所畊九負七束庫果穡字伍斗落所畊十八負六束庫果又下坪藝字伍斗落所畊十六負四束庫果又後坪鬣字四斗落所畊八負伍束庫果長信浦前坪碣字伍斗落所畊伍負田字所畊伍負六束廤合貳石十斗落畓㐣並今年花穀価折錢文八百八十兩依數捧上是遺並新旧文記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則持此文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李德明</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權承原</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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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辛亥<연도>閏六月二十一日<인명>李承曦</인명>前明文右明文事以緊用所致伏在<지명>上西面露積里</지명>上坪賊字四十八次田一斗五升落結二負五束廤乙價折錢文三拾五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以此文憑考事田主<인명>金永根</인명>[指章]證人里長<인명>宋成玉</인명>[指章][<지명>上西露積里</지명>長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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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3년 이승호(李承鎬)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大正二年八月一日 林洞介 李承鎬 大正二年八月一日 林洞介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3년 8월 1일에 임동개(林洞介)와 이승호(李承鎬)가 부안군 상서면 노적리에 있는 논을 거래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3년 8월 1일에 임동개(林洞介)와 이승호(李承鎬)가 부안군(扶安郡)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거래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임동개는 부안군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밭 1마지기를 이승호에게 10원(円)에 팔면서 작성하였다. 매매 계약할 때 매도인(賣渡人)은 매매대금을 법에 따라 받은 다음 토지소유권을 매수인(買受人)에게 전도하고 보증인은 이 계약의 확실한 사실을 보증으로 서명날인 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매도인 임동개, 매수인 이승호, 보증인 송자선(宋子善) 등 3인이 참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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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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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5년 노영학(盧永鶴)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四年乙丑正月十六日 盧永鶴 同治四年乙丑正月十六日 盧永鶴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5년(고종 2) 1월 16일에 유학(幼學) 노영학(盧永鶴)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5년(고종 2) 1월 16일에 유학(幼學) 노영학(盧永鶴)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노영학은 자신이 매득하여 농사지어서 먹고 살면서 진 빚 20냥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부안현 상서면 노적리(露積里) 후평의 옛터에 있는 어자(於字) 논 1마지기와 어자(於字) 밭 3마지기를 20냥에 팔았다. 만일 나중에 이 전답을 두고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밭 주인 노영학 본인이 스스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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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四年乙丑</연도>正月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耕食是多可右人債錢貳什兩未報故伏在<지명>露積里</지명>後坪舊基於字畓一斗五升落果於字田三斗落只所耕二負庫叱價折錢文貳什兩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憑考事田畓主幼學<인명>盧永鶴</인명>自筆[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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