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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안복동(安福同)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一月二十五日 安福同 光緖三年丁丑一月二十五日 安福同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1월 25일 안복동(安福同)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7년(고종 14) 1월 25일 안복동(安福同)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돈지(頓池) 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명문(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賣買) 연월일(年月日)과 매수자(買受者), 매도사유(賣渡事由), 매도물(賣渡物)의 소재지, 양안상(量案上)의 자(字), 번(番), 결부속(結負束)과 두락(斗落)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매도인(賣渡人), 필집(筆執), 증인(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안복동은 흉년(凶年)이 들어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물려받은 논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돈지 전평(前坪) 가자답(嘉字畓) 3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8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안복동은 새로 작성한 문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문기(舊文記) 5장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안복동은 신문기(新文記)에 "만일 뒷날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안복동과 증필(證筆)로는 김병후(金炳後)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 선은동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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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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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一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當此荒年生活無路故勢不得己傳來畓伏在<지명>頓池</지명>前坪嘉字三斗落只所耕八負㐣價折錢文三十兩依數捧上是遣幷以新旧文五丈永永放賣於右人前爲去乎日後若有諸族中異言則持此文記考官卞正事畓主 <인명>安福同</인명>[着名]證筆 <인명>金炳後</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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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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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5년 부안현(扶安縣)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亥十月 日 李奎炫李洪善李昌善等 城主 乙亥十月 日 경남 함양군 [署押] 1개, [官印] 1개 7.0*7.0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5년(고종 12) 10월에 부안현(扶安縣)의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단자(單子). 1875년(고종 12) 10월에 부안현(扶安縣)의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이홍선(李洪善), 이창선(李昌善) 등 전주이씨(全州李氏) 일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들은 단자에서 자신들의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선산(先山)이 있으며, 수백년 동안 금양(禁養)해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신축년, 즉 1841년(헌종 7)에 대방촌에 사는 도백언(都百彦)이란 자가 선산의 단청룡(單靑龍)에서 20보가 채 안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어서, 이씨 문중은 관에 소지를 올려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하였다. 그 뒤 계유년, 즉 1873년(고종 10) 11월에 교촌(校村)에 사는 권병택(權秉澤)이란 자가 바로 앞서 무덤을 파낸 그 자리에 자기 부친의 묘를 몰래 썼다. 이씨 문중에서는 권병택에게 달려가 무덤을 파가라고 밤낮으로 요구했다. 권병택은 겨울에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우니 나중에 산을 구한 다음에 이장하겠다고 애원하면서 여러 차례 수기(手記)를 작성하며 다짐을 했다. 그러나 권병택은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기며 이장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이씨측은 부안현에 소지를 올려 권병택을 관아에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그러면서 권병택이 작성한 수기 2장을 점련하여 소지와 함께 관아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권병택을 데려오면 대질하겠다는 답변을 내렸다. 이 때 이씨측이 올린 권병택의 수기는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과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2"로 현전하고 있다. 이 단자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을해년으로만 나오지만, 권병택의 수기 등 관련문서를 통하여 을해년을 1875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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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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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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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0년대 부안현(扶安縣) 이하용(李夏容) 산도(山圖)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1840대 경남 함양군 [署押]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0년대 초에 부안현(扶安縣)에 사는 이하용(李夏容)이 제기한 산송(山訟)의 처리 과정에서 작성된 산도(山圖). 1840년대 초에 부안현(扶安縣)에 사는 이하용(李夏容)이 자신의 선산(先山)에 투총(偸塚)을 한 도백언(都百彦)을 대상으로 제기한 산송(山訟)의 처리 과정에서 작성된 산도(山圖)이다. 관련문서 "1875년 부안현(扶安縣)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 단자(單子)"에 따르면, 1841년(헌종 7)에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에 사는 도백언(都百彦)이란 자가 대방촌 후록(後麓)의 전주이씨(全州李氏) 선산의 단청룡(單靑龍)에서 20보가 채 안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하였다. 이에 전주이씨 문중은 부안현에 소를 올려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때 수령은 산도를 그려 형편을 파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도에는 도백언의 모친과 조모, 증조부, 고조와 고조모의 무덤이 그려져 있고, 이하용의 증조모와 증조부, 종증조, 고조와 고조모의 무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하용의 증조 무덤에서 도백언의 모친 무덤까지 66보가 떨어져 있고, 이하용의 증조 무덤 쪽에서 앉거나 서있거나 도백언의 모친 무덤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하용의 증조 무덤에서 도백언의 조모 무덤까지 26보 3촌이 떨어져 있고, 이하용의 증조 무덤 쪽에서는 앉거나 서있거나 모두 도백언의 모친 무덤을 볼 수 있다고 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 산도에 수령의 제사는 적혀 있지 않지만, 관련 문서에 따르면 도백언은 패소하여 무덤을 파간 것으로 나온다. 전주이씨 일족은 아마 증조대 이후 함양에서 부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도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3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七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七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3년(광무 7)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3년(광무 7)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6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7세 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8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7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하였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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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0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四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四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0년(광무 4)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0년(광무 4)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3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4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5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4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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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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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答南觀察 秉哲 號圭齋 十年握展乃在烟雲變幻之餘解境老涕尤不能自制於萍地喜歡緣中飯食纔畢飽德欲誦忽又朶雪繼存今慈之款注無窮不知所以報稱也 御扁雙擎奉覽龍章係是初睹歷代帝王家法書閱已多矣未聞晋祠之銘蟋蟀之篇有是西京古法欽玩百遍敻越千載奚止於一段鴨水 天縱之固當如是人工之妙特造神境又非俗諦凡觀所可窺測其萬一吾輩之得預於 奎文晠運亦歐吳諸人所未有耳不敢久留於旅次因伻恭還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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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4년 허주서(許主書)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 十二月初一日 許主書 文川政牙 甲申 十二月初一日 許主書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12월 1일에 허주서(許主書)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12월 1일에 허주서(許主書)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정무를 보느라 바쁘고 군적과 환곡 업무로 힘들 것이라며 자신은 아픈 중에 입성(入城)하였으나 새로운 병이 더해져 조섭할 길이 없으니 3천 민(緡)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피봉에 지난 달 보름에 서행(西行)하였다고 적었는데 허주서는 허성(許晟)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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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모년(某年) 홍판서(洪判書)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洪判書 洪判書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호위청동(扈衛廳洞)에 사는 홍 판서(洪判書)가 보낸 서간(書簡). 호위청동(扈衛廳洞)에 사는 홍 판서(洪判書)가 보낸 서간書簡)이다. 괴귀배(怪鬼輩)가 낙축(落軸)을 많이 만들었다는 말은 입격한 시지(試紙)에 모두 외(外) 자(字)가 있기 때문인데, 당초 고시(考試)할 때 통인배(通引輩)들이 입락(入落)을 누설할까 두려워 입격할 만한 사람은 모두 외자를 몰래 표시해 두었던 것이다. 탁방(坼榜)할 때 비로소 등제(等第)를 쓴다며 덕원(德源)의 김생(金生)이나 안변(安邊)의 7인도 모두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감영에 갔을 때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암표(暗標)였다는 것을 말하라고 하였다. 호위청동은 서울 중구 남산동 1가와 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남산동 2가에 조선시대에 궁궐을 지키는 일을 맡아보던 호위청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호위청골, 호동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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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22년 곡성(谷城) 오지리(梧枝里) 유학(幼學) 안사신(安思信) 등 통문(通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午二月十六日 安思信 梁宗成 朴文孝 等 機池 僉尊 壬午二月十六日 전남 곡성군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2월 16일에 곡성(谷城) 오지리(梧枝里)에 사는 유학(幼學) 안사신(安思信) 등 5인이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의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通文)의 초(抄) 1822년(순조 22) 2월 16일에 곡성(谷城) 오지리(梧枝里)에 사는 유학(幼學) 안사신(安思信) 등 5인이 남원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널리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공의(公議)를 모우자면서 기지방의 유생들에게 보낸 통문(通文)의 초안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나이 17세 때 부친이 고질병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라서 달여 드시게 하였더니 쾌차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어머니도 병이 깊어 구할 도리가 없게 되자, 박인필은 이번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처음처럼 회복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모두가 하늘이 박인필의 효행에 감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발문(發文)하여 공의(公議)를 모아 효자 박인필이 포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광식과 함께 통문을 작성하는데 참여한 사람은 양종성(梁宗成), 박문효(朴文孝), 양득룡(梁得龍), 송현수(宋顯洙) 등이다. 오지곡은 오늘날의 전남 곡성군 오지면 오지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련문서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로,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와 함께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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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答尹梣溪 飛樓百尺長橋十里半世此緣收圓此畫圖中雖使從前阡陌晨夕未必多此一勝況南北顚沛末路合尖又在於棠庇注之際婆心慈悲百福增益旣醉旣飽千里歸來蟄處田間是誰之惠以頌以感卽伏承台下翰如此雪如此寒從審崇樂体居神相曼禧伏庸頂溯第紱舃內移鬱林歸裝似已殼當能無餘惱亦無餘戀知樂玉簫之間似有田頭依依者如何如何戚下歸伏冠岳之下漁弟樵兄相對如夢逼年百感朝沸膓輪間不足爲外人道耳惠盛儀塞破冷廚感切切餘留別復不備惟伏祈迓祉遄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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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연도>辛卯</연도>十二月二十六日李生員前標右票事當此窮口卽<연도>己庚</연도>兩年結價辦出無路故督刷官收捧時勢不得已右前錢文貳拾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則來年九月晦內並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票告官憑考事票主 <인명>金希道</인명>[着名]<인명>崔德仲</인명>[着名]<인명>洪士玉</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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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연도>光緖九年癸未</연도>二月初四日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臨字十三斗落所耕三十卜庫果深字畓十二斗落所耕三十卜束㐣價折錢文參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並舊文五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論則持此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田湘玉</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田汝伯</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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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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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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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2년 김희도(金希道)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辰二月十七日 金希道 壬辰二月十七日 1892 金希道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2년(고종 29) 2월 17일에 김희도(金希道)가 작성한 표(票). 1892년(고종 29) 2월 17일에 김희도(金希道)가 작성한 표(票)다. 김희도는 공납(公納)에 급히 돈이 필요하여 25냥을 매달 5푼(分) 이자로 빌리면서 기한은 8월 그믐에 본전과 이자를 모두 갚기로 하면서 돈을 빌렸다. 만약에 기한을 넘기면 관에 고발하여 독촉해 받으라고 하였다. 당시 표주 김희도와 증필(證筆)로 김필문(金弼文)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임진년으로만 되어 있으나, 1888년에 김희도가 전답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문서 "1888년 김희도(金希道)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있어서 이를 통해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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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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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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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연도>壬辰</연도>二月十七日右手標事有公納緊急處錢文貳拾五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則八月晦內外本利備報是矣若過此限告官督捧爲乎乙事票主 <인명>金希道</인명>[着名]證筆 <인명>金弼文</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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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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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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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1년 김희도(金希道)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辛卯十二月二十六日 金希道 李生員 辛卯十二月二十六日 1891 金希道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1년(고종 28) 12월 26일에 김희도(金希道)가 이생원(李生員)에게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표(標). 1891년(고종 28) 12월 26일에 김희도(金希道)가 이생원(李生員)에게 돈을 빌리면서 작성한 표(標)다. 김희도가 곤궁한 처지를 당하여 기경(己庚) 두 해의 결가(結價)를 납부할 길이 없었다. 때마침 독쇄관(督刷官)이 세금을 징수하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이생원에게 20냥을 매달 5푼(分) 이자를 주고 빌렸다. 기한은 내년 9월 그믐까지로 하여 본전과 이자를 함께 갚겠다고 하였다.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으면 이 표를 관에 알려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신묘년으로만 되어 있으나, 1888년에 김희도가 전답을 방매하면서 작성한 문서 "1888년 김희도(金希道)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 있어서 이를 통해 작성연대를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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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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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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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46년 이하용(李夏容)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午 四月 日 李夏容李遠馨 咸陽 城主 丙午 四月 日 경남 함양군 [署押] 1개, [官印] 3개 7.0*7.0 3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6년(헌종 12) 4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산송소지(山訟所志). 1846년(헌종 12) 4월에 전라도(全羅道) 부안(扶安)에 사는 이하용(李夏容)과 이원형(李遠馨)이 자신들의 선산에 투총(偸塚)을 한 도백언(都百彦)을 잡아 가두고 관아에서 엄히 다스리는 한편, 무덤을 파내게 해달라면서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관련문서 "1875년 부안현(扶安縣)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 단자(單子)"를 함께 참고하여 살펴보면,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에 사는 도백언(都百彦)이란 자가 대방촌 후록(後麓)에 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선산(先山)에 투장(偸葬)을 하였다. 이하용이 올린 이 소지에는 작년, 즉 1845년에 도백언과 송사를 하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위의 이규현 단자에 따르면, 신축년, 즉 1841년(헌종 7)에 도백언이 투총을 하여 송사를 한 것으로 나와 송사의 시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 송사에서 도백언이 패소하였다. 도백언은 금년, 즉 1846년 2월까지 무덤을 파가겠다고 다짐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 뒤 부안에 살고 있었던 전주이씨측이 먼 길을 달려와 4월에 묘역에 와서 보니, 도백언은 여전히 묘를 이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씨측이 이를 문제 삼자, 도백언은 이 달, 즉 4월 27일이 임자(壬子) 공망일(空亡日)이니 이때까지는 반드시 묘를 파서 이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씨측은 이 말을 믿고 기다렸으나 도백언은 사고가 생겼다면서 다시 기한을 물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이씨측은 함양군수에게 소를 올려 법을 무시하는 도가를 관에서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는 한편, 속히 무덤을 파내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령은 도백언을 엄히 다스리고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그를 잡아 대령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위에서 공망일은 무덤을 열기 좋은 날을 가리킨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선택(選擇)〉에서는 공망일을 "임진(壬辰), 임인(壬寅), 임자(壬子), 갑술(甲戌), 갑신(甲申), 갑오(甲午), 계미(癸未), 계사(癸巳), 계묘(癸卯), 을축(乙丑), 을해(乙亥), 을유(乙酉)"라고 지적하고 있다. 전주이씨 일족은 부안의 선은동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런데 선조의 묘가 함양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증조대 이후 함양에서 부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도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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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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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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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2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六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2년(광무 6)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2년(광무 6)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5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6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7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6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 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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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98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二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二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898년(광무 2)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898년(광무 2)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4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1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3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2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4구로 기재되어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칸에 초가(草家) 5간(五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5칸임을 뜻한다. 1898년에 작성된 호적표에는 송일순 처의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있다.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송일순보다 1살 많다. 그러나 호적표에는 3살 적게 적혀있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與權彛齋 秋冬之際崇軆百福回身瞻斗海天茫芒目窮魂斷只有頂祝行莫醜於辱先其次關木索被菙楚受辱乃兩兼之四十日之間遭罹之如是慘毒古往今來之宙寜或有之耶千萬人皆欲殺一人獨憐之至意上薄層雲如剥消之中陽剛君子處於上九爲所承載雖此過盡大陸復涉重溟百轉千磨一縷之殘托庇尙存非只寘頑之甚於木石能支到今日也尙何言哉尙何言哉卄七登舟朝頗恬安早夙猛利船隨以波盪擧皆倉皇暈轉眩倒獨於船頭整暇無恙天吳海若亦寘之度外而然耶日出而放船夕陽泊岸如此不能預量濟人無不以爲北船飛渡來也無非 王靈攸曁耳初一到大靜得一校屬之家寓接厪能籬底紆飯於分亦過矣過此以往又未知何以銷受閏春及初夏連有亟肅似皆邀靑覽自入夏直到秋旬百日阻遽並與家書而不得見陸海之間截雖非異事不若同世並時伏問 崇軆送夏迎秋神葆曼福銼擾未卸大耐政月無他牽纏潭閤均吉大小悉佳區區詹祝無日不依斗勞勞累狀瘴癨三朔無以宜治任其窡熱之凌霍任冉過八十餘日眞元漸敗無餘食補藥補俱非可論肌肉盡脫不能坐穩床籍尻欲生瘡而安能久乎重之蟲虺從以惱之半尺之蜈蚣掌大之蜘蛛橫行枕席簷際乳雀日以警蛇皆北地所未見晦間經一風雨大刧瓦石飛舞空際大樹倒拔連根海濤黑立中作霹靂人皆並頭接膝互相抱持若不能自保者然此中人以爲甲寅大風後四十八年初有云病況以外而又所是經歷如是耳適聞有便敢申數字聊以告存存亦何北望神長大病以來心緖忽忽更覺孤寄無托卽奉 崇函溫存懷袖之間迴環口眼之際依付靑雲護身之呪辟病之符無以多焉第舊雨之感山河悲一字一淚書發恰爲百日秋事爛漫 崇體神毖葆安潭閤勻寜近頗辭煩就逸楸駕已定石役隨完歸晩之計亦得方便不勝引領羨艶知機息機乃能住世出世自昔名碩皆得辦此一着無所留難今時不然傀儡之繩牽住腦賚秋風蓴鱸未見有飄然遐擧者是所悶人若得一廛之借幸遂耦耕之約是夙生大願顧此坎窞中妄想未免瓮中一籌矣累狀間又第四姊噩訃猝次來到神爽飛越海天茫茫作何情事北信之來雖平安二字每執書惝怳況其親戚故舊存沒之感若是惱人似又魔揄鬼揶以此一境如戱本之遞相呈前明知是幻輒爲其苦樂悲歡所流轉穹則變變則通卽消息之至理而窮有未窮變有未變耶抑復消息一理今且無驗氣數主張一任其乖耶賤恙近又更作更止現是止時止不可恃每旁闖如荀穿于階無宜可問藥必何論重之全夏斷屠麥麻伏令如持戒茹素尙能支到今日非始料所及水泉果不住冬雪夏雨之炊亦或有之今夏特不早耳井有五里之遠汲運極難若鑿而得之如冲庵判書故事亦幸甚顧此篱底何處覘泉耶且邑在野中土性尤爲浮躁設有泉脉品必不好邑底所以無一井此又三百六十之所未聞山水公亦自邑移寓滄泉泉味亦勝又有水石可以盤桓此非如累狀所敢議到耳伏惟新元崇禧大吉窃伏計星籌恰滿六十挹此見丁之壽曜遙申載甲之吉祝曷任攢誦繼以君子盡老之歎又不能不悒悒去至臘之間船便久斷無去無來除前一日始伏承至月出書椷殆近六十日之久欣湊滿滿如接昨信逼歲客懷賴以爲重何啻九鼎大呂況參稏鼻煙連蒙便蕃貺仰托 崇庇服之以補元嗅之以禦瘴到底趙謝前冬蕪甫似皆達觀知無䲖鴻之訛遠外滋感輒復憧憧果能隨登韱年後承安又未知在何時目窮神消隣朞儵爾已過矣死生契活之怨覊祣淪諾之思感曜靈之急馭悼陳迹之易述露霜駸駸宿草緜緜言念古歡怛焉靡及晨夢苦短瞬息已非彼蒼何心吾道終穹腸輪欲摧想復勻之累狀居然三載于玆海天茫茫歲月騰騰靦然人面乎哉去魚鱉不遠尙又噉飰着衣凡百常人之事無不爲之此何人斯來敎之諄復敢不佩服血肉之軀凘削無餘日異而時殊雖欲竪起脥梁與造物者相支拄而以有涯隨無涯其可得乎卽聞家人定一螟嗣顧此坎窞屯邅之中亦獲門戶之喜非不爲幸父子無以相見父父子子之道于時亦窮矣高天厚地似此情理果有二哉言之無益以執事之故漫此相聞耳便回伏承五月旬間下復不過未一念之近信魿羽之迅速入海後初有也人於衰境四軆康强然後神仙富貴而無所憾程子於七十二年猶存忘生循慾之戒朱子有金丹遲暮之感叅同之註調息之箴每三致意風雨寒暑飮食起居節宣衛之衛亦存心養性之一端古昔賢人君子皆兢兢處至如不佞之懸祝於台下者又別有耿耿者在耳暵熱一直無旣內地亦頗爲騷云間或普洽耶伏問流躒如此 台軆神相百福檐卸則輕安桷脫則夫活從今台下之世界亦寬閒無碍但未知都下民情不以爲悵失如赤去乳耶允友喬蔭班彩紆靑最是開眼仰想一以感祝一以嘉悅同人騰頌尙復何旣累狀困熱困瘴特不再困於窡熱之病如去年直一石頑木寘而已蜘蛛蜈蚣依舊作苦且蠅甚朝澣之衣夕而如噴鴠夜則蜜蛟相仍無由成服又不知何㨾小蟲或赤或黑細若微塵利侔棘心銛比鋒尖互發交作枕褥之間血肉之軀爲渠家計詩所云憂心情情慍于瘴小遘悶旣多受侮不少者乃及於瑣細虫衆之微而無不侵凌宜其祚沆莗無所顧忌恣肆不已也亦復奈何入秋以還船信稍阻日夕懸懸卽於家伻之來伏承下函是不過卄餘日近信入海後未見其如是駛速蓬藋警咳不啻見似而喜者也陪京新莅緩帯輕裘可以養閒之局無非敗局妙境盡是噩境以今日兒樣欲別尋古人歌壺好處決不可得若歛足鏟迹則已旣混塵和光亦從此裏討去塗抺墁瓦之搘拄木+架楣之間亦無他策但此地異於他處至今一土壤之細一草木之微皆昔日恩澤其間毁畫之不足凘壞之不盡無復餘地是最凛然傷心不可以例視於近日弊局而止似多良工費得畧干心力處未成之耶通明如琥珀尺半之鯽腹腴如雪乳登盤食炞不叚舊觀而亦當下箸有無味者坡像豈料此圖之掛之壁也耶替作護身單隻托賴可以倚重亦崇注無處不周摯也拙字旣承遠索不敢違傲玆先以所思仰塵腕病氣餒不足爲大疋之供亟零鷄瓮並收於丹砂紫芝之間似或納汚矣冬後或來船而夻船極難便禠自致間活是悶是菀阻奉勻函爲一年之久畫前之墨森然自在生滅靡殊心之印澈孤南老宿似當證此古昔言情未有過於錦上之圖盤中之字卽皆梔蠟凡已發者難未發之中十之二三今以來函言之亦皆以睨柯矣然書到之時旁觀邊色欣欣相告海濤天風亦覺有喜氣盈滿溢旣宿之灰已黏之挐亦不能無起發如喚惺惺然以近日患節漸復点檢毫墨首尾累百言不異昔時其所起發者固有不同於旁觀寔在此不在彼也第伏審過境患度專是疾火此爲舊症非別新崇於六氣者但所外現隨境差異矣旣知痰火雖其百變無狀踈達導降之良方無庸藥蹃之歧貳至於克代之劑强壯亦愼況今望七高齡之老人乎似無待於區區之言嘗見黃元御藥方論大逆之症頗具詳有燥土降逆煖水熱火之法而藥方無見黃專是治張仲景孫眞舊訣能抉千載不傳之秘奧自河間丹溪以下並一切抹倒之譬如近日治經之家閰潛邱戴東垣大非俗醫掇拾入門回春以人試病者此也張仲遠世守黃法仲遠父子醫理極精以燥土降逆煖水熱火之法爲問得其藥方並聞現證要一良劑似好伏未知如何燥土降逆之法恐有相合處矣卸却重擔夫里閒裝逍遙林泉寔爲勝服淸凉幾劑然未敢知異能諧此否窃伏想稻脂流白蟹臍團黃園栗剝邜籬菊汎英郊坰風味可以不換亦可以沉疴祛体伏未知天氣沆瀏收潦水淸勻体候百福舊患愆度次第退聽近果舃紱間雲山適情伏庸懸誦不勝遠頌第江湖魏闕固無異同豈可色擧而相忘哉輪翼待輔監梅同和惟其隻歲孤調依恋彷徨賢勞於極艱之會者能無仲山甫之永懷耶耿耿於將去之憧憧於淹留之處正喜之又不能不勞勞者也書函在中秋以前奉攬在立冬以後山阻海淹邊是六七十日猶以爲近信傾注倒瀉若出望外以今時所得以傾倒者追溯其過厺境界蜀山千疊楚水萬迴膠盭汨潏於臅上或槎牙撑交或膏灼煎爍若不可以半晷堪住及其消破卽不過一寸之紙力反復一笑柳州之書惠州之牘亦皆以能如是消息之耶夏秋之間恩解如天休間無地老監鏡水無煩待賜居士潁尾獲遂如願窓中列峀枕下流泉䟽發臭區呈露眞面圖書整理杖屨貞吉山中宰相神仙移地引領攢誦詹戴靡及信後窡初勻軆候連享福楸駕樊御又隨以出入大吉區區慕祝尤切遠外耿誦之私口鼻舊瘥一以無减經年閱歲已極乖常又添眼花殆不辨天地間無非風火挾以瘴毒如是侵凌凡人之邊作云爲百事千端必待眼而發口障鼻障猶有不盡又此眼障竟又何報歟每蒙庇存之盛澤勉警之至意夙夜持戒邊靜体察不敢自弭不敢自怠以若頑命苟延一縷之殘式至于此日豈有他哉今又下敎申復丁寜天人倚伏之理患難邊忍之戒蓍黽必驗丹靑不渝惟是兩手握奉努筋着力立志彌堅執守益確進進不已罔或墜失但歲月堂堂疾病從而浸尋有涯無涯每不相待氣質弱昏抵當不得茫茫此寃奈何近者日下傳聞蹈舜攢抃窃伏惟大明中天雷開萬戶夏禹菲儉殷宗典學纘述祖烈敷宣晠化堯醲舜郁何以伏覩今日也乃玆聖簡特紆復入中書際會明良上下比螎匑匑於日贊之地蒸蒸於風偃之治仰答 天眷俯協群望至若雲山魚鳥有不可算到也前冬蕪函始於春後抵達云未敢知勻覽又在何時春事已過半峭窡尙有前冬臈後餘意此時体候茂膺百福閤覃一以吉安區區慕祝不任遠沈正喜以若病狀七十于玆其頑其宜轉益石木之甚亦不其何故火爍于鼻苔蝕于舌花翳于眼日日膏煎萬無以支過半晷惟願速卽溘然無知雖更過七年有何益哉其所至寃極痛者顧今 聖明鑑臨碩輔協相庶無一夫之不得其所獨此陰厓幽坎自阻於光天化日之下守關之虎豹自在入室之戈戟尙存設有長臂之援溺甘露之潤枯無以措施寃吁長號雲海茫茫亦復何哉適因家伻之婦妥便無以抛過畧以數字支眼窓明處厪此仰達聊申年後耿耿之悃私荒奕不成議悚汗透毫朝家大事今已完就樊上魚鳥亦似牽情出處進退尺寸裁定固當綽綽有裕非小人淺籌所可測窺吉甫穆如之誦不能不耿耿於仲山甫之永懷未知如何如何正喜病情乖甚今雖胃道稍通留侯之辟穀復能强倉閔仲之猪肝亦累安邑口曼餘祟又發於眼專是風火之無以制伏多年障毒交發互乘花翳障纈如在炯霧窟中人而黔晢糢糊飯之羹胾錯誤必有旁人指導然後能隨以作計平生所倚以爲命之書卷一以擱寘夜長如年待鷄如百蟄聞雷望晨如天下文明一日二日以之一月二月火煎膏爍雖不死心如第二羅漢恐無以消受矣下送靈稏有領不辭若固有之是何功德如非前貺之沾枯潤乾無以延此一縷之近頗罄乏又蒙繼廩之盛寘之不竭之原甘露灌頂之謝而已筆如二尖畫如雙权艱寫如此漫不成行轉轉悚蹙不備惟枕簟邀凉林泉換日石翠泉綠終非熖塵中物本自具萬斛淸凉今始吐氣跨景人亦收其功德䟽瀹神志咀嚼英華可以伐毛洗髓凌霄漢登仙梯此亦大哉時而君子以之非止爲一段流連光景已也近夜月色果好江間明月雖甚寥曠未有如山中明月全收二分每詹望願向若將希光追影而不可得忽伏承下書遠存尤不覺心與雲逝況伏審邇凉勻体候神相百福淸亨冲養隨喜自適無他牽礙頂頌無量以旁觀視之赤舃遲回有聊淹留之難龍蟄存神化之盛有非小量淺腹所可圭測烏足與議於大人境界也正喜煖觸尙今自在金火之交痰祟倍肆如秦楚無道弱國兵車無以抵當眼花又添却幾分左右交攻寔有頃刻之雪如得石泉一飮聊城一言之重菊辰舟申之期屈指恭俟敢不擔簦以從也餘窡亘抵臈下江擧又從以侵凌老坡之紙尾竹榻不足排悶党尉之羔酒淺斟亦非雅分朝冷呵手益覺佳節無憀但憶山中雪水試茗忽伏承下書夾之以美醞山肉非徒口趣太屠胃饞可鎭茆山道士脆脂銀榼卽一笨伯耳何等頂謝謹伏審夜窡駿奔餘勻軆度尙有前損之未卽淸和必須石翠嵐漪之間頤神養眞可以大滌舃底黃塵此事果不容易耶如正喜者實不耐米塩凌雜窃欲輕擧而不能辦矣正喜嗽症實賴泉力雖作蝸縮不至鱉咳殊可異矣二帖間從窓影細閱吐墨儘是奇品且其吳邦治所題筆法雅古可愛又鴻雪齋禇法神隨未知皆何等人耶天下至廣此輩皆無聞焉抑或偏方見聞之所未及而盛稱於江浙間歟何畵錄書譜不見一人也李卷靑綠愈見其渲染之神妙古人所云愛畵入骨髓者始可論於此等耳近於煙雲過眼處未嘗留着此心今不忍遽釋仰靳暫存是見獵之習氣耶恨無由對訂如山房雪几耳自峽而嶺是果大人境界耶泰山北斗匔屈下邑王亂諂象聊以逍逼相羊神龍或化蚕蠋須彌亦入芥子是又小大可齊理事無碍歟迂化無窮非人力所可杞定雖百變千幻閬風玄圃隨其所安不爲其所便是君子之立跟著脚不如衆人之蓬轉萍飃同流合汚也第其眼前之謠諑觀之 聖恩慈庇如天無極旁覩感激何況躬承 寵靈也伏未知何日蒼皇踰嶺莫接方便不異過境水泉亦淸爽風土亦馴擾歟風雲饕虐勻軆候百靈衛扶神旺健相無一毫損區區頂祝不能暫刻弭忽如釘着中如印印泥坡老之惠州未足衛公之厓州爲大亦復何計也古人之周易詞抄藥方皆不能無此消受處閒課漫興非爲一段遣悶而已白雲浮石之勝可以幽討而安文成之芳風可以煽遊塵周愼齋之魁將氣像至使苔壁劈窠之字制伏魅怪百世之下可以遡象其風采往昔可追像季可感發者尤不能自己頃於秋駕時亦選出江外大雨中聲信莫及聞在二日後已無以津逮於未前旋又作此行只有遙遙瞻望到抱川驛店得逢輿夫之過去者始伏聞九日始抵達之信過嶺以後無非所實蔭餘愛之地且頌且咏若可以托賴及到樂氏樓下及讀李校所藏書帖喜不自勝如詹歲新如逢花開不覺此身之流轉塞上況承勻宋於咫尺間妄有題識已爲呈覽云矣然以書尺往來無緣柹及懸懸於心中不料李校判維摩應到東坡界可知惠州之不在忝矣並奉書函一讀仰想包涵廣大無所滯芥無小稚之怨誹無楚騷之離憂蟬蛻濁穢之中蜉蝣塵埃之外此所以處坎益亨者耶何其感也佩之身邊作一大明之神呪太上靈符到底勻註感誦無窮已正喜阻二十八大水費三十日風雨抵此城東樺皮屋中厪能支柱殘軀忽自至後疸氣見於面後儼一黃面老曇無醫藥地自分必死又不知何緣回轉數日內稍稍褪黃面而鼎器已敗又何望也桐栢山中耦耕舊約恐爲山誚溪潮矣至如契活東貸西取來時厪能作行費仲季輩羽毛譙譙亦無以摸空判虛此地又荒不知到口者又何如又此殘年向誰乞怜誰又應之隨運騰騰而已姜生與鐵胥皆能奮身隨來而竭人之忠耶恩海恩山祝天祝聖同聲並誦竊伏惟王虯瑶象豈久於潭畔況魁杓一周天道循環自當有大刀頭協慶膺祥其間之暫遊小別人自藤葛於悲歡離合如蟻螻蛸蝡之微付光希影托庇大人境界與榮之幸仰挹勻注亦能生入玉門歸伏田間渙弟樵兄如續再緣是之叮嘱也掃到桐栢陰始逢兩弟獲奉勻信在北起程之日卽赤舃吉旋之時遙遙欣拱及抵田舍第二日又伏承下存非非想中尤不勝讚歎萬千萬千讚歎或從承覿而來者聞起居狀松栢堅貞金石無强今覩無心書果信然且伏審初寒勻體度神相康福過擧已銷善果日圓雲山得意塵襍退聽黍大局魚鳥勝侶逍遙徜徉天機自然似與樊上甲乙但未知臭味何如也區區正誦正喜新渥雖殊舊寃猶在不敢宥還而自處生人天乎天乎此何人斯此何人斯旣生還矣且伏奉䵝昧之恩諭監燭無餘雖卽日趨晋獲展勻覿以理以情無容少緩況山寺之敎若是鄭重隨方便敢不奉以周旋過咸登知樂亭詹覿山海崇深字甚奇壯昔蓮池朴尙强摘海字爲說是不曉隷法耳不覺啞然大笑退村二大隷强腕舃呈非以書爲也笔畫之間寓之屈伸之義庶蒙卽可工拙又不計也雖尋常小文字君子之所贈答朋友之所箴戒皆不有不寓戒古人原無徒作不然卽不過一玩物一俗師字匠何䙡焉乎哉雖博百鵝便復俗書耳拙字甚陋今以後免耳邇還以來㭗紆而憂毒危迫而蕉顇旣壓次之不掦又沈綿之不發心思忄+延?無由收檢手解緩莫得卷曲如騰空界如轉風輪拉繩墨而愈錯就矩矱而益舛懷中之字欲滅不思所以仰對冉冉綠陰之換世積旬過辰亦不自覺其頭上流變稽至于今設或有曲庇委諒道理義禘全不相屬孽子之任渠觸忤恨人之甘自違傲乃如是歟佛辰喜乾燥風弄陰勻体度葆衛百祉如微愼小極隨和隨鬯神健氣旺木火交承無所熏習伏庸額拱徐輔國間從門虛來頗說近候甚詳深加尉浣此召浮由南北得人遊褅令人歡羡如惠持之入定樹中回仙之北海蒼梧必有兩彩一賽誰能定其勝劣也正喜如舊木石去益乖瘏去益靡措始也汗漫之計月初卽理山裝圖躡後塵豈意腕晩差池山盟欲窡林嘲難解然尙擬可追於來者未敢知阮途之窮能果禽尙之緣耶嶺僧聖覃間因勻旨見訪與之數日消受於無聊㐾傺之中亦知其自大人境界來者有殊勝處耳餘不備長語十七年陰厓坎窞日月所不照鬱單之湖歟䟽屬之山歟何以與議於獻發新舊窃伏惟崇齡添籌勻嘏增籙有不得不翹首詹仰區區之私不嘏自顧影踧踖自阻第歲輪轉而月下弦聲塵渺渺上元之夕金生仲遊全亦平安兩字金又以勻什七言並附而來非非想中欣聳十丈捧讀回環江調老靑崍韻健碧大年稀有眞力彌滿古琴梅㿀老瓷秘色歲久時換之際愈覺精采殊勝不以躰逐相變境因物迁字字泛華嚴法界來是老坡一生受用遊戱三昧處熊熊之氣充滿於冰詹雪壁何異夜摩忉利直取肥膩雪乳之味也歲後之寒更甚可謂太昊守謙顓頊不廉舊丙奇寒今於一周尙復㱡㱡猶記雲從街上無人行者豈羌和日月簿亦如世間之謄錄前例不得已循迹俯就耶亦可異矣連空春雪忽憶江淸此時勻体候一向葆處曼康潭禧隨鬯凍鯉冷葅同登椒盤一以繾慮一以憬頌正喜不知何緣又抛一歲月容易如陶家輪至於生人之家常安否不暇計及第呌兄號此何日月一縷尙存甚於鷄肋甚於羊膓亦復奈何每擬一伻今日大着力呵凍毫委甫如此又寫銘放定稍見面目並以呈上更邀攬正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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