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문1) 農圃集敍 농포 정공(鄭公)의 유집(遺集)은 부록을 합하여 약간 편이 된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천신(薦紳) 학사(學士)들이 공의 충정과 공훈을 기리고 공의 억울함을 슬퍼한 지 백 수십 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일찍이 조정에 알려져 단서(丹書)를 씻어주고 관작과 시호를 추증하여2) 이미 융숭하게 보답하였다. 또 화란을 거친 뒤에 공의 유문이 수습되어, 시문의 아름다움이 문단에서 크게 중시되었다.공의 후손 상점(相點)3)이 서문이 빠졌다는 이유로 일찍이 나에게 서문을 써 주길 청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예전에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공적을 세웠으나 억울함을 품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대의 조부 문정공(文貞公)이 일찍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계실 때 그 당시 의사(義士)들의 묘소에 경건하게 제사를 올렸고4), 그대의 종조부 문충공(文忠公)께서 함경도 관찰사로 계실 때 병마평사(兵馬評事) 외재(畏齋) 이공(李公)과 우리 선조의 유사(遺事)를 수집하여5) 선양하는 방도에 관계된 모든 것에 여한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대의 선친 충문공(忠文公)께서 이미 선조의 시장(諡狀)을 지은 데다가 또 《창렬사지(彰烈祠志)》의 서문을 지어6) 선조를 드러낸 것이 모두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서문도 그대의 책무입니다." 내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대개 듣건대, 공은 걸출하고 탁월한 자질로 민첩하고 풍부한 문장력이 있어서, 선조조(宣祖朝)의 태평성세에 높은 등수로 급제하였다.7) 외직으로 나아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가 되었는데,8)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여 잔학한 적들이 잠식해 들어왔다. 이윽고 또 적이 북로(北路)에 난입하자 모반한 백성들이 내응(內應)하여, 왕자와 대신들이 북쪽에서 병란을 피하고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고, 병사(兵使)와 북변(北邊)의 수령들도 모두 적에게 붙잡혔다.9) 육진(六鎭)의 오랑캐들이 또 이때를 틈타 소요를 일으켜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다.공은 일개 미약한 서생으로서 의병을 규합해 이끌어서 모반한 백성들을 제거하였고, 이어 누차 왜적을 격파하고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여, 관북 지역 일대가 함락되지 않게 하였으니, 중흥의 공적을 낱낱이 헤아려 볼 때 공에게 비견될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공의 공적을 시기하고 능력을 음해하는 무리들이 엄폐하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아 조정에서 포상을 시행하지 않았다. 공은 또 초연하게 공을 내세우지 않고 지방 수령을 전전하다가, 그 후에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 때를 만나 그저 술에 흠뻑 빠져 스스로 폐기하였다.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反正) 때에 공이 문무의 재질을 겸비한 데다가 절개를 지켜 더럽히지 않았다 하여, 크게 기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외직으로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무고한 화를 당하여 결국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10), 이것이 공의 충성과 원통함의 실제 행적이다. 아!장주(莊周)가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천명이기에 마음속에서 버릴 수 없으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리이니, 천지 사이에 도망갈 곳이 없다."11)라고 하였으니, 마치 임금과 신하가 서로 관계 맺는 것을 부득이한 사세(事勢)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 듯하다. 회암 선생(晦菴先生)이 《충가집(忠嘉集)》 발문에서 장주의 이 말을 특별히 거론하여 자신만을 위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사설(邪說)이라고 배척하였다.12)지금 이로써 공의 유사(遺事)를 살펴보면,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방의 낮은 관원이 되어 한 무리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백만의 흉포한 왜적과 싸웠으니, 그 형세상 또한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숱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한 번 살아남은 상황에서 끝내 왜적들을 소탕하여 관북 지역을 말끔히 숙청하였는데, 모함하는 자들이 나와서 그 뒤에서 비난하여 공로에 대한 포상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 지역 사람들이 공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하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의 뜻13)은 애초에 작록이나 포상에 뜻을 두지 않았고 오직 신하의 직분을 스스로 다하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군신의 의리가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잡은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이와 같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공의 기백(氣魄)에 감동하여 의사(義士)들이 모두 모인 것은 실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성에서 말미암았으니, 선생의 논의가 바꿀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겠다. 대저 공이 이처럼 대의(大義)에 밝은데도 끝내 화를 당한 것은 어찌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일찍이 공의 시대를 논하고 공의 사람 됨됨이를 상상해 보건대, 공이 여러 유생 사이에서 뽑혀 낮은 관원이 되었으나 다만 충의(忠義)로 서로 격려하여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잘 물리친 것은 당나라의 장 수양(張睢陽)14)과 비슷하고, 위태로운 시대에 서생으로서 병권(兵權)을 맡아 혼란한 상황에서 공적을 세운 것은 송나라의 이백기(李伯紀)15)에게 부끄럽지 않고, 뜻밖에 억울한 일에 걸려 옥사가 성립되었으나 죄명이 없는데도 '아마 있을 것이다[莫須有]'라는 말로 뒤집어쓴 것은 악무목(岳武穆)의 상황과 비슷하니16), 이를 통해 공의 일생을 개괄할 수 있다. 공의 충성과 원통함은 장차 옛사람과 마찬가지로 귀결될 것이니, 그렇다면 이 문집의 유행이 또한 어찌 이백기의 주의(奏議)17), 장 수양과 악무목의 시편18)과 함께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겠는가.숭정(崇禎) 기원후 123년 경오년(1750, 영조26) 중춘에 여흥(驪興) 민우수(閔遇洙)가 서문을 쓰다. 農圃鄭公遺集, 合附錄爲若干編。蓋自公之歿, 薦紳學士, 誦其忠勛, 悲其冤枉, 百數十年矣。間嘗聞于朝, 洗滌丹書, 贈以爵諡, 崇報旣備。又其遺文收拾於禍患之餘, 詞藻之美, 大爲藝苑所重。公之後孫相點, 以序文之闕, 嘗以書請於余曰: "吾先祖舊有忠勞於國, 抱冤以歿。子之王考文貞公, 曾爲鏡城通判, 虔祀其時義士之墓, 子之從祖文忠公, 按節北路, 與評事畏齋李公, 蒐輯吾先祖遺事, 凡係表闡之方, 靡有餘憾。子之先君子忠文公, 旣製先祖諡狀, 又爲《彰烈祠志》弁卷之文, 發揮備至, 今此序文亦子之責也。" 遇洙於是不敢辭。蓋聞公以英偉卓犖之資, 有敏妙華贍之文, 當穆廟盛際, 擢高科。出爲咸鏡北道評事, 未幾島夷來寇, 蛇豕荐食。尋又闖入北路, 叛民內應, 王子大臣避兵在北, 俱被執, 帥臣邊倅, 亦皆陷賊。六鎭諸胡, 又乘時動擾, 摩天以北, 蕩爲賊藪。公以眇然一介書生, 糾率義旅, 旣翦叛民, 繼而屢破倭賊, 逆拒胡寇, 使關北一路, 得免淪陷, 歷數中興功績, 殆無其比, 而一時忌功害能之輩, 掩蔽而不以實聞, 朝家甄賞不行。公又超然不有其功, 浮沈州縣間, 而後値昏朝, 縱酒自廢。及癸亥反正, 以公有文武全才, 且守節不汚, 將加大用。,顧公急於便養, 低回外郡, 旋罹旡妄之禍, 竟死獄中, 此其爲忠冤之實蹟也。嗚呼! 莊周有言: "子之於親, 命也, 不可解於心; 臣之於君, 義也, 無所逃於天地之間。" 若以君臣之相屬爲出於事勢之不得已。晦菴先生跋《忠嘉集》, 特擧其言, 斥其爲爲我無君之邪說。今以是而觀於公之遺事, 則出身未久, 爲關塞小官, 提一隊烏合之衆, 戰百萬鴟張之賊, 其勢亦極難耳。出萬死得一生, 卒能蕩攘羣兇, 汛淸關北, 而媒孼者從而議其後, 賞不酬勞, 一方之人, 無不爲之扼腕憤歎。而迺公萬折必東之志, 初不以爵賞爲意, 唯欲自盡於臣職, 苟非君臣之義, 纏綿固結於人心, 必不能若是。況其聲氣所感, 義士咸聚, 實由於秉彝之所同得, 則益信先生之論之爲不可易。夫以公之明於大義如此, 而卒罣禍網者, 豈非天下之至冤哉? 蓋嘗論公之世, 想公之爲人, 則其起諸生爲小官, 徒以忠義相激厲, 善以少擊衆, 似唐之張睢陽, 當危難之際, 以書生掌戎權, 收功於板蕩之餘, 無愧宋之李伯紀, 橫罹幽枉, 獄成而無罪名, 蔽之以莫須有, 又髣髴於岳武穆, 斯可以槩公之終始。而其爲忠爲冤, 將與古人同歸, 然則斯集之行, 亦豈不與伯紀奏議、張·岳詩篇, 同其久遠也歟?崇禎紀元後百二十三年庚午仲春, 驪興閔遇洙敍。 농포집(農圃集) 서문 민우수(閔遇洙)의 《정암집(貞菴集)》 권9에도 수록되어 있다. 단서(丹書)를……추증하여 조정에서 정문부(鄭文孚)를 신원(伸冤)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단서'는 죄인의 범죄사실을 붉은 글씨로 기록한 문서를 가리킨다. 정문부는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는데, 1666년(현종7)에 신원 되어 우찬성에 추증되었고, 1713년(숙종39)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顯宗實錄 7年 5月 23日》 《肅宗實錄 39年 3月 15日》 그런데 《숙종실록》 39년 3월 15일 기사 및 《농포집》의 〈시장(諡狀)〉ㆍ〈증직교지(贈職敎旨)〉 등에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언급한 내용을 볼 때, 우찬성에 추증되었다는 《현종실록》의 기사는 오류인 듯하다. 상점(相點) 정상점(鄭相點, 1693~1767)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여(仲與),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다. 정문부의 증손이다. 문정공(文貞公)이……올렸고 문정공은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시호로, 민유중은 본관이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저서에 《민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가 있다. 민유중은 1657년(효종8)에 경성 판관에 제수되었다. 문충공(文忠公)께서……수집하여 문충공은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시호이고, 외재(畏齋) 이공(李公)은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이다. 1664년(현종5)에 민정중은 함경도 관찰사로, 이단하는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부임한 바 있다. 이단하는 정문부의 행적을 모으고 선양하기 위해 민정중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농포집》 권4 〈북평사이공단하상순찰사민공정중서(北評事李公端夏上巡察使閔公鼎重書)〉, 〈순찰사민공답서(巡察使閔公答書)〉, 〈이평사재상순찰사민공서(李評事再上巡察使閔公書)〉 등 참조. 충문공(忠文公)께서……지어 충문공은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시호이다. 민진후가 지은 정문부의 〈시장(諡狀)〉은 《농포집》 권2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는 정문부를 배향한 사당으로, 《창렬사지》는 이단하가 1666년(현종7)에 편찬했으며, 1718년(숙종44)에 민진후가 서문을 썼다. 선조조(宣祖朝)의……급제하였다 1588년(선조21)에 식년문과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였고 한성부 참군(參軍)이 되었다. 외직으로……되었는데 정문부는 1591년(선조24) 7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었다. 적이……붙잡혔다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회령부(會寧府)의 국경인(鞠景仁)이 부민(府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잡아 가등청정에게 넘기고 항복했다. 또 당시 순변사 이영(李瑛)과 부사 문몽원(文夢轅)도 왜적에게 붙잡혔다. 《宣祖修正實錄 25年 7月 1日》 무고한……돌아가셨으니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인조가 정문부를 부총관(副摠管)에 기용하려 했는데 정문부는 종기가 심해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내장(朴來章)이 정문부가 일부러 이괄을 피한 것이라고 모함하여 예전에 지은 시를 빌미로 정문부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農圃集 卷5 附錄 諡狀》 자식이……없다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이다. 회암 선생(晦菴先生)이……배척하였다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이다. 주희는 동해(東海) 송군(宋君)의 《충가집》에 써준 발문 첫머리에서 장자의 말을 인용한 뒤, "장주의 이 말을 예로부터 명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부자간의 인과 군신간의 의리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이요 백성들이 본디 소유한 것이다. 그런데 장주는 부자간만 천부적인 것으로 여기고 군신간의 관계는 특별히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니, 어찌 그렇겠는가?……군신간의 의리는 내가 논한 것이 틀림이 없으니, 장생의 말이 자신만을 위하고 임금을 무시하며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사설이 되는 것[莊生爲我無君禽獸食人之邪説]은 또한 변론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82 跋宋君忠嘉集》 만절필동(萬折必東)의 뜻 물이 만번 꺾이며 흘러도 결국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간다는 의미로, 선조가 〈피무변명주(被誣辨明奏)〉에서 명나라 황제에 대한 존모(尊慕)의 뜻을 표현할 때 한 말이다. 여기서는 정문주가 오로지 국가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당나라의 장 수양(張睢陽) 장 수양은 장순(張巡, 709~757)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며 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당하자 장렬하게 순절했다. 《舊唐書 張巡列傳》 송나라의 이백기(李伯紀) 이백기는 송나라 이강(李綱, 1083~1140)의 자로, 호가 양계(梁溪), 시호가 충정(忠定)이다. 이강은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며, 문인으로서 금나라와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宋史 李綱列傳》 뜻밖에……비슷하니 악 무목(岳武穆)은 송나라 장군 악비(岳飛, 1103~1142)의 시호이다. 악비는 금나라와 싸워 중원(中原)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간신 진회(秦檜) 등 주화파(主和派)에 의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해 죽었다. 진회가 악비를 무함하면서 "악비의 아들 악운(岳雲)이 악비의 장수 장헌(張憲)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사실은 분명치 않지만 일의 정황으로 보면 아마 있을 것이다.[雖不明, 其事體莫須有.]"라고 하였다. 《宋史 岳飛列傳》 이백기의 주의(奏議) 송나라 이강이 〈십의상소(十議上疏)〉를 올려 금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에 반대하였였다. 《宋史 李綱列傳》 장 수양과 악무목의 시 장순의 시는 몇 편이 산견되는데, 5언율시 〈문적(聞笛)〉이 그의 대표작이다. 악비의 시는 《악무목유문(岳武穆遺文)》에 6편의 시가 전한다. 장순과 악비의 시는 대부분 무인의 기개와 우국충정을 담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간 서문(1) 農圃集重刊敍 농포 정 선생은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왕자의 수레를 돌리고 역적의 수급을 바쳤으며, 왜적을 무찌르고 변방 오랑캐를 위협하여, 관북 일대가 안정되었다. 일이 이미 평정된 뒤에는 한미한 관직에 떠돌고 외직에서 분주히 일하며 20여 년을 보냈다. 인조(仁祖) 갑자년(1624)에 대간의 논핵을 받아 옥에서 운명하셨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에 공을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19) 특별히 사당에 편액을 내렸으며 공의 자손을 녹용하라고 명했고, 숙종(肅宗) 계미년(1703)에 시호를 하사했다. 아! 여기에 이른 뒤에야 공의 훌륭한 공적이 드러나고 지극한 원통함이 풀려서, 소인배의 입을 다물게 하고 지사(志士)의 담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되었도다.공의 유집은 예전에 2책이 있었는데, 공의 후손들이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의 일고(逸稿) 약간 편을 수습하고 연보를 덧붙여 4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 공이 대장기를 잡고서 적들을 소탕한 광경을 미처 보지는 못했으나, 야사(野史)에서 상고하고 사람들에게 들어, 공의 일생의 훈공을 삼가 개괄한다.대개 이 충무공(李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곽 충익공(郭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비견될 만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의 한때 공로는 공에게 견줄 수 없으니, 충훈부(忠勳府)에 기재된 사람이라도 의당 혹여라도 공을 앞서지 못한다. 그런데 법률 담당 관원의 탄핵문서가 대뜸 나와서 뒤에서 비난하였도다. 어찌하여 하늘이 한 시대의 준걸을 내어 한 시대의 사업을 정돈하되, 그를 좌절시키고 곤란에 빠뜨려 이렇게까지 아껴주지 않는가. 아마도 충무공이 등자룡(鄧子龍)의 전함에서 불 속에 뛰어든 것20)과 충익공이 비슬산(琵瑟山)에서 벽곡(辟穀)한 것21)은 모두 공이 한 수 접어주더라도 공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로다. 천도(天道)가 아득히 멀어서 옛날에 이른바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준다'는 것22)은 시대마다 기약하기 쉽지 않으나, 공적이 있는데 드러나지 않고 억울함이 있는데 신원되지 않는 경우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선 이런 내용으로 적어 후대사람들을 면려하노라.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경인년(1890, 고종27) 중춘에 일선(一善) 김익용(金益容)이 서문을 쓰다. 農圃鄭先生, 以穆陵壬辰咸鏡北道兵馬評事, 倡義旅, 王子旋軌, 逆胥授馘, 蹂倭慴胡, 一路帖然。旣事平, 而浮沈散班, 捿遑外符, 二十餘年。長陵甲子, 被臺評, 隕身圜扉中。崇陵甲辰, 贈貳相, 特宣祠額, 命錄用子孫, 明陵癸未, 賜諡 嗚呼! 至此而後, 茂烈章至冤白, 有足以關宵人之喙, 張志士之膽歟! 公遺集舊有二冊, 公諸孫綴拾公逸稿散在京鄕者若干編, 附年譜爲四冊, 徵序於不侫。不侫生晩, 未及見公握蝥弧掃除攙搶, 而稽之外乘聽之輿人, 竊槪公始卒勳庸。蓋李忠武·郭忠翼之伊呂伯仲, 而餘人一時之勞, 未足倫擬, 則盟府丹書, 宜莫之或先, 而文吏白簡, 遽從而議後歟! 何天之生一代魁碩, 整頓一代事業, 而挫折之顚擠之, 不相惜至此歟? 豈忠武之蹈火鄧船、忠翼之辟穀瑟山, 皆所以贏公一着而爲不可以幾及者歟! 天道遼遠古, 所謂報施善人者, 未易以世代相期, 而有積無發, 有絀無伸, 卽不佞所未聞也。姑識此以勖後人。崇禎紀元後五庚寅仲春, 一善金益容敍。 이상(貳相)에 추증하였고 이상은 좌찬성과 우찬성을 일컫는 말이다. 《현종실록》 7년 5월 23일에 기사에서는 정문부를 우찬성에 추증했다고 했으나, 《숙종실록》 39년 3월 15일 기사 및 《농포집》의 〈시장(諡狀)〉·〈증직교지(贈職敎旨)〉 등에서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고 하였다. 충무공이……것 등자룡(鄧子龍)은 명나라 장수로 1598년에 조선으로 출병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등자료과 함께 적을 포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宣祖實錄 31年 12月 21日, 32年 2月 2日》 충익공이……것 곽재우는 1602년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여, 솔잎을 먹으면서 벽곡(辟穀)하였다. 《葛庵先生文集 卷29 嘉善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公諡狀》 옛날에……것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안연(顔淵) 같은 선인은 비참하게 살다 죽고,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천하를 횡행하며 오래 살다 죽었음을 대비하면서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해 준 것이 어떻다고 하겠는가.[天之報施善人, 其如何哉?]"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 卷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오언고시) 詩(五言古詩)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오봉 호민3)의 사한정4) 시에 차운하다 3수 次李五峰好閔四寒亭韻 三首 천지 사이에 물아가형체는 다르나 절개는 같아라소나무는 추위에 서리를 견딜 수 있고대나무는 추위에 달빛을 띠는 법이지겨울 매화와 한미한 선비는모두 정신이 빙설처럼 정결하네이토록 추운 지경에 이르렀는가5)서로 마주하며 백발에 이르렀네상산사호 같은 은자가 되려 하니그 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지정자는 어느 때가 좋은가엄동설한이 좋다네소나무 대나무는 본래 사시사철 푸르고매화 또한 섣달에 핀다오정자 주인은 또 옥과 같으니눈서리 속에서 함께 늙어가네푸른 잎 노쇠한 얼굴에 비치고흰빛은 백발을 재촉하누나옛사람 중 그 누가 흡사할까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6)섣달 겨울 천지의 기운 막힐 제차군의 절개 사랑스러워라또한 얌전한 여인의 혼령 있어저물녘 달 아래에서 기약하누나7)십팔공8)은 이 중 가장 굳세어우뚝하게 눈 서리에 서 있도다타고난 성품이 서로 부합하니털끝만큼의 틈도 용납못하네묻노니, 누가 정자 주인인가한미한 선비 김창일이라오 物我天地間殊形而一節松寒解凌霜竹寒宜帶月寒梅與寒士精神兩氷雪一寒如此哉相對至白髮擬作四皓隱不可無其一亭到何時好好是嚴冬節松竹自四時梅花亦臘月主人又如玉相與老霜雪蒼者映蒼顔白者催白髮古人誰得似歐陽號六一窮冬天地閉可愛此君節亦有靜女魂期在黃昏月十八公最勁亭亭立霜雪所性有相符間不容毫髮借問誰爲主寒士金昌一 오봉 이호민 1553~16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이다. 임진왜란 때 왕명으로 각종 글을 도맡아 작성하는 등 문장에 뛰어났고, 저서로 《오봉집》이 있다. 사한정 시 이호민(李好閔)의 〈사한정 시에 차운하다[次四寒亭韻]〉 시로, 《오봉집》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사한정은 김창일(金昌一, 1548∼1631)의 정자로, 김창일이 송한(松寒)·죽한(竹寒)·매한(梅寒)과 자신의 한미함[己寒]을 함께 묶어 '사한(四寒)'이라 하였다. 이토록……이르렀는가 《사기》 〈범저열전(范雎列傳)〉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추위를 견디는 소나무·대나무·매화처럼 자신 역시 몹시 한미한 처지에 있음을 형용한 것이다.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수가(須賈)가 진(晉)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범수(范睢)를 만나 보고는 "범숙이 이토록 한미한 지경에 이르렀는가?[范叔一寒如此哉?]"라고 하고, 명주 솜옷 한 벌[一綈袍]을 주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范雎列傳》 구양수가 육일이라 자호했지 김창일이 '사한'이라 자호(自號)하고 대나무·소나무·매화 사이에서 늙어간 것이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책·금서군·거문고·바둑판·술 사이에서 늙어가며 '육일'이라 자호한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구양수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자호를 '육일거사'라 하였는데, 구양수의 〈육일거사전(六一居士傳)〉에 "우리 집에 책 1만 권이 있고, 삼대 이래의 금석유문 1천 권을 모았고, 거문고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고 항상 술 한 병이 놓여 있다.……나 한 늙은이가 이 다섯 가지 물건 사이에 늙어가니, 어찌 여섯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吾家藏書一萬卷, 集錄三代以來金石遺文一千卷, 有琴一張, 有棋一局, 而常置酒一壺……以吾一翁, 老於此五物之間, 是豈不爲六一乎?]"라고 하였다. 얌전한……기약하누나 매화의 정령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수나라 조사웅(趙師雄)이 추운 겨울 저물녘에 나부산(羅浮山)의 솔숲 사이의 술집에 들렀다가, 소복(素服) 차림에 옅게 단장한 여인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조사웅이 고운 향기와 청아한 말에 매료되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五百家注柳先生集 龍城錄 卷上 趙師雄醉憩梅花下》 십팔공 소나무를 의미한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생겨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풀이하기를 "송(松)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는 공(公)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皓傳 裴松之 注》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쥐가 술동이에 들어온 것을 탄식하다 鼠入酒甕歎 큰 쥐야 큰 쥐야나의 곡식 먹지 말라곡식을 먹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술동이 속 좋은 술은 –원문 1자 결락- 어이할꼬술동이는 네가 넘을 것이 아니요술은 네가 욕심낼 것이 아니로다네 몸은 작은 것 중에 작으나술동이 하나에 누를 끼치기 족하네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손님 저버리게 하여흰 망아지 골짝에 들이지 않네16)널 죽이더라도 남은 재앙 있을 것이요네 살을 찢더라도 진실로 속죄하기 어려우리너는 마치 등잔에 달려드는 부나방 같으니17)나는 파리가 옥 더럽힘18)을 안타까워하노라그 누가 이 허물을 책임질꼬술동이 담당한 아이종을 꾸짖노라아이종이 쥐에게 어금니 있다 하니담장 뚫린 일 송사에 비기네19)진실로 고양이 기르지 않았다면털 있는 짐승끼리 또한 서로 욕보였으리 碩鼠復碩鼠無食我苗粟食苗粟尙可奈【缺】樽中綠樽非爾可越酒非爾可欲有體微乎微累及一罇足令人負佳客白駒不入谷殺身有餘殃磔肉固難贖渠如蛾赴燈我惜蠅汚玉伊誰執此咎典守責僮僕僮言鼠有牙穿墉比訟獄苟爲不蓄猫毛蟲亦相辱 흰 망아지……않네 손님을 머물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한 저 흰 망아지가, 마당에 난 싹을 먹었다고 핑계 대고, 발을 묶고 고삐를 매어 오늘 아침을 길게 늘여서, 귀한 이 손님을, 더 놀다 가시게 하리라.……깨끗한 흰 망아지가 저 빈 골짜기에 있도다.[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皎皎白駒, 在彼空谷.]"라고 하였다. 등잔에……같으니 등잔불에 마구 덤벼드는 나방은 세속의 명리를 좇아 허덕이는 무리들을 비유한다. 파리가 옥 더럽힘 소인배가 군자를 무함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백벽청승(白璧青蠅)'이라 하여, 보통 백옥은 어진 사람을, 쉬파리는 참소하는 소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앵앵거리는 쉬파리가 울타리에 앉았도다. 화락한 군자는 참소의 말을 믿지 말지어다.[營營靑蠅, 止于樊. 豈弟君子, 無信讒言.]"라고 하였다. 쥐에게……비기네 《시경》 〈소남(召南) 행로(行露)〉의 구절을 인용하여, 쥐에게 어금니가 있기 때문에 담장이 뚫린 것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소연하는 아이종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시경》 〈소남 행로〉에 "누가 '쥐가 어금니가 없으리오. 없다면 어떻게 내 담을 뚫었겠는가.'하며, 누가 '네가 실가의 예가 없으리오. 없다면 어찌 나를 송사에 불러들였겠는가.' 하건만, 비록 나를 송사에 불러들였으나 또한 나는 너를 따르지 않으리라.[誰謂鼠無牙, 何以穿我墉? 誰謂女無家, 何以速我訟? 雖速我訟, 亦不女從.]"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칠언고시 七言古詩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순영 첩보 계사 2월 19일에 부침 巡營牒報【附癸巳二月十九日】 병마평사(兵馬評事)가 상고할 일입니다. 이달 17일에 도착한 단천(端川)의 왜적을 목 벤 장계의 사연을 첩보한 서목(書目)을 돌려 보내온 내용에 '평사가 11월 19일 패전한 뒤로 북으로 순행하려면 즉 병사(兵使)의 지휘를 순수히 받아야 하는데 귀를 베어 바칠 때 병사가 아직 그 지역에 오지 않았다고 하여 배척하여 쫓아버리고서 그 사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과 또한 정월 28일 이후의 패배는 대장의 지휘가 아닌가에 대해 또한 수로를 통하여 장계할 것을 상고하여 보고할 것이다. 한 나라의 군대로 한 나라의 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단천의 왜적을 토벌하는 군대는 실로 평사가 사사로이 여길 것이 아니거늘, 단천에도 또한 수로가 있으니 단천에서 얻은 적의 귀는 단천 군수도 장계를 올릴 수 있는데 전부 뺏어가서 자신의 공으로 삼았으니, 이는 자못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군자의 행동이라 할 수 없다. 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으로 정한 차첩(差帖)을 급히 거두어 먼저 올려 보낼 것이다. 각사(各社)의 성책도 비변사의 관자(關子)을 등사하여 보낸 지 오래되었으므로 급속히 시행할 것이며, 왜말을 챙겨 보내라는 말은 우연히 한 것이 아니니 다시 상고하여 길주에서 포획한 왜말은 각 이름 아래 어떤 말은 누구누구에게 주고 어떤 말은 어떤 사또에게 올렸는지 하나하나 기록하여 속히 보고하라고 회송한다.'고 하였습니다.상고하건대, 11월 19일에는 평사가 명천(明川)에 있으면서 중위장(中衛將) 정현룡(鄭見龍),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 우위장(右衛將) 오응태(吳應台)를 삼위(三衛)로 나누어 영동(嶺東)의 관창(館倉)으로 보내 포위하고서 영동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졸들이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이긴 것에 우쭐 거려 경솔하게 전진하다가 탄환을 맞아 죽거나 다치게 되었을 뿐 특별히 패주한 일을 없었으며, 가령 패배함으로 죄를 받는다면 일도(一道)의 명장 정현룡이 먼저 죄를 받을 것입니다. 귀를 베어 바치는 장계에 대해서는 팔도에서 병사를 일으킨 삭발승까지도 또한 곧바로 장계하여도 조정에서 금지하는 일은 없는데 평사는 귀를 바치는 장계를 조정에 직접 올리면 죽을죄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정월 28일의 일도 남쪽 지방의 전례에 의거하면 경치나 구경하면서 보내주었다면 병졸 한 명도 다치지 않았을 것인데 평사는 옳지 않은 자신의 판단으로 접전을 벌여 피차간에 모두 부상한 병사가 나왔으니 특별히 패군한 일은 없었지만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단천의 남아 있던 왜적을 무찌를 때는 단천 사람이 실로 앞장서서 목을 베었으므로 구태여 북도의 군사 청하지 않았으며, 또한 각자가 벤 귀를 그대로 각자가 가지고 갔으므로 단천 군수에게 귀를 가져가지 못하였으며, 또한 남이 벤 귀를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삼는 것은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자190)들도 차마 하지 않는 일이거늘 평사가 비록 못났을망정 훤한 대낮에 감히 이런 일은 못할 것입니다.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討捕將)으로 차첩한 것에 대하자면, 다만 눈으로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귀로도 듣지 못하였으므로 올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각사(各社)의 성책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하나 재촉하였지만 각 관원이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왜적의 말을 빼앗은 수는 무려 수백 마리나 되는데 숨겨두고 보여주지 않으니 일일이 찾을 수도 없으며, 장부에 기록한 백여 필의 말도 간혹 군공이라 하여 그 말을 빼앗은 이에게 영영 주어버렸습니다. 서 좌랑이 전한 말은 이전에도 알 수 없다고 이미 첩보하였습니다.대개 종사는 황폐해지고 임금은 몽진을 떠났는데, 신하된 자가 조금이라도 공리의 마음을 지니고서 왜적 토벌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의 재앙은 면할지라도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이에 온 마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왜적을 토벌하는 이외에 세상 인간사의 곡절은 돌아볼 겨를이 없이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여야 하는데, 타인의 모함을 받아 끝내 무거운 죄에 빠지게 되었으니, 참소하는 간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어두운 벽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웃게 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겸도순찰사에게 보고합니다. 兵馬評事爲相考事。本月十七日, 到付端川倭賊斬馘啓聞辭緣牒報書目回送內, ' 事亦十一月十九日見敗之後, 欲爲北巡, 則順受兵使節制, 而獻馘之時, 兵使乙未到界是如, 斥而黜之, 使不得與聞於其間爲旀。正月二十八日之後敗, 則非大將節制是喩, 亦爲水路狀啓爲喩, 相考馳報爲旀, 以一國之軍, 討一國之賊爲在如中, 端川討賊之兵, 實非評事私物之見處者是去等, 端川亦有水路, 端川所獲之馘乙, 端川郡守, 亦可狀啓是去乙, 全數奪去, 以爲己功爲有臥乎所, 殊非不伐君子之所爲是齊。韓伯謙討捕將定體差帖乙良置, 急速收取, 爲先上使爲齊, 各社成冊段置, 備邊司關子乙, 謄送已久爲有昆, 急速施行爲旀, 責送倭馬之說, 必非偶然是昆, 更良相考, 吉州所獲倭馬, 各名之下, 某馬段, 某某人許給, 某馬段, 某使道上使是如, 一一懸錄, 斯速牒報向事爲等如良置, 回送是置'有亦。相考爲乎矣, 十一月十九日段, 評事在明川, 中衛將鄭見龍·左衛將柳擎天·右衛將吳應台, 分三衛, 發送嶺東館倉, 圍抱拔柵亦爲乎矣, 軍卒等狃於累勝, 輕進逢丸, 仍致死傷叱分是遣, 別無敗走之事爲旀, 假說以敗受罪爲良置, 一道名將鄭見龍爲先受罪事是旀, 獻馘狀啓事段, 八道起兵削髮僧人至亦亦爲直啓, 別無朝廷禁斷事良中, 評事耳亦直啓獻馘, 仍陷死罪爲乎乙所知不得爲旀, 正月二十八日段置, 依南關例, 觀光致送爲在如中, 不傷一卒是乎事是去乙, 評事段妄意接戰乙仍于, 彼此俱傷, 別無敗軍之事乙仍于, 亦爲昧死狀啓爲有旀, 端川留賊勦捕時段置, 端川人實爲先登斬馘爲在如中, 不必請來北軍事是旀, 各人所斬乙, 仍各持歸乙仍于, 端川郡守處, 耳級乙進排不得爲旀, 奪人所斬, 以爲己功事段, 吮癰舐痔者之所不忍是去等, 評事雖無狀, 白日之下, 不敢爲此事爲旀, 韓伯謙討捕將差帖段, 非但目所不見, 實爲耳亦不聞乙仍于, 上使不得爲旀, 各社成冊段, 件件催促, 各官時未牒報爲有旀, 倭馬所奪數段, 無慮數百是良置, 隱匿不現, 一一搜覓不得, 置簿爲在百餘匹內, 或以軍功永給所奪人叱分是遣, 徐佐郞傳言段, 自前始叱知不得是如, 已爲牒報爲有齊。大槩宗社爲墟, 乘輿蒙塵, 爲臣子者少有功利之心, 不以討賊爲急爲在如中, 雖免人禍, 必有天殃乙仍于, 一心討賊外, 世情人事間曲折乙, 有不暇顧, 直行不疑爲如乎節, 爲人所搆, 終陷重律, 使讒奸之輩, 狸笑於暗壁之間爲乎乙可, 至爲悶慮爲臥乎事是良旀。牒報兼都巡察使。 종기를……자 《논어》 〈양화(陽貨)〉에 "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의 주(註)에 "작게는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는 것과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모두 부귀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서 생길 뿐이다.[小則吮癰舐痔 大則弑父與君 皆生於患失而已]"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4 卷四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의 대군과 백탑교에서 전투를 벌여 왜적을 퇴각시킨 것에 대한 장계 與倭賊大軍戰白塔郊及倭賊退走狀啓 단천(端川)의 왜적을 토벌하고 사로잡기 위하여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해 보내니, 훈련 정(訓鍊正) 구황(具滉) 등이 밤새도록 내달려갔습니다. 정월 27일 길주(吉州)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남도의 왜적 천여 명이 이미 마천령(磨天嶺)을 넘었습니다.'라고 하니, 신이 즉시 삼위(三衛)의 병사를 거느리고 길주의 임명(臨溟) 지역에 주둔하여 정예기병 6백 명을 뽑아 매복하고서 대기하였습니다. 그 왜적이 영동(嶺東)에 머물던 왜적과 합세하여 28일 이른 아침부터 임명 들판을 가득 채워 길주를 향해 들어오므로, 복병장 훈련정 구황, 첨정(僉正) 박은주(朴銀柱), 첨사(僉使) 강문우(姜文佑), 판관(判官) 인원침(印元忱), 고경민(高敬民), 정로위(定虜衛) 김국신(金國信) 등이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뒤를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에 삼위는 앞을 차단하고 허리를 자르며 전진하고 후퇴하면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접전을 벌이면서 60여 리를 추격하였습니다.훈련 판관(訓鍊判官) 원충서(元忠恕)는 길주성 밖 20리 정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또한 돌격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피차간에 화살과 철환을 쏘아대는 바람에 짧은 무기로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다만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넓은 지역에서는 양쪽에서 공격하고 좁은 지역에서는 꼬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학유(學諭) 이성길(李成)에게 전령을 보내 적의 진영까지 추격하여 싸움을 독려하게 하니, 왜적과 10여 보의 거리에서 종일토록 내달리고 쏘아 흐르는 피가 길을 가득 덮었으며 화살에 맞고 죽은 자는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왜적들이 시체를 싣고 가버렸으므로 낱낱이 귀를 베지 못하였습니다.대개 본도의 군민들이 왜적들의 위세에 겁을 내고 있다가 갑자기 대적을 만나니 대부분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감히 대들어 결전을 벌이지 못하였다가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오게 하니 대단히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단천 군수(端川郡守)의 편지에 '왜적 이천여 명이 또 이성(利城)에 이르렀습니다.'라 하니, 먼저 온 적들과 영동, 길주의 왜적과 합세하면 이만여 명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또한 이성의 이천 명이 이어서 온다면 왜적의 계략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깊이 아군 지역에 쳐들어와 독을 퍼트릴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삼위군이 서로 모여 약속하였으니, 중위와 좌위는 명천(明川)에 웅거하고 우위는 서북보(西北堡)를 지키며, 길주 목사는 좌위(左衛)에서 정예가 아닌 병사를 골라서 다신창(多信倉)의 곡식을 바다의 섬으로 옮기고, 신은 휘하 백여 명을 거느려 경성으로 들어가 민심을 진정시켜 성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중위와 우위에서 거느리는 군사들은 각각 위장을 따라 진영에 왔는데, 좌위군은 모두 길주의 군사들로서 목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고 핑계를 대고서 바다의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좌위장은 겨우 척후병 및 좌부 모두 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으로 향해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러 해 전투에 참여하여 이미 관군이 되었지만 한번 대적을 만나면 성 지키는 것을 회피하고 난을 피해 살아보려고 꾀를 내는데, 민심이 이와 같으니 대단히 한심스럽습니다.왜적들이 혈전을 벌이다가 성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어 관청에 쌓아놓고 그 시체를 불태웠으며, 다음날은 성안의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서 밤을 틈타 몰래 달아나버렸습니다. 이에 우위장(右衛將) 우후(虞候) 한인제(韓仁濟)가 병사를 거느리고 내달려가서 곧바로 성안에 들어가 불을 끄니, 성안에 남았던 곡식은 태반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삼위장이 한꺼번에 추격하여 영동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은 밥을 지어 먹을 시간도 없이 주야로 다급하게 달아나 남쪽을 향하여 돌아갔으므로 쫓아갔으나 공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응당 다급하게 추격하여 밤낮이나 원근을 가리지 말고 적이 간 곳까지 뒤를 밟아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다만 정예병들이 단천(端川)을 오가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리는 통에 말에게 꼴도 먹이지 못하고 종일 고단하게 전투를 벌여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걸음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추격은 하루에 백오십리를 가야 하는데 마천대령을 넘을 수 없을뿐더러 단천 이남은 왜적이 이전부터 마음대로 횡행하여 민가와 곡식과 마초들이 모두 타 버리고 텅 비어서 병사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말은 먹을 풀이 없는데, 미리 준비하지 않고 경솔하게 넘어갔다가는 중대한 행군 중에 졸지에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을 만나 굶주림만 겪게 될 것입니다.단천 군수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꼴과 군량의 준비 여부를 물어보려 하오며, 한편으로는 북절(北卩)의 상선으로 군량과 꼴을 운반하고 정예병을 뽑아 남쪽으로 향하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왜적이 남쪽으로 급히 달아나 철령(鐵嶺)에 이르렀는데, 북도 군마의 양식과 꼴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되면 형세가 끝까지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신이 북도에 있을 때는 북병사(北兵使)가 그 당시 아직 그 지방에 오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주장(主將)의 일을 맡았지만 요즘은 북병사가 남도에 있거늘 막하관이 마음대로 도내의 군마를 거느리는 것은 사체가 대단히 어그러진 것이므로 거느린 군마를 병사에게 이관할 생각입니다.28일에 전사한 자로,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은 온 힘을 다해 죽기로 싸우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성에 거처하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는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하고 적진에 드나들면서 그 허실을 정탐하였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여 앞장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밖에 사졸로 죽은 자는 25명이 됩니다. 왜적은 9명의 목을 베었으니 감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말 15필을 빼앗았습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싣고 성에 들어가 버린 것과 관청에서 불태운 시체는 무려 백여 명이 되나, 귀를 베어 올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2일. 端川倭賊勦捕次, 以分四隊, 定將起送爲白有如乎, 訓鍊正具滉等達夜奔馳, 正月二十七日, 還到吉州言內, '南道倭賊千餘名, 已越磨天嶺'是如爲白去乙, 臣卽領三衛兵, 屯駐吉州臨溟地, 抄發精騎六百, 伏兵待候乎白有如乎。同倭賊嶺東留倭合勢, 二十八日早朝, 始叱瀰滿臨溟野中, 入向吉州爲白去乙, 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 各率所部, 尾擊接戰, 三衛段, 遮前截腰, 進退接戰, 自辰初至酉時, 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 吉州城外二十里許, 伏兵爲白有如可, 亦爲突出接戰, 射矢鐵丸, 彼我俱發爲白乎等以, 未得短兵相接, 只以輕騎馳逐, 地廣則挾擊, 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 迫至賊陣, 使之督戰, 與賊相距十數步, 終日馳射, 流血滿道, 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 倭賊載屍而去乙仍于, 未得一一斬馘爲白齊。大槩本道軍民, 爲倭賊積威所劫, 猝遇大賊, 多懷自沮, 不敢交雜快戰乙仍于, 使賊入城, 極爲痛憤爲白乎旀。同日端川郡守簡通內, '倭賊二千餘名, 又到利城'是如爲有去等, 先來之賊, 與嶺東吉州相合, 少不下二萬餘名, 又有利城二千繼至爲白在如中, 賊謀難測, 不無深入肆毒之患弦如, 三衛相會約束, 中衛左衛段, 據明川, 右衛段, 守西北堡, 吉州牧使段, 除出左衛不精軍, 移轉多信倉穀于海島, 臣段, 率麾下百餘名, 入向鏡城, 欲爲鎭定城守之計爲白如乎。中衛右衛所率軍段, 各隨衛將來到陣所, 左衛軍段, 皆是吉州軍是白乎等以, 托稱與牧使起義兵盡入海島乙仍于, 左衛將, 亦僅率斥候及左部幷百餘名, 入向明川爲白臥乎在亦, 經年赴戰, 已爲官軍爲白有如可, 一遇大賊, 謀避城守便生避亂之計, 民心如此, 極爲寒心爲白齊。倭賊等血戰入城, 收取死者, 積置官廳, 燒其屍身, 翌日, 盡燒城內公私廨, 乘夜潛遁爲白去乙, 右衛將虞候韓仁濟, 領軍馳到, 卽入城內, 滅火爲白乎矣。城中留穀, 太半全在爲白齊。三衛將一時追擊, 到嶺東爲白乎矣, 倭賊等晝夜奔忙, 不暇炊食, 南向出歸爲白乎等以, 追不及擊爲白齊。賊退之後, 所當急急追擊, 勿論晝夜遠近, 尾到賊到處爲白良音可爲白乎矣, 惟只精兵等往來端川, 倍日幷行之際, 不得秣馬, 盡日苦戰, 人極馬疲, 不能運步。又此追擊, 日行百五十里爲白有去等, 磨天大嶺, 末由踰越叱分不喩, 端川以南段, 倭賊自前恣意橫行, 閭家穀草, 焚蕩一空, 軍無依接之處, 馬無喂飼之草, 不爲預備, 輕自越去爲白有如可, 軍行大事, 猝未進退, 坐見饑乏弦如。端川郡守處移文, 蒭粮準備與否。探聽爲白乎旀, 一邊以北卩尙船輸運粮草, 選精兵南向計料爲白在果, 惟只倭賊急於南走, 至於鐵嶺爲白在如中, 北道軍馬糧草辦出無路事良中, 勢難窮追, 未知何如爲白乎旀。臣在北道時段, 北兵使時未到界乙仍于, 權行主將之事爲白如乎節, 北兵使在南道爲白有去等, 幕下之官, 擅率道內軍馬, 事體甚乖爲白乎等以, 所率軍馬乙, 移屬兵使計料爲白齊。二十八日戰亡人段, 朱乙溫萬戶李希唐, 極力死鬪, 日暮時, 中鐵丸身死, 鏡城居前訓導李鵬壽, 自初倡義時, 盡誠奔走, 出入賊中, 窺覘虛實, 忘身徇國爲白有如可節, 奮願先登, 中鐵丸身死, 其餘士卒死者, 二十五名是白遣, 倭賊段, 斬馘九級, 監封上送爲白乎旀, 奪馬十五匹爲白有齊。中箭載屍入城, 官廳燒屍段, 無慮百餘名是白良置, 割耳上送不得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二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장수와 사졸들의 군공단자를 작성한 장계 倭賊退走後將士軍功磨鍊狀啓 정월 28일 남도(南道)의 왜적이 영동(嶺東)의 왜적과 합세하여 길주(吉州)를 향해 들어올 즈음에 임명(臨溟)의 들판에서부터 길주성 아래까지 종일 접전을 벌여 무수하게 쏘아 죽였으니 힘써 싸운 장수와 사졸들은 마땅히 군공을 마련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통쾌하게 싸워 큰 승리를 이루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게 하고서 결국 밤에 달아나게 하였으며 전투 내내 귀를 벤 왜놈이 겨우 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왜놈들이 수레에 싣고 가거나 불에 태워버렸으니, 9명의 귀를 벤 것만으로 공을 논하여 보고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않기에 왜놈의 목을 벤 사람은 등급을 나누어 나열하여 기록하지만 신은 형틀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만일 이 왜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남쪽을 향할 경우에 단천(端川) 이남 지역은 민가가 전부 불타고 없어서 군사와 말은 길에서 자야하므로 꼴과 군량은 준비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니, 차근차근 조치를 취하여야 비로소 행군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안의 왜적을 내쫓았는데도 그대로 앉아 추격하지 못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져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본도는 여러 해 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어 남자는 전투에 참여하고 노약자는 물자는 운송하는 일을 맡았으니 장차 절로 쓰러져 죽을 염려가 있지만, 군민이 모두 왜적과 함께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생들에 이르러서도 징발한 일이 없지만 또한 애초부터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목(事目)에 '자원한 사람들의 공을 논함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자원한 각각의 사람을 책으로 만들고 각자의 이름 아래 공을 논하여 올려 보냅니다.지방 사람인 급제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는 의병을 처음 일으킬 때부터 공이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여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11월 7일 하비(下批)189)하여 건공 장군(建功將軍) 미전 첨사(美錢僉使)로 임명하여 보냈다가 12월 8일에 또다시 창신 교위 훈련 판관(彰信校尉訓鍊判官)으로 계급을 낮춰 임명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감히 아뢰니 대단히 황공합니다.장계를 받들고 가는 사람은 주부(主簿) 최배천(崔配天)으로 당초 창의와 군공으로 상직(賞職)을 받은 자인데, 두 번째 받들고 갈 것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남쪽 왜적이 들어왔을 때에도 종일 힘써 싸웠기에 대단히 가상합니다. 그의 바람에 의해 두 번 보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2월 3일. 正月二十八日, 南道倭賊與嶺東合勢, 入向吉州之際, 自臨溟野至吉州城底, 終日接戰, 無數射殺, 力戰將士, 所當軍功磨鍊, 分等啓聞事是白在果, 惟只未能快戰大捷, 使賊入城, 致有夜遁, 終始所斬只有九級, 餘皆載屍火燒爲白有去等, 斬馘九級叱分以, 論功上報, 實爲未安乙仍于, 所斬人叱分分等除良, 列書磨鍊, 臣段, 伏鑕待罪爲白乎旀。萬一此賊, 不分晝夜, 直向南路爲白在如中, 端川以南段, 一路人家全數焚蕩, 軍馬露宿是白乎乙去爲白在果, 蒭粮準備極難, 次次措置爲白良沙, 始爲行軍事是白去等, 出送境內之賊, 安坐不追, 極爲痛憤, 肝膽如裂爲白齊。本道經年爲盜賊之窟, 男丁赴戰, 老弱轉輸, 將有自斃之患是白良置, 軍民皆知不可與賊俱生乙仍于, 儒生等至亦徵發隅無, 亦當初始叱自募赴戰, 至於立功爲白有去等, 朝廷事目內, '自募人等論功有差'亦爲白乎等以, 自募各人等乙成冊, 各其名下論功上送爲白乎旀。土及第安原權管姜文佑, 自初倡義首功叱分不喩, 累次赴戰, 極力先登, 輒有大功爲白有如乎節。前年十一月初七日, 下批建功將軍美錢僉使差送, 十二月初八日, 又差彰信校尉訓鍊判官降資除受爲白有臥乎所, 未知其由, 敢此報稟, 極爲惶恐爲白齊。 狀啓陪持人段, 主簿崔配天, 當初倡義及軍功賞職, 以再次自願陪持叱分不喩節, 南倭入來時段置, 終日力戰至爲可嘉乙仍于, 依願再送爲白有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 하비(下批) 삼망(三望)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상주하여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遺上几留置記 舊尋源錄一卷新尋源錄一卷儒案一件建祠時執事分定及時到記笏記院村除役完文一丈箭竹掘土各項軍丁遞等官家時頉役文狀幾件呈繡衣趙公萬永書題辭【金松汀行誼按狀感歎況先輩諸公唱詡不淺也陶老述作徐公立言如彼鋪敍則一鄕僉伸之齊擧實蹟復孰曰不可乎原狀謄去當量處事】呈繡衣沈公永錫書題辭【觀此狀辭公議可知當商量啓稟事】呈繡衣兪公星煥書題辭【陶芝兩先生文狀足爲百世不朽之蹟何容更贅焉更加特採公議以爲 上達之地事】呈觀察使徐公 書題辭【孝行聞極嘉歎褒揚更待公議事】告本官書一文建祠時各面請扶通文無爲亭主翁狀草一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本院創修年條記 龍集旃蒙【乙】協洽【未】秋七月余以身病杜門者將三歲矣庫三間從公議新刱一望餘尙未告厥其間所入不少仍此而知我先父老之艱苦在後裔守成之責其果何如也轉輾堆枕歎咄無已而況子孫孤弱財力不贍者乎蓋我先院刱建往在 肅廟朝二十六年庚辰二月季丁而安公冑相乃文康公牛山先生之曾孫於吾先祖松汀公爲外玄孫爲外祖建祠以祭顧我本族旣是弱孑孤蹤雖欲倡始而末由千載之下可見不泯之公議秉彝之良心也詳考年代則我高祖考諱太望三十三歲時也刱建於觀水軒松汀舊址地高風勁瓦桷易頹 景廟末年甲辰移建於廣坪癸坐原嶝高雨打亦無異於古地其後累仍靑烏之說 英廟四十八年壬辰移建於今日俎豆之所則我祖考酒隱公三十七歲時也財力難辦院貌莫成酒隱公自拂髦少無意於營産專以保院爲務不憚劬勞遍訪遠近及境內諸君子廣置院田極力潤色 正廟乙卯講堂重修祭器庫刱建其年八月垣墻新築神門三間刱建翼年丙辰公需廳新刱皆我祖考酒隱公之勞心旋力乙卯後三十四年戊子祭器庫重修丙辰後二十五年庚辰公需廳重建今年秋草庫二間新創其於守成之責不亦難乎然而月去歲邁瓦墻頹圮雨漏風磨營繕最難爲吾祖子孫者於院事凡節視以自己于墻于羹念先祖之懿德入門出戶想先祖之餘蔭踵成酒隱公之深誠則其於爲先裕後之道于光有耀矣勉之哉念之哉九代孫光佶謹誌桐崖安先生重黙配享本院事實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上本倅狀 化民等謹齋沐陳狀于城主閤下伏以民等竊伏聞公論百世後乃定今於桐崖安先生驗之矣安先生純篤之行精粹之學實爲湖南之山斗流光餘韻久而益彰屹然與鳳鳴臺壁立千仞而士林之向慕百世如新則芬苾之享豈在於滄桑變遷之餘耶始因本孫之撝謙終爲世道之多變使先生盛德鬱而不彰使儒林便失矜式之所豈非斯文一大欠事耶乃者長官先倡列邑響應公意一發縟禮將擧菖花良辰俎豆斯講事關斯文衿紳咸聳則曷不先告於我閤下以重其事耶大抵先生之德業尙矣決非後學之所可讚一辭者而若言其孝行則出天而因心者也論其學問則潁脫而不群者也至於節義則無愧於蹈海之魯連恬退則一般乎急流之若水百行俱全衆美咸萃則求之古賢孰有如我先生之超卓而輝暎者耶八歲居廬三年泣血則苟非因心之孝能如是乎十一歲作心學圖且著僞學辨義殆近生知之姿而梁松川朴竹川許以斯門有人博約俱到陶山老先生寄詩獎詡苟非學問之不群則亦能如是耶黑龍之變身帶麻絰未得奮義卽戎而三囊神訣坐贊李忠武平倭之策則其功烈之嵬卓果何如也和使渡海大義一壞而朝野一套無人倡義而先生北望痛哭焚其朝衣朝冠節義之凜烈又果何如也天地再成人皆彈冠而先生則累辭徵辟遯肥山野直與古之人嘐嘐自期而便作橫流砥柱嵬然以隻手扶得幾頹之節其爲有功於世道豈讓於桐江之一絲耶向所謂百行俱全衆美咸萃者豈非着題之公議耶警咳雖邈而烈聞彌彰世級雖遠而景慕益切皆曰我先生可祭於社而鄕論旣一太學通章亦與之同聲當時大老爲製其祭文百年欠事今始成矣豈非士林之幸耶第伏念右文興學實惟我閤下事也隆師尙賢亦惟我閤下事也故定議於士林告成於閤下須以粢牲而責其禮更以黃燭而炳其義使士氣風動使賢宮益重焉配享之所則松汀金先生祠宇也生幷一世學又同門一室揭虔蓋出公議如蒙閤下降臨則非但觀瞻俱聳亦有光於先賢更伏望閤下商量焉不勝祈懇之地謹冒昧以達 庚寅二月 日題辭 桐崖先生道德學行實是後學之所尊仰而今聞享議已成豈非士林之幸耶粢牲香燭謹當備呈而身病方苦末由躬瞻盛儀殊用深恨配享日子涓在何間耶盤谷丁先生父子配享事實逸而不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함평향교위성록(咸平鄕校衛聖錄) 咸平鄕校衛聖錄 咸平鄕校衛聖錄 고서-기타 서원향교지 원문 咸平鄕校衛聖錄 檀紀四千三百十二年己未六月一日 鄭炳華 檀紀四千三百十二年己未六月一日 咸平鄕校 咸平 석판본 1 반곽 유계 12행25자 주쌍행 상하향1엽화문어미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한국학호남진흥원 전라남도 함평향교의 위성(衛星) 과정 등에 관한 기록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序 蓋鄕校之有校誌猶書院之有院誌也 院與鄕 苟無誌 則其設置之沿革也 規模之廣狹也 祭享之豊約也 備品之多寡也 與夫任員祭官之爲誰氏爲某孫 何從以知之歟 此所以諸校 隨時刊誌者也 惟我咸平鄕校 ?在海左 難與雄府鉅邑 幷其莊嚴 極其華麗 而其模式典刑 亦自略具耳 烏可無誌也哉 去年 諸章甫合口齊談 曰吾鄕之修誌 已有年所 而若欲此更刊 則事鉅力綿 卒難奏成 曷若以任員祭官錄 及儒道會案 爲先發刋 姑待異年 俱收幷刊乎 迺以戊午之七月 發通募單 四境響應 無一人懷異志焉遂以今年初夏 厥功告訖 此不亦盛矣哉 ?然 講吾仁義之說 而究吾修齊治平之道者 本也 間於籩豆之節 而習乎玉帛鍾皷之數者 末也 況自滄桑一變以來 西風東渡 邪妄虗誕之說 無父無君之教 無人不染 無處不熾 而彼以談仁義說道德者 稱以守舊翁 明利害善權變者 目爲開化者 則於是乎 先聖前王之文物禮樂 掃地蔑如矣 噫 余?無似 忍見吾鄕 有如此徒軰耶 但願諸賢不拘拘於古而能知新 不逐逐於今而能溫故 彬彬焉 濟濟焉 涵養德性 砥礪名行 爲吾東邦儒者之楷模則斯可謂尊聖也 斯可謂衛聖也 安可以此錄之刊 謂之吾事已了世哉 諸賢 以余主玆役故 請置一言于卷端 余不獲辭 强爲蚯蚓如右 此豈文乎哉 聊爲塞責耳己未之立夏節 羅州金成男謹序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竹亭書院重建事蹟碑文 湖之南靈巖之月出山西竹亭之鄕舊有竹亭院者咸陽朴氏四世俎豆之所也若五恨先生諱成乾字陽宗 成宗壬辰登文科歷長水縣監棄官南歸卜居于靈巖之鳩林不肯隨俗俯仰放意林壑爲賢類所推重若孤狂先生諱權字而經 成宗壬子登科歷司諫院正言當燕山戊午危言不避謫吉州移海南遂放還田里若壽翁公諱奎精字春仲 明宗戊午生員性至孝杜門求志力行古道我家農巖先生所述善狀已盡之矣尙成安公震洪景憲公暹薦于 朝謝辭不起若雪坡公諱承源字季悠繕工監參奉壬丁之燹甲子之變皆倡義有功尤春兩宋先生奏聞 贈戶曹參判若歸樂堂李先生諱晩成字士秋吏曹判書諡忠肅歷本院長遂躋而配食五先生之恬退也文章也節義也忠孝也皆足以羽翼斯文模範百世故 肅宗辛酉建祠妥享以致景仰之誠迨 髙宗戊辰因朝令撤之鞠爲灌莾今焉九十四載矣州人士慨然有感與後承僉謀肆於辛丑春乃相土於間竹亭之北五恨先生杖屨之地也重新厥工棲碑之堂齊沐之室咸中厥度以聳觀慕先尊賢之道一擧而兩全矣將伐一石紀其實使朴燦郁燦宗甫謁文於不佞嗚呼大凡慕其人者所以尊其道也尊其道者所以學其學也不然輪奐其廟貌蠲潔其蒸嘗以致如在之誠固苗裔後學之所當行者然是特文具而己今日之擧勿以是自多師其心法蹈其規矩惟恐令德之或墜永保其家聲則豈不有光於先祖先賢也顧念先誼不敢以不文終辭撮其顚末俾歸刻焉己酉春分節安東金潤東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敬次間竹亭韻 先生當日泛虛舟松竹幽居足勝遊怊悵辟强園裏興只今惟有數叢留伯鸞之後有 先生五恨堂名曠世情百代傳家何所有竹孫松子是雙清 掌令尹光天五恨有先輩潛光隱德尊至今亭下竹生子又生孫後生崔命興西湖湖上木蘭舟山水亭臺幾處遊吾 視風流猶不盡祇今松竹滿園留尙憶臨流手釣綸苔磯側處玉鱗鱗漠漠江湖白滿地後生何恨挹淸塵 後孫 龜胄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春日登間竹亭誦東卧竹亭西泛舟南溪濯足北園遊之句不勝景慕之忱賦詩四章 風滿 先生東卧亭猗猗綠竹間竹靑孱孫俛仰軒窓下宇宙胸襟壁有經月白 先生西泛舟天髙海闊百年遊島邊碧立漁竿竹萬古釣臺淸節留水暖 先生南濯溪淸流九曲碧玻瓈欲知當日觀魚樂終夕無言坐柳邊花發 先生北園遊徘徊想見杖履痕閒中日涉淵明趣手撫依依某樹存 後孫生員良直松風竹韻雜琴聲五恨亭高四落成振起文風今庶幾錦城歌曲朗州城 後孫 履和竹亭書院誌 終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跋 有院所以象賢也有誌所以記院之實也無院則道不尊無誌則文或闕歸於杞宋之無徵無徵則事之不繼而易至於廢誠之不貫而易至於息此古與今院之未或無誌而誌之必致其謹嚴者也凡有院宇可不勖哉竊惟我竹亭書院創建於 肅廟辛酉以先子五恨先生爲主享而配享則先生長胤孤狂先生也旣而建院後三年癸亥又配以先生之孫壽翁先生又經幾歲歸樂堂李先生陞配享位而序居孤狂之下壽翁之上其後 憲廟乙未又以先生玄孫雪坡先生配焉蓋五先生也五先生同享于院經三十三年而至 高宗戊辰見撤於邦禁撤後几十四年辛丑卽大韓民國四十三年也乃以士林之議而復設焉其殿堂門廡之制樽俎籩豆之品揖讓升降之容吾不知比舊何如然亦可謂儀不及而禮無不達矣但院之設享以來追配非一沿革多端而舊誌之所存者僅僅焉無以考其詳則及今之修又安得不汲汲也乃與族弟燦宗始終協議凡自創設至毁撤移建復設享祀維持及其關聯於院者無不蒐輯編成一卷印布於各家於是乎吾院始有誌而五先生之始終源委瞭然於世非曰能也而庶有小補於院之萬一云爾歲舍辛亥四月下澣後孫燦郁謹識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