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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高峰山下世仍居左蕙右蘭香滿墟勤儉治家家有道仁溫處世世同譽空庭雪草靑還出佳兆煙松翠更踈慶福高門天必報莫非平昔積陰餘侍生<지명>安東</지명><인명>權寧桓</인명> 謹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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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수(權秉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秉洙 李殷弼 權秉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병수(權秉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병수(權秉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병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화산후인(花山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화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옛 별호이며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병수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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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公 曾擇處舊臨瀛八十年來送泰平遐祝長期南極壽緣何遽作北邙行湖邊風月懷深色谷裏蕙蘭惜別情講信春秋觀夫席後生不覺淚縱橫 <지명>花山</지명>后人 侍生 <인명>權秉洙</인명>謹再拜哭挽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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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현(朴三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三鉉 李殷弼 朴三鉉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삼현(朴三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삼현(朴三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삼현은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후인(臨瀛后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그는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자신을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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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二年丙子</연도>十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急有要用處伏在<지명>東道仙隱洞</지명>洞中天字苧田二斗落只所耕一負庫乙價折錢文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張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談以此文記告官卞庭事苧田主 自筆 <인명>南啓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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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최규성(崔奎成)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三日 崔奎成 光武七年癸卯十一月十三日 崔奎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광무 7) 11월 13일 최규성(崔奎成)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蘆溪洞)에 있는 면전(綿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광무 7) 11월 13일 최규성(崔奎成)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노계동(蘆溪洞)에 있는 면전(綿田)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최규성은 궁핍한 겨울에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군 하서면 노계동의 남평(南坪) 면전(綿田) 4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18부(負) 9속(束)인 곳과 동평(東坪) 태종전(太種田) 4두락지로 부수로는 5부 5속인 곳이다. 이 두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85냥이다. 여기서 태종전은 콩밭을 말한다. 산세(山稅)는 매입자가 내기로 정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규성은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또한 구문기(舊文記)는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최규성과 증필(證筆) 유학 서덕노(徐德魯)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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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0년 최봉후(崔鳳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三十年庚戌十二月二十日 崔鳳后 道光三十年庚戌十二月二十日 최봉후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0년(철종 1) 12월 20일 최봉후(崔鳳垕)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사창리(社倉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0년(철종 1) 12월 20일 최봉후(崔鳳垕)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사창리(社倉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최봉후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하던 논을 팔게 된 이유는 이매(移買)이다. 이매(移買)란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서 다른 땅을 사는 것을 말한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사창리 전평(前坪) 누자답(樓字畓) 10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3부(卜)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5냥이다. 사창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봉후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분쟁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최봉후와 증인(證人)으로는 유학 이후성(李後成)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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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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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8년 신옥년(辛玉年)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正月二十五日 辛玉年 光緖四年戊寅正月二十五日 辛玉年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1월 25일에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1월 25일에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옥년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전해 내려온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 이자답(履字畓) 16마지기와 동자답(同字畓) 13마지기를 36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를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옥년과 증인으로 유학 전여백(田汝伯)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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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豊九年</연도>己未十一月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數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지명>一道社倉</지명>坪樓字畓十一斗落只所耕二十三負四束㐣価折錢文㱏佰參拾五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二丈新文記一丈倂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以此文記憑考事畓主 <인명>金德現</인명>[着名]證筆 <인명>林琪煥</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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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五年己丑</연도>二月晦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要用處故不得已伏在立下東嶺峙下<지명>萬化洞</지명>前坪而字畓肆斗落只所耕九負二束七夜味㐣價折錢文㱏佰貳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幷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인명>朴凖龍</인명> 喪不着證人 <인명>李伯賢</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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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八年甲辰</연도>九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有要用故伏在<지명>蓮洞坪</지명>滿字苧田三斗落只所耕四負㐣価折錢文貳佰柒拾兩依數捧上是遣幷旧文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 告 官卞正事苧田主 <인명>廉錫洙</인명>[着名]證人 <인명>徐俊敬</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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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六年</연도>庚寅三月十七日前明文右明文事段傳來記得累年居生是多可要用所致伏在<지명>上西面</지명>擧石里於字草家四間果行廊二間果垈田二斗落果苧田九隊〖斗〗落果太種田拾捌斗落果綿田肆斗落果沃畓參斗落果紫場伍拾同處梨木一株柿木陸株所耕二負㐣價折錢文貳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舊文三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則以此文記憑考事家垈主 童蒙 <인명>李周鳳</인명> 喪不着證人 幼學 <인명>姜永氣</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李瑛儀</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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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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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武十年丙午</연도>九月十一日右明文事自己買得數年收稅是多可以要用所致伏在<지명>左山內蓮洞<지명>前坪滿字畓陸斗落只所耕廤倂禾穀㐣価折錢文柒百佰捌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七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說則以此文記告官卞政事畓主 幼學 <인명>李正瑞</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文巨</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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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六年壬寅</연도>十二月十九日 前明文右明事當此要用處故不得已<지명>蓮洞</지명>前坪滿字畓六斗落只所耕十三負五束㐣価折錢文七百兩依數封上是遣新舊文合六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則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인명>崔允七</인명>[着名]證筆 <인명>姜勸永</인명>[着名]證人 <인명>金正宿</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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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4년 염석수(廉錫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八年甲辰九月初三日 廉錫洙 光武八年甲辰九月初三日 廉錫洙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 9월 초3일에 염석수(廉錫洙)가 부안군(扶安郡) 연동(蓮洞)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 9월 초3일에 염석수(廉錫洙)가 부안군(扶安郡) 연동평(蓮洞坪)에 있는 만자저전(滿字苧田) 3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부수(負數)로는 4부가 되는 이 모시밭을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270냥에 팔았다. 거래시 구문기와 신문기를 매입자에게 모두 건네 주었다. 만일 차후에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를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증인으로는 서준경(徐俊敬)이 방매자 염석수와 함께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모시밭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모시밭은 앞서 1862년에 조육손(趙六孫)이 방매하였으며, 1898년에는 조백운(趙白雲)이 방매한 것으로 나온다. 거래가격은 1862년 50냥에서 1898년 220냥으로 올랐으며, 1904년에 와서 다시 270냥으로 크게 올랐다. 이렇게 보면, "1862년 조육손(趙六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와 "1898년 조백운(趙白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은 1904년에 작성된 이 문서의 구문기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시밭의 마지막 거래로 추정되는 1904년의 매입자는 이 문서의 소장처인 부안 선은동의 전주이씨가의 일원으로 추정된다. 선은동은 오늘날의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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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05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복용(福用)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十年乙丑十一月二十日 成生員宅奴 太金 高生員宅奴 福用 嘉慶十年乙丑十一月二十日 成生員宅奴 太金 전북 부안군 [左寸] 1개, [着名] 1개, 喪人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05년(순조 5) 11월 20일에 성생원댁노(成生員宅奴) 태금(太金)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05년(순조 5) 11월 20일에 성생원댁노(成生員宅奴) 태금(太金)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논을 역시 상전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복용(福用)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성생원댁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의복동 전평에 있는 색자답(穡字畓) 3마지기를 고생원댁에 90냥에 팔았다. 만약 나중에 자손 가운데 여러 말이 있거든 건네준 신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태금과, 증인 윤흥신(尹興辛)과 필집 박성근(朴成根) 등 3인이 참여하였다. 박성근은 상중이어서 서명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치부기록류

<지명>下西衣服洞</지명><지명>村前</지명>三斗落 時<인명>崔只文</인명>四斗落 時<인명>鄭永最</인명>五斗落 時<인명>宣懸完</인명>五斗落 時<인명>尹懸寃</인명><지명>함박골</지명> 十二斗落 時<인명>高洪西</인명>七斗落 時<인명>崔只文</인명><지명>平池里村前</지명> 五斗落 時<인명>金順卜</인명><지명>길음이골</지명> 四斗落 時<인명>金同業</인명>合二石五斗落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3년 박원칠(朴元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九年癸巳七月初八日 朴元七 光緖十九年癸巳七月初八日 朴元七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3년(고종 30) 7월 8일에 박원칠(朴元七)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3년(고종 30) 7월 8일에 박원칠(朴元七)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의복동(衣服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원칠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부안현 하서면 의복동(衣服洞) 전평에 있는 논 3마지기, 부수(負數)로는 10부 5속이 되는 곳을 4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 1장과 신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나중에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박원칠은 상(喪)을 당하여 문기에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김응칠(金應七)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九年癸巳</연도>七月初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지명>下西衣服洞</지명>前坪伏在畓三斗落只所耕十負五束㐣價折錢文肆拾五兩依數捧上是遣本文與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인명>朴元七</인명>[喪不着]證人 <인명>金應七</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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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武七年癸卯</연도>十一月十三日 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耕食是多可當此窮冬勢不得已伏在<지명>下西面芦溪洞</지명>南坪 字綿田四斗落所耕山稅八負九束㐣果東坪太種田四斗落所耕五負五束㐣價折錢文捌拾伍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文㱏丈永永放賣爲去乎旧文記他文幷付不得出給而日後若有他說則以新文㱏丈以卞考事田主 幼學 <인명>崔奎成</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徐德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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