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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리(權五利)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권오리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오리(權五利)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권오리는 안동(安東)권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생(侍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가 어렸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星 遠自昌山華閥來江湖勝地別庄開蕙蘭古宅芬千載 松栢佳城土一盃滿世苦辛渾若夢根天仁善擧難收 誄詞未了重重緖殘雪斜陽不耐哀 侍生安東權五利 謹再拜 哭輓 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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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길(沈相吉)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심상길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상길(沈相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상길(沈相吉)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상길은 진주(眞珠)심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蘤 修文一夜鶴登仙痛矣吾林失若賢契事爭論 無秉牌社樽相對孰問筵靑氊詩禮傳家法大 耋頣期謝緣醺然幽明從此隔湖風樑月共 堪憐 侍下生眞珠沈相吉 謹再拜哭輓 {艹/靑+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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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李明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명규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명규(李明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명규(李明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명규는 전주(全州)이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의종제(誼從弟)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 교분이 두터웠던 사촌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雲 天命誰知只自然一生一死不何人蘭庭諸子難 忘際瑤月孤魂入夢頻殘菊丹旌當日淚白雲 古嶂四吋隣親朋多有先代小上帝招公望八年 全州后人 誼從弟 李明主 謹再拜 哭輓 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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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元年己亥</연도>九月 日明文右明文事有所用處<지명>仙隱洞</지명>後坪所在畵字傳來畓柒斗落只所耕二十負庫捧價壹百參拾兩右人前永永放賣而本無舊文券故以新文一張成給日後如有爻象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 <인명>金寬一</인명>[着名]證人 <인명>李致浩</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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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주원숙(朱元淑)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九年乙巳三月一日 朱元淑 大韓光武九年乙巳三月一日 朱元淑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1.2*0.7 1개(적색, 타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5년 3월 1일에 유학(幼學) 주원숙(朱元淑)이 백선(白仙) 후평(後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5년 3월 1일에 유학(幼學) 주원숙(朱元淑)이 백선(白仙) 후평(後坪)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주원숙은 백선 후평에 있는 윤자답(倫字畓) 9마지기, 부수(負數)로는 22부 2속이 되는 곳과 같은 윤자답 4부 6속이 되는 곳을 합하여 총 180냥에 팔았다. 주원숙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여러 해 농사지으며 먹고 살았지만 왕세(王稅)를 낼 길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논을 팔았다고 거래 사유를 적고 있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을 하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주원숙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주동진(朱東辰)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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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大韓光武九年乙巳</연도>三月一日 前明文右明文事傳來畓累年耕食是多可王稅辦出無路故勢不得已伏在<지명>白仙</지명>後坪倫字畓九斗落只所耕二十二卜二束果同字所耕四負六束㐣價折錢文㱏百八拾兩依數捧上是遣以新舊文二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以文憑考事畓主 幼學 <인명>朱元淑</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朱東辰</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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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記右手記事段孤哀生親山移入於<지명>大方村</지명>後<지명>扶安</지명><인명>李奎炫</인명>高祖山局內然當初入葬非永窆爲權厝事今此<인명>李奎鉉</인명>越來督掘勢將求山後移緬而以十月爲此之意成手記以給者<연도>甲戌</연도>三月初九日標主<인명>權秉澤</인명>[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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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八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八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4년(광무 8)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4년(광무 8)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7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처(妻),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8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9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8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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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十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6년(광무 10)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9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9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30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30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1구, 여 2구, 공합(共合) 3구로 기재되어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 칸에 초가(草家) 2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2칸임을 뜻한다. 1906년에 작성된 호적표에는 송일순의 아내, 아들, 며느리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있다. 또한 현존인구 항목에서도 송일구를 제외하고 기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4구로 기재해야 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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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윤치겸(尹致謙)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九月卄六日 致謙 文州政閣 甲申九月卄六日 尹致謙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9월 26일 윤치겸(尹致謙)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9월 26일 윤치겸(尹致謙)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편지를 받고 만난 듯하였다며 벼슬살이 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부모님 모시고 여전하다고 하였다. 낙폭지(落幅紙)를 보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낙폭지는 과거에 떨어진 사람의 답안지로, 대개 서울과 지방의 시소(試所)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보내면, 비변사에서 분배하여 변병(邊兵)의 지의(紙衣)나 군문(軍門)의 화전(火箭) 따위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윤치겸은 당시 안변부사(安邊府使)였으며 피봉에 자신을 학성리(鶴城吏)라고 적었는데 학성(鶴城)은 안변(安邊)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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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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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13년 사돈 설기순(薛紀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酉除月初十日 査下 薛紀淳 癸酉除月初十日 薛紀淳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3년(순조 13) 12월 10일에 사돈 설기순(薛紀淳)이 보낸 서간(書簡). 1813년(순조 13) 12월 10일에 사돈 설기순(薛紀淳)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세모에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받고 편안하게 지냄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다며 자신은 감기에 걸려 열흘을 보냈다고 하였다. 다만 서간의 앞과 뒷면에 모두 같은 내용의 서간이 실려 있는데, 년도는 계축과 계유로 각각 다르다. 아마도 연도를 잘못 써서 뒷면에 다시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피봉이 하나 더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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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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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10년 박용호(朴龍祜) 문과(文科) 홍패(紅牌) 고문서-교령류-홍패 정치/행정-과거-홍패 嘉慶十五年十一月二十四日 純祖 朴龍祜 嘉慶十五年十一月二十四日 1810 純祖 서울시 종로구 9.0*9.0 1개(적색, 정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합격하여 받은 합격증서.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합격하여 받은 합격증서이다. 합격 성적은 병과(丙科) 2인이었다. 39명 중에서 12위의 성적이었다. 홍패는 교지(敎旨)의 하나로, 국왕이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급제자에게 내려준 합격증이다. 홍패라는 말은 이 합격증서의 색깔이 빨강색이어서 나온 것이다. 반면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의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다. 합격증서의 색깔이 하얀색이어서 백패라고 불렀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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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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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32년 김상면(金相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辰元月小晦 金相勉 壬辰元月小晦 金相勉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2년(순조 32) 1월 29일에 김상면(金相勉)이 보낸 서간(書簡). 1832년(순조 32) 1월 29일에 김상면(金相勉)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지난번 위장(慰狀)을 받고 이제야 답장한다며 안부를 묻고 자신은 일이 많아 대접을 못하여 무정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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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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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癸卯</연도>十二月卄七日 前明文右明文事以要用所致自己買得伏在<지명>下西三玄洞</지명>後坪濟字太田三斗落只所耕三卜束㐣折價錢文三十兩依數捧上是遣以新文一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則持此憑考事田主 幼學 <인명>陳性圭</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張乃成</인명>[着名]旧文記中間閪失故未得出給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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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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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강재선(姜在善)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강재선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강재선(姜在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강재선(姜在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강재선은 진주(晉州)강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山 送云此日感私情曾與吾親甲契成甚偉衣冠違〔超〕 世態精通詩禮系家聲爲蘭無主春何晩湖月如人 夜自明一謝塵間多少事玉樓高處復題名 侍下生 晉州后人 姜在善 謹再拜哭輓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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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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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三年丁丑</연도>二月初九日前明文右明文事當此荒年生活無路故勢不得伏在<지명>下西面新基里</지명>前坪中字畓四斗落只所耕六負五束㐣價折錢文三十兩依數捧上是遣旧文㱏張果新文㱏張幷合二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他人中稱他言則以此文記告官卞呈之事畓主 幼學 <인명>黃道汝</인명>[着名]證人 幼學 <인명>金致鎰</인명>[着名]筆執 幼學 <인명>金少成</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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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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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同治十一年壬申</연도>九月十一日 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緊用處故自己買得<지명>扶下西頓池</지명>前坪嘉字畓參斗落只所耕捌負㐣價折錢文柒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一丈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弊則以此文記憑考事畓主 <인명>安深</인명>[着名]證筆 <인명>全云集</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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