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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堂開基祝文(吳東洙) 聳珍爲山特秀南域洞府幽勝泉石澄澈天飜地覆先生遁入人視金華義同雷岳講學授徒用扶道脈山頹樑折倐忽年十安放之痛久而益切儼然遺像尙奉櫝積思欲揭虔巨事綿力爰自士林公議齊發今夏之初乃設工役羣匠奔走竣功不日預卜其基精舍之側有拘於倭事至中撤再入虎穴終爲得復乃招郢斤復事木石開拓定礎以施畚鍤吉涓虔籲牲腯醴潔神其保佑永世無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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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安祝文(吳東洙) 恭惟先師後石先生天資渾厚氣像偉傑事親盡孝從師問學已自早年識博志確沈潜經傳從容禮法道純學正儒門推服剛大之氣賁育莫奪若在王朝臨難盡節運値百六彼金嚴斥謹依春秋入山戴白秉執大義秋霜烈日五年石門十載珍岳金華布冠遼東木榻摳衣之士于于入室講明聖學扶植陽脈山頽以後吾道將絶士林之慕愈久愈切摸冩眞像敬藏櫃櫝薖軸之地草樹含馥遺躅完在爰建影閣爲時阻搪事至中撤多少頡頏百見沮喝在吾先師何損盛德奉安之議曾所累發尙有餘悸遷延歲月今涓吉辰於焉虔揭嚴毅和溫若侍函席精爽洋洋于玆降陟山高水淸永保千百一?一豆我享謹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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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鄭榕源 繼往開來學師存道亦存嗟何今日晩復見聖賢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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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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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72년 신옥년(辛玉年)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一年壬申九月十八日 辛玉年 同治十一年壬申九月十八日 辛玉年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2년(고종 9) 9월 18일에 유학(幼學)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2년(고종 9) 9월 18일에 유학(幼學) 신옥년(辛玉年)이 부안현(扶安縣) 상동면(上東面) 상리(上里)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신옥년은 급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상리 전평(前坪)에 있는 주자답(珠字畓) 5마지기, 부수(負數)로 9부 5속이 되는 곳과 화곡(禾穀) 2석(石)을 합하여 18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를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시끄러운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신옥년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하지 못했으며, 증인(證人)으로 유학 성효(聖孝)가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 말미에 상리 전평 김명여 7마지기 문권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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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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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6년 박용호(朴龍祜)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戌 三月二十二日 朴龍祜 興陽政閣 丙戌 三月二十二日 朴龍祜 전북 남원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6년(순조26) 3월 22일 박용호(朴龍祜)가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6년(순조26) 3월 22일 박용호(朴龍祜)가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객지에서 부인상을 당해 침통하고 매우 슬플 것이라며 벼슬살이 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상대방의 체귀(遞歸)가 언제인지 물었다. 자신의 친산 면례(緬禮)는 다음 달이고 산지는 곡성인데, 편의를 봐 주도록 곡성현감에게 편지 한 장 써달라고 하였다. 감영(監營)을 오갈 때 남원을 경유해야 하니 미리 알려준다면 중도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흥양현감은 조경진(趙璟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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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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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10년 박용호(朴龍祜) 시권(試券) 1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朴龍祜 1810 朴龍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작성한 시권(試券). 1810년(순조 10)에 박용호(朴龍祜)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였을 때 작성한 시권(試券)의 하나이다. 시권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책문(策問)에 대한 답안의 일부로 추정된다. 박용호는 이 해 식년문과에서 병과 2인의 성적으로 급제하였다.(12/39)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응시 당시의 거주지는 남원(南原)이며 당시 3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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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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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23년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未臘月初十日 從兄 震祜 癸未臘月初十日 朴震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못본 지 여러 해라며 객지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의 아들은 예산 조씨(趙氏) 가문과 혼인을 정하였고, 선조의 문집 등 두어 가지 일은 종의(宗議)를 물어서 해야 하며 능행(陵幸) 때 힘써 보려 하는데 거둥 날짜를 정확히 모르니 통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은 복과(覆科)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하였다. 박용호가 외임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쓸쓸하다고 하였다. 박진호의 아들은 박규서(朴奎瑞)로 1825년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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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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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모년(某年) 고정(考亭)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至十八 淳 校洞 靜案 庚至十八 淳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경(庚)자로 시작하는 해의 11월 18일에 고정(考亭)에 사는 이름이 순(淳)으로 끝나는 아무개가 교동(校洞)에 보낸 서간(書簡). 경(庚)자로 시작하는 해의 11월 18일에 고정(考亭)에 사는 이름이 순(淳)으로 끝나는 아무개가 교동(校洞)에 보낸 서간(書簡)이다. 세모에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편지를 받고 위로가 되었다며 자신은 추위에 두문불출하고 있고 숙부의 장례를 치러야 하고 추위가 심하니 시사(詩社) 모임을 다시 정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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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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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貳拾參年癸卯</연도>十一月初六日<인명>辛寬一</인명>前明文右明文事段切有要用致故傳來是果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坪深字畓拾貳斗落只所耕三十五負八束庫果又二負四束庫乙折價錢文壹百八十兩依數捧上爲遣舊文記四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子孫中雜談之弊以此文記告 官卞正爲乎乙事畓主幼學<인명>辛寬億</인명>[着名]筆執幼學<인명>金洪說</인명>[着名]證人幼學金源黙[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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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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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2년 김재후(金在垕)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貳拾貳年壬寅十一月十九日 金在垕 道光貳拾貳年壬寅十一月十九日 金在垕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42년(헌종 8) 11월 19일에 유학(幼學) 김재후(金在垕)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42년(헌종 8) 11월 19일에 유학(幼學) 김재후(金在垕)가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재후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 심자답(深字畓) 12마지기를 1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3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분란이 있거든 이 문서를 관(官)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김재후와 증인(證人)으로 유학 최상진(崔相鎭)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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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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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연도>道光貳拾貳年壬寅</연도>十一月十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傳來是果伏在<지명>一道面定只堤</지명>下坪深字畓拾貳斗落只所耕參拾伍負捌束庫果貳負肆束庫乙折價錢文壹百九拾兩依數捧上爲遣舊文記三丈並以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紛紜之弊則以此文記告 官 卞正爲乎乙事畓主幼學<인명>金在垕</인명>[着名]證人幼學<인명>崔相鎭</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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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83년 전상옥(田湘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九年癸未二月初四日 田湘玉 光緖九年癸未二月初四日 田湘玉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3년(고종 20) 2월 4일에 유학(幼學) 전상옥(田湘玉)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3년(고종 20) 2월 4일에 유학(幼學) 전상옥(田湘玉)이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전상옥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한 부안현 일도면 정지제(定只堤) 아래 임자답(臨字畓) 13마지기와 심자답(深字畓) 12마지기를 총 32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구문기 5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면서 나중에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전상옥과 증인(證人)으로 유학 전여백(田汝伯)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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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竹五十七年非壽春悠悠仙駕化玄塵人間此恨還塋地一曲薤歌淚沸巾<지명>全州</지명>后人 <인명>柳道吉</인명> 謹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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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욱(金鎬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鎬旭 李殷弼 金鎬旭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호욱(金鎬旭)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호욱(金鎬旭)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호욱은 유학자로, 일선(一善)의 후인이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원문 텍스트 一寄一歸於理眞光陰如客夢中新更途床瑟前生樂 永植庭蘭三朶春高山流水過時景急兩烈風去路塵百 年人事虛無理薤露歌聲散四隣 一善后人 金鎬旭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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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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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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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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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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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이정규(李正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李正圭 李殷弼 李正圭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이정규(李正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이정규(李正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이정규는 유학자로, 이은필과 뜻이 통하였던 종제(從弟)이다.○ 원문 텍스트 頻病誰止病已連當時欲別更難言嗟我哀惝 如許異先人厚誼績相侍問來摠不尋常淚老去 尤愁望八年門外千山何處近琳宮好友是眞緣 全州后人 誼從弟 李正圭 謹再拜哭慰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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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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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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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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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김동식(金東植)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東植 李殷弼 金東植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동식(金東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동식(金東植)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동식은 유학자로, 경주(慶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七拾餘年病已成訃島啄啄諸家驚若有天堂 何畏死歸於地下不如生相貌賓客悲含淚還住 輀旌獨去惝一盃樽酒東門外哭送尊公萬里程 慶州后人 生 金東植謹再拜哭慰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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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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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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