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의 별록 從義人別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는 경성(鏡城)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지조가 굳셌으며 기개와 도량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년 역적 국세필(鞠世弼), 국경인(鞠景仁)의 반란 때 이붕수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앞장서서 도모하여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를 구하여 주장(主將)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정 평사(鄭評事)가 지달원(池達源), 최배천(崔配天) 두 사람과 함께 이붕수의 집에 찾아가니, 이붕수가 나와 보고서 대단히 반겨하면서 온 집안 살림을 기울여 그를 받들어 주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한 달을 머물다가 나아가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창의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모두 세 차례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백탑교(白塔橋)의 전투에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습니다.정공이 길주 목사가 되었을 때 '백탑교에서 이 전중을 애통해하다.'라는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 보게 하였습니다. 경성 사람들이 《의려록(義旅錄)》을 지었는데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토벌한 그의 공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그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판관(判官) 홍여하(洪如河)가 묘갈명을 지었습니다. 대개 정공은 붕수가 아니면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고 붕수는 정공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이붕수를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정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운다면 마땅히 이 사람으로 배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증손 7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빼어난 선비로 이동백(李東白), 이동영(李東榮), 이진영(李震英), 이발영(李發榮) 등이 있는데, 이동영은 일찍이 순릉 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고 합니다.○판관(判官) 최배천(崔配天), 참봉(參奉) 지달원(池達源) 두 사람은 경성 사람으로 모두 의를 좋아하였습니다. 정 평사가 처음 두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이붕수의 집에 가서 의병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서 역적 국씨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시종 이 두 사람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최배천은 첩서(捷書)를 품고 행재소에 나아가 아뢰니 선조대왕께서 인견하고서 비단을 하사하고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란 직첩을 내려주었습니다. 당시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은 정공의 업적이 자신의 업적을 가릴까 시기하여 두 가지 일을 날조하여 위에 보고하였기에 정표(旌表)와 상격(賞格)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난리에 의병을 일으켜 따르던 선비들 가운데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지달원은 후에 선원전 참봉(璿源殿參奉)이 되었는데, 이는 조정에 친한 사람이 그의 현능(賢能)함을 알아 천거한 것이지 전공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사람과 강문우(姜文佑)를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으며 또한 확실하지 않아서 어렵다는 의논이 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만 세 사람의 공은 모두 《의려록(義旅錄)》에 실려 있습니다. 판관(判官) 민유중(閔維重)이 이들 모두를 위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니 그 공은 실로 보통보다 뛰어난데, 최배천은 직접 행재소에 갔기 때문에 겨우 영직(影職)7) 오품첩을 얻었고 지달원은 전혀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자손을 비록 녹용(錄用)하기 어렵지만 또한 마땅히 휼전(恤典)을 보태 주어야 합니다.지달원은 적통이 없고 성해(成海)와 학해(學海) 두 첩의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문장에 능하고 학식을 갖추어 그 부친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 때문에 천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애석합니다. 지달원의 군공은 참으로 뒤미처 포상해야 하므로 만약 그 두 아들을 면천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최배천의 자손에 대해서는 민유중 공이 판관으로 있을 때 조정에 보고하여 면강(免講)8)시켜 주었으며 도사(都事)가 간혹 거론할 때도 있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합하께서 가을 순행할 때 하교하기를 '무릇 의병을 일으킨 자손들은 마땅히 별도로 대우하라.'고 하였다는데, 분명하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첩문을 만들어 지급하게 된다면 마땅히 실질적인 은혜가 될 것입니다. 최배천의 손자 최익(崔瀷)은 유생으로 바야흐로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고 합니다.○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는 경성 사람이다. 전 권관(權管)으로 정공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역적 국경인을 포박하였습니다. 선봉장으로 왜적을 토벌하여 능히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에 돌격하였으며 싸우면 반드시 공을 세웠습니다. 사람됨이 호방하고 강건한 장부로 약속한 말은 무겁게 지키며 의기를 중시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의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손자 가운데 세상의 중망을 받는 자도 있으며 학식을 갖춘 유생도 있습니다. 또한 천한 손자도 있는데, 강민(姜敏)과 강인(姜仁) 두 사람은 관청의 종입니다.○이기수(李麒壽)는 경성 사람으로 이붕수의 형입니다. 정공이 의병을 일으킬 때 좌수(座首)로써 의병을 일으킬 것을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또한 역적 국경인이 왜적을 맞이하여 성과 해자, 창고가 다 타버리자 불에 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문을 봉하고 재물을 모아 의병을 기다렸습니다.○서수(徐遂)는 경성 사람입니다. 전 좌수로써 이기수와 함께 의를 행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천한 손자 서주(徐冑)는 바야흐로 행영의 관노로 있습니다.○충의(忠義) 허진(許珍)과 무사(武士) 김국신(金國信)은 길주(吉州) 사람입니다. 허진은 적개공신(敵愾功臣) 허유례(許惟禮)의 증손으로, 김국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당하여 충심에서 일어난 분노가 격렬하였으니, 몰래 산골짜기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여 정공을 따라 역적을 죽였습니다. 허진은 우척후장이 되고 김국신은 좌척후장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니, 자세한 것은 《길주사적(吉州事蹟)》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전공은 경성의 강문우와 비슷하니, 서원리(徐元履)가 순찰사로 있을 때 이 사람들을 위해 또한 길주에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끝내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을 만약 사당에 배향한다면 경성의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 세 사람도 마땅히 사당에 배향하여야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위의 두 사람을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합당한지요.허진의 손자 허철(許喆)은 지식을 갖춘 유생이며, 김국신의 증손 김형(金衡)은 무예를 닦고 있습니다. 김형의 부친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임금을 위해 병사를 일으켜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하였습니다. 목사(牧使) 최유해(崔有海)가 소장을 올려 의병장의 자손을 거두어 쓰라고 청하니, 임금에 감사에 명하여 남은 자손들을 채록하여 녹용(錄用)하라고 하였는데 해당 관청에서 아직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허진과 김국신 두 사람의 자손이 만약 녹용하게 된다면 이붕수의 자손을 참으로 마땅히 먼저 등용해야 하며, 최배천과 지달원 그리고 강문우의 자손도 또한 마땅히 녹용해야 합니다. 대개 최유해의 소장에 대해 이미 선왕의 윤허를 받았는데 해당 관청에서 지금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은전에 흠결이 되니, 더구나 지금 국가에서 바야흐로 북변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자손을 더욱 특별히 녹용하여 장려함을 보여야 합니다.○김려광(金麗光)은 경성 사람이며, 충의위(忠義衛) 허대성(許大成)은 길주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전투에서 죽었는데 전공을 상고할 만한 기록이 없으니, 다만 전투에서 죽었다고 짐짓 이붕수처럼 배향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다만 전투에서 사망한 자손은 또한 휼전을 더하지 않을 수 없는데 두 사람의 자손에 대해 세금을 감면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원통한 일입니다. 마땅히 본부(本府)와 본주(本州)에 관문(關文)을 보내 세금을 면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대성은 공신의 후손으로 그 자손은 으레 면강을 하였는데, 김려광의 자손은 면강첩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만들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수문장(守門將) 박은징(朴銀澄), 부장(部將) 박연주 삼형제는 경성 사람입니다. 정공을 따라 전공을 세워 선무(宣武) 3등에 참여하여 자손들이 면강되었으며 강문우도 또한 이등에 참여하였는데, 그 밖의 유생은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종공신(原從功臣)9)은 반드시 무인이었으니 공을 기록할 때 상경하여 스스로 호소하였고, 유생은 상경할 수 없어서 누락된 것입니다.○박유일(朴惟一)은 경성 사람입니다. 왕자가 왜놈에게 사로잡혔을 때 구출해 낸 공이 있는데, 왕자가 그 이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왕자가 잡힌 것을 슬퍼하여 구출하였는데, 이름은 물을 필요 없습니다."라 하고서 답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대개 그 사람됨이 효성스러워 온 마을이 칭송하였으며 정공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은 또한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자손에게 면강첩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오윤적(吳允)은 회령(會寧) 사람입니다. 본래 유생으로 국경인이 난리를 일으키자 창의(倡義)를 모의하여 향교에서 유생들을 불러 모았는데 국경인이 향교를 포위하고서 위협하며 수창한 자를 나오게 하자, 오윤적이 자수하면서 나갔습니다. 마침 군인 신세준(申世俊)이 요각(鐃角)을 훔쳐서 객사 문밖에서 부니 역적 무리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낸 것으로 착각하고서 일제히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유생들이 그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고서 나아가 국경인을 공격하였습니다. 유생들이 거짓으로 이르기를 "만약 오윤적을 풀어주면 마땅히 전투를 그만두겠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드디어 국경인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오윤적은 본래 거의를 앞장서서 수창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의 직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손 오준(吳鐏)과 오일(吳鎰)은 지금 향임(鄕任)을 하고 있습니다.○출신(出身) 차응린(車應麟)은 이미 권관이 되었고, 양손(養孫) 차지행(車地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출신 박극근(朴克勤)의 아들 박희열(朴希悅)과 박희발(朴希)은 일찍이 향임을 지냈습니다.○유생 김전(金銓)의 양손 김상인(金尙仁)은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고, 그의 아들 김여익(金汝益)은 유학을 익히고 있습니다.○김경(金鏡)의 손자 김주현(金柱玄)과 김주우(金柱宇)는 장수하여 벼슬을 받았습니다.○유생 차득도(車得道)의 손자 차병(車柄)은 바야흐로 좌수(座首)로 있으며, 그의 아들 차천준(車天遵)은 유생입니다.○출신 황수(黃垂)의 손자 황중경(黃重瓊)은 바야흐로 향임으로 있습니다. 오윤적 이하는 모두 회령 사람입니다.○출신 김사주(金嗣朱)와 도훈도(都訓導) 최경수(崔敬守)는 모두 종성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였으나 공이 없어서 상을 받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후에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모두 당상관에 올랐습니다. 김사주의 첩손 김수(金銖)와 최경수의 아들 득례(崔得禮)는 출신이라고 합니다.○원충서(元忠恕)는 경흥(慶興) 사람입니다. 정 평사를 따라 거의하여 전공이 뛰어나 원종공권을 받았으며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습니다. 증손 원자명(元自明)은 지금 향임으로 있습니다. 원충서의 첩의 아들 시발(時發), 시득(時得), 시길(時吉), 시말(時末)은 그 모친이 내비(內婢)이기에 지금 모친의 신분을 따르고 있습니다.○정윤걸(鄭允傑), 정응성(鄭應聖) 부자는 경성 사람입니다.○여정(余貞)은 본래 온성(穩城)의 관노입니다. 계미년에 신립(申砬) 장군을 따라 전공을 세웠으며, 정 평사를 따르다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다만 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지금은 죽었으며, 손자 송학(松鶴)이 바야흐로 관노로 있습니다. 공로를 세웠는데 전투하다가 죽은 자손을 비록 면천하기는 어렵더라도 세금을 면하고 휼전을 내리는 것도 미치지 않으니 탄식이 일어납니다.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정공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였으나 당시 사실을 채록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사적을 찾아 보내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것이 온다면 마땅히 추가로 기록하여 올리겠습니다.아! 북관을 차지한 이래로 변방을 열어 넓히고 오랑캐를 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당시에 모두 공로를 표창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정공은 낮은 관리로써 큰 공을 세웠음에도 당시 감사와 병사가 시기한 나머지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서 그 공을 가려 결국 난리에 거의한 사람들에게 공로의 표창이 내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하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분개하고 한탄하면서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당초에 조정에서 듣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만 한둘의 거짓 장계에 의거하여 믿게 되었다. 그 후로 20년간을 언덕과 습지를 가리지 않고 향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음이 없었으나 으레 이전의 일이라고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끝내 사실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할 때는 지금부터 50년 전입니다. 그 사이에 다만 민 판관만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또한 자손들을 면강해 주었습니다. 감사(監司) 서원리(徐元履)는 그 선조가 이곳에서 난리를 피하였는데 의병의 도움을 받아 재앙에서 벗어나게 되었기에 당시의 일을 마음에 두고서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옛 것을 좋아하고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찌 드물겠습니까. 아! 이전 일이라고 하여 마음에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세속 사람들이 일처리 하는 방식입니다.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일찍이 이러한 일을 급급하게 드러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선친이 그 일을 기록한 것과 민 판관이 제사를 지낸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선친의 기록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다행이도 합하께서 순행하는 날을 만났으니 다시 이에 힘을 쏟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된다면 사리에 있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자세히 이렇게 썼으니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이러한 뜻을 혜량하여 이들을 널리 드날린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贈司憲府監察李鵬壽, 鏡城人, 自少時有志槩, 氣宇不凡。壬辰鞠賊之亂, 鵬壽首謀擧義, 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 而未得其人。鄭評事與池達源·崔配天兩人, 同至鵬壽家, 鵬壽出見大喜, 傾家奉之, 推爲主將。留一月, 進誅鞠賊, 爲倡義別將, 轉討倭寇, 凡三捷立功, 白塔之戰, 中丸而死,追贈司憲府監察。鄭公牧吉州, 以白塔郊哀李殿中出題試士。鏡城人著《義旅錄》, 詳錄其倡義討倭之功。閔判官維重爲文致祭, 洪判官如河撰墓碣銘, 蓋鄭公非鵬壽, 無以擧義, 鵬壽非鄭公, 無以成功。當時之士, 鵬壽當爲第一。若爲鄭公立廟, 當以此人配享。今有曾孫七十餘人, 其中儒士之俊秀者, 李東白·李東榮·李震英·李發榮, 而東榮則曾經順陵參奉云。判官崔配天·參奉池達源兩人, 鏡城人, 皆好義者也。鄭評事初遇兩人, 同至李鵬壽家, 恊謀擧義, 誅鞠賊討倭寇, 終始宣力最多。配天懷捷書奏行在, 宣祖大王引見賜帛, 給軍器寺判官職帖。時觀察使尹卓然, 嫉鄭公聲績掩己, 加以搆捏二事交上, 故旌賞格不行,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坐此故也。達源後爲璿源殿參奉, 此由朝廷有所親, 知其賢而擧之, 非以戰功也。此兩人及姜文佑, 有幷爲配享之議, 而又有疑難之議, 未知如何如何。但三人之功, 俱在《義旅錄》。閔判官維重, 皆爲文致祭, 其功實出尋常, 而配天以躬往行在, 故僅得影職五品帖, 達源全未蒙賞, 此三人子孫, 雖難錄用, 亦宜加恤。達源則無嫡子, 有妾子兩人成海學海, 皆能文有識, 有乃父風, 而以其母內婢, 故從賤役, 可惜可惜。達源軍功固當追褒, 若免其兩子, 使之奉祀, 則可無遺憾。配天子孫, 閔判官時, 報使免講, 而都事或有擧論之時。伏聞閤下秋巡時, 下敎'凡倡義人子孫, 當爲別樣處置'云, 而未有明白指揮, 若蒙成給其帖文, 則當爲實惠耳。配天之孫瀷, 以儒士方治經云耳。僉使姜文佑, 鏡城人。以前權管, 從鄭公起兵, 縛鞠賊, 以先鋒將討賊, 能冒死赴敵, 而戰必有功。爲人豪健丈夫, 能立然諾, 重義氣, 詳在《義旅錄》。其孫有世望者, 有識儒生耳。又有賤孫敏仁兩人, 爲府奴。李麒壽, 鏡城人, 鵬壽之兄。鄭公倡義時, 以座首, 共謀倡義。且鞠賊迎倭, 城池府庫板蕩之餘, 收其餘燼, 封閉修輯, 以待義兵。徐遂, 鏡城人。以前座首, 與李麒壽同事有功。有賤孫胄, 方爲行營官奴。忠義許珍·武士金國信, 吉州人。珍, 敵愾功臣惟禮之曾孫, 與國信當壬辰之亂, 忠憤激烈, 潛行山谷, 募義兵, 從鄭公誅叛賊。珍爲右斥候將, 國信爲左斥候將, 討倭立功, 詳在《吉州事蹟》。此兩人戰功, 如鏡城之姜文佑。徐巡使元履時, 欲爲此等人, 亦立廟於吉州而未果云。此兩人若廟享, 則鏡城之崔池姜三人, 亦宜廟享, 但未知右兩人廟享合當否也。珍孫喆, 有識儒生。國信曾孫衡, 業武。其父起男, 再度勤王, 終始從軍, 牧使崔有海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 上命監司, 採訪遺孫, 以裨錄用, 而該曹尙不施云。珍國信兩人子孫, 若被錄用, 鵬壽子孫固當先用, 如配天達源文佑子孫, 亦當錄用矣。大槩有海之疏, 旣被先朝允許, 則該曹之至今不施, 實爲欠典, 況今國家方軫北邊事, 此等人子孫, 尤當特爲錄用, 以示奬勸也。金麗光, 鏡城人, 忠義許大成, 吉州人。此兩人戰亡, 而無事功可考文字, 不可只以戰亡, 故廟享如鵬壽也。但戰亡子孫, 亦不可不加恤, 而兩人子孫俱無復戶之事, 此爲冤痛, 宜行關本府本州, 使之復戶也, 如何。大成則以功臣後裔, 其子孫例爲免講云, 而麗光子孫, 則無免講帖, 亦宜成給也, 如何如何。僉正朴銀柱·守門將朴銀澄·部將朴連柱三兄弟, 鏡城人也。從鄭公有戰功, 參宣武三等, 子孫免講, 姜文佑, 亦參二等, 而其他儒生, 則皆未參。原從, 必是武人, 則錄功時, 上京自訴, 儒生則不能上京而漏落也。朴惟一, 鏡城人。王子被執時, 有救解之功, 王子問其名, 則答曰: "吾哀王子救之, 名則不必問也。" 因不答而去。蓋其爲人, 有孝行, 一鄕稱之。從鄭公起兵云, 而無可考事實, 然如此人, 亦不可無褒賞, 若給子孫免講帖, 則如何如何。吳允迪, 會寧人。本以儒生, 鞠景仁之亂, 倡謀聚會儒品於鄕校, 景仁圍鄕校, 脅出首倡, 允迪自首而出。適軍人申世俊, 竊取鐃角, 吹于客舍門外, 叛徒疑景仁出令, 齊會, 儒生輩仍勒率, 斬其不從者, 進攻景仁。儒生誑謂'若給允迪, 當罷戰', 景仁從之, 遂窮討景仁斬之。允迪本首倡, 而無成功, 只授軍器主簿職帖, 其孫鐏鎰, 方爲鄕任。出身車應麟, 已行權管, 養孫地行, 曾經鄕任。出身朴克勤子希悅·希發, 曾經鄕任。儒生金銓養孫尙仁, 老品官, 子汝益業儒。金鏡孫柱玄·柱宇, 老品官。儒生車得道孫柄, 方爲座首, 子天遵儒生。出身黃垂孫重瓊, 方爲鄕任。吳允迪以下, 皆會寧人。出身金嗣朱·都訓導崔敬守, 皆鍾城人。從鄭評事而無功賞。兩人後以討胡功, 皆陞堂上。嗣朱妾孫金銖, 敬守子得禮, 出身云。元忠恕, 慶興人。從鄭評事戰功特異, 受原從功券, 官至萬戶。曾孫自明, 方爲鄕任。忠恕妾子時發·時得·時吉·時末, 以其母內婢, 故方從母役。鄭允傑·鄭應聖父子, 鏡城人。余貞, 本穩城官奴, 癸未, 從申砬有戰功, 從鄭評事死於嶺東之戰。只有一子而今死, 有孫松鶴, 方爲官奴。有功戰亡之子孫, 雖難免賤, 復戶恤典亦不及, 可歎。右人等皆從鄭公討賊, 而時未採得事實, 今方行關各邑, 使之求覓以送, 若來則當追錄以上矣。噫, 自有北關以來, 開拓土境擊胡, 有功之人何限, 而當時皆蒙旌賞, 獨鄭公以卑官立大功, 爲其時監兵使妬忌, 誣啓掩功, 以致從難之士, 旌賞闕然。先人記事曰: "至今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又曰: "當初朝聞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隰咨詢, 而例不以前事爲意, 終未有記其實者"云。先人記事時, 距今五十年矣。其間惟有閔判官爲文致祭, 且使子孫免講。徐監司元履以其先世避亂此地, 賴義兵脫禍, 故留意當時事, 欲爲立廟而未果。世間好古慕義之人, 何其鮮也。噫, 不以前事爲意, 此乃流俗之人事。古之賢人君子, 未嘗不以如此等事, 爲汲汲表章之地, 先人之記事, 閔判官之致祭, 卽出於此意, 而端夏今持先人記事而來此, 幸遇閤下巡宣之日, 而不復着力於此事, 使之永歸於泯沒, 則其於事理, 當如何也。玆以縷縷至此, 伏惟閤下諒此意, 有所褒揚, 不勝幸甚。 영직 실제로 맡아서 하는 일은 없으면서 그 직함만 빌려 가지는 벼슬을 이르던 말이다. 면강 조선시대 교생(校生)이 강경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져 군역에 나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강경을 면제하는 것을 이른다. 원종공신 큰 공을 세운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 칭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