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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拾玖年己亥</연도>正月二十一日幼學<인명>金演一</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移買次傳來畓伏在<지명>之飛里</지명>行禁坪淸字丁十二斗落所耕貳拾玖卜肆束果參卜二束㐣價折錢文一百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他田畓並付故不得出給而右人前以新文一張永永放賣是去乎日後或有鬧擾之端是去等以此文告 官卞正事畓主喪人<인명>朴洪奕</인명>[喪不着]證筆 <인명>金斗一</인명>[着名]즁현니졉론문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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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일환(辛一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年辛未正月 日 辛一煥 同治十年辛未正月 日 辛一煥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1년(고종 8) 정월에 노휴재계장(老休齋稧長) 신일환(辛一煥)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1년(고종 8) 1월에 노휴재계장(老休齋稧長) 신일환(辛一煥)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일환은 다른 전답을 매입하기 위하여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임자답(臨字畓) 13마지기, 결부로는 10부 2속이 되는 곳과, 같은 임자답 내 27부 4속이 되는 곳을 신일환에게 2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매입자에게 구문기 2장을 건네주면서 증빙자료로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답주인 노휴재계장 신일환과 필집(筆執) 김방린(金邦麟), 유사(有司) 신동직(辛東稷)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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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송상옥(宋祥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五年丙寅二月初六日 宋祥玉 同治五年丙寅二月初六日 宋祥玉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6년(고종 3) 2월 6일에 유학(幼學) 송상옥(宋祥玉)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6년(고종 3) 2월 6일에 유학(幼學) 송상옥(宋祥玉)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송상옥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상서면 노적리(露積里) 후평의 옛터에 있는 어자(於字) 논 1마지기와 같은 어자(於字) 밭 3마지기를 1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 1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말썽이 일어나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전답주 송상옥이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증인으로 유학 최우효(崔佑孝)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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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光武七年</연도>八月十二日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伏在村左垈田一斗落價折錢文伍什兩右人前放賣而舊文記中間遣失故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憑考事田主 自筆 幼學 <인명>陳榮奎</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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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豐元年辛亥</연도>十一月初一日<인명>高生員宅奴善鳳</인명>前明文右明文事歉年生活無路故自己買得伏在<지명>露積里</지명>村前於字田肆斗落所耕貳卜五束廤價折錢文貳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舊文一丈並以永永放賣爲去乎日後紛紜則持此文憑考事田主 閑良 <인명>陳乭金</인명>[左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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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노(奴) 돌쇠(乭金)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三十年庚戌三月初十日 上典 邊 道光三十年庚戌三月初十日 上典 邊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0년(철종 1) 3월 10일에 상전(上典) 변(邊) 아무개가 부안(扶安) 촌전(村前)에 있는 논을 노(奴) 돌쇠(乭金)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0년(철종 1) 3월 10일에 상전(上典) 변(邊) 아무개가 부안(扶安) 촌전(村前)에 있는 논을 노(奴) 돌쇠(乭金)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상전 변(邊) 아무개는 이사하기 위하여 어자전(於字田) 4마지기 안에 있는 모시밭(苧田) 1마지기를 돌쇠에게 20냥에 팔았다. 모시밭은 부수(負數)로는 2복 5속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거래 당시 신문기 1장을 돌쇠에게 주면서 나중에 증빙자료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문기는 상전인 변아무개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다. 상전이 돈이 궁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종에게 밭을 판 특별한 사례에 속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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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三十年庚戌</연도>三月初十日奴<인명>乭金</인명>處明文右明文事移居次村前於字田四斗落內苧田一斗落並以捧價貳拾兩是遣以新文一丈所耕二卜五束並汝矣處永永放賣爲是日後憑考事田主 上典 自筆 <인명>邊</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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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전인린(田仁麟)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元年壬戌十月十九日 田仁麟 同治元年壬戌十月十九日 田仁麟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2년(철종 13) 10월 19일에 전인린(田仁麟)이 부안현 일도면 봉황리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2년(철종 13) 10월 19일에 전인린(田仁麟)이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인린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부안현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 전평에 있는 누자답(樓字畓) 14마지기를 150냥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매매 당시 본문서 3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서로가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전인린은 상을 당하여 참석하지 못하였고 증필로 김양순(金養順)이 참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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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元年壬戌</연도>十月十九日 右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伏在<지명>一道面鳳凰山</지명>前坪樓字畓拾肆斗落只所耕貳拾捌負捌束庫乙價折錢文壹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參丈並以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記告官卞庭事畓主 <인명>田仁麟</인명>[喪不着]證筆 <인명>金養順</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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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문장(門長) 전은조(田殷祚)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八年丁巳十二月十二日 田殷祚 咸豐八年丁巳十二月十二日 田殷祚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7년(철종 8) 12월 12일에 문장(門長) 전은조(田殷祚)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7년(철종 8) 12월 12일에 문장(門長) 전은조(田殷祚)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동안 문중(門中)에서 이 논을 매득하여 세를 받아왔으나, 빚을 갚기 위하여 봉황산 전평에 있는 누자답(樓字畓) 14마지기를 115냥에 팔았다. 전은조는 문중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이 거래에 참여하였다. 매매 당시 본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어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문장(門長) 전은조와 증인으로 김양순(金養順)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咸豐八年丁巳"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정사(丁巳)는 함풍 8년(1858)이 아니라 함풍 7년(1857)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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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四年戊寅</연도>十一月 日 前明文右明文事卽有要用處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定只堤</지명>下深字畓十六斗落所耕三十七卜五束庫果同坪履字畓十三斗落所耕三十五卜三束㐣價折錢文肆佰捌拾兩依數捧上是遣倂新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異論持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在說</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汝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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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十年</연도>丙午五月初四日 明文 一夜味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勢不得已伏在<지명>古阜巨麻面林方里</지명>前坪嘯字畓七斗落只所耕二十九負四束㐣價折錢文參佰貳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倂付他畓文券故以新文㱏張右人處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文記憑考事畓主 <인명>劉承彦</인명>[着名]證人 <인명>金德彦</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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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十二年丁未</연도>九月二十一日明文右明文事移買次切有緊用處故勢不得已伏在<지명>仙隱洞</지명>前坪太種田天字五斗落所耕八負六束㐣折価錢文陸拾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移去時閪失故以新文㱏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記憑考事太田主自筆<인명>李成實</인명>[着名]證人 <인명>姜和玉</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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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강주환(姜周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姜周煥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喪人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런데 거래 당시 전주 이영수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족인(族人) 이시용(李時容)이 전주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섰다. 이영수는 동생의 선인(船人) 염가(塩價) 문제에다 왕세(王稅) 납부를 거부한 죄목으로 옥에 갇혀 있었다. 관에서는 가장(家庄)과 전지(田地)를 방매하여 추급(推給)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기 때문에 이영수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기(手記)를 작성하여 전지를 파는데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시용이 이영수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서 문서에 서명하였다. 한편 증인으로 면임(面任) 김석원(金碩元)이, 필집(筆執)으로 동임(洞任) 조종규(趙宗奎)가 거래에 입회한 것도 이 거래가 세금을 추징하기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거래의 매입자는 이영수가 작성한 수기와 관제(官題)를 신문기와 함께 넘겨받았다. 만일 뒤에 이 거래를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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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신욱수(辛郁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 畓主 幼學 辛郁首 光緖三年丁丑 辛郁首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신욱수가 팔고자 한 것은 정지제(定只堤) 남쪽 아래에 있는 임자(臨字) 답(畓)과 또 다른 임자(臨字) 답 4두락 등 2군데였다. 매매 가격은 200량. 결코 적은 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옥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본 톤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했던 문서들은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문서들이 다른 전답의 문서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인데, 문서 마지막에 "구문기 타답병부 고미위출급인(舊文記 他畓並付 故未爲出給印)"라고 적힌 부분이 바로 그 내용이다. 한편 신욱수는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를 유학(幼學)이라고 칭한 점을 알 수가 있다. 유학이란 관직이나 품계를 같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사실 양반이 논이나 밭의 거래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으레는 자신이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양반이 돈과 관련한 일에 관여한다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행은 갑오경장 이후가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는데, 신욱수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리인으로 내세울만한 노복이 없어서였는지 혹은 이제는 신분이라는 것이 무색한 것이 되어 비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4년 전준기(田凖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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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年辛未</연도>正月 日 前明文右明文事老休齋畓庫移買次<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伏在臨字畓十三斗落所耕拾負貳束同字貳拾柒負肆束庫叱捧價錢貳百參拾兩幷舊文記二丈永永放賣爲去乎以此憑考爲乎乙事老休齋稧長 <인명>辛一煥</인명>[着名]筆執 <인명>金邦麟</인명>[着名]有司 <인명>辛東稷</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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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노휴재(老休齋)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十一年辛酉十月 日 辛景始 老休齋 咸豐十一年辛酉十月 日 辛景始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1년(철종 12) 10월에 신경시(辛景始)가 부안의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노휴재(老休齋)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1년(철종 12) 10월에 신경시(辛景始)가 부안의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노휴재(老休齋)에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경시는 급하게 돈이 필요하여 정지제 아래의 임자답(臨字畓) 13마지기, 부수로는 10부 2속이 되는 곳과 같은 임자답 27부 4속이 되는 곳을 노휴재에 196냥 5전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1장을 건네주면서 이를 증빙문서로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경시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證人)으로 김기겸(金基謙)과 신두환(辛斗煥) 등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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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豐十一年辛酉</연도>十月 日 老休齋中明文右明文事有急次<지명>定只堤</지명>下臨字畓拾三斗落所耕十負二束庫果同字二十七負四束庫乙捧價錢壹百玖拾陸兩五錢齋中放賣而舊文記一張幷以出給爲去乎以此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 <인명>辛景始</인명>[着名]證人 <인명>金基謙</인명>[着名]<인명>辛斗煥</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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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이광진(李光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十九年乙亥三月初九日 李光震 嘉慶十九年乙亥三月初九日 李光震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15년(순조 15) 3월에 유학 이광진(李光震)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15년(순조 15) 3월에 유학 이광진(李光震)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광진은 급히 돈을 쓸 곳이 있어서 정지제(定只堤) 아래의 임자답(臨字畓) 13마지기, 부수로는 10부 2속이 되는 곳과 같은 임자답내 27부(負)가 되는 곳을 모두 1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서는 다른 논의 문기에 붙어 있어서 매입자에게 주지 못했다. 만약 이 논을 두고 나중에 서로 다른 말이 나오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이광진이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서규찬(徐奎贊)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嘉慶十九年乙亥'로 되어 있지만, 을해년은 가경 20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하여 1815년을 작성연대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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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녕환(權寧桓)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寧桓 李殷弼 權寧桓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녕환(權寧桓)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녕환(權寧桓)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녕환은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녕환은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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