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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남계풍(南啓豊)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瑞元年乙亥十月卄三日 南啓豊 光瑞元年乙亥十月卄三日 南啓豊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5년(고종 12) 10월 23일 남계풍(南啓豊)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僊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5년(고종 12) 10월 23일 남계풍(南啓豊)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僊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남계풍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 전평(前坪) 지자답(地字畓)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 로는 12부(負)이다. 방매 가격은 6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남계풍은 구문기(舊文記) 3장(丈)과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유학(幼學) 남계풍과 증인(訂人)으로는 김치도(金致道)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광서(光瑞)는 광서(光緖)로, 일장(一張)은 일장(一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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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庚戌</연도>十一月二十八日<지명>愚東里</지명>前坪謝字畓四斗落果慼字畓六斗落果太種田二斗五升落荷字庫文券幷付於家垡文券故未得出給印畓主 <인명>李相九</인명> [喪不着] 字正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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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九年庚午</연도>二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有急用處傳來右田伏在<지명>一道黃盖山</지명>墓下命字三斗落所耕六負三束庫乙捧價錢文柒兩是遣右人永永放賣爲去乎舊文段他田中幷付故不得出給而以新文一張興成爲去乎如有日後携貳之弊以此文憑考事田主 幼學 <인명>朴受繪</인명>[着名]訂人 <인명>李取浩</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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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박오위장댁노(朴五衛將宅奴) 동일(東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拾肆年癸巳二月二十六日 金福介 朴五衛將宅奴東日 道光拾肆年癸巳二月二十六日 金福介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3년(순조 33) 2월 26일 김복개(金福介)가 박오위장댁(朴五衛將宅) 노(奴) 동일(東日)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 1833년(순조 33) 2월 26일 김복개(金福介)가 박오위장댁(朴五衛將宅) 노(奴) 동일(東日)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이다. 김복개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박오위장댁의 노 동일에게 팔았다. 문서상 토지를 산 사람은 박오위장의 노비(奴婢) '동일'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대부는 매매행위에서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집안의 노비를 내세워 계약을 했다. 즉, 이 밭의 실질적 매득인(買得人)은 박오위장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명자태전(命字太田)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5부(負) 6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냥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전(太田)은 콩밭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김복개는 중간에 구문기(舊文記)를 모두 분실하여 이번에 작성된 신문기(新文記) 1장(丈)만을 매수인에게 넘겨주었다. 추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을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밭의 주인 김복개와 정필(訂筆) 이기석(李基錫)의 이름과 서명이 각각 있다. 본 문서(文書)가 작성된 계사년(癸巳年)은 1833년으로 도광(道光) 14년이 아니라 도광 13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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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拾肆年癸巳</연도>二月二十六日朴<관직명>五衛將</관직명>宅奴<인명>東日</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自己買得太田命字三斗落所耕五負陸束㐣捧價錢文捌兩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旧文記段中間閪失故以新文一張放賣日後如有爻象是去等持此文憑考卞正事田主 <인명>金福介</인명>[着名]訂筆 <인명>李基錫</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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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四年戊子</연도>十一月十五日 右宅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大荒之年生活無路故勢不得已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定只</지명>堤下 字畓伍斗落所耕拾扒負㐣價折錢文肆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二張果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憑考事畓主 閑良 <인명>朴五達</인명>[着名]證人 閑良 <인명>金成五</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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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김상문(金相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年甲申四月初十日 金相文 光緖十年甲申四月初十日 김상문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고종 21) 4월 10일에 유학 김상문(金相文)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4년(고종 21) 4월 10일에 유학 김상문(金相文)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상문은 금년에 흉년이 들어 세금을 납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일도면 후산(後山)의 뒷들에 있는 면자답(面字畓) 7두락과 이도면(二道面)에 있는 망자답(邙字畓) 14두락을 100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면자답은 17부, 망자답은 32부 3속 등 모두 49부 3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 4장과 신문기 1장을 매수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들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김강문과 증인으로 유학 전정풍(田定豊)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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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年</연도>甲申四月初十日 前明文右明文事當此大荒之年 王稅辦出無路故傳來畓伏在<지명>一道</지명>後山後坪面字七斗落所耕十七負庫果<지명>二道</지명>秩邙字十四斗落所耕三十二負三束㐣價折錢文壹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四丈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金相文</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定豊</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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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유기룡(柳基龍)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二年壬子十月初九日 柳基龍 咸豊二年壬子十月初九日 유기룡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2년(철종 3) 10월 9일에 유학 유기룡(柳基龍)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2년(철종 3) 10월 9일에 유학 유기룡(柳基龍)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기룡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긴요하게 쓸 일이 있어서 부안 일도면 황수제(黃水堤) 아래에 있는 면자답(面字畓) 7두락지를 190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17부가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매수자에게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분란의 조짐이 보이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아 관에 고하여 증명하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논의 마지기 수와 부수를 고친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정한 수치로 해제를 작성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유기룡과 증필로 유학 최봉두(崔奉斗)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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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김재후(金載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七年丁巳十一月初九日 金載垕 咸豊七年丁巳十一月初九日 김재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7년(철종 8) 11월 9일에 김재후(金載垕)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57년(철종 8) 11월 9일에 김재후(金載垕)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재후가 집안의 생계(生計)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부북(扶北)에 있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사자(斯字) 논 5두락지를 8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문기 1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자손들이 여러 말이 있으면 이 문기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김재후가 직접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보증인으로 사촌인 김이후(金以垕), 증인으로는 김원서(金元瑞)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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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元年辛亥十一月初一日 陳乭金 高生員宅奴 善鳳 咸豐元年辛亥十一月初一日 陳乭金 전북 부안군 [左掌]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1년(철종 2) 11월 1일에 한량(閑良) 진돌쇠(陳乭金)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1년(철종 2) 11월 1일에 한량(閑良) 진돌쇠(陳乭金)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노적리(露積里)에 있는 논을 고생원댁노(高生員宅奴) 선봉(善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진돌쇠는 흉년이 들어 도저히 생활할 길이 없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상서면 노적리(露積里) 전평에 있는 어자전(於字田) 4마지기를 고생원댁노 선봉에게 2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으며, 나중에 말썽이 나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 주인 진돌쇠만 참여하여 착명(着名) 대신에 왼쪽 손바닥을 그려서 확인하였다. 이 문서에서 선봉은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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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三年</연도>甲戌十二月晦日 前明文右明事段急有眞用處伏在<지명>一道黃可山</지명>北麓命字田五斗落只所耕七負㐣折価錢文貳拾貳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二丈倂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論則以此憑考事田主 幼學 <인명>黃在成</인명> 喪不着證筆 幼學 <인명>姜泰瑞</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任弼瑞</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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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四年甲申</연도>七月 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同生弟買得<지명>扶北</지명>一作盡字畓二十五斗落只所耕肆拾扒負肆束庫果北邊三負一束庫乙決價貳佰玖拾兩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諸族中如他說以此憑考爲㫆本文記貳丈幷以出給爲乎乙事畓主兄<인명>金光一</인명>[着名]證人<인명>徐有祿</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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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염도여(廉道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正月二十六日 廉道汝 光緖三年丁丑正月二十六日 廉道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1월 26일에 염도여(廉道汝)가 부안현 일도면 봉황리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1월 26일에 염도여(廉道汝)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염도여는 흉년이 크게 들어 어쩔 수 없이 일도면 봉황리의 후평(後坪)에 있는 직자답(稷字畓) 14마지기, 부수(負數)로는 28부 8속이 되는 곳을 72냥에 팔았다. 거래 당시 구문기 3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어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염도여가 직접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보로 유학 이취호(李取浩)가 참여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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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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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正月二十六日 右明文右明文事段當此大無盡年勢不得而<지명>一道鳳凰里</지명>後坪稷字畓十四斗落只所耕二十捌負捌束庫乙價折錢文柒拾貳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三張果新文記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相左之端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自筆 <인명>廉道汝</인명>[着名]證保 幼學 <인명>李取浩</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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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2년 신명직(辛命直)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七年壬子十一月初七日 金廣履 辛命直 乾隆五十七年壬子十一月初七日 金廣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2.5*2.5 3개(흑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2년(정조 16) 11월 7일에 김광리(金廣履)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신명직(辛命直)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2년(정조 16) 11월 7일에 김광리(金廣履)가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신명직(辛命直)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광리는 가세가 빈한하여 부북에 있는 일작(一作) 이자답(履字畓) 15마지기, 부수(負數)로는 36부 4속이 되는 곳을 신명직에게 26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3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광리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보로 최덕관(崔德寬)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연도>丙午</연도>正月初五日 手票右票事畓價推捧之場旧文以爻周次覔搜則中間遺失故更爲成票以給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票憑考事票王 <인명>劉承彦</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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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06년 유승언(劉承彦)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十年丙午五月初四日 劉承彦 光武十年丙午五月初四日 유승언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6년(광무 10) 5월 초4일에 유승언(劉承彦)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6년(광무 10) 5월 초4일에 유승언(劉承彦)이 고부현(古阜縣) 거마면(巨麻面) 임방리(林方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유승언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고부현 거마면 임방리 전평(前坪) 소자답(嘯字畓) 7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9부(負) 4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20냥이다. 임방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백산면 오곡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유승언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며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승언과 증인(證人)으로는 김덕언(金德彦)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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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8년 강영달(姜永達)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柒年戊辰二月十一日 金相珏 姜永達 同治柒年戊辰二月十一日 金相珏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8년(고종 5) 2월 11일에 김상각(金相珏)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유학(幼學) 강영달(姜永達)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8년(고종 5) 2월 11일에 김상각(金相珏)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유학(幼學) 강영달(姜永達)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상각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농사지어 먹고 살던 부북(扶北) 일도(一道) 후지(後止) 앞들에 있는 거자(據字) 논 6마지기를 강영달에게 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서를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을 때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김상각과 필증(筆證)으로 유학 전정풍(田定豊)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柒年戊辰</연도>二月十一日幼學<인명>姜永達</인명>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傳來耕食是如可伏在<지명>扶北一道後止</지명>前坪據字畓㱏斗伍斗落所耕二負五束庫乙價折錢文參拾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一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伊後若有他端則持此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金相珏</인명>[着名]筆證 幼學 <인명>田定豊</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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