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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南時別紙 此中風土人物天荒尙未闢破推魯無知卽何異魚蠻鰕夷箕中亦有秀拔超倫之奇其所讀不過通鑑孟子兩種書而已雖此兩種亦何徵而礙但可以如是責備耶天賦無南北特無導揚開發導師悲悶爲爾嚬歡者政爲此地道耳然環漢拏四百里之問柑橙橘柚之嘉玲人所共知者外此奇木名世葱靑交翠擧皆冬靑皆不能知名樵牧無禁甚可惜若使一笻一屐處處採訪必有奇觀異聞顧此籬底生活何以及此耶楚南之多石少人自昔已然漢拏靈異磅軋之氣鍾在草木而已耶豈鍾於物而不鍾於人也水仙花果是天下大觀江浙以南未知如何此中之里里村村寸土尺地無非水仙花花品絶大一朶多至十數花八九蕚五六蕚無不皆然其開在正晦二初至於三月山埜田隴之際漫漫如白雲浩浩如白雪累居之門東門西無不皆然顧玆坎窞蕉顇何可及此若閉眼則已開眼則便滿眼而來何以遮眼截住耶土人則不知䙡焉牛馬食齕又從以踐踏之又其多生於麥田之故村丁里童一以鋤去而猶生之故又仇視之物之不得其所有如是矣又有一種千葉者初開花之時如菊花之靑龍鬚與京洛所見千葉大異卽一奇品矣秋末冬初窃擬擇其大根者送呈未知其時便値晼晩矣屈子所云不及古人誰與玩訪者不幸近之觸境感悽不禁汪然也扇題書畫果是佳品甌香筆意石帚餘調令人移情大槩近日寫生之必宗南田愼詞之遠訢白石風裁冷雋不及側艶一蹃足以頂針於東人此雖小道亦不可看過也此中有甘露樹樹厪大一握或二三握折其本則水湧如瀑泉一本可得水一大甁水如乳泉味甘如石蜜之上品淸例有香他蜜之甘皆不如也儘奇品異産矣仙家之瓊醬玉液恐不多於是樹在深山或遇之而不多此中人亦不知也年前有一行脚如道人者渡海而來入山渴甚取其樹截而飮之其時樵夫一人旁見之能道其事今從樵夫得之恐其傳播而爲此島大患故亦秘而不發若三四日程則可以轉達而百計籌量無以遠致之道不得仰呈極可嘆耳曾記宋元間人所著錄南方草木有云樹汴如甘露者未知是樹歟書卷中見之亦一奇聞而豈料口嘗異味如是耶不得不仰陳於閤下以廣海外異聞耳伏聞登晋台閤與一世同慶又爲之憧憧不已同慶者外而隨衆之尋常頌禱憧憧者內而肺腑中流出之耿耿者也雖下邑島澉之村丁紅女擧無不引領加額況如坎窞桂蟄之物舊在久要之末者乎今日之日異於昔日之日動作則披絮牽棘習尙則脂掌含糊雖臯夔執炊伊呂添薪鼎中之梅萬無以調劑也然聖明在上得君之專恐又無如此時遂不得一展施一效力和光同塵與之上下於膠漆盆中寜不太息流涕者乎爲閤下籌之不量入而入勇往猛進有可以一分有益何憚而不爲若無一分益而萬仞之塹隨其後亦非君子審幾密時之義耳日者恩叙誕宣感祝深極朝家之面目始正是功贊頌其於閤下何有乎遲早又何有乎增减西郊之風雷旋息東岱之霖雨勃興區區喜慶非止一段私好已也雪屋冰簷卽往時之熱界火宅當是時豈料今日此境天道循環有不得不已昔之東蓬崍轉南梗零飄必有此五色瓜地煙江疊嶂 恩輝寵光先已此爛盈交加江樹含萃鵙鷺與榮有待乎今日世諦之如豆小眼特迷訛不識天運循環之際妄以盲輪幻網弄現不已紫薇玉堂東坡赤壁自是一坡民笑且歌一邱一壑敺是現景同軌疊炬村凞埜樂無礙太平頂拱無窮至如小人天之所廢鬼神之所呵日月之所不及雨露之所未濡四阾耒耟齊起陰崖之氷雪如舊自分阿鼻永劫沈淪雖提波尙有授記其有甚於提波者乎跳空而空不受攝塌地而地亦吐棄恁麽不得不恁麽不得顚狂搭到不知所出間於恩甄之時崧壽之辰理當有一申悃私顧以何面目擧似隨人作計耶想亦諒及於此不以深責於一切阻斷矣不備望後山駕果將再理適得一俗諺唐突崇嚴極知猥屑極知悚惶敢博異聞函海之大亦當包宥矣有一遇虎之人超上虎背虎亦驚擲無定遂騎虎而之村落間兒童拍手齊呼作騎虎仙人其人曰仙則仙矣苦哉苦哉騎虎是不得已也仙人是童觀之異也苦哉苦哉是其實情耳每見名山福地有仙無虎安得於福地名山永享仙樂耶不覺啞一笑絳灌隨陸非不各足英分對留侯則傖夫嵇鍛阮洎非不骨帶烟霞對蘇門先生則笨伯余於此卷亦云黃癭瓢畵甚奇古以隷畵作之如金冬心鄭克桑又是一種風致茶品果是勝雪之餘馥賸香會於雙碑舘中見如此者東來四十再未見嶺南人得之於智異山僧山僧亦如蟻聚金塔實難多得又要明春再見僧皆深秘畏官不易出然其人與僧好尙可圖之其人甚愛拙書有轉轉兌換之道耳不備有一蜜僧自楊根過江而來傳道初十山期眞眞的的不勝聳賀聳賀者神旺氣逸無舊衍之沉尋一也無有牽纏解脫二也勇前直截不少持疑如少壯時三也是皆豈衰脫所能辦也我公是一聖世閒人天以是公賁餙 聖世一閒世界圓就 聖世一事業是不世有之瑞世者豈止於文龍海晏威鳳河淸而已所以賀不容口繼之乎攢不自已第入此山者亦有遊術其槩不出三數仙遊也禪遊也儒遊也仁山智水王籥金樞華嚴樓閣皆其惟之近而各隨境異山未嘗有異能不囿於是而得廬山眞面目又果何如哉最其名遊一着爲可惡名遊者噉名而遊也大抵山內外九龍淵萬瀑八潭爲第一天一坮歇惺樓爲瑰觀須彌搭爲奇觀摩訶衍十日留而不厭者靈源洞亦不可不觀外此幽洞奇山甘+欠一石一流非不有處處自具一段可喜多噉名處萬物草爲甚此可以省老年笻屐之勞不逐於噉名之中也山中故事如霜岳故實降香遺跡一無所傳有所稱盧亻+眷一款包絡山川令人欲嘔如西山具葉內賜鸚鵡螺甚奇螺是詳製萬曆以前此物何日流傳而東出也在揄站寺中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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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척독(秋史尺牘) 秋史尺牘 秋史尺牘 고서-집부-서간독류 개인-생활-서간 고서 원문 秋史尺牘 성책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부안 하서 고부이씨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간찰을 옮겨 적은 것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간찰을 옮겨 적은 것이다. 따라서 추독이라는 제목은 추사의 간찰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제목도 추사척독(秋史尺牘)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추사가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규재(圭齋) 남병철(南秉哲), 동암(桐菴) 심희순(沈熙淳) 등에게 보낸 간찰이 전사(傳寫)되어 있다. 만약 이 간찰의 원본이 전하지 않는다면, 본서에 전사된 간찰은 추사 김정희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한편 본 추사척독도 정의재장이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다. 정의재는 물론 부안 출신의 유학자 이기로(李驥魯) 선생의 호(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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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尺牘 上石坡書 石坡太院位自號也迹拘形違每有願言況自外氏之如是零謝別有耿耿俯仰今昔益切懸懸不意委存之盛出尋常萬萬執緘悒悒無以自定第謹審 崇體神葆曼相頟頌如潮至芳樹佳緣脩竹淸興風流圓就文字吉羊臨風溸懷尤何等艶嗟而已戚生至今不死省是異事轉轉作一痴頑不靈之物日日耳目所接無非惱亂而已崇貺諸品仰認鄭重之至意非素望所及却之不恭冐領如固有感愧交並眼花添障臂重如山艱此勝毫留不備年後一緘如瞻歲新如逢花開喜可知耳但此頹放蕉萃不足以當崇注山寺一約亦浮生淸緣何以易就且須隨意方便不必自惱自勞也蘭話一(石坡畵蘭甚奇故云)卷妄有題記順且寄呈可蒙領存大抵此事直一小技曲藝其專心下工無异 聖門格致之學所以君子一擧手一擧足無往非道若如是又何論於玩物之戒不如是卽不過僞師魔界至如胸中五千卷腕下金剛皆從此入耳並候崇祉不備非非想中崇椷專星奉齎 恩敎六日乃到先於報感注驚倒不有平日注存於此身者貫激有頂痛癢相涉何以得此不肖無狀之罪戾橫極猶幸禦魑北方自分永劫沈淪萬死無惜千年不寤不自意光天化日照臨於坎窞幽陰中 霈澤旁流喑哂跛躃同聲並奏歡欣蹈舞於堯醲舜郁之昌際盛時見之光天下文明雖生生世世萬糜千粉何以圖報萬一也仍具審露辰 崇體神嘏頂誦頂誦如水無窮戚從飽盡惠飯行將生入玉門亦知奉展光覿有日矣來伻留之數日今始回送敢申若干不備霜稜晶晶納手知寒花時一約轉到此際對境悒悒卽伏承審秋成 崇體葆禧仰慰第公私煩惱不勝耿誦戚生老病益甚衰氣萬無搘拄草木同枵卽分內事耳俯示蘭幅老夫亦歛手鴨水以東無如此作此非面前阿好之一餙辭也昔李長蘅有此法今復見之何其異也閤下亦不自知其出於是是乃合轍之妙耳餘硏寒草草不備朱戶貼鷄金盤簇燕天門開詄蕩蕩新嘏鼎來百吉隨宜卽伏承崇函並貺吉語是推以及人之盛不勝贊誦更伏問近日 軆中葆禧曼壽詹祝膝下韶年兒女靑紅歲味之最如今圓全似無其二尤何等艶羡戚功草木殘年儵爾七十蓼辛茶苦去益支離自顧亦愧人必嘔之耳荷此厚疑陰嵌回暖荒寒寂寞之濱有誰警咳於蓬藜中也隷字佳好當與蘭負雙美屋頭可以貫虹矣不備邇佳崇禧曼吉頃承雲椷幷硏隷菊㡧土銼泥壁覺有虹月之異里魁村傖無不驚吒絶倒孰謂春菊之不能也豪生妙相亦果造化之轉移耶菊法圓熟十分無以加矣更於熟後生一諦深留意焉是禱數日天氣始佳政是寫蘭之候銷得幾筆臨風溯咏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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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谷風飄紼路臨歧百感應非此一時齒德終鮮鄕邑老歌謠不絶巷閭兒滿齋蕙葉空多碧繞圃篁隂自不移眷眷年來陪誨席長旁犻有在傍知 侍下生<지명>水原</지명><인명>白達燮</인명>再拜謹輓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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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섭(沈珪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珪燮 李殷弼 沈珪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규섭(沈珪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규섭(沈珪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심규섭은 유학자로,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만장에 진주후인(眞珠後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진주는 삼척의 옛 별호이다.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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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忽聞蘭報夢耶眞歲不龍蛇送哲人谷有馨蘭徐韻遠家傳司馬舊風新往來一里情親洽詩酒同筵氣味醇飄拂丹㫌邙悲去靑山無語水如嚬 <지명>眞珠</지명>後人<인명>沈珪燮</인명>謹拜哭輓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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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익(金敎益)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敎益 李殷弼 金敎益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교익(金敎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교익(金敎益)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교익은 유학자로, 호는 일문약인(一文若人)이며, 출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원문 텍스트 惟公溢性稟於天南壽星暮海阡函字宜餘鄕契帖詩 書其付子孫賢謹知半世光陰容倏化三淸苟藥仙一來生蒭牲 訊意薤露歌聲發四隣 一文若人 金敎益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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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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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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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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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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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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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김준경(金俊卿)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俊卿 李殷弼 金俊卿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준경(金俊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준경(金俊卿)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 한 수와 칠언절구 한 수가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김준경은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명주후인(溟洲后人)라 적었는데 여기서 명주는 강릉의 옛 이름이다. 후인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동계생(同契生)이라고 자신을 적었는데 동계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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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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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山壽可賦仁寔當眞首於兩契老成人登壇把矢先規律聽講就筵獻酒巡翏瑟續連前世約芝蘭三秀四時春八句有二康寧體揖讓瓊宮上帝宸又斯公罕德耋耄稀仁者壽壽語未迷願訴人間多苦事少而不老老無歸 <지명>溟洲</지명>后人 同契生 <인명>金俊卿</인명>謹再拜哭輓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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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892년 이규환(李奎煥)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辰 生李奎煥 壬辰 李奎煥 전북 부안군 [署押]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2년(고종 29) 2월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92년(고종 29)에 전북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살고 있는 이규환(李奎煥)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이규환은 이전에도 부안현감에게 소지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소지에서는 스스로를 화민(化民), 죄민(罪民) 등으로 적었었다. 하지만 이번 소지에서는 그와는 달리 생(生)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생은 아마도 유생의 의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규환이 소지를 올린 이유는 같은 부안현의 일도면(一道面) 증동리(甑東里)에 사는 김희도(金希道)와의 채무 관계 때문이었다. 김희도로부터 6석 10두와 20냥(兩)를 받아야 하는데, 일부는 받았지만 일부를 받지 못하였으니 받게 해 달라는 취지에서였다. 이규환의 호소에 대해 부안현감은 이규환이 원하는 바를 즉시 들어 주도록 하였는데, 부안현감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김희도로부터 받아야 할 돈이 곧 세금(稅金)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니까 김희도는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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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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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김상수(金尙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尙洙 李殷弼 金尙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상수(金尙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상수(金尙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절구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김상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분성(盆城)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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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二年丙子</연도>十二月卄四日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荒年生活無路故勢不得伏在<지명>下西面頓池常頭洞坪</지명>庸字畓肆斗落只所耕八負五束㐣價折錢文二十三兩依數捧上是遣旧文㱏張新文㱏張幷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他言以此文記告官卞呈事畓主閑良<인명>金仁坤</인명>[着名]筆執<인명>金貴萬</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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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5년 이하용(李夏容) 등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李夏容李遠馨 城主 乙巳十一月 日 경남 함양군 [署押] 1개, [官印] 5개 7.0*7.0 5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이다. 이들은 도백원(都伯元)(다른 소지에는 도백언(都百彦)으로도 나온다.)이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있는 자신들의 선산에 투총(偸塚)을 한 것을 알고 관아에 소를 제기하여 도가를 잡아오라는 판결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던 도가는 투총 2기를 파가겠다고 다짐하는 문서까지 작성하여 주었지만,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이장을 하지 않고 이씨측을 피하고 다녔다. 이에 이씨측은 관아에 소를 올려 관에서 내린 제사(題辭)를 무시하고 천리 먼 곳의 타향에서 온 자신들을 무시하는 도가를 잡아다가 법대로 처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수령은 우선 그를 다시 즉각 잡아서 대령하는 한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단 도형(圖形)을 작성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하용과 이원형은 부안의 선은동에 살고 있었던 전주이씨 문중의 일족으로, 선대에는 함양에서 살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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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이하용(李夏容) 등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巳十一月 日 李夏容李震容李遠馨等 城主 乙巳十一月 日 경남 함양군 [署押] 1개, [官印] 1개 7.0*7.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진용(李震容), 그리고 이원형(李遠馨) 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 1845년(헌종 11) 11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진용(李震容), 그리고 이원형(李遠馨) 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이다. 이들은 부안 선은동에 세거(世居)하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일족으로, 선산이 있는 함양군(咸陽郡)을 떠난 지는 이미 여러 대가 지났다. 그러나 성묘를 하러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선산(先山)에 갔다가 그곳에 사는 도백원(都伯元)(다른 소지에는 도백언(都百彦)으로도 나온다.)이란 자가 신축년, 즉 1841년에 그의 모친 묘를 선산에 몰래 썼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같은 전주이씨 일족의 한 사람인 이득용(李得容)이 성묘를 하러 선산에 왔다. 도가는 이득용을 부추겨 20냥에 투장한 묘자리를 20냥에 사들이고 표(標)까지 작성하였다. 몇 년 만에 선산을 들른 이하용 등이 이 소식을 듣고 족원들을 설득하여 20냥을 마련하여 도가에게서 땅을 되찾으려고 함양을 찾아왔다. 그런데 도가는 지난 7월에 다시 그의 조모의 무덤까지도 이씨의 선산에 쓴 뒤였다. 이에 전주이씨 일족은 함양군수에게 소지를 올려 도가를 관아에 잡아들여 사대부가의 선영에 압장(壓葬)한 책임을 묻고, 기한을 정하여 무덤을 파가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령은 도백원을 데려오면 조사하겠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소지를 올린 이하용과 이진용, 이원형 등은 부안의 선은동에 살고 있었던 전주이씨 문중의 일족으로, 선대에는 함양에서 살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함양을 떠나 부안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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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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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재운(李在雲)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재운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재운(李在雲)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재운(李在雲)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재운은 안성(安城)이씨의 후손이었다.○ 원문 텍스트 松 北斗以南有一人 碧梧堂月爲隣百世文華鳴地閥平生仁性保天眞達者誰知三也足 贖兮難欲百其身泉臺千里令何處灑淚難堪永訣晨 安城后人李在雲謹再拜哭 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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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송관순(宋冠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宋冠淳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들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관순의 나이는 39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관순은 아내 단양우씨(丹陽禹氏)와 둘이 살았다. 단양우씨의 나이는 38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1구, 여 1구, 공합(共合) 2구로 기재되어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2간(二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관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2칸임을 뜻한다. 송관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906년과 1903년에 각각 작성된 총 2장이 전해지고 있다. 요 3년 사이에 송관순의 가족 구성원이나 주거 형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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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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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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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3년 송관순(宋冠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七年二月 古阜郡守 宋冠淳 光武七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3년(광무 7)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3년(광무 7)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관순(宋冠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관순의 나이는 38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관순은 아내 단양우씨(丹陽禹氏)와 둘이 살았다. 단양우씨의 나이는 31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기구 항목에 여 1구(口)가 기재되어 있다. 또 고용 항목에도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관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1구, 여 1구, 공합(共合) 4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송관순과 그의 처, 기구 1명,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5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관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5칸임을 뜻한다. 송관순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906년과 1903년에 각각 작성된 총 2장이 전해지고 있다. 요 3년 사이에 송관순의 가족 구성원이나 주거 형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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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대(韓相大)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韓相大 李殷弼 韓相大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한상대(韓相大)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한상대(韓相大)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한상대는 유학자로, 청주(淸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勤儉七旬樂泰平豈知今日隔幽明先天閱盡風霜㤼 寶迎忍故琴瑟情都是浮生萍草世如何此訣雪花城 歸路泉坮無後憾惟有賢孫永護聲 淸州后人 韓相大 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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