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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嘉慶拾年</연도>乙丑二月初八日初<인명>田水中</인명> 前明文右明文事段祖上傳來累年畊食是如可移買次<지명>扶北</지명>伏在二作面字丁玖〔七〕斗落只所耕三十四卜五束〔十七負〕庫果同字畓三斗落只所耕五負八束㐣捧価錢文捌拾伍兩依數捧上是遣本文二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雜談是去等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朴春得</인명>[着名]證人 <인명>姜金伊</인명>[着名]證保 <인명>田乱退</인명>[着名]茟執 幼學 <인명>金亨河</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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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김광삼(金光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四年甲寅十一月初九日 金光三 咸豊四年甲寅十一月初九日 김광삼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1월 9일에 유학 김광삼(金光三)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1월 9일에 유학 김광삼(金光三)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광삼은 선대로부터 논을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지만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부북 황수제(黃水堤) 아래에 있는 망자답(邙字畓) 14두락지를 78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33복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매수자에게 본문기 1장과 신문기를 건네주며 4년을 기한으로 환퇴(還退)하겠다는 의사를 문서에 넣었다. 만일 나중에 이 거래를 둑 다른 말이 생기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아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김광삼과 증인으로 이도도감(二道都監) 최내진(崔乃進), 필집으로 유학 이여화(李汝化) 등 3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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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咸豊四年</연도>甲寅十一月初九日 明文右明文事段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黃水題〖堤〗下<지명>扶北</지명>伏在邙字畓十四斗落只所耕三十三卜㐣價折錢文七十八兩依數捧上是爲本文一丈新文幷右人處永永放買爲去乎四年期限還退之意成文爲去乎日後若有異說之弊則持此文記 憑告事畓主 幼學 <인명>金光三</인명>[着名]證人 二道都監 <인명>崔乃進</인명>[着名]茟執 幼學 <인명>李汝化</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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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유치중(劉致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一日 劉致仲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一日 유치중 전북 부안군 [着名] 5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 11월 21일에 유학 유치중(劉致仲)이 고부군(古阜郡) 거마면(巨麻面)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 11월 21일에 유학 유치중(劉致仲)이 고부군(古阜郡) 거마면(巨麻面)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치중은 항구전(巷口錢) 900냥을 납부할 길이 없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계동 전평의 위토(位土) 지자답(紙字畓) 16두락지를 800냥에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35부 6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매수자에게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여러 자손들 가운데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기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유치중을 중심으로 유양지(劉良知), 유운경(劉雲卿), 유체국(劉替國), 유선중(劉善仲) 등 유씨 종족 5명과 증인으로 유학 주정집(朱正執)이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들 중 유선중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않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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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인명>春石</인명>處無他宅有移買意<지명>定只堤</지명>下伏在命字畓十五斗落所耕二十八卜一束庫果履字畓十六斗落所耕三十六卜九束庫乙願買人處捧準價納宅爲遣牌子導良成文以給宜當者<연도>壬辰</연도>六月初十日<인명>上典 李</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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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강인석(姜麟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參年丁丑三月二十五日 姜麟錫 光緖參年丁丑三月二十五日 姜麟錫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25일에 강인석(姜麟錫)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3월 25일에 강인석(姜麟錫)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강인석은 봉황리 전평(前坪)에 있는 측자답(則字畓) 20마지기를 300냥에 팔았다. 그는 이 논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농사지으며 먹고 살았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매매 당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이 논을 두고 만약 서로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강인석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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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전재열(田在悅)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八年甲辰十二月十二日 田在悅 光武八年甲辰十二月十二日 田在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광무 8) 1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광무 8) 1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재열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라고 하였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심자답(深字畓) 8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24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5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전재열은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구문기(舊文記)는 다른 문서와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논의 주인 전재열이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강화옥(姜化玉)이 증인(證人)으로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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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己巳</연도>二月初八日 前明文右明文事所急有緊處自己買得東門外<지명>仙隱洞</지명>前坪地字畓三斗落只所耕十二負庫乙折價錢文三十八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二丈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之說則以此文記憑告官卞正事畓主 閑良 <인명>房巖</인명>[着名]證人 證筆 <인명>廉致連</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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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설처(薛處)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三十三年戊子二月十四日 薛處 乾隆三十三年戊子二月十四日 薛處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68년(영조 44) 2월 14일 신노봉태난(辛奴奉太蘭)이 설(薛) 아무개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68년(영조 44) 2월 14일 신노봉태난(辛奴奉太蘭)이 설(薛) 아무개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노봉태난은 방매(放賣) 사유를 '나의 상전(上典)이 팔고자 하는 곳이 있어서 논과 밭을 팔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매매행위에 대해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집안의 노비를 내세워 계약했다. 따라서 이 계약은 노비(奴婢) 봉태난과 설처 사이에 이루어졌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동문(東門) 바깥쪽 선은동(僊隱洞) 전평(前坪) 지자답(地字畓) 3두락지(斗落只)와 밭 1두락지로 부수(負數)로는 13부(負)인 곳이다. 방매 가격은 2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노봉태난은 구문기(舊文記) 2장과 신문기(新文記)를 매수인(買受人) 설처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신노봉태난과 증보(證保)는 정손(丁孫)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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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오원칠(吳元七)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五年己丑二月二 吳元七 光緖十五年己丑二月二 吳元七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9년(고종 26) 11월 20일 오원칠(吳元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신후리(新后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9년(고종 26) 11월 20일 오원칠(吳元七)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신후리(新后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오원칠은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 밭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동면 신후리에 있는 잠자(潛字) 태전(太田)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4부(負) 9속(束)인 곳이며, 방매 가격은 85냥이다. 여기에서 태전은 콩밭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밭의 주인 유학(幼學) 오원칠, 증인(證人)은 유학 김주성(金周成), 집필(執筆)은 유학 오도현(吳道賢)의 이름이 있다. 문서를 작성한 오도현은 상중(喪中)이어서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태전주(太田主) 오원칠과 증인 김주성은 각각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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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嘉慶拾年乙丑</연도>十二月二十三日<인명>辛命直</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扶北伏在<지명>一作</지명>荷字所耕二十三卜一束又(虛錄頉下)鳳字所耕八卜八束合九斗落庫果八作樓字十一斗落所耕二十八卜二束庫乙價折錢文壹百陸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本文記段他畓幷付乙仍于未得出給爲去乎日後如有相左是去等以此卞正事畓主自筆 幼學 <인명>金誠鉉</인명>[着名]定只堤下自<지명>鳳凰里</지명>之飛里去路下二次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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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二十五年乙巳</연도>十一月二十日 前明文右明文事段矣有要用處<지명>扶北</지명>八作樓字畓拾斗落只所耕二十卜五束㐣価折錢文玖拾兩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二丈新文記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或有子孫中雜談之弊以此文記三丈告 官卞正事畓主<인명>鄭得完</인명>[着名]證人執筆<인명>吳禮敬</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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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안성집(安成集)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九年甲午三月十二日 安成集 光緖十九年甲午三月十二日 安成集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4년(고종 31) 3월 12일에 유학(幼學) 안성집(安成集)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매산리(梅山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4년(고종 31) 3월 12일에 유학(幼學) 안성집(安成集)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매산리(梅山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안성집은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매산리 전평(前坪) 방자답(傍字畓) 10두락지(斗落只)로 부수(負數)로는 20부(負) 8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6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안성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문서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안성집의 이름과 그의 서명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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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八年甲辰</연도>十二月十二日 明文右明文事有要用致<지명>一道定只</지명>堤下伏在畓深字八斗落所耕二十四負㐣折價八百伍拾兩依數捧上而右前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異論則以此文記告官憑考事 舊文則他畓並付故未爲出給事畓主幼學自筆 <인명>田在悅</인명>[着名]證人 <인명>姜化玉</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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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황내현(黃乃賢)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二年癸酉十二月十六日 黃乃賢 同治十二年癸酉十二月十六日 黃乃賢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3년(고종 10) 12월 16일 황내현(黃乃賢)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3년(고종 10) 12월 16일 황내현(黃乃賢)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이다. 황내현은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논을 매도(賣渡)하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모두 세 곳이다. 첫 번째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에 있는 현자답(玄字畓) 2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2부(負) 5속(束)인 곳이다. 두 번째 토지는 선은동에 있는 동자답(同字畓) 1두락지이고 세 번째 토지는 선은동에 있는 동자전(東字田) 1두락지이며 부수(負數)로는 6부 3속인 곳이다. 이 세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71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황내현은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본문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황내현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전성오(田聖五)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본문에 문기(文紀)라고 쓴 것은 문기(文記)로 고쳐 써야 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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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乾隆三十三年戊子</연도>二月十四日 薛處明文右明文事段矣身上典宅有賣用處東門外地字三斗落只同字田一斗落只所耕十三卜庫乙捧價錢貳拾兩本文記二張幷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雜談以去矣告故卞正事田主 自筆 <인명>辛奴奉太蘭</인명>[着名]證保 <인명>丁孫</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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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방해득(房海得)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三十六年辛卯十月十五日 朴尙洙 房海得 乾隆三十六年辛卯十月十五日 朴尙洙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71년(영조 47) 10월 15일 박상수(朴尙洙)가 방해득(房海得)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71년(영조 47) 10월 15일 박상수(朴尙洙)가 방해득(房海得)에게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상수는 몸이 아파서 약값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동문(東門) 바깥쪽 선은동(僊隱洞) 전평(前坪) 지자답(地字畓) 3두락지(斗落只)와 밭 1두락지로 부수(負數)로는 13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상수는 구문기(舊文記) 1장(丈)과 신문기(新文記)를 매수인(買受人) 방해득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박상수와 증인(訂人) 송순봉(宋順奉), 집필(執筆) 이춘우(李春遇)가 참여하여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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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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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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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五年己丑</연도>二月二▣▣▣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지명>上東面新后里</지명>後坪潛字太田五斗落只所耕肆負玖束㐣價折錢文捌拾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端則持此文記憑考事太田主 幼學 <인명>吳元七</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周成</인명>[着名]執筆 幼學 <인명>吳道賢</인명> 喪不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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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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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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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3년 김봉서(金奉瑞)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九年癸巳六月十三日 金奉瑞 光緖十九年癸巳六月十三日 金奉瑞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3년(고종 30) 6월 30일에 김봉서(金奉瑞)가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복성리(福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3년(고종 30) 6월 30일에 김봉서(金奉瑞)가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복성리(福星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김봉서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밭을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동면 복성리에 있는 소나무밭 30동락(同落)으로 방매 가격은 43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봉서는 구문기(舊文記)를 중간에 잃어버려 신문기(新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송전주(松田主) 유학(幼學) 김봉서, 증인(證人)은 유학 박성률(朴成律)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서명하였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一張)은 일장(一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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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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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九年甲午</연도>三月十二日 前明文右明文事急有緊用處伏在<지명>一道梅山</지명>前坪傍字畓十斗落所耕二十負八束㐣價折錢文六拾伍兩依數捧上是遣旧文一張果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持此文告 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安成集</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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