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함294)이 추향 후에 봉은사에서 노닐려고 배로 오가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4수 次李汝涵秋享後遊奉恩寺舟行往還韻【四首】 진세의 일이 사람을 얽어매어 한가롭지 못해 괴로우니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추향의 반열을 바라보노라두 왕릉에 제 올리고서 절을 찾으니삼복의 찌는 더위에 억지로 성문 나서네-원문 1자 결락- 은 온통 흰 돌인 낮은 여울을 내달리고강기슭은 길게 펼쳐진 갯벌을 끼고서 반쯤은 높다란 산이어라오늘은 물길 거슬러 -원문 1자 결락- 저어 나가고내일은 물살 타고서 노 젓지 않고 돌아오리라백 길 높이로 배를 끌어올려도 나는 절로 한가로우니강기슭에 누워서 울긋불긋한 화초를 바라보노라진세 벗어나니 바야흐로 탕 임금 그물 벗어난 듯295) 상쾌하고벼슬의 굴레는 무관에 갇힌 듯296) 근심스럽구나어젯밤 가을바람 하늘에서 불기 시작하더니옅은 가을색이 숲속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어라밝은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함을 싫어하지 말라인간 세상에서 임술년297)을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성을 나왔다고 어찌 이 몸이 한가로울까시구는 마음을 억눌러 머리카락 새려 하네선유(船遊)는 끝이 없으니 읊조림도 멈추지 않고모래톱 새 쌍쌍이 나니 〈관저〉편298)을 읊조리누나가까운 방초, 먼 숲이 어여쁘며맑을 제 고운 모래밭 비 올 제 숲이 사랑스러워라경치는 사람을 홀려 수응을 다하지 못하니이곳에 와서 노닐어 돌아갈 줄 모르누나태평시대 무능하여 절로 한가로우니어찌 노심초사하며 억지로 반열을 넘겨볼까벼슬길은 나에게서 삼천 리 떨어져 있고세상길은 백이관299)보다 어렵구나좋은 벗과 만나 승경을 찾아가니파란 강, 푸른 산 대단히 아름다워라소선의 적벽이 이와 어떠한가일엽편주 띄워 한번 오가는구나 塵事牽人苦未閒不禁愁鬢望秋班二陵灑掃仍尋寺三伏炎蒸強出關【缺】走淺灘渾白石岸臨長浦半危巒今辰逆浪撑【缺】去明日乘流弭棹還百丈拖船我自閒臥看江岸草花班出塵方快開湯網羈宦曾愁閉武關昨夜商颷動閶闔一分秋色在林巒莫嫌明月初生魄人世難逢壬戌還出城那得此身閒詩句關心鬢欲班不盡江流吟滾滾作雙洲鳥詠關關近憐芳草遙憐樹晴愛明沙雨愛巒物色惱人酬未了來遊此地不知還昭代無能也自閒肯勞心目強窺班名場遠我三千里世路難於百二關良友相逢仍勝地碧江殊好又蒼巒蘇仙赤壁何如此欲駕偏舟一往還 이여함 이정(李瀞, 1541~1613)의 자로 그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하였다. 의병을 모아 진해, 창원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에서는 의령현감으로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왜군을 격파하였다. 탕……듯 옛날에 탕 임금이 밖에 나가다 보니, 어떤 사람이 들판에다 사면으로 그물을 쳐 놓고 축원하기를 "하늘로부터 사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 그물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하였다. 탕 임금이 "세상이 다 되었구나."라고 하고 삼면의 그물을 제거하고 나서 축원하기를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되,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나의 그물로 들어오라."라고 하였는데,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 "탕의 덕이 지극하여 금수에까지 미쳤다."라고 하였다. 《史記 殷本紀》 진 소왕(秦昭王)이 초 회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화합하지 않으면 제후를 호령할 수 없으니, 무관(武關)에서 만나 맹약을 체결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초 회왕이 사기를 당할까 봐 망설였다. 초 회왕의 아들 자란(子蘭)이 말하기를, "왜 진나라의 환심을 잃으려고 합니까?"라고 하자, 초 회왕이 무관에 가서 회합하기로 하였다. 진 소왕이 장수 한 명을 무관에 매복시켰다가 초 회왕이 도착하자, 체포하여 함양(咸陽)으로 데리고 갔다. 초 회왕이 장대(章臺)에서 진 소왕을 알현하니, 번신(蕃臣)으로 대하고 대등한 예로 예우하지 않자 초 회왕이 크게 노하였다. 진나라가 초 회왕을 억류해 놓고 무(巫)ㆍ검(黔)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자, 초 회왕이 맹약부터 체결하자고 하였다. 진나라가 먼저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자 초 회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진나라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또 나에게 땅을 떼어 달라고 강요한단 말인가?"라고 하고, 다시금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초 회왕이 돌아가려고 도망쳤으나 실패하자 병이 나서 죽었다. 《史記 卷40 楚世家》 임술년 소식(蘇軾)이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것은 임술년 7월 기망(旣望)이다. 관저편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번째 편인 〈관저(關雎)〉에 "관관히 우는 저구새, 하수의 모래섬에 있도다. 요조한 숙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라고 하였다. 경치를 보면서 여러 시를 읊었다는 의미이다. 백이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지를 말한다. 옛날 진(秦)나라 땅이 험고(險固)하여 2만 인으로 제후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다[秦得百二焉]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