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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승기략 國乘紀略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북계(北界)에 침입하자,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왜적을 맞아 항복하자1)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함경북도 병마 평사(兵馬評事)2)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착민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는데, 도망친 자는 열에 한두 명도 안 되었다. 병마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기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교생들과 무사들 중에 식견이 있는 자가 정문부가 있는 곳을 듣고 모두 그에게 찾아갔고,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土兵)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 전 만호(萬戶) 강문우(姜文佑)3)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바로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이때 국세필(鞠世弼)4)이 '예백(禮伯)'이라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부임하여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와 복을 들어 위협하자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바쳤다. 정문부가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에 범한 죄를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모으고, 또 그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돌격 기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여 성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베자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함경북도 병마평사 정문부가 길주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안정되자, 군사들의 마음은 모두 적을 공격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병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고 할 때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여 말하기를,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는데 나라의 역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마침내 국세필 등 13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를 돌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뿐이며 이들 외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들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다. 다시 육진(六鎭)에 격문을 보내어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의 목을 베게 하자,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5)의 목을 베었고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었으며, 반민(叛民)은 처형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군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秀)를 주벌하고 그 성을 수복하였다.길주의 왜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한 부대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기에,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군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패배시키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또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嶺東館) 책성(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추격하여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여 적병을 패주시키고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의 왜적이 주둔한 채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함경도 길주에 주둔한 적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 의병의 파병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육진을 순행하여 반민(叛民)을 찾아내어 베었으며, 번호(番胡 여진족)를 진정시키고 여러 보(堡)를 수복하여 장수를 파견해 두어 북변이 복구되었으니, 모두 정문부의 노력이었다. ­이상은 《선묘보감(宣廟寶鑑)》에 나온다.­만력(萬曆) 20년 임진년(1592, 선조25) 7월에 평청정(平淸正)이 함경북도에 침입하였는데, 병사(兵使) 한극함(韓克諴)의 군사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회령 사람 국경인이 배반하여 가등청정에게 내응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6)과 순화군(順和君)7)을 잡았다. 경성 사람 국세필과 명천 사람 정말수가 각각 성에 점거하여 왜군을 맞아 항복하니, 함경도의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이보다 앞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에 오자 김귀영(金貴榮)이 편의를 봐주었고 부사 이영(李瑛)을 뽑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는데, 이영이 마천령(磨天嶺)에서 청정의 군사를 만나 군대가 궤멸되어 돌아갔다. 북병사 한극함이 육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여 해정창(海汀倉)에서 역습하였는데, 북도의 군사들은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기에 평지에 나아가 좌우로 번갈아 나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대자 적이 패하여 해정창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어 제군(諸軍)이 잠시 쉬고자 하였으나, 한극함이 들어주지 않고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하게 하였다. 적들은 창고의 가마니를 꺼내 줄지어 쌓아 성을 만들어 화살과 투석(投石)을 피하면서 그 안에서 조총(鳥銃)을 마구 쏘았다. 그런데 우리 관군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굴비를 묶어 놓은 것처럼 중첩되었기에 탄환에 맞으면 반드시 관통하여 혹 적의 총알 하나에 3, 4명씩 쓰러졌다. 이에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죽고 군사가 마침내 궤멸되자, 한극함이 군사를 거두어 고개 위로 물려 진을 쳤다. 밤에 적이 잠행하여 관군을 에워싸고 풀숲 사이에 흩어져 복병하다가 아침에 짙은 안개 속에 섞여 사방에서 크게 외치면서 돌격하였다. 이에 관군이 놀라 흩어져 적이 없는 곳을 향하여 달아나다가 모두 진창에 빠지자, 적이 뒤쫓아 와서 베었으니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극함은 경성(鏡城)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토착민이 잡아서 적에게 항복하였다.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사나운 종들을 풀어서 민간을 어지럽히니 크게 인심을 잃었다. 23일 경진(庚辰)에 회령의 향리 국경인은 왜적이 마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성안에서 반란을 주동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영(李瑛)의 수하에 아직도 용맹한 군관 수십 명이 남아있자,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말하기를, "반란자들이 비록 많을지라도 난을 도모한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하니, 청컨대 관군을 거느리고 그들이 처음 모여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우두머리를 쳐서 베면 잔당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영이 두려워하고 당혹해하여 따르지 못했다. 이에 국경인 등이 마침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이영 및 임해군·순화군과 호종하는 신하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잡아 가등청정을 맞이하여 항복했는데, 유경천은 빠져나갔다.김귀영의 부인이 나이가 젊었기에 국경인이 핍박하여 겁탈하려하자, 부인이 힘써 저항하다가 병풍 틀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성의 관노 국세필과 명천의 시노(寺奴) 정말수도 모두 성에 점거하여 난을 일으켜 호응하고,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사는 곳에서 향응(響應)8)하여 모두 수령과 진장(鎭將)을 잡아서 배반하였다. 가등청정이 승승장구하여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육진의 성보(城堡)를 모두 빼앗고 국경인을 왜관(倭官)의 형판(刑判)으로, 국세필을 예백 겸 본도 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정말수를 대장으로 삼아 관북(關北)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장수인 직정(直正)·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都關汝文) 등을 길주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갔다.이때 육진의 오랑캐들이 난을 틈타 모두 배반하여 야인과 군사를 연합하여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는데, 오직 온성(穩城)의 오랑캐만이 배반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상하게 여겼다. 함흥의 토병(土兵) 함덕후(咸德厚)가 흩어진 백성을 앞장서서 거느리고 서수라보(西水羅堡)를 지키고 있었는데, 오랑캐 기병들이 사방으로 들어와 포위하기에 함덕후가 모두 항거하여 물리치고, 바로 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의 빈틈을 타서 강을 건너 그 부락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왔다.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육진을 타일러서 항복시켰다.처음에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반민(叛民)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고, 국경인·국세필·정말수는 각각 큰 성을 점거하여 왜적과 군사를 연합하여 도 전체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평사 정문부가 홀로 몸을 빼내어 산중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경성의 유생 이붕수(李鵬壽)9)와 최배천(崔配天)10)이 정문부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자고 청하자 선뜻 의견을 따랐다. 이에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토착민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집하니, 그곳의 소재한 수령과 변장(邊將)이 모두 합류하였다.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변방을 자주 약탈하기에 국세필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는데, 최배천이 평소 국세필과 잘 지냈기에 혼자서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투항하였다. 국세필의 어머니가 늘 국세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최생(崔生)은 비범한 사람이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국세필이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마침내 틈을 타서 국세필을 달래며 말하기를, "북쪽 오랑캐들가 쳐들어오면 참으로 대적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정 평사(鄭評事)는 위엄과 명망이 있으니, 오히려 그를 맞아들여 함께 지킨다면 오랑캐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네."라고 하니, 국세필이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바로 격문(檄文)을 급히 보내어 국세필을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국세필이 여전히 의심하고 군사를 엄하게 하여 기다렸다.16일에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국세필과 서로 만나고 친히 타이르자,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또 병사(兵使)의 관인(官印)을 바쳤다. 정문부가 이내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의 죄를 묻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장수들이 국세필을 베고자 하였으나 정문부는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성급하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고, 또 자기를 활로 쏘았던 반병(叛兵)을 기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국세필이 자기 심복에게 정문부를 좌우로 곁에서 모시며 동정을 몰래 살피게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자기 부하들에게 사졸(士卒)들과 함께 성에 올라가 전술을 익히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는데 날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왜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가볍게 무장한 소수의 병력으로 갑자기 와서 성문을 두들겼는데, 정문부가 국세필에게 왜장을 유인하여 성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에게 남은 왜병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주군(州郡)에 격문을 돌려 반민(叛民)들을 타일러 항복하게 하였다. 육진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반란자11)들을 풀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차례대로 항복하고 장사와 호걸들이 다투어 와서 모병에 응하니, 이 때문에 변방의 성과 보(堡)가 이에 모두 수복되고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회령(會寧) 사람들이 국경인을 공격하여 베었다.정문부가 회령에 격문을 돌려 국경인에게 와서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고, 길주(吉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과 함께 경성을 협공하였다. 회령 사람 오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서 무리를 모으고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와 호응하기를 도모하니, 국경인이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수창(首倡)한 자를 나오라고 위협하기에 오윤적이 몸을 빼서 자수하여 나갔다. 국경인이 그를 죽이려는데, 부(府)의 아전 신세걸(申世傑)이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몰래 훔쳐 객사 문 박에서 불자, 반병(叛兵)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의심하고 일제히 모였는데 마치 수풀과 같았다. 신세걸이 그대로 그들을 거느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를 참수하였으며, 군중을 부추겨서 앞으로 나아가 국경인에게 이르기를, "성안의 병사들이 이미 나에게 모두 귀속되었으니, 네가 오윤적을 풀어주면 나도 마땅히 병사들을 해산할 것이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인을 쳐서 참수하고 그 머리를 경성에 전했으며, 오윤적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나아갔다.정문부가 정말수와 국세필을 사로잡고, 길주에서 왜인을 크게 패배시켜 왜장 직정(直正)과 도관여문(都關汝文)을 참수했다.명천 사람들이 또 자제들을 단결하여 정말수를 공격하여 정문부에게 응하려 했는데, 정말수에게 패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및 강문우(姜文佑)를 몰래 보내어 기병 60여 명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달려가 갑자기 명천으로 돌입하자, 정말수가 깜짝 놀라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여러 보(堡)가 모두 수복되고 오직 길주만이 왜적에게 점거되었으며, 군민(軍民)들도 모두 안정되었고 군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사람들이 모두 적을 쳐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려고 하자, 정문부가 바로 대장의 깃발을 세우고 남문의 망루에 올라 장수들을 불러들여 군례를 행하게 하였다. 장수들이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叛賊)이 아직도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좌중에서 국세필과 그의 잔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군중에게 조리돌리며 말하기를, "맨 처음 반역을 창도한 이는 이 무리뿐이고 이외에는 무관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고 군성(軍聲)이 마침내 진작되고 사기는 10배 높아졌다.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12)이 경성을 보전하면서 틈을 엿보고자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시켜 적을 치지 않으니, 반란자들의 하는 짓을 본받고자 하십니까? 청컨대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날이 밝자 군중을 남문 밖에 모아 놓고 두 사람의 논쟁 중에 누가 옳은지를 묻자, 사람들이 모두 정문부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이때 왜장 직정·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 등이 길주에 주둔하여 점거하고, 또 영동(嶺東 마천령(磨天嶺)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고 목책(木柵)을 설치해서 남북의 길을 통하여 왕래하면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정미일(丁未日)에 정문부가 명천으로 나아가 진을 치고,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종사관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성 외곽 세 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엿보게 하였다.병진일(丙辰日) 그믐날 새벽에 적이 군사 600명을 출동시켜 가파(加坡)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는데, 해가 지자 약탈한 것을 몰고 돌아갔다. 이에 원충서가 부하 3백 명으로 먼저 달려가 이들을 요격하여 앞에서 길라잡이 왜적 2명을 참수하자 적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침 큰 진영에 있는 왜적이 성안에서 계속 지원하기에 원충서가 산세가 험준한 곳으로 물려서 지켰다. 그리고 한인제가 구황과 강문우 등 3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와서 원충서와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싸웠다. 직정과 도관여문이 용감한 선봉대 400명으로 먼저 올라오기에 관군은 돌격 기병으로 출몰하면서 공격하였는데, 전투가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앞뒤 진(陣)이 모두 무너졌다. 유경천이 또 병력을 보내서 적의 퇴로를 끊자, 관군이 마침내 양면에서 협공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직정과 도관여문 등 다섯 장수를 참수하였으며, 갑옷을 입은 병사 800명의 수급과 군장(軍裝)・기계(器械) 천여 점을 노획했고, 약탈한 남녀를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12월에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13)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종성부사 정현룡으로 북병장(北兵將)을 대신 삼았다.정문부가 승세를 타고 길주(吉州)로 진격하여 공격한 지 며칠 동안 이기지 못하였는데, 영동(嶺東)의 적이 또 길주에 이르자 정문부가 요격(邀擊)하여 쌍개포(雙介浦)에서 패배시켰다. 군사를 옮겨 영동의 목책을 공격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길주 성 아래 줄지어 진을 치고, 왜적들이 약탈할 길을 끊고 또 군량을 원조받을 길을 막아서 지구전으로 곤궁하게 하였다. 처음에 재신(宰臣) 윤탁연이 왕자를 모시고 북변으로 들어와 갑산(甲山)으로 방향을 틀어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그대로 윤탁연을 감사로 삼았다. 이때 와서 윤탁연이 정문부의 성공을 듣고 질투하여 그 실상과 정반대로 행조에 아뢰었다. 또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아 반드시 군법으로 정문부를 얽어매어 죽이고자 장사(將士)들을 고문하자, 군중(軍中)에서 몹시 분하게 여겨 대부분 흩어져 떠나버렸다. 정문부가 마침내 병권을 내놓고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찰하며 군민(軍民)을 불러 모으고 장수를 파견해 두었는데, 오랑캐들이 자주 변경을 약탈하기에 정문부가 복병(伏兵)을 배치하여 그들을 패주시켰다.윤탁연이 다시 정문부를 북병장으로 삼자 가등청정과 모리길성(毛利吉盛 모리 요시나리)과 중륭(重隆 시게타카)이 군사를 거두어 경기(京畿)로 돌아갔다.처음에 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또 장수를 자주 바꾸어 작전을 많이 그르치자, 공을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 다시 정문부를 기용하여 장수로 삼았다. 정문부는 이에 군사를 돌려 사졸들을 먹이고, 구황(具滉)으로 하여금 기병 200명을 선발하여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14)에게 가서 돕게 하니, 적 200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다. 원충서(元忠恕)도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베었다. 이때 평청정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패하여 경기(京畿)로 들어갔다15)는 말을 듣고 철수하여 돌아갈 것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길주의 적이 한창 정문부에게 막혀 있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마침내 2만 명으로 마천령을 넘어서 영동의 적과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정탐하여 자세히 알고 그의 군사 3천여 명이 먼저 임명(臨溟)을 점거하고 매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계미일(癸未日) 동틀 무렵에 적병이 들판을 뒤덮으며 오다가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자, 정문부가 복병을 보내 그 후미를 끊고 날랜 기병을 풀어 좌우로 에워싸며, 말달리고 활을 쏘아 살상한 것이 매우 많아 유혈이 들을 뒤덮었다. 별장 이붕수가 왜장 한 명을 쏘아 죽이고, 즉시 몸을 빼어 깃발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아 죽었다.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힘껏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정은 혈전(血戰)을 벌여 퇴로를 열고 관군과 함께 60여 리를 옮기며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도로가 아직 막혀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막연하여 통하지 못했는데, 정문부 등은 문득 적의 세력이 성대한 것을 보고 저들이 재차 쳐들어올까 의심하여 물러가 성보(城堡)를 지키면서 적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가 말하기를, "적이 돌아갈 뜻이 있는 듯하니 군사를 주둔시키고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정문부가 따르지 않고 물러나 명천(明川)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한인제가 염탐하여 알아보니, 이날 밤에 가등청정은 시체를 쌓아 불태우고 성안의 군사를 몰래 거두어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밥을 지어 먹을 겨를도 없이 도망갔다. 정문부가 급히 와서 한인제를 보고 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적군의 정세를 헤아리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신묘한가."라고 하였다. 한인제가 속히 진군할 것을 청했는데 정문부는 금방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경보가 있었기에 허락하지 않고, 한인제를 보내어 오랑캐를 쳐서 물리치게 하였다. 가등청정이 마침내 연도(沿道)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었는데, 함경남도의 군사들이 절멸(絶滅)시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닷가를 따라서 달아났다. 이유일(李惟一)이 군사를 정돈하여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성윤문(成允文)16)이 허락하지 않고 그 군사를 빼앗았다.청정은 또 모리길성(毛利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어 함께 경성(京城)에 모였다. 한극함(韓克諴)은 구금되었다가 양주(楊州)에 와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뒤에 조정에서는 적에게 아첨하여 몸을 빼냈다고 하여 마침내 사사(賜死)하고 그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한인제는 웅위(雄偉)하고 원대한 생각이 있어 사람들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일컬었는데, 조정에서는 당하관 우후(堂下官虞侯)의 지위와 명망이 본디 비천해서 오랑캐들에게 존중받을 수 없다고 여겨, 남우후(南虞侯) 한희길(韓希吉)과 직위를 바꾸어 차임하였고, 이유일은 군공으로 겨우 보을하 첨사(甫乙下僉使)로 삼았다. 이러한 명이 내려지자 군사들은 모두 해체되었고, 오직 유응수(柳應秀)만이 뒤에 도신 이희득(李希得)의 장계로 인하여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구황(具滉)은 북변의 장수 중에서 가장 날래고 용감하다고 알려졌다. ­이상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서 나왔다.》­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길주의 적을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경성(鏡城)의 사인(士人) 등이 함께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먼저 북쪽 백성 가운데 반역하여 왜적에게 붙은 자와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토벌하여 죽이고, 왜병을 길주에서 격파하여 820여 명의 수급을 베니, 적이 모두 군대를 거두어 안변(安邊)으로 돌아갔고 관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소대연기(昭代年紀)에서 나왔다.》­북방의 목사와 군수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여 법도를 어기고 군사 대비가 해이했기에 다시 병마 평사를 설치하되, 반드시 전랑(銓郞) 및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차출하여 보내 통제하는 자리로 삼도록 했기에 평사 정문부가 임진년의 난을 당하여 북방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특명으로 이공(貳公 찬성(贊成))으로 월등하게 추증(追贈)하고 함께 일한 자들도 모두 추포(追褒)하도록 명하니, 그 일대가 고무되었다. ­〈현종대왕 행장(顯宗大王行狀)〉에서 나왔다.­ 倭將淸正入北界, 會寧人叛, 執兩王子、諸宰臣迎降, 關南北皆陷于賊。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時北界守將, 皆被土民執與倭將, 逃出者十無一二。評事鄭文孚, 嘗授書校生, 故變作之後, 弟子數人, 庇護得脫。校生及武士有識者, 聞文孚所在, 皆就之, 遂推文孚爲義兵將, 團集土兵、壯士數百人, 鏡城人前萬戶姜文佑, 領率居前, 卽抵府城。鞠世弼方稱禮1)伯, 莅兵使印, 治府自若, 猝聞兵至, 閉門乘城拒之。文佑等脅以禍福, 世弼知不敵, 開門迎入納印。文孚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遂傳檄南北州堡, 合兵三千人, 又抄精猛突騎爲先鋒。吉州倭賊聞之, 遣兵百餘人哨探, 至城西, 姜文佑等, 開門出擊, 斬數十人, 餘賊遁。北道評事鄭文孚, 大敗賊兵于吉州, 圍其城。文孚安集旣定, 軍情皆欲擊賊自效。乃卜日出兵將發, 壯士齊請曰: "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陳中, 不可不先討之。" 遂執鞠世弼等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府人可勿疑。" 衆皆歡悅, 此文孚本謀也。復檄通六鎭, 誅首倡亂者, 會寧儒生申世俊, 起兵斬鞠景仁, 餘鎭皆復, 叛民或誅或逃。文孚進兵古站驛, 遣兵誅明川叛賊鄭末秀, 復其城。吉州賊遂四出焚掠, 一枝軍掠明川海倉, 文孚進兵吉州南村, 邀其歸路, 賊兵大敗, 斬六百級。賊一屯在磨天嶺下嶺東館柵城, 焚掠臨溟村, 文孚回兵擊之, 戰于雙浦, 賊兵敗走, 斬六十級。自是兩賊屯, 皆堅守不出, 文孚分兵圍之。咸鏡道吉州屯賊, 拔城遁。鄭文孚還鏡城, 罷遣義兵, 北巡六鎭, 搜誅叛民, 撫定番胡, 收復諸堡, 派置將領, 北邊復舊, 皆文孚力也。【以上出《宣廟寶鑑》。】萬曆二十年壬辰七月, 平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軍敗被擒。會寧人鞠景仁, 叛應淸正, 執王子臨海君、順和君。鏡城人鞠世弼、明川人鄭末秀, 各據城迎降, 咸鏡道州郡皆陷。先是臨海君、順和君來往會寧, 金貴榮便宜, 擢府使李瑛爲南兵使, 瑛遇淸正兵於磨天嶺, 衆潰而還。北兵使韓克諴, 率六鎭兵, 逆戰于海汀倉, 北兵善騎射, 就平地上, 左右迭出馳射, 賊敗入倉中。時日已暮, 諸軍欲少休, 克諴不聽, 揮兵圍之。賊出倉中穀石, 列置爲城以避矢石, 從其內亂發鳥銃, 官軍櫛比而立, 重疊如束, 中必貫穿, 或一丸斃三四人。富寧府使元喜死之, 軍遂潰, 克諴收兵, 退屯嶺上。夜賊潛行環官軍, 散伏草間, 朝乘大霧, 四面大呼突起, 官軍驚散, 向無賊處奔走, 悉陷泥淖, 賊追至芟刈, 死者無數。克諴走鏡城, 土民執以降賊。時臨海君、順和君, 縱豪悍奴僕, 擾民間, 大失人心。二十三日庚辰, 會寧鄕吏鞠景仁, 聞賊踰磨天嶺, 倡亂城中。當是時, 李瑛手下, 尙有壯勇軍官數十人, 高嶺僉使柳擎天曰: "叛徒雖衆, 謀亂者不過數人, 請率官軍, 乘其初集, 擊斬渠首, 則餘黨自定矣。" 瑛惶惑, 不能從。景仁等遂盡殺官軍, 執瑛及臨海君、順和君、從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 迎降于淸正, 擎天逸去。金貴榮夫人年少, 景仁欲逼辱之, 夫人力拒之, 就屛風機, 自縊而死。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 亦皆據城作亂以應之, 各邑軍民所在響應, 皆執守令、鎭將以叛。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刑判, 鞠世弼爲禮2)伯兼本道兵使, 鄭末秀爲大將, 分統關北, 使其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屯吉州, 自引兵還出北靑。時六鎭蕃胡乘亂皆叛, 與野人連兵, 寇掠邊上, 惟穩城胡不叛, 人皆嘉之。咸興土兵咸德厚, 倡率散民, 獨保西水羅堡, 虜騎四入圍之, 德厚皆拒却之, 乃健率兒, 乘虛渡江, 攻破其部落而還。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 招降六鎭。初, 北界守將, 皆被叛民執與倭將, 鞠景仁、鞠世弼、鄭末秀各據大城, 與倭連兵威脅一道。評事鄭文孚獨脫身, 走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見文孚, 請起兵擊賊, 頓然從之, 遂推文孚爲將, 團集土民、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皆附之。是時北虜屢掠邊上, 鞠世弼頗憂懼, 崔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世弼之母, 每戒世弼曰: "吾觀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能從。配天遂乘間說世弼曰: "北虜若至, 誠難與敵, 鄭評事有威望, 尙能延入共守, 虜不足憂矣。"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孚, 文孚卽馳檄諭世弼, 世弼猶疑之, 嚴兵以待。十六日, 文孚率兵至城下, 與世弼相見, 親自說諭, 世弼始迎入, 又納兵使印。文孚乃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孚不從曰: "遽也, 非計也。" 又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使其腹心夾侍文孚左右, 伺察動靜, 文孚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皆如是。倭人未知, 以輕兵奄至叩城, 文孚令世弼誘倭將入門而擒之, 令安原權管姜文佑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民。六鎭聞文孚已釋反側, 次第送款, 將士、豪傑爭來應募, 緣邊城堡於是悉復, 北道人心稍定。會寧人擊斬鞠景仁。鄭文孚移檄會寧, 諭景仁來降不從, 與吉州屯倭將協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徒鄕校, 謀伐景仁以應文孚, 景仁急圍鄕校, 脅出首倡, 允迪挺身自首而出。景仁將殺之, 府吏申世傑, 潛偸景仁鐃角, 吹之客舍門外, 叛兵疑景仁出令, 齊會若林。世傑仍領之, 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謂景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給吳允迪, 我當罷兵。" 景仁駭懼從之。遂擊景仁斬之, 傳首鏡城, 允迪等又領兵繼赴。鄭文孚擒鄭末秀、鞠世弼, 大敗倭人於吉州, 斬其將直正、都關汝文。明川人又團結子弟, 攻鄭末秀以應文孚, 爲末秀所敗, 文孚潛遣吾村權管具滉及姜文佑,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 末秀惶駭,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諸堡盡復, 惟吉州爲倭所據, 軍民亦皆安集, 兵至三千餘人。衆咸欲擊賊自效, 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召諸將入行禮, 諸將齊請曰: "今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座中, 執鞠世弼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此文孚本謀也, 軍聲遂振, 士氣十倍。鍾城府使鄭見龍, 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以通南北路, 往來焚掠。丁未文孚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伏於吉州城外以覘之。丙辰晦平明,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日晡驅所掠而還。元忠恕以所部三百先馳邀之, 斬先導兩賊, 賊驚北, 會賊大陣, 自城中繼援, 忠恕退保山險。韓仁濟以具滉、姜文佑等三百餘騎馳至, 與忠恕連兵大戰。直正、都關汝文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 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柳擎天又遣兵截其歸路, 官軍遂兩面夾擊大敗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甲首八百、軍裝、器械千餘計, 盡奪所掠男女而還。十二月, 咸鏡監司尹卓然, 奪鄭文孚兵, 以鍾城府使鄭見龍代爲北兵將。文孚乘勝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又至吉州, 文孚邀擊, 雙介浦敗之。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摽掠, 阻其粮援, 以持久困之。初, 宰臣尹卓然陪王子入北, 轉至甲山, 至別害堡, 行朝仍以卓然爲監司。至是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實以聞行在, 又奪文孚兵, 必欲以軍法搆殺文孚, 榜掠將士,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招集軍民, 派置將領, 蕃胡屢掠邊上, 文孚設伏兵走之。尹卓然復以鄭文孚爲北兵將, 平淸正、吉盛、重隆撤還京畿。初, 尹卓然奪鄭文孚兵, 又數易將帥, 多誤戰機, 懼不能成功, 復起文孚爲將。文孚乃還軍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元忠恕又擊斬賊將於吉州城下。是時平淸正, 聞行長敗入京畿, 將謀撤還, 而吉州賊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文孚諜知之悉, 其兵三千餘人先據臨溟, 伏以待之。癸未黎明, 賊兵蔽野而至, 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伏兵截其尾, 自縱輕騎繞左右, 馳射殺傷甚衆, 流血被野。別將李鵬壽射一倭將殪之, 卽挺身出旗前, 忽中丸而死, 朱乙溫萬戶李希唐亦力戰,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轉鬪六十餘里, 日暮得入城。時道路尙阻, 兩西聲息邈然不通, 文孚等, 忽見賊勢浩大, 疑其再逞, 欲退守城堡以待之。北虞侯韓仁濟曰: "賊似有歸意, 莫若屯兵俟。" 文孚不從, 退屯明川而留。仁濟詗知之, 是夜淸正積屍焚之, 而潛撤城中兵, 乘夜跳城, 不暇炊食而走。文孚馳來, 見仁濟謝曰: "君之料賊, 何其神也?" 仁濟請亟進兵, 文孚以方有虜警不許, 而遣仁濟擊虜却之。淸正遂盡撤沿道諸屯, 恐南道兵勦絶, 不敢踰咸關嶺, 沿海而走。李惟一勒兵將追之, 成允文不許而奪其兵。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掇江原道諸屯, 俱會于京城。韓克諴被拘, 至楊州逃歸, 後朝廷以爲媚賊脫身, 遂賜死而幷殺其子。韓仁濟雄偉有遠慮, 人稱有將帥材, 朝廷以爲堂下虞侯地望素卑, 非所以見重於胡人也, 以南虞侯韓希吉換差, 李惟一以功, 僅爲甫乙下僉使。命下, 士皆解體, 惟柳應秀, 後因道臣李希得狀啓, 得拜三水郡守, 俄又陞嘉善, 具滉北將中, 最以驍勇著。【以上出《宣廟中興誌》。】北評事鄭文孚, 起義兵討吉州賊, 大破之。鏡城士人等, 共推文孚起義兵, 先討北民之叛附倭賊者、鞠世弼等十三人誅之, 擊破倭兵于吉州, 斬八百二十餘級, 賊皆捲還于安邊, 關北悉平。【出《昭代年紀》。】北鄙牧守, 貪縱違度, 戎備解弛, 復設兵馬評事, 必以銓郞及玉堂官差送, 爲彈壓之地, 故評事鄭文孚, 當壬辰亂, 大有功於北方。特命超贈貳公, 同事者悉令追褒, 一方聳動。【出《顯宗大王行狀》。】 왜장(倭將)……항복하자 선조 25년(1592) 7월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은 가등청정에게 쫓겨 회령으로 들어갔는데, 회령의 아전으로 있던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였다. 《宣祖修正實錄 25年 7月 1日》 《燃藜室記述 卷15 北道之陷鄭文孚收復》 병마 평사(兵馬評事) :병마 도사(兵馬都使)라고도 한다. 평안도·함경도에만 두는 병사(兵使)의 막료이다. 군기(軍機) 및 개시(開市)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무관의 정6품 벼슬이다. 강문우(姜文佑)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여익(汝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며 1558년(명종13)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를 거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지냈다. 국세필(鞠世弼) 경성부의 아전으로, 국경인의 숙부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국경인·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국경인(鞠敬仁) ?~1592. 본래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어가 재산을 모았는데, 조정에 대해서 원한이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 함경도로 침입하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 명천 아전 정말수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1574~1609)으로, 선조의 첫째 서자이다.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갔는데,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에 의해 가등청정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협상을 통해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순화군(順和君) ?~1607. 선조의 아들로 순빈(順嬪) 김씨 소생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민폐를 많이 끼쳐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국경인에 의해 왜군에 넘겨졌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향응(響應) 어떤 사람의 주창(主唱)에 따라 그와 행동을 같이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중항(仲恒)이다. 정문부의 별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길주 장평(長坪), 쌍포(雙浦)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593년(선조26) 1월 함경북도 단천(端川)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왜적이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최배천(崔配天)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중립(仲立)이다. 판관(判官)에 증직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반란자 원문의 '반측(反側)'은 두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자를 가리킨다. 정현룡(鄭見龍) 1547~1600.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다. 1593년(선조26) 종성부사로 역임하면서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고령 첨사 유경천(柳擎天)과 함께 길주에 머무르고 있던 왜적을 토벌하여 잡았고, 곧바로 영동(嶺東)으로 이동하여 2백여 명의 왜병을 쫓아냈다. 1595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함경도에 피난했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강찬(姜燦) 1557~1603.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이다.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으로 두 왕자가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아 싸우고, 행조(行朝)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사태를 보고했다. 봉산(鳳山)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들어갔다 1593년(선조26)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부대가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에게 패배하여 한성으로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26年 1月 6日·7日·8日·9日》 성윤문(成允文)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91년(선조24)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부임하여 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이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부하 장수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과감한 공격을 제지하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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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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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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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감회 2수 택당 이식 鏡城感懷【二首 澤堂】 시서에 능한 김종서50) 장수에 명 받고훈척 윤 시중51) 정벌 전담하였네유묘에 지금 바로 합사하기 어려워도사관이 어찌 한 분의 공만을 기리겠는가­아마도 그들을 합사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듯하다.­신공은 화살 한 대로 겹겹의 포위 풀고52)정공은 지휘 세 번에 왜적 격파하고 돌아왔네53)두 분의 충절 관외에 일월처럼 걸렸으니부질없이 장사들에게 눈물 뿌리게 하누나54)­신(申)은 신립(申砬, 1546~1592) 공을 가리키는 것 같고, 정자(鄭子)는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詩書命帥金宗瑞勳戚專征尹侍中遺廟卽今難幷祀史家那得獨褒功【蓋惜其不能幷祀也。】申公一箭解重圍鄭子三麾破敵歸關外雙忠懸日月空令壯士涕交揮【申似指申公砬, 鄭子指先生也。】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윤 시중(尹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윤관(尹瓘 ?~1111)을 가리킨다. 고려 예종 때의 학자·장군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이다. 어사대부·한림학사 등을 지냈으며,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았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아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1130년(인종8년)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신공은……풀고 1583년(선조16)에 이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종성(鍾城)의 요새지에 들어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을 때, 신립이 온성 부사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했던 일을 말한다. 《宣祖修正實錄 16年 5月 1日》 지휘……돌아왔네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과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기며 투항을 하자,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 대장이 되어 경성을 수복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왜적을 격파한 것을 말한다. 《農圃集 年譜》 부질없이……하누나 신립은 임진왜란 때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왜적에게 참패하여 남한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했고, 정문부는 인조(仁祖) 2년(1624)에 초 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역사 시로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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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 병서 약천 남구만 彰烈祠【幷序 藥泉 南九萬】 경성부(鏡城府)에서 남쪽으로 1백 리에 어란리(禦亂里)가 있는데, 혹은 어랑리(漁郞里)라고도 한다.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팔경대 남쪽으로 10리쯤에 무계호(茂溪湖)가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사 이붕수(李鵬壽)가 평사 정문부(鄭文孚)를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금상 을사년(1665, 현종6)에 평사(評事) 이단하(李端夏)가 앞장서 발의하여 무계호 가에 사당을 세워 정공을 제향하고, 함께 맹약한 이붕수 등을 배향하였으며, 또 그 옆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세워 유생들이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았다. 사당은 서쪽 봉우리 아래 높은 언덕에 있고, 앞에 작은 산이 있는데 마치 초승달이 뜬 것처럼 가로질렀고, 반쯤은 호수에 잠겼으며 푸른 산에는 초목이 울창하였다. 사면의 산들은 마치 채색 병풍이 두른 것처럼 깎아질러 서 있고 그 가운데는 편평하고 둥글게 호수를 이루어 너비가 9리쯤 된다. 연잎과 마름은 씻은 듯이 맑고 푸르며 온화하고 청려(淸麗)하여 거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북도의 산천은 대체로 험준하여 훤히 터져 활달한 장관은 원래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처럼 산이 감싸고 물이 돌아 그윽하고 고요한 곳은 없다. 이는 아마도 하늘이 또한 정공의 충렬(忠烈)을 드러내려고 특별히 변방 지역에 별천지를 설치해서 그 영령을 편안히 하려는 것인 듯하다.정공의 사당 곁에 자리한 무계호에푸른 산이 호숫가에 우뚝 서있네잔잔한 구리의 호수에 잔물결 멈추고사방 겹겹의 산봉우리 병풍처럼 둘렀네당신은 변란 당하여 충절 드러내어궁벽한 변방 땅에 별천지 만들었네다시금 촉룡 서당의 기문 읽고서멀리 두 이공77) 생각에 경도를 바라보네 鏡城府南一百里, 有禦亂里, 或稱漁郞里。里有八景臺。臺南十里許, 有茂溪湖, 乃壬辰倭亂時, 義士李鵬壽邀鄭評事文孚, 起兵處也。今上乙巳, 評事李端夏倡議, 立祠于湖上, 享鄭公而以同盟人鵬壽等配之, 又作燭龍書堂于其側, 以爲儒生居業之所。祠在西峯下高阜, 而前有小山, 橫抹如新月之吐, 半浸湖水, 蒼翠蔚然。四面諸山削立如彩屛之圍, 而其中平圓成湖, 縱廣九里。芰荷、菱芡, 綠淨如拭, 蘊藉淸麗, 殆不可名言。北地山川, 大抵麤壯軒豁之觀, 則固可易得, 而山彎水環, 未有如此地之幽靜1)1) 靜 : 대본에는 '靚'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집(藥泉集)》 권28 〈북관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에 근거하여 고쳤다.者, 豈天亦欲彰鄭公之忠烈, 特設別區於荒裔之域, 以妥其靈也耶!鄭公祠傍茂溪湖湖上靑峯一抹孤九里湖平纖纊息四圍巒疊畵屛紆人當板蕩彰忠節地到窮荒創別區更讀燭龍書室記遙思二李望京都 두 이공 이붕수(李鵬壽)와 이단하(李端夏)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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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㡬䄵香案侍楓宸飜作天涯一逐臣北闕縱難能徹意東門容易可藏身平生事業無遺䇿半世悲懽不怨人天序四時功者去春鳳纔過又秋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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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三可堂 斗南當日冠羣賢千載髙名吏永傳恩到頴川黄覇右孝居莊屋老萊前心情旣與無終始生死如何異後先一閉佳城休敢惜樂夫天命古來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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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軒事蹟【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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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전재학(田在鶴) 토지 소유권 증명 말소등기 신청서(土地所有權證明抹消登記申請書) 고문서-소차계장류-근현대문서 田在鶴 大邱地方法院蔚珍出張所 大邱地方法院蔚珍出張所印 1課(적색,정방형,2.2×2.2cm)司法代書人南容克 1顆(적색,정방형,1.3×1.3cm)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5년 2월 9일에 전재학(田在鶴)이 대구지방법원 울진 출장소(大邱地方法院蔚珍出張所)에 제출한 토지 소유권 증명 말소등기 신청서(土地所有權證明抹消登記申請書) 대상: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蔚珍郡 遠南面 梅花里) 號字4畓4斗落, 珠字5畓1斗落 참여자: 대리인(代理人) 남용극(南容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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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기(葬擇記) 2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918 모(某)의 묘소(墓所)를 택(擇)하여 안장(安葬), 하관(下棺) 등 장례 지내는 절차와 시일, 무덤 위치에 관해 기록한 택일기(擇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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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제홀기(忌祭笏記) 고문서-치부기록류-홀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홀기(笏記)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절차를 적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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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혼례홀기(婚禮笏記) 고문서-치부기록류-홀기 吳煥周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혼례(婚禮) 홀기(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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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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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39년 술수(術數) 고문서-치부기록류-문복록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2월에 문관산(文冠山)이 작성한 문복록(問卜錄) 박동민(朴東民)의 생년월일, 박송계(朴松溪)의 생년월일을 확인해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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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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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92년 종정도(從政圖)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2년 1월 22일에 작성된 종정도(從政圖) 종정도(從政圖), 승경도(昇卿圖) 라고도 칭함 윷놀이로 가지고 놀 수 있게 모(毛),유(兪),걸(乞),개(介),도(刀)마다 다른 직책이 적혀져있으며, 윷이 가르키는대로 말을 이동시켜 즐길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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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규호(李奎鎬) 영수증(領收證) 고문서-증빙류-근현대문서 朝鮮殖産銀行 李奎鎬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576 1930년 4월 30일에 임실군 성수면에 사는 이규호(李奎鎬)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보낸 영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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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토지등기부(土地登記簿) 고문서-소차계장류-근현대문서 全州地方法院任實出張所 全州地方法院任實出張所印(3.6×3.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576 1930년 4월 26일에 전주지방법원 임실출장소가 발급한 토지등기 사실을 증명하는 토지등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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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로(金永老) 호구단자(戶口單子) 2 고문서-증빙류-호적 金永老 1顆(6.5×6.7)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906 유학(幼學) 김영로(金永老, 44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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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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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김영로(金永老) 호구단자(戶口單子) 3 고문서-증빙류-호적 金永老 1顆(6.6×6.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3906 유학(幼學) 김영로(金永老, 53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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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김정근(金貞根) 토지 소유권 말소 등기신청서(土地所有權證明抹消登記申請書) 고문서-소차계장류-근현대문서 金貞根 光州地方法院潭陽出張所 吳昌俊信 1顆(적색,원형,1.2cm)光州地方法院潭陽出張所 1顆(적색,정방형,3.7×3.7cm)司法代書人吳昌俊 1顆(적색,정방형,1.5×1.5cm)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6년 3월에 김정근(金貞根)이 광주지방법원 담양 출장소(光州地方法院潭陽出張所)에 제출한 토지 소유권 말소 등기신청서(土地所有權證明抹消登記申請書) 대상: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潭陽郡 古西面 古邑里) 宇2331番 畓 1斗落 등기일자: 1915년 6월 7일 참여자: 대리인(代理人) 오창준(吳昌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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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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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경자년 치부(置簿)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자년 5월 20일에 작성한 치부(置簿) 왜유(倭油) 1盆 12兩, 우산 5개 5兩 5戔으로 표기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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