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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元年辛巳</연도>六月初八日<지명>東道東門中里</지명><인명>金仲田</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祖上傳來畓累年耕食是如可切有緊用處扶北盡字畓貳什伍斗落只所耕肆什捌負肆束庫果北邊參負貳束㐣価折錢文貳百柒什兩交易捧上爲遣右人前本文記二丈幷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官 卞正事畓主<인명>金萬發</인명>[着名]證人<인명>羅昊範</인명>[着名]筆 <인명>盧補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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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박문영(朴文永)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年甲申九月晦日 朴文永 光緖十年甲申九月晦日 朴文永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 21) 9월 30일에 유학 박문영(朴文永)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 21) 9월 30일에 유학 박문영(朴文永)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문영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이자답(履字畓) 16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7부가 되는 곳을 25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7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박문영과 증인으로 유학 이문선(李文善)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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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豊四年</연도>甲寅正月二十六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木浦前坪号字畓五斗落只所耕拾負五束㐣価折錢文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成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瑞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崔石斗</인명>[着名]證茟 幼學 <인명>林世</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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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양계광(梁啓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隆熙三年己酉正月十三日 梁啓光 大韓隆熙三年己酉正月十三日 양계광 전북 부안군 [印], [着名]2개 1.3*1.3 1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9년(융희 3) 1월 13일에 양계광(梁啓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9년(융희 3) 1월 13일에 양계광(梁啓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양계광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고부현 거마면 임방리 전평(前坪) 소자답(嘯字畓) 7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9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220냥이다. 임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양계광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구문기(舊文記)를 합쳐 모두 3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참봉(參奉) 양계광과 증인(證人)은 유양지(劉良知), 증필(證茟)은 유학(幼學) 김경숙(金敬淑)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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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光武八年</연도>甲辰十一月二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巷口錢玖百兩辦出無路故伏在<지명>古阜郡巨麻面桂洞</지명>前坪傳來位土紙字畓十六斗落只所耕三十五負六束廤乙価折錢文扒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諸子孫中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劉致仲</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朱正執</인명>[着名]<인명>劉良知</인명>[着名]<인명>劉雲卿</인명>[着名]<인명>劉替國</인명>[着名]<인명>劉善仲</인명> 喪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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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明治四十五年壬子陰二月初九日 金公淑 李樂善 明治四十五年壬子陰二月初九日 김공숙 전북 부안군 [印]4개 2*2, 1.3*1.3 각1개(적색, 정방형), 1*1 1개, 0.7*0.7 2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력 2월 9일에 김공숙(金公淑)이 이낙선(李樂善)에게 고부군(古阜郡) 거마면(巨麻面)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2년 음력 2월 9일에 김공숙(金公淑)이 이낙선(李樂善)에게 고부군(古阜郡) 거마면(巨麻面)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동중리(東中里)에 사는 김공숙은 자신이 매득하여 오랫동안 세를 거두며 살아왔지만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계동 전평에 있는 면자(面字) 5차답 16두락지 2편결 56부 1속을 1,600냥에 이낙선에게 팔았다. 매매 당시 김공숙이 신구문기 2장을 이낙선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생기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부안군 동도면 동중리에 사는 논주인 김공숙과 증인으로는 고부군 거마면 계동에 사는 주상숙(朱相淑) 및 계동이장 주익찬(朱益贊) 등 3명이 거래에 참여하여 날인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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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明治四十五年</연도>壬子陰二月初九日 <인명>李樂善</인명>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收稅是多可以要用所致伏在<지명>古阜郡巨麻面桂洞</지명>前坪面字五次畓十六斗落只二片結五十六負一束廤乙倂折錢㱏千陸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二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次文記憑考事畓主 扶安郡東道面東中里 <인명>金公淑</인명>[印]證人 古阜郡巨麻面桂洞 <인명>朱相淑</인명>[印]桂洞里長 <인명>朱益贊</인명>[印][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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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주원숙(朱元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九年己巳三月日 朱元淑 大韓光武九年己巳三月日 주원숙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5년 3월에 유학 주원숙(朱元淑)이 백선후평(白仙後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5년 3월에 유학 주원숙(朱元淑)이 백선후평(白仙後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주원숙은 선대로부터 논을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으나 세금을 납부할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백선후평에 있는 윤자답(倫字畓) 9두락지와 이 논에서 수확한 4부 6속을 합하여 모두 188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매수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증거로 하여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주원숙과 증인으로 유학 주동진(朱東辰)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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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十六年丙申</연도>正月望幼學<인명>廉相鳳</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畓伏在<지명>扶東仙隱洞</지명>前坪玄字丁四斗落只所耕捌負貳束㐣価折錢文參拾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鬧端則持此告官卞正事畓主自筆 幼學<인명>田鎭斅</인명>[着名]證人 幼學<인명>趙甲環</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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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十三年癸巳</연도>十月晦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段以移去次自己買得伏在<지명>仙隱洞</지명>前坪玄字畓四斗落只所耕 八負二束庫叱折価參拾伍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相左之弊則以此憑考事畓主自筆 幼學<인명>梁哲洙</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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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八年戊子</연도>二月 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用處自己買得縣內一作<지명>仙隱坪</지명>玄字丁四斗落只所耕八卜二束庫及黃字畓一斗落只所耕三卜二束合五斗落只本文記三丈幷以捧価錢肆拾伍兩依數捧上爲遣永永放賣日後若相左之弊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 <인명>金邦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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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김순오(金舜五)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參拾年庚戌十一月二十七日 金舜五 道光參拾年庚戌十一月二十七日 金舜五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0년(철종 1) 11월 27일에 김순오(金舜五)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0년(철종 1) 11월 27일에 김순오(金舜五)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순오는 자신이 매득한 동도면 선은동(仙隱洞) 앞들에 있는 논 7마지기를 6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서 8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분란이 있을 때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순오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전윤수(田允秀)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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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參拾年庚戌</연도>十一月二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伏在<지명>仙隱洞</지명>前坪柒斗落庫乙所耕二十卜畓折價錢文陸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說是去等以此新舊文記捌張憑考事畓主自筆 <인명>金舜五</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允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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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박왜토이(朴倭土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六年己酉十一月初十日 外祖母 姜氏 朴倭土伊 乾隆五十六年己酉十一月初十日 外祖母 姜氏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右寸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89년(정조 13) 11월 초10일 외조모(外祖母) 강씨(姜氏)가 외손자(外孫子) 박왜토이(朴倭土伊)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89년(정조 13) 11월 초10일 외조모(外祖母) 강씨(姜氏)가 외손자(外孫子) 박왜토이(朴倭土伊)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외조모 강씨는 수년간 농사를 지어 먹고 살다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 매도(賣渡)하게 되었다. 이 논은 외조부(外祖父)가 생전에 계실 때 매수(買受)한 것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전평(前坪) 가자답(嘉字畓) 3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8부(負)인 곳이며, 방매 가격은 36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외조모 강씨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구문기(舊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 박왜토이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외조모 강씨와 증인(證人)으로는 오촌질(五寸侄) 강점석(姜占石), 증보(證保)는 육촌남(六寸娚) 강재군(姜才君), 필(筆)은 한량(閑良) 장귀천(張貴天)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문서에 각자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는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의 기유년(己酉年)은 1789년으로 건륭(乾隆) 56년이 아니라 건륭(乾隆) 54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하여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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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一年乙酉</연도>正月晦日 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지명>扶北一道</지명>一作盡字畓二十五斗落所耕四拾八負四束北邊三負一束㐣折価錢文肆佰伍兩依數捧上是遣舊文四丈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以此文記憑考事畓主<인명>金士洪</인명>[着名]證人<인명>鄭化叔</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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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三年</연도>六月 日 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者<지명>扶北一道</지명>一作盡字畓二十五斗落只所耕四十八負四束庫果北邊三負一束㐣折価文肆百陸拾兩依數捧上是遣幷付旧券永永放賣爲乎㫆日後如有異端以此文券相考爲乎乙事<연도>甲子</연도>六月十七日畓主<인명>辛重之</인명>[着名]證人<인명>金元汝</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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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十一年辛卯</연도>七月卄五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지명>扶北一道</지명>一作盡字畓貳拾伍斗落只所耕四十八卜四束庫果北邊三卜一束庫乙決價參佰肆拾兩捧上是遣永永放賣爲去乎以此文記憑考事畓主<인명>吳守哲</인명>[着名]訂人<인명>金哲興</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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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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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乾隆四十九年甲辰</연도>十一月初七日安完奉前明文右明文爲事段矣祖母自起買得畓累年耕食別有取用處<지명>頓池里</지명>前坪員伏在嘉字畓參斗落只所耕捌負㐣價折錢文四拾伍兩依數奉上爲遣右人本記文記二丈幷以此子孫中若有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雜談隅是去等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인명>朴倭土伊</인명>[着名]證人 <인명>姜承元</인명>[着名]筆 <인명>高應星</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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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隆熙三年</연도>己酉正月十三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所耕食是如可以要用所致伏在<지명>古阜巨麻面林方里</지명>前坪嘯字畓七斗落只所耕二十九負四束㐣價折錢文貳佰貳拾兩依數捧上是遣幷新舊文三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관직명>參奉</관직명> <인명>梁啓光</인명>[印]證人 幼學 <인명>劉良知</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金敬淑</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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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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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7년 모경삼(牟京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一年丁未十二月十一日 牟京三 大韓光武十一年丁未十二月十一日 모경삼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12월 11일에 모경삼(牟京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12월 11일에 모경삼(牟京三)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모경삼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고부현 거마면 임방리 전평(前坪) 소자답(嘯字畓) 7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9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0냥이다. 임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모경삼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구문기(舊文記)를 합쳐 모두 2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모경삼과 증인(證人)으로는 이청여(李淸如)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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