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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승지(承旨) 이기연(李紀淵)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李承旨紀淵 李紀淵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안동(安洞)에 사는 승지(承旨) 이기연(李紀淵)이 보낸 서간(書簡). 안동(安洞)에 사는 승지(承旨) 이기연(李紀淵)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지난번에 당한 일은 실로 뜻밖이라 이 마음으로 한탄스러워 실로 예사롭지 않았는데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다며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공요(公擾)로 여가가 없다고 하였으며 보내준 여러 물건은 진심이 담긴 것들이라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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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노광규(盧光奎)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二月念九日 盧光奎 戊申二月念九日 盧光奎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48년(헌종 14) 2월 29일 사돈 노광규(盧光奎)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48년(헌종 14) 2월 29일 사돈 노광규(盧光奎)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대방의 안부와 며느리는 무고한지 물었다. 지시한 대로 아들을 보낸다며 지체하여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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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조봉진(曺鳳振)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臘月卄二日 曺鳳振 甲申臘月卄二日 曺鳳振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12월 22일 조봉진(曺鳳振)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12월 22일 조봉진(曺鳳振)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세밑에 이별하고 그리워하던 차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았다며 지방 수령으로 부임한 이래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은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며 상대방이 보내준 여러 물품에 감사하다고 하였다. 다가오는 새해 더욱 좋아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때 조봉진은 공조 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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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武七年癸卯</연도>二月初三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累年耕食是多可要用所致勢不得己伏在<지명>扶安立下牛東里</지명>右邊殊字苧田㱏斗伍升落只所耕三負五束廤価折錢文㱏百伍拾兩依數捧上是遣倂新旧文二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之弊端則持此文記告 官卞呈事苧田主 幼學 <인명>金耿龜</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曺德弼</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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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임기주(林基柱)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七年辛卯八月二十七日 林基柱 光緖十七年辛卯八月二十七日 林基柱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1년(고종 28) 8월 27일에 임기주(林基柱)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 우동리(牛東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1년(고종 28) 8월 27일에 임기주(林基柱)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 우동리(牛東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임기주는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밭을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팔았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입하면 우동리 우측 가장자리에 있는 수자(殊字) 저전(苧田)으로 1두(斗) 5승락지(升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3부(負) 9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76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임기주는 구문기(舊文記)를 잃어버려 내어 줄 수가 없었고, 신문기(新文記)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새로 작성한 문서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모시밭 주인 유학(幼學) 임기주와 증필(證筆) 나우성(羅祐成)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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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연(辛在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신재연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신재연(辛在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신재연(辛在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신재연은 금성(錦城) 곧 나주신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山 天降福翁厚且寬敦親仁里樂平安蓮花宅裡詩聲 古惠葉齋前月色寒甲欲三千心上計年何人二 夢中殘奄然忘却風塵界前日甑山去赤難 錦城后侍下生 辛在衍 謹再拜哭輓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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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최영심(崔永心)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崔永心 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 辛寬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7년(고종 4) 1월 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7년(고종 4) 1월 2일에 신관옥(辛寬玉)이 부안현(扶安縣) 궁월리(弓月里)에 있는 논을 최영심(崔永心)에게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관옥은 궁월리 서쪽 들에 있는 내자답(乃字畓) 9마지기를 120냥에 팔았다. 신관옥은 이 논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논을 수년 동안 농사지으며 먹고 살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팔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히고 있다. 이 매매 당시 구문기는 다른 논의 문서에 붙어 있어서 출급할 수 없어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신관옥과 증필(證筆)로 김치화(金致化)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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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者郵書仰想熟參而今且專人◉係于歸日字之迫所也十分另意期於右日治行焉日家所云若前日理程則甚如不利是此是初行之事不可疎忽也以此諒之如何就審日內禮盡在沽藥旺仁庇句禧◉◉不任區區弟姑率盛寧呌姑今則小差之餘不備禮 <연도>甲子</연도>元月九日弟<인명>李暾善</인명>再拜發行日時<연도>甲子</연도>二月六日巳時入門時仝日酉末戌初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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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김낙건(金洛鍵)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八年甲辰三月十二日 金落鍵 光武八年甲辰三月十二日 金落鍵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 3월 12일에 유학(幼學) 김낙건(金洛鍵)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금강동(金崗洞)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4년 3월 12일에 유학(幼學) 김낙건(金洛鍵)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금강동(金崗洞)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낙건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금강동 전평(前坪)에 있는 모시밭 1마지기와 산세(山稅) 2부를 5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모시밭 주인김낙건과 증필(證筆)로 유학 김우재(金禹載)가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문서 말미에 구문서는 가대(家垈) 문서와 붙어 있어서 출급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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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봉(沈相鳳)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相鳳 李殷弼 沈相鳳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상봉(沈相鳳)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상봉(沈相鳳)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절구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심상봉은 유학자로, 자는 덕오(德梧), 호는 춘천당(春泉堂),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이다. 그는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자신을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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蘤好仁樂善出於天碩福人間有誰先八十二年非不壽難禁執紼淚潺然其二春雨霏霏故未收聲聲愁聽漲溪流終天永訣當今日海月湖風憶舊遊侍下生 眞珠后<인명>沈相鳳</인명>謹再拜哭輓{艹/靑+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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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昌城華閥襀陰門繼繼衣冠尙古存滿案詩書能處世長春花樹自成村敢承契誼先追慕幸接風儀感厚溫蘭音一落薤歌又玄路茫茫雨意昏 白夏后人小生<인명>李良濟</인명>謹再拜哭輓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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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박화연(朴化然)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朝鮮開國五百五年丙申十一月 日 朴化然 大朝鮮開國五百五年丙申十一月 日 朴化然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6년 11월에 유학(幼學) 박화연(朴化然)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玄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6년 11월에 유학(幼學) 박화연(朴化然)이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삼현동(三玄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박화연은 긴요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삼현동 전평(前坪)에 있는 논 3마지기, 부수(負數)로는 7부 8속이 되는 곳을 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는 다른 논의 문서에 붙어 있으므로 신문기 1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박화연과 증필(證筆)로 유학 박윤준(朴潤俊)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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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인(沈相仁)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相仁 李殷弼 沈相仁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조용락은 유학자로, 다정한 벗이면서 함안(咸安)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華堂寂寂主何寜乃?君今永永離明也雖分幽也會生而相樂 死而悲繁華互楡敦如許孤秀庭蘭慶不衰多少情懷今未敢 斜風那忍送靈輀 情契 咸安后人 趙鏞洛 慟哭再拜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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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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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택(沈興鐸)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興鐸 李殷弼 沈興鐸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흥택(沈興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흥택(沈興鐸)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흥택은 유학자로, 진주(眞珠)의 후생이다.○ 원문 텍스트 昌寜華閥遠落來碧海鑑湖這一隈仁享九旬上年 壽厭煩是日復泉臺其二萬紫千紅當此時和風惠雨日遲遲 薤歌數曲人歸去酹醪以香膠哭以詩 侍生 眞珠 沈興鐸 謹拜哭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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