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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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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癸酉</연도>十二月二十九日 前手標右標事切有緊用處故右人前錢文三十兩以每市一分例得用是乎所限于來十月晦內備報之意如是成標事標主幼學 <인명>金元淑</인명>[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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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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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收證一金貳拾円也右ᄂᆞᆫ家垈金으로正히領收홈<연도>>大正四年</연도陰二月十一日領收人<인명>金昌希</인명>[印]小名 <인명>文在</인명>[印]兒名 <인명>德化</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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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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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咸豊七年</연도>丁巳十一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家道無路故<지명>扶北</지명>伏在傳來畓斯字伍斗落只所耕拾扒負伍束㐣折価錢文捌拾兩依數捧上爲遣新文記一長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雜談爲去等以此文記卞正憑考事畓主 自筆 <인명>金載垕</인명>[着名]證保四寸 <인명>以垕</인명>[着名]證人 <인명>金元瑞</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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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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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김재후(金載垕)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咸豐七年丁巳十一月初九日 金載垕 咸豐七年丁巳十一月初九日 김재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7년(철종 8년) 11월 9일 김재후(金載垕)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1857년(철종 8년) 11월 9일 김재후(金載垕)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김재후가 같은 해 방매한 부북에 있는 사자답(斯字畓)의 문서가 다른 논과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한 이유를 수기로 증명한 것이다. 문서 작성시 수기주인 김재후와 보증인으로 사촌 김이후(金以垕), 증인으로 김원서(金元瑞)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때 김재후가 논을 거래하면서 작성한 문기는 "1857년 김재후(金載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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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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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三十年</연도>庚戌十二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耕食是多可移買次<지명>一道社食</지명>坪樓字畓拾斗落只所耕二十三卜四束㐣価折錢文一百五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丈新文記幷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告官卞呈事畓主 幼學 自筆 <인명>崔鳳后</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李後成</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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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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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9년 조필량(趙弼良)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八年己亥十二月初九日 金氏 趙弼良 道光十八年己亥十二月初九日 김씨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9년(헌종 5) 12월 9일에 숙모(叔母) 김씨(金氏)가 조카 조필량(趙弼良)에게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9년(헌종 5) 12월 9일에 숙모(叔母) 김씨(金氏)가 조카 조필량(趙弼良)에게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지비리(之飛里)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道光十八年己亥"로 기재하고 있으나, 기해년은 도광 18년이 아니라 도광 19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하여 1839년으로 작성연대를 잡았다. 숙모 김씨가 조카 조필량에게 논을 팔게 된 이유는 이사(移徙)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지비리 전평(前坪) 누자답(樓字畓) 10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3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20냥이다. 지비리는 현재의 부안군 동진면 지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숙모 김씨가 구문기(舊文記)는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 조카 조필량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숙모 김씨와 정정(訂爭)으로는 김성운(金聖云)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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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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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907년 이상필 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十一年丁未四月初八日 李相弼 裵閏國 大韓光武十一年丁未四月初八日 전북 부안군 [印]3개, [着名] 2개 2.0*2.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7년(융희 1) 4월 초8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7년(융희 1) 4월 초8일 이상필(李相弼)이 배윤국(裵閏國)에게 전라북도(全羅北道) 만경군(萬頃郡) 남일면(南一面) 묘라리(竗羅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개자답(盖字畓) 15두락지(斗落只) 결수(結數)로는 33부(卜) 6속(束)인 곳과 차자답(此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30부 1속인 곳이다. 이와 함께 동자답(同字畓) 18두락지 결수로는 41부 6속인 곳과 동자답(同字畓) 13두락지 결수로는 25부 7속인 곳이다. 네 곳의 토지는 모두 59두락지로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2805냥이다. 묘라리는 오늘날의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매매명문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되었지만, 여전히 면적을 표기하는 방법은 조선 시대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필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논문서와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음이라 하고 새로 작성한 문서를 1장을 매수인(買受人) 배윤국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경신문외평동(京新門外平洞) 전참봉(前叅奉) 이상필과 매수인 배윤국, 거매주(居賣主)는 유학(幼學) 임은숙(任殷叔), 집필(執筆) 유학 임도형(任道衡), 보증(保證)은 유학 강자선(姜自先)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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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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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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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0년 김상만(金祥滿)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庚寅三月十八日 金祥滿 光緖十五年庚寅三月十八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3월 18일 김상만(金祥滿)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증산(甑山) 남쪽 산기슭에 있는 땅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3월 18일 김상만(金祥滿)이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 증산(甑山) 남쪽 산기슭에 있는 땅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산의 주인 김상만은 다음달 말까지 이곳에 있는 친산(親山)을 이장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상대방이 이곳에 산소를 쓰기 위하여 매입 의사를 밝히자 옛 무덤구덩이 전후 좌우 10보씩에 해당하는 땅을 팔기로 하였다.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50냥이다. 증산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동진면 증산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매도인(賣渡人) 유학(幼學) 김상만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산지주(山地主) 유학(幼學) 김상만과 증필(證筆)로는 유학 박규환(朴奎桓)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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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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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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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五年</연도>庚寅三月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親山在於<지명>扶北一道面甑山</지명>南麓是乎所以來月晦內移去後右人入葬之意自舊壙前後左右限十步之地價折錢文伍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爻象持此文憑考事山地主 幼學 <인명>金祥滿</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朴奎桓</인명>[着名](背面)<지명>擧石里</지명>家垈文 <인명>李周鳳</인명>處買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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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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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嘉慶十年乙丑</연도>十一月二十日<인명>高生員宅奴福用</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衿得畓<지명>下西衣服洞</지명>前坪伏在穡字畓三斗落只所耕十負五束庫乙價折錢文九十兩依數捧上爲遣本文記 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同生子孫中雜談是去等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上典<인명>成生員宅奴太金</인명>[左寸]訂人 <인명>尹興辛</인명>[着名]筆<인명>朴成根</인명>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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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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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과부(寡婦) 김소사(金召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三月初六日 寡婦 金召史 光緖三年丁丑三月初六日 寡婦 金召史 전북 부안군 [右掌]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초6일에 과부(寡婦) 김소사(金召史)가 부안현(扶安縣) 의동(衣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3월 초6일에 과부(寡婦) 김소사(金召史)가 부안현(扶安縣) 의동(衣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소사는 이 해에 흉년이 들어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어서 의동(衣洞) 전평에 있는 무자답(務字畓) 3마지기를 14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유실되었기 때문에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나중에 이 논을 두고 소동이 일어나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소사와 증인(證人)으로 동생 김국서(金國瑞)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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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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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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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6년 염규석(廉圭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丙子三月初三日 廉圭錫 光緖三年丙子三月初三日 廉圭錫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 (고종 13) 3월 초3일에 염규석(廉圭錫)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 (고종 13) 3월 초3일에 염규석(廉圭錫)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염규석은 이사를 가기 위해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에 작성연대로 기재된 병자년(丙子年)은 광서(光緖) 3년이 아니라 광서 2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1876년으로 추정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 전평(前坪) 현자(玄字) 7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23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5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염규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2장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토지의 주인 염규석과 증인(證人)으로 전흥문(田興文)의 이름이 있다. 염규석은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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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연도>咸豐七年</연도>丁巳十一月初九日 前明文右手記事段斯字畓本文記段他畓並付故不得出給以此手記憑考爲乎事手記主 <인명>金載垕</인명>[着名]證保四寸 <인명>以垕</인명>[着名]證人 <인명>金元瑞</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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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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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2년 신동흡(辛東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八年壬午九月 辛東翕 光緖八年壬午九月 신동흡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2년(고종 19) 9월 30일에 신동흡(辛東翕)이 부북(扶北) 일도(一道)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82년(고종 19) 9월 30일에 신동흡(辛東翕)이 부북(扶北) 일도(一道)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동흡은 자신이 매득한 부북 일도면 지비리(之飛里) 전평(前坪)의 사자답(似字畓) 15두락과 청자(淸字) 12두락, 또 사자(似字) 6두락 등 모두 합하여 1석 13두락에다가 화곡(禾穀)을 더해서 총 37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8장을 매수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분란이 일어날 폐단이 있으면 이 문기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신동흡이 직접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으로 정동식(鄭東息)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위 문서에 나오는 지비리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 지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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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0년 김연일(金演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貳拾年庚子十二月二十八日 朴蘭奕 金演一 道光貳拾年庚子十二月二十八日 박난혁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0년(헌종 6) 12월 28일에 유학 박난혁(朴蘭奕)이 유학 김연일(金演一)에게 부안 일도(一道)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40년(헌종 6) 12월 28일에 유학 박난혁(朴蘭奕)이 유학 김연일(金演一)에게 부안 일도(一道)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난혁이 부안 일도의 지비리(之飛里) 분평(芬坪)에 있는 사자답(似字畓) 15두락을 김연일에게 280냥에 팔았다. 그곳에서 수확한 곡식은 44부 8속이다. 매매 당시 본 문서 2장과 완문(完文) 1장을 김연일에게 넘겨주면서 나중에 만약 분란이 일어나면 이 문서들을 증거로 관에 알려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박난혁과 증필로 유학 사촌(四寸) 박명혁(朴明奕)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위 문서에 나오는 지비리는 오늘날 부안군 동진면 지비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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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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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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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4년 최석두(崔石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崔石斗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최석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최석두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 전평(前坪) 호자답(号字畓)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0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석두는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최석두와 증필(證茟)으로는 유학 임세(林世)가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은 오늘날 부안군 상서면 고잔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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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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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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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十八年</연도>己亥十二月初九日 侄<인명>趙弼良</인명> 前明文右明文事段移徙次伏在<지명>一道之飛里</지명>前坪樓字畓拾斗落所耕二十三負四束㐣折価錢壹百二十兩依數捧上爲遣右侄前永永放賣而本文記段他文書並付故不得出給爲去乎日後若有異說是去等持此文記告官憑考事畓主 叔母 金氏[着名]訂爭 幼學 <인명>金聖云</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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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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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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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十一年</연도>丁未四月初八日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지명>全羅北道萬頃南一面竗羅</지명>坪盖字畓十五斗落結三十三卜六束庫果此字畓十三斗落結三十卜一束庫果同字畓十八斗落結四十一卜六束庫果同字畓十三斗落結二十五卜七束庫合畓五十九斗落価折錢文貳仟扒佰伍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幷付他畓不得出給以新文一丈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京新門外平洞 前<관직명>叅奉</관직명> <인명>李相弼</인명>[印]賣主 前主事 <인명>裵閏國</인명>[印]居賣主 幼學 <인명>任殷叔</인명>[着名]執筆 幼學 <인명>任道衡</인명>[印]保證 幼學 <인명>姜自先</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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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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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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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8년 전재열(田在說)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十一月 日 田在說 光緖四年戊寅十一月 日 田在說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11월에 유학(幼學) 전재열(田在說)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11월에 유학(幼學) 전재열(田在說)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재열이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 심자답(深字畓) 16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7복 5속이 되는 곳과 이자답(履字畓) 13마지기, 부수로는 35복 3속이 되는 곳을 48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를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전재열과 증인으로 유학 전여백(田汝伯)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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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乾隆三十四年己丑</연도>四月 日<인명>金昌吉</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矣亦年運不幸家禍菫菫保命生道爲難乙仍于矣身自記賣得畓拾柒斗落只畓庫伏在外<지명>一道面</지명>一作伏在履字畓三十六卜四束畓庫叱乙錢文壹百柒拾兩依數捧上本文記肆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或有雜談是去等以此文記告官處置事畓主 <인명>金再永</인명>[着名]證人 <인명>姜渭得</인명>[着名]筆執 <인명>朴就榮</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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