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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기(金章起)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章起 李殷弼 金章起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장기(金章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장기(金章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장기는 유학자로, 명주(溟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靈駕飄飄祖道遷俄客像望在生前陶朱産業非心事商皓鬢眉 處世仙八耋大歸云是翁千秋永訣正堪憐 公座身後座無感肖 子賢孫非繼侍 溟州后人 契下生 金章起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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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노석윤(盧錫胤)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 五月初三 盧錫胤 乙 五月初三 盧錫胤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5월 3일 노석윤(盧錫胤)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5월 3일 노석윤(盧錫胤)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대방이 방백(方伯)으로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으니 위로가 된다며 올해는 장마와 더위로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자신은 슬픈 일을 당한 뒤로 백발이 늘었다며, 상대방 가문의 과거 합격 경사를 축하하고, 희수(稀壽 70세)인 당숙의 안부를 물었다. 피봉의 문천(文川)은 박용호를 지칭한다. 박용호는 1824년 함경도 문천 군수가 되었다. 편지 내용 중 과거 합격자는 박규서(朴奎瑞)로 1825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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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사돈 이굉구(李肱九)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巳十一月初二 李肱九 乙巳十一月初二 李肱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45년(헌종 11) 11월 3일 사돈 이굉구(李肱九)가 보낸 서간(書簡) 1845년(헌종 11) 11월 3일 사돈 이굉구(李肱九)가 보낸 서간이다. 아들이 돌아와 상대방의 안부를 잘 알았다며 혼례를 잘 치르고 신부가 바라던 것보다 넘치니 자신 집안의 큰 경사이며 기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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吁銅章觀象識得周天之常度度曆象記數推占歲日之運行則可以知朞三百有六旬有六日之義也何則天行健常一日一周而過一度日行遲雖一日一周而退一度是故周天之常度則有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也日之行則積三百六十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而後與天會而爲一歲日行之數也然則周一歲之日數其非三百六十六日乎倘與天會而沕合天度則推可知周年之日數也旣麗天行而步驗天度則從可{目+制}朞年之日數也故古聖王置閏成歲之際嗟歎而告之曰朞三百有六旬有六日不其然乎是知每歲日數只有三百六十日而又有六日者日與天會而叶天之常度也一歲常數不過三百六旬而且有六日者合天度而得氣之盈數也乃所謂朞三百有六日者非耶知夫天垂象聖人則之故先後天而不違明之以周年之日數者是己仰天路而同軌告之以朞年之日數者亦是已苟非欽明之聖孰使之而明其然也執此以究則書義可{目+制}矣請申之盖朞者周一歲之謂也日與天行或過或退而會合天度則一歲之日數若是乎三百有六旬有六日也何以明之璇璣旋斡理會一天之度數玉管窺察推占三辰之躔度則進退疾徐之度過差會合之理各有分數而天有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也歲有三百六十五日四分日之一也以此推之朞三百六旬六日之數不難明矣然則稽古帝堯欽昊授時之餘置閏成歲之際明其周年之日數而咨汝羲和者有是夫大抵歲有十二月月有三十日而通計三百六十者一歲之常數也常數之外多五日九百四十分日之二百三十五者與天會而爲氣盈也月與日會而少五日九百四十分日之五百九十二者爲朔虗合氣盈朔虗而爲閏者所以消其盈息其虗之意也定時成歲之道在於置閏所以置閏之法在於朞年之日數則書經駕說不其宜乎嗚呼天日臨想象運行之度數而朞年之日數則千歲之日至可坐而致也噫雲過太虛至治無跡蓂庭午日餘輝尙存常想於千載之下而尤以以是多感焉吁 謹義(背面)義盈字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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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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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通文右通諭事橘有渡淮之欲而終知其爲橘花有落溷之髮是知其爲花今花何爲泥橘何爲柚哉然則可以人而不如淮之橘溷之花乎盖貴坊士人朴東禎仁碩叔侄粤自密城君後裔本以淸州木果洞人也簪纓世族詩禮古家論其世德則恭孝公其十一代祖也訥齋公其九代祖也江波先生之八代孫也棄窩先生之四代孫也棄窩公隱德不仕棄世於本府本坊者取不才明主棄之意而退世於山林中勝探者也不幸此家興替有數科?間寂班名世守者鄕中表族俱是姻婚之家道內美閥亦是戚紀之地則愚夫蠢童咸知其班脉之昭然常人庸士亦誦其來歷之閥閱而去甲乙大無哀我生靈黃口簽丁白骨徵布之餘士人東禎混入虛名故盖有齊顙之呈此終見頉給之題矣傳聞今又其侄仁碩不幸橫侵云然則仁碩之家便是常人樣卽亦不無齒寒之歎然尊卑有等上下有分則極守班名者必無是理而況我鄕知名之族有此橫侵之獘者豈不寒心而若使其淸州鄕人聞知則必有一正論於本府矣玆敢齋參通告窃願上有司與益尊特出齊憤之義一以明同濟之有等一以杜任掌之橫侵無至玉石之俱樊千萬幸甚右敬通于機池上有司癸未十一月初六日龍湖祠會所友通 幼學崔漸翼 李亨來 金星德 房基亨 盧學文 趙重伯 丁孝達 安錫宗 楊大壽 金星燁 房海相 李觀淵 朴鼎權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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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성적(聖迪)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戌至月初三日 聖迪 文川政軒執事 丙戌至月初三日 聖迪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6년(순조 26) 11월 3일 성적(聖迪)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6년(순조 26) 11월 3일 성적(聖迪)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산에 대한 소견이 있는가 묻고 대개 별이나 풍수에 대해서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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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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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金正國)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정국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정국은 계림(鷄林), 곧 경주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었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松 高峯山下世同隣朝暮相從我作親甑峀淸風遊樂日鏡湖寒 月鉤罷濱於恭於敬孫有德觀志觀行子克仁非不侍湯誠孝薄 緣何所?未回春 侍生鷄林金正國謹拜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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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同治三年甲子</연도>正月二十三日 <인명>崔錫龍</인명>處明文右明文事段門中畓每年收稅是如可要用所致夫伏在<지명>扶北</지명>八作㭗字畓三斗落只所耕七負五束庫乙價折錢文二十兩依數捧上是遣本文記二丈倂以右處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以此憑考事畓主 副門長 <인명>田五豊</인명> 喪不着證筆 幼學 <인명></인명>李時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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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이익문(李益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十三年癸卯十一月十七日 李益文 道光二十三年癸卯十一月十七日 李益文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3년(헌종 9) 11월 17일에 유학(幼學) 이익문(李益文)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3년(헌종 9) 11월 17일에 유학(幼學) 이익문(李益文)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익문은 긴급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북(扶北)에 있는 팔작(八作) 울자답(㭗字畓) 3마지기를 11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명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이익문만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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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道光二十三年癸卯</연도>十一月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段以要用所致自己買得<지명>扶北</지명>八作㭗字畓參斗落所畊柒負伍束庫價折錢文拾壹兩爲遣以本文記一丈幷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異言則以此憑考事畓主 幼學<인명>李益文</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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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7년 김영일(金永一)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二十七年丁未十二月二十五日 金永一 道光二十七年丁未十二月二十五日 金永一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7년(헌종 13) 12월 25일에 유학(幼學) 김영일(金永一)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7년(헌종 13) 12월 25일에 유학(幼學) 김영일(金永一)이 부북(扶北)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영일은 긴급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북(扶北)에 있는 팔작(八作) 울자답(㭗字畓) 3마지기를 11냥에 팔았다. 거래 당시 본문서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문제가 생기면 이 문서로 증거를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영일과 증필(證筆)로 한량 박용이(朴用伊)가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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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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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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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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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조성학(趙性學)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조성학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성학(趙性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성학(趙性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조성학은 유학자로, 함안(咸安)조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정계(情契)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계를 같이하면서 교분을 나누었던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褄德家庭梃然〔玉〕人平生孝友出天眞芝蘭雅禊接隣 里雲〔樹〕深情義禮親農談斜陽忘日暮那知黃壤作靈身 存亡此夕如何痛墓草應留淚血㻞 情契咸安趙性學慟哭 拜 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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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방득수(房得水) 가사매매명문(家舍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嘉慶四年己未二月初三日 金致雨 房得水 嘉慶四年己未二月初三日 金致雨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799년(정조 23) 2월 3일에 유학(幼學) 김치우(金致雨)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에 있는 가대전(家代田)을 방득수(房得水)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799년(정조 23) 2월 3일에 유학(幼學) 김치우(金致雨)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에 있는 가대전(家代田)을 방득수(房得水)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치우는 일작(一作) 천자전(天字田) 1마지기, 부수(負數)로는 1부 5속이 되는 곳을 1냥을 받고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자손들이 여러 말들을 하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밭 주인 김치우와 필집(筆執)으로 서석린(徐錫獜)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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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嘉慶四年己未</연도>二月初三日<인명>房得水</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家代田<지명>東道</지명>一作天字田壹斗落只所耕壹負伍束庫錢文一兩本文記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或爲雜談是去等持此文記告 官卞定事田主 幼學 <인명>金致雨</인명>[着名]筆執 <인명>徐錫獜</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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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이동선(李東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明治四十五年壬子陰正月初九日 朱正執 李東善 明治四十五年壬子陰正月初九日 朱正執 전북 부안군 [印] 3개 1.7*1.7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음력 1월 9일에 주정집(朱正執)이 고부군(古阜郡) 입마촌(立麻邨)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이동선(李東善)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2년 음력 1월 9일에 주정집(朱正執)이 고부군(古阜郡) 입마촌(立麻邨) 계동(桂洞)에 있는 논을 이동선(李東善)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고부군 입마촌(立麻邨) 계동(桂洞)에 사는 주정집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던 입마촌 계동 전평의 인자삼차답(印字三次畓) 9마지기를 이동선에게 720냥에 팔았다. 주정집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팔았다고 거래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을 하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주정집과 증인(證人)으로 주상숙(朱相淑), 주익찬(朱益贊)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인장을 찍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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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全炳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全炳轍 李殷弼 全炳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전병철(全炳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전병철(全炳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 세 수가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전병철은 유학자로 본관은 옥산(玉山)이다. 그는 자신을 외생(外甥)이라고 적고 있는데, 외생이란 사위가 장인이나 장모에게 자기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전병철은 망자의 사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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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癸未</연도>三月卄二日 右人前手標右標事果以舍兄之債事屢次官庭推卞而至今必報乃已故右錢三十兩减條而以租二石今十月晦內代捧之意如是成標如有他端則右錢三十兩並本利推給事標主 幼學 <인명>金成叔</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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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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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이경백(李京伯)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寅正月二十九日 李京伯 壬寅正月二十九日 1902 李京伯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2년 1월 29일에 이경백(李京伯)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밭을 담보로 하여 금전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 1902년 1월 29일에 이경백(李京伯)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돈지리(頓池里)에 있는 밭을 담보로 하여 금전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이경백은 자식의 혼인 문제로 긴급하게 돈을 쓸 일이 있어서 돈지리(頓池里) 전평(前坪)에 있는 보리밭(麥田) 6마지기와 하곡(夏穀)을 담보로 하여 아무개에게 5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이다. 매달 이자(利子)로 6푼(分)을 주고, 빚은 오는 4월 그믐 안에 갚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기한이 지나도 빚을 갚지 않으면 이 문서를 증거로 하라고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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