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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락(趙鏞洛)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趙鏞洛 李殷弼 趙鏞洛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조용락은 유학자로, 다정한 벗이면서 함안(咸安)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華堂寂寂主何寜乃戴君今永永離明也雖分幽也會生而相樂 死而悲繁華互楡敦如許孤秀庭蘭慶不衰多少情懷今未敢 斜風那忍送靈輀 情契 咸安后人 趙鏞洛 慟哭再拜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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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김정범(金正範)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辛亥三月二十八日 金正範 辛亥三月二十八日 1911 金正範 전북 부안군 [指章] 1개, [着名] 2개 2.7*2.7 1개(적색, 정방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1년 3월 28일에 김정범(金正範)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11년 3월 28일에 김정범(金正範)이 부안군(扶安郡)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정범은 긴요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안군 일도면(一道面) 정지제평(定只堤坪)의 모자삼차답(慕字三次畓) 5마지기, 결부(結負)로 20부 5속이 되는 곳을 63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을 하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정범과 증인(證人)으로 강화옥(姜和玉), 오순권(吳順權) 그리고 그 외 선동이장(仙洞里長) 염도홍(廉道弘) 등 4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거나 인장 또는 지장을 찍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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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辛亥</연도>三月二十八日 明文右明文事有緊用處傳來畓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坪</지명>慕字三次畓五斗落新量結貳拾負伍束㐣價折錢文陸百參拾兩依數捧上是遣舊文一張新文㱏張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端則以此文憑考事畓主 <인명>金正範</인명>[指章]證人 <인명>姜和玉</인명>[着名]<인명>吳順權</인명>[着名]<지명>仙洞里</지명>長 <인명>廉道弘</인명>[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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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9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三年 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三年 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899년(광무 3)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899년(광무 3)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2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3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3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2세이다. 1년 전인 '1898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를 살펴보면 송일순의 아들 송방옥의 이름이 송진옥(宋秦玉)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1899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에는 송방옥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아들의 이름을 '송진옥'에서 '송방옥'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명(改名)에 대한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칸에 초가(草家) 4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4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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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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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01년 송일순(宋馹淳)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五年二月 古阜郡守 宋馹淳 光武五年二月 古阜郡守 전북 고부군 [郡守官印] 1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1901년(광무 5)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 1901년(광무 5) 2월에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 청량리(靑良里)에 사는 송일순(宋馹淳)이 작성한 호적표(戶籍表)이다. 호적표는 1896년(건양 1)에 공표된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 및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에 따라 각 항목을 양식화하여 인쇄한 새로운 호적양식이다. 호적표의 기재항목은 호주의 거주지, 주소, 이름, 나이, 본관, 직업, 사조(四祖)사항을 기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 거주지, 전입 시기, 동거친속(同居親屬), 가택(家宅) 소유현황 등이 추가되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양식에 맞춰서 인쇄한 종이에 각 항목을 채웠다. 호주(戶主) 송일순의 나이는 44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직(織)은 유학(幼學)이다. 호적표에는 호주의 사조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부친은 송진구(宋鎭龜), 조부는 송배(宋培), 증조부는 송규찬(宋奎燦), 외조부는 황영환(黃永煥)이다. 외조부의 본관은 홍주(紆州)이다. 송일순은 아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처(妻)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나이는 45세이고 아들 송방옥(宋榜玉)은 26세이며 자부(子婦) 흥성장씨(興城張氏)는 25세이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실제 거주자를 파악하기 위해 동거친속 뿐만 아니라 기구(奇口), 고용(雇傭) 인원까지 포함하여 기재하도록 했다. 고용 항목에는 남 1구(口)로 기재가 되어있어 송일순의 일가에서 남자 고용인 1명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존인구 항목에는 남 2구, 여 2구, 공합(共合) 5구로 기재되어 있다. 즉, 식구 4명과 고용인 1명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택(家宅) 항목을 살펴보면 기유(己有)칸에 초가(草家) 6간(六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기유는 가택이 본인 소유일 경우에만 기재하는 항목이다. 만약 호주가 거주하는 가택이 빌린 것일 경우 차유(借有) 칸에 기재하게 되어있다. 즉, 송일순이 거주한 가택이 본인 소유의 초가집이며 크기가 6칸임을 뜻한다. 송일순이 호주로 기재된 호적표는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작성된 총 9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 9년 동안 그의 거주지는 계속 고부군 궁동면 청량리에 머물렀으며,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고 처와 더불어 2대가 함께 살아가는 주거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손주는 이 호적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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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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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0년 박용호(朴龍祜) 시권(試券) 2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庚午式年 朴龍祜 純祖 庚午式年 朴龍祜 서울시 종로구 9.5*9.5 17개(적색, 정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전시(殿試)에서 작성한 시권(試券).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전시(殿試)에서 작성한 시권(試券)이다. 당시 과목은 명(銘)이었으며, 시험 제목은 인정문(仁政門)이었다. 시험이 열린 장소는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이었다. 이해 실시된 문과의 방목(榜目)으로 현존하는 것은, 『국조방목(國朝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貴 11655])이다. 이때 박용호가 작성한 시권의 오른쪽 상단에는 그의 인적사항과 4조(祖)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박용호는 응시 당시 33세로 유학(幼學)이었으며, 남원(南原)에 거주하고 있었다. 부친은 동관(東瓘), 조부는 천유(天由/乙), 증조는 시웅(時雄), 외조는 김대성(金大成)(본관 : 청도(淸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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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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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幼學臣朴龍祜年三十三本竹山居南原父幼學 東瓘祖學生 天曾祖學生 時雄外祖學生金大成本淸道一地 一地 一地仁政門銘幷序庚午式年 殿試文科丙科第二人望伏以有國於扶堯之東自箕子井田之畫而仁政始於是乎太平之人仁而治道休明屛箴几銘亦尙仁政故下至殿額門顔莫非一仁字取義而崇仁其殿敦仁其門也降及句濟羅麗仁之爲字便作了巋然靈光而猗歟我 聖祖胥宇于仁山之南信土維基智水維紀如天堯仁而三等其階發政姬仁九級其堂崇禮彰義無非其門熙政惠化無非其堂而于以取仁之涵則翼翼其亭于以取仁之興則巍巍其門也以至曰春曰化曰陽何莫非仁字中毅{急+殳}洩而况朝政大門尤不可以無名故特以仁政二字扁之意闢是門行是政浩浩其仁顧厥名思厥義藹藹其仁其仁爲元皷八方以元德其仁如春躋一世於春坮于斯時也孰不歸仁仁者壽而壽域其國也以是傳之神孫神孫肯搆以弼我丕丕基而不幸爲中年回祿之灾是仁愛之天警告我 仁聖殿下而欲使之又一初政也嗚呼成湯之仁而猶警其旱高宗之仁而亦警其雉俾殷祚便有二初而享其長久則今此殿門之再新亦一無疆之機也伏願留念於仁政二字一號一令如非其仁則曰是門何顔一政一事或非其仁則曰是額何義念玆在玆是處是廬爰里上仁坐以治之則我 東方億萬年廣居之休其將無窮期矣豈不盛哉臣亦有道治憂明之意思欲以一仁字仰勉矣今何幸進臣於仁政門之內銘以仁政爲 問敢不對揚其萬一哉臣謹拜乎稽首作銘曰仁統五常 行是二字政緫百爲 靡國不治猗我朝門 薰宮古制于以名之 明堂遺儀聖神相承 顧名思義俾作廣居 其可忽諸天籲重新 臣拜獻銘有光于初 上仁攸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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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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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5년 이규동(李奎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正月初五日 李奎東 朴正言 乙酉正月初五日 李奎東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1월 5일 이규동(李奎東)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1월 5일 이규동(李奎東)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뜻밖에 폄하(貶下)되니 놀랍다며 수레를 내린 지 얼마지 않아 이런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새해를 맞아 상대방이 잘 지낸다니 위로가 된다며 자신은 허다한 시끄러운 일로 괴롭다고 하였다. 수일 뒤에 만나러 가겠다고 하였다, 이규동은 1824년 3월 덕원부사(德原府使)에 제수되었고 10월 그의 아버지 병 때문에 임소로 돌아가지 못해 개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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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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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10년 박용호(朴龍祜) 강서채점지(講書採點紙)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朴龍祜 1810 朴龍祜 서울시 종로구 [署押] 8개 8.5*5.0 10개(흑색, 장방형)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복시(覆試) 초장(初場)에서 작성한 강서(講書) 시험의 채점지.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복시(覆試) 초장(初場)에서 작성한 강서(講書) 시험의 채점지이다. 문과 응시자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지식을 구두로 시험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 문서이다. 7명의 시험관이 각자 채점한 뒤에 이를 수합하여 성적을 매겼다. 당시 박용호가 강을 했던 과목은 주역(周易), 서전(書傳), 시전(詩傳),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으로, 채점지에는 그가 강을 했던 책의 해당 부분과 성적이 매겨져 있다. 박용호는 이 시험에서 총 4분반(分半)의 성적을 얻어 합격하였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응시 당시의 거주지는 남원(南原)이며 당시 3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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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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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蘤惟公天賦素寬仁每對愚生善諭諄八耋光陰經石火百年浩㤼嘆彫輪遨遊世外郡仙籍幻脫人間下界塵種德高門 餘慶大子蘭孫竹蔭長春 契下 生 <지명>江陵</지명><인명>金喆起</인명>謹再拜哭輓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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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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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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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수(琴昌洙)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琴昌洙 李殷弼 琴昌洙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금창수(琴昌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금창수(琴昌洙)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금창수는 유학자로, 본관은 봉성(鳳城)이다. 그는 자신을 계하생(契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계하생이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계하생이라고 하였으니 금창수는 망자에 비해 나이가 어린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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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時經學襲前人夙夜乾乾守本眞落落巖崖肥遯屋悠悠天地不辜身發蒙啓鈍功千載講道論文業九旬豈意東風驚木稼南州諸子淚沾巾 契下生 <지명>鳳城</지명><인명>琴昌洙</인명>再拜哭 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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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행(趙敏行)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趙敏行 李殷弼 趙敏行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민행(趙敏行)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민행(趙敏行)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에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 두 수와 사언시(四言詩)가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조민행은 유학자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그는 자신을 문하생(門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문하생이란 어떤 스승의 아래에서 배우는 제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은필과 조민행은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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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誨函筵問幾時泫然掩袂哭吾私詩書滿架依如昨杖屨乘風香莫追齒德俱尊光輩仰音容永閟後生悲茫茫大夜今何世一曲薤歌和子規公年九十縱云多恨未聖朝天爵加丹旐斜陽何處去風烟依舊繞安窩平日多薰炙至今佩訓言三尊德莫盛百行孝爲源懿範稱隣里嘉謨戒子孫九原難復作澘淚滿眶痕景仰今無地臨風有淚澘悠悠人事變丹旐向靑山 門下生<지명>漢陽</지명><인명>趙敏行</인명>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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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명(崔圭明)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圭明 李殷弼 崔圭明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규명(崔圭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규명(崔圭明)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규명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원문 텍스트 海岳巉巖鏡水淸千年奇稟鍾人成寬仁性度吉天賦灑 落襟期不世情沸畜詩書傳世業試將琴酒樂平生輀歌 今日嗟何去夜色蒼凉片月明 侍下生 臨瀛 崔圭明 謹再拜奉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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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창섭(權昌燮)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權昌燮 李殷弼 權昌燮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권창섭(權昌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권창섭(權昌燮)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권창섭은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자신을 고종형(姑從兄)이라고 적고 있는데, 고종형이란 나이가 자기보다 위인 고종사촌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창섭은 망자와 사촌지간이며 망자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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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로(李經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이경로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경로(李經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경로(李經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경로는 완산(完山)이씨의 후손으로, 자신을 시하생(侍下生)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문 텍스트 松 昌山華閥大瀛東詩禮䋲䋲述世風勤儉規模承泩 古桂蓮猷徽出衆中天心難測舟移壑人事靡常夢 若空執彿春山鵑泣血緬懷前躅淚盈瞳 侍下生 完山后人 李經魯 謹再拜 哭輓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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