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주창하여 병사를 일으켜 경성으로 들어가 지킨 뒤에 왜적을 공격하여 참수하고서 올린 장계 倡義起兵入守鏡城後擊斬倭賊狀啓 철령(鐵嶺)을 지키지 못해 서쪽길이 끊어진 뒤로 조정의 명을 듣지 못하였기에 절도순찰사 겸관찰사(節都巡察使兼觀察使) 김명원(金命元)의 관자(關子)와 유지(有旨)가 길이 막혀 전해지지 않던 차에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등이 덕만동(德萬洞) 촌민들이 전해준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삼가 유지를 보고서 행재소에서 잘 지내신다는 것과 칠도에 왜적이 거의 섬멸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기쁨에 손뼉을 치며 망극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당초 북방의 일은 지난 6월 12일에 철령의 병력이 궤멸된 이후에 남도(南道) 열읍의 군민이 굳게 지키려는 뜻이 사라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흩어져버렸기에, 왜놈들이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 김귀영(金貴榮)이 북도(北道)에서 병사를 징집하였고,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도 또한 자신이 맡았던 병사를 거느리고 직접 나아갔습니다. 마침 육진(六鎭)의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엿보고서 휘파람을 불어 무리를 불러 모으니, 장차 앞뒤로 적을 맞닥뜨리는 근심이 있을 것 같기에 병사는 길주(吉州)에 머물러 주둔하여 남북으로 지원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에게 명하여 정병 2백 명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내달려 가게하고, 또한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에게 명하여 정병 4백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 북청(北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 방어할 수 없어서 이영 등의 병력은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퇴각하여 북병사와 합쳤는데, 병사 1천여 명이 길주의 임명 지역에 주둔하였다가 왜적과 접전을 벌여 왜놈 7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싸우다가 죽었다'는 해괴한 말들이 떠돌게 되자 군사들은 더욱 동요되어 북쪽 정예병의 태반이 밤에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적병이 와서 습격하니 남은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병사 이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은 이미 흩어지고 성안은 비로 쓴 듯 텅 비어 부득이하게 이영은 회령(會寧)을 지키려고 하였고 한극함은 종성(鍾城)을 지키려고 하던 차에 지난 7월 23일에 회령 역졸 이충경(李忠卿),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향리(鄕吏) 국경인(鞠景仁) 등이 앞장서서 외쳐 난리를 일으켜서 왕자 두 분과 상락부원군 김귀영,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승지(承旨) 황혁(黃赫), 선전관(宣傳官) 조인징(趙仁),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회령 부사(會寧府使) 문몽헌(文夢軒),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혜(李蕙) 등을 사로잡아 왜적에게 넘겼습니다.회령의 변란 이후로 종성 이북의 인심은 모두 이반되어서 북도 우후(北道虞侯) 이범(李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병사 한극함 등은 또한 본도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왜놈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 나머지 수령과 진장(鎭將) 등은 자신의 휘하에게 습격을 당하여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되었습니다. 신도 또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활로 공격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나서 경성의 바닷가 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전 좌수(座首) 서수(徐遂), 당시 좌수 이기수(李麒壽), 이 고을 사람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 급제(及第) 박은주(朴銀柱), 전 권관(權管) 강수연(姜壽延), 유학(幼學) 최배천(崔配天), 정병(正兵) 강수하(姜壽遐),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미전 첨사(美錢僉使) 김범(金範),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옥련 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 황자파 권관(黃柘坡權管) 함이량(咸以良), 오촌 권관 구황, 병사 군관(兵使軍官)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 전 만호 김귀장(金龜), 훈련 봉사(訓鍊奉事) 허대임(許大任), 내금위(內禁衛) 이팽령(李彭齡), 충의(忠義) 이응운(李應雲)과 이귀서(李貴瑞), 정로위(定虜衛) 손걸(孫傑), 우림위(羽林衛) 이응란(李應鸞), 보인(保人) 홍대연(洪大連), 종성 부사(鍾城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 최경원(崔慶元), 충의위 어기영(魚起瀛), 전 사복(司僕) 엄준억(嚴俊億), 정로위 정춘기(鄭春氣), 별시위(別侍衛) 이수근(李壽根), 보인 정시룡(鄭時龍), 보인 이종신(李宗信), 보인 곽사(郭俟), 종성 군관(鏡城軍官) 전 내금위 이현(李鉉), 온성 판관(穩城判官) 군관 정로위 이광진(李光辰)과 이천룡(李天龍), 유원 첨사(柔遠僉使) 군관 전 내금위 김대관(金大寬), 갑사(甲士) 최명옥(崔命玉)과 신구학(申九鶴), 훈융 천사(訓戎僉使) 군관 정로위 정려(鄭勵), 별시위 이장형(李長亨)과 김흥복(金興福)과 고영진(高永珍)과 박종례(朴從禮), 교생(校生) 한득(韓得)과 주덕남(朱德男), 미전 첨사(美錢僉使) 군관 별시위 안덕수(安德壽), 갑사 방인학(仁鶴), 충순위 장붕(張鵬), 갑사 이찬(李贊), 황자파 권관(黃柘坡權) 군관 별시위 전흥개(田興漑), 보인 최용담(崔龍潭), 갑사 이몽복(李夢福), 서올에서 피난 온 성균관 권지(成均館權知) 학유 이성길(李成吉), 전 직장(直長) 신석린(申石潾), 생원 신노(申櫓), 유학 이정려(李精李精), 유학 신부(申桴)와 신격(申格), 이 지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임정언(林廷彥), 유학 신미(申楣), 서리(書) 최언붕(崔彥鵬), 보인 오경남(吳慶男)과 오응남(吳應男) 등이 원근에서 와서 모여 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책을 세웠습니다.이에 이달 9월 16일에 경성으로 들어가 방비하기로 하였는데, 창고와 성과 해자는 왜적들이 오래 머물면서 어지럽게 헤쳐져 있어서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麒壽) 및 관노 등이 타고 남은 것들을 모았으며 더러운 것을 파묻고 부서진 것은 수리하여 신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달 18일 사시에 길주에 주둔하던 왜적 92명이 문득 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한 왜장이 앞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성문을 향해 돌진하였습니다. 미전 첨사 김범이 거느린 관노 국생(鞠生)이 검으로 팔뚝을 자르고, 그의 부친 관노 세필(世弼)이 왜장을 붙잡아 말에서 끌어내려 곧바로 사로잡아서 군중에 효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성 아래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김범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이 활을 많이 쏘아서 왜적과 말들을 맞추자 비로소 퇴각하였습니다. 안원 권관 강문우가 앞에서 이끌고 오촌 권관 구황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 등 15명이 자원하여 추격하다가 본 지역의 전 만호 급제 김대진(金大振)과 중도에서 만나 힘을 합쳐 추격하였습니다. 일식(一式 30리) 남짓 거리를 가면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상당수의 왜적을 활로 쏴서 맞히니, 시체를 싣고서 급히 달아나 흐르는 피가 길바닥을 적셨으며 마필과 의복 등 잡물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강문우가 두 명의 왜적 목을 베었는데, 날이 어두워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수한 목과 자른 귀 둘은 함께 산길을 통해 보냈는데 관찰사또가 자신이 공이라고 위로 사신을 보내 보고하였습니다.184)본부 토병(土兵) 전 별시위 유억수(庾億壽)와 이 지역에 들어와 사는 갑사(甲士) 이태옥(李泰玉) 등은 당초 왜적이 성에서 웅거할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여 활을 쏘아 왜적을 사살하고서 묻어두었다가, 신이 성에 들어간 후에 유억수는 수급 둘, 이태옥은 수급 하나, 정병 강득횡(姜得璜)은 수급 하나와 아울러 빼앗은 환도를 저에게 바쳤습니다. 도내 경흥(慶興), 경원(慶源) 등지의 변방 오랑캐와 깊이 숨은 여러 왜놈의 우두머리에게 동시에 글월을 화살에 묶어 쏘아서 보냈습니다.경흥부와 그 소관인 네 보는 전부 함락되어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은 거의 죽음을 당하였을 뿐더러, 경원 소관인 아산(阿山)과 건원(乾元) 두 보(堡) 및 고아산의 고건원창(古乾元倉), 유신창(有信倉), 해창(海), 온성의 덕명창(德明倉), 덕산창(德山倉), 해창(海倉), 종성 부계(俯溪) 장풍리(長豐里)와 방산리(方山里)의 녹야창(鹿野倉), 조산리(造山里)의 해창(海倉), 회령 역산창(櫟山倉), 고랑거리창(古郞巨里倉) 등도 또한 노략질을 당하였습니다.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남쪽으로 길주의 왜적을 도모하고 북쪽에 가득한 오랑캐를 막으려고 하니, 대단히 고민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경성부는 또한 육진의 요충지로 길주까지 이틀거리요 회령까지도 또한 이틀거리인데, 두 곳의 왜적 사이에 끼어 있어서 병사를 징발할 곳이 없고 군량을 계속 보급할 계책도 없으니 더욱 고민입니다.대개 왜적 숫자의 많고 적음을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성(利城)과 단천(端川), 영동(嶺東)과 길주(吉州) 네 곳에 남아 있는 숫자는 각각 4천여 명이라 하는데, 공격과 수비의 편의를 제장과 상의하여 힘을 다하여 조치하면서 주제넘게 이것저것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인신(印信)이 없는 관리로써 이런 변란의 시기를 당하였는데, 백문185)으로 봉계하는 것은 부신의 증험이 없는 것 같아서 임시로 부령부의 인신을 사용하였으니 대단히 황공합니다만,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9월 20일 自鐵嶺失守, 西路阻絶, 未聞朝命爲白有如乎, 節都巡察使兼觀察使金命元關子及有旨段, 路塞不通次, 慶源府使吳應台·朱乙溫萬戶李希唐·玉連萬戶安沃·吾村權管具滉等, 以持德萬洞村氓傳書, 來到爲白是去乙。臣伏見有旨, 始知行在萬安, 七道倭賊幾盡勦滅, 不勝感泣欣抃, 罔極爲白齊。當初北方事段, 去六月十二日, 鐵嶺兵潰後, 南道列邑軍民, 罔有固志, 望風奔散, 仍致長驅之勢爲白去乙, 上洛府院君臣金貴榮, 徵兵北道爲白良在乙, 北兵使韓克諴, 亦所當領兵親赴事是白乎矣。適音六鎭諸胡伺釁嘯聚, 將有腹背受敵之患乙仍于, 兵使段留鎭吉州, 以爲南北聲援爲白遣, 卽令斜卩洞權管高敬民, 率精兵二百名, 馳赴咸興, 又令會寧府使李瑛, 率精兵四百名, 繼往北靑爲白有如乎。賊勢益熾, 不能防遏, 李瑛等兵, 退踰磨天嶺, 與北兵使合, 兵一千餘名, 軍于吉州臨溟地, 接戰斬倭七級。富寧府使元喜戰沒, 妖言流聞, 軍情益搖, 北地精銳之兵, 太半宵遁。 翌朝, 賊兵來襲, 餘軍一時自潰, 兵使以下僅以身免, 欲退守鏡城爲白良置。人心已散, 城內如掃, 不得已李瑛段, 欲守會寧, 韓克諴段, 欲守鍾城次, 去七月二十三日分, 會寧驛子李忠卿·親軍衛金世彥·鄕吏鞠景仁等, 唱首作亂, 王子君兩分及上洛府院君金貴榮·長溪府院君黃廷彧·前承旨黃赫·宣傳官趙仁徵·南兵使李瑛·會寧府使文夢軒·咸興判官李蕙等乙, 捉給倭賊。自會寧作變之後, 鍾城以北人心, 幷爲離叛, 至於北道虞侯李範·穩城府使李銖·兵使韓克諴等, 亦爲本道人所捉給乙仍于, 其餘守令鎭將, 爲其下所圖, 不能自保, 僅以身免。臣段置, 亦爲土人所射, 幾死得免, 來在鏡城海村爲白有如乎。鍾城府使鄭見龍·前座首徐遂·時座首李麒壽·本府人安原權管姜文佑·及第朴銀柱·前權管姜壽延·幼學崔配天·正兵姜壽遐·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訓戎僉使金磁·柔遠僉使李希良·美錢僉使金範·茂山萬戶李蘭·玉連萬戶安沃·朱乙溫萬戶李希唐·黃柘坡權管咸以良·吾村權管具滉·兵使軍官前監察吳命壽·前萬戶金龜長·訓鍊奉事許大任·內禁衛李彭齡·忠義李應雲·李貴瑞·定虜衛孫傑·羽林衛李應鸞·保人洪大連·鍾城府使軍官前萬戶崔慶元·忠義衛魚起瀛·前司僕嚴俊億·定虜衛鄭春氣·別侍衛李壽根·保人鄭時龍·保人李宗信·保人郭俟·鏡城軍官前內禁衛李鉉·穩城判官軍官定虜衛李光辰·李天龍·柔遠僉使軍官前內禁衛金大寬·甲士崔命玉·申九鶴·訓戎僉使軍官定虜衛鄭勵·別侍衛李長亨·金興福·高永珍·朴從禮·校生韓得·朱德男·美錢僉使軍官別侍衛安德壽·甲士方仁鶴·忠順衛張鵬·甲士李贊·黃柘坡權管軍官別侍衛田興漑·保人崔龍潭·甲士李夢福·京來避亂人成均館權知學諭李成吉·前直長申石潾·生員申櫓·幼學李精瓈·幼學申桴·申格·入居林廷彥·幼學申楣·書吏崔彥鵬·保人吳慶男·吳應男等, 遠近來會, 與臣共謀倡義, 今九月十六日, 入守鏡城, 倉穀城池, 倭賊久留板蕩之餘, 徐遂·李麒壽及官奴等,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臣等爲白有齊。本月十八日巳時量, 吉州留屯倭賊九十二名, 奄至城下, 有一倭將意謂如前, 突入城門爲白去乙。美錢僉使金範所領官奴鞠生, 以釰斫臂, 其父官奴世弼, 挾執下馬, 仍爲生擒, 梟示軍中爲白遣。其餘段, 列立城底爲白有去乙, 金範及朱乙溫萬戶李希唐, 多數發射, 中賊中馬爲白良沙, 始爲退還爲白去乙, 安原權管姜文佑倡首, 吾村權管具滉·朱乙萬戶李希唐等十五名, 自願追擊, 與本土及第前萬戶金大振, 中路相逢, 幷力追至一息餘程, 合戰十餘度, 多數射中倭賊, 載屍奔北, 流血濺道, 馬匹及衣服雜物乙, 幷爲棄走, 姜文佑斬首二級, 因日昏未得窮追爲白有齊。同斬馘割耳二級段, 由山路, 觀察使道以己爲上使爲白有齊。本府土兵前別侍衛庾億壽·入居甲士李泰玉等, 當初倭賊據城時, 奮不顧身, 射殺倭賊, 埋置爲白有如可, 臣入城後, 庾億壽段二級, 李泰玉一級, 正兵姜得璜一級, 幷其所奪環刀, 來納爲白齊。道內慶興·慶源等地藩胡與深處諸酋, 一時傳箭。慶興府及所管四堡, 全數陷掠, 民人殆盡爲白是沙餘良, 慶源所管阿山·乾元二堡及古阿山·古乾元倉·有信倉·海倉·穩城德明倉·德山倉·海倉·鍾城俯溪長豐里·方山里鹿野倉·造山里海倉·會寧櫟山倉·古郞巨里倉等, 亦盡爲搶掠爲白是去等。新集散卒, 以南圖吉州之倭, 北捍充斥之胡, 極爲悶慮叱分不喩。鏡城府, 亦六鎭要衝之地, 距吉州二日之程, 距會寧亦二日之程是白去等, 介於兩賊之間, 兵無徵發之處, 粮無繼運之策, 加于憫慮爲白齊。大槩賊數多少, 雖不詳知爲白良置, 利城·端川·嶺東·吉州四處留在之數, 各四千餘名是如爲白臥乎等用良, 攻守便宜, 與諸將相議, 盡力措置, 妄料爲白乎旀, 臣亦無印信官, 以當此變亂之時, 白文封啓, 似無符驗乙仍于, 權用富寧府印信, 至爲惶恐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 九月二十日。 관찰사또가……보고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자 기사에 "관찰사 윤탁연은 정문부를 시기 질투하였다. 문부가 전후로 세운 전공(戰功)을 탁연이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문부의 부하가 수급(首級)을 가지고 관남(關南)을 지나면 그가 모두 빼앗아 자기 군사에게 주었다. 그리고 문부의 행동이 불궤(不軌)스럽다고 조정에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백문 관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를 이르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