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6년 이규환(李奎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二月初十日 姜周煥 李奎煥 光緖二年丙子二月初十日 姜周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2월 10일에 강주환(姜周煥)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이규환(李奎煥)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2월 10일에 강주환(姜周煥)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이규환(李奎煥)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강주환은 자신이 매득하여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부안현 일도면 선은동(仙隱洞) 후평에 있는 진자답(盡字畓) 11마지기를 80냥에, 그리고 선은동 전평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3마지기를 1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유실되었기 때문에 출급하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강주환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으로 전성오(田成五)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二年丙子</연도>二月初十日<인명>李奎煥</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賣得耕食是如可要用所致伏在<지명>一道仙隱洞</지명>後坪盡字畓卜數三十二負三束庫十一斗落價折錢文捌拾兩是遣<지명>仙隱洞</지명>前坪玄字田卜數八負庫三斗落價折錢文十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遺失故不得出給只以新文記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某中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考事田畓主自筆 <인명>姜周煥</인명>[着名]證人 <인명>田成五</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1년 강여중(姜汝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年辛未正月初五日 康汝中 同治十年辛未正月初五日 康汝中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1년(고종 8) 1월에 강여중(康汝中)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1년(고종 8) 1월 5일에 강여중(康汝中)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강여중은 본인이 매득하여 농사지어 먹고살다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상동면(上東面) 장수(長水) 안뜰에 있는 거자답(巨字畓) 1마지기를 3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원래 있던 문서는 잃어버려 신문서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면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다. 매매 당시 논 주인인 강여중과 증필(證筆)로 전봉규(田鳳圭)가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 뒷면에 강여중의 노비 소남(小男)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97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建陽二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建陽二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897년(광무 1)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897년(광무 1)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3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0세 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1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의 나이는 20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 남 2구(口), 여 2구, 공합(共合) 4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송일순, 그의 처, 아들, 며느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3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3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拾壹年癸酉</연도>三月十七日<인명>李奎煥</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急有緊處伏在<지명>西道面</지명>上蘇山後坪蜂字畓九斗落所耕拾五負二束㐣價格錢文貳佰陸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中間火灾時燒燼故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記告 官卞庭事畓主幼學 <인명>辛淇馨</인명>[着名]筆執 <인명>崔麟吉</인명>[着名]證人 <인명>田基賢</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武二年戊戌</연도>二月二十日 明文右明文事有要用處<지명>定只堤</지명>下履字畓八斗落所耕三十三負二束㐣折價四百兩依數捧上是遣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矣日後若有爻端持此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在悅</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致道</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4년 신재윤(辛在潤)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三年甲戌九月二十日 辛在潤 同治十三年甲戌九月二十日 辛在潤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9월 20일 신재윤(辛在潤)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4년(고종 11) 9월 20일 신재윤(辛在潤)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재윤은 돈을 쓸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매도를 하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이 앞에 있는 천자답(天字畓) 1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0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28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신재윤은 3년 안에 환태(還退) 즉, 이 논을 다시 사겠다고 문서에 썼다. 매도인(賣渡人) 신재윤은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차후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신구문권(新舊文券)을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신재윤과 증인(證人)으로는 유학 김진현(金晉鉉)이 참여하였다. 문서에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임진년(壬辰年) 노(奴) 춘석(春石) 패지(牌旨)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壬辰六月初十日 上典 李 奴 春石 壬辰六月初十日 上典 李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임진년(壬辰年) 6월 초10일에 상전(上典) 이모(李某)가 노(奴) 춘석(春石)에게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도록 전권을 위임하면서 작성한 패지(牌旨). 임진년(壬辰年) 6월 초10일에 상전(上典) 이모(李某)가 노(奴) 춘석(春石)에게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도록 전권을 위임하면서 작성한 패지(牌旨)이다. 상전 이모(李某)는 다른 전답을 사기 위하여 정지제 아래에 있는 명자답(命字畓) 15마지기와 이자답(履字畓) 16마지기의 매입을 원하는 사람에게 시가(時價)대로 방매하고 이 패지에 따라 매매문서를 작성해 주라고 지시하였다. 패지는 배지(背旨)라고도 하였는데, 오늘날의 위임장과 같은 성격의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금전이 수반되는 거래 행위를 기피하여 자신의 노비에게 금전의 수수(授受)나 물건의 매매 등을 위임하였다. 이때 작성된 문서가 패지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嘉慶十二年丙寅</연도>十二月二十八日<인명>李生員宅奴白云</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矣宅以移買次<지명>定只堤</지명>下伏在命字畓十五斗落所耕二十八卜一束庫乙賣納之意成下牌子故右人前折價一百五十兩依數捧上永永放賣而本文一丈及牌子一丈並以成文以給爲去乎日後如有相左之端則以此記憑信事畓主<인명>崔生員宅奴五壯</인명>[左寸]證筆 <인명>趙榮益</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798년 최대관(崔大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四年戊午三月初四日 崔柱岳 崔大觀 嘉慶四年戊午三月初四日 崔柱岳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8년(정조 22) 3월 4일에 유학(幼學) 최주악(崔柱岳)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유학 최대관(崔大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8년(정조 22) 3월 4일에 유학(幼學) 최주악(崔柱岳)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유학 최대관(崔大觀)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학 최주악은 다른 전답을 매입하기 위하여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부북의 일작(一作) 명자답(命字畓) 15마지기를 최대관에게 1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동생이나 자손 중 만약 누구든지 다른 말을 하거든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최주악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였다.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嘉慶四年戊午'로 되어 있으나 무오(戊午)는 가경 4년(1799)이 아니라 가경 3년(1798)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武二年戊戌</연도>二月二十日 明文右明文事有所用處<지명>定只堤</지명>下深字畓十一斗落所耕三十四負㐣折價五百五十兩依數捧上是遣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而舊文他畓並付故未爲出給則日後若有爻端持此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在悅</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致道[</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7년 김유일(金裕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三年丁亥十一月十六日 金裕一 光緖十三年丁亥十一月十六日 金裕一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7년(고종 24) 11월 16일에 김유일(金裕一)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촌(鳳凰村)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7년(고종 24) 11월 16일에 김유일(金裕一)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촌(鳳凰村)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유일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부안현 일도면 봉황촌(鳳凰村) 뒤쪽 숲에 있는 넓이 5백보 길이 5백보가 되는 송전(松田)의 송지(松枝) 20동락과 시초(柴草) 20동락을 모두 8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가대문권(家垈文券)과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 주인인 김유일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十二年癸酉</연도>十二月十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急有緊用處<지명>東道仙隱洞</지명>前坪玄字畓二斗落只所耕二負八束庫果同字畓一斗落同字田一斗落所耕六負三束㐣價折錢文七十一兩依數捧上是遣旧文紀一丈新文一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紀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黃乃賢</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聖五</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46년 황학인(黃學仁)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貳拾陸年丙午十一月十一日 黃學仁 李圭咸 道光貳拾陸年丙午十一月十一日 黃學仁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6년(헌종 12) 11월 11일에 이규함(李圭咸)이 황학인(黃學仁)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6년(헌종 12) 11월 11일에 이규함(李圭咸)이 황학인(黃學仁)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규함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요용소치(要用所致), 즉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 쓰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3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2복(卜) 8속(束)인 곳과 같은 현자답 2두락지, 그리고 같은 현자전(玄字田) 1두락지로 부수로는 6복 3속인 곳이다. 이 세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30냥이다. 본문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혔다. 매도인(賣渡人) 이규함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문서와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새로 작성한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이규함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황도황(黃道晃)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뒷면에는 '내현문권(乃賢畓券)'이라 적어 황내현(黃乃賢)의 문서임을 표시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十年辛未</연도>正月初五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耕食是如可要用所致伏在<지명>上東面長水</지명>內坪巨字畓三負三束庫㱏斗五升落乙価折錢文參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閪失故只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憑考事田主 <인명>姜汝中</인명>[着名]證筆 <인명>田鳳圭</인명>[着名](背面)姜奴小男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四年戊子</연도>十二月初十日明文右明文事當此大荒之年勢不得已<지명>扶北一道</지명>甑東前坪容字畓十斗落所耕三十六負三束㐣折價錢文貳佰參拾參兩依數捧上是遣舊文二張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文憑考事畓主幼學 <인명>金希道</인명>[着名]證人幼學 <인명>田石凡</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6년 김병두(金炳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丙子正月二十九日 金炳斗 光緖三年丙子正月二十九日 金炳斗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월 29일에 유학 김병두(金炳斗)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1월 29일에 유학 김병두(金炳斗)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병두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선은동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와 같은 현자답 2마지기를 1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2마지기 논의 구문기는 다른 논 문기에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하고 4마지기 논의 구문기 4장과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김병두 그리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임운집(任雲集) 유학 전인홍(田仁鴻)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光緖三年丙子'로 되어 있으나, 병자는 광서 2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1876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3년 김병두(金炳斗)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二年癸亥六月二十二日 黃海鱗 金炳斗 同治二年癸亥六月二十二日 黃海鱗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3년(철종 14) 6월 22일에 유학(幼學) 황해린(黃海鱗)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유학 김병두(金炳斗)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3년(철종 14) 6월 22일에 유학(幼學) 황해린(黃海鱗)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유학 김병두(金炳斗)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황해린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선은동 전평(前坪)에 있는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를 김병두에게 35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3장를 매입자에게 건네주었으며,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특히 이 문기에 환퇴(還退)를 위해서 구문기를 건네준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황해린은 나중에 이 논을 다시 살 의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논 주인 황해린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임필상(任弼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咸豐十一年辛酉</연도>二月二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自己買得伏在<지명>仙隱洞</지명>前坪天字畓十三斗落所耕三十二負庫乙折價錢文㱏百兩依數捧上是遣永永放賣爲去乎矣本文記段中間閪失不得出給只以新文一丈成給爲去乎日後若有二談以此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黃道吉</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同治十三年甲戌</연도>九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伏在<지명>東道仙隱洞</지명>前坪天字畓十三斗落所耕參拾負五束庫乙折價錢文貳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限三年還退之意成文記爲乎矣舊文記㱏丈並以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此新舊文券憑考事畓主 幼學 <인명>辛在潤</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金晉鉉</인명>[着名]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