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 年譜 ▪황명(皇明)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44년 을축년(1565) 우리 명종대왕(明宗大王) 20년 2월 19에 선생은 한성부 남부(南部) 반송방(盤松坊) 남소동(南小洞) 집에서 태어났다.▪45년 병인년(1566) 선생 2세▪목종황제(穆宗皇帝) 융경(隆慶) 원년 정묘년(1567) 선생 3세▪2년 무진년(1568)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 원년 ○선생 4세▪3년 기사년(1569) 선생 5세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선생은 우뚝하게 큰 뜻이 있어 장난치고 놀 때, 서당 아이들과 편을 짜서 진을 치기를 마치 적과 대치하는 형상처럼 하기로 약속했는데, 선생이 가운데에서 호령하자 아이들이 모두 그 약속을 지켜서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다.▪4년 경오년(1570) 선생 6세 총명함이 매우 뛰어나 글을 읽을 때 한번 보면 외웠다.어른을 따라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호랑이 잡는 것을 구경하는데, 호랑이가 포효(咆哮)하자 구경하는 자들은 모두 깜짝 놀라 물러나 피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홀로 편안히 앉아 미소를 짓고 안색이 태연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담력과 지략에 탄복하였다.▪5년 신미년(1571) 선생 7세 '〈옥 같은 얼굴이 한아1)보다 못하다[玉顔不及寒鴉色]〉'2) 라는 오언 고시(五言古詩) 한 편을 지었다. 원집에 보인다.▪6년 임신년(1572) 선생 8세 '〈초승달을 읊다[詠初月]〉'라는 오언 절구(五言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전하여 외웠다. 원집에 보인다.▪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원년 계유년(1573) 선생 9세▪2년 갑술년(1574) 선생 10세 《소학(小學)》을 과업으로 강학하였다.판서공(判書公)이 《소학》을 가르치면서 선생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 이 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니, 선생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우러러 본받고 받아들여 강구(講究)하여 효도와 우애를 힘써 닦았다.▪3년 을해년(1575) 선생 11세 봄에 《논어(論語)》를 읽었다.▪4년 병자년(1576) 선생 12세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사기(史記)》 등의 책을 통독하였다.글을 읽으면서 글의 뜻이 긴요한 곳에 이르면 책상을 마주해 묵묵히 앉아 정밀하게 연구하고 탐색하여 그 뜻을 깨달으면 매번 기뻐하고, 깨닫지 못하면 벽에 써놓고 절로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5년 정축년(1577) 선생 13세 봄에는 《대학(大學)》을, 가을에는 《중용(中庸)》을, 겨울에는 《춘추(春秋)》를 읽었다.▪6년 무인년(1578) 선생 14세 봄에 산사(山寺)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다.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시 제목은 〈달 밝고 꽃은 지니 또 황혼이다[月明花落又黃昏]〉인데, 뒤에 명나라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의 과체문(科體文)을 보고자 할 때, 조정에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시3)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배 속에 있던 아이라오[泣送歸時在腹兒]〉와 선생의 이 시를 함께 써서 보여주었다.▪7년 기묘년(1579) 선생 15세 《서경(書經)》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의 책을 읽었다.▪8년 경진년(1580) 선생 16세 모의 표문 〈송나라 종정경 사요가 백구를 바쳐 악비에게 역심이 없음을 보증하다[宋宗正卿士䮍請以百口保岳飛無他]〉을 지었다.4)▪9년 신사년(1581) 선생 17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고원위(高原尉) 항(沆)의 손녀이고, 봉사 예(欚)의 따님이다.강학(講學)하는 여가에 간간이 활 쏘는 기예를 익혀 탁월한 솜씨5)가 있었고, 천문(天文)과 산수(算數)도 모두 통달하였다.▪10년 임오년(1582) 선생 18세▪11년 계미년(1583) 선생 19세 선생이 이미 장성했는데도 판서공은 오히려 날마다 공부시키기를 어릴 때처럼 하였다.▪12년 갑신년(1584) 선생 20세 7월에 김정수(金廷叟)·김백후(金伯厚)와 함께 금양정사(衿陽精舍)에 모여서 글을 읽었다.선생은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두 김공과 함께 강습하고 익혔으니, 〈문회록(文會錄)〉이 있다. 김정수의 이름은 수현(壽賢)이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며, 김백후의 이름은 선여(善餘)이고 벼슬은 수찬(修撰)인데, 선생과 같은 해에 진사에 급제하였다.8월에 생원·진사의 초시(初試)에 모두 합격하였다.▪13년 을유년(1585) 선생 21세 2월에 생원·진사의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하였다.▪14년 병술년(1586) 선생 22세 12월에 맏아들 대영(大榮)이 태어났다.▪15년 정해년(1587) 선생 23세 성균관에 유학했다. ○3월에 종형 송재공(松齋公)을 곡하였다.공의 휘는 문영(文英)이고 문행(文行)으로 일찍이 이름이 크게 드러나 가정의 촉망을 받았는데 이때 이르러 요절하였으니, 선생은 자기 몸의 반을 베어내는 것과 같이 애통해하였다고 한다.▪16년 무자년(1588) 선생 24세 가을에 명경과(明經科)에서 김시헌(金時獻)의 방 아래 갑과(甲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독권관(讀券官)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등 여러 공이 서로 축하하면서 조정에 인재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전례에 따라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부직(付職)되었다.▪17년 기축년(1589) 선생 25세 2월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4월에 홍문관 기사(弘文館記事)에 제수되었다. ○7월에 승정원 부정자(承政院副正字)에 체수(遞授)6)되었다. ○10월에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로 승진하였다. ○12월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지냈다.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연설(筵說)은 실전되었다.▪18년 경인년(1590) 선생 26세 6월에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중전(中殿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병환으로 사면령을 반포하는 글[中殿失寧頒赦文]〉7)을 지어 올렸다. ○이때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의 내직을 항상 으레 겸임하였다. ○무릇 조정에서 경사를 맞아 응제(應製)8)하는 것과 어전의 체자(帖字)9) 및 관각 문자(館閣文字)10)는 선생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19년 신묘년(1591) 선생 27세 맏형 봉사공(奉事公 정문승(鄭文升))이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7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에 제수되었다.선생의 일기를 상고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7월 그믐에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어 8월 28일에 길을 떠났다. 동교(東郊)에서 송별할 때 맏형님이 먼저 왔고, 여러 명사(名士)로는 양이화(梁而和)·민언실(閔彦實)·이잠(李潛)·여흥 영(驪興令) 이백기(李伯起)·이양백(李養伯)·채길(蔡吉)·원군서(元君瑞)·공서(公瑞)·송연(宋淵)·신대용(愼大容)·이사의(李士誼)·구자심(具子深)·홍중재(洪仲載)·경서(景瑞)·이서(而瑞)·순성(順城)·여강(汝剛 권인(權韌))·자신(子新)·경숙(敬叔 신흠(申欽))·이책(李策)·이혁(李爀)·한집(韓潗)·윤찬(尹燦)·권철(權澈)·성여식(成汝栻)·방덕룡(方德龍) 등 20여 인이 왔으며, 민덕로(閔德老)는 일이 있어 도성으로 들어갔기에 길에서 만나 말 위에서 작별하였다. 저물녘에 누원(樓院)11)에 투숙하니 홍이신(洪而信)이 먼저 와서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기다렸는데, 사운시(四韻詩 율시) 세 수를 지어서 작별해 주기에 내가 그중 한 수를 차운하여 화답했다. 시는 원집에 보인다.그믐날 양문역(梁文驛)12)에 도착하니 양문역에서 5리 지점에 한줄기 긴 냇물이 고여서 못이 되고, 높이가 3장(丈)이나 되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하여 우뚝 솟은 것이 마치 연꽃이 물속에서 나온 모양과 같았는데, 말을 길가에 멈추고 그 위에서 잠깐 쉬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40리를 가서 풍전(豐田)13)에 이르자 날이 저물려고 하였다. 찰방 김영달(金穎達)이 영동(嶺東)에서 처음 부임한 역중에서 나를 맞이하기에 그의 관사로 갔는데, 뜰에 산국화가 열을 지어 만개하였다. 인하여 소주 10여 잔을 따랐는데 나는 가래와 기침 때문에 고사(苦辭)하다가 조금 마셨다.이튿날 편지를 써서 주인집 사람에게 부탁하여 본가에 부쳐 보냈다. 이 아래 몇 줄은 결락되었다. 시냇물이 맑고 깨끗해 바닥에 헤아릴 만큼 노는 고기가 보였다. 건너편으로 2리를 가니 평민 지방언(池邦彦)이라는 자가 산 아래 집을 지었는데, 3면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1면은 앞에 냇물이 흘렀다. 소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고 곡식 여러 무더기를 쌓아 놓았으니, 아마도 한 고을의 부자인 듯하다. 김화(金化)로부터 금성(金城)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벼랑을 따라 난 돌길이 많았고, 아래로 긴 냇물이 내려다보이니 자못 눈을 즐겁게 할 만하였다. 신시(申時)에 진목역(眞木驛)에 이르렀는데 역에는 기와집이 없고 곁채도 낮고 누추했지만, 현(縣)의 지응(支應)14)이 유시(酉時)에 도착하여 그대로 유숙하였다.2일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금성현(金城縣)을 지나 5리를 가니 남대천(南大川)이 있고, 다리를 건너 골짜기로 들어가자 단풍나무가 산에 가득했으며 첫서리가 땅에 깔렸다. 진시(辰時)에 창도역(昌道驛)15)에 도착하니 어사(御史) 최렴(崔濂)이 막 나왔고, 또 40리를 가는 도중에 말 위에서 시를 읊었다. 시는 원집에 실려 있다. 회양(淮陽)과 보리(甫里) 경계에 넓은 들 가운데가 끊어져 깊이가 수백 장(丈)은 되는데, 배 다니는 큰 내가 굽이돌아 남쪽으로 흐르기에 경강(京江)의 장사꾼들이 뗏목을 잡아타는 곳이다. 회양부(淮陽府)까지 30리를 못 미치는 곳에 신안역(新安驛)이 있는데, 제영(題詠)한 시 10여 수가 있다. 역에서부터 부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3개의 재가 있으니, 첫째는 당애아(唐涯阿), 둘째는 아아라(阿兒羅)이고, 부에 거의 이르면 백령(栢嶺)이 있는데, 재에는 무성한 잣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렸으며 둘레는 30리였다. 부를 지나 1리쯤 가니 바로 은계(銀溪)인데 또한 나룻배 건너는 곳이고, 은계를 건너 5리쯤 가니 은계역(銀溪驛)16)이 있다. 날이 저물어 횃불을 켜고 역에 가서 숙소로 정하니, 부사 홍인걸(洪仁傑)이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었다.9월에 북도의 여러 진(鎭)을 순행하였다. 이때 지은 시는 원집에 실려 있다.평사(評事)는 실제로 학교를 감독하여 인솔하는 책임과 여러 도를 순찰하여 안무(按撫)하는 직책을 겸한다. 그런데 전임자는 생도(生徒)에게 예로써 대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강(考講)을 매우 엄하게 하여 해마다 유안(儒案)에서 도태되어 군적(軍籍)에 충당시킨 자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어 북도 사람들이 탄식하고 원망한 지 오래되었다. 선생이 부임하여 말하기를, "관북(關北)은 먼 국경 지역17)이라 국가의 문교(文敎)가 아직 널리 펴지지 못하였으니, 이곳의 생도를 책망한들 어찌 호남과 영남의 유향(儒鄕)처럼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바로 고강하는 규정을 느슨하게 하여 음을 읽고 뜻을 해석하는 단계만 통하기만 하면 모두 도태를 면하게 하였다. 유생들을 인접(引接)하여 예법으로 대우하고 예의로 가르치며, 공부를 권하여 감독하고 인솔하며, 지극히 정성스레 인도하여 도와주었다. 북변(北邊)을 순시하여 민폐를 묻고 군정(軍政)을 검열하여 폐단을 제거하고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온갖 제도가 정비되자 북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20년 임진년(1592) 선생 28세 4월 29일에 선생이 행영(行營)에 있으면서 왜적이 부산(釜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5월 1일에 한격(韓格)의 편지를 통해 이어서 듣기를 "4월 15일에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여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고, 울산(蔚山)·언양(彦陽)·양산(梁山)의 수령들은 계원장(繼援將)18)으로 모두 피살되었습니다. 수영(水營) 및 양산·언양·밀양(密陽)의 군사들이 한창 접전(接戰)하고 있는데, 왜적의 예봉이 당당한 터라 조금도 대적할 형세가 못 됩니다."라고 하니, 선생은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략을 마련하여 막아낼 계획을 세웠다.2일에 온성(穩城)의 토병(土兵) 여정(汝丁)을 통하여 장계(狀啓)하게 하고, 본가에도 편지를 써서 부쳤다. 이날 강혜(姜譓)가 영동(嶺東) 감영에서 와서 전하는 말이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이 성을 버리고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과 군사를 합하였습니다."19)라고 하였다.6일에 선생이 회령(會寧)에 이르러 관보를 보니 '성상께서 백관에게 말[馬]을 바치게 하였고, 또 스스로를 책망하고 원병을 구하는 교지(敎旨)를 내렸다.'고 하였다. 왜적이 울산·양산·밀양 등지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승승장구의 형세를 이루었다.9일에 경성(鏡城)에 있었는데, 또 왜적이 경기(京畿)를 압박하여 성상께서 평양(平壤)으로 행행(行幸)했다고 들었다. 선생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내의 정병(精兵) 수백 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임금을 도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10일에 감사의 공문을 보니 '어가(御駕)는 파천(播遷)하였고 왕자는 두 갈래로 갈라져 안변(安邊)에 와 계시니, 정예병을 뽑아 보내 철령(鐵嶺)에서 왕자를 모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즉시 부령(富寧) 이남의 군사 300명을 뽑아 옥련 만호(玉連萬戶)에게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에게 평양에 문안하게 하며,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에게 안변에 문안하게 하고, 인하여 관노(官奴)를 보내 청송(靑松)의 판서공(判書公) 임소로 문후하게 하였다.11일에 진무사(鎭撫使)가 서울에서 와 알리기를 "왜적이 이미 충주에 이르러 신립(申砬)이 패하여 죽자, 서울의 남녀들이 다투어 도성 문을 나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12일에 부령에 거주하는 백성이 4월 18일에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비로소 맏형과 동생이 청송의 임소까지 부친을 모시고 갔음을 알았다. ○선생은 비록 난리에 길이 막혔지만, 매달 반드시 관노를 보내 판서공의 임소에 문후를 드렸다.6월 12일에 철령의 군사들이 궤멸 되어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왜장(倭將) 평청정(平淸正)의 용맹은 삼군(三軍)에서 으뜸이고, 군사들은 더욱 날래고 사나워 하루에 수백 리를 가니, 비바람과 같은 기세에 닭과 개 한 마리도 남기지 않았다. 승승장구하여 함경도로 들어오자 북관(北關)의 토적(土賊)이 왜적과 한패가 되었는데,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臨海)·순화(順和) 두 왕자 및 대신 김귀영(金貴榮)·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승지 황혁(黃赫)을 잡아 왜적에게 항복하였다.경성의 국세필(鞠世弼)과 명천(明川)의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여 난을 일으켜 수령과 진장(鎭將)을 다투어 잡아 왜적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평청정이 마침내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모두 취하고서 국경인을 왜관(倭官)의 형판(刑判)으로, 국세필을 예백(禮伯) 겸 본도 병사(兵使)로, 정말수를 대장(大將)으로 삼아 관북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그의 장수 직정(直正)과 도관여문(都關汝文) 등을 길주(吉州)에 주둔하게 하고, 자기는 군대를 이끌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평청정이 백성을 위협하며 산림(山林)을 수색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도륙하니, 의관 갖춘 선비들은 머리를 움츠리고 몸을 숨겨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7월에 선생이 드디어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였다. 전 감사 이성임(李聖任)도 피난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끝까지 찾아서 가서 만나고 함께 창의(倡義)를 도모했지만, 군중이 무너져 성취하지 못하였다.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수성 찰방 최동망·유배 중인 한백겸(韓伯謙)·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경성으로 들어갔으나, 군중들은 국세필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져버렸다.8월에 선생이 샛길로 탈출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다가 용성(龍城 경성(鏡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투숙하였다.선생이 저물녘에 한인간의 집에 투숙하자, 한인간이 자세히 보다가 "혹시 평사공(評事公)이 아니십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움칫하며 "나는 서울 상인으로 난을 만나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는 무슨 망언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인간은 마음속으로 알아보고 바로 모시고 들어가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추석일(秋夕日)에 한인간이 자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 음식을 먼저 선생에게 드리자, 선생이 말하기를, "예에 있어서 이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한인간이 말하기를, "우리 집 조상은 천한 사람이니, 가령 생존해 있을 때 평사께서 왕림하셨다면 진실로 감히 이 음식을 먼저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며칠이 지난 뒤에 최배천(崔配天)·지달원(池達源)20) 등을 만나 함께 경성 어랑리(漁郞里) 혹은 어란리(禦亂里)라고 한다.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함께 다시 거의를 도모하였다.선생이 이붕수·최배천·지달원 등에게 함께 도모하여 동류(同類)를 이끌어 오고 초유문(招諭文)을 서로 돌리니 점점 향응(響應)하였다.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가 가장 먼저 오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각 진의 수장(守將) 및 피난 온 조정의 관리 서성(徐渻)·이성길(李成吉) 등도 모여들었다. 이붕수가 몸소 식량을 지고 산길에 난 샛길을 따라 길주(吉州)로 가서 왜병의 출입하는 형세를 은밀히 엿보았는데, 이처럼 한 것이 모두 두 차례였다. 왜노가 국세필과 내통하여 끊임없이 왕래하자, 강문우 등에게 길에서 맞이하여 모두 격살하게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면서 군중에게 맹세하니, 군중도 모두 충의(忠義)에 감복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선생이 맹주(盟主)를 정현룡에게 양보하자 정현룡이 고사(固辭)하고, 사졸들도 선생을 따르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은 대장(大將), 정현룡은 부장(副將), 이붕수는 별장(別將), 강문우는 척후장(斥候將)이 되었다.이때 변방의 오랑캐들이 난을 틈타 야인(野人)들과 군사를 연대하여 여러 차례 변경을 침략하자, 국세필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최배천은 평소 국세필과 잘 지내는 사이라 선생이 몰래 최배천을 보내어 말 한 마리를 타고 가서 거짓으로 투항하게 하였다. 최배천이 마침내 틈을 타서 국세필에게 나라가 중흥하는 경사를 들어 설득하고 또 말하기를, "정 평사(鄭評事)는 위엄과 명망이 있으니, 만일 그를 영입하여 함께 지킨다면 오랑캐는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선생에게 고하자 선생이 즉시 격문을 보내 국세필을 타일렀는데, 국세필은 여전히 의심하면서 군대를 엄중하게 정비하여 기다렸다.9월 16일에 선생이 의병을 거느리고 경성으로 들어가 지켰다.이때 왜적들이 오래 머물러 있었기에 군저(軍儲 군량 등의 군수물자)가 탕진되자, 좌수(座首) 이기수(李麒壽)가 그 불타고 남은 것을 거두어 창고에 봉해두고 수리하여 의병을 기다렸다. 선생이 성 아래에 이르러 국세필을 불러 만나서 위협도 하고 알아듣게 타이르니, 국세필이 이내 맞아들였다. 선생이 드디어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지난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또 자기에게 화살을 쏘았던 반민(叛民)을 기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장수들은 국세필을 참수하고자 했으나 선생은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성급하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국세필이 그의 심복에게 좌우를 지키게 하고 동정(動靜)을 살피게 하였으며, 모든 문서를 매번 훔쳐보았다. 선생이 치계(馳啓)하려 할 때 국세필에 관한 일에는 짐짓 완곡한 말을 써서 그 초본(草本)을 다른 원고 속에 끼워 책상 위에 두고 잠깐 일어나 뒷간에 가자, 국세필은 그것을 보고 과연 기뻐하면서 스스로 안심하였다. 선생은 이내 자기 부하를 시켜 사졸들과 함께 성에 올라가 전술을 익히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는데 날마다 이처럼 하였다.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선생이 격문(檄文)을 초(草)하여 북변의 사민(士民)들에게 알아듣게 타일러 충의로써 격려하자, 북변 일대에서 향응(響應)하여 모두 스스로 분발할 것을 생각했다. 이 격문은 잃어버렸다.19일에 길주로 진격하여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이때 길주의 왜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 아래에 이르자, 선생이 이희당(李希唐)과 강문우 등에게 명하여 힘을 합해 추격하게 하여 10여 차례 교전했는데, 왜적이 시체를 싣고 패주하였다. 유혈이 길을 적시고 수급(首級)을 많이 얻었으니, 의병을 일으킨 이후로 이것이 최초의 승첩이라서 군대의 명성이 점차 떨쳐졌다.20일에 행조(行朝)에 계문(啓聞)하였다. 계본(啓本)은 원집(原集)에 보인다. ○28일에 주군(州郡)에 두 번째 격문을 보냈다. 격문은 원집에 보인다.선생이 몸을 바쳐 공을 세우라는 뜻으로 분발하고 힘써 격문을 돌리니, 말뜻이 위엄 있고 당당하여 북방의 장사(壯士)들이 그것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와서 응모하였다. 육진(六鎭)의 반민(叛民)들도 선생이 이미 반란자21)들을 풀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차례대로 투항하니, 이에 북변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이 외재(畏齋) 이공(李公)22)에게 답한 편지23)에 말하기를, "일찍이 그분의 임진년 격문을 읽고 그분의 사람됨을 상상한 적이 있다."라고 하였고, 노봉(老峰) 민공(閔公)24)도 말하기를, "임진년에 대중에게 알아듣게 타이른 글을 보니, 그의 충의와 식견이 저처럼 탁월하였다."라고 하였다.10월 14일에 역적 국경인과 정말수(鄭末秀)25) 등을 쳐서 참수하고 바로 치계하여 행조(行朝)에 아뢰었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선생이 회령(會寧)에 공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투항하라고 타일렀는데, 국경인이 따르지 않고 길주의 왜장과 경성(鏡城)을 협공하자, 회령의 유생 오윤적(吳允迪)과 도훈도(都訓導) 신세준(申世俊) 등이 국경인과 그 잔당 6인을 쳐서 참수하여 군문(軍門)에 수급을 바쳤다. 명천(明川) 사람도 자제와 단결하여 정말수를 공격하여 선생과 호응하려다가 도리어 적에게 패배하였다. 선생이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과 강문우(姜文佑)를 보내 정예 기병 60여 명을 이끌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려 갑자기 명천에 진입하자, 정말수가 깜짝 놀라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강문우 등이 뒤쫓아 사로잡고 참수하였다.이어서 역적 국세필을 베고 행조(行朝)에 계문하였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난이 일어난 초기부터 국세필이 반적의 괴수가 되자, 선생은 위무하여 난을 평정할 계획을 세웠다. 하루는 갑자기 두 역졸(驛卒)이 까닭 없이 크게 소리치자, 선생은 그것이 국세필의 흉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즉시 두 역졸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영을 내려 성에 올라가 전술을 익히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고, 다음 날 아침에도 이처럼 하였다.선생이 대장 깃발을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앉자, 국세필이 장수들과 함께 군례를 행하고 들어가 뵈었다. 선생이 강문우에게 명하여 자리에서 국세필을 잡아 문루를 내려가게 했는데, 문이 좁아 방해될까 염려하여 마침내 문루의 판자를 차서 부러뜨리고 끌어안아 내려갔다. 그 잔당들은 국세필이 사로잡힌 것을 보고 밖에서 무기를 빼서 들어오기에 선생이 활을 당겨 문틈으로 쏘아 죽였다. 국세필 등 13명을 모두 참수하여 대중에게 조리돌리며 말하기를, "당초 반역을 일으킨 것은 이 무리뿐이니 이 외에는 상관없다."라고 하자, 이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졌고 사기는 열 배나 높아졌다.선생이 장수들과 출병하여 왜적을 격퇴할 계책을 의논하자,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엿보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제 지키고만 있다면, 어찌 처음에 의병을 일으킨 뜻이겠습니까. 그러나 마땅히 대중과 모의하여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대중을 남문 밖에 모아 놓고 그 가부를 물으니, 대중이 모두 선생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이에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을 경성에 남아 지키게 하였다.21일에 마침내 삼위(三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성을 나와 몇 리를 행군하는데 어떤 사람이 선생을 맞이하여 고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강성하여 싸우면 반드시 불리할 것이니, 성을 지키고 스스로 보전해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적을 위하여 나의 군사를 저지하려는 것이냐?" 하고, 바로 그의 머리를 베어 깃대에 매달았다. 이때 왜장 직정(直正)·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都關汝文) 등이 길주에 점거하고, 또 영동(嶺東)에 군사를 배치하고 목책(木柵)을 치며 남북으로 길을 통하여 왕래하면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선생은 중위장(中衛將) 정현룡(鄭見龍)과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명천에 머물며, 정예병 4백 명을 뽑아 두 부대로 나누어 고참(古驂) 지역으로 나아가 주둔하며 요로(要路)에 매복시켰다.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이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해정창(海汀倉)에 주둔하여 약탈하는 적의 동태를 엿보았으며, 우위장(右衛將) 오응태(吳應台)는 길주와 서북쪽 보(堡)의 정예병 2백여 명을 이끌고 길주에서 30리 떨어진 아간창(阿間倉)에 주둔하며 산에 올라가 적의 진영을 엿보았다.30일에 명천의 왜적이 길주의 적과 합세하여 사방으로 나와 크게 노략질을 하자, 선생은 장수들을 나누어 진격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하고 그 대장 직정과 도관여문 등을 참수하고 8백여 수급을 참수하였으며, 군장(軍裝)을 많이 노획하였다.동틀 무렵에 왜적 천여 명이 장평(長坪) 가파리(加坡里)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며, 해 질 무렵에 노략질한 남녀와 재물·가축을 몰고 돌아가는데, 원충서(元忠恕)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요격(邀擊)하여 길잡이 왜적 2명을 참수하자 적이 놀라서 달아났다. 마침 큰 진영을 갖춘 왜적이 성안에서 계속 지원하기에 원충서가 산세가 험준한 곳으로 물러나 보존하였고, 복병장(伏兵將) 한인제(韓仁濟)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60리26) 길을 달려와서 원충서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적의 괴수 직정·도관여문 등과 이름 모르는 장수 5인이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거느리고 용감하게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여 싸웠는데, 좌척후장(左斥候將) 구황(具滉), 우척후장(右斥候將) 강문우, 별장 안옥(安沃), 종사관 인원침(印元忱), 군사(軍司) 황사원(黃嗣元)·박은주(朴銀柱) 등이 각각 부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돌진하자, 일꾼과 병졸들까지 모두 용기가 북돋아 올라 빗발치듯 화살을 쏘자 왜적들은 말에서 내려 땅에서 싸우다가 날이 저물고 힘이 다해서야 비로소 패주하였다. 복병장 고경민(高擎民)이 부하를 거느리고 산 위를 차단하자, 정예롭고 용맹한 우리 군사가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그 장수 5인을 참수하고 8백 2십여 수급을 베었으며, 산골짜기로 도망친 자들은 사방으로 불을 놓아 모두 태워 죽이고, 화살에 맞거나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말 118필을 얻었고 노획한 군장과 기계가 매우 많았으며, 잡혀갔던 남녀들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논하는 자는 "왜적이 국경에 들어온 뒤로 우리 군대가 붕괴(崩潰)되어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충무(李忠武 이순신(李舜臣))의 한산(閑山) 전투와 권 원수(權元帥 권율(權慄))의 행주(幸州) 전투를 제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무리들이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고 온전히 승리하여 환란을 극복한 경우라면 이 승첩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11월 1일에 왜적을 격파한 일로 장계하여 행조(行朝)에 아뢰었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 ○12월 25일에 길주 임명(臨溟)의 왜적을 격파하고 육진(六鎭)의 반당(叛黨)을 찾아내 주벌했으며, 평사(評事)의 본직으로 북변을 순행하여 변방 오랑캐들을 불러 복종시켰다.길주에 머물던 적이 성에 점거하고 굳게 지키기에 장수들이 여러 번 포위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급히 취한다면 사졸을 많이 다치게 할 것이니, 영동(嶺東)으로 군사를 옮겨 먼저 목책 안의 적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목책 안의 왜적이 평정되면 성안의 왜적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형세라 마치 새장 속의 새를 잡는 것과 같으리라."라고 하고, 그날로 군사를 옮겨 영동으로 향하여 임명의 쌍포(雙浦)에 이르렀다. 마침 임명 마을 집들을 노략질하는 목책 안의 왜적 4백여 명을 만났는데, 복병장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하고 대군(大軍)에게 급히 알리자, 삼위(三衛)의 군사들이 일시에 돌진하여 백여 명을 사로잡거나 참수했으며, 바로 그 시체를 취하여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길가에 늘어놓으니 10여 리나 이어졌다. 이어서 목책 안의 적을 진군하여 포위하고 왜장에게 격문을 던져 말하기를, "장평(長坪)에서 귀를 베인 무수한 놈들은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치는 종놈이 될 것이고, 쌍포에서 거세당한 많은 놈들은 살아 있을 때만 남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처음에 재신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변에 들어가 갑산(甲山)으로 돌려 들어갔다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자, 행조(行朝)는 그대로 감사(監司)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이 변방에 나온 중신(重臣)으로서 왜적 한 명도 사로잡은 공이 없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선생의 명성과 공적이 자신을 압도한 것을 시기하여 비난하며 말하기를, "아무개는 본래 일개 보좌관으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미 법도를 어겼으며, 게다가 북도의 호란(胡亂)을 급히 달려와 보고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네 번이나 공함(公緘)27)으로 추고(推考)했는데, 선생은 사리에 의거하여 시비곡직을 따지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윤탁연이 크게 노하여 그 실정을 뒤집어 행재소(行在所)에 아뢰기를, "군사는 모두 길주 목사가 소집한 군사이고, 공로는 모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며, 패군장 원충서(元忠恕)도 녹훈(錄勳)에 참여하였고, 정희적(鄭熙績)과 고경민은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해 위에 아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여 여러 가지로 헐뜯고 무함했으며, 또 선생의 전공(戰功)으로 얻은 수급을 모두 빼앗아 휘하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28)을 바치도록 유도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실상을 까맣게 모르고 표창과 포상을 행하지 않았다.또 정현룡(鄭見龍)은 처음에 겁을 먹고 선봉에 서려고 하지 않다가 공을 세우게 되자 또 선생과 틈이 생겼다. 이보다 앞서 약탈당한 사대부 대부분이 선생에게 찾아와 재보(財寶)를 찾아 돌려주기를 요구하자, 선생은 백성을 괴롭힐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자 정현룡이 들어주기에 선생이 또 꾸짖고 저지하였다. 정현룡이 마침내 크게 원한을 품고 사이가 틀어져 유언비어를 함께 날조하니, 윤탁연이 몰래 주도하여 늘 군법으로 선생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 휘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이 쫓겨나거나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렬해져 덕을 본 것 없이 해만 입는다고 하여 선생을 배반하지 않았다.윤탁연은 선생의 대장직을 갈아 정현룡으로 대신하게 하고, 선생을 포망장(捕亡將)29)으로 삼아 마천령(磨天嶺)에 나아가 주둔하여 도망하는 군졸을 잡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길주와 영동이 아직 소탕되지 못했는데, 북쪽 땅으로 도망친 군졸이 어찌 남관(南關)으로 도망갈 리가 있겠습니까?"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고 북병사(北兵使)의 지휘에 따라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반당(叛黨)의 남은 무리를 베고 오랑캐들을 불러서 타이르고 상벌을 적절하게 하니, 백성들이 오랑캐들이 경외하여 감히 더이상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였다.▪21년 계사년(1593) 선생 29세 1월 9일에 조정에서 국세필을 참수한 선생의 공로에 상을 내려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직시켰다. ○12일에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한 일을 장계로 행조에 아뢰었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윤탁연이 정현룡을 대장으로 삼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겸절도사(兼節度使)로 옮겨 제수하고 대장을 오응태(吳應台)로 대신하게 하더니, 또 한 달 남짓하여 도로 선생을 대장으로 삼았다. 대개 군중(軍中)에서 선생을 잃고부터 분개하고 불평하여 의사들은 흩어져 떠나고 왜적들은 으르렁대며 틈을 엿보며, 반민(叛民)의 잔당도 다시 들고일어날 기미가 있자 식자들이 모두 허물을 윤탁연에게 돌렸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자가 선생에게 이르기를, "사퇴할 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처음에 내가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을 뿐인데 이제 죽을 자리를 찾았으니, 어찌 공을 빼앗겼다고 부끄럽게 여겨 작은 혐의를 돌아보고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나의 본뜻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그 사람이 사과하였다.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와 머물며 장사들을 먹이고 위로하며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자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삼위(三衛)의 장사 및 육진의 군민들은 선생이 돌아온 것을 보고 용기가 백배 오르고, 떠났던 자들도 다시 모였다.15일에 진군(進軍)하여 야인(野人)과 오랑캐들을 격파하였다.이때 깊숙한 곳에 있던 야인들이 틈을 타서 종성(鍾城) 부계리(涪溪里)에서 괴롭히고 약탈하자, 선생이 경원(慶源)에서 급히 달려가 온성(穩城)·종성·행영(行營)의 삼위의 군사들에게 세 곳에 복병을 두어 길에서 요격하게 해서 패주시키고, 그들의 군장과 마필을 노획하였다. 아울러 사로잡혔던 남녀 30여 명 및 재물과 가축을 모두 빼앗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16일에 행조에 계문(啓聞)하였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 ○18일에 본주(本州, 길주) 다신리(多信里)에 나아가 장수들을 먹이고 위로하였으며, 예전과 같이 부서를 나누었다. 22일에 단천(端川)에 진군하여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 27일에 행조에 계문하였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단천 군수 강찬(姜燦)이 와서 말하기를, "단천에 머물러 있는 적이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니,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소서."라고 하자, 장수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다. 선생이 말하기를, "길주 두 군데 왜적은 기세가 꺾여 머리를 움츠리고 있는데, 내가 이제 앉아서 강병(强兵)을 쉬게 하고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즉시 정예병 200명을 뽑아 구황(具滉) 등 네 장수에게 각각 장사(將士) 50명씩 거느리고 재를 넘어 동쪽으로 가서 성 밖에 군사를 복병(伏兵)하게 하고, 단천의 군사에게 앞으로 나아가 싸움을 걸게 하였다. 그러자 성안에 머물던 적이 연이은 승리에 익숙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200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장 단천의 군사를 추격하여 복병한 곳에 이르렀다. 이에 복병한 4개의 부대가 일제히 뛰쳐나와 좌우로 돌진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고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여 거의 다 쏘고 베었으며, 겨우 남은 30여 명도 하나하나 화살에 맞은 채 성으로 들어갔는데, 원충서(元忠恕)도 왜장을 성 아래에서 격참(擊斬)하였다.2월 1일에 또 백탑교(白塔郊)에서 청정(淸正)을 크게 깨뜨리자, 청정이 그 무리를 거두어 밤을 틈타 도망쳤기에 관북(關北)이 모두 평정되었다. 2일에 왜적이 퇴각했다는 장계를 행조에 아뢰었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이때 청정이 형세가 고립되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길주(吉州)에 머물러 있는 왜군이 한창 의병에게 포위되어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자, 마침내 스스로 2만 명을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합병하여 와서 구원하였다. 이에 선생이 염탐하여 알고 군사 3천 명을 모두 먼저 임명(臨溟)을 점거하고 복병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이윽고 왜적이 들판을 뒤덮다시피 왔는데 의병의 약소한 모습을 보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치자, 선생은 드디어 복병을 출동시켜 그 후미를 끊고 즉시 삼위(三衛)의 굳센 군사들을 지휘하여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그를 따르고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60여 리를 이리저리 싸우다가 백탑교에 이르러 빗발치듯 화살을 쏘자 유혈이 길에 가득하였다. 청정은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힘이 다하자 날이 저물어서야 성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화살에 맞아 죽은 자들을 거두어 불태웠으며, 그 무리를 모두 거두어 밤을 틈타 도망쳐 재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밥을 지을 겨를도 없었다. 선생이 영동까지 추격하고 돌아왔으니, 이에 관북 지방이 드디어 깨끗해졌다.3일에 군공(軍功)을 마련하여 행조에 계문하였다. 계본은 원집에 보인다.선생이 드디어 장평(長坪)·임명·단천·백탑교 네 곳의 대첩(大捷)과 육진을 진정한 공로를 기록하여 최배천(崔配天)에게 장계를 품고 행조에 아뢰게 했는데, 전후 승전한 공을 모두 장수와 보좌관에게 돌리되 등급에 차등을 두었을 뿐, 오로지 자기의 공으로 삼지 않았다.19일에 순영(巡營)에 첩보(牒報)하였다.윤탁연(尹卓然)은 선생이 마음대로 공을 기록하여 계문한 것에 노하여 공문을 보내 힐책하였는데, 말이 대부분 조리가 없었기에 선생은 즉시 보첩(報牒)을 치계(馳啓)하여 매우 분명하게 시비를 따졌다. 이에 윤탁연은 더욱 성내어 군법으로 선생을 해치고자 하여 마침내 선생의 장수와 보좌관을 잡아다 혹독하게 고문하여 선생의 과실을 샅샅이 찾았지만, 장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선생을 배반하지 않았다. 윤탁연은 얻은 것이 없자 바로 무함하는 장계를 짓고 더욱 심하게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전후 승리한 공로에 대해 그 실상과 반대로 보고하였다. 선생이 비록 최배천을 시켜 계문하게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도신(道臣)의 장계를 중시하여 사실로 여겼기 때문에 선생이 전후로 아뢴 승전보는 하나도 조정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다.4월에 병마(兵馬)를 병사(兵使)에게 귀속시키고 청송(靑松) 임소로 돌아가 판서공(判書公)을 뵈었다.이때 판서공은 청송 부사가 되어 온 가족이 임소에 따라갔기에 하인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병란에 해를 입지 않았으니, 아마도 왜인이 '송(松)' 자를 피하여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30)▪22년 갑오년(1594) 선생 30세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다.안변 군수(安邊郡守) 최동망(崔東望)과 창수(唱酬)한 시들이 있다.▪23년 을미년(1595) 선생 31세 6월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이배(移拜)되었다.이때 조정에서는 난이 일어난 뒤에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서 자주 관북의 여러 고을로 옮겨서 진무(鎭撫)해주기를 요구하였다. ○창주(滄洲) 이성길(李成吉)과 창수한 시들이 있다.▪24년 병신년(1596) 선생 32세 3월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이배되었다.부임할 때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증별시(贈別詩)가 있다. 부록에 보인다. ○한인간(韓仁侃) 부부를 관아로 맞아들여 후의(厚意)에 보답했다.8월에 백부 제학공(提學公)31)을 곡하였다.선생이 제학공을 아버지처럼 모셔 항상 관록(官祿)으로 봉양하였다. 선생이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있을 때 제학공이 시를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일흔 하고도 여덟 먹은 이 늙은이 七十八年此老翁형제1)1) 형지(荊枝) : 자형나무 가지로, 형제를 의미한다. 옛날에 전진(田眞)이란 사람의 형제 3인이 부모의 유산을 똑같이 나누고, 마지막으로 당(堂) 앞에 서 있는 자형나무 한 그루를 셋으로 쪼개서 나누자고 의논했는데, 자형나무가 갑자기 말라 죽어 버렸다. 전진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나무는 본래 뿌리가 하나인데 쪼개서 나누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이 때문에 시들어 버린 것이니, 이는 우리 같은 사람이 나무만도 못하다.[樹本同株, 聞將分斫, 所以顦顇, 是人不如木也.]"라고 하고, 슬퍼하면서 그 나무를 나누지 않자 그 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무성해졌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續齊諧記 紫荊樹》중에 또 장존공2)2) 장존공(長尊公) : 장남이라는 말이다. 제학공은 3형제 중 장남이고, 정문부의 부친인 정신(鄭愼)과 정핍(鄭愊) 두 동생이 있다.되었네 荊枝又忝長尊公피골만 남아 가엾게도 고통 심하니 但存皮骨憐肌削늘 새벽과 저녁이면 배고픔 걱정하네 每到晨昏患腹空자식들 모두 못나 제 살기도 어려운데 諸子皆豚難自活너만은 노상에서 곤궁한 날 걱정하네 惟君在道念吾窮허다한 소망이야 다 말하기 부끄럽고 許多祈望羞煩喋무엇보다 꿈에서라도 훌륭한 장수되길 最是良鷹入夢中또 온성 부사로 있을 때 시를 부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실정 없이 옥에 갇혀 용서받기 쉬우니 縲絏無情易見原말 많은 비방과 칭찬 따질 필요 없네 毁譽多口不須論직첩 몰수당해도 천명에 편안했었는데 曾收告帖能安命특별히 수령에 제수하는 은혜 감사하네 特授專城想感恩기어코 충성과 근면으로 보국 생각하고 生死忠勤思報國공명 세워 가문 일으키도록 힘쓰게 功名成立勉興門나는 늙어 다만 인생무상3)3) 조로(朝露) : 해가 뜨면 곧 스러지는 아침 이슬로,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한탄하니 老來第恨臨朝露서로 천 리 떨어져 꿈속 혼만 허비하네 千里相離費夢魂다시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이르러 감찰 이붕수(李鵬壽)를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시는 원집에 보인다.계사년(1593) 백탑(白塔)의 전투에서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이 먼저 올라가 전사하였기에 시에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32)을 이들에 견주었다. ○참봉 지달원(池達源)이 찾아오자 선생이 머물게 하고 〈설월(雪月)〉33)과 〈관계(關鷄)〉34) 등의 시를 지었다. 원집에 보인다. ○이때 동계(桐溪) 정온(鄭蘊) 공이 본 주(州)에 귀양 와서 선생과 서로 친분이 두터웠는데, 동계가 준 시에 '요충지 막아 지킨 공이 부럽고[羨公堪鎖鑰], 본디 어리석고 게으른 내가 부끄럽소.[愧我素愚慵]'35)라고 한 구가 있다. 부록에 보인다.고을 재임 중에 조련당(操練堂)을 창립하고, 정사를 맡은 지 1년 만에 은혜와 위엄이 모두 드러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경외하였다.《지봉유설(芝峯類說)》에 "선생이 공무로 회양(淮陽)을 지나가다가 설날을 만났다. 일행이 배가 고파서 외상으로 술을 마시려고 했는데, 거주민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시를 지어 '회양은 박하지 않는데 인정은 박하고[淮陽不薄人情薄], 철령은 높지 않은데 술값은 높네.[鐵嶺非高酒價高]'36)라고 읊었다."라고 하였다.▪25년 정유년(1597) 선생 33세 어사(御史) 유인길(柳寅吉)이 선생의 치적을 조정에 드러내어 밝히자, 옷의 겉감과 안감[表裏]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선생이 떠난 뒤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8월에 안변 부사로 이배되었다.이때 규오(葵塢) 유인길(柳寅吉) 공이 북로 어사(北路御史)가 되어 선생과 함께 본 부(府) 남천(南川)과 사루(射樓)에서 놀면서 창수한 시들이 있다. 원집에 보인다.11월에 공주 부사로 이배되었다.이때 조정에서 한창 외방(外方)의 진관(鎭管)37)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서애(西崖) 유상공(柳相公) 성룡(成龍)이 선생의 통솔에 법도가 있다고 아뢰어, 군정(軍政)을 정돈하게 하고 여러 읍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였다.▪26년 무술년(1598) 선생 34세 공주의 임소에 있을 때 명나라 장수와 창수(唱酬)하였다.이때 명나라 장수가 왜적을 추격하여 공주에 이르렀는데, 선생이 마음을 다해 책응(策應)38)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편의를 봐주자, 명나라 장수가 시를 지어 가상히 여겼고 선생도 그 운을 차운하여 보냈다. 시는 원집에 보인다.11월에 체임(遞任)되어 돌아왔다.▪27년 기해년(1599) 선생 35세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1월에 둘째 아들 대륭(大隆)이 태어났다.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시험 제목은 〈백발로 함께 숙직하면서[白首同夜直]〉39)인데, 이 한 편은 문원(文苑)에서 전송(傳誦)되었다.▪28년 경자년(1600) 선생 36세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체부(遞付)되었다.이때부터 군직(軍職)에 발령되기도 하고 판결사(判決事)가 되기도 하였는데, 벼슬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고을 수령으로 나아가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할 계획을 세웠다.▪29년 신축년(1601) 선생 37세 품계가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때 북변 사람들이 상소를 올려 선생이 왜적을 격파한 공을 칭송하였기 때문에 특명으로 가자(加資)하고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약봉(藥峰) 서성(徐渻)40) 공이 교서(敎書)를 지어 올렸다. ○당시에 조정에서 선생의 문학과 공적을 아는 자가 통현(通顯)의 지위에 올려주려고 했지만, 선생은 평소 성품이 담담하고 겸손하여 일찍이 시속에 붙좇아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북관(北關 함경도)에서 세운 공렬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랑하지 않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선생을 아는 자는 더욱 감복하였다.▪30년 임인년(1602) 선생 38세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41)과 함께 한강에 배를 띄워 놀면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다.선생이 명나라 사신에게 준 시에 "함께 건넘에 나는 곽태42) 아니라 스스로 부끄럽지만[同濟自慚非郭泰], 이번 생에 형주 안 것43) 얼마나 다행인가.[此生何幸識荊州]."라고 한 구가 있고, 또 뱃놀이를 적은 시 2수와 한강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며 지은 고시(古詩) 한 편이 있다. 원집에 보인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44)가 일찍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바람은 발도 없이 천 리를 간다.[風無一足行千里]'라는 구를 얻었는데, 끝내 대구(對句)를 짓지 못하여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대답하기를, "달은 외바퀴이지만 구천을 돌아다니네.[月有孤輪轉九天]"라고 하자, 듣는 이들이 선생의 시가 더 낫다고 했다.▪31년 계묘년(1603) 선생 39세 1월에 계부 승지공(承旨公 정핍(鄭愊))을 곡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32년 갑진년(1604) 선생 40세 8월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다. ○10월에 양주(楊州) 외송산(外松山) 어룡동(魚龍洞)의 참의공(參議公) 묘 아래에 판서공을 장사지냈다.▪33년 을사년(1605) 선생 41세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선생이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예제(禮制)를 넘어 지나치게 슬퍼하여 몹시 야위었다. 선생은 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다시 회초리를 맞고자 해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매번 오열하며 스스로 가누지 못하였다. 이는 아마도 판서공이 자제들을 매우 엄하게 가르쳐,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매양 회초리로 때렸기에 선생이 이처럼 추모한 듯하다.▪34년 병오년(1606) 선생 42세 2월에 형의 아들 정대일(鄭大逸)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0월에 상복을 벗었다.▪35년 정미년(1607) 선생 43세 2월에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제수되었다.▪36년 무신년(1608) 선생 44세 2월에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승하(昇遐)하였다. ○선조대왕의 만사(輓詞)를 지어 올렸다.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살펴보건대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의 무신년(1608, 선조41) 《고부일기(告訃日記)》에 "오봉이 정사(正使)로서 명나라 북경에 갔다45)가 모년 모월 모일에 안주에 돌아왔을 때, 목사 정모(鄭某)가 나와서 영접했다."라고 하였다.▪37년 기유년(1609) 광해군 원년 ○선생 45세선생이 월사(月沙)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는데, 일찍이 그가 무함(誣陷)을 따지러 떠날 때46) '〈일생을 고생한다[一生勤苦]〉'라는 시를 지어주었고, 또 율시 두 수와 절구 두 수를 지어주었다. 원집에 보인다. 이공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자허(鄭子虛 정문부)의 사람 됨됨이와 재주와 기국은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하는데, 다만 그의 너무 지나친 강직함이 한이다."라고 했다.▪38년 경술년(1610) 선생 46세 사은 부사(謝恩副使)로서 북경으로 가면서 연행시(燕行詩) 여러 편을 지었다.선생이 옥하관(玉河館)47)에 이르러 이제묘(夷齊廟)에 참배하고 "만일 당시에 동쪽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기자의 봉지가 절로 별천지 였을테지.[若使當年東渡海, 箕封自有別乾坤.]"라는 시를 지었다. 도중에 연산(連山)의 경보(警報)를 듣고 "밤에 우수수 느릅 입 떨어지는 소리 듣고, 새벽에 일어나 보갑 속 칼 새로 가노라.[夜聞楡葉墜蕭蕭, 曉起新磨匣裡刀.]"라는 시를 지었으니, 선생의 장대한 뜻을 대략 알 수 있다. 서장관(書狀官)과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마다 시를 지어 창수한 것이 시축에 가득 찼다.8월에 장자 대영(大榮)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39년 신해년(1611) 선생 47세 6월에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다.부임 초에 고을의 어진 선비를 방문하여 예로써 대우하고 유학의 교화를 크게 일으켰다. 매와(梅窩) 정동설(鄭東卨)·송계(松溪) 장세경(張世經)과 서로 종유하면서 강학하고 토론하였다. ○살펴보건대 장송계(張松溪) 문집 서문에 "공이 종유(從遊)한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니, 정농포(鄭農圃)와 같은 공들이다."라고 하였다.▪40년 임자년(1612) 선생 48세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편양(便養)48)을 위해 외읍(外邑)을 청하였다.이때 광해군(光海君)이 새로 즉위하자 북인(北人)이 극성을 부렸고, 이이첨(李爾瞻)과 이경전(李慶全)이 조정의 논의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정조(鄭造)49)는 선생의 지친으로서 북인의 당에 붙었기에 선생이 조용히 꾸짖어 말하기를, "무릇 사대부의 처세와 몸가짐은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자네는 당인(黨人)과 결탁하여 조정의 논의를 주장하니, 옛날에 이른바 '선조를 욕보이고 집안을 망친다.'라고 한 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니, 정조가 성내어 마침내 선생과 정의(情意)가 격조하게 되었다.3월에 다시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4월 5일에 북도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으로서 부령(富寧)의 과장(科場)에 이르렀다. 18일에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와 만나 수중대(水中臺)에서 놀았다. 길주에 있다.선생이 동계와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는데, 선생이 길주를 다스릴 때 동계는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어 서로 종유하고 강학하였는데 공무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다.20일에 명천(明川)의 과장에 나아갔다.평사(評事) 박수서(朴守緖)와 동계 정공도 함께 왔다. ○이때 동계 선생도 참시관(參試官 부시관(副試官))으로 4월 5일부터 24일까지 선생과 함께 왕복하였다. 그들의 유숙(留宿)하고 유람한 계회(契會)는 동계의 《서정일기(西征日記)》에 모두 실려 있다.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가 수성 찰방(輸城察訪)으로서 찾아왔다.이공 역시 선생과 왕래하며 절차탁마하여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선생에게 시를 주어 "문무 모두 갖춘 장상의 자질로[文武俱全將相姿], 이곳 변방에서 이십 년을 헛되이 보냈네.[卄年虛負此邊陲] 지금 마침 성상이 애타게 인재 구하니[祗今聖上求如渴], 대궐의 뜰에 오를 모습 지켜보리라.[佇見飛騰上玉墀]"라고 하였으니, 그의 경모(景慕)가 이와 같았다.▪41년 계축년(1613) 선생 49세 봄에 길주에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선생이 이이첨(李爾瞻)과 마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이이첨이 선생의 두터운 명망을 사모하여 항상 교분을 맺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한 번도 그의 문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맴돌며 어울리지 못한 것이 대략 10여 년이었다.이때 조정에서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병을 핑계하여 참여하지 않았다.이때 광해군이 혼란하여 이륜(彛倫)이 무너지고 막히자, 북인(北人) 중에 권력을 독점하여 화(禍)를 선동하는 자들이 두 궁은 따로 거처해야 한다50)는 의론을 앞장서서 제기하였다. 이에 선생은 통분(痛憤)하고 깊이 걱정되어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며 날마다 하는 일 없이 술만 마셨다. 정조(鄭造) 등이 찾아와 뵈면 취했다 핑계를 대고 졸기도 하고 눈을 감고 말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에 이르러서는 의리를 들어 참여하지 않았으니, 더욱 흉악한 무리에게 미움을 받았다.▪42년 갑인년(1614) 선생 50세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함께 풍계동(楓溪洞)에서 놀았고,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약속하고 사한정(四寒亭)에서 놀았다. 창수한 시들은 모두 원집에 보인다.시사(時事)가 날로 변하기에 선생은 벼슬살이할 뜻이 없어 날마다 명사들과 산수 사이에서 놀았다. 오직 자취 감추는 것만을 마음으로 삼았으니, 일찍이 《급류용퇴부(急流勇退賦)》51)를 지어 뜻을 보였다.▪43년 을묘년(1615) 선생 51세 6월에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이때 두 궁은 따로 거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격화되어 폐모(廢母 인목대비의 폐위)의 의론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선영 아래에서 대식(代食)52)하였다. 평상시에 술을 흠뻑 마시자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이때 이르러 조정에서 부르는 명이 있어도 나아가지 않았다.▪44년 병진년(1616) 선생 52세 송산(松山)의 선영에 있었다.이때 어떤 권신(權臣)이 공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선생을 찾아와 넌지시 말하기를, "공의 빈곤한 삶이 사람들에게 마음 아프게 하는데, 어떻게 시름을 달래십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바로 대답하기를, "내가 장차 활과 화살을 가지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맹호(猛虎)를 사냥하며 먹고 살지언정, 분수에 맞지 않는 부귀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떠났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이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함경남북도의 사적(事蹟)을 채집하여 선생의 창의(倡義)한 전말을 기록하고, 또 《북관지(北關志)》를 저술하여 선생의 훈적(勳蹟)을 자세히 기재하여 세상에 전하였다.▪45년 정사년(1617) 선생 53세 4월에 이전의 직책으로 조정에서 부르는 명이 내려왔지만, 또 나아가지 않았다. ○6월에 폐모하자는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광해군의 패륜이 날로 심해져 흉악한 논의가 실로 많아지자, 문무(文武) 내외의 신하들을 대거 불러 헌의(獻議)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하가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마땅히 의리로써 판단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 부장(部將) 오정방(吳定邦)이 헌의하여 말하기를, "신은 용맹한 무부(武夫)로서 아는 것이 없지만, 단지 《사략(史略)》 초권(初卷)의 '우순(虞舜)의 효도는 점점 다스려서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烝烝乂, 不格姦.]'53)라는 말만 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의롭게 여겨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그의 헌의가 공명정대하다고 칭찬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손녀가 있다고 들었으니, 부디 사돈의 인연을 맺고 싶네." 하고 마침내 둘째 아들 대륭(大隆)을 그의 손녀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선생은 오공과 작위가 현격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좋은 말을 칭찬하고 사돈까지 맺자, 당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46년 무오년(1618) 선생 54세 2월에 또 조정에서 부르는 명이 내려왔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4월에 맏형 봉사공(奉事公 정문승(鄭文升))을 곡하였다.선생은 봉사공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봉사공이 아내를 잃고 혼자 살 때,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봉사공이 죽자 예도(禮度)를 넘기도록 애통해했으며, 죽은 뒤의 일을 경영하는 데 유감이 없게 하였다.9월에 흉당(凶黨)에게 배척받아 창원 부사(昌原府使)에 보임(補任)되었다. ○10월에 부임하였다.공무의 여가에 〈영사(詠史)〉 절구 10수를 지었다. 원집에 보인다.▪47년 기미년(1619) 선생 55세 봄에 성주(星州)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공을 방문하였다.며칠 동안 머물러 정담을 나누며 경서와 예서를 강론하였는데, 추켜세워 칭찬하는 것이 매우 중하였다. 떠나게 되자 정 선생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포옹(圃翁 정문부)이 어찌 시인일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사미정(四美亭)을 창건하여 공무의 여가에 읊조리는 장소로 삼았다.〈들 정자[野亭]〉54)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원집에 보인다.월영대(月影臺)55)를 중수하였다.선생은 평소 세속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는56) 최 문창(崔文昌 최치원(崔致遠))의 운치를 사모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이 대를 중수하고 '고운이 달구경하던 옛 대가 쓸쓸하구나[崔仙玩月古臺空]'라는 시를 지었다.진주(晉州)를 지나다가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 시를 짓고57) 읊었다. 시는 원집에 보인다.진주는 용사(龍蛇 임진왜란) 때 가장 참혹한 병화(兵禍)를 입었는데58), 선생이 고금의 변화에 느낌을 시로 지어 한탄하였다.▪광종(光宗) 황제 태창(泰昌) 원년 경신년(1620) 선생 56세 한강 정공(鄭公)의 부고를 듣고 만시(輓詩) 절구 두 수를 지어 애도하였다. 시는 원집에 보인다. ○정인홍(鄭仁弘)59)의 편지를 물리쳤다.이때 정인홍과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이 경내(境內)에 방파제를 쌓으려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런 일들은 한갓 민폐만 끼칠 뿐이다."라고 하고 공사 시작을 막았다. 이에 그 사람이 정인홍의 편지를 얻어서 청탁하기에 선생이 그 사람에게 장을 쳐서 쫓아내자, 정인홍이 듣고 크게 싫어하였다.9월에 체차되어 돌아왔다.선생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세간의 이익을 탐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자를 보면 늘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으며, 평소에 산업을 경영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행장이 텅 비었고, 집에 도착한 날에도 양식을 꾸어 밥을 먹기까지 하였다. ○이때 선생이 관직에 있었는데 맏아들 집의공(執義公 대영(大榮))이 남쪽으로 내려가 부모를 찾아뵐 때도 선생은 관마(官馬)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집의공은 얼음 얼고 서리 내린 천 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스럽게 갔으니, 청렴하고 엄한 가법이 이와 같았다.▪희종(熹宗) 황제 천계(天啓) 원년 신유년(1621) 선생 57세 선생이 창원에서 돌아온 뒤로 한적한 곳에 은거하였으니, 비록 문인과 자제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드물었다.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60)은 선생과 중표(中表 내외종 사촌)의 친척이다. 이해 봄에 자주 선생을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취하여 누워있는 것을 보고 선생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대영공(大令公)께서는 나중에 과음하지 말고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시게 해달라."라고 하니, 학곡의 뜻을 알 수 있었지만, 선생은 결국 그와 만나지 않았다.▪2년 임술년(1622) 선생 58세 종형 참의공(參議公)을 곡하였다.▪3년 계해년(1623)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 원년 ○선생 59세 3월에 인조 대왕이 반정(反正)하였다.이때 반정에 참여한 여러 공들은 모두 선생의 오래된 벗이었기에 선생은 그 기미를 헤아려 알고 있었다. 3월 13일 밤에 시첩이 밖에서 들어와 고하기를, "대궐 안에 불빛이 하늘로 오르니, 매우 놀랍고 괴이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의관을 정제하고 일어나 앉아 말하기를,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구나."라고 하고, 즉시 복례(僕隷)에게 명하여 대문과 담장을 엄히 경계하게 하고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인조가 즉위하자 원수(元帥)에 추천받았는데, 선생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이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 때 배척받은 사람이라 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선생은 편모 봉양하는 것을 급히 여겨 지방 고을의 수령을 청하였다.4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다.전주에 간사한 거간꾼이 있었는데 권세가와 내통하여 관화(官貨)를 많이 빌려 쓰고 오래도록 갚지 않자, 선생이 엄히 가두고 징수하였다. 박정(朴炡)이 간사한 거간꾼을 위해 풀어주기를 요구하며 심지어 열흘에 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선생이 끝내 들어주지 않고 독촉하여 추징하고 마니 박정이 크게 원망하였다.61)7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갈 때 슬픔으로 수척해지고 몸이 손상되어 큰 종기가 하부(下部)에 생겼는데 오랫동안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선생이 전주에서 관을 모시고 돌아갈 때 간사한 거간꾼이 때를 틈타 원한을 갚고자 하였는데, 판관 김영구(金永耈)가 이를 듣고 이졸(吏卒)을 많이 동원하여 직접 호상(護喪)하여 공주의 경계까지 이르니 간사한 거간꾼이 감히 손쓰지 못했다.▪4년 갑자년(1624) 선생 60세 1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모반하자62), 상이 선생에게 기복(起復)63)을 명하여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으나 선생이 병이 심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상이 공산(公山 공주(公州))에 행행(行幸)하려 할 때 선생에게 기복을 명하자, 선생은 병든 몸을 이끌고 뒤따라 용인(龍仁)에 도착하여 적의 형세가 오래지 않아 평정될 상황을 직접 아뢰었다. 그런데 종기의 증세가 더욱 심해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주상을 호종하는64)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이 매우 통한으로 여겼다. 얼마 뒤에 적이 평정되었다.10월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이때 박내장(朴來章)65) 등이 역모를 꾀하여 몰래 논의하기를, "정모(鄭某)는 문무의 재능이 있어 대장(大將)에 적합하다. 의원 이대검(李大儉)이 종기 치료 때문에 그의 집을 왕래한다고 하니, 이대검을 시켜 언급하도록 해보자.……"라고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이 말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다. 선생이 체포되어 이대검과 대질하였는데 이대검이 말하기를, "이 말은 과연 박내장 등에게 들었지만, 한번 종기를 치료하려 침놓는 의원이 어찌 생소한 재신(宰臣)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모는 실로 이러한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의 억울한 실상이 저절로 밝혀져 석방되려고 하였는데, 대간에서 논한 시안(詩案)의 화가 계속 일어났다.○선생이 창원에 있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영사(詠史)〉 절구 10편을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초 회왕(楚懷王)에 대한 일이었다. 시에 "초나라에 세 집만 남더라도 진나라는 망하리라[楚雖三戶亦秦亡] 남공의 예언66) 꼭 맞지는 않는구나.[未必南公說得當] 한번 무관67)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 끊겼는데[一入武關民望絶],68)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69)"라고 하였다. 이는 한때 즐겁게 읊은 시로 난고(亂稿) 속에 놔두었다가 상중에 있을 때 이 시가 휴지에 함께 들어가 벽 사이에 도배지에 배접하였다. 어느 날 훈신 최내길(崔來吉)70)이 선생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이로 인해 그 시를 보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상세히 보고는 돌아가서 벗들 사이에 전파하였다. 이때 이르러 대관(臺官) 박정(朴炡)과 윤훤(尹暄)이 시의 뜻에 저의(底意)가 있다 하여 국문(鞠問)을 계청(啓請)하였다. 이때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이 문사 낭청(問事郞廳)71)이 되어 위관(委官)72)에게 말하기를, "이는 시인(詩人)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고 또한 감춰놓은 저의가 없는데, 어떻게 이 시를 가지고 이 사람을 죄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힘써 쟁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선생은 마침내 억울하게 문초를 받고야 말았다.○최내길은 선생의 장남 집의공(執義公 대영(大榮))과 함께 익성군(益城君)73)의 사위가 되었는데, 최내길은 간사하고 경박하여 집의공의 그릇과 현격히 달랐다. 이에 익성군이 최내길을 대할 때 소원한 점이 없지 않았으니, 최내길은 서운함을 쌓은 지 오래되었다. 박정은 또 간사한 거간꾼의 일로 선생을 중상(中傷)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시화(詩禍)를 날조하였으며, 윤훤은 별다른 혐의나 틈이 없었는데 최내길 형제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한다.○택당 이공은 늘 선생이 치대(置對)74)할 때 원정(原情)75)한 글을 외우며 그가 원한(寃恨)을 품고 죽은 것을 슬퍼하였는데, 뒤에 국사(國史)를 편수하면서 선생의 훈렬(勳烈)을 기록한 것이 매우 자세하였다고 한다.11월 19일에 졸하였다.선생이 죽은 뒤에 집의공이 막내동생 승지공(承旨公 대륭(大隆))과 마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선친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이는 아마도 선생이 집에 있을 때 엄하여 자질(子侄)들이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5년 을축년(1625) 2월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판서공의 무덤 밑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두 아들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의하여 상복을 입은 채 남쪽 진주(晉州)로 내려갔으니, 이는 선생이 창원(昌原)을 다스릴 때 진주를 두루 둘러보고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토를 아껴, 다시는 벼슬하지 말고 정착하여 살 계획을 세우라고 유명을 남겼기 때문이었다.○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공이 말하기를, "선생은 가법(家法)에 엄하고 규문(閨門)이 화목하지만, 내외에 분명한 구별이 있어 지금까지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무너뜨리지 않았으니, 사대부 집안이 모두 전하여 외었다."라고 하였다. 동계(桐溪) 정공(鄭公)의 조카딸이 선생의 장손부(長孫婦)가 되어 시집가려 하자, 동계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네 시댁의 가법이 지극히 엄정하니, 너는 모름지기 밤낮으로 조심하고 부녀자의 도리를 삼가고 부지런히 닦아 친정부모를 부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세상에 알려진 선생의 가법이 이와 같았다.▪의종(毅宗) 황제 숭정(崇禎) 11년 무인년(1638) 선생 사후 15년 8월에 길주 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여 의병장의 자손을 수용(收用)하여 권선징악을 드러내도록 청하니, 상이 후손을 찾아 녹용(錄用)을 도우도록 명하였다. 최공의 〈기문록(記聞錄)〉이 부록에 보인다.▪숭정 기원후 37년 갑진년(1664)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 5년 ○선생 사후 41년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 공이 북평사가 되어 선생의 공렬을 채집하여 순찰사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사당 세울 논의를 처음 발의하였다.삼가 살펴보건대 현종 대왕의 행장(行狀)에, "북변의 목사와 수령, 무신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니, 다시 병마평사를 설치하되 반드시 전랑(銓郞) 및 옥당(玉堂)의 관원을 차출하여 보내 통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평사 정문부가 임진년의 변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을 세웠고,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이공(貳公 찬성(贊成))에 월등하게 추증(追贈)하였으며, 동시대의 함경남북도 의사 20인에게도 모두 추포(追褒)76)하였다.……."라고 하였다.○이때 이공이 맨 먼저 이 직임을 담당하여 모든 폐단들을 고쳐서 정비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선생이 선발과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 선생을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편지로 민공(閔公)에게 품의(稟議)하니, 민공이 기쁘게 듣고 답장하여 별도로 사당을 세우게 하고 또 관청의 곡식을 덜어내어 공사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6년 을사년(1665) 선생 사후 42년 9월 25일에 경성(鏡城) 어랑리(漁郞里)에 사우(祠宇)가 완성되었다.어랑리는 본 부(府)의 무계호(茂溪湖) 가에 있는데, 바로 선생과 이붕수(李鵬壽) 공이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다. 외재 이공이 단천(端川) 군수 홍석귀(洪錫龜)와 이곳에 사당터를 정하였고, 이해 4월 2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공사를 마쳤으며, 이달 25일에 선생의 위패를 주벽(主壁)에 모시고 이붕수·최배천(崔配天)·지달원(池達源)·강문우(姜文佑) 네 분을 배향하였다.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모두 이공이 지었다.12월에 외재 이공이 조정에 돌아와 상소하여 선생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또 포장으로 높은 벼슬에 추증하도록 청하였다. 상소문은 부록에 보인다. ○27일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경연(經筵)에서 선생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증직을 내리며 자손들을 녹용하도록 주청하자, 상이 바로 윤허하였다. 경연의 말은 부록에 보인다.영의정 정태화·우의정 허적(許積)·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함께 입시(入侍)한 자리이다. 정공이 아뢰기를, "왜적 청정(淸正)이 북방에 들어와 성곽을 도륙하고 불태우며, 소하강(蘇下江)77) 동북쪽의 말갈(靺鞨 여진족)이 날랜 기병을 몰고 들어와 무산(茂山)과 부령(富寧)78) 지역 깊숙이 들어와 유린할 때, 병마평사 신 정문부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을 토벌하고 육진(六鎭) 밖에서 적군의 기를 빼앗고, 백탑(白㙮) 아래에서 적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하게 하고 오랑캐의 기세를 꺾어 진동하고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는 만력(萬曆) 이후로 무공을 세운 장수들에게는 있지 않은 바입니다. 정사(靖社 인조반정) 때 미리 원수(元帥)로 천거를 받았는데 남의 무고를 입어 하옥되었고, 또 지은 〈영사(詠史)〉 시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죽었으니, 신이 속으로 이를 슬프게 여깁니다.행장(行長)이 서쪽으로 들어가자, 신종(神宗) 황제가 대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여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평양성 아래에서 쳐부수게 했습니다. 다만 북방의 산천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는 신종 황제도 구원할 수 없고, 대장군도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문부는 일개 평사(評事)로서 병사 6천 명을 모집하여 힘껏 싸워 왜노를 몰아내어 북방 22개 고을을 회복했는데, 큰 공을 세우고도 봉작(封爵)을 얻지 못하고 이내 죄도 없이 마침내 도필(刀筆)79) 앞에서 죽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정문부에게 작위를 내려 북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7년 병오년(1666) 선생 사후 43년 ○1월 23일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에 특별히 증직되었다. ○3월에 촉룡서당(燭龍書堂)이 완성되었다.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공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9월 11일에 사간 여성제(呂聖齊)가 사액(賜額)을 계청(啓請)하자, 상이 해당 조(曹)에 품처(稟處)하게 하고, 예조가 복계(覆啓)80)하여 윤허를 받았다. 예조의 계사(啓辭)는 부록에 보인다.▪8년 정미년(1667) 선생 사후 44년 10월 6일에 '창렬(彰烈)'로 사액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문은 지제교(知製敎) 이갑(李)이 지어 올렸고 부록에 보인다.예관은 본도 도사 정화제(鄭華齊), 전사관(典祀官)은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지형(李之馨), 대축(大祝)은 수성 찰방(輸城察訪) 김진한(金振漢), 찬자(贊者)는 전 찰방 박흥종(朴興宗), 알자(謁者)는 전 참봉 지천석(池天錫) 등으로 실제로 와서 제사를 지냈다.▪숙종 대왕(肅宗大王) 19년 계유년(1693) 선생 사후 70년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공이 그 자손들을 조용(調用)할 것을 계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민공(閔公)이 평사(評事)로부터 조정에 돌아와 아뢰기를, "정문부의 충절이 있는데도 그 자손 중에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공로에 보답하고 충렬을 권장하는 도리가 전혀 아니니, 마땅히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별도로 조용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29년 계미년(1703) 선생 사후 80년 9월에 선생의 증손 전 주부 정삼(鄭杉)이 상소하여 시호를 내려주도록 청하자, 상이 해당 조(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상소는 부록에 보인다. ○10월 7일에 예조에서 회계(回啓)하여 윤허를 받았다. 계사(啓辭)는 부록에 보인다.▪32년 을유년(1706) 선생 사후 82년 회령(會寧)에 사당을 세웠다.회령의 유생들이 본 부(府)의 문묘(文廟) 옆에 사우를 세우고, 본 부의 의병에 참여한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 등 여러 공을 배향하였다.▪34년 정해년(1708) 선생 사후 84년 도신(道臣)이 사액(祠額)을 계청하자, '현충(顯忠)'이라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제문은 지제교 윤홍리(尹弘离)가 지어 올렸고 부록에 보인다. ○10월에 〈임명대첩비명(臨溟大捷碑銘)〉이 완성되었다. 보덕(輔德) 최창대(崔昌大)가 지었다. ○또 함흥부(咸興府)에 사당을 건립하고 13명의 의사(義士)를 배향하였는데, 사당을 건립한 연월과 사액문(賜額文)·사제문(賜祭文)을 초록(抄錄)하지 못했기에 기록하지 않았다.▪38년 임진년(1712) 선생 사후 89년 시장(諡狀)이 완성되었다.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지었다.▪39년 계사년(1713) 선생 사후 90년 '충의(忠毅)'로 시호를 의망(擬望)하여 비답을 받았다.환란을 당해서 나라를 잊지 않음을 '충(忠)'이라 하고, 과감하게 적을 죽임을 '의(毅)'라고 한다.▪44년 무술년(1718) 선생 사후 95년 〈창렬사지(彰烈祠志)〉가 완성되었다.외재(畏齋) 이공(李公 이단하(李端夏))이 지은 것을 이때 이르러 간행하였고, 지재(趾齋) 민공(閔公 민진후)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모두 부록에 보인다.▪영종대왕(英宗大王) 23년 정묘년(1747) 선생 사후 124년 3월에 소격동(昭格洞) 셋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시호를 내리는 교지(敎旨)를 맞이하였다.선시관(宣諡官)은 이제암(李齊嵒)이다.▪34년 무인년(1758) 선생 사후 135년 문집 원본이 완성되었다. 서간문과 소장(疏章)들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다만 시와 전(箋)과 장계 등의 글로 문집을 완성하였다.정암(貞庵)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가 서문(序文)을 지었고, 좌윤 오혁(吳) 공이 재물을 내어 중간(重刊)하였다.▪정종 대왕(正宗大王) 12년 무신년(1788) 선생 사후 165년 11월 6일에 선생의 5대손 정근(鄭瑾)이 상소하여 부조전(不祧典)81)을 청하자, 상이 해당 조(曹)에 명을 내려 대신들과 의논하여 회계(回啓)하게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을 인용하여 윤허를 받았다.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주(晉州) 유학(幼學) 정근이 올린 글을 보니, 그의 5대조 충의공(忠毅公) 정문부가 4대 봉사(奉祀)의 대수(代數)가 다하여 불천위의 은전을 내려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정문부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평사(評事)로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들을 섬멸하자, 관북(關北) 일대가 그에게 힘입어 평정되었습니다. 그의 높은 공과 장한 충렬은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황진(黃璡)·이복남(李福男) 등과 같은데, 네 사람은 이미 불천위의 성대한 은전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지금 그 자손이 이를 원용하여 청한 것은 반드시 외람된 일이 아니지만, 불천위란 일의 체모가 중요하므로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니오니,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셨다.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국가가 훈신에게 거듭 굳게 맹세하여 영예롭게 해주고, 불천위하여 제향하도록 하는 것은 나라의 은전입니다. 임진년 왜구의 변란에 반민(叛民)이 내응하여 변진(邊鎭)이 모두 함락되었는데, 충의공 정문부가 당시 평사로서 창의(倡義)하여 병사를 모집하고 왜적들을 섬멸하여 북관(北關)이 그에게 힘입어 평정되었기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으니, 그 공적이 참으로 큽니다. 다만 생각건대 불천위라는 것은 훈봉(勳封 봉작과 증직)한 뒤의 일입니다. 비록 그가 죽은 뒤에 포증(褒贈)이 여러 차례 가해졌지만, 대려(帶礪)82)가 당시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행의 문이 점차 열리고 전장(典章)이 날로 실추될 때를 당하여 법을 벗어나 가볍게 허락하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듯하니,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라고 하였다.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아뢰기를, "옛날 임진란 때에 충의공 정문부가 평사로서 창의하여 토적을 섬멸하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 일대를 편안히 보전하게 하였으니, 충성은 진실로 숭상할 만하고 공적 또한 견줄 자가 드뭅니다. 그런데 생전에 훈봉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비록 그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충성이나 공적으로 보더라도 특별한 보답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전례를 원용하여 청한 것이 참람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듯하니,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라고 하였다.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불천위는 공신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임진란을 당하여 충의공 정문부가 토적을 무찔러 없애고 왜적과 오랑캐를 진압하여 관북의 강토를 보전하였으니, 공이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불천위의 은전은 비록 자손들이 호소한다고 하여 쉽게 허락할 수는 없지만, 충의공의 경우에는 생전에 훈봉하지 않았는데 불천위의 은전마저도 인색하다면 큰 공로에 보답하는 의리가 아닌 듯하니,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라고 하였다.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판중추부사 김욱(金煜), 판중추부사 이존협(李存協)은 병으로 의견을 종합하지 못했다. 예조에서 회계(回啓)하기를, "대신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중론(衆論)에 따라 시행하라."라고 하셨다. 계하(啓下 임금의 재가)의 사의(辭意)를 받들어 살펴 불천위의 뜻으로 본가에 통지하여 시행하도록 관문(關文)으로 베껴서 보내 정근(鄭瑾)의 집에 전해주고 그에게 관문대로 시행하도록 판하(判下)83)하셨으니, 입안(立案)한 것84)을 전해주고 형지(形止 사실의 전말)는 즉시 치보(馳報)하라.…….▪13년 기유년(1789) 선생 사후 166년 4월 25일에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예를 행하고, 진주(晉州) 가곡리(佳谷里) 집에서 경축하는 잔치를 베풀었다.▪14년 경술년(1790) 선생 사후 167년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완성되었다. 대제학 황경원(黃景源) 공이 지었고 부록에 보인다.▪철종대왕(哲宗大王) 8년85) 정사년(1857) 선생 사후 234년 함경감사 이시원(李是遠)이 부령(富寧) 청암사(靑巖祠)에 사액을 계청하였다.청암(靑巖) 또한 선생이 적을 막았던 곳이다. 이보다 앞서 북변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본 부(府) 사람 차응린(車應鱗)과 박극근(朴克謹) 등 9명의 의사를 배향하였는데 아직 사액되지 못하였기에,86) 이때 이르러 이공(李公)이 경연에서 아뢰어 계청하였다.▪10년87) 기미년(1859) 선생 사후 236년 청암사에 '숭렬(崇烈)'이라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당저(當宁, 고종(高宗)) 27년 경인년(1890) 선생 사후 267년 3월에 문집이 중간되었다. 皇明世宗皇帝嘉靖四十四年乙丑。【我明宗大王二十年】 二月十九日, 先生生于漢師南部盤松坊南小洞第。四十五年丙寅。【先生二歲】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先生三歲】二年戊辰。【我宣祖大王元年】 ○【先生四歲】三年己巳。【先生五歲】 始就學。先生嶷然有大志, 嬉戲時, 約書童分曹布陣, 如對敵狀, 先生居中號令, 羣兒皆奉其約束, 莫敢有違者。四年庚午。【先生六歲】 聰穎絶倫, 讀書過目成誦。隨長者, 觀捕虎於興仁門外, 虎咆哮, 觀者無不辟易, 先生獨安坐微笑, 顔色自若, 人皆服其膽略。五年辛未。【先生七歲】 有《玉顔不及寒鴉色》五言古詩一篇。【見原集。】六年壬申。【先生八歲】 有《詠初月》五言一絶, 人皆傳誦。【見原集。】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先生九歲】二年甲戌。【先生十歲】 講課《小學》。判書公授《小學》而命之曰: "爲人之方, 不外是矣。" 先生仰體親訓, 受而講究, 勉修孝友。三年乙亥。【先生十一歲】 春讀《論語》。四年丙子。【先生十二歲】 通《綱目》、《馬史》等書。讀書, 至文義肯緊處, 對案黙坐, 專精硏索, 有得則輒欣然, 不得則書諸壁上, 以竢自解。五年丁丑。【先生十三歲】 春讀《大學》, 秋讀《中庸》, 冬讀《春秋》。六年戊寅。【先生十四歲】 春讀《詩經》於山寺。○中陞補壯元。詩題《月明花落又黃昏》, 後天使來, 欲觀我國科體文, 朝廷以李白沙《泣送歸時在腹兒》詩及先生此詩, 同爲寫示。七年己卯。【先生十五歲】 讀《書經》、《左傳》等書。八年庚辰。【先生十六歲】 有擬《宋宗正卿士䮍請以百口保岳飛無他》表。九年辛巳。【先生十七歲】 聘夫人高靈申氏。【高原尉沆之孫, 奉事欚之女。】講學之暇, 間習射藝, 有穿楊之妙, 天文、算數亦皆通曉。十一年癸未。【先生十九歲】 先生旣長, 而判書公猶趁日課業, 如童子時。十二年甲申。【先生二十歲】 七月, 與金廷叟、金伯厚會讀于衿陽精舍。先生刻志勵學, 與兩金公講貫, 有《文會錄》。○【金廷叟名壽賢, 官至大憲, 金伯厚名善餘, 官修撰, 與先生同榜進士。】八月, 俱中生、進初解。十三年乙酉。【先生二十一歲】 二月, 俱中生、進會試。十四年丙戌。【先生二十二歲】 十二月, 長子大榮生。十五年丁亥。【先生二十三歲】 遊泮宮。○三月, 哭從兄松齋公。公諱文英, 文行夙著大, 爲家庭期望, 至是夭卒, 先生傷痛, 如割胖云。十六年戊子。【先生二十四歲】 秋, 登明經科金時獻榜下甲科第二人。讀券官金貴榮、黃廷彧諸公, 相賀稱爲朝廷得人。例付漢城府參軍。十七年己丑。【先生二十五歲】 二月, 除承政院注書。○四月, 授弘文館記事。○七月, 遞授承政院副正字。○十月, 陞正字。○十二月, 拜弘文館修撰, 歷司諫院正言兼中學敎授。【入對經筵, 筵說失傳。】十八年庚寅。【先生二十六歲】 六月, 拜知製敎。製進《中殿失寧頒赦文》。○自是通政以下內職, 常例帶。○凡朝家之迎祥應製與御閣帖字及館閣文字, 多出於先生之手。拜司憲府持平。十九年辛卯。【先生二十七歲】 伯氏奉事公中生員。○七月, 除咸鏡北道兵馬評事。按先生日記曰: "七月晦, 除北評事, 八月二十八日發程。東郊送別時, 伯氏先到, 諸名士梁而和、閔彦實、李潛、驪興令李伯起、李養伯、蔡吉、元君瑞、公瑞、宋淵、愼大容、李士誼、具子深、洪仲載、景瑞、而瑞、順城、汝剛、子新、敬叔、李策、李爀、韓潗、尹燦、權澈、成汝栻、方德龍二十餘人, 閔德老有故入城, 路逢馬上敍別。暮投樓院, 洪而信先待以酒果, 作四韻三首贈別, 余次其一酬別。【詩見原集。】 晦日, 到梁文驛, 梁文五里地, 長川一帶止而爲潭, 有兩巖高可三丈, 相對秀出, 如芙蓉出水之形, 恨不得停驂路旁, 少憇于其上也。行四十里到豐田, 日欲晡矣。察訪金穎達, 自嶺東初到驛中邀余, 往衙軒, 庭有山菊成行滿開。因酌燒酒十餘杯, 以痰喘苦辭, 飮少許。翌日, 修簡托主家人, 送付于家。【此下數行缺。】 溪水淸澈, 見底遊魚可數, 越邊二里, 有平民池邦彦者, 築室山下, 三面環山, 一面臨水, 植松爲籬, 積穀數屯, 蓋一鄕豪富也。自金化到金城地界, 多有緣崖石逕, 下臨長川, 頗可悅目。申時, 次眞木驛, 驛無瓦屋, 旁舍卑陋, 縣中支應, 酉時來到, 因留宿。初二日, 平明發程, 過金城縣五里, 有南大川, 涉橋入峽, 紅樹漫山, 新霜鋪地。辰時, 到昌道驛, 御史崔濂纔出來, 又行四十里, 馬上有吟。【詩載原集。】 淮陽、甫里界, 廣野中斷, 深可數百丈, 有舟行大川環曲而南, 京江賈人取桴之地也。未及淮陽府三十里, 有新安驛, 有題詠十許首。自驛到府, 間有三嶺: 一曰唐涯阿, 二曰阿兒羅, 幾至府, 有栢嶺, 嶺有茂栢參天蔽日, 周回三十里。過府一里, 乃銀溪也, 亦舟渡。渡溪五里, 有銀溪驛, 日昏, 以炬投驛定宿所, 府使洪仁傑, 使人問之。"九月, 巡行北道諸鎭。【有詩載原集。】評事實兼學校表率之任、諸道巡撫之職, 前在是任者, 待生徒不以禮, 且考講甚峻, 歲自儒案汰, 充軍籍者十居五六, 北人之咨怨久矣。先生至則曰: "關北要荒, 國家文敎尙未敷洽, 責此地生徒, 豈可如湖、嶺儒鄕?" 遂乃寬其講規, 纔通音釋, 皆令免汰。引接諸生, 待之以法, 敎之以禮, 勸課表率, 誘掖勤至。巡視北邊, 詢民瘼, 閱軍政, 祛弊繕闕, 百度修擧, 北人大悅。二十年壬辰。【先生二十八歲】 四月二十九日, 先生在行營, 聞倭陷釜山。五月初一日, 因韓格書, 繼聞"四月十五日, 倭陷東萊, 府使宋象賢死之, 蔚山、彦陽、梁山官, 以繼援將皆被所殺。水營及梁山、彦陽、密陽兵, 時方接戰, 賊鋒堂堂, 少無相敵之勢"云, 先生不勝憂憤, 措畫方略, 以爲守禦之計。初二日, 使穩城土兵汝丁因狀啓, 修付家書。是日姜譓, 自嶺東監營來傳言"左水使朴泓棄城, 與兵使合兵"。初六日, 先生到會寧, 得見朝紙"上令百官納馬, 又降責己求援敎旨"云。倭陷蔚山、梁山、密陽等地, 遂作長驅之勢。初九日, 在鏡城, 又聞賊逼畿甸, 上幸平壤。先生聞命, 蒼黃將率道內精兵數百, 勤王于西京。初十日, 見監司移文"大駕播遷, 王子兩分來住安邊, 抄送精兵, 衛王子於鐵嶺"。卽抄富寧以南軍三百, 使玉連萬戶領兵, 使輸城察訪崔東望問安于西京, 使鏡城判官李弘業問安于安邊, 因差官奴, 問候於靑松判書公任所。十一日, 鎭撫自京來聞"賊已到忠州, 申砬敗死, 京中士女爭出都門, 四散奔竄"云。十二日, 富寧居民, 持四月十八日家書而來, 始知伯氏與季氏陪往靑松任所。○先生雖於亂離路梗, 而每月必差官隸, 問候於判書公任所。六月十二日, 聞鐵嶺兵潰失守。倭將平淸正勇冠三軍, 兵尤精悍, 日行數百里, 勢如風雨, 鷄犬亦不遺。長驅入咸鏡道, 北關土賊, 與倭爲黨, 會寧鞠景仁, 執臨海、順和兩王子及大臣金貴榮、長溪府院君黃廷彧、其子承旨赫降于賊。鏡城之鞠世弼、明川之鄭末秀等, 各據城作亂, 爭執守令、鎭將以應之。淸正遂盡取六鎭城堡, 以景仁爲倭官刑判, 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關北。使其將直正、都關汝文等屯吉州, 自引兵還屯北靑, 威脅人民, 搜括山林, 屠戮其不從令者, 衣冠士子縮首潛匿, 不敢出。七月, 先生遂謀擧義。聞前監司李聖任亦在奔迸中, 窮尋往見, 共謀倡義, 衆潰而未就。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彦、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伯謙、羅德明等起兵入鏡城, 衆畏世弼威脅, 已皆潰散。八月, 先生從間道脫身南歸, 行至龍城, 投巫人韓仁侃家。先生暮投仁侃家, 仁侃熟視曰: "豈非評事公耶?" 先生惕然曰: "我乃京商人, 遭亂至此, 子何妄言耶?" 仁侃心知之, 卽引入厚遇之。秋夕日, 仁侃祭其祖, 先以祭饌進先生, 先生曰: "禮不可如此。" 仁侃曰"吾祖賤人也, 假令生存, 評事來臨, 則固不敢先食此饌"云。居數日, 遇崔配天、池達源等, 同至鏡城漁郞里【或稱禦亂里。】李鵬壽家, 因與更謀擧義。先生使鵬壽、配天、達源等協謀, 引其同類, 傳相招諭, 稍稍響應。壯士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各鎭守將及避亂朝士徐渻、李成吉等亦來會。鵬壽身自負粮, 從山路間行, 趍吉州, 密覘倭兵出入形勢, 如是者凡再度。倭奴與鞠世弼相通, 往來不絶, 使姜文佑等邀於路, 盡擊殺之。先生遂流涕誓衆, 衆皆感服忠義, 罔有二心。先生讓主盟於鄭見龍, 見龍固辭, 士卒亦願屬先生。於是先生爲大將, 鄭見龍爲副將, 李鵬壽爲別將, 姜文佑爲斥候將。時藩胡乘亂, 與野人連兵, 屢掠邊上, 世弼頗憂懼。崔配天素與世弼善, 先生潛送配天, 單騎佯投之。遂乘間, 說世弼以國家中興之慶, 且言"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則虜不足憂矣", 世弼心然之。配天歸告先生, 先生卽馳檄諭世弼, 世弼猶疑之, 嚴兵以待之。九月十六日, 先生率義兵, 入守鏡城。時倭賊久留, 軍儲板蕩, 座首李麒壽收其餘燼, 封閉修輯以待義兵。先生至城下, 招世弼相見, 且脅且喩, 世弼乃迎入。先生遂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 又用叛民嘗射己者, 爲裨將。諸將欲斬世弼, 先生不從曰: "遽也, 非計也。" 世弼使其腹心夾侍左右, 伺察動靜, 凡諸文字, 輒皆偸視。先生將馳啓, 而於世弼事, 故作婉辭, 以其草本夾他藁, 置之案上, 乍起如厠, 世弼見之, 果喜自安。先生乃使其屬幷士卒登城習戰, 夜分乃罷, 逐日如之。○擧義之初, 先生草檄, 曉諭北路士民, 以忠義激勵, 一方響應, 咸思自奮。【此檄見佚。】十九日, 進擊吉州, 留屯倭賊, 大破之。時吉州賊率兵, 奄至城下, 先生命李希唐、姜文佑等, 幷力追擊, 合戰十餘度, 倭賊載屍奔北。流血濺道, 大獲首級, 自興義兵以來, 是爲最初捷, 軍聲稍振。二十日, 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 ○二十八日, 再檄于州郡。【檄文見原集。】先生以捐軀圖功之意, 奮勵移檄, 辭旨凜烈, 北方壯士見之感泣, 爭來應募。六鎭叛民又聞先生已釋反側, 次第送款, 於是北路人心大定。○尤庵宋先生答畏齋李公書曰"嘗讀其壬辰檄文, 想像其爲人", 老峰閔公亦曰"以壬辰諭衆之辭觀之, 其忠義見識, 卓犖如彼"云。十月十四日, 擊斬叛賊鞠景仁、鄭末秀等, 卽馳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先生移文會寧, 諭景仁來降, 景仁不從, 與吉州倭將協攻鏡城, 會寧儒生吳允迪、都訓導申世俊等, 擊斬景仁及其黨六人, 獻馘軍門。明川人又團結子弟, 攻末秀以應先生, 反爲賊所敗, 先生潛遣吾村權管具滉及姜文佑, 率精騎六十餘, 晝夜幷行, 猝入明川, 末秀駭惶, 棄城走, 文佑等追擒斬之。繼誅叛賊鞠世弼, 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自亂初, 世弼爲叛魁, 先生設計撫戢。一日, 忽兩驛卒, 無端大呼, 先生知其出於世弼之凶計, 卽斬兩卒, 因下令登城習戰, 夜分乃罷, 翌朝又如之。先生建大將旗, 坐南門樓, 世弼與諸將行軍禮入謁, 先生令姜文佑於座執世弼下樓, 門窄恐有妨, 遂蹴折樓板, 抱持以下。其黨見世弼就擒, 自外抽戈而入, 先生彎弓, 從門隙射殺之。幷斬世弼等十三人以徇于衆曰: "當初首倡, 止此輩, 此外無與也。" 於是軍聲大振, 士氣十倍。先生與諸將議出兵擊倭, 鄭見龍欲保鏡城以伺釁, 先生曰: "今但自守, 豈當初起義兵之意耶? 然當謀于衆以決之。" 明日聚衆于南門外, 詢其可否, 衆咸以先生言爲是。乃使潼關僉使李應星留鎭鏡城。二十一日, 遂率三衛兵, 進次明川。出城行數里, 有人迎告於先生曰: "賊勢甚盛, 戰必不利, 宜且守城自保。" 先生曰: "汝敢爲賊沮吾軍耶?" 卽斬其首, 懸旗竿。時倭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掠。先生與中衛將鄭見龍率軍千餘, 留明川, 抄精兵四百, 分二軍, 進屯古驂地, 設伏要路, 左衛將柳擎天領軍千餘, 屯海汀以伺摽掠之賊, 右衛將吳應台率吉州及西北堡精兵二百餘, 屯吉州三十里阿間倉, 登山覘賊。三十日, 明川賊與吉州賊合勢, 四出大掠, 先生分部諸將, 進擊大破之, 斬其大將直正、都關汝文等, 斬首八百餘級, 大獲軍裝。平明賊千餘, 焚掠長坪加坡里, 日晡驅所掠男女財畜而歸, 元忠恕率所部, 先馳邀之, 斬先導兩賊, 賊驚北。會賊大陣, 自城中繼援, 忠恕退保山險, 伏兵將韓仁濟率諸將, 馳往二息程, 與忠恕合擊。賊魁直正、都關汝文等、名不知將五人, 率精勇兵, 敢死突戰, 左斥堠將具滉、右斥堠將姜文佑、別將安沃、從事官印元忱、軍司黃嗣元、朴銀柱等, 各率所部, 一時突陣, 厮徒、下卒無不鼓勇, 射矢如雨, 倭賊等下馬地鬪, 日昏力屈, 始乃北走。伏兵將高擎民率所部, 遮截山上, 我軍精勇夾擊大破之。斬其將五人, 斬馘八百二十餘級, 逃竄山谷者, 四面縱火而盡燒之, 中箭墜岸而死者, 亦不知其數, 得馬一百十八匹, 獲軍裝、器械甚多, 盡奪所掠男女而歸。○論者以爲"自倭賊入境之後, 我軍崩潰, 無有能禦之者, 而惟李忠武閒山之戰, 權元帥幸州之役爲最。然若其徒以忠義相激, 全勝克復者, 無如此捷之比"云。十一月初一日, 以破倭賊狀啓, 聞于行朝。【啓本見原集。】 ○十二月二十五日, 擊破吉州臨溟倭賊, 搜誅六鎭叛黨, 以評事本職, 巡行北邊, 招服藩胡。吉州留賊據城堅守, 諸將屢圍而不得拔, 先生以爲"今若急取, 多傷士卒, 不如移兵嶺東, 先擊柵內之賊。柵內之賊旣平, 則城中之賊, 勢孤援絶, 取之如籠中鳥耳", 卽日移兵向嶺東, 到臨溟雙浦。適遇柵賊四百餘出掠臨溟村舍, 伏兵將金國信先爲接戰, 馳報大軍, 三衛兵一時馳突, 俘斬百餘級, 乃取其屍, 剖腹露腸, 列之路傍, 連亘十餘里。仍進圍柵賊, 以檄書投倭將曰"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 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初, 宰臣尹卓然陪王子入北,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因以爲監司。至是卓然恥以外藩重臣, 未嘗有擒一賊之功, 而嫉先生聲績掩己, 嘖言"某本一幕佐, 不當自爲大將, 而違已節度, 且北道胡亂, 不爲馳報", 出公緘四次推考, 先生據理辨析, 不爲遜。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以爲"兵皆吉州牧使召募之兵, 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 敗軍將元忠恕亦參錄功, 鄭凞績、高敬民, 不以專功上聞", 毁誣多端, 又盡抄先生戰功首級, 分與麾下人, 以媒賂遺。以是朝廷漠然不知, 旌賞不行, 且鄭見龍始恇㥘,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先生相郤。先是被掠士大夫多就先生, 求搜還財寶, 先生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先生又呵止之。見龍遂大搆嫌隙, 共造飛語, 卓然陰主之, 每欲以軍法按先生, 先生將佐被追榜掠危死。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先生。尹卓然改先生大將, 以鄭見龍代之, 以先生爲捕亡將, 進駐磨天嶺, 使捕捉亡卒。先生以爲"吉州、嶺東姑未掃蕩, 北地亡卒, 豈有逃向南關之理?", 遂不從, 依北兵使節制, 巡行六鎭, 安集軍民, 誅叛黨餘孽, 招諭藩胡, 賞罰得宜, 民夷畏愛, 不敢更謀爲亂。二十一年癸巳。【先生二十九歲】 正月初九日, 朝廷賞先生斬世弼功, 陞通政階。○十二日, 以臨溟破賊狀啓, 聞于行朝。【啓本見原集。】尹卓然以鄭見龍爲大將, 未滿一月, 移授兼節度使, 以吳應台代之, 又月餘還以先生爲大將。蓋軍中自失先生, 憤惋不平, 義士散去, 倭賊狺然伺釁, 叛民餘黨亦有復起之幾, 識者皆歸咎於卓然, 故有是擧。或謂先生曰: "未可辭歟?" 先生答曰: "始吾出萬死起義兵, 只欲爲國家效死, 今得死所, 其何可恥奪功而顧小嫌, 不念國家之危急哉? 此非吾本志也。" 或人謝之。十三日, 還次吉州, 餉勞將士, 誓死報國, 衆皆感服。三衛將士及六鎭軍民, 見先生來, 勇氣百倍, 去者亦還集。十五日, 進軍擊破野人、藩胡。時深處野人乘隙, 驅掠於鍾城涪溪里, 先生自慶源馳赴, 使穩城、鍾城、行營三衛兵設三伏, 邀路擊走之, 獲其軍裝、馬匹, 幷奪其所掠男女三十餘人及財畜, 稇載而歸。十六日, 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 ○十八日, 進到本州多信里, 餉勞諸將, 分署如故。二十二日, 進軍端川, 大破倭賊。二十七日, 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端川郡守姜燦來言曰: "端川留賊恣意橫行, 請分軍擊之。" 諸將論議不一。先生曰: "吉州兩賊勢挫縮頭, 吾方坐休强兵, 何可不爲之救乎?" 卽抄精兵二百, 使具滉等四將各將五十, 踰嶺而東, 藏兵於城外, 使端川軍進前挑戰, 城中留賊狃於屢勝, 略不顧忌, 二百餘名一時出城, 直追端川軍, 至伏兵處。於是伏兵四隊齊出, 左右馳突, 追亡逐北, 夾擊大破之, 幾盡射斬, 僅餘三十餘名, 箇箇中箭而入城, 元忠恕又擊斬倭將於城下。二月初一日, 又大破淸正于白塔郊, 淸正撤其衆, 乘夜逃遁, 關北悉平。初二日, 以倭賊退走狀啓, 聞于行朝。【啓本見原集。】時淸正勢孤, 將謀撤還, 而吉州留倭方爲義兵所扼, 不能自拔, 遂自領二萬人, 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先生諜知之, 悉其兵三千人, 先據臨溟, 設伏以待之。俄而賊蔽野而至, 見義兵弱少, 不顧而過, 先生遂發伏兵, 截其尾, 卽麾三衛勁兵, 策馬而進曰: "今日吾當爲國家一死。" 將士從之, 莫有退者。轉鬪六十餘里, 至白塔郊, 射矢如雨, 流血滿道。淸正血戰力屈, 日暮得入城, 其中箭而死者, 收聚燒之, 盡掇其衆, 乘夜逃遁, 踰嶺南奔, 不暇炊飯。先生追至嶺東而還, 於是關北遂淸。初三日, 磨鍊軍功, 啓聞于行朝。【啓本見原集。】先生遂錄長坪、臨溟、端川、白塔四大捷及鎭定六鎭之勳, 使崔配天懷狀啓, 聞于行朝, 以前後捷勳, 皆歸之於諸將佐, 等級有差, 專不爲己功。十九日, 牒報巡營。尹卓然怒先生擅自錄功啓聞, 移文詰責, 語多無倫, 先生卽馳報牒, 辨析甚明。卓然益大恚, 欲以軍法害先生, 遂拿致先生將佐, 酷加榜掠, 窮索先生過失, 而將士抵死, 不貳於先生。卓然無所得, 乃作誣啓, 搆捏益甚, 而前後捷功, 反其實以聞。先生雖使配天啓聞, 而朝廷以道臣之啓, 歸重取實, 故先生前後奏捷, 一未爲朝廷所知。四月, 以兵馬屬兵使, 歸覲判書公于靑松任所。時判書公爲靑松府使, 渾眷隨在任所, 至於僕隸, 一不爲兵燹所害, 蓋倭人避松字, 不入故也。二十二年甲午。【先生三十歲】 三月, 除永興府使。與崔安邊東望, 有唱酬諸詩。二十三年乙未。【先生三十一歲】 六月, 移拜穩城府使。時朝廷以亂後人心未定, 屢遷關北列邑, 要使鎭撫焉。○與李滄洲成吉, 有唱酬諸詩。二十四年丙申。【先生三十二歲】 三月, 移拜吉州牧使。赴任時, 黃芝川廷彧有贈行詩。【見附錄。】 ○邀致韓仁侃夫妻於衙中, 以報厚意。八月, 哭伯父提學公。先生事提學公如嚴父, 常以官祿逮養。爲先生宰公州時, 提學公寄詩曰: "七十八年此老翁, 荊枝又忝長尊公。但存皮骨憐肌削, 每到晨昏患腹空。諸子皆豚難自活, 惟君在道念吾窮。許多祈望羞煩喋? 最是良鷹入夢中。" 穩城時, 寄詩曰: "縲絏無情易見原, 毁譽多口不須論。曾收告帖能安命, 特授專城想感恩。生死忠勤思報國, 功名成立勉興門。老來第恨臨朝露, 千里相離費夢魂。"重到鏡城漁郞里, 思李監察鵬壽, 作詩以哀之。【詩見原集。】癸巳白塔之戰, 鵬壽與李希唐先登戰亡, 詩中以張巡、許遠比之。○池參奉達源來訪, 先生留之, 有《雪月》、《關鷄》等詩。【見原集。】 ○時桐溪鄭公蘊配本州, 與先生相得甚好, 桐溪贈詩, 有"羨公堪鎖鑰, 媿我素愚慵"之句。【見附錄。】在州, 創立操練堂, 莅政一年, 恩威幷著, 吏民畏愛。《芝峯類說》曰: "先生以公事過淮陽, 値元日。一行飢乏欲貰酒, 而居人不肯。乃作詩曰'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二十五年丁酉。【先生三十三歲】 御史柳寅吉表上先生治行, 賜表裏以褒之。先生去後, 有遺愛碑。八月, 移拜安邊府使。時葵塢柳公寅吉爲北路御史, 與先生遊本府南川及射樓, 有唱酬諸詩。【見原集。】十一月, 移拜公州牧使。時朝廷, 方修外方鎭管之制, 西崖柳相公成龍, 以先生表率有法奏, 使整頓軍政, 使列邑取效。二十六年戊戌。【先生三十四歲】 在公州任所, 與天將唱酬。時天將追倭, 至公州, 先生盡心策應, 公私俱便, 天將以詩嘉之, 先生次其韻以呈。【詩見原集。】十一月, 遞還。二十七年己亥。【先生三十五歲】 拜掌隸院判決事。○拜戶曹參議。○十一月, 次子大隆生。○中文科重試壯元。試題《白首同夜直》, 一篇爲藝苑所傳誦。二十八年庚子。【先生三十六歲】 遞付龍驤衛副護軍。自是或付軍啣, 或爲判決事, 而不樂仕進, 惟出宰郡邑, 爲榮養之計。二十九年辛丑。【先生三十七歲】 陞嘉善階。時北人上疏, 頌先生破倭之功, 故特命加資, 拜禮曹參判。藥峰徐公渻製進敎書。○時朝廷之知先生文學、功績者, 欲加通顯, 而先生素性恬退, 不曾趨附時好, 故竟未大顯。至若北關功烈, 終始不伐, 未嘗對人語, 及知先生者尤服焉。三十年壬寅。【先生三十八歲】 與天使朱之蕃, 泛舟遊漢江, 觀漁賦詩。先生贈天使詩有"同濟自慚非郭泰, 此生何幸識荊州?"之句, 又有紀遊詩二首及漢江觀漁韻古詩一篇。【見原集。】 ○車五山天輅嘗來言曰: "吾得風無一足行千里之句, 終不得對, 可恨。" 先生應聲曰: "月有孤輪轉九天。" 聞者以先生詩爲優云。三十一年癸卯。【先生三十九歲】 正月, 哭季父承旨公。○拜中樞府同知。三十二年甲辰。【先生四十歲】 八月, 丁判書公憂。○十月, 葬判書公於楊州外松山魚龍洞參議公兆下。三十三年乙巳。【先生四十一歲】 居廬于墓側。先生廬于墓所, 哀毁踰制。常語子弟曰: "吾雖欲復受杖, 尙可得乎?" 每嗚咽, 不自勝。蓋判書公敎子弟甚嚴, 少失意, 輒撻1)之, 故先生追慕如此。三十四年丙午。【先生四十二歲】 二月, 兄子大逸中司馬。○十月, 服闋。三十五年丁未。【先生四十三歲】 二月, 除長湍府使。三十六年戊申。【先生四十四歲】 二月, 宣祖大王昇遐。○製進宣祖大王輓詞。○拜安州牧使。按李五峰好閔戊申《告訃日記》"五峰以上使如京師, 某年某月日, 還到安州, 牧使鄭某出來迎接"云。三十七年己酉。【光海元年】 ○【先生四十五歲】先生與月沙李文忠公廷龜, 素相親厚, 嘗於其辨誣行, 有"一生勤苦"之詩, 又有二律、二絶之贈。【見原集】 李公嘗謂人曰"鄭子虛人物、才器, 誠不易得, 而獨恨其剛直太過"云。三十八年庚戌。【先生四十六歲】 以謝恩副使朝京, 有燕行諸詩。先生到玉河館, 謁夷齊廟, 有"若使當年東渡海, 箕封自有別乾坤"之詩。道中聞連山警報, 有"夜聞楡葉墜蕭蕭, 曉起新磨匣裡刀"之詩, 先生壯志槪可見也。與書狀遇景, 輒賦唱酬盈軸。八月, 長子大榮中司馬。三十九年辛亥。【先生四十七歲】 六月, 除南原府使。下車初, 訪問邑士之賢者, 以禮待之, 大興儒化。與梅窩鄭東卨、松溪張世經, 相從講討。○按張松溪文集序曰"公所與遊, 盡一時偉人, 如鄭農圃諸公"云。四十年壬子。【先生四十八歲】 拜刑曹參判, 不就, 請求外邑, 以爲便養。時光海新立, 北人熾盛, 李爾瞻、李慶全主論。鄭造以先生至親, 附麗其黨, 先生從容責之曰: "凡士大夫處世持身, 若臨深履薄可也。今汝締結黨人, 主張朝論, 古所謂辱先喪家, 汝之謂也。" 造怒之, 遂與先生情意阻隔。三月, 再牧吉州。○四月初五日, 以北道監試試官, 到富寧試所。十八日, 與鄭桐溪會, 遊于水中臺。【在吉州】先生與桐溪爲道義交, 先生之莅吉州也, 桐溪爲鏡城判官, 相從講學, 不以公務或廢。二十日, 赴明川試所。評事朴守緖、桐溪鄭公亦偕來。○時桐溪先生亦參試官, 自四月初五日至二十四日, 與先生同往同還。其留宿遊觀之契, 具在桐溪《西征日記》。李石潭潤雨, 以輸城察訪來訪。李公亦與先生往來切磋, 定爲道交, 臨別贈先生詩曰: "文武俱全將相姿, 卄年虛負此邊陲。祗今聖上求如渴, 佇見飛騰上玉墀。" 其景慕如此。四十一年癸丑。【先生四十九歲】 春自吉州棄官歸家。先生與李爾瞻隔洞而居, 爾瞻慕先生重望, 常欲結納。先生一不造其門, 故邅迴不調者, 凡十餘年。時有廷請之事, 先生引病不參。時光海昏亂, 彛倫斁塞, 北人之專權煽禍者, 倡起兩宮各處之論。先生痛憤深念, 杜門屛跡, 日飮無何。造等來拜, 則或托醉沈眠, 或閉目不語。及至廷請, 引義不參, 尤爲凶黨所嫉。四十二年甲寅。【先生五十歲】 與申象村欽遊楓溪洞, 約李五峰好閔, 遊四寒亭。【唱酬諸詩, 俱見原集。】時事日變, 先生無意從宦, 日與諸名士遊於山水間。惟以晦跡爲心, 嘗作《急流勇退賦》以見志。四十三年乙卯。【先生五十一歲】 六月, 除副摠管, 旋拜兵曹參判, 皆不就。時兩宮各處之論激, 而成廢母之議, 先生感念國事, 不勝憂鬱, 遂代食於楸下。居常縱酒, 人不得見其面, 至是有召命而不就。四十四年丙辰。【先生五十二歲】 在松山楸下。時有權臣, 欲引爲己援, 來訪先生而諷之曰: "公之貧苦, 令人傷心, 其何以自遣?" 先生卽應曰: "吾將帶弓矢入深山, 射猛虎以資生, 匪分富貴, 非吾願也。" 其人慚而去。○澤堂李公植爲北評事, 採南北道事蹟, 記先生倡義顚末, 又述《北關志》, 備載先生勳蹟以傳于世。四十五年丁巳。【先生五十三歲】 四月, 以前職有徵命, 而又不就。○六月, 不參廢母廷請議。光海斁倫日甚, 凶議寔繁, 大召文武內外諸臣, 俾爲獻議。先生始終不參曰: "人臣處變之道, 當以義理裁之。" ○時部將吳定邦獻議曰: "臣赳赳武夫, 無所知識, 但讀《史略》初卷'虞舜之孝, 烝烝乂, 不格姦。'云云。" 先生聞而義之, 親訪其第, 稱其獻議之明正, 繼曰: "聞君有孫女, 請與結姻。" 遂以第二子大隆娶之。先生與吳公爵位相懸, 而褒善結親, 時論多之。時論多之。四十六年戊午。【先生五十四歲】 二月, 又有徵命而不就。○四月, 哭伯氏奉事公。先生與奉事公, 友愛篤至, 奉事公喪耦獨居, 撫視諸侄若己出。及其歿, 傷痛踰度, 經理後事, 靡有餘憾。九月, 爲凶黨所擠斥, 補昌原府使。○十月, 赴任。公餘有《詠史》十絶。【見原集。】四十七年己未。【先生五十五歲】 春訪寒岡鄭公于星州。留晤數日, 講論經禮, 推詡甚重。及退, 鄭先生語門人曰: "圃翁, 豈詩人也?"刱四美亭, 爲公暇嘯咏之所。有《野亭》諸作。【見原集。】修月影臺。先生雅慕崔文昌物外遐擧之致, 至是修是臺, 有"崔仙玩月古臺空"之詩。過晉州, 登矗石樓有題詠。【詩見原集。】晉爲龍蛇, 被兵最慘處, 先生感念今昔, 題詩傷歎。光宗皇帝泰昌元年庚申。【先生五十六歲】 聞寒岡鄭公喪, 作輓二絶以悼之。【詩見原集。】 ○逐斥鄭仁弘書。時有仁弘同里人, 欲防海堤於境內, 先生曰: "此等事, 徒貽民弊。" 禁其始役。其人得仁弘書以囑之, 先生杖其人而逐之, 仁弘聞而大嗛之。九月, 遞還。先生持身淸約, 見世之貪利嗜貨者, 常唾鄙之, 平生未嘗爲經營産業計。其罷官而歸, 行李蕭然, 至家之日, 亦不免假貸而爲食。○時先生在官, 而長子執義公南下省覲, 先生不許乘官馬, 執義公氷霜千里, 跋涉間關, 家法之淸嚴如此。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先生五十七歲】 先生自昌原歸後, 屛處幽寂, 雖門人子弟, 罕見其面。洪鶴谷瑞鳳, 與先生爲中表親。是歲春, 數來訪先生, 而輒値醉臥, 語先生子弟曰"大令公, 後勿過飮, 待我更來"云, 則其意可見, 而先生竟不與之相接。二年壬戌。【先生五十八歲】 哭從兄參議公。三年癸亥。【我仁祖大王元年】 ○【先生五十九歲】 三月, 仁祖大王反正。時反正諸公, 皆先生之舊也, 先生揣識其機。三月十三日夜, 侍妾自外入告曰: "闕內火光騰天, 甚是驚怪。" 先生遂整衣冠起坐曰: "此事已成矣。" 卽命僕隸戒嚴門墻, 以待朝命。及仁祖卽位, 被元帥薦, 先生歎曰: "吾將不免矣。" 廟堂以先生昏朝時屛逐人, 將加大用, 而先生急於便養, 求宰外邑。四月, 除全州府尹。州有姦儈, 交通權貴, 多貸官貨, 久而不償, 先生嚴囚以徵。朴炡爲姦儈以求解, 至於一旬三抵書, 而先生終不聽, 督刷乃已, 朴大啣之。七月, 遭母夫人憂, 奉喪歸洛, 哀瘠毁損, 大腫發於下部, 久未完合。先生自全州奉喪而歸, 姦儈欲乘時報怨, 判官金永耈聞之, 多發吏卒, 躬自護喪, 至公州境, 姦儈不敢動。四年甲子【先生六十歲】 正月, 賊适反, 上命起復先生, 爲副摠管, 先生病㞃, 不得進。上將幸公山, 命起復先生, 先生舁疾追到龍仁, 面陳賊勢非久討平之狀, 而腫勢加劇, 不得運身, 未參執靮之列, 先生深爲痛恨。俄而賊平。十月, 被逮繫獄。時朴來章等, 謀不軌私相議曰: "鄭某有文武材, 可合大將。聞醫人李大儉, 以治腫往來其家, 可使大儉言及。云云。" 及事覺, 此言出於賊招。先生被逮, 與大儉面質, 大儉曰: "此言, 果聞於來章等, 而一番治腫下鍼之醫, 安得發此言於分疏之宰臣乎? 鄭某實不聞此言。" 於是先生冤狀自白, 將見釋, 而臺論詩案之禍繼發。○先生嘗在昌原, 公餘有《詠史》十絶, 其一乃楚懷王事也。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一時暢詠之作, 置諸亂稿中, 居憂時, 此作同入於休紙, 背帖壁間矣。一日勳臣崔來吉, 來訪先生坐久, 因見其詩, 就面熟視而去, 傳播儕友間。至是臺官朴炡、尹暄, 以詩意有指, 啓請鞠問。時澤堂李公植、浦渚趙公翼爲問事郞, 言於委官曰: "此乃詩人詠史之作, 且無包藏底意, 何可以此詩罪此人乎?" 力爭而不能得, 先生竟未免梧棘之冤。○蓋來吉與先生長男執義公, 同爲益城君女壻, 來吉回譎輕躁, 與執義公器局懸殊。益城君於來吉待之, 不無疏厚, 來吉積憾久矣。朴炡又以姦儈事, 思欲中傷, 至是搆成詩禍, 尹暄則別無嫌隙, 而爲來吉兄弟鷹犬云。○澤堂李公每誦先生置對時原情文字, 哀其抱冤而歿, 後修國史, 載錄先生勳烈, 甚詳悉云。十一月十九日, 卒。先生歿後, 執義公與季氏承旨公, 相對號泣曰: "汝能記先人顔貌否?" 蓋先生處家以嚴, 子侄不敢仰視矣。五年乙丑。二月, 葬于楊州松山判書公兆下酉坐之原。二子依先生遺命, 衰絰南下晉州, 蓋先生莅昌原時, 歷覽晉州, 愛其風土之淳美, 遺命不復仕進, 俾爲奠居之計。○趾齋閔公鎭厚曰: "先生嚴於家法, 閨門雖雍睦, 而內外截然有別, 至今子孫世守不墜, 搢紳家皆傳誦焉。" 桐溪鄭公之甥女, 爲先生長孫婦將歸, 桐溪戒之曰: "汝舅家家法至嚴正, 汝須夙夜洞屬, 恪勤婦道, 毋貽父母之羞。" 先生家法之聞于世者如此。毅宗皇帝崇禎十一年戊寅。【先生歿後十五年】 八月, 吉州牧使崔有海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以彰勸懲, 上命採訪遺孫以裨錄用。【崔公《記聞錄》見附錄。】崇禎紀元後三十七年甲辰。【我顯宗大王五年】 ○【先生歿後四十一年】 畏齋李公端夏爲北評事, 採摭先生功烈, 與巡相老峰閔公鼎重倡建祠之議。謹按顯宗大王行狀曰: "北鄙牧守、武臣貪縱, 復設兵馬評事, 必以銓郞及玉堂官差送, 爲彈壓之地。故評事鄭文孚, 當壬辰變亂, 有功於北方, 因道臣請, 特命超贈貳公, 同時南北道義士二十人, 悉加追褒。云云。" ○時李公首膺是任, 以修擧廢墜爲務, 深惜先生之未蒙甄賞, 欲以先生幷享于尹文肅公瓘之廟, 以書稟議于閔公, 閔公樂聞而復之, 使別立祠宇, 且捐營穀, 爲功役之費。【六年】 乙巳。【先生歿後四十二年】 九月二十五日, 鏡城漁郞里, 祠宇成。漁郞里在本府茂溪湖之上, 卽先生與李公鵬壽倡義起兵之地也。畏齋李公與端川守洪錫龜相廟基于此, 是年四月二十六日始役, 九月功告訖, 以是月二十五日, 奉先生位主壁, 以李、崔、池、姜四公配之。奉安文與常享文, 皆李公所製也。十二月, 畏齋李公還朝, 上疏伸先生冤, 且請褒贈崇秩。【疏見附錄。】 ○二十七日, 領議政鄭公太和, 筵奏請先生伸冤、贈職, 錄用子孫, 上卽允之。【筵說見附錄。】領相鄭太和、右相許積、副提學趙復陽同爲入侍。鄭公啓曰: "倭奴淸正入北方, 屠燒城郭, 蘇下江東北靺鞨勒輕騎, 深蹂茂山、富寧地, 兵馬評事臣文孚躬將義師, 討淸正, 搴旗六鎭之外, 蹀血白塔之下。威服靺鞨以全邊境, 挫蠻戎之氣, 建震耀之勳, 萬曆以來, 宣武諸將之所未有也。靖社時, 預元帥薦, 而被人誣告下吏, 又坐所爲《詠史》詩, 死於獄中, 臣竊悲之。行長入西方, 神宗皇帝命大將軍李如松率師五萬, 擊倭奴平壤城下。惟北方山川隔遠, 此神宗皇帝之所不得救, 而大將軍之所不能禦也。然文孚以一評事, 募兵六千, 能力戰, 斥逐倭奴, 復北方二十二州, 而大功未獲封爵, 乃以非罪竟死於刀筆之前, 豈不痛哉? 臣以爲宜命有司贈文孚爵, 以慰北人之心。云云。"【七年】 丙午。【先生歿後四十三年】 正月二十三日, 特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三月, 燭龍書堂成。【西河李公敏敍有記。】 ○九月十一日, 司諫呂聖齊啓請宣額, 上令該曹稟處, 禮曹覆啓蒙允。【禮曹啓辭見附錄。】【八年】 丁未。【先生歿後四十四年】 十月初六日, 賜額彰烈, 遣禮官致祭。【祭文, 知製敎李製進, 見附錄。】禮官本道都事鄭華齊、典祀官鏡城判官李之馨、大祝輸城察訪金振漢、贊者前察訪朴興宗、謁者前參奉池天錫等, 實來行祭。【肅宗大王十九年】 癸酉。【先生歿後七十年】 趾齋閔公鎭厚啓請調用子孫, 上允之。閔公自評事還朝啓曰: "以鄭文孚之忠節, 其子孫無一立朝者, 甚非所以酬功興勸之道, 宜令銓曹別爲調用。云云。"【二十九年】 癸未。【先生歿後八十年】 九月, 先生曾孫前主簿杉上疏請諡, 上令該曹稟處。【疏見附錄。】 ○十月初七日, 禮曹回啓蒙允。【啓辭見附錄。】【三十二年】 乙酉。【先生歿後八十二年】 立祠于會寧。會寧儒生立祠于本府文廟傍, 以本府從義人申世俊、吳允迪諸公配享。【三十四年】 丁亥。【先生歿後八十四年】 道臣啓請祠額, 賜額顯忠, 遣禮官致祭。【祭文, 知製敎尹弘离製進, 見附錄。】 ○十月, 《臨溟大捷碑銘》成。【輔德崔昌大撰。】 ○又於咸興府, 建立祠宇, 配享十三義士, 而建祠之年月與宣額、賜祭文, 未得抄來, 故不爲載錄。【三十八年】 壬辰。【先生歿後八十九年】 諡狀成。【禮曹判書閔鎭厚撰。】【三十九年】 癸巳。【先生歿後九十年】 擬諡忠毅, 承批。臨患不忘國曰忠, 致果殺賊曰毅。【四十四年】 戊戌。【先生歿後九十五年】 《彰烈祠志》成。畏齋李公所撰, 至是刊行, 趾齋閔公有序。【俱見附錄。】【英宗大王二十三年】 丁卯。【先生歿後百二十四年】 三月, 設宴于昭格洞僦舍, 延賜諡敎旨。宣諡官李齊嵒。【三十四年】 戊寅。【先生歿後百三十五年】 文集原本成。【書札、疏章卷見逸於鬱攸, 只以詩卷、箋、啓等文成集。】貞庵閔文簡公遇洙撰序文, 左尹吳公捐材重刊。【正宗大王十二年】 戊申。【先生歿後百六十五年】 十一月初六日, 先生五代孫瑾上疏, 請不祧典, 命下該曹, 議大臣回啓, 用大臣議, 蒙允。禮曹啓曰: "觀此晉州幼學鄭瑾上言, 則以其五代祖忠毅公文孚親盡, 不祧爲請矣。文孚當壬辰之亂, 以評事募兵, 翦殲諸賊, 關北一路, 賴以平定, 其巍勳壯烈與趙憲、高敬命、黃璡、李福男一般, 而四人旣蒙不祧之盛典, 則今其子孫援此爲請, 不必爲濫, 而不祧體重, 非臣曹所敢擅便, 議大臣, 稟處何如?" 傳曰"允"。領議政金致仁以爲"國家之於勳臣, 申盟而榮之, 不祧而享之, 國典也。壬辰島夷之變, 叛民內應, 邊鎭俱陷, 而忠毅公鄭文孚, 時以評事倡義募兵, 翦殲諸賊, 北關賴平, 人到于今稱之, 其績固大矣。第念不祧, 勳封後事也。雖其褒贈屢加於身後, 帶礪不及於當時, 則當此倖門漸開, 典章日墜之時, 法外輕許, 恐合難愼, 伏惟上裁"。左議政李性源以爲"昔者壬辰之亂, 忠毅公鄭文孚, 以一評事倡義, 殲土賊、破倭寇, 使關北一路晏然獲全, 忠固可尙, 功亦罕比。生前勳封之不及, 雖不知其故, 以忠以功, 宜蒙殊異之報, 援例爲請, 似不至踰濫, 伏惟上裁"。右議政蔡濟恭以爲"不祧, 所以待勳臣也。當壬辰亂, 忠毅公鄭文孚之勦滅土賊, 蹴踏倭胡, 保有關北疆土, 功莫大焉。不祧, 雖不可以子孫呼籲而容易許之, 若忠毅公, 生不勳封, 而幷與不祧之典而靳之, 則恐非酬報大勳勞之義, 伏惟上裁"。領府事鄭存謙、判府事徐命善、領敦寧洪樂性、判府事金煜、判府事李存協, 病不收議。禮曹回啓"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 傳曰"從多議施行事"。啓下內辭意奉審, 不祧之意, 本家知委施行事, 關辭謄送, 傳給於鄭瑾家, 使之依關辭施行判下。以合行立案者傳給, 形止卽爲馳報。云云。【十三年】 己酉。【先生歿後百六十六年】 四月二十五日, 行改題主禮, 設慶宴於晉州佳谷里第。【十四年】 庚戌。【先生歿後百六十七年】 《神道碑銘》成。【大提學黃公景源撰, 見附錄。】【哲宗大王九年】 丁巳。【先生歿後二百三十四年】 咸鏡監司李是遠, 啓請富寧靑巖祠宣額。靑巖亦先生禦賊之地也。先是北人立祠, 以本府人車應鱗、朴克謹等九義士配享, 未及宣額, 至是李公筵奏啓請。【十一年】 己未。【先生歿後二百三十六年】 宣額于靑巖祠曰崇烈, 遣禮官致祭。【當宁二十七年】 庚寅。【先生歿後二百六十七年】 三月, 文集重刊。 한아(寒鴉) 반포(反哺)의 의리를 아는 까마귀로, 부모의 은덕에 보답하는 효자를 비유한 말이다. 옥……못하다 왕창령(王昌齡)의 〈장신추사(長信秋詞)〉에 "옥 같은 얼굴이 한아보다 못하니, 한아는 그래도 소양궁 해그림자 받고 오네.[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라고 한 말이 나온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시 이 시의 내용은 포은 정몽주의 문집에 실려 있다. 《圃隱集 卷1 征婦怨》 모의……지었다 이 글은 《농포집(農圃集)》 권3에 실려 있다. 악비(岳飛, 1103~1141)는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이며 명장(名將)으로, 자는 붕거(鵬擧), 시호는 무목(武穆)이다. 악비가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다가 진회(秦檜)의 참소를 입고 옥에 갇히자, 종정경 사요가 그를 위하여 일족을 보증으로 하여 악비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역시 쫓겨나 죽음을 당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탁월한 솜씨 원문의 '천양(穿楊)'은 버들잎을 뚫는다는 뜻으로,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양유기(養由基)가 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활로 버들잎을 쏘아 백발백중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4 周本紀》 체수(遞授) 현재의 관직에서 교체되어 다른 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말한다. 중전(中殿)……글 《농포집》 권3에 실려 있다. 응제(應製) 임금의 명에 의하여 지은 시문(詩文)을 말한다. 체자(帖字) 관사(官司)에서 인장(印章)을 찍지 않고 임시로 주던 체(帖) 자를 새긴 공문을 말한다. 관각 문자(館閣文字) 홍문관이나 예문관에서 왕명에 의하여 지어 올리던 시문(詩文)을 말한다. 누원(樓院) 서울 도봉구 도봉동과 의정부시 경계에 있던 마을이다. 다락으로 된 원(院)이 있어서 다락원이라고도 한다. 양문역(梁文驛) 경기도 포천군(抱川郡)에 있었던 역이다. 풍전(豐田)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지역으로, 예전에 풍전역(豐田驛)이 있었다. 지응(支應) 관리가 공무로 출장을 갔을 때, 필요한 물건을 출장지 지방 관아에서 대주던 일을 말한다. 창도역(昌道驛) 강원도 철원군 지역에 있으며, 예전에는 금성현(金城縣)에 속해 있었다. 은계역(銀溪驛)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서쪽 5리에 있다. 먼 국경 지역 원문의 '요황(要荒)'은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말한다. 계원장(繼援將) 전란이 일어났을 때 군량과 군계(軍械)를 수송·조달하고 격문(檄文) 작성 등을 담당한 임시 무관을 말한다. 좌수사(左水使)……합하였습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먼저 성을 버렸으며,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경상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경상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宣祖實錄 25年 6月 28日》 지달원(池達源)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자는 사진(士進)이다.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기사에 의하면, 정문부가 국경인의 난 때 제자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경성 해변의 외진 곳에 있는 지달원의 집에 오래 숨어있었다고 하였다. 반란자 원문의 '반측(反側)'은 두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자를 가리킨다. 외재(畏齋) 이공(李公) 이단하(李端夏, 1625~1689)로, 외재는 그의 호이다. 자는 계주(季周)이고 아버지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이다. 북평사로 있을 때 감사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의 사적을 조사해 조정에 알려 관직을 추증시켰다. 또한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내리게 했다. 저서로는 《외재집》과 《북관지(北關誌)》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암(尤庵)……편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48 〈답이계주(答李季周)〉에 이러한 내용이 보인다. 노봉(老峰) 민공(閔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으로, 노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이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저서로는 《노봉집》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말수(鄭末秀) 명천(明川)의 절의 노비였었다. 60리 원문의 '식(息)'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1식(息)은 30리이다. 공함(公緘) 공함추문(公緘推問)의 준말로, 공문(公文)을 발송해 서면으로 죄과(罪過)를 묻는 서면 심리(書面審理)를 말한다. 뇌물 원문의 '뇌유(賂遺)'는 지방관 등의 하급 관리가 중앙의 상급 관청이나 관리에게 보내는 선물로, 뇌물적 성격이 있는 것을 말한다. 포망장(捕亡將) 도망하는 자를 잡는 장수를 말한다. 송(松)……같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는 조선(朝鮮)에 가면 '송(松)' 자가 들어간 마을을 조심하라는 도참설(圖讖設)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으로 떠나는 장졸(將卒)들에게 '조선에 가면 반드시 송(松) 자를 피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 때문에 왜군들이 '송(松)' 자가 붙은 지명을 침범하지 않고 피해 갔으며, 선발 부대가 지나가며 송(松) 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나 산에는 깃대를 꽂았다고 한다. 일본군이 송(松)자를 두려워하며 피했던 이유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학공(提學公) 정척(鄭惕, 1517~1596)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군길(君吉), 호는 행촌(杏村)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 정언각(鄭彦慤)이다. 1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교리·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어양(漁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향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올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두 장수가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설월(雪月) 《농포집》 권1에 '〈雪夜與池參奉達源口號〉'라는 시가 보인다. 관계(關鷄) 《농포집》 권1에 '〈吉州客館留池達源〉'라는 시가 보인다. 요충지……부끄럽소 《동계선생속집(桐溪先生續集)》 권1 〈증주목정문부(贈主牧鄭文孚)〉에 이러한 내용이 보인다. 선생이……높네 《지봉유설(芝峯類說)》 권13 〈문장부육 동시(文章部六 東詩)〉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진관(鎭管) 조선 시대에 두었던 지방 방위 조직이다. 세조 1년(1455)에 전국을 나누어 주진(主鎭) 밑의 거진(巨鎭)을 단위로 하여 설정하고, 수령이 겸임하는 첨절제사가 통할하게 하였다. 책응(策應) 양편(兩便) 또는 양군(兩軍)이 서로 호응하여 작전 따위를 돕는 것을 말한다. 백발로 함께 숙직하면서 이 시는 《농포집》 권1에 칠언 배율(七言排律)로 실려 있다.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 약봉은 서성의 호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이고,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병조 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에 의해 임해군·순화군·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등청정의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주지번(朱之蕃)과 예부 좌급사중(禮部左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이 황태손의 탄생을 반포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서를 가지고 온 것은 병오년(1606)이다. 《宣祖修正實錄 39年 1月 1日》 본문에 임인년(1602)으로 되어 있는데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곽태(郭泰) 128~169. 후한 말의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자는 임종(林宗)이며, 팔고(八顧) 중 한 사람이다. 높은 학문과 덕행으로 많은 사람에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여사(旅舍)를 거쳐 갈 때는 반드시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가기로 유명했다. 형주 안 것 원문의 '식형주(識荊州)'는 한 형주(韓荊州)를 안다는 말로, 평소 흠모하던 인물을 한번 보고 싶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백(李白)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한조종(韓朝宗)에게 보낸 편지인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태어나서 만호후에 봉해질 필요가 없고, 다만 형주자사 한조종을 한번 알기를 원할 뿐입니다.[生不用萬戶侯, 但願一識韓荊州.]"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 오산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 문서를 담당,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저서로 《오산집(五山集)》 등이 있다. 오봉이……갔다 무신년에 고부 청시 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 선조(宣祖)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내려 줄 것과 신왕의 등극을 책봉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하여, 오억령(吳億齡)과 명나라 서울로 떠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光海君日記 卽位年 2月 21日》 그가……때 1598년(선조31)에 명나라의 병부 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이정귀는 〈무술변무록(戊戌辨誣錄)〉을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月沙集 卷21 戊戌辨誣錄》 옥하관(玉河館) 중국 북경(北京)에 있던 외국 사신의 관소(館所)이다. 편양(便養) 지방관을 맡아서 부모를 공양하기에 편리함을 말한다. 정조(鄭造) 1559~1623. 정문부의 백부인 정척(鄭惕)의 손자이다. 자는 시지(始之)이고, 아버지는 정문영(鄭文英)이다. 이이첨(李爾瞻)의 주구가 되어 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는 폐모론을 제기하였다. 대사간이 된 뒤 정조는 폐모론을 주도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원흉으로 지목되어 1623년(인조1) 사형에 처해졌다. 《국역 광해군일기(중초본) 5년 7월 8일, 6년 7월 2일, 10년 1월 30일》 두……일으켰다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각각 다른 궁에 거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처음으로 이 설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당시 계축옥사와 관련된 인목대비의 처리 문제를 제기하며 "마땅히 모후(母后 인목대비)와 각각 다른 궁에 거처함으로써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光海君日記 5年 5月 25日》 급류용퇴부(急流勇退賦) 《농포집》 권2에 실려 있다. 대식(代食) 농사지어 그 소득으로 녹식(祿食)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대아(大雅) 상유(桑柔)〉에 "이 농사짓기를 좋아하여 농민과 함께 농사지어 녹봉을 대신하니, 농사짓는 것을 보배로 여기고 녹봉 대신하는 것을 좋아하도다.[好是稼穡, 力民代食, 稼穡維寶, 代食維好.]"라고 한 말이 나온다. 우순(虞舜)의……하였다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들 정자[野亭] 《농포집》 권2에 '〈창원의 들 정자 시에 차운하다[次昌原野亭韻]〉'라는 율시 두 수가 실려 있다. 월영대(月影臺) 경남 창원시 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누대(樓臺)이다. 신라 말기에 고운(孤運) 최치원(崔致遠)이 잠시 머물며 후학도 가르쳤던 곳이다. 자유롭게 지내는 원문의 '하거(遐擧)'는 훨훨 노니는 것으로, 고상한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를 짓고 《농포집》 권2에 〈촉석루 시에 차운하다[次矗石樓韻]〉라는 시가 실려 있다. 용사(龍蛇)……입었는데 용과 뱀은 각각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으로, 여기서는 임진년(1592, 선조25)과 그 이듬해인 계사년(1593)을 가리킨다. 1592년에 제1차 진주성 전투가, 1593년에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다. 특히 왜군은 2차 전투에서 1차 진주 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0만에 가까운 대군이 합세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주가 함락되면서 성안에 있던 수만 명의 인사가 함께 희생당하고 말았다. 정인홍(鄭仁弘) 1536~1623.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합천(陜川) 출신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서 대북(大北)을 영도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는데,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1572~1645. 학곡은 홍서봉의 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휘세(輝世)이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박정(朴炡)이……원망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박정은 원한을 품고 있다가 이듬해인 1624년에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정문부가 창원에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역사에 대해 읊은 10수의 시에 무슨 목적이 있다 하여 문초하였고, 결국 정문부는 문초를 받다가 죽게 되었다. 이괄(李适)이 모반하자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논공행상에서 우대받지 못하고 평안 병사(兵使) 겸 부원수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기복(起復)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상제의 몸으로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상을 호종하는 원문의 '집적(執靮)'은 '집기적(執羈靮)'의 준말로, 말의 굴레와 고삐를 손에 쥐는 것이니, 임금을 위하여 천한 일을 한다는 뜻이다. 《禮記 檀弓下》 여기서는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호종했다는 뜻이다. 박내장(朴來章)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광해군 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문관 검열, 교리(校理)를 지냈다. 남공의 예언 《농포집》 권6 〈제가기술(諸家記述)〉 주 참조. 무관(武關)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의 북서쪽에 있는 관(關)으로, 진 소왕이 초 회왕을 만나자고 하여 진나라로 끌고 간 곳이다. 한 번……끊겼는데 《농포집》 권6 〈제가기술〉 주 참조. 잔약한……되었는가 《농포집》 권6 〈제가기술〉 주 참조. 최내길(崔來吉) 1583~164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대(子大)이다.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형이다. 인조반정 때 창의문(彰義門)을 넘어가 궁성을 지킨 공으로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정문부의 장남인 정대영(鄭大榮)과 동서간이다. 문사 낭청(問事郞廳)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주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을 말한다. 위관(委官)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 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금이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관을 말한다.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 1566~1614)이다.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종친으로, 중종(中宗)의 손자인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익성군에 진봉(進封)되었다. 치대(置對) 죄인을 의금부에 잡아다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원정(原情) 관아에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거나 그러한 내용을 적은 글을 말한다. 추포(追褒) 사후에 그 공을 포장(褒獎)하는 것을 말한다. 소하강(蘇下江) 만주 북방에 있는 강으로 백두산의 북쪽에 있다. 무산(茂山)과 부령(富寧) 모두 함경북도의 지명이다. 도필(刀筆) 옛날 중국에서 종이가 발견되기 전에 대쪽에 문자를 기록하던 붓과 그 틀린 것을 깎아내던 칼을 말한다. 전하여 문서의 기록 또는 그 기록을 맡은 소리(小吏)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정문부가 지은 〈영사(詠史)〉 시에 무슨 목적이 있다고 공초(供招)에 기록된 법률 문안(法律文案)을 말한다. 복계(覆啓) 회계(回啓)와 같은 뜻이다. 왕에게 보고된 어떤 사안에 대해 왕이 바로 처리하지 않고 담당 관사의 의견을 듣고자 사안을 내려보내면, 담당 관사에서 의견을 정하여 왕에게 직접 또는 초기(草記) 등으로 아뢰는 행위를 말한다. 부조전(不祧典) 세대가 지난 신주(神主)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만[祧遷], 4대가 지나더라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모시는 특전을 말한다. 대려(帶礪) 하산대려(河山帶礪)의 준말로, 나라에서 공신의 집안을 영원히 보호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 나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공신들에게 벼슬을 봉해 주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말라서 띠처럼 되고 태산이 닳아서 숫돌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하리라.[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高祖功臣年表》 판하(判下) 신하가 상주(上奏)한 안건에 대하여 임금이 검토하여 그 가부를 재가(裁可)하는 것을 말한다. 일명 판부(判付)라고도 한다. 입안(立案)한 것 원문의 '합행입안자(合行立案者)'는 입안식(立案式)의 결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입안(立案)은 당사자의 권리나 모종의 사실을 공증(公證)하기 위해 백성의 요청에 따라 관아에서 발급하는 문서의 일종을 말한다. 입안식의 기본 구성은 입안 발급일과 발급처[某年月日某司立案], 기두어·본문·근거법조항[右立案爲某事云云], 결어, 담당자의 서압, 관인으로 되어 있다. 말미에는 결어로 "합행입안자(合行立案者)"라고 쓰고 발급처의 당상관과 당하관이 서압(署押)하였다. 내용을 다 기재한 뒤에는 해당 관청이 서압하고 관인을 찍은 다음 점련(粘連)하여 입안 신청자에게 발급해 주면 입안 발급의 모든 절차가 끝이 난다. 《經國大典 禮典 用文字式》 8년 대본에는 '구년(九年)'으로 되어 있는데, 정사년(1857)은 철종 8년이므로 고쳐 번역하였다. 차응린(車應鱗)과……못하였기에 철종 8년(1857) 3월 8일에 전 함경감사 이시원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유독 부령(富寧)의 아홉 의사 즉 차응린·박극근·김전(金銓)·김경(金鏡)·차득도(車得道)·황수(黃垂)·박인범(朴仁範)·차덕홍(車德弘)·박례범(朴禮範)은 비록 청암의 거의(擧義)한 장소에 몇 칸의 사우가 있지만, 사액을 하는 데에는 빠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備邊司騰錄 哲宗8 3月 8日》 10년 대본에는 '십일년(十一年)'으로 되어 있는데, 기미년(1859)은 철종 10년이므로 고쳐 번역하였다. 撻 대본에는 '橽'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