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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五十六年</연도>辛亥三月初四日 <인명>張氏</인명> 前明文右文爲事段移買次養家衿得<지명>扶北一道</지명>蘭字九斗落只所耕二十五負七束㐣娚妹 官卞是如可分付內他畓庫並半分決給故右畓放賣錢分次捧價錢一百伍十兩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本文記段他田畓並付乙仍于不得出給爲去乎日後同生子孫中若有以此之弊是去等以此文告 官卞正事畓主 幼 <인명>朴壽福</인명>[着名]畓主 幼 <인명>崔鳳成</인명>[着名]筆 幼 <인명>金昌彦</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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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김철(金哲)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十二年壬辰十二月初二日 張文豊 金喆 道光十二年壬辰十二月初二日 장문풍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32년(순조 32) 12월 2일에 장문풍(張文豊)이 김철(金喆)에게 부북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32년(순조 32) 12월 2일에 장문풍(張文豊)이 김철(金喆)에게 부북 지비리(之飛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장문풍은 지난 2년 동안에 집안에 사고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던 부북 지비리의 난자답(蘭字畓) 9두락지를 김철에게 140냥을 받고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25부 7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장문풍은 본문기 1장을 매수자 즉 김철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거래를 두고 다른 말이 나오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장문풍 본인이 직접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으로 이득존금(李得存金)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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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金龍起)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용기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용기(金龍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용기(金龍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용기는 강릉(江陵)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동계(同契) 소제(少弟)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계를 같이 하면서 교분을 나우었으며,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 추정된다.○ 원문 텍스트 松 仁賦乎天德以根太平國一蘭村身全袵髮耕於野世守家聲士也 門生來世無恙擬仙佛老去齊閑聽子孫每歲射亭盃酒席從今 契事與誰論 同契 少弟 江陵金龍起 再拜謹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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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족제 은상(殷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元年壬戌四月初一日 金德豐 族弟 殷相 同治元年壬戌四月初一日 金德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2년(철종 13) 4월 1일에 족형(族兄) 김덕풍(金德豐)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족제(族弟) 김은상(金殷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2년(철종 13) 4월 1일에 족형(族兄) 김덕풍(金德豐)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족제(族弟) 김은상(金殷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덕풍은 급하게 돈을 사용할 곳이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상리 전평(前坪)에 있는 궐자답(闕字畓) 3마지기, 부수(負數)로 4부 4속이 되는 곳을 족제 은상에게 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3장과 입지(立旨)에 적혀 있는 다짐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분란의 폐단이 있으면 이 문서들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김덕풍과 증필(證筆)로 유학 임낙기(任洛基)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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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길(崔萬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최만길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만길(崔萬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만길(崔萬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만길은 자신을 사하생(査下生)으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사돈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梅 鄕之領袖士之綱謹餙平生勉自疆晩歲又兼苽葛好所居常有蕙芝香誨敎 後裔罔非道紹述先人亦有光使我難忘姻婭誼當年只祝壽而康二絶一朝蘭報使人 驚白首難禁此日情耆舊吾鄕今有幾大溢風浪不平嗚 江城后人 査下生 崔萬吉 謹再拜 哭輓 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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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명(權鍾明)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종명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종명(權鍾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종명(權鍾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종명은 자신을 척제(戚弟)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는 인척(姻戚)간으로 동생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松 寄生歸死理皆同八十二年摠夢中敦睦貴門猶作 棟康寧鄕黨孰如公靑氊舊業榮餘牘一孕寶蘭恨 未窮山寂寂芳人不見嗚呼此別向誰通 安東后人 戚弟 權鍾明 謹再拜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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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인탁(沈仁鐸)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심인탁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인탁(沈仁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인탁(沈仁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인탁은 자신을 격계우(隔界友)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서로 벗으로 사귀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원문 텍스트 山 後我三春並此世奈何末路去先之髮膚不變先王法 禮貌無從俗世儀床瑟早年多憾歎泉坮是日倍傷悲善 家自古天應福藉藉鄕隣衆口碑 隔界友眞珠沈仁鐸謹 拜哭挽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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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金振石)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진석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진석(金振石)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진석(金振石)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진석은 자신을 하생(下生)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망자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仙 雪岺朝旭映丹旌哀輓飄飄祖馬鳴甑麓含悲流水咽 老楊垂淚白雲輕稀齡完福知天厚孝子能孫守 業明悅話溫容難復見下生空有不勝情 下生 金振石 謹再拜哭輓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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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十一年壬申</연도>九月十八日 明文右明文事急有要用處買得伏在<지명>上東上里</지명>前坪珠字畓五斗落所耕九負五束庫果幷禾穀二石價折錢文壹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幷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以此文券卞正事畓主 幼學 <인명>辛玉年</인명>[喪不着]證人 幼學 ▣<인명>聖孝</인명>[着名](背面)<지명>上里</지명><인명>金明汝</인명>畓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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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이상학(李相鶴)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玖年癸未二月二十二日 李相鶴 光緖玖年癸未二月二十二日 이상학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2월 22일에 유학 이상학(李相鶴)이 부안 서도면(西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1883년(고종 20) 2월 22일에 유학 이상학(李相鶴)이 부안 서도면(西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상학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부안 서도면(西道面) 관인제(觀仁堤) 위에 있는 전자답(牋字畓) 9두락지를 90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12부 9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매수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이상학이 직접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고 증인으로 유학 유상근(柳相根)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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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김낙환(金洛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年癸未十月二十九日 金洛煥 光緖十年癸未十月二十九日 김낙환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10월 29일에 동몽 김낙환(金洛煥)이 부안 서도면(西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3년(고종 20) 10월 29일에 동몽 김낙환(金洛煥)이 부안 서도면(西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낙환이 긴급하게 쓸 곳이 있어서 자기가 매득한 부안 서도면(西道面)에 요자정(要字丁) 3두락을 17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 4부 5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 1장과 신문기 1장을 아울러 매수자에게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서로가 다르게 여기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아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동몽 김낙환과 증보로 유학 유상근(柳相根), 필집으로 유학 임철수(林喆洙)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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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年</연도>癸未十月二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有爲緊用處故自買畓要字丁<지명>西道</지명>秩三斗落所耕四負伍束㐣折価錢文拾柒兩是遣右人前永永放賣是矣旧文一丈與新文一丈倂以出給日後相左則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 童蒙 <인명>金洛煥</인명>[着名]證保 幼學 <인명>柳相根</인명>[着名]筆集 幼學 <인명>林喆洙</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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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玖年</연도>癸未二月二十二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지명>西道秩觀仁堤</지명>上牋字畓九斗落只㐣所耕十二負九束㐣折価錢文玖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旧文記二丈右人處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之弊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自筆 幼學 <인명>李相鶴</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柳相根</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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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김영득(金永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柒年丁巳五月初九日 金永得 道光柒年丁巳五月初九日 김영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7년(순종 27) 5월 9일에 김영득(金永得)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7년(순종 27) 5월 9일에 김영득(金永得)이 부안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영득은 이 해에 흉년이 들어 살아갈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부안 일도면(一道面) 관인제(寬仁堤) 안에 있는 전자답(牋字畓) 9두락지를 105냥에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부수(負數)로는 15부 7속이 되는 곳으로, 김영득 자신이 매득하여 오랫동안 경작해 왔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 5장과 신문기 1장을 합한 6장을 매수자에게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김영득과 증인으로 김정용(金正用)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 뒷면에 '一道寬仁堤上九斗落'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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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柒年</연도>丁巳五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故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當此歉年生活無路故寬仁堤內牋字畓九斗落所耕十五負七束㐣並禾穀価折錢文一百五兩依數捧上是遣以旧文五章新文一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異端則以此文記告官憑考事畓主 <인명>金永得</인명>[着名]證筆 <인명>金正用</인명>[着名](背面)<지명>一道寬仁堤</지명>上九斗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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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庚子年) 참봉(參奉) 김문명(金文明)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庚子十二月二十五日 金文明 庚子十二月二十五日 金文明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경자년(庚子年) 12월 25일에 참봉(參奉) 김문명(/金文明)이 부안현 일도면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경자년(庚子年) 12월 25일에 참봉(參奉) 김문명(金文明)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문명은 다른 논을 매입하기 위하여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관복제(寬伏堤) 위에 있는 논 9마지기와 3마지기를 50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서 5장과 신문서 1장을 합하여 총 6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나중에 서로 다른 말이 나오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문명과 증필 유학 홍명국(洪明國)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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