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星名家司馬世家瀛向九旬齡上九京袵髮能存前聖法粉旌獨潔學生名盟寒鏡水春鷗券嘯冷篁林夜月觥矍圃杳期觀的德先人舊契哭吾情 侍生 <지명>安東</지명><인명>權寧機</인명>謹奉哭雲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백달섭(白達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白達燮 李殷弼 白達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백달섭(白達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백달섭(白達燮)이 이은필(李殷弼)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백달섭은 유학자로,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자신을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大韓光武八年甲辰</연도>正月三十日 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臨字畓十五斗落所耕三十日負㐣價折錢文壹仟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一張舊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文記憑考事畓主 <인명>田玉汝</인명>[着名]證人 <인명>田士欽</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8년 신욱(辛郁)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十月二十八日 申郁 光緖四年戊寅十月二十八日 申郁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10월 28일 신욱(申郁)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10월 28일 신욱(申郁)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 쪽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욱은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명자답(命字畓) 1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6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4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신욱은 새로 작성한 매매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본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신욱과 증인(證人)으로는 전용진(田鎔鎭)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구문기(舊文記)는 다른 논의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 내어 줄 수 없음을 문서에 밝히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四年戊寅</연도>十月二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지명>扶安一道面定只堤</지명>下命字畓十五斗落所耕三十四卜畓五斗落所耕十六負㐣價折錢文參伯肆拾兩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日後若有異端則持此文記憑考事旧文記他畓卷倂付故未得出給畓主 <인명>申郁</인명>[着名]證人 <인명>田鎔鎭</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0년 김명철(金命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九年庚午三月二十日 金命澈 同治九年庚午三月二十日 金命澈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0년(고종 7) 3월 21일에 김명철(金命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청림리(靑林里)에 있는 논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0년(고종 7) 3월 21일에 김명철(金命澈)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청림리(靑林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김명철은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어 먹던 논을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청림리 전평(前坪) 어자답(於字畓) 6두락지(斗落只), 9야미(夜味)로, 산세(山稅)가 3부(負)인 곳이었다. 방매(放賣) 가격은 100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명철은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김명철과 증필(證筆)으로 유학 조환곤(曺瓛坤)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咸豊二年</연도>壬子十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黃水堤下<지명>一道</지명>秩面字玖〔七〕斗落只所耕二十二負〔十七負〕㐣折価錢文壹百玖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新旧文二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紛紜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幼學 <인명>柳基龍</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崔奉斗</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05년 전수중(田水中)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拾年乙丑二月初八日 朴春得 田水中 嘉慶拾年乙丑二月初八日 박춘득 전북 부안군 [着名]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05년(순조 5) 2월 8일에 유학 박춘득(朴春得)이 전수중(田水中)에게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05년(순조 5) 2월 8일에 유학 박춘득(朴春得)이 전수중(田水中)에게 부북(扶北)에 있는 이작(二作)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수중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논에서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옮겨서 다른 곳을 살려고 부북에 있는 면자정(面字丁) 7두락지와 동자답(同字畓) 3두락지를 85냥에 전수중에게 팔았다. 부수(負數)로는 22부 8속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박춘득은 매수자 즉 전수중에게 본문기 2장을 건네주어 나중에 만약 자손 중 잡담이 있으면 이 문서를 증거로 삼아 관에 고하여 증명하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논의 마지기 수와 부수를 고친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정한 수치로 해제를 작성하였다. 거래 당시 논주인 유학 박춘득과 증인으로 강금이(姜金伊), 증보로 전란퇴(田亂退), 필집으로 유학 김형하(金亨河) 등 4명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九年癸未</연도>二月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鳳凰里</지명>前坪則字畓㱏石落所耕五十一負四束㐣價折錢文肆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新舊文合四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爻象是去等以此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澤圭<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溶彬<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78년 강균혁(姜均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十二月初八日 姜均赫 光緖四年戊寅十二月初八日 姜均赫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12월 8일에 강균혁(姜均赫)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12월 8일에 강균혁(姜均赫)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강균혁이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였던 봉황리 전평(前坪)에 있는 측자답(則字畓) 20마지기를 38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1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만약 이 논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강균혁 본인이 문서를 작성하고 증인으로 유학 전용진(田溶鎭)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四年戊寅</연도>十二月初八日 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面鳳凰</지명>前坪則字畓二十斗落所耕五十負㐣折價錢文參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一張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持此文憑考爲乎事畓主自筆 <인명>姜均赫</인명>[着名]證人 <인명>田溶鎭</인명>[着名](背面)古龜<지명>仙隱洞</지명>則字畓㱏石只<연도>戊寅</연도>冬買得於<인명>姜岐然<인명>□□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3년 전택규(田澤圭)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九年癸未二月十九日 田澤圭 光緖九年癸未二月十九日 田澤圭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정월 19일에 유학(幼學) 전택규(田澤圭)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3년(고종 20) 정월 19일에 유학(幼學) 전택규(田澤圭)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택규는 자신이 매득하였던 부안현 일도면 봉황리(鳳凰里) 전평에 있는 측자답(則字畓) 1석락(石落)을 42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합하여 4장을 매입자에게 주면서 나중에 만약 서로 다툼이 있으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전택규와 증인 유학 전용빈(田溶彬)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88년 박오달(朴五達)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十五日 朴五達 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十五日 朴五達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8년(고종 25)에 11월 15일에 박오달(朴五達)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8년(고종 25)에 11월 15일에 박오달(朴五達)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오달은 큰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 부득이하게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일도면 정지리 제방 아래에 있는 논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8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오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2장과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본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한량(閑良) 박오달과 증인(證人)으로 한량 김성오(金成五)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1912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李樂善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전북 부안군 [印]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尤東里)에 있는 밭 세 곳이다. 첫 번째는 밭의 지번호(地番号)는 3432이고 하자저전(荷字苧田) 2두락지(斗落只)이며 결수(結數)로는 4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원이다. 두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태전(荷字太田) 1두(斗) 5승락지(升落只), 결수로는 3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12원이다. 세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저전 2두 5승락지로 결수로는 4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44원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밭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이고 두 번째 밭은 태전(太田)으로 콩밭이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의 총면적은 6두락지이고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86원이다. 이 거래에는 부안군 입하면 우동리에 사는 밭의 주인 이정수와 부안군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매수인(買受人) 이낙선이 참여하였고 이정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김낙도(金洛都)가 보증인(保證人)으로 참여하였다. 매도인, 매수인, 보증인은 매매계약서에 서명, 날인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一土地은別紙의表示와 如홈一賣買代金捌拾陸円也一明治四十五年二月 日一賣主上前記賣買代金을거準領하右土地所有權을買受人의계轉渡홈으로契約홈一保證人은契約의確的한事實을保證으로右예署名捺印홈賣渡人全北道扶安郡立下面尤東里 李正壽[印]買受人 仝道 仝郡東道面仙隱洞 李樂善[印]保證人 仝道 仝郡立下面尤東里里長金洛都[印]土地表示一土地所有地名은全北扶安郡入下面尤東坪二地番号荷字三四三二苧田二斗落結肆負參束價文參拾円仝字三四三八四太田一斗五升落結參負貳束價文拾貳円仝字三四八四苧田二斗五升落結肆負壹束價文肆拾肆円三 四標荷字苧田二斗落 東仝人苧田 南路 西路 北路 仝字太田 東村路 南金京必苧田 西仝人苧田 北崔台史字 仝字苧田 東渠 南路 西仝人田 北仝人田四種目 苧田 太種田五面積陸斗落六價折捌拾陸兩七賣主人 全北扶安郡立下面尤東里李正壽[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0년 신기남(辛奇男)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十二月十五日 辛奇男 光緖十六年庚寅十二月十五日 辛奇男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12월 15일에 신기남(辛奇男)이 부안현 상변리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12월 15일에 신기남(辛奇男)이 부안현(扶安縣) 상변리(象邊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기남은 조세를 납부할 길이 없어서 상변리 전평에 있는 논 8마지기를 15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문제가 생기면 관에 알려 증거로 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기남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못하였고, 신무연(辛武然)이 증필(證筆)로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六年庚寅</연도>十二月十五日 明文右明文排結錢充納無路故伏在<지명>象邊里</지명>前坪畓八斗落價折錢文㱏佰五拾依數捧上是遣並以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之端以此文記告官卞政事畓主 <인명>辛奇男</인명>[喪不着]證筆 <인명>辛武然</인명>[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98년 전재열(田在悅)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二年戊戌二月二十日 田在悅 光武二年戊戌二月二十日 田在悅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8년(광무 2) 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의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8년(광무 2) 2월 20일에 전재열(田在悅)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 정지제(定只堤) 아래 쪽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재열은 논을 팔게 된 이유를 요용소처(要用所處), 즉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라고 밝혔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군 일도면 정지리의 제방 아래 이자답(履字畓) 8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3부(負) 2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40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전재열은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전재열과 증인(證人)으로는 유학 김치도(金致道)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