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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壬寅</연도>正月二十九日 前手標右典當事以子婚切有緊用處故伏在<지명>下西頓池</지명>前坪麥田六斗落例夏穀典當是遣右宅前錢文伍拾兩以每朔六分例得用是遣限來四月晦內備報之意如是成標爲去乎若過限不報則以此標憑告爲乎乙事票主 <인명>李京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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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十六年庚寅</연도>二月二十八日前標事右標事段要用所致<지명>擧石里</지명>下坪於字畓庫三斗落文卷右前典當爲去乎以市利例戔十五兩得用限六月晦內成標事標主喪人 <인명>李周鳳</인명>[喪不着]證人 幼學 <인명>姜仁淑</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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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김성숙(金成叔)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未三月卄二日 金成叔 癸未三月卄二日 1883 金成叔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3월 22일에 유학(幼學) 김성숙(金成叔)이 작성한 수표(手標). 1883년(고종 20) 3월 22일에 유학(幼學) 김성숙(金成叔)이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김성숙은 형의 빚 때문에 여러 차례 관아에서 추변(推卞)을 한 끝에 자신이 반드시 형의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김성숙은 빚 30냥을 덜어주는 조건으로 조(租) 2석(石)을 10월 그믐까지 갚도록 약속하고 이 수표를 채권자에게 작성하여 주었다. 그러나 만약 빚을 갚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면 돈 30냥과 함께 본전과 이자를 모두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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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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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30년 김굉(金鍠)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人臘月望六日 金鍠 庚人臘月望六日 金鍠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0년(순조 30) 12월 16일 김굉(金鍠)이 보낸 서간(書簡). 1830년(순조 30) 12월 16일 김굉(金鍠)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사(祥事)를 겪으며 무너지는 심정을 위로하며 안부를 물었다. 남쪽 지방에서 벼슬살이하는 자신은 풍토가 맞지 않고 환곡 포흠을 해결하지 못해 녹봉을 덜어 보태야 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김굉은 1829년 12월에 경상도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제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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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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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機池風憲書目旌褒大孝聖朝之盛典也何則惟皇上帝降衷下民而惇典敷敎者於書垂戎天生蒸民有物有則而秉彛好德者於詩揚訓若是乎天於萬物其爲一大父也而子之於父也亦爲一大父之天也地於萬物抑爲一大母也而子之於母也亦是一大母之地也父如天而生之義莫大焉如地而育之恩莫重焉然則匪父何匪母何恃若當危迫之際而雖委身以死之何爲而有恨乎或或値侍病之日而雖割肉以食之何爲而有惜乎然而挽近以來有如是之行者幾希矣至於本坊三里居密城後人江叟公諱薰九代孫幼學朴東禎以無何之疾數年呌楚病勢漸劇而食飮專廢飢膚漸瘠長委枕席萬身黃脹水不能下咽氣不能開眼命在如縷而幾絶之際者乃去年十二月之時也當此之際其子十七歲兒仁弼遑遑不暇求以身代矣儵然而稟天本然之性自發於幼叺衷生三如一之孝激動於微腔斯須之間欺其渾家乘其時之便隙而蘇子刺股之手執介子割股之刀天然而割其右股從容隱炙至於其父之前呼以稱之曰黃雀炙云云則怳若玉祥之黃雀炙乎如此蒼黃之時將死之厥父隱隱然不知感動而樂食其子之股肉矣自是闕後自有天雷勿藥之慶而次次漸蘇至今復初則其或有天感地激之理而然乎抑亦有鬼護神助之妙而然乎哉以夙成之長者尙不可作意以爲之之事也況以齡妙志微之兒有如此孝感所致者也歟豈不休哉其不歎哉如此之至孝古但聞而今始見也玆以目今見不勝敬歎以不可泯滅之意不待村狀而從坊論緣由馳報爲臥乎事狀壬午閏三月 日風憲金[着名]使[署押](題辭)聞甚嘉尙 從當博採向事卄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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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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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10년 정계동(鄭季東)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10년(순조 10) 7월 초 10일에 정계봉이 노 돌금으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 1810년(순조 10) 7월 초10일에 정계봉(鄭季奉)이 상전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노(奴) 돌금(乭金)으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명문이다. 돌금의 상전은 오랫동안 선산을 금양해 왔으나, 금년에 정계봉이 그 선산과 이웃해 있는 자신의 선산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산지 일부를 팔아달라고 간청하자 40냥을 받고 팔았다. 문서의 말미에 상전댁은 만일 이후에 이 거래를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상전을 대신하여 돌금이 서명하였으며, 증인으로 김인북(金仁北)이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직접 거래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흔히 자신의 노비에게 대신 거래를 하도록 위임장을 주었는데, 이를 패지(牌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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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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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7년 장한조(張漢朝)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虎谷 朴生員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수상한 날씨에 잘 갔는지 묻고 상대방의 아들이 간다고 하니 다시 슬퍼진다고 하였다. 새해를 맞아 복 많이 받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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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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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6년 박용호(朴龍祜) 수신(受信)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戌至月念日 欽 丙戌至月念日 欽 전북 남원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6년(순조 26) 11월 20일에 이름이 흠(欽)자로 끝나는 사람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6년(순조 26) 11월 20일에 이름이 흠(欽)자로 끝나는 사람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아들과 재종제의 혼인 날짜가 서로 겹쳤다며 사모(紗帽)와 각대(角帶), 목화(木靴)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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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道光拾捌年戊戌</연도>七月初八日<인명>蔡生員奴春石</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傳來畓<지명>下西</지명>伏在<지명>頓池</지명>前坪屈乃坪中字畓十一斗落只所耕二十一負庫果西邊四斗落只所耕四負二束庫乙價折錢文陸拾貳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一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紛紜之弊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正事畓主 <인명>李汝宗</인명>[着名]證人 <인명>南順伊</인명>[着名]筆執 <인명>高夢說</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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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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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799년 이관필(李寬弼)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嘉慶四年己未十二月初九日 李述里金 李寬弼 嘉慶四年己未十二月初九日 李述里金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9년(정조 23) 12월 9일에 이술리금(李述里金)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이관필(李寬弼)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9년(정조 23) 12월 9일에 이술리금(李述里金)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논을 이관필(李寬弼)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술리금은 살아나갈 길이 지극히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조상 때부터 내려온 논인 돈지리의 전평(前坪)에 있는 굴내평(屈乃坪) 중자답(中字畓) 11마지기와 서변(西邊) 논 4마지기를 이관필에게 1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중간에 유실되어 부득이 출급하지 못하고 신문기를 건네주어 나중에 자손 중 만약 다른 말이 있은 경우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이술리금과 증인(證人)으로 재종제 이탁주(李卓柱), 필집(筆執)으로 유학 한태윤(韓泰允)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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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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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嘉慶四年己未</연도>十二月初九日<인명>李寬弼</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生道極難故勢不得已祖上傳來畓<지명>下西</지명>伏在<지명>頓池</지명>前坪屈乃坪中字畓十一斗落只所耕二十一負庫果西邊四斗落只所耕四卜二束庫乙價折錢文㱏百玖拾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段中間遺失故不得出給而以新文記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若有二言之弊則持此文告官卞正事畓主 <인명>李述里金</인명>[着名]證人 再從弟 <인명>李卓柱</인명>[着名]筆執 幼學 <인명>韓泰允</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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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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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신옥년(辛玉年)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四年戊寅二月十二日 辛玉年 光緖四年戊寅二月十二日 辛玉年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8년(고종 15) 2월 12일에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8년(고종 15) 2월 12일에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옥년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안현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 임자답(臨字畓) 13마지기와 심자답(深字畓) 12마지기를 300냥에 팔았다. 임자답은 부수(負數)로는 30복, 심자답은 31복이 되는 곳이었다. 매매 당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은 경우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옥년과 증인(證人)으로 전여백(田汝伯)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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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瑞元年乙亥</연도>十月卄三日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自己買得累年耕食以多可勢不得而伏在<지명>東道僊隱洞</지명>前坪地字畓參斗落只所耕十二負㐣價折錢文陸拾兩捧上是遣旧文參張果新文一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告 官卞廷事畓主 幼學 自筆 <인명>南啓豊</인명>[着名]訂人 <인명>金致道</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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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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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9년 방암(房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己巳二月初八日 房巖 同治己巳二月初八日 房巖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9년(고종 6) 2월 초8일 방암(房巖)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僊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9년(고종 6) 2월 초8일 방암(房巖)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僊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방암은 긴히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동도면 동문(東門) 바깥쪽 선은동 전평(前坪) 지자답(地字畓)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2부(負)이다. 방매 가격은 38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방암은 구문기(舊文記) 2장과 신문기(新文記) 1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가져가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답주(畓主) 한량(閑良) 방암과 증인(訂人), 증필(證筆)로는 염치연(廉致連)가 참여하여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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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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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910년 이상구(李相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明治四十三年 庚戌十一月二十八日 李相九 明治四十三年 庚戌十一月二十八日 李相九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0년(융희 4) 11월 28일에 이상구(李相九)가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위치한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0년(융희 4) 11월 28일에 이상구(李相九)가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이다. 이상구가 논과 밭을 팔게 된 이유는 요용소치(要用所致), 즉 돈을 쓸데가 있어서라고 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모두 네 곳이다. 첫 번째 토지는 부안현 입하면 우동리 전평(前坪) 사자답(謝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6부(負) 1속(束)인 곳이다. 두 번째 토지는 척자답(慼字畓) 6두락지이며 부수로는 7부 5속인 곳이다. 세 번째 토지는 호자저전(虎字苧田)은 3편(片) 5두락지이며 부수로는 9부 5속인 곳이다. 마지막 네 번째 토지는 태종전(太種田) 2두(斗) 5승락지(升落只)이며 부수로는 4부 5속인 곳이다. 네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1600냥이다. 매매된 저전은 모시밭을 말하고 태종전은 콩밭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구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구문기(舊文記) 5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답(畓)의 주인 이상구와 이장(理長) 김홍삼(金共三)의 이름이 있는데 이상구는 상중(喪中)이이서 서명하지 않았으며, 김홍삼은 이름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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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奴<인명>分同</인명>處無他矣宅急有緊用處伏在<지명>扶東仙隱洞</지명>前坪一作玄字畓肆斗落只所耕拾負㐣準價依數納宅後成文以給事<연도>丙申</연도>十一月 日<인명>上典 李</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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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26년 서치록(徐致錄)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서치록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오랫동안 농사지으며 먹고 살던 동도면 선은동 전평(前坪)의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 부수(負數)로는 10복이 되는 곳을 46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다른 전답의 문서에 함께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자손 중 여러 말이 있으면 이 신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서치록과 증인(證人)으로 박호재(朴好才) 필집(筆執)으로 조종학(趙宗學)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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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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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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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65년 박성칠(朴成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三年乙丑三月二十三日 崔乃儀 朴成七 同治三年乙丑三月二十三日 崔乃儀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5년(고종 2) 3월 23일에 생원(生員) 최내의(崔乃儀)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박성칠(朴成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5년(고종 2) 3월 23일에 생원(生員) 최내의(崔乃儀)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박성칠(朴成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유학 최내의는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농사지어 먹고 살아왔으나 부득이한 형편으로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 5마지기를 박성칠(朴成七)에게 85냥에 팔았다. 거래 당시 구문기 1장과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다른 말이 있거든 이 2장을 가지고 관에 알려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최내의와 함께 증필(證筆)로 유학 황석남(黃石南)이 참여하여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동치(同治) 3년 을축(乙丑)으로 나오는데 을축은 동치 3년이 아니라 4년이다. 여기에서는 간지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1865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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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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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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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同治三年乙丑</연도>三月二十三日右<인명>朴成七</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不得已伏在<지명>一道面</지명>定只堤下畓伍斗落只所耕拾捌負庫乙價折錢文捌拾伍兩依數捧上是遣舊文記一丈果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持此新舊文二張告官卞政事畓主 幼學 <인명>崔生員乃儀</인명>[着名]證筆 幼學<인명>黃生員石南</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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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61년 최학봉(崔學鳳)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拾壹年辛酉至月十二日 田仁掑 崔學鳳 咸豐拾壹年辛酉至月十二日 田仁掑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1년(철종 12) 11월 12일에 전인기(田仁掑)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유학 최학봉(崔學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1년(철종 12) 11월 12일에 전인기(田仁掑)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유학 최학봉(崔學鳳)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인기는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어먹고 살다가 부득이한 형편으로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 5마지기를 최학봉에게 50냥에 팔았다. 거래 당시 구문기는 다른 논과 붙어 있어서 매입자에게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분란의 단서가 있거든 이 문기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인 전인기 혼자만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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