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주와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한 것과 육진의 역적을 찾아 목을 베고 오랑캐들에게 항복 받은 것에 대해 올린 장계 吉州臨溟破倭賊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狀啓 지난 해 11월 1일에 성첩(成貼)187)하여 올려 보냈던, 길주(吉州)에 주둔한 왜적과 접전을 벌여 목을 벤 사연을 적은 장계가 12월 9일에 행재소에 도달하여 접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올해 정월 9일에 본도로 가지고 온 비변사에서 내려 보낸 다섯 통의 공문을 상고하였습니다.길주에 주둔한 왜적이 한번 패배한 뒤로는 견고한 성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 않거늘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려 모두 삼천여 명의 병사가 다시 찾아가 성을 포위하고서 종일 접전을 벌였습니다. 왜적 4백여 명이 성 위에 줄지어 서서 죽을힘을 다해 방비하므로 철환과 화살에 왜놈과 아군 모두 많은 병사가 부상을 당하니 빨리 함락할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나눠 성 밖 2~3리 네댓 곳에 매복하고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왜놈이 나오면 곧바로 죽이거나 사로잡으려 하였습니다. 세 위장은 모두 병사를 영동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의 왜적을 섬멸한 뒤에 성 안의 왜적을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마침 군사를 옮기는 날, 영동(嶺東)의 왜적 사백여 명이 임명촌(臨溟村) 민가에 나와 불 지르고 노략질할 때 좌위장 유경천이 차정(差定)하여 보낸 복병장 길주 토병(土兵)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대군에게 급히 통보하니 삼위장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육진의 정예병이 먼저 접전을 벌여 왜적이 패퇴하였는데, 삼위의 군사들이 활로 쏘거나 참수한 왜놈과 성 안에 남았다가 드나들 때 붙잡아 죽인 왜놈까지 모두 백여 급(級)으로, 왼쪽 귀를 함에 넣어 봉하고 군공을 모두 기록하여 장계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던 차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저희들 마음대로 장계한다고 하여서 공문으로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순찰사의 지휘를 낱낱이 거행하지 않았고 군중의 기밀도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으며 북도 오랑캐의 난리도 또한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연달아 네 차례나 추고하였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병사들은 모두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이 모집한 병사이며 공은 모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라 하면서 '패군 장수 원충서(元忠恕)를 녹공(錄功)에 참여시키고 정희적과 고경민의 온전한 공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명천 현감(明川縣監) 장응상(張應祥)을 시켜서 평사(評事, 정문부)가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인양 다짐을 받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신은 나이가 어리며 어리석고 용렬한 백면서생으로 군사 일을 잘 알지 못할 분 아니라 문서 보고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군무를 맡게 되었는데 일을 잘못 처리하여 중죄를 받게 되었으니 방황하며 근심하던 차에 순찰사의 공문에 '평사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아울러 종사관을 거느리니 지극히 해괴하다.'라 하여 신의 대장직을 교체하고 회령 부사 정현룡으로써 대장을 바꾼다는 공문을 작년 11월 21일 성첩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체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수하 장수와 병사 삼천여 명 모두를 정현룡에게 넘겨주고 신은 물러나 추고에 답하려고 하였는데, 북병사가 공문에 보내와 '평사는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울려 오랑캐를 진압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대장직에서 교체되었기에 감히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군관과 휘하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였습니다.경원(慶源)에 이르러 백성들을 효유하고 아울러 오랑캐들에게 음식을 보내 달랬습니다. 백성들은 왜적이 물밀 듯 밀고 올라올 처음에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면서 군민들이 그 수장을 내쫓고 드넓은 도로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피란 온 선비들을 간혹 붙잡아서 왜적에게 내주고 간혹 옷과 행장을 몽땅 빼앗았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로 다른 관원들이 토착민들의 전날 악행을 낱낱이 들어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을 추심하는데 급급하니 민심이 불안하게 되었는데, 신은 '두 마음을 먹은[反側] 무리들을 진정시키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일절 금지하여도 왕의 권위를 빙자하여 이런 행위를 하니 금하여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마음을 먹은 무리들은 의구심이 날로 깊어져 신이 회령(會寧)에 이를 때에는 본부(本府)의 백성들이 반적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으니, 신이 임기응변의 말로 온화하게 효유하였으니, '이미 괴수는 죽였으니 위협에 의해 협조하던 이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경성과 온성(穩城)의 인심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자못 의심을 가지고 주저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원 좌수(慶源座首) 정사기(鄭士麒)와 그 아우 사봉(士鳳)은 당초 왜적이 북쪽에 들어왔을 때 병사 이하 관군을 잡아서 왜적을 맞이하여 투항할 생각이었는데, 신이 경성에 들어가 장악한 이후로 여덟 차례나 징병령을 내렸지만 거역하고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랑캐 난을 방어하려고 길주에 진군한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범(金範)은 회령을 겸하여 다스리기에 회령으로 들여보냈고,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은 본진(本鎭)으로 들여보내어 백성들과 오랑캐의 마음이 거의 진정되었습니다만, 정사기만은 도내의 거악(巨惡)으로 자신의 친족 무리를 군노사령(軍奴使令)으로 많이 심어놓으니 판관들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러 정사기와 사봉 및 그 당의 괴수 경흥 토병 최송(崔松)을 행영(行營)에 잡아와서 모두 참수하고서 효수하였습니다. 종성 통사(鍾城通事) 안억수(安億壽)는 전부터 변방 오랑캐들에게 토색질을 하였으며 왜란이 일어난 뒤에 나라에 기강이 없음을 틈타 온갖 물건을 토색질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통사의 눈앞에서도 오랑캐가 고한 말을 변조하여 거짓으로 전하였습니다. 신이 그 기색이 거짓되고 비밀스러움을 보고서 직접 중추하량개(中樞下良介)를 불러들여 우리나라 말로 문답을 하였는데, '육진이 왜변이 일어난 뒤 토병의 토색질로 변방의 근심을 빚어낸 것은 대개 다 비슷한데, 그 가운데서도 안억수는 가장 심하다.'고 하거늘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 돌림하여 일벌백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량개란 놈도 흉측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오랑캐라 우리나라 사람을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 오랑캐가 보는 앞이라 경솔하게 처형하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 같아서 곧바로 칼을 씌워 부령부(富寧府)로 옮겨 가두고 순찰사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오랑캐의 정세를 말씀드리자면, 회령 관내는 당시 배반하는 정황이 없으며, 경성의 오랑캐는 밖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소원하니 그들의 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한 분명하게 도적질하는 일은 없으며, 온성의 오랑캐는 애초 왜변 때부터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흩어져 지내는 우리 백성을 한 명도 노략하지 않았을 뿐더러 판관이 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른 오랑캐들이 노략질한 사람과 물건을 먼저 돌려보내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니 다른 진(鎭)의 예에 의거하여 술과 고기를 보내고 소금과 장을 주는 이외에 별도로 공이 있는 오랑캐를 따로 불러서 한 상 물러주어 술을 주고 소금과 장을 더 주면서 왜적을 모두 평정한 후에는 상과 벼슬을 서울에 가서 각각 특별히 시행할 것으로 이치를 들어 타일렀습니다.경원은 두두족(頭頭族) 추장 10여 명이 이따금 와서 고하며 우리나라에게 복종할 것처럼 거짓 꾸며 보이지만, 부내(府內)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를 배반하여 잠깐 귀순하는 척 왔다가 곧바로 떠나 함께 도적질을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합니다. 신이 북으로 갔을 때 타이르는 명령을 듣기 위해 왔었던 추장과 학생 도합 이백여 명은 우리 쪽에서 불러서 왔을 뿐 아니라 저들도 부름에 응하여 귀순한 것이므로 숨은 악행을 들춰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례에 의거하여 음식과 물품을 주고서 효유하기를 '도적질하는 오랑캐가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침입해 올 경우 나라에서 죄를 물을 때 너희들도 함께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니 본분을 잘 지키며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각별히 유념하라.'라고 엄한 말로 타일렀습니다.경흥은 서수라일보(西水羅一堡)의 첩입군(疊入軍)과 조산보(造山堡)의 흩어진 백성과 토병을 함덕후(咸德厚)가 거느려 성을 시키고 있는데, 도둑질하는 오랑캐들이 네 번이나 성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을 뿐 아니라 도적 오랑캐의 부락 한 곳을 빈틈을 타서 불태웠습니다. 고립된 군대가 자신의 지역을 넘어 장수가 명령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온당함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조그마한 외로운 성이 큰 도둑에 의해 길이 끊어져 제 때 지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성을 온전히 보호하고 왜적을 무찔러 군기(群機)를 잃지 않았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 일이기에 함덕후를 정장(定將)으로 삼고 회령 해창(海倉)에 있는 쌀 1백 석을 그쪽의 보(堡)로 운반하여 성을 지키는 군량미로 쓰게 하였습니다.경흥부와 그 관내인 조산(造山), 무이(撫夷), 아오지(阿吾地)와 경원 관내인 건원(乾元), 아사보(阿山堡)는 애초부터 지키지 못하여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분탕질하고 거침없이 왕래하여 도둑들이 다니는 길이 되어버렸으니, 간혹 경흥의 바닷가에서 혹은 경원 지역에서 들어와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도둑질을 하여 산골의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육진의 정예병 2백여 명은 길주(吉州)에 나아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게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마구간이 텅 비어버려 전날 말달리며 활 쏘던 군사가 지금은 말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 기물[軍器]도 왜놈들에게 모두 불타버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을 묶어 횃불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피난한 백성들 가운데 활과 화살을 지닌 자는 모두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민간의 전투 기물도 거의 묻혀 섞어 버렸으므로 성에 웅거하며 방어하는 것도 오히려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 먼 곳까지 추격하는 것은 형편상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촌에 사는 백성들 모두에게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여 노략질 당함을 면하게 하였습니다.길주의 왜적의 세력이 이윽고 사그라지고 육진의 오랑캐의 난리가 점차 거세지므로 부득이하게 왜적과 싸우던 여러 장수 가운데 간간이 뽑아 들여보냈는데, 각 그 진장(鎭將)이 정예병을 뽑아 거느려서 요충지에 매복하여 횡행하는 길목을 끊어버렸습니다. 대개 북도는 길이 대단히 멀고 눈얼음이 쌓인 지역으로 순찰사가 있는 곳까지 10여 일이 걸리는데, 군중의 기무(機務)는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하니 한결같이 지휘에 의해서 시행한다면 아마도 임기응변하는 병가(兵家)의 도리가 아닌 듯 하기에 그 간의 급한 일은 간혹 순찰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시행하고서 후에 문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찰사의 지휘에 '대장을 교체하여 도망병을 잡는 장수로 정했으니, 마천령과 단천 등지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도망한 병졸을 체포하라.'라 하였습니다. 신이 하찮은 작은 관리로 조그마한 공도 없이 문득 당상관에 오르니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여 어떻게 은혜를 갚고 죽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피를 칼날에 바르고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다만 지금 길주와 영동을 아직 소탕하기 전이라 북쪽으로 도망간 우리 병사가 남쪽을 향하여 도망갈 이치는 없을 듯 하기에 일단 군중에 머물고 있습니다.신이 지난해 11월 21일 대장에서 교체되었을 때 12월 14일자로 보낸 비변사의 이문(移文)에 '평사는 바야흐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날짜가 24일이나 지났는데 순찰사가 저의 죄를 청하는 장계가 당시에 행재소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회령 부사 정현룡은 대장이 된 지 한 달도 못되어 겸절도사로 교체하여서 육진을 순행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 오응태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신은 다만 북병사의 지휘에 의하여 제 마음대로 북쪽을 순시하였다고 추고하였습니다. 각 진의 장수로 예를 들면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등 무려 수십 명은 각자 본진(本鎭)의 토병(土兵)을 이끌고 와서 왜적을 토벌함에 참여하고서 순찰사에게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각 보와 진의 장수를 거의 다 교체하여 간혹 한 진과 보의 장수에 2~3 사람을 거듭 임명하여 장수들도 자신의 본래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고 병졸들도 자신의 장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정(軍情)은 흔들리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에 대단히 염려가 되어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제 마음대로 장계를 올린다고 죄를 얻을까 염려되어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에 올린 장계를 돌려보내는 사연과 및 비변사에서 보낸 다섯 통의 공문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어 1등의 군공을 세운 지방 사람으로 급제한 차응린(車應轔)이 자원하기에 전례에 의거하여 바닷길로 장계를 올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2일. 前年十一月初一日, 成貼爲白在, 吉州留倭接戰斬馘辭緣書狀, 十二月初九日得達行在所受到付, 及備邊司啓下成貼關五度, 今年正月初九日, 齎還本道爲白有去乙, 相考爲白乎矣。吉州留賊一敗之後, 入據堅城, 縮頭不出爲白去乙,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高嶺僉使柳擎天, 各率所部, 合兵三千餘, 再度圍城, 終日接戰爲白乎矣。倭賊四百餘名, 列立城頭, 抵死防備, 鐵丸射矢, 彼我俱傷, 勢難猝拔乙仍于, 分兵設伏城外數里許四五處, 晝夜候伺, 出則勦捕爲白乎旀, 三衛將幷以移兵嶺東, 先滅柵內之賊, 次及城中之寇計料爲白如乎。適音移兵之日, 嶺東倭賊四百餘名, 出來臨溟村舍, 焚蕩擄掠之際, 左衛將柳擎天, 定送爲白在伏兵將吉州土兵金國信, 爲先接戰爲旀, 一邊以馳報大軍爲白良在乙, 三衛一時馳突其中, 六鎭精兵爲先接刃, 倭賊敗奔, 三衛射斬及城中留賊出沒時捕斬, 合百餘級, 左耳函封, 軍功幷以磨鍊狀啓計料次, 都巡察使尹卓然, 亦擅自狀啓是如, 出公緘推考爲白乎旀, 巡察使節制一一擧行不冬, 軍中機務趁不馳報, 北道胡亂, 亦不這這馳報是如, 連四度推考叱分不喩, 某條以傳聞爲白乎喩, 兵皆吉州牧使鄭煕績召募之兵, 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是去乙, '敗軍將元忠恕, 亦參錄功, 鄭煕績·高敬民, 不以專功上聞'是如, 明川縣監張應祥乙用良, 評事失誤軍機樣, 以捧侤音, 上使亦爲白臥乎在亦。臣以年少迷劣白面書生, 不閑軍旅叱分不喩, 文報間曲折, 專不閒習爲白如可, 一朝臨戎, 誤蒙重罪爲白乎去, 彷徨悶迫之際, 巡察使節制內, '評事自稱大將, 兼率從事官, 至爲駭怪'是如, 遆臣大將之任,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改定大將關子, 前年十一月二十一日, 成貼到付爲白良在乙, 卽依巡察使節制, 專以手下將士三千餘名, 鄭見龍處交付, 臣段, 退答推考爲白如乎, 北兵使節制內, '評事亦巡行六鎭, 鎭定人心, 兼鎭虜情'亦爲白有去乙, 臣已遆大將之任, 不敢不從乙仍于, 率軍官及麾下五十餘人, 北行六鎭。至慶源, 曉諭人民, 兼饋藩胡爲白乎矣。人心段, 當初倭賊長驅之時, 不復知有國家, 軍民逐其守將, 衢路恣行攘奪, 京來將士及避亂士人等, 或被捉致倭賊, 或被赤脫衣裝爲白有如可, 自臣入城之後, 歷擧土人前日過惡, 使無所容叱分不喩, 急於推得失物, 因致人心不安爲白去乙, 臣以謂'鎭定反側之初, 如此擧措, 甚非事宜'是如, 一切痛禁爲白如乎節段, 憑藉王靈, 禁不能抑, 反側之輩, 疑懼日深, 至於臣到會寧之日, 本府人民, 恐爲叛賊連累, 太半逃走爲白有去乙, 臣以權辭溫諭, 諭以'已殲巨魁, 罔治脅從之意'爲白良沙, 稍稍還集爲白乎旀。鍾城穩城人心段置, 亦未翕然鎭定, 頗有持疑顧望之端叱分不喩, 慶源座首鄭士麒及其弟士鳳段, 當初倭賊入北之時, 謀捉兵使以下欲爲迎降之計爲白如可, 臣入據鏡城之後, 八度徵兵, 拒逆不送爲白乎旀, 人心虜變鎭定防禦次, 以吉州赴戰爲白如乎, 富寧府使金範段, 會寧兼官, 以入送會寧爲白遣, 潼關僉使李應星·柔遠僉使李希良·訓戎僉使金磁·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 入送本鎭爲白乎矣, 人心虜情, 太半鎭定, 而鄭士麒耳亦, 道內巨惡, 以多植族黨奴使, 判官莫敢措手爲白去乙, 臣到本府, 捉致士麒士鳳及其黨魁慶興土兵崔松于行營, 幷只斬首梟示爲白遣, 鍾城通事安億壽段, 自前始叱侵虐藩胡爲白如乎節, 倭變之後, 國無紀律爲白乎去, 向入侵徵雜物, 無所不至爲白乎矣, 眼前通事, 以胡人告訴乙, 變詐誣傳爲白去乙, 臣觀其氣色詭秘, 親引中樞下良介, 問答以我國言語爲白乎矣, '六鎭倭變之後, 土兵侵虐, 釀成邊患, 大槩同然, 其中安億壽爲甚'是如爲白去乙, 卽欲斬徇, 懲一勵百爲白乎矣, 唯只下良介段置, 桀驁難側5)之胡, 以來訴我人爲白去等, 諸胡所見處, 輕易行刑, 恐妨國體爲白乎去, 卽加枷杻, 移囚富寧府, 以待巡察使處置爲白有齊。虜情段, 會寧所管, 時無叛狀, 鍾城段, 外親內疎, 所爲叵測爲白良置, 亦無顯然作賊之事, 穩城段, 當初倭變時, 始叱接置我國, 散民一不擄掠叱分不喩, 判官還鎭聞奇, 他胡所掠人物乙, 爲先刷還, 極爲可嘉爲白乎等以。臣到本府, 依他鎭例, 饋酒肉給塩斗外, 別引有功胡人, 退床饋酒, 加給塩斗, 諭以倭賊盡平之後, 賞職上京, 各別施行, 亦擧理開喩爲白有齊。慶源段, 頭頭酋長十餘人, 間間進告, 佯示向國之狀爲白良置, 府境諸胡, 皆已叛國乙仍于, 乍去乍來, 同心作賊, 判然無疑爲白乎矣。臣北行時, 開喩聽令次以來到爲在, 酋長學生幷二百餘名段, 自我招來叱分不喩, 彼亦應招歸順爲白有去等, 摘發隱惡, 治罪不當乙仍于, 依前饋贈, 喩以'賊胡, 自汝等所居處, 由入爲在如中, 國家問罪之時, 恐有俱焚之患, 守護進告等事, 各別盡心,' 亦嚴辭開喩爲白有齊。慶興段, 西水羅一堡疊入, 造山散民土兵, 咸德厚領率守城, 賊胡四度圍城, 不勝退兵叱分不喩, 賊胡部落一處乙, 乘虛焚蕩爲白有臥乎所。孤軍越境, 不出將令, 如此擧措, 雖似乖當, 叢爾孤城, 大盜隔絶, 勢未能及期節制事良中, 全城斬賊, 不失軍機, 實爲可嘉乙仍于, 同咸德厚, 因爲定將, 會寧海倉, 運米一百石, 輸送本堡, 使爲城守之粮爲白有齊。慶興府及所管造山·撫夷·阿吾地, 慶源所管乾元·阿山堡段, 自初不守, 賊胡恣意焚蕩, 往來不忌, 因爲賊路, 或自慶興海汀, 或自慶源地境入來, 橫行作賊, 擄掠山谷人畜, 極爲痛憤爲白良置, 六鎭精兵二百餘名, 至吉州赴戰, 加以倭寇之餘, 馬羣一空, 前日馳射之士, 今爲無馬之軍叱分不喩, 軍器段置, 盡爲倭人焚蕩, 至以長片箭, 束作火炬爲白乎旀, 避亂人民等持弓箭者, 盡爲倭賊殺戮乙仍于, 民間軍器, 幾盡埋置腐敗爲白乎等以, 據城防禦, 猶患不足, 涉遠追擊, 事勢極難乙仍于, 村居人民全數, 知委疊入城內, 俾免虜掠之患爲白如乎節段。吉州倭勢已縮, 六鎭胡亂漸熾, 不得已赴戰諸將中, 間間入送, 各其鎭將抄率精兵, 要路伏兵, 以絶橫行之路爲白有齊。大槩北道, 亦道理絶遠, 氷雪積塞之地, 距巡察使所在處, 十餘日程是白去等, 軍中機務, 一日萬變, 一依節制施行爲白在如中, 恐非兵家制變之道乙仍于, 其間急務段, 或有不報巡察使施行, 從後牒報爲白如乎節段, 巡察使節制內, '大將遆改, 捕亡將定體, 磨天嶺及端川等地, 率軍官進駐, 捕捉亡卒'亦爲白有在果。臣以幺麽小官, 未有寸功, 遽陞堂上, 天恩罔極, 尤不知死所。蹀血鋒刃, 有所不辭是白在果, 唯只吉州嶺東未掃蕩前段, 我軍北地亡卒, 似無逃向南關之理乙仍于, 先可留住軍中爲白有齊。臣以去年十一月二十一日, 遆大將爲白在如中, 十二月十四日, 備邊司移文內, '評事方行主將之令'是如爲白有臥乎所, 其間日數二十四日之久是白去等, 巡察使請罪狀啓, 時未達行在爲白有臥乎喩, 事涉可疑爲白乎旀, 會寧府使鄭見龍段置, 爲大將未滿一月, 遆易以兼節度使, 巡行六鎭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爲大將, 臣段只據北兵使節制, 任意北巡是如, 推考爲白乎旀, 各鎭將如茂山萬戶李蘭等, 無慮數十人, 各率本鎭土兵, 來會討賊事乙, 巡察使處當初始叱再再, 名錄牒報爲白有矣, 各堡鎭將乙, 幾盡遆易, 或一鎭堡將, 疊差二三人, 使將不知本任, 卒不知其將, 軍情搖漾, 士氣怠惰, 未知其由, 至爲悶慮, 欲報稟朝廷爲白良置, 擅自狀啓是如, 獲罪弦如, 不敢以聞爲白有如乎節, 前狀啓回送辭緣及備邊司關子五度, 不敢不答乙仍于, 自募軍功一等土及第車應轔乙用良, 依前由海路狀啓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二日。 성첩(成貼) 문서에 서압을 하고 관인을 찍어서 마무리하는 일. 또는 그 완성된 문서를 가리킨다. 側은 測의 오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