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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김택(金澤)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武城書院儒會所 李斯文 全州鄕校(흑색,직방형, 7×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4년 8월에 무성서원유회소 진사 김택 등 7인이 이 사문에게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실 건물의 도감동으로 임명하므로 협력하여 완공할 것을 청하는 통문 1924년 8월에 무성서원유회소(武城書院儒會所) 진사(進士) 김택(金澤) 등 7인(人)이 이 사문(李斯文)에게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영정(影幀)을 모실 건물의 도감동(都監蕫)으로 임명하므로 협력하여 완공할 것을 청하는 통문이다. 면암 최 선생의 충의(忠義)와 도덕을 우리 사림 모두가 흠모하고 본받으려 하였으며, 선생이 대마도에서 임종한 후 도내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태산읍(泰山邑, 현 전북 정읍시 泰仁面)의 옛터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베푼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몇 년 전에 총독부(總督府)에서 면암의 영정을 철거하고 향사를 금지하여 처량한 원우는 학교로 변하였으니 유학자들이 모두 개탄하였다고 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영정을 환안(還安)하고 향사를 복구할 뜻을 당국에 여러 차례 연명하여 올려 다행히 총독부에서 영정 환안과 향사 복구를 특별히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1922년 9월 8일에 우선 영정을 무성서원 강수재(講修齋)에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올해 여름 무성서원의 동쪽 터를 닦아 지금 건물을 세우고 기와를 얹으려 한다. 이 사문이 면암 문하의 제자라고 들었으므로 이번 유회소 회의 때의 공의로 도감동 임무를 천거하여 망첩(望帖)을 올리니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완공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855년(철종 6)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민씨 일파를 비판하다 제주도로 유배된 후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을 걸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고 1906년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기우만(奇宇萬)의 협조를 얻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단식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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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函右敬啓者伏以 勉菴崔先生忠義道德凡我士林孰不欽慕矜式哉 先生馬島易簀之後道內士林之公議歸一建祠于泰山邑之舊址春秋設享已過十餘星霜矣不意年前自緫督府撤去影幀禁止享祀凄涼院宇變爲學校冠儒服儒孰不慨嘆乎厥後士林等影幀還安享祠復舊之意累次聯名張書于當局矣何幸一線陽脉復明於群隂之中自該府影幀還安享祠復舊特許故去壬戌年秋九月八日影幀爲先權奉于武城書院講修齋今年夏間武城書院東垈上修基方今建設盖瓦也而非推出慕賢衛忠之誠豈可告切乎仄聞座下卽先生之門弟子故今番儒會時公議均符以 座下都監蕫之任薦望故望帖修呈望須同心協力以完竣工之地千萬敬要右敬告于李 斯 文 座下 甲子秋八月日 武城書院儒會所 進士金澤 閔泳碩 崔永大 幼學主任權在一 金煥豊 司勇林炳昱 敎官金成基[○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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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郡 本村面 日谷里盧軫永氏親展(피봉_뒷면)光州郡 光州面 楊林里 一五七番地崔相鉉(簡紙)謹拜審新元貴體節萬安, 仰頌區區. 生依劣已耳. 就告 貴族盧光明君勸送于貴邊, 是望耳. 有所議事中, 生若直接請座, 似或不應,故如是替告耳. 餘留, 不備上.戊辰正月十四日, 生 崔相鉉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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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郡 本村面 日谷里盧 軫永 氏(피봉_뒷면)光州郡 光州面 楊林里 一五七番地崔 相 鉉(簡紙)謹更惟日來貴體萬安하심을 仰祝이오며 小生은 多蒙愛護하와 一如前樣ᄒᆞ니 伏幸이오다. 就告, 道評議員選擧時에 小生의 名義로 投票하여쥬시긔를 敢請하오니 雖曰無慮이오나 然而特垂愛護中更加贊成인ᄃᆡ 豈非謀忠上積陰乎? 餘日后面拜次 不備謹上.丁卯元月十五日, 小生 崔相鉉 拜. [圓形朱印: 崔相鉉]盧 軫永 氏(名啣)崔相鉉최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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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本村面 日谷里盧 軫永 氏宅親展(피봉_뒷면)光州郡 坪底里金炳周戊辰陰二月十四日 星煥持參稽(簡紙)昭和三年 參月 四日 光州驛前 罪弟 金炳周 二拜疏上盧軫永 殿稽上拜言. 書候積年情仰葛極. 謹詢仲春,侍體候隨序萬重, 大少寶閤均寧, 溸仰區區, 誠祝不任. 罪弟昨秋嚴親之別世後, 仍罹病魔矣. 近纔奏効, 幸須煩陳. 就悚, 每以煩說累貽, 實爲不安莫甚. 久未得出入中, 且以病魔這間受困, 一不成言, 這間整理書件不少, 爲先多少之所費至急, 故想仰吾兄之高誼, 鄙兒星煥, 玆敢冒廉仰告, 金五拾圓, 某條另念周旋 惠借, 則閏貳月末日當晋拜完還矣. 幸垂 大惠千切企切企耳. 餘略此, 不備謹疏上.追伸, 昨秋訃告, 幸以傳覽否? 前記畧仰告, 姑未盡皆充數, 依其 吾兄之可及的周旋, 多少間使爲補給, 若何若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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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22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22년(순조 22)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1통 2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55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47세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며, 증조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14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개자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1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묘호구상준(己卯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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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25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25년(순조 25)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58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50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17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개자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22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임오호구상준(壬午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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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김성인(金聖仁)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羅州牧使 金聖仁 牧使<押> 羅州牧使之印(7.1x7.1), 周俠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789 1828년 나주목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한 준호구 1828년(순조 28) 나주목(羅州牧)에서 호주 김성인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로 열서(列書)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성인의 거주지는 나주목(羅州牧) 하의도(荷衣島, 현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어은촌(於恩村) 오가작통 순번 제2통 6호이다. 직역은 한량(閑良)이고 올해 나이는 61세 기축생(己丑生)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성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한량 필봉(弼逢), 할아버지 한량 상건(尙巾), 증조(曾祖) 한량 연백(延伯), 외조(外祖) 한량 김절순(金節順) 본관은 김해이다. 김성인의 아내 박씨는 나이 53세 병신생(丙申生)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씨의 사조는 아버지 한량 득대(得大), 할아버지 한량 경한(敬漢), 증조(曾祖) 한량 계춘(桂春), 외조 한량 임춘봉(林春逢) 본관은 나주이다. 이외 가족 구성원으로 아들 달오(達五)가 있으며, 나이 20세 기사생(己巳生)이다. 문서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및 주협개자인(周俠字改印)이 찍혀있으며, 1825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을유호구상준(乙酉戶口相凖)'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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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阻之餘 星皓來訪 欣倒之狀 難以形喩 謹詢審仲春靜棣候連向萬重 渾節均穩 慰賀區區 實愜願言弟慈省每多欠損 且以室憂近旬彌留 上焦下悶 實難盡免 令伯氏丈聞作達行云想已返旆 而果無損節耶就聞茅坪辛友家有閨節 而卽兄甥侄女也 從侄方當醮而姑無定處 兄其極力周旋 期於必成如何餘在星從已傳 不備伏惟戊午二月十二日弟金極永拜手【피봉】玉山 靜座 執事坪城謹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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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春數宵行誨 殆若夢境 而逢秋懷事 尤切耿頌 謹未審比來靜中棣候連護 大都均穩耶 區區溸仰 實勞遠忱 弟省節長時欠寧 焦煎難狀 而兒輩姑無頉是幸 今年農形到處被荒 而聞貴鄕尤甚云 爲之代悶 咸氏兄會事 聞見屈云爲之代憤 而伯氏丈垂暮之境 春秋科事 未見其成 尤爲憤歎而已 從侄婚事 姑無定處 是悶那處云事 已至發說云 近果快諾耶 婚節已届 須更爲通奇以未寒前成事如何 雖留此漢數日 以爲詳探回示 切企切企 令允婚事有定處耶 弟亦發說於一處矣尙無回報 是悶是悶 餘撓甚不備禮戊午陽月初吉 弟金極永拜木花十五斤送上 助用於寒具如何【피봉】玉山 靜座 執事入納坪城謹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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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落落相居 便風莫憑 瞻咏方切 匪意獲拜惠札 謹審秋涼侍候衛重 區區慰仰 不啻尋常 弟三夏經過 困暑昏頓 餘症尙爾 逢秋未蘇 自是衰相 奈何 第旣帶院 一番行公 勢當不已 而且聞○享礼旣在科後 且其時節候 寒暖適宜 擬欲趍進 而盖此行只係不病無故 則當者亦不能自期則 院中亦不必預待 第當其時如有可圖之勢 則當自此治發而 可除院隸一番徃來之弊 ■(而)〔以〕是俯諒 如何如何節儀各種依到 而虛帶任名 坐受例饋 亦甚不安耳 年事此亦幷被虫旱之損 發穟差晩 人情惶恐實非細憂也餘漏萬略此不備 伏惟尊照 謹謝狀乙巳八月八日 沈宜朝 拜(皮封)玉溪○侍座執事東谿謝狀 [着名] 拜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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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稽顙言新媾之地阻悵 倍多耿結 況此葭蒼露白之節乎 伻來○書足以慰阻懷饋足以飽衆口也 感喜曷量 因謹審嘉排節大庭棣體候 連護康旺晨昏餘友體事湛重 寶節均休 婦阿近樣 雖不及書末 其在蒙○庇 可知善度耳仰慰區區 實叶哀禱 査弟罪人 節序之感 未逮之痛 際此難堪 惟幸伯仲相支餘集別無告警耳 ○節儀値此大無 何如是過念也 空箱還送 旋切愧汗 歸武立促 餘萬不備 謝䟽壬辰八月十三日 査弟罪人 安文煥 再拜(皮封)佳仁 査兄 侍棣座 回納臨皐謹謝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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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년 안엽(安曅)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安曅 査頓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633 무신년 7월 7일에 범농 안엽이 머슴이 없어 직접 농사짓고 있는 옥산의 상대방에게 경강의 말을 인용하여 고취시키고, 상대방의 조부 적취 공이 주자어록 중에서 직접 쓴 24자에 대한 견해 등을 전한 간찰 무신년 7월 7일에 범농(凡儂) 안엽이 머슴이 없어 직접 농사짓고 있는 옥산(玉山)의 상대방에게 경강(敬姜)의 말을 인용하여 고취시키고, 상대방의 조부 적취 공(滴翠公)이 주자어록 중에서 직접 쓴 24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 등을 전한 간찰이다. 해가 소년처럼 길어졌으니 우리 유학자들이 공부할 때라는 내용, 근래 상대방과 그의 부모 안부를 묻는 내용, 머슴 자리가 비어서 상대방이 몸소 밤낮으로 부지런히 김을 매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계를 꾸리는 것이라는 내용, 요임금은 수척해지고 우임금은 살에 굳은살이 박혔으며 주공은 안일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려 지극한 정성이 쉼 없이 태화 원기(太和元氣)와 함께 유행하니 천리(天理)가 나에게 있으므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 노(魯)나라의 재상 공보 문백(公父文伯)의 어머니인 경강이 말한 '사람이 고되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면 선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요, 안일하면 음란해지고 음란해지면 선을 잊고 선을 잊으면 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비옥한 땅에 사는 백성이 재주가 없는 것은 음란해서이고, 척박한 땅에 사는 백성이 의(義)를 좇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은 고되기 때문'이라는 이 말은 참으로 영원토록 규방(閨房)의 으뜸이다. 상대방이 부지런히 일하고 수고로움을 익히는 것 또한 이 훈계에 감복함이 있어서라는 내용, 상대방의 조부 적취 공(滴翠公)이 손수 쓴 주자의 말 24자는 경계를 보인 것이 지극하니, 크게는 천하의 존망(存亡)과 작게는 한 개인의 득실(得失)이 어찌 마음을 다잡거나 방치하는 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겠느냐며, 이 교훈을 시험 삼아 오늘날의 변괴를 살펴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는 내용, 자신은 지금 열사병으로 신음하느라 죽음의 문턱에 있으나 이 마음을 독실히 보존하며 목숨을 걸고 바른 도를 지켜 사대생성(四大生成)의 중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죽음을 앞둔 자의 절실한 마음이라는 내용 등을 담았다. 양숙(陽叔) 형이 당한 변고에 슬픈 마음 가눌 수 없으며, 중부(中阜)의 어른과 아이들은 모두 평안한 지 안부를 묻는 내용을 추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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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流光奔邁 將失一禩矣 而意中直諒 無由際接 只誦杜草堂岸高瀼滑限西東之句 三復興吁 料襮獲蒙惠圅 擎手圭復 似不如合簪者幾希 靜審寒冱春府患候 彌延跨朔 何等貢憂而調護有道 復常趂效 而○侍中棣翕湛相 何等攢祝區區 第芳旨崔友之慘報 抑塞罔涯 崑岡玉石 無以喩其禍變也 冬夜方永 乘隙有鑽硏做工否 斯世斯事 將付廣陵散已矣 願毋使希音無傳 是爲有志者懇祝也老弟吟寒跧伏 無足爲況 而將賃一小屋 以爲鷦棲計 而所需者 罔非龜背之毛也 良用甕算之費思耳南茗多荷○惠腆 而長夜消遣 甚得好料 而無物仰酧 不覺騂汗餘萬非面曷罄 統希侍韻增彩 用副遐悰己酉至月二十五日曅 弟 拜謝(皮封)玉山 侍案 回納襟堂留弟謝書 [着名]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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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夏爲盡 炎熱比酷 伏不審此時靜養氣候 循序萬康 眷下諸節 俱得平迪否 種種伏溯不任之至 査侍生等 各保傍命與賤狀 而舍妹今初六日鷄三唱 順産生男 別無雜症 多幸多幸 卽欲送伻通奇 而旱炎如此 今始送之耳 餘不備伏惟下察 上候狀丁亥六月十八日 査侍生 金錫義等拜手【피봉】玉溪靜案下執事坪湖上候狀 省式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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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色垂暮 瞻慕益切 伏不審此時氣體候連向萬安 舍妹與甥兒輩 俱無病耶 種種伏傃不任 査下生等各保傍命賤狀 而轍兒月前以瘟疾大端危劇 而今纔起頭 還可幸也 一候之計 營之久矣而近汨憂冗 未得遂誠伏恨之餘 不備伏惟下察 上候狀辛卯十二月十二日 査下生金錫義拜手細鰲一器伏呈耳【피봉】玉溪靜几下執事坪湖上候狀 省式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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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式言尊阮丈喪事 千萬夢寐之外驚怛之極 復何言復何言 伏惟親愛加隆 哀慟沈痛 何可堪勝 而春府査丈疚懷 亦何以寬慰也如弟親知之間 猶不勝心寒而胸塞 况在至情間乎 第服中侍候衛重 舍妹姑無病 是痛仰慰也 弟等自夏以來家間些少憂故 不一而足 自悶奈何 承此實音 固當匍匐之不暇 而非但道路之稍遠 各汨憂冗 末由如意 烏在其相愛相親之誼耶 只切悲訴而已餘不備狀上己丑八月晦日 弟金錫義 錫禮 錫智 狀上食器大接 曾有舍妹所托 故買送耳 賻儀付呈耳【피봉】玉溪朞服僉案執事坪城謹狀上 省式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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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式 客秋奉叙 迨切感荷 而料襮惠䟽 踵至於悵別之餘承慰且悚 尤爲沒量 矧審冬令侍中僉哀候 連爲支重渾節均宜 何等慰仰 弟慈候以風痰 當寒添谻 煎悶不可言也季氏兄阻餘相逢 欣慰極矣 而歉歲多眷 契活爲難 此雖大同之患 爲其至情者 不忍聞見也 奈何奈何 乾魚依受 而椒子非不感也 恨其些略 後便或有更念之道耶 呵呵 餘不備謝䟽禮丙申十月十九日 弟金錫智拜【피봉】上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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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意襮耑价○惠翰 遠辱於窮山寂莫之濱 便覺不遐之厚誼 憑審䆋殷侍中棣履候勝重 僉候均慶 區區仰慰 實非虛語 弟峽味去益無聊中以婦阿彌朔之憂 爲慮不淺耳 晋參○貴院齋席 不待請辭 而固所志願 兼欲攄積懷 而衰病之脚 倚笻習步 然未可必也 餘多少客撓 不宣狀儀甲辰八月念日 弟 韓公琦 拜伯氏兄近在山庄耶 當有各候矣忙未如意 悵恨爲深 此懷雷照 如何(皮封)章院 齋案 執事鶴亭謝狀 謹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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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48년 강련(姜鍊)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姜鍊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8년 2월 24일에 법전에 사는 강련이 옥산의 이 생원에게 상대방의 묏자리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아 걱정되고, 부탁한 일은 자신이 도와줄 수 없어 한탄스러우며, 보내준 안경은 자신에게 맞지 않아 다시 돌려보낸다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 1848년(헌종 14) 2월 24일에 법전(法田)에 사는 강련(姜鍊, 1800~1853)이 옥산(玉山)의 이 생원(李生員)에게 상대방의 묏자리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아 걱정되고, 부탁한 일은 자신이 도와줄 수 없어 한탄스러우며, 보내준 안경은 자신에게 맞지 않아 다시 돌려보낸다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이다. 지난해 겨울에 상대방을 만나서 정담을 나눈 일은 해가 지나도록 위안되고 감사했는데 인편으로 또 편지를 받고서 상 중인 상대방이 잘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위안된다는 내용, 자신은 어버이의 근력이 항상 병이 많아 애가 타며, 과거 시험 기일이 점점 닥쳐오니 갈수록 머리털이 모두 희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내용, 상대방의 묏자리 관련 소송 일은 아직까지 결말이 나지 않아 걱정스러우며, 상대방이 간접적으로 부탁한 일은 자신이 부응하기 어려우니 도리어 말씀을 받들지 않음만 못해 그지없이 탄식스럽다는 내용, 상대방이 보낸 안경은 귀한 물건을 주신 친절함에 감사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맞지 않아 다시 돌려보낸다는 내용, 나머지 사연은 달성(達城)에서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법전은 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으로, 진주강씨 법전문중의 세거지이다.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柳溪)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주강씨 법전문중의 파조(派祖)인 홍문관 응교 강덕서(1540~1614)의 아들 의금부 도사 강윤조(1568~1643)와 그의 두 아들인 잠은 강흡(姜恰, 1602~1671)과 도은 강각(姜恪, 1620~1657)이 병자호란을 피해 법전리로 입향하였다. 이후 노론의 당색을 띤 강흡의 후손들은 음지마을에, 소론색을 띤 강각의 후손들은 양지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문과 급제자 25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급제자 31명 등을 배출하였다. 발신자 련은 거주지가 법전인 것을 볼 때 진주 강씨(晉州姜氏) 강련(姜鍊, 1800~1853)으로 추정되며, 발신년도 무신년은 1848년로 추정된다. 강련의 자(字)는 성백(成百)이고, 강흡(姜恰)의 후손으로, 법전에 거주하였다. 1850년(철종 1)에 증광시(增廣試) 을과 4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부안현감(扶安縣監) 등을 지냈다. 그의 부친은 1809년(순조 9)에 별시(別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낸 류하(柳下) 강태중(姜泰重, 1778~186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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