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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三月日 明文右明文事有緊用處定只堤下伏在南臨字畓庫果同字畓四斗落所耕十六負㐣折価貳佰兩依數捧上是遣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爻端以此新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辛郁</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溶鎭</인명>[着名]舊文記他畓並付故未爲出給[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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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六年壬寅</연도>正月十八日 明文右明文事卽有緊用處傳來畓伏在馬車堤上驚字畓九斗落只所耕二十四卜八束㐣価折錢文肆佰伍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幷付他畓文券故以新文記一丈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爻象則以此文憑告事畓主 幼學 <인명>沈文景</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夢三</인명>[着名]文書債三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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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신덕연(辛德淵)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五年己卯十二月十一日 辛德淵 光緖五年己卯十二月十一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9년(고종 16) 12월 11일에 신덕연(辛德淵)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9년(고종 16) 12월 11일에 신덕연(辛德淵)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신덕연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봉황리 후평(後坪) 누자답(樓字畓) 6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8부(負) 6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25냥이다. 봉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덕연은 구문기(舊文記)가 중간에 불에 타서 유실되었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신덕연과 정인(訂人)으로는 유학 전복여(田福汝)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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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五年</연도>己卯十二月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耕食矣以要用所致伏在<지명>一道面鳳凰里</지명>後坪樓字畓六斗落只所耕十八負六束㐣折価貳拾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已爲中間失火故只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告 官卞政事畓主 幼學 <인명>辛德淵</인명>[着名]訂人 幼學 <인명>田福汝</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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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十二月日 前明文右明文事段曲耒畓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伏在<지명>一道所只定堤</지명>下深字畓十一斗落卜數三十六卜五束庫叱價折錢文壹百五拾兩依數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而旧文記段中年失火時入於燒燼故新文記一丈成給日後若有意外之說則以此憑考事畓主 幼學 <인명>辛洪馨</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趙雲龍</인명> 喪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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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八年甲辰</연도>十一月十七日明文右明文事急有所用處故<지명>一道定只堤</지명>下伏在深字畓十一斗落所耕三十六負㐣價折錢文玖佰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舊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端持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準洪</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士欽</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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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신홍형(辛洪馨)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十二月日 辛洪馨 光緖三年丁丑十二月日 辛洪馨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12월에 신홍형(辛洪馨)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12월에 신홍형(辛洪馨)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신홍형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급히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라고 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심자답(深字畓) 11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36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5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신홍형은 구문기(舊文記)가 중간에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신문기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답(畓)의 주인 유학(幼學) 신홍형과 증필(證筆)로는 조운룡(趙雲龍)의 이름이 있다. 신홍형은 이름 아래에 서명하였고 조운룡는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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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안완봉(安完奉)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四十九年甲辰十一月初七日 朴倭土伊 安完奉 乾隆四十九年甲辰十一月初七日 朴倭土伊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84년(정조 8) 11월 초7일 박왜토이(朴倭土伊)가 안완봉(安完奉)에게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84년(정조 8) 11월 초7일 박왜토이(朴倭土伊)가 안완봉(安完奉)에게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왜토이는 조모(祖母)가 자기매득(自己買得)하여 경작해 왔던 논으로,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 매도(賣渡)하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돈지리 전평(前坪) 가자답(嘉字畓)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8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왜토이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2장(丈)을 매수인(買受人) 안완봉에게 넘겨주었다. 본문에는 훗날, 자손(子孫) 중에 이 거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면 될 일이라고 기록했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박왜토이와 증인(證人) 강승원(姜承元), 필(筆) 고응성(高應星)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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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九拾四兩也右家垈依로正히領收홈<연도>大正四年</연도>陰二月八日領收人<인명>金昌希</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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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參円也右ᄂᆞᆫ<지명>東津面鳳凰里</지명>家垈價條正히領收홈<연도>大正四年</연도>陰四月十四日領收人<인명>金文在</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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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貳拾円貳拾錢也但家垈價로正히領收條也<연도>大正四年</연도>陰四月十九日領收人<지명>鳳凰里</지명><인명>金昌希</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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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六拾[印]円也右<지명>鳳黃里</지명>家垈價是正히領收홈<연도>大正四年</연도>陰二月拾六日[印] <지명>鳳凰里</지명><인명>金德化</인명><인명>昌希</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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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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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捌円也右<지명>成黃里</지명>家垈價로正히領收홈<연도>大正四年</연도>陰四月二十四日領收人<인명>金文在</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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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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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貳拾年</연도>庚子十二月二十八日幼學<인명>金演一</인명>前明文右明文事移買次<지명>一道之飛里</지명>芬坪似字畓拾伍斗落只所耕肆拾肆負捌束㐣折價錢貳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本文二丈果完文一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端是去等持此文告 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朴蘭奕</인명>[着名]證茟 幼學 四寸<인명>明奕</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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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이시백(李時白) 산도(山圖)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19세기 후반 전북 부안군 [官印] 3개 6.5*6.5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후록(後麓)에 있는 이시백(李時白)의 선산(先山) 산도(山圖) 19세기 후반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후록(後麓)에 있는 이시백(李時白)의 선산(先山)에 묻혀 있는 선조들의 묏자리와 최창규(崔昌奎)의 선조들의 묏자리를 표시한 산도(山圖)이다. 당시 이시백이 속한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과 그 선산에 묘를 쓴 최창규의 문중과의 사이에 산송(山訟)이 일어났다. 산도에 적혀 있는 기록에 따르면 10월 초6일에 이시백의 5촌숙(寸叔)이 이곳에 입장(入葬)하였을 때, 최씨측은 이를 투장(偸葬)이라고 하였고, 이씨측은 백주(白晝)에 떳떳하게 입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같은 달 초9일에 이시백의 조부를 이곳 선산에 입장(入葬)하였는데, 최씨측은 이를 또 투장(偸葬)이라고 하였고, 이씨측은 백주(白晝)에 떳떳하게 입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최창규의 7대 조부모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75보 떨어진 곳에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시백이 새로 무덤을 썼다. 그리고 이시백이 새로 무덤을 쓴 곳에서 그의 증조모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는 불과 20보 반보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전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도에는 수령의 제사(題辭)도 적혀 있는데, 즉시 고하여 입장하고 만약 다시 소요를 일으키면 잡아들여 엄히 형벌을 가하라는 내용이 19일자로 적혀 있다.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지 않아서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수령은 소를 제기한 이시백측의 입장에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고문서가 수백 점 전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소장 문서의 압도적인 다수는 명문들로 약 5백여 점의 문서가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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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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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1년 이규정(李奎井)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巳十一月 日 東道面仙隱洞化民李奎井 城主 辛巳十一月 日 東道面仙隱洞化民李奎井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官印] 1개 7.0*7.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1년(고종 18) 11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정(李奎井)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 1881년(고종 18) 11월에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의 화민(化民) 이규정(李奎井)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이다. 이규정의 증조의 산소가 우산내면(右山內面) 자미동(滋味洞) 후록에 있었는데, 그동안 산직(山直)을 두어 수백년 동안 관리해 왔으며,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이곳에 투장(偸葬)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달 15일밤에 누군가가 주맥(主脈) 위쪽으로 이미 한 번 무덤을 파낸 곳에 압장(壓葬)을 하였다. 이규정은 묘의 주인을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관아에 소를 올려 관에서 즉시 그 묘를 파내도록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령은 무덤을 쓴 사람을 찾은 뒤에 다시 와서 소를 제기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고문서가 수백 점 전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소장 문서의 압도적인 다수는 명문들로 약 5백여 점의 문서가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이 소지에는 작성연대가 신사년(辛巳年)으로만 나오지만 위에서 보듯이 이규정의 관련 호구단자를 통하여 신사년을 1881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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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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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歲在<연도>戊戌<연도>九月二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數年收食是多可移居次不得已伏在<지명>蓮洞</지명>前坪滿字苧田參斗落只所耕四負㐣価折錢文二百貳拾兩依數捧用是遣倂旧文記三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則以此文記憑考事此亦中苧田主 <인명>趙白雲</인명>[着名]證人 <인명>梁得壽</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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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김규상(金珪相) 방매(放賣)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正元年陰八月八日 金珪相 大正元年陰八月八日 전북 부안군 [印] 3개 1.5*1.5 1개(적색, 원형), 1.1*0.8 1개(적색, 타원형), 1.6*1.1 1개(적색, 타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력8월 8일에 김규상(金珪相)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益上里)에 있는 산판(山坂)을 팔면서 작성한 산지매매계약서(山地賣買契約書) 1912년 음력8월 8일에 김규상(金珪相)이 부안군(扶安郡) 상동면(上東面) 익상리(益上里)에 있는 산판(山坂)을 팔면서 작성한 산지매매계약서(山地賣買契約書)이다. 김규상은 스스로 매입하여 가꾸어 온 시장(柴場)을 팔게 되었다. 시장(柴場)이란 땔감 채취를 위하여 가꾼 지정된 삼림 지역을 말한다. 매매 대상이 된 시장은 부안군 상동면 익상리 뒷쪽에 있는 산판 10동락(同落)이다. 매매 가격은 150냥이다. 익상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도인 김규상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부안군 상동면 익상리에 살고 있었다. 이 거래에는 매도인 참봉(參奉) 김규상과 보증인(保證人)으로는 호용신(扈用辰) 또한 마을 이장(里長) 심한근(沈漢根)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산판사표(山坂四標)를 살펴보면 동(東)쪽으로는 김원겸(金元兼)의 시장(柴場)있고, 서쪽으로는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 있다. 남(南)쪽은 김옥여(金玉汝)의 시장이 있고, 북(北)쪽으로는 손씨(孫氏) 성을 가진 사람의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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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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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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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3년 서내열(徐乃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八日 徐乃烈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광무 7)11월 18일에 서내열(徐乃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老溪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광무 7) 11월 18일에 서내열(徐乃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老溪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서내열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팔게 되었다. 이 문기에서는 특별한 방매 사유를 밝히고 있지 않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계동 전평(前坪) 태종전(太種田) 9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3부(負) 2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5냥이다. 여기서 태종전은 콩밭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락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서내열은 구문기(舊文記)가 가대(家垈)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서내열과 증필(證筆)은 강봉국(姜奉國)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 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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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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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3년 황한산댁노(黃韓山宅奴) 춘석(春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三日 金汝玉 黃韓山宅奴 春石 大韓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三日 金汝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광무 7) 11월 13일 김여옥(金汝玉)이 황한산(黃韓山) 댁(宅) 노(奴) 춘석(春石)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광무 7) 11월 13일 김여옥(金汝玉)이 황한산(黃韓山) 댁(宅) 노(奴) 춘석(春石)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본 명문에 토지를 산 사람은 황한산 댁의 노비(奴婢) 춘석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매매행위에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집안의 노비를 내세워 계약했기 때문에 이 밭의 실질적 매득인(買得人)은 황한산인 것이다. 김여옥은 스스로 매득(買得)하여 농사짓던 밭을 팔게 되었는데 본문에는 방매 사유를 뚜렷이 밝히고 있지 않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청림리(靑林里) 곡묵전평(谷墨前坪)에 있는 면전(綿田) 4두락지(斗落只)로 방매(放賣) 가격은 6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여옥은 구문기(舊文記)와 신문기(新文記)를 매수인(買受人) 황한산 댁의 노비 춘석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김여옥과 증인(證人)으로는 조영화(趙永化)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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