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재가 농암 김공 창협 에게 준 편지 畏齋與農巖金公【昌協】書 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 공의 사적은 《북관지(北關志)》에 적혀 있다네. 대개 임진왜란을 당하여 진보(鎭堡)의 반란병들이 수령과 장수를 앞 다퉈 결박하고 온 성안의 사람들이 왜적을 따랐으나, 정공은 경성(鏡城) 어란리(禦亂里) 어느 유생의 집에 숨어서 제생(諸生)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반란의 역적을 죽이고 왜구를 토벌하였으니 관북이 마침내 평정되었네.그 당시 방백(方伯)이란 자는 쥐처럼 숨어 다니면서 목숨을 건졌는데, 정공이 낮은 벼슬로 큰 공을 세운 것을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알리니 난리에 참여했던 군사들이 한 명도 고신을 얻지 못하였네. 이에 백성들이 분통을 터트리고 탄식하면서 왕의 일이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네.선친이 손수 초를 잡은 두어 장의 종이가 집안에 보관된 문서에서 발견되었기에 내가 이로 인하여 방백 노봉 민 상공에게 품의하고서 어란리에 사우를 세워 정공을 제사지내고 의사 네 사람으로 배향하였네. 또한 사당의 곁에 서당을 세워 마을의 제생들이 학문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서 촉룡(燭龍)으로 명하였네. 조정에서 서원에 창렬(彰烈)이란 현판을 내렸는데, 내가 또 사지(祠志)를 만들어 보관하게 하였네.원컨대 중화(김창협의 자)가 이 지역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사원을 찾아가 제생들을 불러 보며, 서원에 폐지되거나 그만두는 일이 생기면 힘을 다하여 진작시키게. 훗날 북관에 변고가 발생한다면 지방민들에게 권면되는 바가 있을 것이며 나라가 이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故評事鄭公文孚事蹟, 付于《北關志》。蓋當壬辰之亂,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鄭公投匿鏡城禦亂里儒生家, 與諸生共起義兵, 誅叛賊討倭寇, 關北卒就平定。而其時爲方伯者, 鼠竄偸生, 忌鄭公以小官立大功, 反實以聞,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云。先人手草數紙, 見遺於家藏, 故余因此稟議于方伯老峰閔相公, 建祠宇於禦亂里祀鄭公, 以義士四人配之。又作書堂于祠側, 爲里中諸生肄業之所, 名以'燭龍'。朝廷賜祠額曰'彰烈', 余又爲祠志, 以藏之。願仲和入其境, 先訪此祠, 招見諸生, 事有廢墜, 爲致力而振起, 他日關北有變, 土人有所興勸, 而國家可從而得力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