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이상구(李相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明治四十三年 庚戌十一月二十八日 李相九 明治四十三年 庚戌十一月二十八日 李相九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0년(융희 4) 11월 28일에 이상구(李相九)가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위치한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0년(융희 4) 11월 28일에 이상구(李相九)가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愚東里)에 있는 논과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이다. 이상구가 논과 밭을 팔게 된 이유는 요용소치(要用所致), 즉 돈을 쓸데가 있어서라고 하였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모두 네 곳이다. 첫 번째 토지는 부안현 입하면 우동리 전평(前坪) 사자답(謝字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6부(負) 1속(束)인 곳이다. 두 번째 토지는 척자답(慼字畓) 6두락지이며 부수로는 7부 5속인 곳이다. 세 번째 토지는 호자저전(虎字苧田)은 3편(片) 5두락지이며 부수로는 9부 5속인 곳이다. 마지막 네 번째 토지는 태종전(太種田) 2두(斗) 5승락지(升落只)이며 부수로는 4부 5속인 곳이다. 네 곳의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1600냥이다. 매매된 저전은 모시밭을 말하고 태종전은 콩밭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상구는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구문기(舊文記) 5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답(畓)의 주인 이상구와 이장(理長) 김홍삼(金共三)의 이름이 있는데 이상구는 상중(喪中)이이서 서명하지 않았으며, 김홍삼은 이름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