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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翁先生祝文 同人道學文章一家三傳立祠并享罕古美全毁院復舊義在尊賢今更奉安位序從前俎豆斯陳告儀式虔庶幾格思顧歆吉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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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坡先生祝文 同人忠竭三亂孝先百行配享竹院與四賢并毁院復設新樑告完同堂異位奉以妥安攝以威儀濟濟冠襟薦裸如禮是顧是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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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設後齋任錄【庚子八月 日】 成造有司崔圭亨 字泰元 朗州人 居鳩林成造有司愼載範 居昌人 居永保成造有司崔洪燮 海州人 居鳩林辛丑十月十三日禮成院 長 崔圭亨 【朗州人】 居鳩林掌 議 愼載範 【居昌人】 居永保有 司 崔洪燮 【海州人】 居鳩林題 主 朴漢珪 【咸陽人】初獻官 崔定燮 【海州人】 居鳩林崔圭顔 【全州人】 居永保獻 官 曺在淵 【昌寕人】 居華山執 禮 愼元範 【居昌人】 居永保祝 崔日錫 【朗州人】 居竹亭奉 香 文永來 【南平人】 居場巖奉 爐 閔炳錫 【驪興人】 居葛谷司 尊 郭尙欽 【海美人】 居鳩林奠 爵 鄭价采 【河東人】 居草谷贊 引 崔奇燮 【慶州人】 居光州謁 者 愼載範 【居昌人】 居永保壬寅十月十九日院 長 柳增淵 文化人 居茅山掌 議 李萬宇 全州人 居新巢有 司 金永達 光山人 居江亭初 獻 全鍾夏 天安人 居奄吉亞 獻 崔圭珍 全州人 居鳩林終 獻 李教學 全義人 居新村執 禮 文義善 南平人 居場巖祝 玄永福 星山人 居廣巖陳設監 朴南基 咸陽人 居鳩林奉 香 魯聖煥 江華人 居竹亭奉 爐 曺在和 昌寕人 居鳩林司 尊 朴雲在 后孫 居鳩林奉 爵 朴錫鎭 后孫 居鳩林奠 爵 朴萬在 后孫 居康津謁 者 朴亨在 后孫 居月巖賛 引 朴文在 后孫 居長興癸卯十月十五日院 長 柳增淵 文化人 居茅山掌 議 李公雨 慶州人 居望湖有 司 金相燁 金海人 居華巢初獻官 朴南七 密陽人 本郡守朝陽齋影堂初獻官 愼官晟 居昌人 居永保亞獻官 朴基柱 咸陽人 居舟巖終獻官 李在憲 咸平人 居晴峴執 禮 鄭淳完 河東人 居坪里祝 李相睦 慶州人 居望湖陳設監 朴燦萬 后孫奉 香 朴明辰 密陽人 居終吾奉 爐 崔文錫 朗州人 居鳩林司 尊 朴錫貴 后孫奠 爵 金瑛炫 金海人 居華巢謁 者贊 引 朴亨在 后孫甲辰十月十一日院 長 柳增淵 文化人 居茅山掌 議 柳寅興 文化人 居茅山有 司 崔圭太 朗州人 居鳩林初 獻 李基泳 原州人 居光州朝陽齋獻官 愼文晟 居昌人 居船巖亞 獻 朴麟煥 成陽人 居康津終 獻 梁晶河 濟州人 居錦山執 禮 金鶴炫 金海人 居華巢乙巳十月十七日院 長 崔定燮 海州人 居鳩林掌 議 文永萬 南乎人 居場巖有 司 全錫奎 天安人 居奄吉初獻官 金榮錫 光山人 居山溪朝陽齋初獻官 朴希圭 咸陽人 居柹木亞 獻 金炳秋 密陽人 居蓮汀終 獻 李基範 全義人 居龍山執 禮 文泰亨 南平人 居栗山祝 林泰壕 善山人 居蘇山陳設監 韓福相 善山人 居坪里丙午十月十三日院 長 崔定燮 海州人 居鳩林掌 議 崔炳亮 全州人 居竹亭有 司 金甲洙 光山人 居江亭初獻官 崔秉燮 全州人 居務安朝陽齋初獻官 金陽均 天安人 居奄吉亞獻官 玄宗鎬 星山人 居廣巖終獻官 朴相球 咸陽人 居上月執 禮 梁榮翰 濟州人 居永保祝 柳秉珍 文化人 居茅山奉 香 崔圭奉 朗州人 居鳩林丁未十月千八日院 長 崔秉燮 全州人 居務安掌 議 全陽均 天安人 居奄吉有 司 愼鏞俊 居昌人 居永保初獻官 崔暻默 居鳩林朝陽齋初獻官 金鳯洙 光山人 居江亭亞獻官 全相德 金海人 居華巢終獻官 朴時煥 咸陽人 居康津執 禮 崔雲燮 海州人 居鳩林祝 鄭仲采 河東人 居草谷奉 香戊申十月十四日院 長 崔洪燮 海州人 居鳩林掌 議 崔圭東 朗州人 居鳩林有 司 鄭芝采 河東人 居茅山初獻官 愼載範 居昌人 居永保朝陽齋初獻官 鄭淳尙 河東人 居草谷亞獻官 曺奎煥 昌寕人 居鳩林終獻官 朴珉洙 咸陽人 居舟巖執 禮 崔圭東祝 魯炳燦 咸平人 居長福奉 香 金達浩 密陽人 居江亭己酉十月十九日立碑時院 長 金永逹 光山人 居江亭掌 議 金鶴炫 金海人 居華巢有 司 曺永鉉 昌寧人初獻官 李泰烋 原州人 居海南朝陽齋初獻官 金永逹 光山人 居江亭亞獻官 柳寅哲 文化人 居茅山終獻官 朴明鎭 咸陽人 居鰲山執 禮 金應錫 光山人 居羅州祝 朴基甫 咸陽人 居舟巖祝 曺濟鉉 昌寧人 居華山奉 香 金璇泰 金海人 居夢海奉 爐 鄭京俊 河東人 居草谷庚戍十月十五日院 長 金永逹 光山人 居江亭掌 議 崔和烈 全州人 居永保有 司 崔英巖 海州人 居鳩林初獻官 柳寅興 文化人 居茅山朝陽齋初獻官 崔圭桓 全州人 居永保亞獻官 全東洙 天安人 居月山終獻官 朴興圭 咸陽人 居柹木執 禮 全秉鉉 金海人 居華巢祝 玄章鎬 星山人 居渴馬奉 香 金孟俊 光山人 居舟巖奉 爐 愼治範 居昌人 居永保司 尊奉 爵奠 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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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恨先生間竹亭原韻 東卧竹亭西泛舟南溪濯足北園遊平生浩蕩不羈志南北東西任去留脩篁簇簇送微凉竹葉樽前自倒觴醉引靑奴同一夢愛他成癖入膏盲乘間西下坐垂綸潑潑江魚碧玉鱗適志平生無競貴笑他終日走紅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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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中作 細想人間事顔彭共一梭愁來無與敵要爾作干戈傾盡三杯醉夢長萬愁千恨此時忘赤城羽客如相見不問仙方問酒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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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設禮成時到記【辛酉十月十三日】 崔圭亨 崔秉直 崔洪燮 梁永進 朴柱天 朴明鎭 柳珏羲崔圭顏 崔暻默 朴勝烈 梁晶河 朴珉洙 朴在麟 李璟凾愼載範 崔正熙 玄宗鎬 朴奎祥 朴致煥 朴明煥 李公雨曺泰煥 崔東炫 梁基煥 朴温煥 朴基柱 朴麟煥 李相揆李鍾錄 崔日錫 全基奉 金相基 鄭燦玉 朴學實 李來憲李鐘律 閔炳錫 全世奉 黃善澤 朴福潤 朴勝泰 崔明贊魏仁煥 郭尙欽 曺南煥 尹相根 金丁鉉 徐元善 李致淳鄭甲采 鄭价采 曺喜敬 朴判述 金在萬 徐点成 李聖緖鄭奎采 崔其? 崔宗圭 朴点洙 崔三燮 徐龍澤 金炳夏鄭淳尙 崔永變 金逹鎬 金鶴鎔 崔千變 徐上五 曺一鉉金炳秋 崔贊燮 郭仁采 徐允基 金俊煥 梁在日 金炳泰金基泰 曺鳯植 崔興默 魯炳燦 曺圭泰 金炳憲 崔雲燮崔圭喆 崔興變 曺在麟 林平準 金永文 全順玉 崔應燮崔秉甲 金容來 文永洙 玄基煥 文永來 魯勝淑 曺在淵愼元範 崔彩鎬 崔圭太 鄭淳浣 曹永鉉 曺鳯巖 曺喜天崔秉哲 崔完植 崔允鎬 崔在東 崔致萬 玄永焄 全東洙崔三燮 崔勳燮 申興均 吳洪根 崔平默 李成憲 金相萬申仲均 崔五奉 金相彦 吳義善 崔明圭 崔在淵 韓福相崔奎植 愼德鏞 鄭成采 宋達鉉 崔根植 崔在甲 金容五朴埰鉉 朴春石 申德均 崔玉燮 李燦宇 曺甲鉉 申明述曺二萬 魯東鉉 金貴泰 崔圭權 李德憲 崔在明 崔乃煥崔宗仁 金同洙 崔在天 崔致燮 崔在成 魯俊太 林有奉文明鎭 金永鍾 崔点圭 崔 洪 崔準基 李南玉 朴勝天金弘九 金容碩 崔在玉 曺在麟 金日洙 崔京遠 朴勝用吳昌桓 曺紅点 愼鏞玳 曺雙鉉 崔錫天 崔一黙 朴勝彦文永冕 金同煥 金雙大 崔在樹 吳仲善 崔圭錫 崔龍默郭斗秀 崔權變 郭同洙 崔善雄 金吉洙 李基範 崔圭童曺生鉉 尹東炫 崔栗鎬 崔平洙 李英魯 崔在京 徐圭奉曺在悅 崔龍準 崔炳吉 崔在旻 崔吉鎬 崔善夢 崔昌動崔成圭 金智煥 崔炳龍 崔黔圭 崔吉甫 崔東圭 崔哲鍾崔在益 金在燮 愼錫範 崔文錫 玄永華 金淡進 崔勢炫曺侯鉉 崔在燮 崔秉玉 崔洪烈 崔在出 崔子化 崔壽童金但生 尹喜烈 崔圭正 金在千 申文宗 崔在洪 金淳地崔文鎬 崔朔金 崔容三 金容來 曺官鉉 崔南斗 曺在洙林正龍 崔秉喆 林正洙 崔珉鎬 鄭有采 崔秉圭 崔南圭趙千樹 崔在澤 曺喜鎰 崔吉永 崔陽奎 尹泳植 原林基奉 李宗出 曺子鉉 金福洙 崔焄燮 徐錦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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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成錄 崔圭亨【朗外人】 金五百圜 居鳩林 全鐘甫【天安人】 金貳千圜 居虎洞崔圭珍【朗州人】 金壹千圜 居鳩林 曺喜天【昌寧人】 金壹千圜 居鳩林崔洪燮【海州人】 金壹千圜 居鳩林 魯孝漢【江華人】 金壹千參百圜 居竹亭曺泰煥【昌寕人】 金壹千圜 居鳩林 金永文【金海人】 金壹千五百圜 居坪里崔東炫【朗州人】 金壹千圜 居鳩林 崔炳亮【全州人】 金五百園 居竹亭崔陽奎【全州人】 金貳千圜 居鳩林 全平洙【天安人】 金壹千圜 居虎洞崔圭喆【朗州人】 金壹千圜 居鳩林 崔在珙【全州人】 金五百圜 居竹亭崔暻默【朗州人】 金五百圜 居鳩林 曺升煥【昌寕人】 金五百圜 居梅月金容來【光山人】 金壹千圜 居鳩林 崔定燮【海州人】 金五百圜 居鳩林崔炳鎰【全州人】 金五百圜 居竹亭 崔秉午【海州人】 金壹千圜 居鳩林朴采鉉【密陽人】 金五百圜 居鳩林 玄成鎬【星山人】 金壹千圜 居鳩林郭仁采【淸州人】 金五百圜 居坪里 崔圭永【朗州人】 金壹千圜 居鳩林崔容三【朗州人】 金壹千圜 居光州 崔圭顔【全州人】 金壹千圜 居永保崔秉甲【全州人】 金壹千圜 居鳩林 利川徐氏【門中】 金參千圜 産骨亭全順玉【天安人】 金壹千圜 居龍塘 光山金氏【門中】 金貳千圜 茅亭曺秉倫【昌寧人】 金參千圜 居本邑 河東鄭氏【門中】 金貳千圜 草谷鳩林大同禊 金七萬圜 昌寕曺氏【門中】 金貳千五百圜 鳩林咸陽朴氏【門中】 金壹萬圜 舟巖 平山申氏【門中】 金壹千五百圜 茅亭咸陽朴氏【門中】 金壹萬圜 鰲山 耽津崔氏【門中】 金壹千圜 東湖朗州崔氏【門中】 金壹萬圜 鳩林 朴希圭【感陽人】 金壹千圜 居柿木海州崔氏【門中】 金壹萬圜 鳩林 曺喜珍【昌寕人】 金五百圜 居鳩林全州崔氏【門中】 金五千圜 永保 朴昌洙【咸陽人】 金壹千圜 居竹亭全州李氏【門中】 金五千圜 聖才 金平三【金海人】 金貳千圜 居三湖潘南朴氏【門中】 金參千圜 坪里 金相德【金海人】 金五百圜 居華巢昌寕曺氏【門中】 金參千圜 鳩林 朴正洙【潘南人】 金參百圜 居坪里金海金氏【門中】 金參千圜 華巢 崔子化【朗州人】 金五百圜 居竹亭梁在彦【濟州人】 金貮千圜 居務安 鄭淳完【河東人】 金五百圜 居坪里曺一鉉【昌寕人】 金五百圜 居鳩林 金達浩【密陽人】 金壹千圜 居松亭玄永昌【星山人】 金五百圜 居鳩林 曺鳯植【昌寧人】 金參百圜 居上月朴基柱【咸陽人】 金貮千圜 居舟巖 金丁炫【淸州人】 金壹千圜 居永善朴珉洙【咸陽人】 金壹千圜 居舟巖 金在萬【金海人】 金參百圜 居坪里魏仁煥【長興人】 金壹千圜 居長興 梁永進【濟州人】 金五百圜 居錦山文永來【南平人】 金五百圜 居場巖 梁晶河【濟州人】 金五百圜 居錦山崔日錫【朗州人】 金五百圜 居竹亭 韓福相【淸州人】 租五斗 居坪里閔丙載【驪興人】 金五百圜 居葛谷 玄宗鎬【星山人】 金五百圜 居鶴溪黃重澤【紆州人】 金壹千圜 居牙川 吳基東【同福人】 金五百圜 居新安朴奉洙【咸陽人】 金五百圜 居竹亭 崔興燮【海州人】 金五百圜 居鳩林朴孟致【咸陽人】 金五百圜 居竹亭 崔千燮【海州人】 金五百圜 居鳩林金相基【金海人】 金五百圜 居鳩林 金炳秋【密陽人】 金五百圜 居蘆洞尹相近【海南人】 金五百圜 居白巖 林奉文【平澤人】 金五百圜 居上月朴少順【全武永毋】金五百圜 居泉海 朴學實【密陽人】 金壹千圜 居太白梁琪煥【濟州人】 金五百圜 居鳯湖 申明述【平山人】 金壹千圜 居茅亭崔應燮【海州人】 金五百圜 居鳩林 金在千【金海人】 金五百圜 居夢海金在玉【密陽人】 金壹千圜 居蘆洞 崔龍準【朗州人】 金五百圜 居鶴巖金順培【金海人】 金壹千圜 居龜山 曺雙鉉【昌寧人】 金五百圜 居鳩林崔吉範【朗州人】 金參百圜 居上月 朴逹燮【咸陽人】 金五百圜 居鳩林曺圭泰【昌寧人】 金壹千圜 居長善 崔珉鎬【朗州人】 金五百圜 居鳩林文明進【南平人】 金五百圜 居燕巢 林平準【善山人】 金五百圓 居草池金琪泰【金海人】 金壹千圜 居夢海 全鍾夏【天安人】 金壹千圓 居奄吉金炳泰【密陽人】 金五百圜 居蘆洞 全錫奎【天安人】 金壹千圓 居奄吉全鐘萬【天安人】 金壹千圓 長川校敎員一同 柳寅興【文化人】 金貳百圓 居茅山金鶴炫【金海人】 金壹千五百圓 居華巢 黃善澤【紆州人】 金壹百圓 居西湖崔元溥【海州人】 金壹千圓 居京城 崔 橚【全州人】 金壹百圓 居光州柳增淵【文化人】 金壹千圓 居茅山 李錦信【 人】 金壹百圓 居靈光金一龍 金參百圓 居京畿 朴奉春【咸陽人】 金壹百圓 居康津李載憲【咸平人】 金參百圓 居晴峴 梁榮翰【濟州人】 金貳百圓 居永保尹在明【海南人】 金壹千圓 民議員居海南 金相德【金海人】 金五百圓 居華巢金俊淵【金海人】 金壹千圓 民議員 吳命求【同福人】 金貳百圓 居鳩林朴南七【密陽人】 金壹千五百圓 本郡守 宋達鉉【礪山人】 金貳百圓 居草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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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室 皇鑑孔昭國誣洞釋小子何幸事光簡策不忘其初禮宜顯親有事太廟徽章備陳念茲大慶祖宗之佑攝薦廣牡尙冀保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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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에서 회포를 서술하다 2수 禁中述懷【二首】 성군의 은혜 크건만 이 몸은 미천하니보답하려는 마음 지녔으나 일마다 어긋나네궐 안에서 꽃을 보니 해를 향하는 것 어여쁘고산속에서 약초를 캐니 돌아가고픈 생각 떠오르네58)노년에 시 읊조림은 가을 벌레가 울듯 괴롭고만년의 계책 저녁 새가 돌아가듯 재촉하네나월과 송운을 밤마다 꿈꾸니59)꿈꿀 땐 그곳이건만 깨고 나면 아니구나홀을 괴고 생각에 잠겨 푸른 산 마주하니60)내 어찌 세상을 등졌으랴, 세상이 나와 어긋난 게지광망(狂妄)한 뜻은 나는 나라고 자신했으나61)졸렬한 계책은 어찌하여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는가허로는 구름이 북쪽으로 간다는 시구 읊조렸고62)소옹은 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단 말 마음으로 좇았지63)나그네 감흥은 고금에 다를 바 없으니어찌 유독 도연명만 지난날 잘못됨을 깨달았으랴64) 聖君恩重此身微欲報心將事事違禁裡看花憐向日山中採藥憶當歸老吟苦作秋蟲咽晩計催如夕鳥飛蘿月松雲夜夜夢夢時方是覺時非柱笏凝思對翠微吾何違世世吾違狂圖自信我爲我拙計云胡歸不歸許老句吟雲北去蘇翁心逐鵲南飛羈人感興無今古豈獨淵明悟昨非 궐……떠오르네 '향일규(向日葵)'라는 꽃과 '당귀(當歸)'라는 약초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나월과……꿈꾸니 꿈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나월(蘿月)은 등라(藤蘿) 사이에 뜬 달이고, 송운(松雲)은 푸른 소나무와 흰 구름으로, 고향의 풍광이나 은자의 처소를 의미한다. 홀을……마주하니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모습을 말한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는 성품이 소방(疏放)하고 구속을 싫어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때 업무를 보라는 환충에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홀(笏)로 턱을 고이고서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이는구나."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광망(狂妄)한……자신했으나 유하혜(柳下惠)의 고사를 인용하여, 관직 생활의 적극적 포부를 말한 것이다. 유하혜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로, 벼슬길에 나가서는 어짊을 숨기지 않아 반드시 그 도리를 다하였고,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액을 당하여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我爲我], 네 비록 내 곁에서 옷을 걷고 몸을 드러낸들 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허로는……읊조렸지 허로는 당나라 시인 허혼(許渾)을 가리킨다. 허혼의 〈서울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두 도읍의 벗에게 부치다[京中閒居, 寄兩都親友]〉 시에 "만남과 이별은 때가 있으니 구름 북쪽으로 가고, 부침은 헤아릴 수 없으니 강물 동쪽으로 흘러가네.[聚散有期雲北去, 浮沈無計水東流.]"라고 하였다. 소옹은……좇았지 소옹(蘇翁)은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조조(曹操)가 〈단가행(短歌行)〉에서 "달이 밝아 별이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날아간다.[月明星稀, 烏鵲南飛.]"라고 하여 전란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상황을 비유했는데, 훗날 소식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으로 날아간다고 한 것은 조맹덕의 시가 아닌가?[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라고 하였다. 도연명만……깨달았으랴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길을 잘못 들긴 했어도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지난날은 잘못된 것을 깨달았네.[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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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1595, 선조28) 추석에 온성에서 돌아와 거산역에 이르러 이덕재를 만나다 乙未秋夕 還自穩城 到居山驛 逢李德哉 오동나무 잎 막 흩날려 가을과 여름이 나뉘니고향 소식 어떻하면 들을 수 있을거나어렴풋한 꿈속에 지당에서 청초를 읖조리고91)돌아가고픈 마음에 변방에서 흰 구름 바라보노라92)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이 오래 객지살이 하였고93)허리에 칼을 비껴차고 오랫동안 종군했네하늘에 비바람 가득한 변방 길에서술자리에서 얼마나 다행히도 그대를 만났는가 梧葉初飛秋夏分故園消息若爲聞池塘殘夢吟靑草嶺海歸心望白雲囊乏一錢長作客腰橫三尺舊從軍滿天風雨關山路樽酒如何幸見君 어렴풋한……읊조리고 남조 시대 송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시상(詩想)에 골몰하다가 꿈속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蓮)을 보고 나서 "못 위에 푸른 풀이 났다.[池塘生靑草.]"라는 시구를 지었다. 《南史 謝惠連列傳》 여기서는 고향의 형제 또는 친족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흰 구름 바라보노라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법조(幷州法曹)로 부임하였을 때 그의 부모가 남쪽 하양(河陽) 땅에 있었는데, 적인걸이 병주의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남쪽 하늘로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나의 어버이가 저 구름 아래 계신다."라고 하고, 한참 동안 흐느꼈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狄仁傑列傳》 주머니에……객지살이 진(晉)나라 완부(阮孚)의 고사를 차용하게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완부가 검은 주머니[皂囊] 하나를 차고 회계(會稽) 지방을 유람할 때, 한 나그네가 완부에게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묻자, 완부가 "다만 일전으로 주머니를 지키게 하노니, 주머니가 텅 비면 궁핍할까 염려해서이다.[但有一錢守囊, 囊空羞澁.]"라고 하였다. 《山堂肆考 卷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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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 송□□ 을 축하하는 문서 賀咸鏡道觀察兼巡察使宋 名缺 狀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림을 생각하는 법국운이 회태의 시기147)를 만났어라.겨울이 지나 봄이 오니천도는 건인의 달148)이 되었네.북쪽 땅으로 매서운 추위를 보내니남양에 아름다운 기운이 더하였어라.삼가 생각건대,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고문과 무를 구비하였네.모친의 사랑 임금의 은총에색동옷 입고 황금 띠를 찼다네.지방관과 군용은감당149)에 집을 짓고 세류영150)에 주둔하리라.삼양의 절기151)에만복을 함께 하리라.삼가 생각건대, 다행이도 유문의 하늘152)을 이면서정령위의 고을153)을 지키게 되었네.오두미를 받으니비록 도잠이 허리를 굽힌 것154)처럼 부끄럽지만한 지역의 풍속을 보니송경의 다리155)를 만난 것 같아 기쁘네. 亂極思治國運當回泰之期冬後有春天道屬建寅之月送寒威於北陸增佳氣於南陽伏惟忠孝雙全文武俱備母恩君寵着班衣而帶黃金使華軍容舍甘棠而屯細柳三陽之節萬福攸同伏念幸荷孺文之天忝守令威之郡受五斗米雖愧陶潛之折腰觀一方風欣逢宋璟之有脚 회태의 시기 비색(否塞)한 운세가 끝나고 태평한 운세가 돌아온다는 뜻으로, '태(泰)'는 《주역》의 괘명(卦名)인데 건하곤상(乾下坤上)으로 천지 음양의 기운이 조화되어 만물이 태평해지는 상(象)이다. 건인의 달 고대의 역법(曆法)에서 북두성(北斗星)의 두병(斗柄)이 십이진(十二辰) 가운데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때를 말한다. 하(夏)나라의 역법에서는 이때를 정월로 삼았는바, 후대에는 정월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감당 《시경 소남(召南)》 〈감당(甘棠)〉에 "무성한 팥배나무를, 자르고 베지 말라. 소백이 초막으로 삼으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하였다. 이는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며 문왕의 정교(政敎)를 펼쳤는데,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 나무를 베지 말자며 읊은 노래이다. 흔히 지방장관의 치덕(治德)을 칭송할 때 '감당'이란 말을 사용한다. 세류영 세류영 : 한 문제(漢文帝)가 여러 군영(軍營)을 순찰하는 중, 다른 곳에서는 모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지만, 주 아부(周亞夫)의 세류영(細柳營)에 갔을 때는, 군문 도위(軍門都尉)가 장군의 영(令)이 없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절(使節)을 보내어 주 아부에게 통한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한다고 하여, 문제가 말고삐를 당겨 천천히 다녔고, 본영으로 가 주 아부와 군례로 서로 인사한 다음 돌아갔는데, 문제는 아부 군중의 이러한 일을 도리어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ㆍ《서한기(西漢記)》. 삼양의 절기 삼양(三陽)의 달인 정월을 이름. 《주역(周易)》에서 정월(正月)이 태괘(泰卦)가 되는데, 태괘는 삼양(三陽)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른다. 유문의 하늘 유문은 후한(後漢) 소장(蘇章)의 자(字)이다. 그가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을 때 친구가 청하 태수(淸河太守)로 있었는데, 소장은 그의 죄를 알고서 불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즐긴 뒤에 "오늘 저녁 소유문이 옛 친구와 술을 마시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내일 기주 자사로서 일 처리를 하는 것은 공법(公法)이다."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태수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一天]뿐이지만 나만은 하늘이 둘[二天]이다." 하였다. 그다음 날 소장이 친구의 죄를 들어 징계하니, 온 경내가 숙연해졌다. 《後漢書 卷61 蘇章列傳》 정령위의 고을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된 뒤, 천 년이 지나 학으로 변신하여 요동 성문 앞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았다. 《搜神後記 卷1》 함경도 지방이 요동에 가까워 이렇게 말하였다. 도잠이……것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있을 적에, 군(郡)에서 파견한 독우(督郵)의 시찰을 받게 되었는데,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도잠이 탄식하면서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릴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라고 하고는, 즉시 수령의 인끈을 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송경의 다리 당(唐)나라 송경(宋璟)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봄'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開元天寶遺事 有脚陽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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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 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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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으로 함경도의 열읍의 수령과 사민들에게 알리는 격문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 -이 글은 충추 허창의 집에서 얻었다. 대개 허창의 고조인 부사 허제는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선생의 이 격문과 〈배한신대장제(拜韓信大將制)〉를 썼는데, 그의 자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해 내려왔다. 작품의 끝에 쓰기를 '정 아무개의 두 번째 격문.'이라고 했으니, 첫 번째 격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서 아울러 간행하여 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못 한스럽다.-대개 듣건대, 충신은 몸을 바쳐 주군에게 보답하고지사는 때를 살펴 공을 도모하네.시험 삼아 보건대, 성조의 신민 가운데그 누가 어지러운 시기에 충성을 바쳤는가.생각해보면, 나라를 세운 지 이백 여 년에왕위를 전한 것이 열한 임금이네.은나라 선대 철왕보다 많아대대로 덕을 잃지 않았으며주나라의 문교를 숭상하여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네.예악의 문치라전쟁이 멈추었네.어찌 생각이나 했으리, 바다 건너 왜구가감히 우리나라를 업신여길 줄을.처음에는 통신사를 보낸다는 감언을 하였고끝내는 길을 빌린다는 어려운 청156)을 내새웠어라.교린은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상국을 범하는 것을 어찌 따르리오.우리가 전쟁을 부른 것이 아니오저들이 독을 퍼트린 것이라.이에 온 나라를 동원하여이에 우리 영토를 침범하였네.만여 척의 배를 연결하니긴 창이 햇빛이 반짝였어라.접전을 벌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영가 연간에 남쪽으로 피난 간 것157)처럼 참혹하고-도(渡)는 거성으로 아마도 옮겨간다는 의미나 달아난다는 의미인데, 자세하지 않다.-파죽지세로 도성까지 몰아닥치니천보 연간에 서쪽으로 파천한 것158)과 흡사하였네.도정에서 군대를 버리고 간 이보가 있었지만159)옹구에서 병사를 일으킨 장순160)은 없어라.방태위161)는 여러 왕자를 세우자는 계책을 아뢰어왕자를 여러 도에 나눠 보냈네.악소보162)는 일찍 태자를 정하자는 계책을 올려동궁에 민심을 모았네.우리 북방은왕업이 일어난 곳이요천험의 요새라.백성들은 아들 같이 사랑해주는 은덕을 품어서응당 상나라를 떠받드는 것163)과 같이 하네.변방 사람들이 알을 품어주는 듯한 사랑에 감동하니어찌 본조를 잊으랴.지리를 보면 높은 산에 험준한 고개요물산을 보면 건장한 말과 용맹한 사내라.지금 장성한 왕자가 와 있으니늙은 재상이 보호하고 있네.곽자의164)는 북방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으니감히 근왕에 게으르랴.충사도165)는 산서의 건아를 거느렸으니응당 먼저 적에게 내달려 가야 하네.한번 북령의 험지를 잃고 나서서쪽 길이 통하지 않아소릉의 규합166)이 없어졌으니제후 그 누구와 함께 걱정하랴.하양에서 임금 위해 달려감이 없으니167)관군의 지킴을 내 어디에서 구할까.진의중은 오늘밤 도망을 갔고168)송의 화원은 한밤중 들어가 힘든 상황을 고하였네.169)말을 하고보니 통곡하고픈데저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고.성상께서 어진 이를 고르고 능력 있는 이에게 일을 맡겨문무를 숭상하였으니나라 망하는 경계를오히려 태평한 시절에 다하였으며병사를 잘 다스리라170)는 가르침을항상 평안한 때에 강론하였네.장차 하늘이 우리 국운을 끊으려 함인가아니면 사람의 본성이 절로 그 떳떳함을 잃은 것인가.눈을 들어 바라보니 위국의 산하가참으로 보배 아님을 알겠어라.171)마음이 아프니, 당나라의 번진이어찌 신하가 되리오.공들은 혹 왕실의 지친이요혹 훈벌의 자손이며혹은 재상의 반열에서 관찰사가 되었고혹은 시종에서 지방관의 부신을 찼네.고관으로 총애하니낭심172) 같은 충신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오두터운 봉록을 하사하니주여숙173)을 알지 못했던 것과는 다르네.황금 인장 옆에 차고붉은 깃발 세우니그보다 큰 영광이 없어라.붉은 마음 열어서흰 칼날도 무릅쓰니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너희들 군민과 그 부로들에게 효유하노니선대왕들의 유택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반드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 하노라.군신간의 대의가 아직 남아 있으니절로 같은 생각을 지니고서 응하는 자가 있으리.맹명은 세 번 패한 이후에 공을 세웠으니174)뒤의 일이 그 앞의 허물을 덮을 만하네.소강은 십리 땅에서 왕업을 일으켜작은 고을에서 큰 공적을 도모하였어라.175)생각건대, 저 왜적은무도함으로써인을 지닌 우리를 공격하였네.그 형세를 비교하면 저들은 객이 되고그 말을 따져보면 우리가 곧도다.비록 독사처럼 독을 퍼뜨릴지라도반드시 고래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요176)천도로써 말하자면회오리바람과 소나기는 아침나절도 못가고매서운 추위 다음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은 절로 차례가 있네.인도로써 말하자면무력를 믿고 잔인함을 편하게 행함은 망하는 도요군대를 내달려 깊이 쳐들어옴은 패할 형세라네.천도와 인도에 비춰 따져보면승패를 헤아릴 수 있어라.이에 내 편폭의 격문을 날려우리 동맹에게 고하노라.임금의 수레 어디로 갔는가문천상처럼 들어와 호위하는 이 보이지 않고왕성은 누가 지키는가종택177)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어라.조정에서 신하를 대하는 것이 어떠하기에신하들이 조정에 보답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귀한 바는 다만 의리니사랑할 대상이 임금이 아니랴.심산유곡에서혹 한 때의 목숨을 건질지언정청천백일 아래한 평생의 몸을 용납받으랴.아! 너희 부로들아나라가 망하면 집안은 온전할 수 있으며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이 어디를 가랴.너희 자제들을 간곡히 타일러서우리 국가를 저버리지 말라.공업을 이룰 수 있다면장상도 어찌 따로 정해짐이 있으랴.더구나 지금 하늘이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는데욕수178)가 가을을 맡았네.북쪽 지방은 일찍 추워남풍이 기세를 다투지 못하네.말은 살지고 활은 굳세어전사는 용맹을 떨칠 마음이 솟구치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179)적들은 승리에 익숙한 기운이 꺾였네.우리들이 작은 마을에서 충신한 이들을 모아한 지역에서 의열을 격려하노니힘이 약하고 성이 외로워비록 만전의 형세는 없더라도명분이 바르고 말이 옳으니한번 승첩의 공훈을 기약하노라.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180)원컨대 부섭의 강개함181)을 본받으시라.제공은 각자 병사와 전마를 거느리고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라.군상의 차등은조정에서 자세히 살필 것이라.아녀자처럼 연연하여끝내 장부의 웅도를 그르치지 말라.오호라! 태산과 홍모에 경중을 잘 살펴서182)강의 물고기와 곰발바닥에 취사를 정해야 하네.183)처자에게 죽음의 죄를 끼치지 말고영원히 자손에게 영광을 끼칠 것이라.나라의 법전이 엄격하니내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모두들 일심협력하여격문을 어기지 말라. 【此文得於忠州許昶家. 蓋昶之高祖府使稊善書, 嘗寫先生此檄及拜韓信大將制, 其子孫珍藏流傳矣. 章末書云, 鄭某再檄, 其有初檄明矣. 無由求得幷刊而傳, 殊可恨也.】蓋聞忠臣捐軀而報主志者相時而圖功試觀聖朝之臣民孰效亂日之忠志洪惟立國二百載傳序十一君多殷先哲王世無失德右周家文敎人不知兵禮樂文哉干戈休只豈意海寇敢侮我邦始有通信之甘言終發借途之難請交鄰猶可爲也犯上豈能從乎非我召兵自彼生毒乃擧其國乃侵于疆萬艘連環長戈耀日交鋒未浹于旬朔禍慘永嘉之南渡破竹已及於都城事迫天寶之西幸都亭有委師之夷甫雍丘無起兵之張巡房太尉陳衆建之謀分王子於諸道岳少保獻早定之策係民望於東宮惟我北方王業攸基天險之地民生懷子惠之德應知戴商蕃種感卵4)育之仁豈能忘漢地利則高山峻嶺物產則健馬勇夫今者長君來臨老相保護郭子儀擁朔方之精卒敢怠勤王种師道領山西之健兒宜先赴敵一自北嶺失險西路不通邵陵無糾合諸侯誰則同恤河陽絶奔問官守我之何求陳宜中有今日之逃宋華元告半夜之病言之可哭彼其何心聖上簡賢任能崇文尙武其亡之戒尙軫於豐豫之時克詰之謨恒講於恬嬉之日將天意欲絶我寶命抑人性自失其秉彝擧目魏國之山河誠知非寶痛心唐家之藩鎭何用爲臣公等或王室之親或勳閥之冑或自宰列而建節或由侍從而佩符寵以高官非狼瞫之見黜食以厚祿異柱厲之不知橫黃金建紅旗榮亦莫大披赤心冒白刃死何敢辭諭爾軍民曁厥父老祖宗之遺澤不斬必欲一擧以殲之君臣之大義猶存自有同聲而應者孟明得功於三敗後事可掩其前愆少康興業於一成大勳庶圖於小邑惟彼倭賊以其無道讐我有仁較其勢則彼爲之賓軌其辭則我爲之直雖肆蛇虺之毒必受鯨鯢之誅以天道言之飄風驟雨不終朝沍寒陽春自有序以人道言之阻兵安忍亡之道懸軍深入敗之形究諸天人卜玆勝敗飛吾片幅告我同盟乘輿何歸未見天祥之入衛王城誰守不聞宗澤之過河朝廷之待臣子者何如臣子之報朝廷者若是所貴惟義可愛非君窮谷深林或可偸一時之命靑天白日其能容百年之身嗟汝父老國破家可全父在子焉往敦諭爾子弟無負我國家功業可以成將相寧有種矧今皇天悔禍蓐收行秋北地早寒南風不競馬肥弓勁士奮賈勇之心鶴唳風聲敵摧狃勝之氣某等鳩忠信於十室激義烈於一方力弱城孤雖無萬全之勢名正言順可期一捷之勳勿以賀蘭之猜疑願察傅燮之慷慨諸公各領兵馬克期掃淸軍賞等差朝旨詳實莫以兒女之戀終誤丈夫之圖於乎審輕重於泰山鴻毛定取舍於河魚熊掌罔貽妻孥之戮永遺子孫之榮國典有嚴余言不再咸一心力無違檄文 길을……청 1591년 왜(倭)의 관백(關白)인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고 하였다. 영가……것 서진 영가 말년에 흉노가 한(漢)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뒤 낙양(洛陽)을 함락시켜 결국 서진(西晉)이 멸망하였다. 종친인 사마예가 양쯔강 남쪽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피난을 온 교성(僑姓)과 원래 강남에서 살았던 오성(吳姓)에게 추대를 받아서 동진을 세웠다. 천보……것 당 현종 때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을 갔었다. 도정에서……이보 이보는 왕연(王衍)의 자이다. 왕연(王衍)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보(夷甫)이다. 당시에 시국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왕연은 자신을 보호할 계책을 세워 그의 동생인 왕징(王澄)을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족제(族弟)인 왕돈(王敦)을 청주 자사(靑州刺史)로 보내고는 "삼굴(三窟)의 계책이 이루어졌다."라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의 추대에 의해 원수(元帥)가 되었다가 석늑(石勒)에게 패하여 처형당하였다. 《晉書 卷43 王衍列傳》 옹구에서……장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으로 있던 장순은 옹구(雍丘)에서 기병하여 저항하였으며, 지덕(至德) 2년(757)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장렬히 죽었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下》 방태위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 연간의 상신(相臣) 방관(房琯)을 가리킨다. 악소보 송나라 태위소보(太尉少保)인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상나라를……것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백성들이 상나라를 떠받든 것이 오래되었네.[民之戴商, 厥惟舊哉.]"라고 하였다. 곽자의 당 숙종(唐肅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부터 상보(尙父)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무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를 한 몸에 짊어졌던 불세출의 명장이다. 충사도 충사도는 송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흠종(欽宗) 때 금군(金軍)이 쳐들어오자 이강(李綱)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투항을 주장하는 자들의 반대에 밀려 실패하고 군권(軍權)을 빼앗겼다. 이후 금군이 다시 개봉성(開封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아우인 충사중(种師中)의 군대를 이용하여 후미를 공격해서 금군의 정예군을 말살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다시 반대론자들의 반대에 막혀 수포로 돌아갔으며, 금군이 돌아간 뒤에 차선의 대책으로 대군을 황하(黃河) 양안에 주둔시켜 금군의 2차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이 역시 반대론자들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宋史 卷335 种世衡列傳 种師道》 소릉의 규합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4년 기사에 근거하여 '邵'를 '召'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소릉은 초나라의 지명이다. 제나라 관중(管仲)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가서 그들에게 왕실(王室)에 공납(貢納)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리를 따져 추문하자, 초왕이 굴복하여 굴완(屈完)을 시켜 소릉에서 제나라와 맹약하도록 하였다. 이는 싸우지 않고 맹약을 이루어 낸 사례로서 널리 일컬어진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하양에서……없으니 현종이 서촉으로 몽진 갈 때 당의 대군은 이광필(李光弼)의 지휘 아래 하양에서 사사명(史思明)의 대군을 막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이유로 현종의 몽진에 근왕하지 못함을 말한다. 진의중은……갔고 남송(南宋) 말기의 재상으로, 자가 여권(與權)이다. 육수부(陸秀夫) 등과 함께 익왕(益王)을 옹립하였으나 큰 소리만 쳤을 뿐 실제적인 대비책에는 아무것도 조처한 것이 없어 결국 송나라가 원(元)나라에 패망하였다. 남송이 멸망했을 때 식솔을 이끌고 점성(占城)으로 가서 그곳에서 군대를 빌려 원(元)나라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점성이 원나라에 점령되자 다시 섬라(태국)로 달아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宋史 卷480》 송의……고하였네 《춘추좌씨전》 〈노선공하(魯宣公下)〉에서 "초나라가 송(宋)나라를 포위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겁을 내어 화원을 보내어 밤에 초나라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보내어 우리나라의 고충을 고하게 하니 즉 우리나라가 현재 자식을 식량과 바꾸어 먹고, 해골을 쪼개어 밥을 짓는 땔감으로 쓰고 있으나 성하의 맹약[城下之盟]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따를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30리를 물러간다면 초나라가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셨다."고 하였다. 병사를 잘 다스려라 《서경》 〈입정(立政)〉에 "너의 군병을 잘 다스리라.[其克詰爾戎兵]"라고 하였다. 위국의……알겠어라 위무후(魏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오기(吳起)에게 "아름답구나, 산하의 견고함이여! 이것은 위(魏)나라의 보배다.[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라고 말하였다. 여기서는 이 고사의 의미를 반대로 사용하였다. 낭심 춘추 시대 진(晉)나라 장수이다. 진(秦)나라와 팽아(彭衙)에서 싸울 적에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전사하자, 진(晉)나라 군대가 이에 편승하여 진(秦)나라를 대파하였다. 그가 상관인 선진(先軫)의 조치에 분노하면서도 화풀이를 하려 하지 않고 떳떳하게 전투에 임한 것을 두고 군자라고 칭찬한 말이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2년에 나온다. 주여숙 춘추 시대 거(莒) 나라 오공(敖公)을 섬기다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그를 떠나 해변에서 살았는데, 오공이 환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목숨을 바치려고 하면서 "내가 장차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것은 신하를 몰라주는 후세의 임금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吾將死之, 以醜後世之人主不知其臣者也.]"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列子 說符》 맹명은……세웠으니 맹명(孟明)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어진 신하 백리해(百里奚)의 아들로 이름은 시(視)이다. 그가 정(鄭)나라를 치다 3차례나 패했는데도 진 목공이 오히려 써주어, 뒷날에 목공이 패자(霸者)가 될 기초를 닦아 놓았다. 《春秋 文公》 소강은……도모하였어라 소강은 하우(夏禹)의 6세손으로 제상(帝相)의 아들이다. 요(澆)가 제상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하우의 왕통이 끊어진 지 40년이 되었을 적에, 소강이 사방 십 리 되는 땅[一成]과 5백 명[一旅]의 병력으로, 마침내 과(過)와 과(戈)를 멸망시키고 우왕(禹王)의 기업을 회복한 뒤에, 하나라 역대 왕을 종묘에서 제사 지내며 천명으로 왕이 되었음을 밝혔다.[祀夏配天]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고래처럼……것이요 고래는 흉포한 왜구를 비유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임강왕절사가(臨江王節士歌)〉에 "장사는 분노하는데 큰 바람이 일어난다. 어이하면 의천검(倚天劍)을 얻어서 바다 건너 큰 고래를 벨거나.[壯士憤, 雄風生. 安得倚天劍, 跨海斬長鯨.]"라고 하였다. 종택 종택은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에 자주(滋州)를 맡았는데, 태원(太原)이 금(金)나라에 넘어가자 의병을 모아 금나라에 대항하였다. 휘종(徽宗)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악비(岳飛)를 장수로 등용하여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宋史 宗澤列傳》 욕수 가을을 맡은 신으로 '금정(金正)'이라고도 한다. 《예기》 〈월령(月令)〉에 "가을 3개월을 주관하는 신이 욕수이다.[孟秋三月 其神蓐收]"라고 하였다. 학의 울음과 바람소리에도 학려풍성(鶴唳風聲)은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로, 겁먹은 사람이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는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사현(謝玄)과 사석(謝石)에게 8만의 군사를 주고 나가 싸우게 했다. 비수(淝水)에 진 치고 있던 부견이 명하기를, "전군을 조금 후퇴시켰다가 적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반격하라." 하였으나, 후퇴 길에 오른 전진군(前秦軍)은 반격은커녕 멈춰 서지도 않아 동진군에 크게 패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갑옷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나며 '학의 울음과 바람 소리'만 들어도 동진의 군사가 온 줄 알았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하란처럼 시기하지 말고 하란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하란 진명(賀蘭眞明). 숙종(肅宗) 때 하남 절도사(河南節度使)로서 임회(臨淮)에 주둔하고 있었다. 윤자기(尹子奇)가 수양(睢陽)을 포위하자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을 임회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장순의 명성이 높고 자기보다 공이 많은 것을 질투하여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수양이 함락당하게 하였다. 《唐書 玄宗本紀》 부섭의 강개함 후한(後漢) 때 적군이 한양(漢陽)을 포위하고 한양 태수 부섭을 향리로 보내려 하자, 부섭이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반드시 여기에서 죽으리라."라고 탄식하며 부하들을 지휘하여 싸우다가 전몰하였다. 《柳河東集注 卷5 君睢陽廟碑》 태산과……살펴서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하였다. 강의……하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물고기는 목숨을 곰발바닥은 의를 비유하였다. 원문에는 '卯'로 되어 있으나 내용상 '卵'이 맞는 것 같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장계 狀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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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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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반란의 역적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 등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 신이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계책을 내어 병사를 모집한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뱃길로 장계하였거니와, 거센 파도와 왜놈들 사이에서 혹 도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다시 진달하옵니다. 장계에 다 올리지 못한 사연과 근래의 조처한 일 등에 대해 아뢰자면, 신이 처음에 이성인(李聖仁),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서 군민(軍民)들을 효유하여 함께 지킬 생각이었는데, 백성들의 의혹이 너무 심하여 백에 하나도 믿지 않을뿐더러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도 또한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대부분 남쪽으로 도망하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각자 흩어져 혹은 산길로 혹은 바닷길로 향하여 관군에게 가려고 하였습니다.신이 바닷가 마을에 와 있다가 배를 타려고 하던 차에 마침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구황 등이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온다 하기에 신은 곧바로 정현룡에게 통지하고지방사람 및 여러 진의 장수들과 모의하여 경성에 들어가 웅거하기로 하고서 들에 성 안의 군민을 모아 국가의 중흥을 위해 마음을 돌려 적을 토벌하자는 의리로써 효유하였으며, 공문으로 원근의 병마를 불러서 반역자를 토벌하고 왜적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의 기세가 바야흐로 강성하고 사람들은 두려워 주저하니 다만 모군(募軍)에 응하는 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회령(會寧)의 역적 아전 국경인(鞠景仁)은 왜놈이 주는 벼슬을 받아 판형(判刑)이라 칭하고서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며 육진의 병사를 부를 길을 막았으며 몰래 왜적과 통하여 항상 경성을 양쪽에서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명천사(明川寺)의 종 말수(末秀)는 대장이라 자칭하며 전령을 보내 물자를 끊임없이 운반하여서 길주(吉州)의 왜놈들과 결탁하였으며 지방의 호족들을 도살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기에 경성의 수비가 고립되고 약하여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오랑캐와 왜적이 협공하는 형세에 남북으로 반란의 역적이 있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죽음으로 지킬 생각이었습니다.이번 달 2일에 회령 향소의 공문에 '본부(本府)에 거처하는 향리 국경인은 본래 악독한 놈으로 평소 일을 처리할 때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으나 대단한 일이 아니기에 내버려두고 다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경향(京鄕)의 사람들이 옷과 관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허둥대었는데, 본도(本道)의 산천은 험하고 높으며 거리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약간의 사대부 뿐 아니라 왕자 두 분과 그를 모시고 온 영부사(領府事)와 부원군(府院君), 승지(承旨) 등이 왜병을 피하고자 이 성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왜적이 부령에서 곧바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앞에 보이는 국경인이 들어 알고서 왜장에게 아첨하려고 자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왜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이에 은밀하게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역자(驛子) 이충경(李忠卿·), 관노 승수(承水)와 경이(京伊) 및 그가 아는 잡놈 등으로 하여금 왕자 두 분과 부인, 영부사, 부원군, 승지 등과 그 부인들이 각각 자신의 처소에 있을 때 밤을 타고 돌입하여 불의에 잡아 결박하여 군영에 단단히 가두고서, 그 당시 부사와 판관으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며 군대의 위엄을 매섭게 펼쳐 놓았습니다. 부사(府使) 군관(軍官) 전 만호(萬戶) 이함(李涵), 내금위(內禁衛) 김덕신(金德新), 판관(判官) 군관 최덕흥(崔德興) 및 부조 방장(府助防將) 우후(虞侯) 군관 장응별(張應鱉), 정인신(鄭仁信) 등과 및 부하들을 시켜 이전에 미워하던 향리 공억복(貢億福), 관노 청룡(靑龍) 등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인 뒤에 왜적이 고풍산(古豐山)이 이르자 반란 아전 국경인은 왕자를 잡아 가두었다고 왜장이 있는 곳에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향리 임민(林岷)을 내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당시 성안의 군민들은 모두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향소에도 위로는 관원이 없고 아래로는 군민이 없었기 때문에 저 또한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이 성에 들어간 뒤에 돌아왔는데 군민들도 천천히 돌아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역적 아전 국경인이 왜장에게 벼슬을 청하여 '판형(判刑)' 두 글자라는 이름을 받아 성안에서 권세를 드날리며 자신의 무리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위세를 떨치며 무고한 군민 십여 명을 제 마음대로 참수하고서 생존한 백성들로 하여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날로 길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향소의 교생과 군민들이 비록 분통한 뜻이 있더라도 위세에 겁을 내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세언, 이충경, 승수, 경이, 한복 등은 기회를 타서 참수하였습니다.그러나 역적의 괴수 국경인은 위세가 당당하고 그 족속들은 삼대처럼 많아서 기회를 얻을 틈이 없었기에 위의 김세언 등을 벤 목을 여러 진에 효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감사의 공문에 '의병을 뽑아서 보내라.'라고 거듭거듭 분부하였지만, 위의 국경인이 또한 감사의 공문을 도외시하고 하나도 거행하지 않으므로, 온 고을의 군민이 그가 의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분통을 터드려 한곳에 모두 모여 군대의 위엄을 크게 펼쳐 이전 역적 아전 국경인과 및 그와 함께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그의 처남의 안종 박림(朴林), 김림(金琳), 그의 수양아들 최린수(崔麟水) 뿐 아니라 김윤복(金允福), 오복수(吳福水), 종 언준(彥俊) 등을 전투를 벌여 일시에 활로 쏴 죽이고 그날로 목을 베었습니다. 국경인은 손발을 자르고 박림 등은 머리를 베었는데 모두 일곱의 목을 품관 색리 등에게 주어 모두 함에 담아서 보냈으며 의병도 내일 정도에 뽑아서 보낼 것이니, 역적 아전 국경인을 잡을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등급을 나누어 책으로 만들어서 올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첩보를 올렸습니다.배후의 강한 도적은 비록 이미 죽였으나 목전의 반도들은 아직도 왜놈의 기세를 끼고서 먼저 명천을 점령하였고 다음으로 길주(吉州)를 도모하려던 차에 명천(明川)의 품관과 촌민들 수백 명이 모여서 길을 나눠 습격하였으나 반란의 역적들이 성에 웅거하면서 화포를 많이 발사하자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곧바로 무너져 뿔뿔이 달아났습니다. 이에 신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를 보내 각각 정예기병 30명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신의 군관 경원(慶源) 전 별감(別監) 정응복(鄭應福), 경성 친군위(鏡城親軍衛) 전덕룡(全德龍) 및 종성 부사 정현룡의 군관 경성 사람 급제 박은주(朴銀柱), 서자 정시룡(鄭時龍) 등도 적을 치러 갈 것을 자원하여 밤낮으로 내달려 명천에 이르니, 말수 또한 자신의 형세가 막다른 것을 알고서 몸에 무기를 차고서 산골로 도망가 웅거하였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추격하였는데, 경성 토병(土兵) 전덕인(全德仁)이 먼저 그 흔적을 찾았으며 본부 영군사(營軍士) 김천년(金千年)이 산채로 포박하였고 그의 무리 경성 안종 논손(論孫), 명천 관노 문형(文亨), 귀양 온 장응호(張應豪) 등을 잡아 목을 베어 군중에 효수하니 잔당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혹은 왜적에게 가거나 혹은 산속으로 달아나 전부 체포하지는 못하였습니다.이전 회령에서 죽인 국경인과 명천 말수의 머리와 손발을 모두 함에 넣어 보내며, 그 나머지 목은 벤 13명의 수급은 산길이 눈에 얼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부득이 왼쪽 귀를 베어 쪽지에 이름을 써서 올려 보냅니다. 역적의 재산은 법으로 마땅히 몰수해야 하니 마땅히 기록하여 아뢴 뒤에 처리하겠습니다만, 고을 곳간이 탕진되었기에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권장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권도(權道)로 군중의 상품으로 사용하였으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밭과 집은 마땅히 계문(啓聞)하여 역적을 잡거나 토벌한 이에게 주려고 생각하였으니, 앞의 두 역적은 다만 일개 하찮은 놈들이라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을 등급을 나눠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울 듯하며, 또 새로 모인 병사들에게 만일 고무시키는 조치가 없으면 호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에 전하께 이처럼 아룁니다.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 난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온성 이남의 진보(鎭堡)에서 불러 모은 병사들이 차츰 올라오는데, 다만 경원의 군사는 현재 아직 방비하는 곳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진보의 여러 장수들은 경성을 방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혹은 북관에서 남으로 내려오고 혹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북으로 돌아와 모두 경성에 들어와 신의 지휘를 받고 있으니,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영건 만호(永建萬戶) 정예국(鄭禮國), 보로지 권관(甫老知權管) 유대남(柳大男),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보화보 권관(寶化堡權管) 이언상(李彥祥),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 한대방(韓大防), 장군파 만호(將軍坡萬戶) 오대남(吳大南), 조산 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어유간 만호(魚遊澗萬戶) 방우주(方佑周), 세천 권관(細川權管) 박예범(朴禮範) 등이 차례대로 와서 모였습니다.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은 순찰사의 공문을 가지고 별해보(別害堡)에서 왔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 서성(徐渻)과 귀양 온 나덕명(羅德明)은 바깥 마을에 있다가 마을에 거주하는 군정을 타일러 모두 성으로 들어왔습니다.육진은 한번 왜적이 지나간 뒤에 군기와 창곡이 겨우 10분의 1~2정도 남았는데 각각 봉하여 닫아두었는데, 말이 모두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므로 운반하여 타지와 통할 형세가 되지 못합니다. 경성에는 다행히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각각 7백여 부와 천 명이 반 년 먹을 식량이 있으므로 군사 1천 7백여 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 다른 고을의 관군은 산료(散料)를 관에서 주고 이 고을 사람은 모두 자비로 먹게 하였습니다. 대개 앞뒤로 이 지방 사람으로 하여금 두세 번 길주의 성으로 들어가게 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의 숫자는 만여 명으로 관청과 개인 집에 나눠 거처하면서 성 안에 따로 깊은 해자와 높은 망루를 설치하여 주야로 망을 보면서 순찰한다고 하니, 경솔하게 병사를 일으켰다가는 욕을 볼 것을 깊이 헤아려 모쪼록 형세를 보아 기습하여 먼저 그들의 예봉을 꺾은 연후에 일거에 섬멸시키고 다음으로 영동(嶺東)과 단천(端川)에 미칠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14일. 臣與鍾城府使鄭見龍, 共謀集兵緣由, 已爲由水路, 狀啓爲白有在果, 風濤盜賊之間, 恐未得達爲白乎去, 更良陳達爲白在果。狀啓未盡辭緣及近日措置事段, 臣初與李聖仁及慶源府使吳應台等入鏡城, 曉喩軍民, 以爲共守之計爲白良置, 民惑已甚, 百不一信叱分不喩, 京來將士, 亦無固志, 多欲南出乙仍于, 不得已各散, 或向山路, 或向海道, 欲達官軍。臣來在海村, 欲爲乘舟次, 適聞道路傳言, 具滉等持巡察使關子, 北還之奇爲白遣, 臣卽通于鄭見龍, 謀與土人及諸鎭將, 入據鏡城, 庭集城中軍民, 諭以國家中興, 回心討賊之義, 帖召遠近兵馬, 以爲討叛滅倭之計爲白良置, 賊勢方張, 人心疑懼, 非但應募無幾叱分不喩, 會寧叛吏鞠景仁段, 受倭官稱判刑, 威制一府, 以塞六鎭徵兵之路, 潛通倭賊, 常爲挾擊鏡城之計爲白遣。明川寺奴末秀段, 稱大將用傳令, 輸載絡繹, 締結吉州之倭, 屠殺土豪, 以遏義旅之興爲白乎等以, 鏡城守禦孤弱不振, 胡倭挾勢, 南北有叛, 僅僅支保, 死守是計爲白有如乎。本月初二日, 會寧鄕所牒呈內, '本府居鄕吏鞠景仁, 亦本是頑惡之人, 以平時用事之日, 多般作惡爲白良置, 非大段事是乎等用良, 置而不治爲如乎次節, 倭賊猝發, 衣冠顚倒, 京外遑遑, 本道乙山川險高, 道路隔遠是去, 凡干士大夫是沙餘良, 王子君兩分及陪來領府事·府院君·承旨等, 欲避倭變, 委入此城爲有去乙, 倭賊自富寧直入之奇乙, 上項鞠景仁, 亦聞知爲遣, 欲媚倭將, 使其徒立功於倭賊爲乎矣。陰令親軍衛金世彥·驛子李忠卿·官奴承水·官奴京伊及其矣所知雜類等率良旀,同王子兩分及夫人與領府事府院君承旨等夫人敎是等乙, 各其所在處, 乘夜突入, 不意執捉結縛, 堅囚軍營爲遣, 其時府使判官以使不得下手, 盛陳軍威。府使軍官前萬戶李涵·內禁衛金德新·判官軍官崔德興及府助防將虞侯軍官張應鱉·鄭仁信等及府下人, 前月有嫌爲在, 鄕吏貢億福·官奴靑龍等, 斬首示威後, 倭賊到古豐山爲有去乙, 同叛吏鞠景仁, 亦王子執捉拘留是如, 倭將處, 其矣所厚鄕吏林岷, 以馳告爲乎矣。' 其時段, 城中軍民, 幷只避亂入山乙仍于, 鄕所等段置, 上無官員, 下無軍民是乎等用良, 亦爲入山爲有如可, 倭賊入城後, 還來爲乎亦中, 軍民等徐徐還來爲良置。向前叛吏鞠景仁, 亦要名於倭將, 受判刑二字之名, 擅權於城內, 逞一己嘯聚之計, 又立威權, 恣斬無辜軍民十餘名, 使生存之民, 不得下手, 日增道路耳目是乎等用良, 鄕所校生軍民等, 雖有痛憤之志, 亦怯於積威, 莫敢下手爲有如乎次, 金世彥李忠卿承水京伊漢福等段, 乘機斬首爲有乎矣。 同賊首鞠景仁, 亦威勢堂堂, 族類如麻, 乘機無隙是置有等以, 上項金世彥等斬首乙, 梟示列鎭不得爲有如乎。道關內義兵抄送事, 再再分付爲有乎矣。上項鞠景仁, 亦道關乙, 置之度外, 一不擧行爲去乙, 一邑軍民, 憤其義兵不送, 咸聚一處, 大陳軍威, 向前叛吏鞠景仁及同謀作亂爲如乎其矣妻甥內奴朴林·金林, 其矣義子崔麟水是沙餘良, 金允福·吳福水·奴彥俊等, 一時相戰射殺, 同日斬首爲乎矣。鞠景仁段, 處斬手足, 朴林等段, 斬首, 合七首乙, 品官色吏等準授, 幷只函送爲遣, 義兵段置, 來明日, 抄送爲在果, 叛吏鞠景仁執捉時功勞人等乙, 秩秩分等成冊, 上道爲白臥乎味, 牒呈是白有亦。背後劇賊, 雖已就戮, 目前叛竪, 尙挾倭勢乙仍于, 先定明川, 次圖吉州計料次, 明川品官及村民等, 相聚數百, 分道掩襲爲白如乎, 叛賊據城, 多放火炮, 烏合之衆, 旋卽潰散是如爲白去乙, 臣遣吾村權管具滉·安原權管姜文佑, 各率精騎三十名, 臣矣軍官慶源前別監鄭應福·鏡城親軍衛全德龍及鍾城府使鄭見龍軍官鏡城土及第朴銀柱·庶孽鄭時龍等, 自願往討, 晝夜幷行, 比到明川, 則同末秀亦自知勢窮, 身佩戎器, 竄據山谷爲白有去乙, 追至深山, 鏡城土兵全德仁, 先得其蹤, 本府營軍士金千年執縛生擒, 幷捉其黨鏡城內奴論孫·明川官奴文亨·定配人張應豪等斬首, 梟示軍中爲白遣, 餘黨四散, 或投倭賊, 或竄山間, 時未盡捕爲白有齊。向前會寧所誅鞠景仁及明川末秀段頭及手足, 幷只函送爲白遣, 自餘斬馘十三級段, 山路氷雪, 輸送甚難乙仍于, 不得已左耳割取, 小牌書名, 上送爲白齊。逆賊財產, 法當籍沒, 所當錄啓處置事是白乎矣, 唯只府庫板蕩之餘, 召募散民, 勸勵慰悅次, 以權用於軍中賞格, 不勝惶恐爲白乎旀, 田民家舍段, 從當啓聞, 給付捕討人爲乎乙去, 計料爲白在果, 向前兩賊, 特一幺麽小竪良中, 討賊人分等錄功, 恐涉煩瑣爲乎矣。新集之卒, 若無聳動之擧, 則響應甚難, 弦如冒瀆上聞爲白齊。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穩城以南鎭堡徵兵, 稍稍來到, 唯只慶源軍, 時未到防爲白齊, 鎭堡諸將等聞鏡城守禦之奇, 或自北關南出, 或自南程北還, 皆入鏡城, 受臣節制爲白在果, 防垣萬戶韓仁濟·潼關僉使李應星·永建萬戶鄭禮國·甫老知權管柳大男·高嶺僉使柳擎天·寶化堡權管李彥祥·森森坡萬戶韓大防·將軍坡萬戶吳大南·造山萬戶印元忱·魚遊澗萬戶方佑周·細川權管朴禮範等, 次次來會爲乎旀, 斜卩洞權管高敬民段, 持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爲白遣, 兵曹佐郞徐渻·定配人羅德明, 在外村, 曉諭村居軍丁爲白如乎節段, 幷只入城爲白有齊。六鎭一經倭賊之後, 軍器倉穀, 僅餘十分之一二爲白良置, 各自封閉叱分是白遣, 馬匹盡歸倭賊乙仍于, 無有轉運相通之勢爲白齊, 鏡城段, 幸有長片箭各七百餘部, 千人半年之粮爲白乎等以, 聚軍千七百餘名內, 他官軍段, 官給散料, 本府人段, 幷只自備以食爲白齊。大槩前後使土人, 再三入吉州城中, 覘賊虛實爲白乎矣。賊徒萬餘, 分據公私廨, 城內別作深溝高壘, 晝夜候望巡更爲白去等, 輕擧見辱爲白乎去, 百分詳量, 某條觀勢出奇, 先挫銳氣, 然後一擧盡殲爲白遣, 次及嶺東·端川計料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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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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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역적 경성의 국세필을 죽이고 올린 장계 誅叛賊鏡城鞠世弼狀啓 북도 지역 사람들은 왜적이 침입한 이후로 남쪽 길이 막혀 다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반란민들은 그 수령을 잡아 묶고 역적의 졸개들은 그 진의 장수를 내쫓아 버리고서 각자 스스로 장수라 칭하면서 왜적을 맞아들였습니다. 경성(鏡城)의 관노인 국세필(鞠世弼) 역시 회령(會寧)의 역적 아적 국경인(鞠景仁)과 같은 집안의 삼촌 숙부로 회령의 변란에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인하여 왜놈에게서 예백(禮伯)이라는 벼슬을 받아 왜놈과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표리가 되어 온 부중(府中)을 위압하면서 왜놈을 받들었을 뿐 아니라 산골짜기에 숨은 여러 진의 장수와 서울에서 온 선비들을 육진에 통문(通文)을 보내서 사로잡아 왜놈들에게 내주었습니다.왜놈들이 길주로 물러난 뒤에 신과 이성임(李聖任) 등은 본부(本府, 경성)으로 들어와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는데, 앞의 국세필은 여전히 왜적의 위세를 빌어 매우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면서 나라에 배반하려는 잔꾀를 맘대로 부려 의병을 일으키려는 일을 방해하여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고립되어 기세가 약하였기에 그를 죽여서 효시하지 못하고 각자 흩어져 남쪽으로 나와 관군에게 가려고 하던 즈음에 별해보(別害堡)에서 오는 순찰사의 공문을 이성임은 산길에서 보았고 저는 바닷가에 와 있다가 도로에서 전하는 그 공문을 보게 되었습니다.품관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등이 먼저 신과 호응하였으니, 저희들은 서울에서 온 장수와 사졸 및 토병(土兵) 수십 명과 함께 경성으로 들어가 공격하여 성을 차지한 뒤 수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 사람들은 이미 미혹되어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데다가 남쪽으로 명천의 역적 놈이 왜적의 기세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북쪽으로 회령 역적의 아전이 육진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국세필은 그들과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고 있는 역적으로 은연중에 같은 배를 탄 원수처럼 다뤄야 했습니다. 만약 임기응변으로 그를 속여서 나라를 배반하려는 그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게 않게 하지 않으면 경성을 차지한 노회한 역적이 선수를 칠 걱정이 없지 않았으므로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허물을 버리고 잘못을 씻자고 깨우쳤으며, 아비와 아들의 공을 기록하여 공을 세워서 죄를 면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한편으로는 군중의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령에서 몰래 염탐하는 길을 끊은 다음에 회령과 명천(明川) 두 역적의 머리를 베니 군세가 차츰 떨치고 기강이 점차로 바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용납하지 못한 역적이 훗날 법망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곧바로 군중에서 목을 베어 조리 돌리고 함에 머리와 손발을 넣어 보내오며 그 아들 국생(鞠生)의 머리와 귀도 잘라 올려 보냅니다.대개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을 제어함이 없어서 간혹 왜적을 끌어들여 촌가를 노략질하여 죽이거나 혹은 산속에서 같은 부류들을 불러 모아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지금 나라가 다시 서고 전형(典刑)이 새로워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자신이 처벌받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서 자못 주저하는 상황일 뿐 아니라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본토의 양민들이 그들의 과거 악행을 미워하여 간혹 그 때 일을 들춰내어 말을 하니, 육진의 병사를 불러 모아야 하는데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오지 않은 자들이 있어 염려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에 신이 막하의 낮은 관리로 마음대로 처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다만 일을 맡고 있는 신하이므로 부득이 권도로써 탕척령(蕩滌令)을 시행하여 그 수괴는 없애버리고 위협을 받아 수괴를 따랐던 이들은 용서해 주어 징병에 참여하는 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문(啓聞)은 지금 길이 막혔기 때문에 올려 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장계를 가지고 갈 사람을 사람은 자원하는 자를 뽑아서 보내오며, 은전으로 상을 내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청할 바가 아니오나 그 무리들의 공로를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0년 임진년 10월 모일. 北道, 自倭寇之後, 南路阻絶, 不復知有國家, 亂民縛其守宰, 叛卒逐其鎭帥, 各自稱將, 以迎倭賊爲白有如乎。鏡城官奴鞠世弼, 亦以會寧叛吏鞠景仁同姓三寸叔父, 通謀會寧之變, 因受倭賊禮伯之官, 與倭同處, 相爲表裏, 威制一府, 供奉倭奴叱分不喩, 諸鎭將及京來士人避亂山谷者乙, 通文六鎭, 捉致倭賊爲乎旀。 倭退吉州之後, 臣及李聖任等來入本府, 謀欲擧義次, 同世弼尙假倭威, 黨與寔繁, 逞其反側之謀, 沮敗倡義之擧乙仍于。臣等孤立勢單, 不能顯戮, 各散南出, 圖赴官軍爲白如乎節, 巡察使關子, 自別害來到, 李聖任段, 遇於山路爲白遣, 臣段, 來在海汀, 得見道路傳書爲白齊。 品官徐遂·李麒壽等, 爲先響應, 謀與京來將士及土兵數十人, 同入鏡城, 以爲攻守之計爲白良置, 當此人心已惑, 王化不究之日, 南有明川逆竪, 近挾倭勢, 北有會寧叛吏, 威行六鎭, 世弼以聲勢相倚之賊, 隱然爲舟中之敵是白去等, 若非權謀紿說, 先釋其反側之心爲白在如中, 盤據老賊, 不無逞手之虞乙仍于, 溫辭開諭, 曉以棄過滌垢之意, 父子錄功, 示以立功免罪之端。一以定羣下疑懼之心, 一以絶會寧陰伺之路爲白有如乎節, 會寧·明川兩逆授首, 軍勢稍振, 紀律漸張爲白有去等, 覆載難容之賊, 恐有他日網漏之患絃如, 卽於軍中, 處斬梟示, 函送頭級手足爲白遣, 其子鞠生段, 斬首割耳, 上送爲白齊。大槩經亂以來, 民無防禁, 或有連引倭賊, 殺掠村家, 或有嘯聚山藪, 白晝殺越者, 不知其數, 今聞國家再造, 典刑維新爲白遣, 人懷自疑, 頗有顧望之端叱分不喩, 京來將士及本土良民等, 嫉其旣往之惡, 或發指斥之言爲白乎等乙以, 六鎭徵兵, 或有畏罪而不來者, 至爲可慮爲白昆, 臣以幕下小官, 擅便爲難爲白在果, 最只當事之臣, 以不得已權行蕩滌之令, 除其首惡, 捨其脅從, 以廣應募之路爲白乎旀, 凡干啓聞事段置, 當此路塞之時, 上達甚難, 陪持人等乙, 募其願往者起送爲白去乎, 恩賞重事, 非自下所敢擅請是白良置, 其矣徒等功勞段, 不敢不達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길주와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한 것과 육진의 역적을 찾아 목을 베고 오랑캐들에게 항복 받은 것에 대해 올린 장계 吉州臨溟破倭賊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狀啓 지난 해 11월 1일에 성첩(成貼)187)하여 올려 보냈던, 길주(吉州)에 주둔한 왜적과 접전을 벌여 목을 벤 사연을 적은 장계가 12월 9일에 행재소에 도달하여 접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올해 정월 9일에 본도로 가지고 온 비변사에서 내려 보낸 다섯 통의 공문을 상고하였습니다.길주에 주둔한 왜적이 한번 패배한 뒤로는 견고한 성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 않거늘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이 각자 부하를 거느려 모두 삼천여 명의 병사가 다시 찾아가 성을 포위하고서 종일 접전을 벌였습니다. 왜적 4백여 명이 성 위에 줄지어 서서 죽을힘을 다해 방비하므로 철환과 화살에 왜놈과 아군 모두 많은 병사가 부상을 당하니 빨리 함락할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군사를 나눠 성 밖 2~3리 네댓 곳에 매복하고 밤낮으로 감시하면서 왜놈이 나오면 곧바로 죽이거나 사로잡으려 하였습니다. 세 위장은 모두 병사를 영동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의 왜적을 섬멸한 뒤에 성 안의 왜적을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마침 군사를 옮기는 날, 영동(嶺東)의 왜적 사백여 명이 임명촌(臨溟村) 민가에 나와 불 지르고 노략질할 때 좌위장 유경천이 차정(差定)하여 보낸 복병장 길주 토병(土兵)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대군에게 급히 통보하니 삼위장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육진의 정예병이 먼저 접전을 벌여 왜적이 패퇴하였는데, 삼위의 군사들이 활로 쏘거나 참수한 왜놈과 성 안에 남았다가 드나들 때 붙잡아 죽인 왜놈까지 모두 백여 급(級)으로, 왼쪽 귀를 함에 넣어 봉하고 군공을 모두 기록하여 장계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던 차에 도순찰사(都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저희들 마음대로 장계한다고 하여서 공문으로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순찰사의 지휘를 낱낱이 거행하지 않았고 군중의 기밀도 때에 맞춰 보고하지 않았으며 북도 오랑캐의 난리도 또한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연달아 네 차례나 추고하였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병사들은 모두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이 모집한 병사이며 공은 모두 사절동 권관(斜卩洞權管)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라 하면서 '패군 장수 원충서(元忠恕)를 녹공(錄功)에 참여시키고 정희적과 고경민의 온전한 공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명천 현감(明川縣監) 장응상(張應祥)을 시켜서 평사(評事, 정문부)가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인양 다짐을 받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신은 나이가 어리며 어리석고 용렬한 백면서생으로 군사 일을 잘 알지 못할 분 아니라 문서 보고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군무를 맡게 되었는데 일을 잘못 처리하여 중죄를 받게 되었으니 방황하며 근심하던 차에 순찰사의 공문에 '평사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아울러 종사관을 거느리니 지극히 해괴하다.'라 하여 신의 대장직을 교체하고 회령 부사 정현룡으로써 대장을 바꾼다는 공문을 작년 11월 21일 성첩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체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수하 장수와 병사 삼천여 명 모두를 정현룡에게 넘겨주고 신은 물러나 추고에 답하려고 하였는데, 북병사가 공문에 보내와 '평사는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울려 오랑캐를 진압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대장직에서 교체되었기에 감히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군관과 휘하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였습니다.경원(慶源)에 이르러 백성들을 효유하고 아울러 오랑캐들에게 음식을 보내 달랬습니다. 백성들은 왜적이 물밀 듯 밀고 올라올 처음에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면서 군민들이 그 수장을 내쫓고 드넓은 도로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병사 및 피란 온 선비들을 간혹 붙잡아서 왜적에게 내주고 간혹 옷과 행장을 몽땅 빼앗았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로 다른 관원들이 토착민들의 전날 악행을 낱낱이 들어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을 추심하는데 급급하니 민심이 불안하게 되었는데, 신은 '두 마음을 먹은[反側] 무리들을 진정시키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일절 금지하여도 왕의 권위를 빙자하여 이런 행위를 하니 금하여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마음을 먹은 무리들은 의구심이 날로 깊어져 신이 회령(會寧)에 이를 때에는 본부(本府)의 백성들이 반적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으니, 신이 임기응변의 말로 온화하게 효유하였으니, '이미 괴수는 죽였으니 위협에 의해 협조하던 이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차츰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경성과 온성(穩城)의 인심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자못 의심을 가지고 주저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원 좌수(慶源座首) 정사기(鄭士麒)와 그 아우 사봉(士鳳)은 당초 왜적이 북쪽에 들어왔을 때 병사 이하 관군을 잡아서 왜적을 맞이하여 투항할 생각이었는데, 신이 경성에 들어가 장악한 이후로 여덟 차례나 징병령을 내렸지만 거역하고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랑캐 난을 방어하려고 길주에 진군한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범(金範)은 회령을 겸하여 다스리기에 회령으로 들여보냈고,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 경원 판관(慶源判官) 오언량(吳彥良)은 본진(本鎭)으로 들여보내어 백성들과 오랑캐의 마음이 거의 진정되었습니다만, 정사기만은 도내의 거악(巨惡)으로 자신의 친족 무리를 군노사령(軍奴使令)으로 많이 심어놓으니 판관들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러 정사기와 사봉 및 그 당의 괴수 경흥 토병 최송(崔松)을 행영(行營)에 잡아와서 모두 참수하고서 효수하였습니다. 종성 통사(鍾城通事) 안억수(安億壽)는 전부터 변방 오랑캐들에게 토색질을 하였으며 왜란이 일어난 뒤에 나라에 기강이 없음을 틈타 온갖 물건을 토색질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통사의 눈앞에서도 오랑캐가 고한 말을 변조하여 거짓으로 전하였습니다. 신이 그 기색이 거짓되고 비밀스러움을 보고서 직접 중추하량개(中樞下良介)를 불러들여 우리나라 말로 문답을 하였는데, '육진이 왜변이 일어난 뒤 토병의 토색질로 변방의 근심을 빚어낸 것은 대개 다 비슷한데, 그 가운데서도 안억수는 가장 심하다.'고 하거늘 곧바로 참수하여 조리 돌림하여 일벌백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량개란 놈도 흉측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오랑캐라 우리나라 사람을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 오랑캐가 보는 앞이라 경솔하게 처형하는 것은 아마도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 같아서 곧바로 칼을 씌워 부령부(富寧府)로 옮겨 가두고 순찰사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오랑캐의 정세를 말씀드리자면, 회령 관내는 당시 배반하는 정황이 없으며, 경성의 오랑캐는 밖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소원하니 그들의 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지만 또한 분명하게 도적질하는 일은 없으며, 온성의 오랑캐는 애초 왜변 때부터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흩어져 지내는 우리 백성을 한 명도 노략하지 않았을 뿐더러 판관이 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른 오랑캐들이 노략질한 사람과 물건을 먼저 돌려보내니 대단히 가상합니다. 신이 본부(本府)에 이르니 다른 진(鎭)의 예에 의거하여 술과 고기를 보내고 소금과 장을 주는 이외에 별도로 공이 있는 오랑캐를 따로 불러서 한 상 물러주어 술을 주고 소금과 장을 더 주면서 왜적을 모두 평정한 후에는 상과 벼슬을 서울에 가서 각각 특별히 시행할 것으로 이치를 들어 타일렀습니다.경원은 두두족(頭頭族) 추장 10여 명이 이따금 와서 고하며 우리나라에게 복종할 것처럼 거짓 꾸며 보이지만, 부내(府內)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이미 우리나라를 배반하여 잠깐 귀순하는 척 왔다가 곧바로 떠나 함께 도적질을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합니다. 신이 북으로 갔을 때 타이르는 명령을 듣기 위해 왔었던 추장과 학생 도합 이백여 명은 우리 쪽에서 불러서 왔을 뿐 아니라 저들도 부름에 응하여 귀순한 것이므로 숨은 악행을 들춰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례에 의거하여 음식과 물품을 주고서 효유하기를 '도적질하는 오랑캐가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침입해 올 경우 나라에서 죄를 물을 때 너희들도 함께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니 본분을 잘 지키며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각별히 유념하라.'라고 엄한 말로 타일렀습니다.경흥은 서수라일보(西水羅一堡)의 첩입군(疊入軍)과 조산보(造山堡)의 흩어진 백성과 토병을 함덕후(咸德厚)가 거느려 성을 시키고 있는데, 도둑질하는 오랑캐들이 네 번이나 성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을 뿐 아니라 도적 오랑캐의 부락 한 곳을 빈틈을 타서 불태웠습니다. 고립된 군대가 자신의 지역을 넘어 장수가 명령을 내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온당함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조그마한 외로운 성이 큰 도둑에 의해 길이 끊어져 제 때 지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성을 온전히 보호하고 왜적을 무찔러 군기(群機)를 잃지 않았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 일이기에 함덕후를 정장(定將)으로 삼고 회령 해창(海倉)에 있는 쌀 1백 석을 그쪽의 보(堡)로 운반하여 성을 지키는 군량미로 쓰게 하였습니다.경흥부와 그 관내인 조산(造山), 무이(撫夷), 아오지(阿吾地)와 경원 관내인 건원(乾元), 아사보(阿山堡)는 애초부터 지키지 못하여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분탕질하고 거침없이 왕래하여 도둑들이 다니는 길이 되어버렸으니, 간혹 경흥의 바닷가에서 혹은 경원 지역에서 들어와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도둑질을 하여 산골의 사람과 가축을 노략질하니 대단히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육진의 정예병 2백여 명은 길주(吉州)에 나아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게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마구간이 텅 비어버려 전날 말달리며 활 쏘던 군사가 지금은 말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 기물[軍器]도 왜놈들에게 모두 불타버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을 묶어 횃불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피난한 백성들 가운데 활과 화살을 지닌 자는 모두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민간의 전투 기물도 거의 묻혀 섞어 버렸으므로 성에 웅거하며 방어하는 것도 오히려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 먼 곳까지 추격하는 것은 형편상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촌에 사는 백성들 모두에게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여 노략질 당함을 면하게 하였습니다.길주의 왜적의 세력이 이윽고 사그라지고 육진의 오랑캐의 난리가 점차 거세지므로 부득이하게 왜적과 싸우던 여러 장수 가운데 간간이 뽑아 들여보냈는데, 각 그 진장(鎭將)이 정예병을 뽑아 거느려서 요충지에 매복하여 횡행하는 길목을 끊어버렸습니다. 대개 북도는 길이 대단히 멀고 눈얼음이 쌓인 지역으로 순찰사가 있는 곳까지 10여 일이 걸리는데, 군중의 기무(機務)는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하니 한결같이 지휘에 의해서 시행한다면 아마도 임기응변하는 병가(兵家)의 도리가 아닌 듯 하기에 그 간의 급한 일은 간혹 순찰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시행하고서 후에 문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찰사의 지휘에 '대장을 교체하여 도망병을 잡는 장수로 정했으니, 마천령과 단천 등지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도망한 병졸을 체포하라.'라 하였습니다. 신이 하찮은 작은 관리로 조그마한 공도 없이 문득 당상관에 오르니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여 어떻게 은혜를 갚고 죽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피를 칼날에 바르고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다만 지금 길주와 영동을 아직 소탕하기 전이라 북쪽으로 도망간 우리 병사가 남쪽을 향하여 도망갈 이치는 없을 듯 하기에 일단 군중에 머물고 있습니다.신이 지난해 11월 21일 대장에서 교체되었을 때 12월 14일자로 보낸 비변사의 이문(移文)에 '평사는 바야흐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날짜가 24일이나 지났는데 순찰사가 저의 죄를 청하는 장계가 당시에 행재소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회령 부사 정현룡은 대장이 된 지 한 달도 못되어 겸절도사로 교체하여서 육진을 순행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 오응태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신은 다만 북병사의 지휘에 의하여 제 마음대로 북쪽을 순시하였다고 추고하였습니다. 각 진의 장수로 예를 들면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난(李蘭) 등 무려 수십 명은 각자 본진(本鎭)의 토병(土兵)을 이끌고 와서 왜적을 토벌함에 참여하고서 순찰사에게 처음부터 계속해서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각 보와 진의 장수를 거의 다 교체하여 간혹 한 진과 보의 장수에 2~3 사람을 거듭 임명하여 장수들도 자신의 본래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고 병졸들도 자신의 장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정(軍情)은 흔들리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기에 대단히 염려가 되어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제 마음대로 장계를 올린다고 죄를 얻을까 염려되어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에 올린 장계를 돌려보내는 사연과 및 비변사에서 보낸 다섯 통의 공문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어 1등의 군공을 세운 지방 사람으로 급제한 차응린(車應轔)이 자원하기에 전례에 의거하여 바닷길로 장계를 올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2일. 前年十一月初一日, 成貼爲白在, 吉州留倭接戰斬馘辭緣書狀, 十二月初九日得達行在所受到付, 及備邊司啓下成貼關五度, 今年正月初九日, 齎還本道爲白有去乙, 相考爲白乎矣。吉州留賊一敗之後, 入據堅城, 縮頭不出爲白去乙,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高嶺僉使柳擎天, 各率所部, 合兵三千餘, 再度圍城, 終日接戰爲白乎矣。倭賊四百餘名, 列立城頭, 抵死防備, 鐵丸射矢, 彼我俱傷, 勢難猝拔乙仍于, 分兵設伏城外數里許四五處, 晝夜候伺, 出則勦捕爲白乎旀, 三衛將幷以移兵嶺東, 先滅柵內之賊, 次及城中之寇計料爲白如乎。適音移兵之日, 嶺東倭賊四百餘名, 出來臨溟村舍, 焚蕩擄掠之際, 左衛將柳擎天, 定送爲白在伏兵將吉州土兵金國信, 爲先接戰爲旀, 一邊以馳報大軍爲白良在乙, 三衛一時馳突其中, 六鎭精兵爲先接刃, 倭賊敗奔, 三衛射斬及城中留賊出沒時捕斬, 合百餘級, 左耳函封, 軍功幷以磨鍊狀啓計料次, 都巡察使尹卓然, 亦擅自狀啓是如, 出公緘推考爲白乎旀, 巡察使節制一一擧行不冬, 軍中機務趁不馳報, 北道胡亂, 亦不這這馳報是如, 連四度推考叱分不喩, 某條以傳聞爲白乎喩, 兵皆吉州牧使鄭煕績召募之兵, 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是去乙, '敗軍將元忠恕, 亦參錄功, 鄭煕績·高敬民, 不以專功上聞'是如, 明川縣監張應祥乙用良, 評事失誤軍機樣, 以捧侤音, 上使亦爲白臥乎在亦。臣以年少迷劣白面書生, 不閑軍旅叱分不喩, 文報間曲折, 專不閒習爲白如可, 一朝臨戎, 誤蒙重罪爲白乎去, 彷徨悶迫之際, 巡察使節制內, '評事自稱大將, 兼率從事官, 至爲駭怪'是如, 遆臣大將之任,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改定大將關子, 前年十一月二十一日, 成貼到付爲白良在乙, 卽依巡察使節制, 專以手下將士三千餘名, 鄭見龍處交付, 臣段, 退答推考爲白如乎, 北兵使節制內, '評事亦巡行六鎭, 鎭定人心, 兼鎭虜情'亦爲白有去乙, 臣已遆大將之任, 不敢不從乙仍于, 率軍官及麾下五十餘人, 北行六鎭。至慶源, 曉諭人民, 兼饋藩胡爲白乎矣。人心段, 當初倭賊長驅之時, 不復知有國家, 軍民逐其守將, 衢路恣行攘奪, 京來將士及避亂士人等, 或被捉致倭賊, 或被赤脫衣裝爲白有如可, 自臣入城之後, 歷擧土人前日過惡, 使無所容叱分不喩, 急於推得失物, 因致人心不安爲白去乙, 臣以謂'鎭定反側之初, 如此擧措, 甚非事宜'是如, 一切痛禁爲白如乎節段, 憑藉王靈, 禁不能抑, 反側之輩, 疑懼日深, 至於臣到會寧之日, 本府人民, 恐爲叛賊連累, 太半逃走爲白有去乙, 臣以權辭溫諭, 諭以'已殲巨魁, 罔治脅從之意'爲白良沙, 稍稍還集爲白乎旀。鍾城穩城人心段置, 亦未翕然鎭定, 頗有持疑顧望之端叱分不喩, 慶源座首鄭士麒及其弟士鳳段, 當初倭賊入北之時, 謀捉兵使以下欲爲迎降之計爲白如可, 臣入據鏡城之後, 八度徵兵, 拒逆不送爲白乎旀, 人心虜變鎭定防禦次, 以吉州赴戰爲白如乎, 富寧府使金範段, 會寧兼官, 以入送會寧爲白遣, 潼關僉使李應星·柔遠僉使李希良·訓戎僉使金磁·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 入送本鎭爲白乎矣, 人心虜情, 太半鎭定, 而鄭士麒耳亦, 道內巨惡, 以多植族黨奴使, 判官莫敢措手爲白去乙, 臣到本府, 捉致士麒士鳳及其黨魁慶興土兵崔松于行營, 幷只斬首梟示爲白遣, 鍾城通事安億壽段, 自前始叱侵虐藩胡爲白如乎節, 倭變之後, 國無紀律爲白乎去, 向入侵徵雜物, 無所不至爲白乎矣, 眼前通事, 以胡人告訴乙, 變詐誣傳爲白去乙, 臣觀其氣色詭秘, 親引中樞下良介, 問答以我國言語爲白乎矣, '六鎭倭變之後, 土兵侵虐, 釀成邊患, 大槩同然, 其中安億壽爲甚'是如爲白去乙, 卽欲斬徇, 懲一勵百爲白乎矣, 唯只下良介段置, 桀驁難側5)之胡, 以來訴我人爲白去等, 諸胡所見處, 輕易行刑, 恐妨國體爲白乎去, 卽加枷杻, 移囚富寧府, 以待巡察使處置爲白有齊。虜情段, 會寧所管, 時無叛狀, 鍾城段, 外親內疎, 所爲叵測爲白良置, 亦無顯然作賊之事, 穩城段, 當初倭變時, 始叱接置我國, 散民一不擄掠叱分不喩, 判官還鎭聞奇, 他胡所掠人物乙, 爲先刷還, 極爲可嘉爲白乎等以。臣到本府, 依他鎭例, 饋酒肉給塩斗外, 別引有功胡人, 退床饋酒, 加給塩斗, 諭以倭賊盡平之後, 賞職上京, 各別施行, 亦擧理開喩爲白有齊。慶源段, 頭頭酋長十餘人, 間間進告, 佯示向國之狀爲白良置, 府境諸胡, 皆已叛國乙仍于, 乍去乍來, 同心作賊, 判然無疑爲白乎矣。臣北行時, 開喩聽令次以來到爲在, 酋長學生幷二百餘名段, 自我招來叱分不喩, 彼亦應招歸順爲白有去等, 摘發隱惡, 治罪不當乙仍于, 依前饋贈, 喩以'賊胡, 自汝等所居處, 由入爲在如中, 國家問罪之時, 恐有俱焚之患, 守護進告等事, 各別盡心,' 亦嚴辭開喩爲白有齊。慶興段, 西水羅一堡疊入, 造山散民土兵, 咸德厚領率守城, 賊胡四度圍城, 不勝退兵叱分不喩, 賊胡部落一處乙, 乘虛焚蕩爲白有臥乎所。孤軍越境, 不出將令, 如此擧措, 雖似乖當, 叢爾孤城, 大盜隔絶, 勢未能及期節制事良中, 全城斬賊, 不失軍機, 實爲可嘉乙仍于, 同咸德厚, 因爲定將, 會寧海倉, 運米一百石, 輸送本堡, 使爲城守之粮爲白有齊。慶興府及所管造山·撫夷·阿吾地, 慶源所管乾元·阿山堡段, 自初不守, 賊胡恣意焚蕩, 往來不忌, 因爲賊路, 或自慶興海汀, 或自慶源地境入來, 橫行作賊, 擄掠山谷人畜, 極爲痛憤爲白良置, 六鎭精兵二百餘名, 至吉州赴戰, 加以倭寇之餘, 馬羣一空, 前日馳射之士, 今爲無馬之軍叱分不喩, 軍器段置, 盡爲倭人焚蕩, 至以長片箭, 束作火炬爲白乎旀, 避亂人民等持弓箭者, 盡爲倭賊殺戮乙仍于, 民間軍器, 幾盡埋置腐敗爲白乎等以, 據城防禦, 猶患不足, 涉遠追擊, 事勢極難乙仍于, 村居人民全數, 知委疊入城內, 俾免虜掠之患爲白如乎節段。吉州倭勢已縮, 六鎭胡亂漸熾, 不得已赴戰諸將中, 間間入送, 各其鎭將抄率精兵, 要路伏兵, 以絶橫行之路爲白有齊。大槩北道, 亦道理絶遠, 氷雪積塞之地, 距巡察使所在處, 十餘日程是白去等, 軍中機務, 一日萬變, 一依節制施行爲白在如中, 恐非兵家制變之道乙仍于, 其間急務段, 或有不報巡察使施行, 從後牒報爲白如乎節段, 巡察使節制內, '大將遆改, 捕亡將定體, 磨天嶺及端川等地, 率軍官進駐, 捕捉亡卒'亦爲白有在果。臣以幺麽小官, 未有寸功, 遽陞堂上, 天恩罔極, 尤不知死所。蹀血鋒刃, 有所不辭是白在果, 唯只吉州嶺東未掃蕩前段, 我軍北地亡卒, 似無逃向南關之理乙仍于, 先可留住軍中爲白有齊。臣以去年十一月二十一日, 遆大將爲白在如中, 十二月十四日, 備邊司移文內, '評事方行主將之令'是如爲白有臥乎所, 其間日數二十四日之久是白去等, 巡察使請罪狀啓, 時未達行在爲白有臥乎喩, 事涉可疑爲白乎旀, 會寧府使鄭見龍段置, 爲大將未滿一月, 遆易以兼節度使, 巡行六鎭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爲大將, 臣段只據北兵使節制, 任意北巡是如, 推考爲白乎旀, 各鎭將如茂山萬戶李蘭等, 無慮數十人, 各率本鎭土兵, 來會討賊事乙, 巡察使處當初始叱再再, 名錄牒報爲白有矣, 各堡鎭將乙, 幾盡遆易, 或一鎭堡將, 疊差二三人, 使將不知本任, 卒不知其將, 軍情搖漾, 士氣怠惰, 未知其由, 至爲悶慮, 欲報稟朝廷爲白良置, 擅自狀啓是如, 獲罪弦如, 不敢以聞爲白有如乎節, 前狀啓回送辭緣及備邊司關子五度, 不敢不答乙仍于, 自募軍功一等土及第車應轔乙用良, 依前由海路狀啓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二日。 성첩(成貼) 문서에 서압을 하고 관인을 찍어서 마무리하는 일. 또는 그 완성된 문서를 가리킨다. 側은 測의 오자인 듯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온성, 종성, 행영 세 진의 복병이 도적질하는 오랑캐를 격파하여 패주시킨 것과 육진의 정병을 불러서 본도에서도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과거 시행할 것을 청하는 장계 穩城鍾城行營三鎭伏兵擊走賊胡及請徵還六鎭精兵本道依他道設科狀啓 지난해 12월 13일 순찰사(巡察使)의 지휘에 의거하여 대장에서 교체된 뒤에 또다시 북병사의 지휘를 받아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안정시켜 모으고 오랑캐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원(慶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종성의 경내에 있는 부계리(浮溪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은 사통오달이라 도적질하는 오랑캐들의 요충지가 됩니다. 이에 온성(穩城), 종성(鍾城), 행영(行營) 세 진의 군사 각 50명을 뽑아 이곳에 매복시켜 적을 맞아 치게 하였습니다.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의 첩정에 '절해(節該).188) 세 진의 군사 각 오십 명을 평사의 지휘에 의하여 세 곳에 나누어 매복시켰는데, 정월 7일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랑캐들이 온성의 군사가 매복한 곳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많은 오랑캐를 쏘아 죽이고 승전을 타서 추격하였는데, 토병(土兵) 박언주(朴彥柱)와 오득침(吳得沈)은 각각 한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안장을 갖춘 오랑캐 말 두 필과 오랑캐의 활 한 장, 화살 아홉 개, 비단 칼집 한 부 등을 모두 도(道)에 올렸으며, 고을의 통사(通事) 도막동(都莫同)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위의 말들은 빼앗은 사람에게 주고 활과 화살, 기타 잡물은 경성영(鏡城營)에 올리고 오랑캐 머리 두 급(級)은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행영과 종성의 복병장들의 보고에 '같은 날 도적질하는 오랑캐 백여 명이 매복한 곳에 쳐들어와 접전을 벌였는데, 행영과 종성 두 군대가 힘을 합쳐 추격하여 많은 오랑캐를 쏴 죽이고 오랑캐들이 붙잡아 가던 남녀 모두 33명, 말 한 필, 부(釜)와 정(鼎) 각각 두 개 등을 다시 되찾았으며, 전날 사로잡혀 갔던 역자(驛子) 박세정(朴世貞), 김억수(金億壽)는 오랑캐들과 뜻을 함께 하여 변복하고서 오랑캐가 되었다가 오랑캐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뒤에 사로잡아 경성부에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위의 복병장 토병 이운로(李雲老)와 종성의 복병장으로 왜적을 토벌한 군공이 일등인 지방 사람 급제 강언수(姜彥壽)는 행영복병장(行營伏兵將)으로서 왜적을 토벌하러 의병을 일으킬 때 제일 먼저 호응한 공로로 공명고신(空名告身)의 안릉 참봉(安陵參奉)에 임명하였습니다. 신형(辛衡) 등은 그 당시 추격하여 혹은 오랑캐의 목을 베거나 혹은 우리 사람을 되찾아오는 공을 세웠으니 조정에서 명단을 마련하여 계획하여 시행해 주십시오.○ 순찰사가 신을 대장에서 교체한 후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으로 삼았다가 지난해 12월 그믐 무렵에 정현룡을 겸절도사로 전임시켜서 육진(六鎭)을 순시하게 하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대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의 관문(關文)에서 '오응태 대장을 교체하고 예전대로 평사를 대장으로 다시 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서 '겸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교체되고 북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도사는 왜적을 토벌한 정병은 자기가 통솔하는 부하라고 하면서 자신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보내주지 않는데, 요즘 날씨가 따뜻해져서 왜적의 기세가 점차 드세지는 때가 되니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신은 관문을 통하여 그에게 병사를 요청하겠거니와 조정에서도 각별히 사목(事目)을 내려주고 그 숫자에 의거하여 징병할 수 있도록 방어사로 불리는 정현룡에게 분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또 요즘 듣자하니, 팔도 가운데 남도에서는 이미 과거를 보았다고 하는데 유독 북도에서는 아직도 과거를 시행하지 않으니 백성들을 고무시키는 의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순찰사도 계청하지 않는 일을 보잘 것 없는 작은 관리가 계청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도내의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서서 한 사람으로 경성의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경성으로 정배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 좌수(富寧座首) 김전(金銓) 등이 있는 힘을 다해 분주히 노력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그 일이 성공한 것은 실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날 상을 논할 때 과거 공부한 유생과 내금위에게만 내렸으므로 억울한 것 같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경성 판관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 아직도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부(本府)도 또한 도회처라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장만하는데 유진 가장(留鎭假將)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라고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16일. -아마도 같은 조목 아래 묶인 하나의 장계가 아닌 듯하다.- 前年十二月十三日, 巡察使節制, 據遆大將後, 又以北兵使節制, 巡行六鎭, 安集散民, 鎭定虜情次以行到慶源, 還由鍾城境浮溪里爲白如乎, 同里亦四通五達, 賊路要衝之地是白去乙, 穩城·鍾城·行營三鎭軍, 各抄五十名, 同處伏兵, 要擊亦爲白有如乎節。穩城判官李訥牒呈內, '節該三鎭軍各五十名, 依評事節制, 分三處設伏爲白有如乎, 正月初七日, 胡賊不知其數, 穩城軍伏兵處, 圍犯爲去乙, 多數射中, 勝戰追擊, 土兵朴彥柱·吳得沈, 各斬一級, 胡馬具鞍二匹, 胡弓一張, 胡矢九箇, 入羅鞱一部, 幷以上道爲旀, 府通事都莫同段, 逢箭身死'是如爲白有去乙, 同馬匹段, 所奪人還給, 弓矢雜物段, 鏡城營上, 胡馘二級段, 監封上送爲白齊。行營及鍾城伏兵將馳報內, '同日賊胡百餘名, 伏兵處來犯接戰, 兩軍同力追擊, 多數射中, 賊胡擄去爲如乎男女幷三十三名, 馬一匹, 釜鼎各二等物, 還奪爲旀, 前日被擄驛子朴世貞·金億壽段, 胡賊同心, 變服爲胡爲有如可, 賊胡不勝退兵時生擒, 鍾城府囚禁'是如, 馳報爲白有齊。上項伏兵將土兵李雲老, 鍾城伏兵將討倭軍功一等土及第姜彥壽, 行營伏兵將討倭倡義時, 爲先響應功, 以安陵參奉空名告身良中, 塡差爲白有在。辛衡等登時追擊, 或斬胡馘, 或奪我人之功乙良, 朝廷以磨鍊施行爲白只爲。○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 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在, 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入歸'是如爲有臥乎,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可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仄聞爲白乎矣, 入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座首徐遂·李麒壽·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六日【疑非一啓繫圈下】 절해(節該) 문건이나 어떤 사람의 말을 전문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요지만 간추려 기재할 경우에 쓰는 용어이다. 《이문집람(吏文集覽)》에 의하면, 성지(聖旨)와 공문서에는 반드시 첫마디에 '절해(節該)'라는 두 글자를 덧붙이는데, 이는 곧 '그 구절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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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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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단천에서 왜적을 격파한 사연과 군기시 최동망과 이성길을 종사관에 임명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 端川破倭賊緣由及請軍器崔東望李成吉從事官差定狀啓 지난해 12월에 신이 북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고 올해 정월 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오던 차에 경성(鏡城) 주촌(朱村) 도중에서 순찰사의 관자(關子)를 받아보니, 신을 다시 대장으로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길주성 밖 10여 리에 있는 우위장(右衛將) 한인제(韓仁濟)의 군중으로 나아가 장수와 병졸들을 호궤(犒饋)하고 이달 18일에 본주(本州) 다신리(多信里)에 나아가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과 중위장(中衛將) 오응태(吳應台)가 거느리는 장수와 병사들을 호궤하였습니다. 그리고 본처(本處)에 머무르면서 길성(吉城)과 영동(嶺東) 두 곳의 상황을 보고서 대응하려고 하였는데,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직접 군중에 와서 말하기를 '단천에 남아 있는 왜적이 제멋대로 횡포한 짓을 하여도 군사가 모두 보병이라 겁을 먹고서 지레 궤멸되어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기병과 사병(射兵)을 나눠 주십시오.'라 하며 간곡히 청하였습니다.길주는 군사를 두 곳으로 나눠 왜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군사를 다른 도로 옮기는 것은 형세상 좋지 않기에 이전부터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아직 출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길주 두 곳의 왜적은 기세가 꺾여 머리를 움츠리고 있으니 강한 아군을 그대로 쉬게 하면서 한 나라 한 도의 왜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사리로 보아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에 즉시 정예 기병 이백 명을 뽑아 네 부대로 나눠 1대장은 구황(具滉), 2대장은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인원침(印元), 4대장은 고경민(高敬民)을 나눠 정하고서 각각 50명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이달 20일에 다신리를 출발하여 산길을 따라 22일 단천(端川)에 이르렀습니다.다음날 아침에 네 부대는 성 밖 이십 리 쯤에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성 밖 5리까지 나아가 싸움을 걸게 하였습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왜적이 연승에 자만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성에서 나와 곧바로 단천의 군사를 추격하니, 거짓으로 패한 양 도망칠 적에 피곤한 말에 탔던 병사가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왜적은 또다시 기세를 올리며 멀리까지 추격하여 곧바로 매복한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네 부대의 복병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중간을 자르며 혹은 그 뒤를 끊어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습니다. 왜적들은 돌격하는 기병을 갑자기 만나 다급하여 어찌할 줄 몰라 철통을 마구 쏘아댔지만 모두 헛쏘기만 하고 맞히지 못하였으며,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어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밑까지 추격하여 거의 모두 활을 쏴서 죽였으며, 살아남은 자는 겨우 30여 명으로 그들도 모두 화살에 맞아 성으로 들어갔습니다.대개 죽인 왜적의 숫자는 적어도 백여 명에서 내리지 않을 것인데 북도의 군사들은 기병이라 오로지 말을 타고 활을 쏘기 때문에 일일이 목을 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십여 리에 걸쳐 싸우는 동안 단천의 보병이 뒤를 따라오면서 귀와 목을 수습하였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부대가 죽인 것을 말하자면, 1대는 왼쪽 귀 21개, 2대는 14개, 3대는 15개, 4대는 11개로 모두 61개이니, 감봉하여 위로 올렸습니다.이달 19일 길주성 밖의 복병장(伏兵將) 원충서(元忠恕)의 보고에 '왜적 백여 명이 남문 밖 1리쯤에 나와 주둔하고 있는데, 왜장 한 명이 말 두 마리를 모는 두 부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나와 2리쯤 가서 말을 모는 두 명의 왜놈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말을 타고 3리쯤 갔습니다. 이에 제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십여 명을 이끌고 잠복하여 망을 보다가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적장이 깜짝 놀라 말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떨어졌습니다. 이에 제가 활로 쏴서 맞히고 종성의 갑사(甲士) 신수(申守)가 그 목을 베었습니다. 왜적 보병 한 명은 화살에 맞고 거꾸러졌는데 문 밖의 여러 왜놈들이 부축하고 성으로 들어가 목을 베지 못하였습니다. 적장의 왼쪽 귀를 잘라 또한 감봉하여 올려 보내며, 그가 입었던 비단 옷 3건, 환도 1자루, 비단 안장, 가죽 안장, 말은 접전을 벌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은 논하여 나눠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의 첩정에 '고을 백성의 사노비 사랑금(思郞金)이 왜적 목 하나를 베어 바쳤으며, 복병군인 절노비 윤희(尹煕)도 또한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원충서의 보고에 '부령 정로위(定虜衛) 차덕홍(車德弘)이 목 하나를 베었습니다.'라고 하니, 모두 4개의 목을 올려 보내니 도합 65개의 목을 베었습니다. 무릇 이것은 왜적을 격파한 자잘한 일이라서 낱낱이 공을 기록하여 계문하지만, 벼슬과 상은 한계가 있고 왜놈의 귀는 한정이 없으니 조정에서 은혜 베풀 때 난처함이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였기에 전날 가부와 임명 두 곳에서의 전공은 모두 기록하여 계문하지 않았습니다.신이 대장에서 교체된 후로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저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을 때 순찰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모두 등급을 나눠 순찰사에게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이번 단천의 전공을 아뢰지 않았다면 다만 전례를 어기며 사졸들의 희망을 어그러트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천견으로 마음대로 억누른 것이니 또한 온당치 않기에 전례에 따라 전공을 기록하여 보고합니다. 빼앗은 물건은 또한 기록하여 계문할 것인데, 군수품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군의 상품으로 내려 주려고 올려 보내지 못하니 대단히 황공합니다. 그 가운데 왜총통은 전날 비변사의 공문에 의거하여 파괴된 것 20개를 이미 올려 보냈으며, 이번에 뺏은 20개도 뒤미처 올려 보내겠습니다.본도의 군기가 탕진되어 조처하기에 급급한데, 그 중에서도 부레풀, 활시울, 화살꼭지가 가장 절실합니다만 장만할 방법이 없어 대단히 걱정되오니 조정에서 조치하여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군마와 병무(兵務)가 번거로운데 용렬한 낮은 관리가 오로지 문서를 맡으니 걸핏하면 일이 어그러집니다.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과 군자 직장(軍資直長) 겸성균관 권지학유(兼成均權知學諭) 이성길(李成吉)이 바야흐로 군중에 있으므로 종사관(從事官)의 칭호를 주고 문서를 맡게 할 생각이오나 보잘 것 없는 신으로서 나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는 동렬의 문관을 막좌로 임용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기에 감히 마음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문서를 지니고 가는 사람은 경성으로 귀양 온 진무(鎭撫) 김귀겸(金貴謙)으로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원, 종군하여 칼날 아래서 접전을 벌여 군공을 참록(參錄)된 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차서를 갖추어서 잘 계달해 주십시오.만력 21년 계사년 정월 27일. 前年十二月分, 臣北行六鎭, 今年正月十三日, 回還吉州次, 以在鏡城朱村道中, 得巡察使關子, 以臣還定大將爲白有去乙, 進到吉州城外十餘里許右衛將韓仁濟軍中, 餉勞將士, 本月十八日, 進到本州多信里, 餉勞左衛將柳擎天·中衛將吳應台所率將士, 因爲留駐本處, 欲爲吉城嶺東兩處相機策應爲白如乎, 端川郡守姜燦親到軍中言內, '端川留賊, 恣意橫行爲良置, 兵皆步卒, 怯懶先潰, 下手不得, 分軍馳射,' 亦懇懇說道爲白齊。吉州段, 置兩處分兵, 與賊相持, 移兵他道, 勢似非便乙仍于, 自前諸將論議不一, 未果出兵爲白有如乎節, 思量爲白乎矣, 吉州兩賊, 勢挫縮頭爲白有去等, 坐休強兵, 不討一國一道之賊, 事理乖當爲白乎去。卽抄精兵二百騎, 分四隊, 一隊將具滉, 二隊將朴銀柱, 三隊將印元忱, 四隊將高敬民, 岐如定體, 各率五十名, 同月二十日, 多信里離發, 由山路, 二十二日到端川, 昱朝四隊藏兵於城外二十里許, 使端川軍三十名, 進次城外五里許, 挑戰爲白乎矣。城中留賊狃於屢勝, 略不顧忌, 二百餘名, 一時出城, 直追端軍爲白去乙, 佯敗還走之際, 疲馬之卒, 爲賊所殺, 賊又乘勝遠追, 直至伏處爲白去乙, 四隊伏兵, 一時突出, 或遮其前, 或截其腰, 或斷其後, 射矢如雨爲白乎矣。倭賊猝遇突騎, 倉皇失措, 多放鐵筒爲白良置, 皆爲虛放不中, 奔走無暇, 莫敢相抗。追至城底, 幾盡射斬, 僅餘三十餘名, 箇箇中箭入城爲白齊。大槩殺賊之數, 少不下百餘名是白良置, 北軍騎兵, 專以騎射, 未得一一斬馘, 轉戰二十餘里, 端川步卒, 從後拾得耳級是如爲白良置, 未知厥數幾何是白在果, 四隊所斬段, 一隊左耳二十一, 二隊十四, 三隊十五, 四隊十一, 合六十一箇, 監封上送爲白齊。本月十九日, 吉州城外, 伏兵將元忠恕馳報內, '倭賊百餘名, 南門外一里許出屯, 有一倭將, 挾兩倭雙牽馬, 向南出來, 至二里許, 牽馬二倭乙, 落後隱置, 單騎至三里許爲有去乙, 同元忠恕, 亦親率精騎十餘名, 潛伏伺候爲白有如可, 一時高聲突出, 賊將蒼黃不能制馬, 因爲墜落爲白去乙, 元忠恕射中, 鍾城甲士申守斬頭, 步倭一名中箭顚仆爲白有去乙, 門外諸倭, 扶曳入城, 斬頭不得, 同賊將左耳割取, 亦爲監封上送爲白乎旀, 所着錦衣三件, 環刀一柄, 錦鞍甲鞍馬段, 接戰有功人, 論賞分給'爲白有旀, 吉州牧使鄭煕績牒呈內, '州民私奴思郞金, 斬納一級, 伏兵軍寺奴尹煕, 亦斬一級,' 又元忠恕馳報內, '富寧定虜衛車德弘, 斬一級,' 合四耳, 亦爲上送, 都合六十五級是白齊。凡此些少破賊事良中, 一一錄功啓聞爲白在果, 爵賞有限, 倭耳無窮, 朝廷施報有所難處爲白乎去, 私自妄料乙仍于, 前日加夫臨溟兩處戰功乙, 皆不錄啓爲白有去乎。臣遆大將之後會寧府使鄭見龍代將時, 巡察使關據幷只分等, 巡察使處牒報是如爲白去等, 今此端川戰功, 不爲上聞爲白在如中, 非徒有乖前規, 士卒缺望, 一己淺見, 擅自沮抑, 亦爲未安乙仍于, 依例錄功報聞爲白齊。所奪物件, 亦爲錄啓爲白良置, 當此軍需板蕩之時, 軍賞用下次以上送不得, 極爲惶恐, 其中倭銃筒段, 前日備邊司關據破件二十箇, 已爲上送爲白有如乎節, 所奪二十箇, 追于上送爲白齊。本道軍器蕩盡, 措備急急, 魚膠弓絃弓箭帽最關爲白乎矣, 辦出無路, 極爲悶慮, 朝廷以措置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許多軍馬戎務似煩, 迷劣下吏專掌文書, 事多乖錯弦如, 輸城察訪崔東望·軍資直長兼成均權知學諭李成吉, 方在軍中爲白乎等以, 從事官稱號帶率文書次知, 亦計料爲白良置, 臣以幺麽幕下之官, 不少同列文官乙, 任爲幕佐, 事甚乖當, 不敢擅便爲白乎旀。書狀陪持人段, 鏡城定配人鎭撫金貴謙, 當初倡義時, 自募從軍, 接戰鋒刃, 參錄軍功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二十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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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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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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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家狀 孫男承百公諱翼鎭字景進初諱義健又曰仁基號南崖居士我洪氏其先豊山人系出高麗國學直學之慶國學公有子侃官都僉議舍人知制誥世稱洪崖先生以忠義文章稱麗十二大家有文集行于世界傳至諱龜知麗運將訖以右領郞將退居于高陽而終世稱以明哲炳幾入本朝諱伊官南平縣令生諱樹官成川府使卜居羅州生諱貴枝早擧生員不仕文章鳴世事載湖南八詠詩及錦城六章歌生諱漢義官健元陵參奉自羅州又移南平生諱漣官司導訓鍊主簿生諱民彦號壺隱以學行薦除司僕寺主簿宣廟倭亂擧義樹勳光海時坐誣獄謫寧越三年而放還敍職不就生諱時梃號蒼崖以學行薦除繕工濟用兩監奉事壬辰及甲子之亂擧義勤王有孫曰錫一肅宗丁巳與湖南儒生千餘人聯疏伸救尤菴宋先生之被誣贈戶曹參議公之五世祖也高祖諱益河贈吏曹佐郞曾祖諱以東贈吏曹參議祖諱壽源號酒隱累擧孝廉不起贈左承旨考諱鳳周號石崖又南坡生員文科官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爲正廟名臣妣晉州鄭氏馨東女昌寧曺氏夏裕女晉州鄭氏慶文女公以諱顯周生出爲伯父嗣公以英宗丙戌八月二十日生于道川本里銀沙四歲隨長者至村塾聞諸兒讀字聲輒諳誦不忘人皆驚異之五歲王母淑夫人吳氏卒隨諸父哭泣哀戚有若成人樣七歲上學其對冊受課欽膝端坐如泥塑反覆尋繹一字一句不敢放過或至忘寢食及長受業于夢村金先生及三山金先生博極諸書文理大就石崖公以歲癸卯擢文科明年甲辰由正字檢閱爲宗簿寺主簿時朝廷有事於追上英宗大王貞聖王后徐氏尊號貞純王后金氏加上尊號莊獻世子追上尊號惠慶宮洪氏加上尊號及文孝世子冊封上命宗簿寺釐刊璿源譜石崖公與諸僚奉敎刊進睿覽而嘉之宣醖賜裘時石崖公猝中風眩自直中舁還于舊館公時年方十九千里侍疾奉還于家旬望之間官隷郵卒綜錯于路而隨處順應咸得其宜而刀圭無間於驛路官僚及皀隷咸嘖嘖稱之曰草野之中有如此之才而恨不能用及還左右就養不脫冠帶聞有良醫靈藥則雖遠路必致雖貴價必辦其或語言木訥則代話未吐之辭而不違片言肢體痿麻則將攝扶持而不違寸志如是十三載如一日誠孝所到石崖公病漸向可克享隆耊己酉歲値歉荒朝廷多事石崖公雖病臥江湖憂深廊廟力疾草疏數千言使公奉疏上達天陛之下公之此行於國於家可云順其職耳送者如堵贐以詩及序而稱之者多進士林公德鎭詩曰曾聞司馬好壯遊書劒遍尋江漢湄孰若吾君斯一擧悅親佑國兩兼之人稱道得洽好云庚戌正廟別設賓興之科試經術文章之士公應是擧獻賦紫宸正廟親臨考試宸墨煌煌賞賜書冊硯墨人皆爲之榮焉尹公碩茂書賀于石崖公曰胤妙新製特蒙恩批榮光動耀湖山千里之外吟病老靑衫其於仰感俯慈之地殆若肉骨而蘇瘠仰賀千萬徐公一榮抵書于公有曰聞兄獻賦紫宸特夢恩批煌煌雲漢焜燿券頭榮光動於湖南千里之外使吟病老親聞好音而耳淸心爽宿疴快袪爲子悅親有如此健羡可已人之稱道如是而公則不以外至者爲欣戚焉公學問之博孝友之篤宣著遠近道內章甫累擬上聞于朝石崖公每止之曰學優則自有出仕之日諸章甫爲之相與語曰昔宋之呂榮公有至行茂學而以其父正獻公簡嚴廉潔故人不敢以其子之賢言于朝不能大用今石崖公望重朝野而亦不欲使其子登朝廉謹家法殆近呂公父子云丙辰春石崖公易簀于正寑生計屢空而喪葬盡禮衿紳之來吊者以屢千計而哭泣之節應接之儀少無苟矯而中於禮度人莫不稱石崖公有克家子矣戊午服闋南平倅鄭侯持容擧公才行薦報于方伯明年己未登聞于朝上年冬至正廟下敎中外求進農政是歲春三月沔川郡守朴公趾源進課農少抄正廟覽極稱善夏四月公又繼進疏陳農政尾附最要十二條其一言燥濕之地種有早晩之異宜其二言穀有溫凉之異性適期而播穫之其三言早種之宜其四言歲必有旱澇之異其五言乾播之不可緩其六言役民之宜其七言取種之良其八言徵稅之宜其九言擴張貯水池其十言泉流普霑其十一言冬耕之宜其十二言資給牛刀也正廟嘉納稱達時務除英陵參奉不就自是尤着力于頣神圖書自娛探玄鉤奧優游不迫涵養益深籣滋九畹葸茂百畝庶幾乎竢時而將艾也明年庚申夏正廟昇遐公益切如喪之痛盖以累蒙恩寵而報效無地故也又明年辛酉秋七月初五日考終于正寢及終謂諸子曰修短有數順天所授顧何傷焉惟老慈在堂而味得終養再霑天恩而一未報效徹天之恨也葬南平縣法古川上負坎面离之原在祖考酒隱公墓階下公姿禀醇厚氣宇犖卓家有賢父詩禮早聞於庭趨外就賢師門路不差于繩尺少年試銳于玉陛咫尺御考恩批三上之選壯歲被選于才行薦報疏陳農政擧目十二之要褒賞非公所望而榮耀動於湖山千里除命雖出宸簡而頣養寤寐於澗阿涵泳日多積日富遭値聖明學優而仕魚水之會指日可期而龍馭遽爾賓天公亦大歸于翌年士之出處道之行湮其亦有關於氣化之盛衰也豈人智之可爲哉夫人幸州奇氏贈吏曹參議泰良女後公一年而生于英宗丁亥九月十七日歿亦後公四十四年憲宗乙巳十月初六日也享年七十九墓祔公墓左生三男二女男祐德祐吉祐弼女適坡州廉在學濟州梁得浩祐德娶海南尹氏得元女生一男後娶商山金氏必欽女生一男三女男長承說次承祿女長適晉州河錫奎次適驪興閔致榮次適咸陽朴萬赫祐吉娶金海金氏在赫女無育取伯兄子承祿爲後祐弼娶錦城羅氏贈吏曹參議纘賢女生二男二女男長承九次承百女長適尹誠儉次適尹文儉皆咸安人廉在學生一男曰性直梁得浩生二男曰棨曰㯳內外孫合若干人嗚呼以公才學輪困經綸未試於當世其形於文字可爲學子之指南爲治之法門者劫於六丁殆盡蕩失惟御考試券及農政疏草本僅僅無恙殆若神護而鬼秘使人得以像想公智德之萬一其宸翰耀丹則不徒爲公榮儘可百世欽奉無斁者也至若農疏試有如上舍韓公馨履所謂深得古聖人制治之意指摘當時病農之弊後之有意於仁政者必來取法焉然則我公之言雖不得行於一時實萬世無窮之金科玉條也承百生不及公年 姱言令德不能詳其一一謹摭遺文之可徵參以石崖公文集僭爲家狀以資立言家採憑焉崇禎紀元後五丙子月日不肖孫男承百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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