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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辛亥年)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2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亥十一月十九日 全州李氏家 辛亥十一月十九日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1월 19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1월 19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신해년(辛亥年)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과 같은 내용이다. 아마 1의 문서를 작성한 뒤에 입석(立石) 날짜를 다시 잡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장지의 형국과 좌향은 물론 이장에 이르는 각 단계의 시각과 방위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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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卯龍甲坐庚向辰普得丑破乾仙命<연도>壬寅</연도>金正<연도>乙未</연도>金 運財中宮坤化命<연도>己丑</연도>土洪<연도>壬辰</연도>水立石<연도>辛亥</연도>十一月十九日 午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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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辛亥年)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1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辛亥十月初三日 全州李氏家 辛亥十月初三日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0월 3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신해년(辛亥年) 10월 3일에 합장(合葬)을 하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장지의 형국과 좌향은 물론 이장에 이르는 각 단계의 시각과 방위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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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卯龍甲坐辰普得癸破乾仙命<연도>壬寅</연도>金破<연도>己酉</연도>墓合窆坤化命<연도>己酉</연도>土正<연도>乙未</연도>金運泊綠財富六丁明氣到穴洪<연도>壬辰</연도>水合葬<연도>辛亥</연도>十月初三日窆棺 未時啓墓 同日卯時先破西方或初二日辰時呼冲<연도>丁卯</연도><연도>癸卯</연도>生等人窆棺時少避課 <연도>辛亥</연도>金 白白紫<연도>己亥</연도>木 白<연도>丁酉</연도>火 白<연도>丁未</연도>水 紫立石同月初八日隨時 或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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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녕기(權寧機)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寧機 李殷弼 權寧機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녕기(權寧機)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녕기(權寧機)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녕기는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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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一年乙酉</연도>八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伏在<지명>下西靑林</지명>前坪於字畓㱏石三斗落山稅 㐣價折錢文參佰兩捧上是遣旧文二丈果新文一丈放賣爲去乎稅則黃租每年拾貳石酌定是矣限來明年依本價還退之意成文以給若過限則永永次持事畓主 自筆 <인명>李榮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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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규열(李圭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四年乙丑正月二十五日 金命澈 李圭烈 同治四年乙丑正月二十五日 金命澈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5년(고종 2) 1월 25일에 김명철(金命澈)이 이규열(李圭烈)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5년(고종 2) 1월 25일에 김명철(金命澈)이 이규열(李圭烈)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김명철은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어 먹던 논을 돈이 필요한 곳이 있어서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청림리(靑林里)의 전평(前坪) 어자답(於字畓) 12두락(斗落) 부수(負數)로는 3부(負)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95냥이다. 매도인(賣渡人) 김명철은 구문기(舊文記)는 잃어버렸고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 이규열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김명철과 증필(證筆)로는 유학 조환곤(曺瓛坤)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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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四年乙丑</연도>正月二十五日幼學<인명>李圭烈</인명>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伏在<지명>靑林</지명>前坪於字畓拾貳斗落只夜味所耕三負㐣價折錢文㱏百玖拾伍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閪失故以新文一丈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論則持此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金命澈</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曺瓛坤</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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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면(一道面) 관인제(寬仁堤) 전답문권(田畓文券) 녹명지(錄名紙)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扶安)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일도면(一道面) 관인제(寬仁堤)에 있는 전자답(牋字畓)을 거래하면서 작성된 전답문권(田畓文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적은 녹명지(錄名紙). 부안(扶安)의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일도면(一道面) 관인제(寬仁堤)에 있는 전자답(牋字畓)을 거래하면서 작성된 전답문권(田畓文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적은 녹명지(錄名紙)이다. 문서의 소장자가 문서를 분류하기 위하여 이렇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묶음에는 "1827년 김영득(金永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4년 장경로(張敬魯)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0년 김상렬(金相烈)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3년 이상학(李相鶴)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3년 김낙환(金洛煥)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경자년(庚子年) 참봉(參奉) 김문명(金文明)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등 6건의 문서가 들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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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寬仁堤</지명>上畓文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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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拾柒年</연도>丁酉十二月初七日幼學<인명>金宅垕</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移買次自己買得<지명>扶北定只堤</지명>下<지명>之飛里</지명>前坪伏在蘭字丁畓九斗落只所耕貳拾伍負柒束㐣折價錢文㱏百肆拾兩依數捧上爲遣旧文記二丈幷以右人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雜談之弊是去等持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閑良 <인명>金哲伊</인명>[着名]證筆 幼學 <인명>金奎澤</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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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장씨(張氏)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五十六年辛亥三月初四日 朴壽福 張氏 乾隆五十六年辛亥三月初四日 박수복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1년(정조 15) 3월 4일에 유학 박수복(朴壽福)이 장씨(張氏)에게 부북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1년(정조 15) 3월 4일에 유학 박수복(朴壽福)이 장씨(張氏)에게 부북(扶北)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수복은 다른 곳에 있는 전답을 사기 위하여 양가(養家)에서 상속받은 일도면 난자답(蘭字畓) 9두락을 150냥에 장씨(張氏)에게 팔았다. 이 논은 관에서 판정하여 남매(娚妹)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부수(負數)로 25부 7속이 되는 곳이었다. 한편 구문기는 다른 전답(田畓)과 붙어 있어서 부득이 줄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 같은 자손 중에서 만약 이것 때문에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증거로 관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이 명문에는 박수복 외 또 한 명의 논주인으로 유학 최봉성(崔鳳成)이 나오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남매 중의 1명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유학 김창언(金昌彦)이 집필로 참여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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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戊戌年) 부안(扶安)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戊戌十二月十八日 全州李氏家 戊戌十二月十八日 全州李氏家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무술년(戊戌年) 12월 18일에 장례(葬禮)를 치르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부안현(扶安縣)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무술년(戊戌年) 12월 18일에 장례(葬禮)를 치르기 위하여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이다. 장사택일지는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이 문서에는 장지의 형국과 좌향은 물론 이장에 이르는 각 단계의 시각과 방위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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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十年乙酉</연도>七月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所用緊急故傳來苧田二斗落天字所耕二負六束㐣價折錢文十六兩果<지명>仙隱洞</지명>前麓柴場五同落價折二兩合十八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中間遺失故以田當票一張果以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文記告 官憑考事苧田柴場主 童蒙 金明轍[着名]證筆 幼學 <인명>姜士成</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福汝</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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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분류 :
계약서

1912년 이정수(李正壽) 계약서(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壬子正月二十日 李正壽 壬子正月二十日 李正壽 전북 부안군 [印]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1월 20일에 이정수(李正壽)가 부안군(扶安郡)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밭의 규모를 완정(完定)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 1912년 1월 20일에 이정수(李正壽)가 부안군(扶安郡)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밭의 규모를 완정(完定)하면서 작성한 계약서(契約書)이다. 이정수는 부안군 우동리(愚東里) 동평에 있는 모시밭(苧田)을 세를 준 4대(隊) 반으로, 콩밭은 1두 5승락, 미모(米牟)는 3두(斗), 콩 3두로 완정(完定)하고 이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가 "1912년 이정수(李正壽)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와 점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해 2월에 모시밭과 콩밭을 이낙선(李樂善)에게 방매하기 전에 거래물건의 규모를 완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약서에는 당시 우동리에 사는 이정수 외에 노적리(露積里)에 사는 증인(證人) 박치장(朴治章)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연도>壬子</연도>正月二十日右契約事<지명>愚東里</지명>東坪苧田四斗五升落貰四[印]隊半果太田一斗五升落米牟三斗과太三[印]斗式完定事契約主 <지명>愚東里</지명><인명>李正壽</인명>[印]證人 <지명>露積里</지명><인명>朴治章</인명>[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박은수(朴殷秀)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殷秀 李殷弼 朴殷秀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은수(朴殷秀)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은수(朴殷秀)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은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후인(臨瀛后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박은수는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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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聞公礿訃感於前使我先君淚自然仁壽皆称姜八十齊家猶足范三千無窮傳世多孫列罔極呼天諸子賢仙界云何悲門外薤歌忽斷白雲邊 <지명>臨瀛</지명>后人生 <인명>朴殷秀</인명>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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