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대군과 백탑교에서 전투를 벌여 왜적을 퇴각시킨 것에 대한 장계 與倭賊大軍戰白塔郊及倭賊退走狀啓 단천(端川)의 왜적을 토벌하고 사로잡기 위하여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해 보내니,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등이 밤새도록 내달려갔습니다. 정월 27일 길주(吉州)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도의 왜적 천여 명이 이미 마천령(磨天嶺)을 넘었습니다.'라고 하니, 신이 즉시 삼위(三衛)의 병사를 거느리고 길주의 임명(臨溟) 지역에 주둔하여 정예기병 6백 명을 뽑아 매복하고서 대기하였습니다. 그 왜적이 영동(嶺東)에 머물던 왜적과 합세하여 28일 이른 아침부터 임명 들판을 가득 채워 길주를 향해 들어오므로, 복병장 훈련정 구황, 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 판관(判官) 인원침(印元忱), 고경민(高敬民), 정로위(定虜衛) 김국신(金國信) 등이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뒤를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에 삼위는 앞을 차단하고 허리를 자르며 전진하고 후퇴하면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접전을 벌이면서 6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훈련 판관(訓鍊判官) 원충서(元忠恕)는 길주성 밖 20리 정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또한 돌격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피차간에 화살과 철환을 쏘아대는 바람에 짧은 무기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다만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넓은 지역에서는 양쪽에서 공격하고 좁은 지역에서는 꼬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학유(學諭) 이성길(李成)에게 전령을 보내 적의 진영까지 추격하여 싸움을 독려하게 하니, 왜적과 10여 보의 거리에서 종일토록 내달리고 쏘아 흐르는 피가 길을 가득 덮었으며 화살에 맞고 죽은 자는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왜적들이 시체를 싣고 가버렸으므로 낱낱이 귀를 베지 못하였습니다.대개 본도의 군민들이 왜적들의 위세에 겁을 내고 있다가 갑자기 대적을 만나니 대부분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대들어 결전을 벌이지 못하였다가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오게 하니 대단히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단천 군수(端川郡守)의 편지에 '왜적 이천여 명이 또 이성(利城)에 이르렀습니다.'라 하니, 먼저 온 적들과 영동, 길주의 왜적과 합세하면 이만여 명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또한 이성의 이천 명이 이어서 온다면 왜적의 계략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깊이 아군 지역에 쳐들어와 독을 퍼트릴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삼위군이 서로 모여 약속하였으니, 중위와 좌위는 명천(明川)에 웅거하고 우위는 서북보(西北堡)를 지키며, 길주 목사는 좌위(左衛)에서 정예가 아닌 병사를 골라서 다신창(多信倉)의 곡식을 바다의 섬으로 옮기고, 신은 휘하 백여 명을 거느려 경성으로 들어가 민심을 진정시켜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중위와 우위에서 거느리는 군사들은 각각 위장을 따라 진영에 왔는데, 좌위군은 모두 길주의 군사들로서 목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고 핑계를 대고서 바다의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좌위장은 겨우 척후병 및 좌부 모두 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으로 향해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러 해 전투에 참여하여 이미 관군이 되었지만 한번 대적을 만나면 성 지키는 것을 회피하고 난을 피해 살아보려고 꾀를 내는데, 민심이 이와 같으니 대단히 한심스럽습니다.왜적들이 혈전을 벌이다가 성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어 관청에 쌓아놓고 그 시체를 불태웠으며, 다음날은 성안의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서 밤을 틈타 몰래 달아나버렸습니다. 이에 우위장(右衛將) 우후(虞候) 한인제(韓仁濟)가 병사를 거느리고 내달려가서 곧바로 성안에 들어가 불을 끄니, 성안에 남았던 곡식은 태반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삼위장이 한꺼번에 추격하여 영동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은 밥을 지어 먹을 시간도 없이 주야로 다급하게 달아나 남쪽을 향하여 돌아갔으므로 쫓아갔으나 공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응당 다급하게 추격하여 밤낮이나 원근을 가리지 말고 적이 간 곳까지 뒤를 밟아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다만 정예병들이 단천(端川)을 오가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리는 통에 말에게 꼴도 먹이지 못하고 종일 고단하게 전투를 벌여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걸음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추격은 하루에 백오십리를 가야 하는데 마천대령을 넘을 수 없을뿐더러 단천 이남은 왜적이 이전부터 마음대로 횡행하여 민가와 곡식과 마초들이 모두 타 버리고 텅 비어서 병사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말은 먹을 풀이 없는데, 미리 준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넘어갔다가는 중대한 행군 중에 졸지에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나 굶주림만 겪게 될 것입니다.단천 군수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꼴과 군량의 준비 여부를 물어보려 하오며, 한편으로는 북절(北卩)의 상선으로 군량과 꼴을 운반하고 정예병을 뽑아 남쪽으로 향하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왜적이 남쪽으로 급히 달아나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북도 군마의 양식과 꼴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되면 형세가 끝까지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신이 북도에 있을 때는 북병사(北兵使)가 그 당시 아직 그 지방에 오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주장(主將)의 일을 맡았지만 요즘은 북병사가 남도에 있거늘 막하관이 마음대로 도내의 군마를 거느리는 것은 사체가 대단히 어그러진 것이므로 거느린 군마를 병사에게 이관할 생각입니다.28일에 전사한 자로,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은 온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성에 거처하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는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하고 적진에 드나들면서 그 허실을 정탐하였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여 앞장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밖에 사졸로 죽은 자는 25명이 됩니다. 왜적은 9명의 목을 베었으니 감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말 15필을 빼앗았습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싣고 성에 들어가 버린 것과 관청에서 불태운 시체는 무려 백여 명이 되나, 귀를 베어 올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2일. 端川倭賊勦捕次, 以分四隊, 定將起送爲白有如乎, 訓鍊正具滉等達夜奔馳, 正月二十七日, 還到吉州言內, '南道倭賊千餘名, 已越磨天嶺'是如爲白去乙, 臣卽領三衛兵, 屯駐吉州臨溟地, 抄發精騎六百, 伏兵待候乎白有如乎。同倭賊嶺東留倭合勢, 二十八日早朝, 始叱瀰滿臨溟野中, 入向吉州爲白去乙, 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 各率所部, 尾擊接戰, 三衛段, 遮前截腰, 進退接戰, 自辰初至酉時, 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 吉州城外二十里許, 伏兵爲白有如可, 亦爲突出接戰, 射矢鐵丸, 彼我俱發爲白乎等以, 未得短兵相接, 只以輕騎馳逐, 地廣則挾擊, 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 迫至賊陣, 使之督戰, 與賊相距十數步, 終日馳射, 流血滿道, 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 倭賊載屍而去乙仍于, 未得一一斬馘爲白齊。大槩本道軍民, 爲倭賊積威所劫, 猝遇大賊, 多懷自沮, 不敢交雜快戰乙仍于, 使賊入城, 極爲痛憤爲白乎旀。同日端川郡守簡通內, '倭賊二千餘名, 又到利城'是如爲有去等, 先來之賊, 與嶺東吉州相合, 少不下二萬餘名, 又有利城二千繼至爲白在如中, 賊謀難測, 不無深入肆毒之患弦如, 三衛相會約束, 中衛左衛段, 據明川, 右衛段, 守西北堡, 吉州牧使段, 除出左衛不精軍, 移轉多信倉穀于海島, 臣段, 率麾下百餘名, 入向鏡城, 欲爲鎭定城守之計爲白如乎。中衛右衛所率軍段, 各隨衛將來到陣所, 左衛軍段, 皆是吉州軍是白乎等以, 托稱與牧使起義兵盡入海島乙仍于, 左衛將, 亦僅率斥候及左部幷百餘名, 入向明川爲白臥乎在亦, 經年赴戰, 已爲官軍爲白有如可, 一遇大賊, 謀避城守便生避亂之計, 民心如此, 極爲寒心爲白齊。倭賊等血戰入城, 收取死者, 積置官廳, 燒其屍身, 翌日, 盡燒城內公私廨, 乘夜潛遁爲白去乙, 右衛將虞候韓仁濟, 領軍馳到, 卽入城內, 滅火爲白乎矣。城中留穀, 太半全在爲白齊。三衛將一時追擊, 到嶺東爲白乎矣, 倭賊等晝夜奔忙, 不暇炊食, 南向出歸爲白乎等以, 追不及擊爲白齊。賊退之後, 所當急急追擊, 勿論晝夜遠近, 尾到賊到處爲白良音可爲白乎矣, 惟只精兵等往來端川, 倍日幷行之際, 不得秣馬, 盡日苦戰, 人極馬疲, 不能運步。又此追擊, 日行百五十里爲白有去等, 磨天大嶺, 末由踰越叱分不喩, 端川以南段, 倭賊自前恣意橫行, 閭家穀草, 焚蕩一空, 軍無依接之處, 馬無喂飼之草, 不爲預備, 輕自越去爲白有如可, 軍行大事, 猝未進退, 坐見饑乏弦如。端川郡守處移文, 蒭粮準備與否。探聽爲白乎旀, 一邊以北卩尙船輸運粮草, 選精兵南向計料爲白在果, 惟只倭賊急於南走, 至於鐵嶺爲白在如中, 北道軍馬糧草辦出無路事良中, 勢難窮追, 未知何如爲白乎旀。臣在北道時段, 北兵使時未到界乙仍于, 權行主將之事爲白如乎節, 北兵使在南道爲白有去等, 幕下之官, 擅率道內軍馬, 事體甚乖爲白乎等以, 所率軍馬乙, 移屬兵使計料爲白齊。二十八日戰亡人段, 朱乙溫萬戶李希唐, 極力死鬪, 日暮時, 中鐵丸身死, 鏡城居前訓導李鵬壽, 自初倡義時, 盡誠奔走, 出入賊中, 窺覘虛實, 忘身徇國爲白有如可節, 奮願先登, 中鐵丸身死, 其餘士卒死者, 二十五名是白遣, 倭賊段, 斬馘九級, 監封上送爲白乎旀, 奪馬十五匹爲白有齊。中箭載屍入城, 官廳燒屍段, 無慮百餘名是白良置, 割耳上送不得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二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