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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촉룡26)서당기 서하 이민서 燭龍書堂記 【西河 李敏敍】 북관(北關)은 옛날 숙신(肅愼)과 말갈(靺鞨)의 터전으로 도성에서 가장 먼 지역인데, 여러 성조들이 근심하고 모신(謀臣)들이 경영함에 변방 수비를 견고히 하고 외적을 막는 일을 급무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변경의 성곽을 담당하는 신하는 대부분 무인을 등용하였으니, 본래 절의(節義)와 명교(名敎)의 방도를 널리 퍼트릴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 이 지역을 소유한 지 거의 2백 년이 지났으나 비루한 토속(土俗)이 다 일신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들이 보고 감화되는 바가 없으니 종종 사납고 교활한 기운을 믿고 혼란한 시기에 배반한다.하늘이 인재를 내릴 때 도성 안팎,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어찌 북쪽 지역의 인사(人士) 중에 훌륭한 재주와 특별한 능력, 문학과 의로운 행실이 다른 고을 사람에게 비할 이가 유독 없으랴. 다만 가르치고 인도할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북방의 일을 경영하는 자가 이것을 보면 어찌 심사숙고하여 조금이라도 도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북평사(北評事)를 두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성상이 등극하신 지 4년째 되던 해에 비로소 다시 두었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던 이단하(李端夏) 공이 먼저 여기에 선발되었고 또 민정중(閔鼎重) 공을 관찰사로 임명하였는데, 두 사람이 매우 마음이 맞아 북방의 일에 대해 거행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함께 상의한 뒤에 시행하였다. 이에 함께 도모하기를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니, 무비(武備)는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절의를 드러내고 명교(名敎)를 세울 방법을 도모하여 부로(父老)를 찾아가 정문부(鄭文孚) 공이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한 일을 발굴해서 조정에 보고하여 표장(表章)하였다. 또 거사를 일으킨 지역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를 함께했던 의사(義士) 약간 명과 아울러 향사하였다. 또 사당 옆에 학사(學舍)를 지어 '촉룡서당(燭龍書堂)'이라 이름 짓고 그 지역 사인(士人) 중에 독서하여 의리를 사모하는 이를 머물게 하였다. 이군(李君)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관찰사 공의 조력 덕분이었다.아, 요즈음 외지를 맡은 이들은 교화에 뜻을 두는 이가 드물며 더구나 북평사의 직무는 군사 업무로 절도사를 보좌하면 그만이니, 두 사람이 일의 본말을 참으로 알아서 국가를 위해 깊이 고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정해진 업무 외에다 힘을 쏟아 부지런히 이러한 일을 하려 하겠는가.또 정공(鄭公)이 떠돌며 숨어 지내다가 기이한 계책을 떨치고 큰 어려움에 맞서 안으로는 적당(賊黨)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한창 확장되는 외적을 섬멸하였으니, 그 공덕과 계획이 훌륭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묻혀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두 사람을 만나서 크게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떤 일이 드러나고 묻히는 것은 본래 때가 있는가 보다. 황량한 절역(絶域)에서 사람들은 예의(禮義)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선비들은 시서(詩書)의 교훈을 익히지 못하여 어리석고 야만스러워 서울로 가는 길을 스스로 끊어 버렸는데, 지금 열사(烈士)의 풍성(風聲)으로 드러내 주고 문학과 행실을 강습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여 그 미혹된 점을 이끌어주고 그 어두운 점을 인도해 주어 마치 촉룡(燭龍)이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밝혀 주는 것처럼 시원하니, 가르침이 흥성하고 폐지되는 것은 또한 그 적당한 사람을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보다.그렇다면 두 사람의 뜻은 아마도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이로 인해 단서를 열어서 옛날의 가르침을 익혀 고무되고 진작되어 풍속을 선하게 하고 그 비루함을 바꾸며 나아가 배우는 자들은 모두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되게 하여 국가의 문교(文敎)의 혜택이 먼 지역에까지 입혀지기를 바라는 데에 있으니, 두 사람이 이 지역에 은혜를 내려 가르침이 후대에 이루어져 후인들로 하여금 그 자취를 보고 그 가르침에 감복하여 추모하고 칭송하며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 또한 어찌 끝이 있으랴. 그런데 그 가르침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이 서당에서 비롯될 것이므로 내가 흔쾌히 기문을 짓는다. 그 서당을 명명한 의미는 북평사 군이 전해 받은 내력이 있을 것이다. 北關, 古爲肅愼·靺鞨之墟, 於京師最遠, 列聖之所顧憂, 謀臣之所經營, 莫不以固邊守捍外侮爲急, 而封疆城郭之臣, 率皆選用武人, 固未遑於節義名敎之方也。是以國家有此土, 迨將二百年矣, 而土俗之陋, 未盡變, 而俊造不興, 愚民無所觀感而化, 則往往負其桀黠之氣, 反側於危亂之時。夫天之降才, 非有內外遠近之殊也, 豈北之人士, 獨無長才異能, 文學行義, 與他州比者哉。特以敎導之無其具耳。營度北方之事者, 觀於此, 豈不可以長慮却顧而少爲之圖也。北評事之不置, 久矣。上之四年, 始更置之, 李侯端夏, 以弘文館修撰, 首膺是選, 而又得閔公鼎重, 爲觀察, 使二君相得甚驩, 於北方事, 事有可擧, 必與之咨度而後行之。於是相與謀曰: "人未知方, 武備不足恃也。" 乃圖所以表節義立名敎者, 訪於父老得鄭公文孚倡義討賊之事, 聞于朝而表章之。又立祠於其起事之地, 與同事者義士若干人, 而幷祀焉。又置學舍於其傍, 名之曰: "燭龍書堂", 以處其士人之讀書慕義者, 李君實主其事, 而終始有成者, 亦觀察公之力也。嗚呼, 今之居方州者, 鮮克置心於敎化, 況評事之爲職, 只可以戎事佐節度, 非二君之眞知本末, 爲國家深長思者, 誰肯出力於文法之外, 勤勤而爲此哉。且夫方鄭公羈旅竄伏, 奮奇計抗大難, 內鋤賊黨, 外殲方張之寇, 其功謀可謂壯矣, 而抑塞湮鬱, 不克彰徹於世, 今乃得二君而大顯, 事之顯晦, 固自有時哉。而荒遐僻絶之域, 人不知禮義之訓, 士不習詩書之敎, 蠢愚羯羠, 自絶於上國, 而今乃暴之以烈士之風聲, 進之於文行講習之塗, 導其迷而牖其冥, 廓然如燭龍之爲明於日月之所不及, 敎之興廢, 抑亦有待於其人乎。然則二君之意, 其欲使夫此邦之人, 因此發端, 講習古訓, 鼓舞奮振, 以至於善風俗易其陋, 而學者皆爲才且良, 庶國家文敎之澤, 被於遐遠也, 則二君之嘉惠此邦, 敎成於來世, 使後之人, 覽其跡服其敎, 追思頌歎而不能忘者, 亦豈有窮也哉。而其敎之所由興, 將自此書堂始, 故余樂爲之書焉。其名堂之義, 評事君蓋有所受云爾。 촉룡(燭龍) 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주는 용이라는 뜻이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에 "태양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텐데, 촉룡이 어째서 비춰 주는가.[日安不到 燭龍何照]"라는 말이 나오는데, 후한(後漢) 왕일(王逸)이 해설하기를 "하늘의 서북쪽에 해가 없는 어둠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은 용이 촛불을 입에 물고 비춰 준다.[天之西北有幽冥無日之國 有龍銜燭而照之也]"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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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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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창열사 봉안문 彰烈祠奉安文 유세차 을사년 갑신일이 초하루인 9월 25일 무신일에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이단하(李端夏)는 삼가 예자(醴粢)와 희생과 폐백으로 의병 대장 정공에게 고합니다.삼가 아룁니다.아아! 우리 공께서는참으로 문덕과 무위(武威)를 갖추었으니나라를 경영할 재주이며조정 중신의 인재였네.지난 임진년에융막의 보좌로 나갔는데대단히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왜놈이 북방을 침범하였네.반란의 백성들이 함께 일어나저들의 매서운 악독함을 도왔어라.성과 진을 훔쳐 장악하니귀순할 생각 없어 역도라 칭하네.왕자와 대신원수와 수령거의 모두 적에 잡히고 함락되었는데다만 공만 남았어라.풀숲으로 달아났다가은밀하게 의사들을 불러 모았네.의사의 대장은그 성이 이씨16)라네.최씨와 지씨및 강씨17)가 협력하였네.먼저 역적놈을 죽이고이어서 날뛰는 왜적을 토벌하였어라.흉도를 죽이고 난을 평정하여다시 북방을 차지하였네.공은 백 대에 남아 있으니잊게 할 수 있으랴.고을에서 추모하여사우를 건립하였으니이에 무계의의병을 처음 일으킨 곳이라네.당시의 주인은참으로 이공이었으니우리 공을 맞이하여 이르니큰 성공의 토대였다네.업적이 가장 많았으며마침내 충성을 다하다가 죽었구나.의로움이 공과 짝이 되니그 보다 나은 이가 없어라.두세 명의 동지가논이 정해지길 기다렸네.사원 담장 밖에따로 작은 집을 세우니마을의 학자들이이곳에 거처하였네.높은 덕행 우러러 존모하여교화가 우뚝 서게 되었어라.이로부터 먼 북방에대의가 밝게 빛났네.이에 좋은 때를 잡아신위를 만들어 영령을 모셨네.혼이여! 돌아와서이곳에 기대고 의지하소서.선비들이 다 모였으니예를 어그러트리지 말라.부디 와서 흠향하여영원토록 후세를 인도하고 도와주시라.삼가 깨끗한 제수 올려경건히 고하나이다.상향. 유세차 을사년 갑신일이 초하루인 9월 25일 무신일에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이단하(李端夏)는 삼가 예자(醴粢)와 희생과 폐백으로 의병 대장 정공에게 고합니다.伏以猗歟我公允文允武經濟之材廊廟之具粤在壬辰出佐戎幕遭時孔艱島夷寇北叛民幷起助厥威毒竊據城鎭忘順稱逆王子大臣元戎長吏陷賊殆盡獨有公在竄身草莽密結義士義士之首其姓曰李惟崔惟池曁姜恊力先誅逆竪繼討狂賊夷凶靖亂再奠北方功存百世俾也可忘鄕邦追慕爲建祠宇于此武溪首事之所當時主人寔惟李公邀我公至肇基大功勞績最多竟死于忠義配于公無出其上二三同志追竢論定祠墻之外別設小齋里中學子爰處爰居仰止景行樹之風聲從此遐荒大義揭明玆捐吉辰設位妥靈魂兮歸來是憑是依章甫咸集禮秩無虧庶垂欽格永世啓佑恭伸明薦用表虔告尙饗 이씨 이봉수(李鵬壽)를 가리킨다. 최씨와……강씨 최씨는 최배천(崔配天), 지씨는 지달원(池達源), 강씨는 강문우(姜文佑)이다. 이붕수와 이들 세 사람에 대해서는 권4 〈종의인별록(從義人別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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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임진년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 이식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조 26년이다.30)-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승승장구하며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1)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도로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 다투어 수령과 변장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나눠주어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죽음은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32)의 민가에 숨자,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强請)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를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문을 닫아걸고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의 배반한 자들은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이들을 국세필 등 13인과 함께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조리돌림 하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렀는데,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엿보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蹟)》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33)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비난하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양보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빼앗아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로 줄 것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불러 들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면서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이었다.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이에 정현룡은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였으며, 정문부의 장좌(將佐)들은 이따금 불려가 매질과 고문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였으니, 공적을 세웠는데도 해를 입었다고 하여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옮겨주었다. 정문부가 비로소 병권을 놓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으며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다른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승세를 탄 병사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과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34) 같은 옛 날 영토가 오랑캐의 땅35)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36)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하였다. 이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이라서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즐겨 물어서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사실이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사람으로 출신(出身)인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사람으로 출신인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사람으로 출신인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사람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등이다.이상은 선부군의 사실을 기록한 말단에 정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의 성명으로, 겨우 초고에서 분별한 것이다. 또한 여정의 이름의 소주 아래에 길주(吉州)와 명천(明川) 네 글자를 나란히 쓰고 그 아래는 빠져 있으니, 아마도 두 고을의 의사를 채록하려 했으나 고증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또 들으니 경성(鏡城)과 육진에도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하니, 내가 추가로 채방하여 아래에 별록을 만들었다. -순찰사 민공에게 보고한 토적의사(討賊義士)의 별록에 보인다.- 아들 이단하는 절하며 삼가 기록한다. 萬曆二十年【宣祖二十六年】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明·鏡·富等鎭, 入會寧擄王子, 從渡江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 渡江歷入穩城·慶源·慶興沿海路, 還趨鏡城。於是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鏡城則寺奴鞠世弼【世弼乃是官奴, 寺字或誤, 疑卽寺奴而移屬官奴。】爲酋,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八月淸正使一偏將, 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安邊各置重兵, 以爲聲援。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 獲脫免。遂與前監司李聖任·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伯謙·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文孚復窘匿禦亂里民家, 儒生等聞而赴之。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及鍾城府使鄭見龍·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粮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已者爲裨將。【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 斬以徇諸鎭。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國耳。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 "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又邀見龍等, 主文孚軍, 六易將軍, 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其間誤戰機, 多以此故。見龍初恇㥘,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 止之。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 往往被追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嗚呼, 關北俗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能知推擧一介從事, 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返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顧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隰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記其實者。頃於從役之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餙,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槩, 僭付于事蹟之末。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奉事吳大男·鏡城出身權管姜文佑·訓導李生鵬壽【戰死】·朴銀柱·儒生崔配天·池達源·朴惟一·金麗光【戰死】·吳允迪·富寧出身車應麟·朴克謹·儒生金銓·金鏡·車得道·慶源人鄭允傑應星父子·鏡城出身金嗣朱·崔敬守·南繼仁【本官奴】·穩城余貞【本官奴癸未從申砬有戰功至是死於嶺東之戰】右, 先府君記事末端, 同鄭公起兵人姓名, 僅辨於草稿中。且余貞名小註下, 列書吉州明川四字, 而其下缺, 蓋必採錄兩邑義士而無可攷, 又聞鏡城及六鎭, 亦有闕漏之人, 不肖追加採訪, 有別錄見于下。【見下報巡察使閔公討賊義士別錄中】 男端夏拜手謹識。 선조 26년이다 1592년은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의려록 전적 박흥종 義旅錄 【典籍朴興宗】 임진년 7월에 왜적이 승승장구하여 함경도에 들어가서 마쳔령(磨天嶺)을 넘었는데 병사들의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으니, 절도사(節度使) 한극함(韓克諴)이 싸움에서 패한 뒤로 여러 고을이 따라서 와해되었다. 14일에 역적들이 경성(鏡城) 지역에 들어가 드디어 왜놈을 인도하여 북으로 가게 되어 강가를 따라 왜적이 가득하였으니,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으므로 다시 이 지역을 수복할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 흉도들이 몰래 일어나 왕왕 역적들과 더불어 당여(黨與)를 지으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이 다 적당의 괴수였다. 국세필은 군사를 거느려 성을 점거하여 왜적과 더불어 후원하는 형세를 맺고 백성을 위협하여 장차 산림을 수색하여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니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머리를 움츠리고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유생 이붕수(李鵬壽)가 탄식하고서 울분을 토하며 말하기를 "나라가 어지러워 흥망을 알 수 없는데, 흉도가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켜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라 하고 이에 드디어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꾀하고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인망이 있는 자를 구하여 주장(主將)을 삼으려고 했는데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적에게 함락되었던 중에 탈출해서 도망하여 떨어진 옷을 입고 부령(富寧), 청암(淸巖) 지역을 다니면서 걸식하였는데, -이 당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주의 가운데 칠척의 몸, 아득한 곳에 홀로 서니 이웃할 그림자도 없네. 다만 청산에 길을 빌릴 수 있으니, 석양에 오랫동안 오가는 사람이로다.[宇宙中間七尺身, 蒼茫獨立影無隣. 惟有靑山能借路, 夕陽長作往來人]"-, 굶주려 능히 다니지 못하고 더러는 나물을 먹었다.용성(龍城)에 이르러 무인(巫人)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찾아갔는데, 한인간이 자세히 보고 말하기를 "평사공(評事公)이 아니십니까?"라 하니, 평사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나는 서울 상인인데 난을 만나 돌아가지 못하고 걸식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대는 어찌 망언을 하느냐?"라 하였다. 한인간이 속으로 그인 줄 알고 즉시 집안으로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였다. 추석에 한인간이 그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제수(祭需)로써 평사에게 올리니 평사가 말하기를 "예에 이처럼 할 수 없다."라 하였다. 한인간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천한 사람입니다. 가령 생존하셨는데 평사가 계셨다면 진실로 감히 그 음식을 먼저 맛보지 못하실 것입니다."라 하였으니, 그가 공경하고 예를 다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평사가 후에 길주 목사가 되어 한인간 부부를 맞이하여 관아에 앉히고 그 은덕을 두터이 보답하였다.-이곳에 기거한 지 5~6일이 되어 평사가 샛길을 따라 남으로 가다가 서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을 만났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의를 좋아하는 자이다. 혹 업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가다가 다른 사람이 평사를 찾을까 두려워하여 몸을 풀 사이에 숨겼고 혹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정 서방이라 불렀다. 드디어 그들과 더불어 동행하여 어랑리(漁郞里) 무계(武溪)의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이르렀는데, 이붕수가 나와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가산을 기울여 가며 침식을 제공하고 인하여 주장(主將)으로 추대하고 그가 지휘할 것을 여쭈었다. 그리고 최배천, 지달원 등과 모의하여 그 동류를 끌어들이고 서로 말을 전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경내의 사람들이 점점 모였다. 강문우(姜文佑)가 제일 먼저 왔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또 왔는데 무계에 머문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이붕수가 몸소 양식을 지고 산길과 샛길을 따라 숨어 다니면서 길주로 달려가서 몰래 왜병이 출입하는 형세를 관찰하였다. 이와 같이 두 번 하였는데, 왜인이 국세필과 더불어 상통하고 왕래가 끊어지질 않거늘 강문우 등으로 하여금 길에서 맞아서 다 죽이게 하였다.이에 드디어 평사를 창의 대장(倡義大將)으로 삼고서 이붕수가 창의 별장이 되었고 종성 부사 정현룡은 창의 중위장이 되었으며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었다. 이 때에 북쪽 오랑캐들이 도둑질하러 내지까지 들어왔는데 부령 고현(古縣)까지 침입하여 인민들을 협박하고 노략질하니 곧 사자를 국세필에게 보내 오랑캐를 막는 데 협력하여 줄 것을 일렀었다. 9월 10일이 되어 창의 대장 정문부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에 들어가 유정(柳亭)에 진을 쳤고 -바로 경성에서 5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또 사자를 국세필에게 보내어 형세를 살펴보는데, 국세필은 병사의 위세를 성대하게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창의의 병사는 겨우 1백여 명이므로 중과(衆寡)의 차이가 현격하여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는데, 창의 대장은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서 국세필과 마주하고서 그 이해(利害)를 말하는데 언사가 여유가 있고 민첩하며 이치에 적합하니, 이 때문에 능히 흉악한 예봉을 거두고 감히 행동하지 못하였다. 국세필이 친속으로서 좌우에 모시도록 하고 그 동정을 엿보았는데, 창의 대장은 그 친속과 사졸들을 시켜 성에 올라 성첩(城堞)에 나누어 서서 군법에 의하여 전투를 연습하는데 밤에 이르러 그쳤다. 그 이튿날 새벽에 또 성에 올라 어제 저녁처럼 하였다.평사가 대장의 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서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두 잔 술을 마셨는데 조금 있다가 제장(諸將) 이하 모두 다 들어와 국궁(鞠躬)하고 예를 행하였다. 국세필이 먼저 들어오거늘 강문우 등에게 그를 잡아 그 활과 칼을 빼앗고 남문 밖에 포박하여 나가 그 죄를 열거하고 먼저 사지(四肢)를 자른 연후에 그 머리를 베어 조리 돌리고 그의 위협에 따른 자들을 사면하면서 이 뒤에 공을 세우도록 책망하였다. 이에 군대의 함성이 진동하고 장사의 기운이 배가 되어 드디어 그 군대를 통솔하였다. 당일로 그들을 이끌고 남으로 와 명천(明川)에 주둔하고서 말수(末秀)와 목남(木南) 등의 목을 베어 죽였으며, 모병을 하는데 남북 사람이 다 호응하여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11월 15일에 왜적과 길주(吉州) 장평(長坪) 석을고개(石乙古介)에서 싸웠는데 아군이 승세를 타서 크게 승리하였으니, 귀를 벤 숫자는 다 헤아릴 수 없었으며 왜장이 후퇴하여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12월 10일에 또 길주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아군이 철기(鐵騎)로써 빠르게 내달려 그 진의 왜병을 들이받고 한 번 불을 지르니 손댈 틈이 없이 다 후퇴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아군이 드디어 승리의 틈을 타서 크게 격파하였다. -창의 대장이 격서를 왜장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장평에서 귀를 벤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 다닐 놈이 될 것이며, 쌍포에서 거세당한 자가 매우 많으니 다만 살아 있을 때의 남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이듬해 계사년 정월 26일에 단천(端川) 지마흘(地馬屹) 지역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겼으며, 드디어 길주에 회군하여 그 군사와 말을 휴식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왜장이 대병을 보내 길주에 주둔한 왜군을 맞이하여 남도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듣고 대장은 군사를 거느리며 싸우고 추격하여 백탑교(白塔郊) 남칠목(南潻木) 아래에 이르렀다. 별장 이붕수가 한 왜장을 활을 쏘았는데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왜장이 쓰러졌다. 이붕수가 곧 몸을 빼내 대장의 말 앞에 나가 섰는데 문득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같은 날에 죽었는데 이때가 28일이었다. -대장과 나덕명(羅德明) 두 분이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후에 찰방(察訪) 이성길(李成吉)이 또한 장편시를 지었다. 평사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문에 들어오니 혼백은 눈에 선한데, 연로한 형만 두고 어머니도 저버렸어라. 천 년 전 장순과 허원37)이, 구중의 황천길에 행여 함께 돌아가리.[入門魂魄想依依, 有老兄存母亦違. 千載張巡與許遠, 九重泉路倘同歸.]"라 하였다. 이성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오직 공이 다행히 장인길38)의 점괘 만나, 강개하여 함께 적의 괴수 죽이기를 기약하였네. 몸을 범 아가리에 던져 중과를 시험하면서, 역적 무리 바라보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였네.[惟公幸遇丈人吉, 慷慨期同誅賊魁. 投身虎口試衆寡, 阿睹賊徒如嬰孩.]"라 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은 모두 뒤에 쳐졌는데 그대 먼저 올랐으니, 분개한 마음은 속에 가득하여 자재하기 어려웠어라. 뜻밖에 조총의 탄환이 영혼을 흩으니, 비로소 충성이 화근이 된 줄 알겠네.[人皆後殿于先登, 憤惋彌中難自裁. 無端鳥丸散英魂, 始覺忠誠爲禍媒.]"라 하였으며, 또한 "장군의 절개 기록하여 구중궁궐에 아뢰고, 은전을 내려 후대에 전해지게 하여야 하네. 서생은 싸우다 죽고 무장은 온전하니, 여러 진에서 의견이 분분하니 참으로 비웃을 만하네. 공에게 드러난 은전 없고 상도 없으니, 세상에 시기하는 자 많은 것을 또한 알겠네.[將軍錄節奏九重, 褒贈要令傳後來. 書生戰死武夫全, 列鎭紛紛良可咍. 公無顯典將無賞, 也知世路多嫌猜.]"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시의 대략이다.-이에 최배천을 시켜 첩서(捷書)를 품고 사잇길을 따라 가서 행재소에 아뢰니, 선조 대왕이 그를 인견하고 눈물을 흘렸다. 최배천에게 조산 대부(朝散大夫)의 작질(爵秩)을 보태주며 명주 1필을 내렸고 이붕수는 사헌부 감찰로 추증하였다.평사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고립된 군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남의 의표를 찔렀으니 능히 적으로 하여금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두 손을 마주잡고 죽게 하였다. 사람 기용을 잘하여 각각 그 재주에 맞도록 하고 호령이 엄하여 사람이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우게 만들어서 강토를 회복한 것이다. 최배천과 지달원은 시종 모의에 참여하여 힘을 쓴 것이 가장 많았다. 강문우도 호걸의 장부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며 의기를 중히 여겼으니, 매양 선봉장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 달려들어 싸우면 반드시 공을 세웠다. 壬辰七月, 倭賊長驅, 入咸鏡道, 逾磨天嶺, 兵勢甚盛, 節度使韓克諴戰敗, 列郡從而瓦解。十四日, 賊入鏡城界, 遂引而北, 瀰滿沿江, 諸郡人民避亂入山, 無復有恢復之望。兇徒竊發, 往往與賊爲黨, 明川之末秀·木男, 鏡城之鞠世弼·會寧之鞠景仁, 皆賊黨魁首也。鞠世弼擁兵據城, 與倭結爲聲援, 威脅人民, 將欲搜括山林, 屠戮其不從令者, 衣冠士子, 縮首潛匿, 而不敢出。儒生李鵬壽, 慨然發憤曰: "邦國板蕩, 未知興亡, 兇徒之乘隙作亂, 乃至此乎。" 於是遂謀擧義討賊, 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 而未得其人。初, 北評事鄭文孚, 陷賊中, 脫身逃走, 弊衣行乞於富寧淸巖境,【時有詩曰, 宇宙中間七尺身, 蒼茫獨立影無隣。惟有靑山能借路, 夕陽長作往來人。】 飢乏不能行, 或食野菜。至龍城, 投巫人韓仁侃之家, 仁侃熟視曰: "豈評事公耶。" 評事惕然曰: "我乃京商人, 遭亂不得歸, 丐乞至此, 子何妄言耶。" 仁侃心知之, 卽引入其家, 而厚遇之。秋夕日, 仁侃祭其祖先, 以祭饌進於評事, 評事曰: "禮不可如此。" 仁侃曰: "吾祖賤人, 假令生存, 有評事在, 則固不敢先嘗其食。" 其致敬盡禮, 類如此。【評事後爲吉州牧, 迎仁侃夫妻, 置衙內而厚報其德。】 居五六日, 評事從間道南行, 遇書生崔配天·池達源, 此二人, 皆好義者也。或負或携而行, 恐人物色之, 竄身草間, 而人或見之, 則必以鄭書房呼之。遂與之同行, 至漁郞武溪李鵬壽家, 鵬壽出見大喜, 遂傾家奉之, 仍推爲主將, 稟其指揮, 而與配天達源等協謀, 引其同類, 傳相招諭, 則境內之人, 稍稍赴集。而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亦來會, 住武溪者幾一月矣。鵬壽身自負粮, 從山路間行, 趨吉州, 密觀倭兵出入形勢, 如是者凡再度, 而倭人與鞠世弼相通往來不絶, 使姜文佑等, 邀於路盡殺之。於是遂以評事爲倡義大將, 李鵬壽爲倡義別, 將鍾城府使鄭見龍爲倡義中衛將, 姜文佑爲斥候將。當是時, 北狄入寇內地, 至富寧古縣, 劫掠人民, 卽遣使于鞠世弼, 喩以協力禦狄。至九月初十日, 倡義大將鄭文孚, 起兵入鏡城, 結陣于柳亭,【卽鏡城五里程】 又遣使于世弼, 觀形勢, 則世弼盛陳兵威, 以待之, 而倡義兵僅百餘人, 衆寡懸絶, 形勢甚危, 而倡義大將, 略不動容, 遂領兵入城, 與世弼相見, 語其利害, 言辭贍敏, 而順於理, 以此能戢其兇鋒而不敢動。世弼以親屬, 夾侍左右, 伺其動靜, 倡義大將, 乃使其屬幷士卒登城, 分立城堞, 依軍法習戰, 至夜乃罷。翌日平明, 又使登城, 如昨夕焉。評事建大將旗上南門樓, 正位而坐, 飮二巵酒, 俄而諸將官以下, 皆入鞠躬行禮, 而鞠世弼先入, 使姜文佑等執之, 奪其弓釰, 縛出南門外, 列數其罪, 先斷四肢, 然後斬其頸以徇, 赦其脅從者, 而責立後功。於是軍聲遂振, 壯士氣倍, 遂領其衆, 卽日引而南, 屯于明川, 斬末秀木男等, 募兵, 南北人皆響應, 衆至數千人。十一月十五日, 與倭合戰于吉州長坪石乙古介, 我軍乘勝大捷, 斬馘不可勝計, 倭將退入壁。十二月初十日, 又戰于吉州雙浦, 我軍以鐵騎疾入, 衝突其陣倭兵, 一番放火後, 不及措手, 皆辟易散亂, 我軍遂乘勝大破之。【倡義大將, 以檄書投倭將曰: "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 越明年癸巳正月二十六日, 戰于端川地馬屹境, 三戰三勝, 遂還軍吉州, 休其士馬。俄聞倭將遣大兵, 迎吉州所駐倭, 撤還南道, 大將帥師, 且戰且追, 至白塔郊南潻木下。別將李鵬壽射一倭將, 應弦而倒, 鵬壽卽挺出大將馬前而立, 忽中丸死。朱乙溫萬戶李希唐, 亦同日死, 時則二十八日也。【大將及羅德明, 幷爲詩以哀。其後察訪李成吉, 亦爲製長篇一首。評事詩曰, 入門魂魄想依依, 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 九重泉路倘同歸。李詩曰, 惟公幸遇丈人吉, 慷慨期同誅賊魁。投身虎口試衆寡, 阿睹賊徒如嬰孩。又曰, 人皆後殿于先登, 憤惋彌中難自裁。無端鳥丸散英魂, 始覺忠誠爲禍媒。又曰, 將軍錄節奏九重, 褒贈要令傳後來。書生戰死武夫全, 列鎭紛紛良可咍。公無顯典將無賞, 也知世路多嫌猜。此其大略也。】 乃使崔配天懷捷書, 從間路, 奏行在所,【時乘輿播越永柔縣】 宣祖大王引見流涕, 加配天朝散大夫, 而賜帛一疋, 追贈李鵬壽司憲府監察。評事初起兵時, 以孤軍入虎穴, 臨危處變, 出人意表, 能使賊不敢動, 而斂手就戮, 又善於用人, 各盡其才, 而號令嚴明, 人不敢犯法。以此能得人死力, 而恢復疆土。崔配天·池達源, 終始參謀, 宣力最多, 姜文佑, 亦豪健丈夫, 能立然諾, 重意氣, 每爲先鋒將, 能冒死赴敵, 而戰必有功。 장순과 허원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함락하였는데, 이때 진원 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과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이 강회 지역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안녹산의 장수 윤자기(尹子奇)가 이끄는 대군을 막아 낸 일을 말한다. 후에 구원병이 오지 않고 군량도 떨어져 결국 성은 함락되고 장순과 허원은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두 사람 모두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전사하였다. 《舊唐書 忠義列傳下 許遠》 장인길 《주역》 〈사괘(師卦)〉에 "사(師)는 바르니, 장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師貞, 丈人吉, 無咎.]" 하였다. 사(師)는 군대를 거느리는 자를 말하며, 장인은 존엄한 어른을 말한다. 전(傳)에 말하기를, "사(師)의 도는 정도(正道)를 근본으로 삼는다. 군대를 통솔하고 무리를 거느림은 사람들이 존신(尊信)하고 외복(畏服)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인심의 따름을 얻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시장 예조판서 민진후 諡狀 【禮曹判書閔鎭厚】 선조 때의 명신 전주 부윤(全州府尹) 농포(農圃) 정공(鄭公)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 만에, 그의 증손 전 주부(主簿) 삼(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의 증조부 문부(文孚)가 임진년 난리 때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을 무찌르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을 평정했건마는, 관찰사가 사실을 숨겨 공적과 포상이 실제에 걸맞지 아니하였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한 처음에 불행히 횡액으로 옥사에 연루됨에 걸려들어 마침내 시안(詩案) 때문에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선왕조에 이르러 그 원통함을 씻어 주고 작위를 내리고 공로를 녹훈하였으며, 후에 그를 이어 사당의 편액을 특별히 하사하여 융숭한 보답의 은전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직 시호를 주는 일 한 가지만은 아직 실시되지 못했으니 어찌 성조의 한 가지 빠진 일이 아니오리까?"라 하였다. 이에 그것을 해당 관청에 내리니, 그곳에서 아뢰기를 "문부의 공렬과 절의는 선배 명신들이 말한 것이 많으니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옛 법에 실제 직함 정2품 이상이 아니면 시호를 얻지 못하는 것이 준례이오나, 취할 공적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거기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니 삼의 말이 옳습니다."라 하니, 주상께서 곧 그것을 허락해주었다.그 뒤 10년이 지나 삼의 재종제 되는 구(構)가 공의 문집과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선조(先祖)의 시호는 이미 임금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형 삼이 병으로 죽고 태상(太常)의 시장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나의 선조 사적을 아는 이로는 그대처럼 자세한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감히 부탁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나는 두 번 절하며 그것을 받고서 말하기를 "그렇다. 옛날 우리 선친 문정공(文貞公)39)이 경성 통판(鏡城通判)으로 계셨을 적에 공의 유풍을 듣고 충의를 사모함이 대단히 지극하여 제문을 지어 공과 더불어 같이 거의(擧義)한 이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고, 또 돌아가신 중부(仲父) 의정공(議政公)40)이 일찍이 북도를 안찰했을 적에 공의 사당을 세워 길이 교화의 터전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분발케 한 바 있었습니다. 진후는 비록 못났지마는 오히려 어진 부형 둔 것을 기뻐할 줄은 알거늘 이제 공에 대한 글 수고쯤이야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자는 자허(子虛)요, 농포(農圃)는 그의 호다. 계통은 해주(海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중(侍中) 숙(肅)의 후손이다. 조선 왕조에 와서는 찬성사(贊成事) 정도공(貞度公) 역(易)이 가장 현달하였으며, 그 아들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은 효성과 우애로써 널리 알려졌다. 동지의 아들은 참의(參議) 침(忱)이요, 참의의 아들은 부사(府使) 연경(延慶)이다. 부사로부터 3대가 지나 공의 아버지 신(愼)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 김씨로 장사랑(將仕郞) 흥례(興禮)의 따님이다.공은 가정(嘉靖) 을축년(명종 20, 1565년) 2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큰 뜻을 지녀 장난할 때도 반드시 편을 갈라 진을 치고 적을 마주하여 서로 싸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이 한가운데에서 호령하면 뭇 아이들은 모두 그 약속이나 한 듯 명령을 받들었다. 일찍이 범 잡는 것을 구경할 적에 포효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뭇 아이들은 엎어지며 피해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공만은 혼자 태연히 그대로 앉아 있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또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는데 한 번 눈을 거치기만 하면 외웠으며, 7~8세 때에 지은 시 구절은 당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간간이 활쏘기를 익혀 멀리서도 버들잎을 맞추는 솜씨41)가 있었고, 천문과 산수 같은 것도 모두 통달했다.을유년(1585년)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무자년(1588년)에 명경(明經) 갑과 제 2등에 올라, 예에 의하여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보직되었다. 만력 신묘년(1591년)에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니, 평사는 실로 학교를 관장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책임을 겸하고 있다. 공이 부임하여 법으로써 가르치고 예로써 접대하여 모든 학생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듬해 여름에 왜구가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적장 청정(淸正)은 승승장구하여 북쪽에 침입했을 때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키려 하다가 군사가 궤멸되어 달아나자, 적이 마침내 쳐들어와 강가 연해 여러 고을에 가득하니 인심은 소란해지고 반란자들이 몰래 일어났다.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목남(木南),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등은 모두 반란한 역적들의 괴수인데, 국세필은 왜서(倭署)를 받아서 관호(官號)를 두었으니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그 당시 임해군(臨海君), 순화(順和君) 두 왕자와 대신 김귀영(金貴榮), 부원군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승지 혁(赫)이 병화를 피하여 북도에 있었는데 국경인이 잡아 묶어 왜적에게 넘겨주었으며, 남북의 병사(兵使)와 여러 고을 수령, 진보(鎭堡)의 변방 장수들도 거의 모두 반적에게 함락되었다. 공은 마침내 몰래 산 속에 숨었다가 길에서 반적을 만나 잡혀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한 서생이 농기구를 가지고 반적을 쳐 죽이고서 공을 탈출시켰으며, 또 토착민이 쏜 화살에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죽음은 면하기도 했다.공은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이 또한 피난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방을 두루 찾아 서로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같이 의논하고 인하여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 나 정언(羅廷彥), 수성 찰방 최동망(崔東望), 귀양 와 있던 한백겸(韓百謙),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경성에 들어갔으나 군중이 국세필의 위협에 겁내어 순식간에 궤멸되어 흩어지므로 공은 부득이 샛길로 남쪽으로 달아났다.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찾아들었는데, 한인간은 마음속으로 정공임을 알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국세필이 사람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끝까지 숨기고 고발하지 아니했다. 며칠을 묵고 있다가 마침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을 만나 함께 어랑리(漁郞里)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갔다. 이붕수는 의사라, 공이 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가산을 기울여 모셨다.공은 마침내 이붕수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자 이에 서로 전하고 부르며 차츰 호응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가 제일 먼저 왔고, 종성 부사 정현룡(鄭見龍) 및 각 진을 지키던 장수와 피난 와 있던 조정의 관리 서성(徐渻)과 이성길(李成吉) 등이 또한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으려하자 공은 스스로 나이 젊고 지위가 낮음을 들어 정현룡에게 사양하였으나, 정현룡은 감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며 또 다른 장사들도 또한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하므로 이에 공은 대장이 되고 정현룡은 부장, 이붕수는 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어 부서가 정해진 다음 먼저 국세필에게 사람을 보내어 국가가 장차 중흥될 경사가 있음을 알리고 공을 세워 스스로 충절을 바치라는 뜻으로 타일렀다.9월 12일에 군사들을 이끌고 고을의 성에 이르니 국세필이 문을 걸고 항거하므로 협박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자, 비로소 맞아들이는데 공은 국세필의 군대 형세가 지극히 강성한 것을 보고도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이 천천히 반역과 순종에 대하여 변론하면서 되풀이하며 깨우쳤더니, 반적이 두려워 굴복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했었다. 국세필은 그의 심복 부하를 시켜 공의 좌우에서 모시며 모든 문서를 모두 몰래 보게 했는데, 공은 장계를 올릴 때 국세필의 일에 대해서는 짐짓 완곡한 말을 만들어 그 초본을 책상 위에 두었더니 국세필이 그것을 보고 과연 기뻐하였다. 이에 공은 국세필에게 명령하여 관청 일을 맡겼다.어떤 사람이 공에게 국세필을 일찍 없애버리라 권하자 국세필은 그 말을 듣고 겁을 내니, 공은 밤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국세필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며 의심하지 않는 기색을 보여 주었다. 마침 왜병 90여 명이 성 아래로 육박하므로 공은 장수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려 공격하여 물리치게 하자 국세필은 그 아들과 함께 왜장 한 놈을 사로잡았다. 공은 국세필 부자의 공로를 기록하여 장계하니 국세필은 스스로 안심하였으며, 공이 또 일찍이 자기를 쏘았던 자의 죄를 용서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자, 이에 육진(六鎭) 사람들은 공이 배반자를 놓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다투어 투항하였다.회령의 아전과 선비들이 국경인과 그 무리 여섯 명을 목 베어 그것을 군문에 바쳤다. 명천 사람도 또한 말수의 목을 베려 하다가 도리어 적에게 패하였는데, 공이 강문우와 구황(具滉)을 보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목을 베었다. 이 두 역적의 목을 벤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징발한 군사가 점점 많이 모여 들게 되었으니, 고령(高嶺) 첨사 유경천(柳擎天) 등 여러 진장(鎭將)들도 또한 공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공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하여 군중이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어느 날 갑자기 두 역졸이 까닭 없이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는데, 공은 그것이 국세필의 흉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 곧바로 두 역졸을 목을 베고 이어서 영을 내려 성에 올라 전투를 훈련시키게 하되 밤중에야 파하며 이튿날에도 또 그렇게 했다. 공은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에 앉자 국세필이 모든 장수들과 함께 군례를 올렸는데, 공은 강문우에게 명령하여 국세필을 끌어내려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협박에 못 이겨 그의 명을 따른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서 훗날에 공을 세우게 하니 이에 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공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내어 왜적을 치기로 의논하였는데 정현룡은 경성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제 다만 자신만을 지키는 것이 어찌 당초 의병을 일으킨 뜻이겠는가. 그러나 대중에게 물어서 결정하자."라 하고서 다음날 군중을 남문 밖에 모으고 가부를 물으니 모두 다 공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에 동관(潼關) 첨사 이응성(李應星)으로 하여금 경성에 머무르게 하고, 정현룡은 중위장을 삼고 유경천은 좌위장, 오응태는 우위장, 방원(防垣) 만호 한인제(韓仁濟)와 사절동(斜卩洞) 권관 고경민(高敬民)을 좌우복병장으로 삼았다. 10월 21일에 삼위병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몇 리를 가니, 어떤 이가 공을 맞이하면서 고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드세니 싸우면 반드시 이롭지 못할 것이요, 아직은 성을 지켜 스스로 보전하는 것이 옳습니다."라 하므로 공은 "네가 감히 적을 위하여 우리 군사를 막으려 하느냐."라 하고는 곧 그 머리를 베어 깃대에 매어 달고 명천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서 모든 장수들에게 방략을 지휘했다.그믐날에 왜적을 길주(吉州) 장평(長坪)에서 만나 모든 군사가 양 옆에서 공격하고 복병이 번갈아 나오자 마부와 하졸들도 용기를 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적이 패하여 도망하므로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괴수 다섯 명을 죽였으며 8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산골로 도망간 자들도 사방으로 불을 놓아 모두 타죽게 하였으며, 또 화살에 맞아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말은 118 마리를 노획하고 적에게 노략당한 사람과 가축 및 군기 등 물건을 도로 빼앗아 온 것이 매우 많았으니 논하는 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여기에 비길 만한 승첩은 없었다고들 하였다.길주에 머무는 왜적이 성에 웅거하여 굳게 지키니 여러 위장들이 여러 번 포위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은 이르기를 "지금 만약 급히 뺏으려 하다가는 군사들이 많이 상할 터이니 군사를 영동(嶺東)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에 있는 적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책문 안의 적이 평정되면 성안에 있는 적은 형세가 외롭고 후원이 끊어져 새장 속에서 새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로 영동으로 향해 옮겨 임명(臨溟)의 쌍포(雙浦)에 이르렀는데, 마침 책문 안에서 나와 노략질하는 왜적을 만나게 되자, 삼위의 날랜 기병이 한꺼번에 들이쳐 백여 명의 목을 베고 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내어 길가에 십여 리나 늘어놓았다. 그대로 진군하여 적의 책문을 포위하고 왜장에게 격문을 던졌는데, 그 안에 "장평에서 귀를 베인 무수한 놈들은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 다닐 놈이요, 쌍포에서 거세당한 놈들은 다만 생전에서만 남자 구실한 놈들이다."라는 말이 있었다.이에 앞서 피난 온 사대부들이 토착민들에게서 무수히 약탈을 당했다가 공이 반적을 토벌하게 되자 모두 공에게로 와서 그것을 도로 찾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일체 들어주지 아니하였으며, 정현룡이 이 일로 백성을 소란케 하자 공이 꾸짖어 못하고 하고 곧 영을 내렸다. 정현룡은 본래 공의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유언비어를 만들어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의 귀에 들어가게 하자, 윤탁연도 본래부터 공의 명성과 업적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미워하며 마침내 공문을 발송하여 공의 죄를 따지고 대장을 바꾸어 정현룡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전후의 전공을 모두 속여 정현룡에게로 돌리고서 조정에 이를 아뢰니, 정현룡은 마침내 크게 승직되고 공은 다만 국적(鞠賊)을 죽인 것으로 당상관의 자급에 올랐다.윤탁연은 또 공을 포망장(捕亡將)으로 삼아 마천령에 머물게 했으나, 공은 사양하여 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길주의 적을 아직 소탕하지 못하였는데, 북방 적병들이 어찌 남쪽으로 도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북병사(北兵使)가 남도에 있으면서 공으로 하여금 멀리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들을 억누르라고 하니 공은 마침내 부하 약간 명을 거느리고 육진을 향해 출발하여 공 있는 사람은 표창하고 죄 있는 자는 목을 베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싸우고 지키는 것을 모두 마땅하게 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모두 경외하며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했다.정현룡이 대장 된 지 한 달이 못 되어 윤탁연은 그를 다시 겸절도사(兼節度使)로 옮기고, 오응태로써 대신하게 하더니 또 한달 남짓하여 도로 공으로 대장을 삼았다. 그것은 대개 군중이 공을 잃고부터는 분하게 여기며 불평하고 의사들 대부분 흩어져 떠나니, 왜적이 이를 갈며 틈을 엿보고 반역의 남은 무리들도 또 다시 일어날 기미가 있어서 식자들이 모두 허물을 윤탁연에게로 돌렸기 때문에 이런 조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사퇴하지 못하겠는가."라 하니 공은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다만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죽을 곳을 얻었는데, 어찌 작은 혐의를 고려하여 위급한 국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계사년(1593년) 정월에 마침내 길주에 이르러 삼위장의 군사를 먹이고 위로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가 배나 솟아 흩어져 도망갔던 자들도 도로 모여들었다. 단천(端川) 군수 강찬(姜燦)이 달려와 공을 보고 말하기를 "단천에 남은 왜적들이 마음대로 횡행하니 군사를 나누어 칩시다."라고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방금 강병을 쉬고 있는 중이요, 단천은 같은 도인데 어찌 서로 구원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곧 정병 2백을 뽑아서 구황(具滉) 등 네 장수로 하여금 각각 50명씩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고개를 넘어가 성 밖 20리쯤에서 병사를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다가 거짓 패하는 척하게 하였다. 이에 왜적 2백여 명이 승세를 타고 멀리 쫓아 매복이 있는 곳까지 이르므로, 네 부대가 함께 나와 좌우로 내달려 돌격하여 도망하는 자를 추격, 거의 다 쏘아 죽이고 목을 베니, 부상을 입고 성으로 들어간 자는 겨우 30여명이었다.이윽고 남도의 왜적 한 개의 큰 부대가 영동의 왜적과 합세하여 마천령을 거쳐 북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도로 임명(臨溟)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정병 6백을 뽑아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과연 왜적이 들을 덮어 침입하여 오므로 복병이 모두 일어나 힘을 다해 싸우고, 공도 또한 삼위병을 지휘하여 말을 채찍질해 나가면서 "오늘 나는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라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그를 따르며 물러가는 자가 없었다. 60여 리를 옮겨가며 싸우다가 백탑교(白塔郊)에 이르러서는 화살이 비 오듯 하며 피는 흘러 길에 가득하였는데, 적의 목 9급을 베었으며 말 15필을 빼앗았다. 그 가운데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적이 싣고 성으로 들어가 한데 모아 불태워 버렸는데, 대개 그 수가 백여 명 정도 되었다. 청정(淸正)이 그 무리를 거두고 밤을 타고 도망하여 고개를 넘어 남으로 도망하면서 밥 지을 겨를도 없었는데, 공은 그들을 쫓아 영동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니, 이로부터 관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대개 공은 일을 처리하는 데 정밀하고 분명하였으며, 적정을 파악하는 데는 귀신 같았다. 더욱 사람 쓰는 데 능하여 각각 적재적소에 등용하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잊어버리고 공에게 기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마침내 수천 명밖에 안 되는 고립된 군사로 한창 기세를 드날리는 정예의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으랴.윤탁연은 공이 자신 마음대로 제 공로를 기록하고서 이문(移文)했다고 하면서 성을 내어 공문으로 꾸짖으며 말이 몹시 이치가 없었으나, 공은 변론하고 분석하기를 밝게 하며 굴하지 않았다. 윤탁연은 더욱 크게 성내어 군법으로써 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며, 공의 보좌관을 잡아다가 고문하기까지 하였지만 죄를 얽을 단서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모함하는 말을 지어 사실과 반대되게 장계를 올렸다. 공은 본시 외로이 일어섰고, 또 그를 위해서 한 마디 말도 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의 전후 공적이 저같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모두 알지 못했었다.길이 뚫리게 되자 병사가 비로소 북으로 오게 되니 공은 자기가 거느린 병마를 이끌고 가서 그에게 귀속했었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배수되고, 을미년(1595년)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옮겼으며, 병신년(1596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옮기고, 정유년(1597년)에 어사(御史)가 공의 치적을 위에 아뢰어 안팎의 옷감을 하사하여 포상하였으며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옮겼다가 다시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옮겼다. 당시 바야흐로 외방 진관(鎭管) 제도를 수정하는데, 상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공이 먼저 공으로 하여금 군정을 정돈하게 하고서 열읍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라고 청하였다. 무술년(1598년) 봄에 부임하였다가 가을에 체임되어 돌아왔는데, 그 뒤 5~6년 동안은 잇달아 지방 고을로 나갔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군직을 맡거나 혹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신축년(1601년)에 북쪽 인사들이 상소하여 공의 공적을 칭송함으로 인하여, 가선 대부에 올랐다. 갑진년(1604년)에 부친상을 입었다가 탈상한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610년)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신해년(1611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자년(1612년)에 다시 길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광해의 정치가 어둡고 어지러웠는데, 흉인(凶人) 정조(鄭造)42)는 마침 공의 가까운 일가였다. 공은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정조가 오는 것을 보면 혹 취한 척 깊이 잠자고 또는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게 되자 항상 술만 마시니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부총관(副摠管)과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무오년(1618년)에는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되었다.계해년(1623년) 3월에 인조 대왕이 등극하여 정치의 계획을 세울 적에 조정의 의논이 공을 크게 쓰려고 하여 원수(元帥)에 추천되었고 또 장차 현달한 높은 자리에 두려고 하였는데, 공은 노모를 편하게 봉양하는데 급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원하였다. 그런지 몇 달이 못 되어 어머님이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공은 상(喪)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인하여 몸이 손상되어 병이 되었으며 또 큰 종기가 나서 오랫동안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었다. 갑자년(1624년) 정월에 이괄(李适)이 난리를 일으켜 임금이 공주로 행차하였는데, 공에게 기복(起復)43)을 명하여 부총관을 삼아 출전하게 하려다가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으며, 적이 평정된 이후 상례를 마치도록 허락했다.이 해에 박래장(朴來章) 등이 모반을 꾀하면서 공이 장수의 재질이 있다 하여 의원 이대검(李大儉)으로 하여금 모반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대검이 공을 대하여 감히 그 말을 발설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실지로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역옥이 이뤄지자, 공은 이름이 반역자들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체포되었으나 여러 죄수들의 공술(供述)이 서로 다르지 않아 공의 억울한 사정이 밝혀졌으니 으레 마땅히 석방되어야 하는데, 다시 시안(詩案)의 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공이 일찍이 창원 부사로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우연히 〈영사(詠史)〉 10절을 지었는데, 그 한 수는 다음과 같다.초에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4)4)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5)5)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6)6) 여린……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孱孫何事又懷王그 시를 그대로 휴지 뭉치 속에 두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여막의 벽에 도배를 했는데, 어떤 공신이 찾아와서 벽을 눈 여겨 보고 간 뒤에 친구들 사이에 널리 전파하였다. 대관(臺官)이 '시의 뜻이 무엇을 지적한 바가 있다'고 논계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이 당시 문사낭청이 되었는데, 위관에게 말하기를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 깊은 뜻이 있지 않은데 무슨 죄가 되겠소."라 하고 힘써 무죄를 다투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마침내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바로 11월 19일이다. 원 근간에 이 소식을 들은 사람으로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대개 공은 평소에 말이 적었고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비록 친하게 잘 지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바르지 못한 곳이 있음을 보면 다시는 서로 사귀지를 아니하였다. 월사(月沙) 이 문충공(文忠公, 李廷龜)은 평소 공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자허의 인물과 재질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다만 그의 강직함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쉽다."라 하였으니 대개 공이 화를 입을까 걱정한 것인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고들 하였다. 광해 때에 어떤 권세 있는 대신이 그를 끌어 자기의 편을 삼으려 하여 공을 보고 풍자해 말하기를 "그대의 가난과 고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하거늘 어찌 스스로 그것을 견디는가."라 하자, 공은 곧 대답하기를 "나는 장차 활과 화살을 가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맹호를 쏘아 그것으로 살아갈지언정 분수 넘치는 부귀는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오."라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가 버렸다. 이이첨(李爾瞻)과는 한 동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그가 공의 문재(文才)를 사모하여 사람을 시켜 여러 번 공에게 뜻을 보냈으나, 공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또 서로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정인홍(鄭仁弘)에게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와서 그의 권세에 힘입으려 하므로 공은 매를 때려 쫓아 버렸다. 대개 훈신 귀족의 요청을 일체 들어 주지 아니하여 공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화를 부르게 된 까닭이었던 것이다.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난 성품이어서 부모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함을 다하였다. 판서공(공의 부친)은 자제 가르침이 매우 엄격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매를 치더니, 그가 돌아가신 뒤에 공은 항상 "내가 다시 매를 맞고자 한들 어디 가서 매를 맞겠는가?"라 하고 매양 흐느끼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었다. 큰 형이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았는데, 공은 여러 조카들 어루만지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들처럼 하였다. 몸가짐은 맑고 검소하게 하여 세상의 이익이나 탐하고 재물이나 좋아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겼다. 평생 살림을 경영하려는 생각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때는 그 행장이 쓸쓸하였으며 집에 이르는 날에는 또한 남에게서 꾸어다가 밥 짓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가법에 더욱 엄격하였으니 집안이 비록 화목했으나 안과 밖을 자른 듯이 구별하여 지금껏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실추하지 않아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들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처음에 택당공이 일찍이 북평사가 되었을 때에 그 곳 백성들의 말을 채록하여 공이 적을 토벌하던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아직 업적을 드러내어 표창하지는 못하였다. 현종 갑진년(1664년) 무렵에 이단하(李端夏) 상공은 택당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북평사로 나갔는데, 공의 충의에 감격하였으나 그 원한을 드러내 밝히지 못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사우를 세워 제향할 것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또 소장을 올려 공을 위해 힘써 신원을 변론하였으며, 높은 품계의 벼슬을 추증하여 포상할 것을 주청하니 주상은 묘당에 명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대신 정태화(鄭太和) 공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이에 공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겸직은 정해진 규례대로 추증하였으며, 또한 자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사우의 편액을 내렸으니, 이것은 상공 여성제(呂聖齊)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나도 일찍이 외람되이 평사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에게 아뢰기를 "정문부, 이붕수와 같은 충절로도 조정에 벼슬하는 자손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공을 갚고 선을 권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전조(銓曹)에 명을 내려 특별히 뽑아 쓰도록 하소서."라 하니, 주상께서 곧바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제 20년이 거의 되었으되 아직도 명을 받들어 시행한 사람이 없으니 사뭇 개탄할 일이다. 생각하건대 공의 위대한 공적과 지극히 원통한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환히 드러나 있고, 또 절로 석실(역사)의 좋은 기록에도 있으니 도리어 어느 겨를에 구구하게 감탄하면서 찬양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두드러진 사행과 이력을 대강 기록하여 유사(有司)에게 삼가 고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하였으니 이것 또한 옛 사람들이 시호를 청하는 체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살펴주기 바란다.승정 대부 행예조판서 민진후는 삼가 짓는다. 宣廟朝名臣全州府尹農圃鄭公, 旣沒之八十年, 其曾孫前主簿杉上疏言, "臣之曾祖父文孚, 當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破倭寇, 以克定關北, 而臬司掩蔽, 功賞未稱。仁祖反正之初, 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及至先王朝雪其冤枉, 而贈爵錄, 後又從而特宣賜額, 崇報之典大備, 惟是贈諡一事, 尙未之擧, 豈非聖朝之一闕事也。" 事下該曹, 覆奏曰: "文孚功烈節義, 前輩名臣多言之, 無復可議。國家故事, 非實職正二品以上, 例不得諡, 而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杉之言。是也。" 上亟許之。又其後十年, 杉之再從弟構, 袖公文集及家狀一通, 來謁于鎭厚曰: "先祖易名, 旣蒙聖允, 而未幾而兄杉病死, 太常之狀, 至于今未就。世之知吾祖事蹟者, 莫如子詳, 敢以爲托。" 鎭厚再拜而受之曰: "然。昔我先君子文貞公, 通判鏡城, 聞公之風而慕義特至, 至操文致酹於與公同事諸人之墓, 先仲父議政公, 嘗按北藩, 立公之遺祠, 以永樹風聲, 而使民有所興勵。鎭厚雖甚不肖, 猶知樂有賢父兄, 則今於公文字之役, 其烏敢辭之哉。" 謹按公字子虛, 農圃其號也。系出海州, 高麗侍中肅之後。入我朝, 有贊成事貞度公易, 最顯, 其子同知忠碩, 以孝友聞。同知之子曰, 參議忱。參議之子曰府使延慶, 自府使三世而至公之考愼, 大司諫, 贈禮曹判書, 妣, 貞夫人金氏, 將仕郞興禮之女。公以嘉靖乙丑二月十九日生, 幼而嶷然有大志, 其遊戲必分曹布陣, 爲對敵相戰狀。公居中號令, 而羣兒皆奉其約束。嘗往視捕虎, 咆哮之聲振天地, 羣兒無不顚仆辟易, 而公獨安坐自若, 見者異之。又聰穎絶人, 讀書過目成誦, 七八歲時所綴詩句, 已膾煑一世。間習射藝, 有穿楊之竗, 如天文籌數, 亦皆通曉焉。乙酉中生員進士兩試, 戊子登明經甲科第二名, 例付漢城參軍。萬曆辛卯除北評事, 評事實兼學校表率之任。公至則敎之有法, 而待之以禮, 甚得諸生之心。翌年夏, 倭寇陸梁, 乘輿西狩。賊將淸正長驅入北, 北兵使韓克諴, 欲守磨天嶺, 軍潰而走, 賊遂入瀰滿沿江諸郡, 人心壞亂, 兇徒竊發, 明川之末秀木男·會寧之鞠景仁·鏡城之鞠世弼, 皆叛賊之魁, 而世弼至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時, 臨海順和兩王子及大臣金貴榮·府院君黃廷彧·其子承旨赫, 避兵在北, 景仁縛之, 以給倭, 南北兵使·諸邑守宰·鎭堡邊將, 幾盡陷於叛賊。公遂潛匿於山中, 路遇叛卒, 將執之以去, 賴有一書生, 以所持農器, 擊殺叛卒, 脫公而送之。又爲土人所射, 幾死而免。公聞前監司李聖任, 亦在奔逬中, 窮尋往見, 共謀倡義, 仍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百謙·羅德明等, 起兵入鏡城, 衆畏世弼威脅, 俄皆潰散, 公不得已, 亦從間道南走。至龍城, 投宿巫覡韓仁侃之家, 仁侃心知爲公, 待之甚厚, 世弼遣人搜括, 而終匿不告。居數日, 適遇鏡城儒生崔配天·池達源俱行, 至漁郞里李鵬壽家。鵬壽, 義士也, 見公至大喜, 傾家以奉之。公遂與鵬壽等, 謀再擧義兵。於是傳相號召, 稍稍響應, 壯士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及各鎭守將及避亂朝士徐渻·李成吉等亦來會, 衆皆推公主盟, 公自以年少位卑, 讓於見龍, 見龍不敢當, 諸壯士亦願屬公。於是公爲大將, 見龍爲副將, 鵬壽爲別將, 文佑爲斥候將, 部署略定, 先送人於世弼, 報以國家中興之慶, 諭以立功自效之意。九月十二日, 勒兵向府城, 世弼懸門而拒之, 且脅且諭, 始乃迎納。公見世弼兵勢甚盛, 而略無怖意, 徐以逆順之辨, 反復譬曉, 賊畏服不敢動。世弼使其親屬, 侍公左右, 凡諸文書, 輒皆偸視, 公將馳啓, 而於世弼事, 故作婉辭。以其草本置之案上, 世弼見之, 果喜, 公命世弼, 仍管官事。人有勸公早除世弼者, 世弼聞而懼, 公夜屛人獨坐, 招世弼與語, 示以不疑之色。適會倭兵九十餘薄城下, 公命將士擊退之, 世弼與其子擒一倭將。公一體錄功而啓之, 世弼乃自安, 公又赦嘗射己者罪, 以爲褊裨, 於是六鎭人聞公釋反側, 爭相送款。會寧吏士斬景仁及其黨六人, 獻馘軍門, 明川人亦欲誅末秀, 反敗於賊, 公遣姜文佑·具滉, 率精騎揜擊斬之。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徵兵稍集, 而高嶺僉使柳擎天等諸鎭將, 亦皆受公節制, 公號令嚴肅, 賞罰明信, 軍中無敢有犯法者。一日忽有兩驛卒, 無端大呼, 公知其出於世弼之兇計, 卽斬兩卒, 而仍下令登城習戰, 夜分乃罷, 翌朝又如之。公建大將旗, 坐南門樓, 世弼與諸將行軍禮, 公命姜文佑拿下斬之以徇, 其脅從, 幷赦勿治, 俾立後功, 於是軍聲大振。公與諸將, 議出兵擊倭,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公曰: "今但自守, 豈當初起義兵之意耶。然當謀于衆以決之。" 明日聚衆于南門外, 詢其可否, 咸以公言爲是。乃使潼關僉使李應星留鏡城, 鄭見龍爲中衛將, 柳擎天爲左衛將, 吳應台爲右衛將, 防垣萬戶韓仁濟·斜卩洞權管高敬民爲左右伏兵將, 十月卄一日, 率三衛兵出城, 行數里, 有人迎告於公曰: "賊勢甚盛, 戰必不利, 宜且守城自保。" 公曰: "汝敢爲賊沮吾軍耶。" 卽斬其首, 懸旗竿, 進次明川, 指揮諸將方略。晦日, 遌倭於吉州長坪, 諸軍挾擊, 伏兵迭出, 廝徒下卒, 無不鼓勇, 賊潰而奔北, 追擊大破之, 殺其巨魁五人, 斬馘八百二十餘級。其逃竄山谷者, 四面縱火而盡燒之, 中箭墜崖而死者, 亦不知其數, 得馬一百十八匹奪, 其所擄人畜及軍器等物甚多, 論者謂中興以來, 未有此捷比云。吉州留倭, 據城堅守, 諸衛將累圍而不得拔, 公以謂'今若急取, 多傷士卒, 不如移兵嶺東, 先擊柵內之賊, 柵內之賊旣平, 則城中之賊, 勢孤援絶, 取之如籠中鳥耳。' 卽日移向嶺東, 到臨溟之雙浦, 適遇柵內賊出掠者, 三衛精騎, 一時奮擊, 斬首百餘級, 剖腹露腸, 列之路傍, 連亘十餘里。仍進圍賊柵, 以檄書投倭將, 有曰: "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 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 先是避亂士夫, 多爲土民所掠奪, 及公討叛賊, 皆從公請推還, 公一切不聽, 鄭見龍以此事擾民, 公又呵止, 而仍下令。見龍本忌公成功, 乃與諸士夫共造飛語, 使入於觀察使尹卓然之耳, 卓然固嫉公聲績掩己, 乃移文數公罪, 而遞大將, 以見龍代之。因以前後戰功, 誣歸於見龍, 而聞于朝, 見龍遂大被陞擢, 而公只以誅鞠賊授堂上階。卓然又以公爲捕亡將, 使住磨天嶺, 公辭不行曰: "吉州之賊, 尙不掃蕩, 北地之卒, 豈有南逃之理乎。" 北兵使在南道, 遙令公巡行六鎭, 以定民心鎭虜情, 公乃率麾下若干人, 發向六鎭, 褒有功誅有罪, 撫禦戰守, 咸得其宜, 民夷畏愛, 不敢更謀爲亂。鄭見龍爲大將, 未滿一月, 卓然移授兼節度使, 而以吳應台代之, 又月餘, 還以公爲大將, 蓋軍中自失公, 憤惋不平, 義士多散去, 而倭賊狺然伺釁, 叛民餘黨, 亦有復起之幾, 識者皆歸咎於卓然, 故有是擧。或謂公曰: "公未可辭歟。" 公曰: "始吾出萬死起義兵, 只欲爲國家效忠耳。今得死所, 其何可顧小嫌, 而不念國事之危急哉。" 癸巳正月, 遂馳到吉州, 餉勞三衛將之軍, 將士見公來, 勇氣自倍, 散去者亦還集。端川郡守姜燦馳謁公曰: "端之留倭, 恣意橫行, 願分兵以擊之。" 公曰: "吾方坐休強兵, 而端是同道, 何可不爲之相救乎。" 卽抄精兵二百, 使具滉等四將, 各將五十, 逾嶺而去, 伏於城外二十里許, 使端軍三十, 挑戰佯敗, 賊二百餘名, 乘勝遠追, 至伏兵處, 四隊齊出, 左右馳突, 追亡逐北, 幾盡射斬, 其帶傷入城者, 僅餘三十矣。 俄聞南道倭一大隊, 與嶺東倭合勢, 由磨天北來, 公還住臨溟, 抄精兵六百, 潛伏於要衝處, 倭果蔽野而至, 伏兵盡起鏖戰, 公亦麾三衛兵, 策馬而進曰: "今日, 吾當爲國一死。" 將士從之, 莫有退者。轉鬪六十餘里, 至白塔郊, 射矢如雨, 流血滿道, 斬馘九級, 奪馬十五匹, 其中箭而死者, 賊皆載屍而入城, 收聚燒燼, 蓋亦百數矣。淸正盡撤其衆, 乘夜逃迍, 逾嶺南奔, 不暇炊飯, 公追至嶺東而還, 於是關北遂淸。蓋公慮事精明, 料敵如神, 尤善於知人, 用各當才, 故人皆忘死而樂爲用, 卒能以數千孤軍, 擊却方張之銳寇, 雖故名將, 何以過此哉。尹卓然怒公擅自錄功移文, 詰責語多無倫, 公辨析甚明而不爲屈, 卓然益大恚, 欲以軍法殺公, 拿公將佐, 至加榜掠, 而終不得搆罪之端, 乃作誣語, 反其實以啓。公本孤立, 又無爲之一言者, 是以公之前後所成就, 如彼卓爾, 而朝廷皆莫之知也。道旣通, 兵使始北來, 公乃以所率軍馬, 屬之以歸。三月除永興府使, 乙未, 移穩城, 丙申, 移吉州牧使, 丁酉, 御史上公治行, 賜表裏以褒之, 移安邊府使, 又移公州牧使。時方修外方鎭管之制, 西厓柳相公成龍, 請先使公整頓軍政, 使列邑取效。戊戌春赴任, 秋遞還, 是後五六年, 連出宰郡邑, 而入則或付軍銜, 或爲判決事。辛丑, 因北路人上疏, 頌公之功, 陞嘉善階。甲辰丁外憂, 服闋除長湍府使。庚戌, 以謝恩副使朝京。辛亥南原府使, 壬子再牧吉州。是時, 光海昏亂, 而凶人鄭造, 又公之至親也。公杜門屛跡, 見造來, 則或托醉沈眠, 或閉目不語, 及乙卯廢母之論起, 則居常縱酒, 人不得見其面, 除副摠管兵曹參判而皆不就。戊午爲昌原府使。癸亥三月, 仁祖大王御極圖治, 朝議欲大用公, 旣被元帥薦, 而又將置之通顯, 顧公急於便養, 求爲全州府尹。未數月, 大夫人歿於官舍, 公奉喪歸洛, 因毀成疾, 又生大腫, 久阽於危。甲子正月, 李适叛, 上將幸公山, 命起復公, 爲副摠管, 使出戰, 聞其病劇而止, 賊平許終喪。是歲朴來章等, 謀不軌, 以公有將才, 因醫人李大儉要令言及, 而大儉對公, 不敢發, 公實不聞。及事發獄成, 公以名出逆招被逮, 諸囚以實供無異辭, 公冤狀自白, 例當見原, 而詩案之禍, 又出矣。公曾在昌原, 公餘偶作〈詠史十絶〉, 其一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仍置之休紙軸, 至是塗壁於廬幕, 有一勳臣來訪, 就壁熟視而去, 傳播儕友間。臺官以'詩意有指', 啓請鞠問。澤堂李公植·浦渚趙公翼, 時爲問事郞, 言於委官曰: "詩人詠史之作, 非有深意, 何可爲罪也。" 力爭而不能得, 終至栲死於獄中, 卽十一月十九日也。遠近聞者, 莫不冤之。蓋公平居簡默, 未嘗論人長短, 而性本嚴毅, 雖所親善, 見其有不正處, 不復與之相款。月沙李文忠公素與公厚, 嘗謂人曰: "鄭子虛人物才器, 誠不可易得, 而獨恨其剛直太過。" 蓋以取禍爲慮, 而其言卒驗云。光海時有權臣, 欲引爲己援, 見公而諷之曰: "君之貧苦, 令人傷心, 其何以自堪。" 公卽應曰: "吾將帶弓矢, 入深山, 射猛虎, 以資生, 匪分富貴, 非吾願也。" 其人慚而去。李爾瞻隔洞而居, 慕公文才, 因人累致意於公, 而公終不答。有相識者, 受簡於鄭仁弘, 欲以藉重, 公杖而逐之, 凡勳貴請囑, 一切無所聽施, 公之峭直, 類如此, 而此其所以招禍之道也。公孝友出天, 事父母, 極其愛敬。判書公敎子弟甚嚴, 少失意輒撻之, 及大故之後, 公常曰: "吾雖欲復受杖, 尙可得乎。" 每嗚咽不自勝。伯兄喪耦獨居, 公撫視諸侄若己出。持身淸約, 聞世之貪利嗜貨者, 常唾鄙之。平生未嘗爲經營產業計, 其罷官而歸, 行李蕭然, 至家之日, 亦不免假貸而爲食, 尤嚴於家法, 閨門雖雍睦, 而內外截然有別, 至今子孫世守不墜, 而搢紳家亦皆傳誦焉。始澤堂公, 嘗爲北評事, 採訪遺民之言, 記公討賊始末甚詳, 而未有以褒顯之。顯廟甲辰間, 李相公端夏, 以澤堂之胤, 繼先躅出佐北幕, 感公忠義, 而心傷其冤恨之未暴, 旣倡議建祠而俎豆之, 歸又上封章, 爲公伸辨甚力, 且請褒贈崇秩, 上下廟堂議。大臣鄭公太和諸人, 咸一辭贊之, 乃贈公議政府左贊成, 兼如式, 而又命錄用子孫, 其祠額之宣, 則用呂相公聖齊之言也。鎭厚亦曾忝爲評事, 旣還朝而告于上曰: "以鄭文孚·李鵬壽之忠節, 其子孫無一立朝者, 甚非所以酬功興勸之道, 宜令銓曹, 別爲調用。" 上卽賜頷可, 而今幾二十年, 尙未有奉承者, 殊可慨然耳。竊惟公之豐功偉烈, 至冤深痛, 昭在人耳目, 而又自有石室之良筆, 顧奚暇區區贊歎而揄揚之哉。玆敢粗錄其事行履歷之表著者, 敬告有司, 以備採擇, 而餘皆略之, 蓋亦古人請諡之體然也, 幷冀垂察焉。崇政大夫行禮曹判書閔鎭厚謹狀。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킨다. 의정공(議政公)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활쏘기를……솜씨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에 "초(楚)나라에 사는 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다. 백 보(步)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에 화살을 쏘면 백 번 발사에 백 번을 맞힌다."라고 하였다. 정조 1559~1623.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시지(始之)이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측근으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인조반정 후 세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다. 기복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인데,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상중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것을 이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신도비명 병서 神道碑銘 【幷序】 大提學黃景源撰【吏曹判書李鍾愚書禮曹判書徐承輔篆】 대제학 황경원은 짓다. 이조판서 이종우가 쓰고 예조판서 서승보가 전서(篆書)를 쓰다.현종(顯宗) 6년(1665년) 12월 무인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臣)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왜노 청정(淸正)이 북방에 들어와 성곽을 도륙하고 불태울 때와, 소하강(蘇下江) 동북쪽의 말갈(靺鞨)이 날랜 기마를 몰아 무산(茂山)ㆍ부령(富寧) 땅 깊숙이 들어와 짓밟았을 때, 병마평사(兵馬評事) 신 문부(文孚)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을 토벌하여 6진 밖에서 적군의 기를 뽑았으며, 백탑(白㙮) 아래에서 적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히 하였고 오랑캐의 기운을 꺾어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만력 이래의 선무 공신(宣武功臣)인 여러 장수들 중에는 있지 않은 바입니다. 인조께서 반정을 하셨을 때 원수(元帥) 천거에 들었으나 남의 무고를 입고 하옥되었고, 또 지은 영사시(詠史詩)로 죄에 걸려 옥중에서 죽었으니 신이 속으로 슬프게 여깁니다.행장(行長)이 관서지방으로 들어왔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대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여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왜노를 평양성(平壤城) 아래에서 쳐부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북방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신종황제가 구원할 수 없었고, 대장군이 방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문부는 일개 평사(評事)로서 병사 6천 명을 모집하여 힘껏 싸워 왜노를 몰아내고 북방 22주를 회복하였건만, 큰 공로도 봉작(封爵)을 얻지 못하고 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부당한 법령 앞에 죽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정문부에게 작위를 주어 북방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심이 옳을 듯합니다."라 하니, 상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도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을 추증하였다.공의 성은 정씨(鄭氏)요, 자는 자허(子虗)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보임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다. 만력(萬曆) 20년(1592년)에 평수길(平秀吉)이 반란을 일으켜 6월에 청정(淸正)이 북방으로 들어왔다. 회령부(會寧府) 아전 국경인(鞠敬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 순화군(順和君) 토(?)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 등을 잡아 군중에 가두었다가 임민(林珉)을 시켜 청정에게 바치었다. 며칠이 지나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이 경성(鏡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말수(鄭末秀)가 명천(明川)에서 반란을 일으켜 청정의 앞잡이가 되어 북방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절도사(節度使) 한극함(韓克諴)ㆍ우후(虞候) 이범(李範) 등을 잡아 청정을 맞이하니 6진(六鎭)으로부터 함관령(咸關嶺)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가 모두 왜노의 수중에 들어갔다.공이 발분하여 은밀히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ㆍ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彥) 등과 더불어 경성에 들어가 북방을 회복하기를 도모하였는데 사람들이 국세필을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져서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공이 포기하고 떠나서 떨어진 옷을 입고 동냥을 하며 부령(富寧)의 정암산(靖巖山) 속으로 들어가 나물을 캐어먹었다. 한참 있다가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격(巫覡)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의탁하였다. 한인간이 자세히 쳐다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병마평사가 아니십니까?"라 하고서 마침내 후하게 대우하였다.8월 중에 공이 포의(布衣) 최배천(崔配天)ㆍ지달원(池達源) 두 사람과 더불어 혹은 지고 혹은 끌고 하며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무계(武谿)에 이르렀다. 무계의 처사 이붕수(李鵬壽)가 공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맞이하여 그 집으로 갔다. 한 달이 지나 공이 바다에 배를 띄워 동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이붕수가 개연히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왜적 토벌을 건의하고자 하여 장수 노릇을 할 수 있는 열사(烈士)를 은밀히 구하였으나 아직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공이 찾아왔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 북방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인하여 공을 머물게 하고 의병을 불러 모았다. 경성(鏡城)의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선봉이 되기를 원하였다.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 공의 소문을 듣고 또한 귀부하였다.이붕수가 몸소 군량을 지고 샛길로 길주(吉州)로 달려가 왜노 군중의 허실을 엿보았다. 그때 청정이 안변(安邊)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국세필과 더불어 염탐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 공이 근심하여 이에 강문우로 하여금 기병 몇을 거느리고 도중에서 맞아 모두 죽이도록 하니, 마침내 염탐하는 일이 끊어졌다. 정현룡 등이 공에게 호칭을 세우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이붕수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한 연후에야 허락하였다. 무리가 마침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ㆍ오응태를 차장으로 삼았다. 공이 스스로 나이가 어리고 지위도 낮다고 하여 정현룡에게 양보하니 정현룡이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고, 여러 장사들도 또한 공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였다.마침 말갈(靺鞨)이 소하강(蘇下江)으로부터 훈융(訓戎)ㆍ아산(阿山)ㆍ무이(撫夷)ㆍ조산(造山) 네 진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군사의 맹약을 주장하여 즉시 국세필에게 사자를 보내어 힘을 합하여 방어하자고 회유하였다. 9월에 공이 어랑리(漁郞里)로부터 유정(柳亭)에 이르러, 또 사자를 보내어 국세필과 부중(府中)에서 모이기를 청하자 국세필이 군대를 성대하게 거느리고 기다렸다. 공이 휘하 100여 기를 이끌고 말을 달려 부중으로 들어가 이해(利害)를 가지고 반복하여 비유하여 타이르니, 국세필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친속을 시켜 공의 곁에 거처하게 하고 그 기미의 변화를 살폈다.사람들 중에 공에게 국세필을 죽이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필이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공이 밤중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필과 더불어 부중(府中)의 일을 말하였는데 의심하는 기색이 없으니 세필이 매우 기뻐하였다. 얼마 있다가 왜노 90여 명이 밤중에 성 아래로 접근하자 공이 장사들에게 명하여 쳐서 참살하게 하였다. 이에 세필이 그 아들과 더불어 왜노 장수를 사로잡으니 공이 그 공을 기록하여 아뢰었다. 세필이 더욱 기뻐하여 이에 스스로 안심하였다.공이 또 부중의 반란군을 사면하고, 일찍이 자신을 쏜 자를 비장(禆將)으로 삼으니 6진의 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휘하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얼마 안 있어 회령의 유생 오윤적(吳允廸)이 공의 의기를 좇아 부학(府學)에서 말하기를 "국경인(鞠敬仁)은 참수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부중의 의사 신세준(申世俊)이 이에 뿔나팔을 부니 사졸들이 모두 모였다. 유생 윤립(尹岦) 등 6명이 사졸들에게 영을 내려 국경인 및 그 수양아들 최인수(崔鱗水) 등을 참수하게 하였다.겨울 10월에 명천의 사민(士民) 200명이 함께 말수를 쳤으나 패배하여 부중이 궤멸되었다. 의사 김천년(金千年)이 말수와 그 무리 장응호(張應豪) 등을 생포하였다. 이로부터 남북이 통로를 얻게 되어 징집된 병사가 점점 이르렀다. 이튿날 공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세필 등 13명을 포박하고 모두 참수하여 그 군대에 돌렸다. 이에 위엄과 명성이 북방에 진동하니 여러 진영의 장사(壯士)로서 모집에 응한 자들이 6000명에 이르렀다. 공이 여러 장수들과 출사를 의논하니 정현룡이 이르기를 "왜노가 지금 한창 강성하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경성을 지켜 그 틈을 엿보아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성 하나를 지키면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으니, 규문의 여자가 하는 일을 본받으려 하는가?"라 하였다. 이에 군대를 3위(衛)로 나누어 영강역(永康驛)을 나가 몇 리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고하기를 "왜노의 군사가 많으니 공이 더불어 싸우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마땅히 성을 지켜서 스스로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왜노를 위해 우리 군대를 저지하는가?"라 하고서 즉시 그 머리를 베어 깃대 위에 걸었다.명천(明川)에 이르러 방원(防垣)의 병마만호(兵馬萬戶) 한인제(韓仁濟)를 복병장으로 삼았다. 또 종사(從事) 원충서(元忠恕)에게 명령하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길주 북쪽 30리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왜노와 해정(海汀)에서 싸우게 하여, 그 선봉장 2명을 베니 왜노가 달아났다. 원충서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장평(長平)에 이르렀을 때, 왜노 직정(直正)이 장군 도관(都關)ㆍ여문(汝文)과 더불어 대군을 이끌고 죽기를 각오하고 맞붙어 싸웠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좌우로 나누어서 기병을 놓아 돌진하고 한인제의 복병이 또 번갈아 전진하며 시도(廝徒)와 우졸(郵卒)도 용맹을 떨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직정이 말에서 내려 마침내 걸으며 싸웠다. 신시(申時)에서부터 술시(戌時)까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우박처럼 모여드니, 왜노가 힘이 다하여 비로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모두 말을 채찍질하여 앞뒤로 끼고 달려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니 직정의 군사들이 궤멸되어 마침내 패주하였다. 강문우가 추격하여 장덕산(長德山)에 이르러, 도관ㆍ여문도 화살을 10여 군데 맞고 달아나자 복병이 사방에서 나와 크게 무찔렀다. 그 괴수 5명을 죽이고 825급을 참수하였으며 그 나머지 무리로 산으로 도망해 들어간 자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화살을 맞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전투마 118필을 획득하였고 또 정기(旌旗), 창과 방패, 갑옷도 매우 많이 얻었다.11월에 3위(三衛)가 군사를 합하여 길주(吉州)를 포위하였는데, 왜노가 굳게 지켜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급하게 공격하면 사상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먼저 영동책(嶺東柵)을 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책중(柵中)이 평정되면 길주의 형세는 고립되어 구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그것을 취하기는 조롱 속의 새와 같을 것이다."라 하였다.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쌍개포(雙介浦)에 이르러 직정을 만나, 3위의 정예 기병이 발분하여 그를 쳐서 마침내 왜노를 압해정(壓海亭) 아래에서 쳐부수었다. 100여 급을 참수하였고 시체가 15리에 어지러이 널렸다. 공이 또 길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이튿날 격문을 만들어 성중으로 쏘아 보내니 왜노가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12월에 공이 비로소 국세필을 참수한 공으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공의 공로를 시기하여, 이에 이문(移文)을 해서 공을 대장(大將)에서 해면(解免)하니 정현룡이 그를 대신하였다. 마침 절도사가 공으로 하여금 6진을 순행하여 말갈을 회유하게 하였다. 공이 휘하 50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현에 가서 죄 있는 자는 벌주고 공 있는 자는 표창하였으며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나가 싸우고 물러나 지켜서 능히 그 방법을 얻었으므로, 말갈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여 저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타일러서 그들이 잡아간 인구를 모두 돌려보냈다.공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그 추장 2백 명을 불러서 먹이며 따뜻한 말로 타이르니, 선춘(先春)ㆍ운두(雲頭) 이남에서부터 동건(童巾)ㆍ다온(多溫)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족들이 감히 다시는 변경의 해가 되지 않았다. 윤탁연이 공을 대장에서 면직시키고부터 인심이 불만을 품어 6000명의 장사들이 많이 흩어져 가버리자, 윤탁연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다시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이듬해 정월에 공이 홀로 말을 달려 길주에 이르니, 6천 명의 장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였으며 흩어져 가버린 자들도 모두 돌아와 모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공에게 와서 말하기를, "왜노가 고을 안을 멋대로 돌아다니니 원컨대 공이 군대를 나누어서 치소서."라고 하였다. 공이 정예병 3백 명을 선발하여 4부대로 나누어 성 밖에 매복시키고, 단천의 군대로 하여금 싸움을 걸어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게 하였다. 왜노가 추격하여 고개 아래에 이르자 4부대가 한꺼번에 나와서 달려 치니, 왜노가 패하여 달아나면서 공포(空砲)를 당겨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공이 힘을 다해 싸우면서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뒤를 잘라서 60급을 참수하였다.5일 있다가 청정이 군사 2만 명을 통솔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직정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공이 굳센 기병 600명을 이끌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며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죽지 않는다면 충신이 아니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그를 따라 감히 적을 두려워하여 물러나는 자가 없었다. 온종일 60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 백탑교(白㙮郊)에 이르러 날쌘 기병으로 곧바로 왜노를 쳐서 크게 무찌르니,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화살을 맞고 죽은 자가 천 명으로 헤아렸다. 왜노가 시체를 싣고 성 안으로 들어가 불을 놓아 태웠다. 밤에 청정이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밥 지을 겨를도 없었다. 이에 북방이 비로소 깨끗하게 맑아졌다.공이 최배천(崔配天)을 보내어 첩서(捷書)를 올리니 선조께서 눈물을 흘리며 최배천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를 더해 주었다. 윤탁연이 화를 내어 공의 과실을 모아 죄상을 열거하여 논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은 등용되지 못하였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다가 온성(穩城)으로 개수되었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옮겼다. 얼마 후에 왕의 부름을 받아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사(副使)로 천자에게 조회하러 갔다가 이듬해 사행이 돌아왔다. 북방 사람들이 상소하여 공을 칭송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管), 병조분사 참판(兵曹分司參判)에 승진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탈하며 조심스럽고 과묵하였다. 음주를 즐겼는데 대취하면 땀이 주르르 흘러서 빈객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원수(元帥)로 천거되었는데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장차 화(禍)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서 노모를 봉양할 수령 자리를 청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2년도 안 되어 무고를 입고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죄가 없으므로 석방되려고 하는데, 공을 미워하는 자가 영사시(詠史詩)를 얻어 그것으로 그를 중상(中傷)하였다.처음에 광해군 때 공이 시를 지어 초 회왕(楚懷王)을 슬퍼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회왕이 한번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백성들의 희망이 끊어졌는데, 그 자손이 또 무엇 때문에 회왕이라 일컫는가?'라는 것이었다. 후에 최내길(崔來吉)이 그 시를 보고서 마침내 세상에 전하였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죄에 걸려 고문을 받아 천계 4년(1624, 인조2) 11월 기사일에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0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모일에 모부 모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숙종 때(1713, 숙종39)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7대조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이 강헌대왕(康獻大王 태조(太祖))을 섬겨 충근(忠勤)함으로써 소문이 났다. 증중조(曾仲祖) 정희량(鄭希良)은 관직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이르렀으나 일부러 강에 빠져 그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부친 정신(鄭愼)은 모부의 부사로서 모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배필 모현의 모씨는 모관 모의 딸이며,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모공이다.공이 돌아가신 지 42년이 되어 병마평사 이공(李公) 단하(端夏)가 의론하기를 "북방은 윤관(尹瓘) 공이 처음으로 9성(九城)을 설치하고서부터 317년 후에 군현이 몽고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김종서(金宗瑞) 공이 그 땅을 회복하여 마침내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김공이 처음 6진을 설치하고서부터 161년 후에 군현이 왜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정문부 공이 그 땅을 회복하였다. 이 세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므로, 예법상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북방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무계(武谿)에 세웠으니, 숙종께서 이름을 내려 창렬(彰烈)이라고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정씨 가문이 현달하기로는 鄭氏顯聞정도공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自貞度始멀리 7세에 이르러 遙遙七世공이 그 복을 이어받았도다. 公承其祉처음에 평사를 제수 받아 初授評事북방의 원수를 보좌하니, 以佐朔帥변방의 선비들이 荒服之士예물을 가지고 모여들었도다. 罔不執贄섬오랑캐 극렬히 날뛰고 島夷孔熾북방 오랑캐도 위태롭게 하는데, 而狄又棘세 악인이 나라 안에서 반역하여 三孽內奰호랑이의 손발이 되었다. 爲虎羽翼아득한 북방 영토가 芒芒北門왜노들에게 함락되었으니, 淪于漆齒측근 신하가 도적을 키운 것이 屛臣養寇또한 크나큰 수치로다. 亦孔之耻공이 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公提義師무계에서 떨쳐 일어나니, 奮自武谿네 명의 지사가 용맹스럽게 四士蹻蹻더불어 고비를 따랐도다. 與從鼓鼙인의 갑옷에 예의 투구 쓰고 仁介禮冑충성 신의를 깃발 삼아, 忠信爲旌원수 백성을 죽이고 旣戮讎民마침내 성벽을 굳건히 하였도다. 遂敦雉城저 장평의 적을 쓸어버린 輮彼長平그의 6천 명의 군대가, 其旅六千백탑교에 이르러 至于白㙮하늘의 토벌을 도맡았다. 天討是專이에 야인들을 쳐서 乃拊山戎모여 살게하고 부드럽게 달래니, 以輯以柔오랑캐들이 복종하여 氊裘率從모두 임금님 은덕을 칭송하였도다. 咸頌王休북방이 평정된 것은 朔方載定누구의 공이던가, 伊誰之功아 너희 측근 신하가 咨汝屛臣도리어 충신을 헐뜯었도다. 乃反訾忠아름다운 시호가 빛나 有赫嘉謚그 잘못이 바루어졌으니, 其屈斯直의로운 명성을 길이 밝히고자 永昭義問돌에다 새기노라. 以刻于石 顯宗六年十二月戊寅,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臣太和言, 倭奴淸正入北方, 屠燒城郭, 蘇下江東北靺鞨勒輕騎, 深輮茂山·富寧地, 兵馬評事臣文孚, 躬將義師, 討淸正, 搴旗六鎭之外, 蹀血白塔之下。威服靺鞨, 以全邊境, 挫蠻戎之氣, 建震耀之勳, 萬曆以來, 宣武請將之所未有也。靖社時, 預元帥薦, 而被人誣告下吏, 又坐所謂詠史詩, 死於獄中, 臣竊悲之。行長入西方, 神宗皇帝命大將軍李如松, 率師五萬, 擊倭奴平壤城下。惟北方山川隔遠, 此神宗皇帝之所不得救, 而大將軍之所不能禦也。然文孚以一評事, 募兵六千, 能力戰斥逐倭奴, 復北方二十二州, 而大功未獲封爵, 乃以非罪, 竟死於刀筆之前, 豈不痛哉。臣以爲宜命有司, 贈文孚爵, 以慰北人之心。上乃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公姓鄭氏, 字子虛, 海州人也。少擧甲科, 補漢城府參軍, 出爲咸鏡北道兵馬評事。萬曆二十年, 平秀吉叛, 六月淸正入北方, 會寧府吏鞠景仁, 執王子臨海君珒·順和君?及南道兵馬節度使李瑛等, 幽之軍中, 使林珉獻于淸正。旣數日, 景仁叔父世弼, 以鏡城叛, 末秀以明川叛, 爲淸正爪牙, 北方大亂, 縛節度使韓克諴·虞侯李範等, 以迎淸正, 自六鎭至咸關嶺千餘里, 皆屬倭奴。公發憤, 潛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彦等, 入鏡城, 謀復北方, 衆畏世弼, 皆分散, 不可復集。公棄去, 弊衣行乞, 入富寧靖巖山中, 菜食。久之, 至龍城, 依巫覡韓仁侃家。仁侃熟視, 曰:"子豈非兵馬評事邪?" 遂厚遇之。八月中, 公與布衣崔配天、池達源二人者, 或負或携, 從間道, 南抵武谿。武谿處士李鵬壽見公容貌, 大說之, 迎至其家。居一月, 公欲浮海下東南, 鵬壽慨然爲公語曰:"吾欲建義討倭奴, 陰求烈士之可爲將者, 而未得其人也。今公來臨, 是上天佑我北方也。" 因留公招集義旅。鏡城壯士姜文佑、鍾城府使鄭見龍願爲前行。徐忠肅公渻聞公之風, 亦歸之。鵬壽身自負軍糧, 間走吉州, 覘倭奴軍中虗實。時淸正屯于安邊, 與世弼使諜不絶。公患之, 乃令文佑從數騎, 邀於道中盡殺之, 使諜遂絶。見龍等勸公立號, 公不肯。鵬壽流涕固請之, 然後乃許。衆遂推公爲大將, 見龍、應台爲次將。公自以年少位卑, 讓於見龍, 見龍固辭不敢當, 諸將士亦願隷公。會靺鞨, 自蘇下江襲訓戎、阿山、撫夷、造山四鎭, 殺掠人民。公由是主義旅盟, 卽遣使于世弼, 諭以戮力禦邊境。九月, 公自漁郞里, 次于柳亭, 又遣使請與世弼會府中, 世弼盛兵以待之。公引麾下百餘騎, 馳入府中, 以利害反復譬曉, 世弼畏服, 不敢動。乃使親屬居公旁, 察其機變。人有勸公誅世弼者, 世弼聞之,乃大懼。公夜屛人,與世弼語府中事,不色疑,世弼甚喜。已而倭奴九十餘,夜薄城下, 公命將士擊斬之。於是世弼與其子禽倭奴將, 公錄其功, 申聞之。世弼益喜, 乃自安。公又赦府中叛兵, 嘗射己者, 爲禆將, 六鎭戎士皆感激, 願屬麾下。居未幾, 會寧諸生吳允廸服公之義, 言於府學曰:"敬仁可斬。" 府中義士申世俊乃吹角, 士卒皆會。諸生尹岦等六人勒令士卒斬敬仁及其義兒崔鱗水等。冬十月, 明川士民二百人共討末秀, 敗績潰府中。義士金千年生擒末秀及其黨張應豪等。自是南北得通道, 徵兵稍至。明日, 公建大將旗, 登南門樓, 縛世弼等十三人, 皆斬之, 以徇其軍。於是威聲震北方, 列鎭壯士應募者, 至六千人。公與諸將議出師, 見龍曰:"倭奴方銳不可敵。宜保鏡城以伺其釁。" 公奮曰:"文孚本興義兵, 爲國耳。今守一城, 不出戰, 欲效閨門女子爲邪?" 乃分其兵爲三衛, 出永康驛, 行數里。有人走告曰:"倭奴軍盛, 公與戰必不利也。宜城守以自保。" 公怒曰:"汝爲倭奴沮吾軍邪?" 立斬其首, 懸旗上。次于明川, 以防垣兵馬萬戶韓仁濟爲伏兵將。又令從事元忠恕率精兵, 屯吉州北三十里, 與倭奴戰于海汀, 斬其帥先登二人, 倭奴遁去。忠恕乘勝追擊之, 至長平, 倭奴直正與將軍都關、汝文, 引大兵敢死搏戰。文佑、忠恕分左右, 縱騎突進, 仁濟伏兵又迭前, 廝徒、郵卒無不鼓勇, 直正下馬遂步闘。自申至戌, 四面流矢如雹集, 倭奴力屈, 始升高。文佑、忠恕皆怒馬先後夾馳, 上峻阪, 直正軍潰, 遂北走。文佑追至長德山, 都關、汝文亦中矢十餘而遁, 伏兵四出, 大破之。殺其巨魁五人, 斬首八百二十五級, 其餘衆亡入山者, 輒縱火而燒殺之。中矢墜崖而死者, 不可勝數。奪戰馬一百十八匹, 又得旌旗戈戟鎧甲甚多。十一月, 三衛合兵, 圍吉州, 倭奴堅守不可拔。公以爲:"吾兵驟攻, 死傷必多, 不如先擊嶺東柵。柵中旣平, 則吉州勢孤援絶, 吾取之如籠中鳥耳。" 卽移兵至雙介浦, 遇直正, 三衛精騎奮擊之, 遂破倭奴於壓海亭下。斬百餘級, 僵尸縱橫十五里。公又進圍吉州。明日, 爲檄射城中, 倭奴恐懼, 皆遁去。十二月, 公以始斬世弼功, 特加通政。觀察使尹卓然忌公之功, 乃移文免公大將, 見龍代之。會節度使令公巡行六鎭中, 以綏靺鞨。公率麾下五十人, 北行郡縣, 誅有罪旌有功, 拊禦戰守, 能得其方, 靺鞨畏愛, 私相戒諭, 悉還其所掠人口。公具酒食, 招其酋長二百人以饋之, 溫言開告, 繇先春、雲頭以南, 至童巾、多溫諸族, 不敢復爲邊境害。自卓然免公大將, 人心不平, 六千壯士多散去, 卓然始懼, 乃復以公爲大將。明年正月, 公單騎馳至吉州, 六千壯士見公來, 勇氣百倍, 散去者亦皆還集。端川郡守姜燦造公語曰:"倭奴橫行郡中, 願公分兵以擊之。" 公選精兵三百人爲四隊, 伏於城外, 使端軍挑戰陽北。倭奴追之抵嶺下, 四隊並出馳擊之, 倭奴敗走, 提空礮發, 皆不中。公力戰, 或遮其前, 或斷其後, 斬六十級。居五日, 淸正勒兵二萬人, 踰摩天嶺, 與直正合衆北上。公引勁騎六百人, 策馬而進, 曰:"吾爲國家不戰死, 非忠臣也。" 將士從之, 莫敢有畏敵而退者。終日轉闘六十里, 至白㙮郊, 以輕騎直搗倭奴, 大破之。流血盈野, 中矢死者以千數。倭奴載尸入城中, 縱火燒之。夜淸正棄城南遁, 不暇炊食。於是北方始廓淸。公遣配天上捷書, 宣廟流涕, 加配天朝散大夫。卓然恚, 積公過失, 列狀論之, 故公不得見用矣。三月授永興府使, 改穩城, 遷吉州牧。已而召拜掌隷院判決事。光海卽位, 以副使朝天子, 明年使還。北方人上疏頌功, 陞嘉善, 進五衛都總府副總管、兵曹分司參判, 皆不就。公爲人剛簡謹默。喜飮酒, 大醉淋漓, 賓客不得見其面也。仁廟卽位, 被元帥薦, 公歎曰:"吾將不免矣。" 乃以母老求終養, 出尹全州, 不二年, 被人誣告, 逮繫獄。無罪當釋, 嫉公者得詠史詩以中之。始, 光海時, 公爲詩, 傷楚懷王, 蓋其意曰:"懷王一入武關, 民望已絶, 則其孫又何以稱懷王也?" 後崔來吉見其詩, 遂傳於世。公由是坐, 被考問, 以天啓四年十一月己巳, 卒于獄中, 享年六十。以明年某月某日, 葬某府某里之原。肅廟時, 謚曰忠毅。七世祖貞度公易事康獻, 以忠勤聞。曾仲祖希良, 官至藝文館檢閱, 佯沈江, 不知所終。皇考諱愼, 某府府使, 贈某曹參判。公之配曰某縣某氏, 某官某之女也。有子幾人, 曰某公。旣卒之四十二年, 兵馬評事李公端夏議:"北方自尹公瓘初置九城, 後三百十七年, 郡縣入于蒙古, 金公宗瑞復其地, 遂置六鎭。自金公初置六鎭, 後一百六十一年, 郡縣入于倭奴, 鄭公文孚復其地。此三人以勞定國, 法宜祀。" 於是北人立公之廟於武谿, 肅廟賜名曰"彰烈"。銘曰:"鄭氏顯聞, 自貞度始。遙遙七世, 公承其祉。初授評事, 以佐朔帥。荒服之士, 罔不執贄。島夷孔熾, 而狄又棘。三孽內奰, 爲虎羽翼。芒芒北門, 淪于漆齒。屛臣養寇, 亦孔之耻。公提義師, 奮自武谿。四士蹻蹻, 與從鼓鼙。仁介禮冑, 忠信爲旌。旣戮讎民, 遂敦雉城。輮彼長平, 其旅六千。至于白㙮, 天討是專。乃拊山戎, 以輯以柔。氊裘率從, 咸頌王休。朔方載定, 伊誰之功。咨汝屛臣, 乃反訾忠。有赫嘉謚, 其屈斯直。永昭義問, 以刻于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문록 창곡 최유해 길주 □ 있을 때 □ 바이다. 記聞錄 蒼谷崔有海【□吉州時所□】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승승장구하며 쳐들어오자 왕의 수레가 서쪽으로 몽진하였다.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윤탁연(尹卓然)은 새가 도망치고 꿩이 숨는 듯하였는데, 왜적이 길주(吉州) 이북에 가득 차 백성을 날로 사살하였으니 이것은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과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 등이 철령(鐵嶺)을 지키다가 패하였기 때문이었다.어리석은 백성과 종[奴]의 무리들은 우리나라 사대부의 은신처를 다투어 왜놈에게 고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재신(宰臣) 황정욱(黃廷彧)과 황혁(黃赫) 등이 회령(會寧)에서 포로가 되었으며, 명천(明川)의 관노 말수(末秀)와 회령의 관노 국경인(鞠景仁) -정공의 장계에서 모두 국경인을 아전이라 하였으니, 관노라 칭한 것은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등은 왜적의 무리를 따랐으며, 병사 한국함, 경성 판관 이홍업(李弘業), 명천 현감 한인제(韓仁濟) 등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10월에 본주(本州) 사람 허진(許珍)은 적개공신 허유례(許惟禮)의 증손으로서 무사 김국신(金國信),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 등과 충심과 울분이 격렬하여 몰래 산속에 다니면서 의병을 일으키고 패전 병사 및 백성들을 일깨우니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해구(海口)에서 의논을 모아 군사 1천 명을 얻었다. 여러 사람들이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추대하여 대장으로 정하고 피를 마시며 하늘에 맹세했다. 반역자 송대풍(宋大豐), 임대정(林大定), 박 보(朴甫), 기남(奇南), 기말수(奇末守), 국경인(鞠景仁), 전언국(田彦國) 등을 먼저 잡아 몰래 죽이니 위엄이 원근에 진동하였다.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 경원 부사 유경천(柳擎天), 오응태(吳應台) -정공의 장계와 택당의 《채순록(採詢錄)》에는 모두 유경천은 고령(高嶺) 첨사라 하고 오응태를 경원 부사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경원 부사 유경천이라 하였고 오응태의 위에는 관직이 없으니 아마도 탈자나 오자가 있는 듯하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모두 와서 따랐으니, 부대가 만 명이 되었다. 대장은 제장(諸將)에게 부서를 맡겼으니, -부서를 맡긴 것은 정공의 장계와 다르니, 아마도 이 글을 기록할 때 정공의 장계가 아직 널리 전해지지 않아서 다만 들은 내용에 의지하여 기록한 것인가.- 한인제는 좌위장이 되어 목책(木柵)에 진을 쳤고, 정현룡은 중위장이 되어 백탑(白塔)에 진을 쳤고, 유경천은 우위장이 되어 날하(涅河)에 진을 쳤고, 원충서(元忠恕)는 우복병장이 되어 모회(毛會)에 진을 쳤고, 오응태는 좌복병장이 되어 석성(石城)에 진을 쳤고, 허진(許珍)은 우척후장이 되어 방치동(方峙洞)에 진을 쳤고, 김국신(金國信)은 좌척후장이 되어 임명(臨溟)에 진을 쳤으며, 대장 정문부는 명천(明川)에 진을 쳐서 서로 의각(猗角)의 형세44)를 이루어 적병이 나와 노략질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장차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11월에 주진(州陣)의 적장 거도문(巨道文)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명천 가파(加坡) 지역까지 와서 노략질하였다. 이 때에 내노(內奴) 이배(李培)는 집안 살림이 매우 넉넉하였는데 굿을 지내기 위해 빚어 놓은 술이 한창 잘 익었으므로 모든 적이 마시고 진탕 취하였다. 크게 노략질하여 회군하는데, 허진과 김국신이 회의하기를 "왜놈이 돌아갈 때 어둑해지면 마땅히 석성령(石城嶺)에 이를 것인데, 길이 좁고 옆으로 매우 험준하니 군사가 매복하면 목을 움켜쥐고 등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고 사잇길로 가서 몰래 매복하였다.적이 과연 날이 저물어 석성령 밑에 이르므로, 좌우 복병이 함께 뛰쳐나와 두어 겹으로 포위하니 적이 놀래어 어쩔 줄 몰라 하였고 혹은 술에 취해서 창도 잡을 수 없었다. 허진과 김국신 등이 활을 잡고 쏘니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짧은 병기로써 뒤쫓아가 찌르니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오직 왜적의 우두머리 거문만이 도망하여 성벽에 들어가 통곡하였는데, 견고한 성벽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 뒤 성과 나루 그리고 진(鎭)에 머무르던 왜적이 임명(臨溟)에 나타나 지르고 노략질하니, 의병장이 날랜 기병을 산기슭에 매복시키고 적이 돌아오는 것을 엿보다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왜적의 목을 베었다. 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길가에 늘여놓은 것이 십여 리나 뻗쳤으니,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진동하였다.이듬해 2월에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격문을 돌려 협력하여 왜적을 칠 것을 청하니, 의병장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사절동 권관(斜卩洞權官) 고경민(高敬民)을 장수로 삼아 보냈는데, 성 밖에서 왜적을 꾀어 공격하여 매우 심하게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을 토막 내니 왜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에 대장 청정(淸正)에게 고하니 대군을 거느리고 본주(本州)로 들어가는데, 의병장이 고을 사람 허충방(許忠邦)과 원충서(元忠恕)로 하여금 내달려가서 왜적이 가는 길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왜적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행군하였다. 허대성(許大成)과 이붕수(李鵬壽)는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정이 고을에 이른 이튿날 철수하기 시작하여 이틀 거리를 하루에 가며 남으로 내려가니, 북로에서 국명(國命)을 보전하게 된 것은 의병의 공 아님이 없었다.이 때 북로의 소식이 오랫동안 행조(行朝)에 두절되었다. 정문부가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을 시켜 승전보를 행재소에 보고하니, 그를 포상하여 판관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그 뒤 경성 유생 등이 상소하여 정문부 등이 창의한 사적을 극력 아뢰니, 선조 대왕이 가자(加資)하고 다시 길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허진의 손자 허힐(許詰)은 유식한 유생이었고, 김국신의 손자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달려가 근왕병이 되어 시종일관 종군하였는데, 각각 할아버지의 기풍이 있었다. 이붕수의 손자 이훤(李萱)과 이용(李蓉)은 경성에 있다고 한다.무인년(1638년) 8월에 목사가 소장을 올려 의병장의 자손을 거두어 녹용(錄用)해서 권선징악의 도리를 세상에 밝혀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감사에게 명하여 후손들을 채방하여 녹용(錄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壬辰, 倭賊長驅, 龍馭西行, 咸鏡監司尹卓然, 鳥竄雉伏, 賊瀰滿吉州以北, 日殺人民, 北兵使韓克諴·南兵使李渾等, 守鐵嶺致敗之故也。愚民僕屬, 爭告我國士大夫隱伏處, 王子臨海君·順和君·宰臣黃廷彧·黃赫等, 被擒於會寧, 明川官奴末秀·會寧官奴鞠景仁【鄭公狀啓, 皆以景仁爲吏, 則官奴之稱, 恐誤。】等, 付賊黨。兵使韓克諴·鏡城判官李弘業·明川縣監韓仁濟, 幷被擒。十月本州人許珍, 敵愾功臣惟禮之曾孫也, 武士金國信·鏡城儒生李鵬壽等, 忠憤激烈, 潛行山谷, 以義兵倡, 諭敗卒及士民, 多應之。會議於海口, 得兵一千。衆推北評事鄭文孚, 有文武才, 定大將, 歃血誓天。叛民宋大豐·林大定·朴甫·奇南·奇末守·鞠景仁·田彦國等, 爲先潛戮, 威震遠近。北虞侯韓仁濟·慶源府使柳擎天·吳應台【鄭公狀啓及澤堂《採詢錄》, 皆以柳擎天爲高嶺僉使, 吳應台爲慶源府使, 而此云慶源府使柳擎天, 吳應台上無官銜, 恐有脫誤。】·鍾城府使鄭見龍, 皆來附, 兵隊滿萬。大將部署諸將,【部署, 與鄭公狀啓異, 豈其時鄭公狀啓未及傳行, 而只憑傳聞記之邪。】 韓仁濟爲左衛將屯木柵, 見龍爲中衛將屯白塔, 柳擎天爲右衛將屯涅河, 元忠恕爲右伏兵將屯毛會, 吳應台爲左伏兵將屯石城, 許珍爲右斥候將屯方峙洞, 金國信爲左斥候將屯臨溟, 大將鄭文孚陣明川, 相爲猗角, 以待賊兵出掠, 將勦之。十一月, 州陣賊將巨道文, 領千兵, 出掠明川加坡地。時內奴李培, 家甚饒, 因巫祀釀酒方濃, 諸賊飮而盡醉, 大掠回軍, 許珍·金國信會議曰: "賊之還, 暮當至石城嶺, 路狹傍多險阻, 可伏兵, 扼項拊背。" 間行潛伏。賊果暮至嶺底, 左右伏兵俱發, 圍之數匝, 賊震駭失措, 或醉不能持戟, 許珍金國信等, 彎弓以射, 無不中, 短兵追跐, 積屍如山, 賊酋巨文, 獨跳奔入壁痛哭, 堅壁不動。後城津留鎭之賊, 出臨溟焚掠, 義兵將以輕騎還伏山麓, 伺賊之還, 追斬獲甚多, 遂剖其腹, 露其腸, 列之路旁, 連延十餘里, 兵聲大震。明年二月, 端川郡守姜燦移檄, 請恊力討賊, 義兵將抄精銳, 以斜卩洞權管高敬民爲將以遣, 誘擊於城外, 大膊亦甚, 賊大懼, 告于大將淸正, 領大兵入本州, 義兵將使州人許忠邦元忠恕, 馳犯賊路, 賊略不顧徐行。許大成李鵬壽, 中丸以死。淸正到州, 翌日撤回, 倍日南出, 北路得全國命者, 莫非義兵之功也。時, 北路聲息, 久絶行朝。文孚使鏡城儒生崔配天, 報捷行在, 褒賞秩判官以送, 後鏡城儒生等, 陳疏極言鄭文孚等倡義之蹟, 宣祖大王命加資, 再牧吉州。許珍孫詰, 有識儒生, 金國信孫起男, 再赴勤王, 終始從軍, 各有祖風。李鵬壽孫李萱李蓉, 在鏡城云。戊寅八月, 牧使陳疏, 請收用義兵將子孫, 以彰勸懲, 上命監司採訪遺孫, 以裨錄用。 의각의 형세 한 손으로는 그 뿔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 발을 비튼다는 뜻으로 협공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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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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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선국 함경도 임명 대첩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咸鏡道臨溟大捷碑銘 【幷序】 崑崙崔昌大撰【李奉化明弼書】 곤륜 최창대가 짓다. 봉화 이명필이 쓰다.옛날 임진년의 난리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한 세상에 이름을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공(忠武公)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원수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李月川)의 연안(延安) 대첩45)이 있는데,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으며 재담꾼은 칭송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분들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서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냄에 힘입을 수 있었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 다니며 숨어 지내다 분발하여 다만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 지방을 수복한 것은 관북(關北)의 군사가 제일이었다.처음 만력(萬曆) 연간에 왜의 추장 수길(秀吉)은 강한 군사들을 믿고 오만하게 굴면서 우리의 뜻을 거스르며 중국을 넘겨다보고 침범하려 하였다.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어, 드디어 대규모로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밀고 들어왔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몽진하였고 여러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켰다. 그 날랜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은 행조(行朝)를 뒤쫓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은 북방 침공을 맡았다.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왜적의 군대가 대단히 정예병이라 철령(鐵嶺) 이북의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鞠敬仁) 등이 반역하여 왜적에게 내응하였다. 국경인은 회령부(會寧府)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왜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사로잡고 아울러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내주며 정성을 보였다.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必)은 그의 숙부인데, 이놈이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南)과 연합하여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聲勢)를 벌여 백성을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들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백성들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경성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로, 분개하며 말하기를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몰래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도모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찾아왔으니,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主將)으로 삼고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고서 피로써 의리를 맹서하며 병사를 모집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그 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국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국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와 북을 세우고, 남문루에 올라 국세필에게 올라와 인사하라고 꾀어 그가 누대에 올라올 때에 강문우에게 눈짓하여 그를 사로잡게 하고서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용서해 주었다.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남쪽 명천(明川)으로 달려가 말수 등을 잡아 목을 베었으며, 회령 사람이 또한 국경인을 쳐서 죽여서 의병에게 호응하였다. 군세(軍勢)가 점점 커져서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길주(吉州) 사람 허진(許珍), 김국신(金國信), 허대성(許大成)도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이 때에 청정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하게 하고서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뒷배를 지켜주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부서를 나눠 배치하되 정현룡은 중위장을 삼아 백탑(白㙮)에 진을 치게 하고, 오응태와 원충서(元忠恕)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게 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게 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을 삼아 날하(涅河)에 진을 치게 하고, 김국신과 허진은 좌우 척후장으로 삼아 임명(臨溟)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전투에 이긴 것에 오만하여 방비를 허술하게 하였다.우리 군사들은 한꺼번에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세를 타고 달려들었으니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었다. 적이 패하여 달아나는데 군사를 풀어 추격하여 장수 다섯 명을 죽였고 목은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가축,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원근에 승전보가 진동하여 도망치고 숨어 지내던 장수와 아전들이 앞 다퉈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왜적은 패잔병을 수습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길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는 왜놈을 맞아 곧바로 무찔러 버렸다.이윽고 성진(城津)의 왜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노략질하므로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습격하였으며, 산에 숨어 매복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고 또 수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길가에 늘어놓자 군사의 사기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접전을 벌이는데 편장(偏將)이 철기를 끌고 풍우처럼 빠르게 가로질러 돌파하니 적이 기세를 잃고서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승세를 타고 또다시 격파하였다.이듬해 정월에 단천(端川)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이윽고 청정이 군대를 쓰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대군을 보내어 길주의 왜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후미를 공격하였는데, 백탑에 이르러 큰 전투가 벌어져 또다시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붕수, 허대성, 이희당(李希唐)은 전사하였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 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행장을 평양에서 격파하였는데, 정공이 최배천(崔配天)을 시켜 샛길로 행재소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붕수에게 사헌부 감찰을 추증하고 최배천에게는 조산대부의 직급을 내렸다.당시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은 것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顯宗) 때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서 듣고서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비로소 정문부에게는 찬성(贊成), 이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거의했던 여러 사람들을 제사지내게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지금 임금 경진년(숙종 26, 1700년)에 내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알게 되니 제공(諸公)의 기풍을 탄식하면서 상상하였다. 또 이른바 임명(臨溟), 쌍포(雙浦)를 찾아가 진을 치고 싸우던 자리를 살펴보면서 배회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탄식이 일어 떠나지 못하였다. 간간이 부로에게 말하기를 "섬나라 오랑캐의 전화(戰禍)가 혹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고립된 군사를 이끌고서 강한 왜구를 무찔러 우리나라 왕이 일어났던 옛 지역을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에서 면하게 하였다.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와 연안의 일은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드리우고 있으니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예를 표하는데, 관북의 훌륭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라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라 하였다.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서 사람을 시켜 나에게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기를 "이 일은 공이 실로 처음 의논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라 하기에 나는 마침내 그의 사적을 서술하고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남쪽에서 도적이 와 有盜自南명나라를 치려하였네. 讐我大邦우리 왕은 그 이웃이 되니 我王于蕃온 나라가 칼날을 받았어라. 以國受鋒높고 높은 북방이 屹屹北原오랑캐 소굴이 되었구나. 狼虺穴墉어리석은 백성들이 有蠢者氓대항하지 못하고 따랐네. 不抗而從피 머금은 입으로 서로 삼키며 血口胥呑흉악한 독을 퍼트렸어라. 濟毒以兇선비가 헌걸차니 士也朅朅준수한 무리 모두 같구나. 俊羣攸同군사에겐 의리가 제일 중요하니 兵義莫利창과 활로 싸우는 게 대수랴 不屑戈弓이윽고 반역의 무리를 섬멸하니 旣殲叛徒왜구는 우리에게 덤비지 못하네. 寇莫我衝무부들 북을 치고 함성 지르니 武夫鼓呼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솟구치는 듯. 山摧海洶군대의 정벌이 크게 빛나니 師征孔赫왜놈들 무너져 두려워하였어라. 厥醜崩恟협심하여 하늘의 벌이 이르게 하니 協底帝罰나의 충정을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라네. 匪私我忠북토가 이미 평정되니 北土旣平너는 누에 치고 나는 농사짓누나. 爾蠶我農임금께서 "아! 大君曰咨누가 너의 공보다 뛰어나랴." 孰尙女功관직 추증하고 사원 제사 명하니 贈官命祠시종 빛나는 은혜 베풀었어라. 光惠始終사풍이 이 때문에 열렬하니 士風其烈백성들은 곧바로 싸울 수 있구나. 民可卽戎임명의 바닷가에 臨溟之厓우뚝한 빗돌 있어라. 有石嵸嵸새겨서 그 말 외우게 하며 刻之誦詞영원히 보게 하리라. 用眡無窮숭정 갑신 뒤 65년 10월 일 삼가 짓다. 在昔壬辰之難, 其力戰破賊, 雄鳴一世者, 水戰則有李忠武之閑山焉, 陸戰則有權元帥之幸州焉, 有李月川之延安焉, 史氏記之, 游談者誦之不倦。雖然此猶有位地, 資於乘賦什伍之出也。若起單微奮逃竄, 徒以忠義相感激, 卒能用烏合取全勝, 克復一方者, 關北之兵爲最。始萬曆中, 倭酋秀吉, 怙强驁逆, 規犯中國, 怒我不與假道, 遂大入寇, 長驅至都。宣廟旣西幸, 而列郡瓦解, 賊已陷京畿。其驍將二人, 分兵首兩路, 行長躡行朝西, 淸正主北攻。其秋, 淸正入北道, 兵銳甚。鐵嶺以北, 無城守焉。於是鞠敬仁等叛應賊, 敬仁者, 會寧府吏也。素惡不率, 及賊到富寧, 隙危扇亂, 執兩王子及宰臣奔播者, 並縳諸長吏, 與賊效欵。鏡城吏鞠世必, 其叔父也, 及明川民末守木男, 連謀相黨, 並受賊所署官, 各據州城, 聲張勢立, 殺脅惟所指, 數州崩駭, 人莫自保。鏡城李鵬壽, 爲氣士也, 奮曰: "縱國家創攘至此, 兇徒敢爾耶。" 乃潛與崔配天·池達源·姜文佑等, 謀起義兵, 諸人地相夷, 莫適爲將。評事鄭文孚, 有文武才, 無兵可戰, 脫身匿山谷間, 聞義兵起, 欣然從之, 遂推鄭公爲主將, 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爲次將, 歃血誓義, 募兵得百餘人。時北虜人侵北邊, 諸公使人誘世必, 並力禦北虜, 世必許之, 內義兵州城。明朝, 鄭公建旗鼓, 上南城樓, 誘世必上謁, 時其入, 目文佑禽之, 斬以徇, 赦其脅從。卽引兵南趣明川, 又捕末守等斬之, 會寧人亦討敬仁誅之, 以應義兵, 軍勢稍壯, 來附者益衆, 吉州人許珍·金國信·許大成, 亦聚兵爲聲援。當是時, 淸正令偏將, 領精兵數千, 據吉州, 身率大軍, 屯南關以護之。十一月, 遇賊于加坡將戰, 鄭公部署諸將, 見龍爲中衛將, 屯白㙮, 應台及元忠恕爲伏兵將, 分屯石城·毛會, 韓仁濟爲左衛將, 屯木柵, 柳擎天爲右衛將, 屯涅河, 金國信,許珍爲左右斥候將, 分屯臨溟方峙, 賊狃勝不甚備。諸軍並起揜擊, 乘銳蹙之, 士無不疾呼先登者, 賊敗走, 縱兵追之, 殺其將五人, 斬獲無數, 盡奪其馬畜兵械。於是遠近響震, 將吏亡伏者爭起應之, 衆至七千餘人, 賊收入吉州城, 窘不敢動, 列伏于旁陿, 邀其出輒剿之。已而城津賊, 大掠于臨溟, 率輕騎襲之, 萆山設伏, 伺其還夾擊, 大破之, 又斬數百人, 遂剖其腹腸, 暴之大路, 於是兵聲大振, 賊益畏之。十二月, 又戰于雙浦, 戰方合, 偏將引鐵騎橫衝之, 迅如風雨, 賊失勢, 不及交鋒, 皆散走, 乘勝又破之。明年正月, 又戰于端川, 三戰三勝, 還屯吉州休士。旣而淸正知軍不利, 遣大兵迎還吉州賊, 我軍尾擊, 至白㙮大戰, 又敗之, 是役也, 李鵬壽·許大成·李希唐, 戰死。然賊遂退, 不敢復北。當是時, 皇明將李如松, 亦破行長於平壤, 鄭公乃使崔配天, 間行奏捷行在, 上引見流涕, 贈鵬壽司憲府監察, 賜配天秩朝散。時觀察使怒文孚不稟節度, 而疾義兵功聲出已, 聞奏率以誣揜, 以故賞不行。久之, 顯宗時觀察使閔鼎重, 北評事李端夏, 聽於父老, 以實聞。於是加贈文孚贊成, 鵬壽持平, 餘人贈官有差, 又建祠鏡城之漁郞里, 祀同事諸人, 賜額曰彰烈。今上庚辰, 昌大爲北評事, 旣與義旅之子孫, 訪問前故, 得事蹟爲詳, 慨然想諸公之風, 又嘗路所謂臨溟·雙浦者, 觀其營壁戰陣之所, 徘徊指顧, 爲之咨嗟而不能去。間語其長老曰: "島夷之禍烈矣, 三京覆而八路壞, 諸公出萬死一生, 提孤軍摧勁寇, 使我國家興王舊地, 卒免於左袵, 而邊塞之人, 興於聽聞, 勸於忠義者, 又誰之力也。幸州·延安, 俱有碑碣, 載事垂烈, 東西者瞻式, 以關北之功之盛而獨闕焉, 庸非諸君之恥歟。" 咸應曰: "然。惟鄙人志, 矧公命之。" 遂伐石鳩材, 以人來請文, 辭非其人, 又來曰: "斯役也, 公實首議, 不得命將輟。" 余乃叙其事, 系之銘曰: "有盜自南, 讐我大邦。我王于蕃, 以國受鋒。屹屹北原, 狼虺穴墉。有蠢者氓, 不抗而從。血口胥呑, 濟毒以兇。士也朅朅, 俊羣攸同。兵義莫利, 不屑戈弓。旣殲叛徒, 寇莫我衝。武夫鼓呼, 山摧海洶。師征孔赫, 厥醜崩恟。協底帝罰, 匪私我忠。北土旣平, 爾蠶我農。大君曰: '咨, 孰尙女功。' 贈官命祠, 光惠始終。士風其烈, 民可卽戎。臨溟之厓, 有石嵸嵸。刻之誦詞, 用眡無窮。"崇禎甲申後六十五年十月日 謹撰 이월천의 연안 대첩 이월천은 이정암(李廷馣,1541~1600)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 개성(開城)에서 방어했고,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공으로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가 되어 연안(延安)에서 포위된 왜군 3,000여 명을 격파하여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고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596년 충청도관찰사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여 파직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로 기용되어 도순찰사를 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재차 황해도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하였고, 난이 끝난 후 사퇴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해동명장전 이계 홍양호 海東名將傳 【耳溪洪良浩】 정문부(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 무자년(158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속하였다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다. 임진란에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임진강을 건너 임금의 수레가 혹시 북관(北關)에 들어간 것을 예상하고서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약속하였다. 행장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청정은 북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용맹은 왜적 중에 제일이며 거느린 병사는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으로부터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으로 나아가니 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궤멸되었다. 청정은 하루에 수백 리를 다녀 형세가 비바람과 같았는데 지나간 곳은 노략으로 닭과 개는 물론 땅 위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는데, 반민(叛民)들이 왜병을 인도하여 그를 붙잡았다. 북청부(北靑府) 사람 김응전(金應田)이 거짓으로 감사의 종[奴]이라고 칭하고 적중에 들어가 밤에 틈을 타서 업고 도망하여 행재소에 돌아왔다. 판관(判官) 유희진(柳希津)은 반민에게 잡혀 항복하였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났으나 반민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府使)를 죽이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왕자 순화군(順和君)이 철원(鐵原)에 들어갔다가 왜적이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남도에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따랐었다. 이에 이르러 두 왕자는 또 남도로부터 군사를 피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 청정이 함경북도에 들어오자 병사(兵使) 한극함이(韓克諴)은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도 마천령(磨天嶺)에서 패하게 되자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전에 두 왕자는 사나운 종놈을 풀어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회령(會寧) 향리 국경인(鞠景仁), 경성(鏡城)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고 두 왕자 및 배신(陪臣)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맞아들여 항복시킨 뒤에 붙잡아 두었다.청정이 승승장구하며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다 빼앗았다. 그리고 국 경인을 왜의 관직인 판형(判刑)으로 삼았고 국세필은 예백겸본도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삼았고 말수도 대장(大將)으로 삼아 북관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정문부가 평사(評事)로서 경성(鏡城)에 있다가 난을 만나 탈출하여 산중에 숨어 있었는데,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와 최배천(崔配天)이 정문부를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정문부가 흔연히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정문부를 장수로 추대하고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장사(壯士)가 수백과 현지 수령의 변장(邊將)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틈타 여러 번 변방을 노략질하니 국세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배천은 원래 국세필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의탁하는 것처럼 하니 국세필의 어미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최생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 하였으나 국세필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틈을 타서 달래기를 "북쪽 오랑캐가 만약 크게 쳐들어오면 진실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 평사는 위엄과 덕망이 있으니 능히 맞아들여 함께 오랑캐를 지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곧 격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국세필이 의심을 하여 군사에게 엄명하고 기다리니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 이르러 국세필을 보고 친히 달래고 타이르니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병사의 부신(訃信)을 바쳤다. 그러자 정문부가 영을 내리기를 "높거나 낮은 백성과 병사들에게 예전에 법을 범한 것은 묻지 말라."라 하고 세필로 하여금 전같이 군사를 맡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국세필을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반병(叛兵) 가운데 일찍이 자기를 쏘아 상처를 입힌 자를 발탁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세필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으며 그 심복으로 하여금 정문부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그 무리를 시켜 사졸과 함께 성에 올라 전투를 연습하게 했는데, 밤에 이르러 파하였으며 매일 이렇게 하였다.왜인이 경기병(輕騎兵)으로 문득 와서 성을 두드리거늘 정문부가 국세필을 시켜 왜장을 꾀어 문에 들어오도록 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官) 강문우(姜文祐)에 명령을 내려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게 하고 드디어 주군에 격문을 돌려 반병(叛兵)의 항복을 받았다. 육진(六鎭)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배반한 자들을 석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차례로 투항하였다. 이에 장수와 군사, 호걸들이 서로 다투며 모집에 응하였다. 이에 주변의 성보(城堡)를 다 회복하니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정문부가 회령(會寧)에 격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하도록 타일렀으나, 국경인은 따르지 않고 길주에 주둔한 적과 더불어 경성을 협공하려고 꾀하였다. 한편 회령 사람 오 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 모여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에게 호응할 것을 꾀하였다. 국경인이 염탐하여 알고는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주모자를 나오라고 위협하므로, 오윤적이 몸을 빼어 자수하니 국경인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부(府)의 아전 신세준(申世俊)이 몰래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훔쳐 객사 문 밖에서 부니 반병(叛兵)들은 국경인이 영을 내렸나하고서 일시에 모여드니 숲을 이룬 듯했다.신세준 등이 그들을 통솔하여 그의 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인 다음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켜 나아가 국경인에게 말하기를 "성 안의 병사가 이미 다 나한테 귀속되었다. 네가 오윤적을 내놓으면 마땅히 군사를 파하겠다."라 하니, 국경인이 겁을 먹고 이를 따랐는데, 드디어 국경인의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해주었다. 오윤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문부에게 간 뒤에 명천 사람들이 자제를 단결시켜 말수를 치고서 정문부에게 응하기로 했는데 말수에게 패하였다. 정문부가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官)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 강문우를 보냈다. 이들이 60여 기병을 거느리고 주야로 행군하다가 갑자기 명천(明川)에 쳐들어가니 말수가 겁을 내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성과 읍은 다 회복하였으나 오직 길주만 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정문부가 이에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모여 살게 하니, 모집된 병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러 병사들이 다 적을 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여러 장수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이 아직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국세필을 체포하고 아울러 그 무리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리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서서 반란한 놈들은 이 무리들이므로 나머지는 문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정문부가 본래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사기가 십 배나 되었는데, 곧 장계를 갖추어 최배천(崔配天)을 행재소로 보내어 아뢰니 주상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정문부에게 옷과 신, 환약을 내리었다.부사(府使)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에 머물러 틈을 기다리고자 하므로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함이다. 이제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지 않으니 반도들을 본받으려 함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봅시다."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을 남문 밖에 모이게 하여 이 두 사람의 다툰 바를 말하고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 결정하라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정문부가 옳다고 하였다.이 당시 왜장 직정(直正), 도문(道文), 도관(都關), 여문(汝文) 등이 길주를 점거하여 주둔하고 또 영동(嶺東)에다가 군사를 배치하고 책(柵)을 설치하여 남북도의 길을 통하게 하고서 왕래하며 불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종사관(從事官)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 성 밖 세 곳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엿보게 하였다.병진일 먼동이 틀 무렵 왜적이 병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가파리(加坡里)를 불 지르고 노략질하고서 노략질 한 것들을 핍박하며 돌아오는데, 원충서가 2백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왜적의 선도(先導)를 격파하니 왜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 때에 적의 대진(大陣)이 성 안에서 계속 지원하니 원충서는 산이 험한 곳으로 물러갔다. 한인제가 구 황, 강문우 등 3백여 기병으로 달려와서 원충서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직정(直正), 도관(都關), 여문(汝文)이 선봉의 정예 군사 4백 명으로 앞장서 올라가니 관군이 돌기병(突騎兵)으로 출몰하면서 격파하였다. 전투가 날이 저물 때쯤 되자 왜적의 앞뒤 진들이 다 궤멸되었다. 유경천이 군사를 보내어 그 귀로를 차단하고 관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직정, 도관, 여문 등 다섯 장수의 목을 베었고 8백 여 수급(首級)과 군 장비 기계 1천여 점을 노획하였고, 노략당한 것을 다 빼앗아 돌아왔다. 구황과 강문우는 북방의 장수 가운데 가장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다.정문부가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타고 길주를 진격하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영동(嶺東)의 적이 대규모로 몰려오니 정문부는 쌍개포(雙介浦)에서 맞아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군사를 이동하여 영동책(嶺東柵)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길주성 아래에 줄지어 진을 치고서 왜놈의 약탈을 막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 지구전을 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들어오다가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써 중도에 뒤쳐져 머물렀다가 방향을 틀어 갑산(甲山)으로 들어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윤탁연을 본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은 정문부가 왜적을 물리친 공에 대해 듣고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행조에 알렸으며, 또한 정문부의 병권을 빼앗고서 경성 부사 정현룡을 대신 북병장(北兵將)을 삼으니 군중(軍中)이 울분을 토하며 흩어져 떠나가 버렸다. 정문부가 드디어 병권을 놓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면서 군민(軍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모여 살게 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이 여러 번 변방에 들어와 약탈하므로 정문부가 매복했다가 그들을 격파하매 북쪽 오랑캐가 모두 귀순하였으니, 또 납지(蠟紙)로 그런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유생 이회록(李希祿)과 김응복(金應福)이 윤탁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므로 윤탁연이 행조에 치계하고서 무과를 열어 백여 명을 취하였다. 무과 출신 유응수(柳應秀), 이유일(李惟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 생원 한경상(韓敬商) 등이 군사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윤탁연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히 적을 토벌하였으니 적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산 부사 성윤문(成允文)으로 대장을 삼고 묘파(廟坡) 권관 백응상(白應祥)을 함흥 판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 아래로 나아갔는데, 왜적이 밤에 관군을 습격하니 성윤문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일군(一軍)이 다 함락되었다.이유일, 유응수, 박중립, 정해택 등이 별도로 진을 치고 적을 치는데 간혹 돌격하여 왜놈의 머리를 베어왔다. 한인제(韓仁濟), 유응수, 이유일은 다 함흥 사람이다. 전공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들을 지목하여 함흥 삼걸이라 하였다. 한인제는 공으로써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백응상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용맹함을 지녀 잘 싸웠는데 마침내 진에서 죽었다. 당시 북변을 수토하는 신하들은 물러서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남북의 사이에 끼어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이 없으므로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쳤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자주 대장을 바꾸어 전투의 기회 그르친 것이 많았으니, 그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정 문부를 기용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문부가 대장으로 직임에 나아가 사졸을 실컷 먹이고서 구황으로 하여금 2백 명의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단천 군수 강찬을 돕게 하니 그가 왜적 2백 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으며, 원충서가 또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죽였다.청정(淸正)이 행장의 패전한 통보를 듣고 경기(京畿)에 들어와서 장차 철군하여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길주는 정문부에게 제압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2만의 군졸로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는데, 정문부가 이를 염탐하여 알아내고 군사 3천여 명을 먼저 임명(臨溟)에 웅거하여 매복시켜 기다렸다. 계미일 날이 밝아올 때 왜적의 군대는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서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움직여 그 뒤를 차단하고 좌우로 포위하여 날쌘 기병을 풀어서 내달리며 활을 쏘니 살상(殺傷)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피가 흘러 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청정이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열려고 관군과 더불어 60여 리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길이 막혀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정문부 등이 적의 형세가 다시 거세진 것을 보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걱정하여 명천(明川)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 날 밤 청정이 시체를 쌓아 불 지르고, 몰래 군사를 거두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밥 지을 겨를도 없이 달아나는데, 남쪽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퇴로를 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달아났는데, 이유일이 병사를 거느려 그들을 추격하였다. 청정은 길성(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모든 주둔군을 다 철수시켜 함께 한양에 모였다.정 문부가 장계를 올려 장수와 병졸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탁연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유일은 군공(軍功)으로써 볼하 첨사(乶下僉使)가 되었고 유응수는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정문부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북로(北路)의 장사(壯士)들은 모두 의병을 풀고 떠났으며, 난이 평정됨에 정문부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정문부는 한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인조 때에 이르러 북방의 경계46)가 발생하니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명하였는데 정문부를 원수로 천거하였다. 정문부가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문부가 지은 시를 습득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북방 사람들이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북평사가 되어 북방 사람들의 칭송을 채집하여 조정에 알리게 되니, 공론이 비로소 돌아 그의 원통함을 씻고 그의 공을 포상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이 경성(鏡城)에 나아가 사원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사액하기를 '창렬사(彰烈祠)'라 하였다. 鄭文孚, 字子虛, 海州人也。少好讀書, 善屬文。中宣廟戊子文科, 隸槐院, 出爲北道兵馬評事。壬辰之亂, 行長與淸正, 渡臨津, 慮車駕或入北關, 約分路, 行長向西, 淸正向北, 勇冠諸倭, 所領兵尤精悍。從谷山踰老里峴, 出鐵嶺, 北守兵潰。淸正日行數百里, 勢如風雨, 所過赤地, 鷄犬不遺。監司柳永立避入山峽, 叛民引賊兵襲執之。北靑府人金應田, 詐稱監司奴, 入賊中, 乘夜竊負, 逃歸行在。判官柳希津, 爲叛民所執降, 兵使李渾, 奔入甲山, 爲叛民所殺, 甲山人, 又斬府使而降賊。王子順和君入鐵原, 聞賊入江原道, 遂踰鐵嶺, 入咸鏡南道。隨臨海君。至是兩王子, 又自南道避兵入北道。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 戰敗被擒, 南兵使李瑛, 亦敗於磨天嶺, 州郡皆陷。先是兩王子, 縱豪奴擾民間, 大失民心, 會寧鄕吏鞠景仁·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等, 各據城, 迎降兩王子及陪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被執。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判刑, 鞠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北關。是時, 文孚以評事, 在鏡城, 遭亂脫身, 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 見文孚請起兵討賊, 文孚欣然從之。遂推文孚爲將, 團集土兵, 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 皆附之。北虜乘機, 屢掠邊境, 世弼憂懼, 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 弼母戒曰: "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從。配天遂乘間說曰: "北虜若大至, 誠難與敵。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虜不足慮也。"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浮, 卽馳檄諭之, 世弼持疑, 嚴兵以待。文浮率兵至城下, 見世弼親自說諭, 世弼始迎入, 納兵使符信。文浮下令曰: "大小民兵, 勿問舊犯。" 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浮不許, 又擢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猶未放心, 使其腹心, 夾侍文浮左右, 伺察動靜。文浮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如之。倭人以輕兵奄至叩城, 文浮命世弼誘倭將入門擒之, 令安原權官姜文祐, 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兵, 六鎭聞文浮已釋反側, 次第送款。將士豪傑, 爭先應募, 於是悉復緣邊城堡, 北道人心稍定。文浮移檄會寧, 諭敬仁來降, 敬仁不從, 與吉州屯賊謀夾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鄕校謀伐敬仁, 以應文浮, 敬仁諜知, 急圍鄕校, 脅出首唱, 允迪挺身自首, 敬仁囚之。府吏申世俊潛偸敬仁鐃角, 吹於客舍門外, 叛兵疑敬仁出令, 齊會如林。世俊等仍領之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 謂敬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出吳允迪, 當罷兵。" 敬仁駭慄從之。遂斬敬仁, 傳首鏡城, 允迪領兵繼赴 後明川人團結子弟攻末守欲應文浮, 爲末守所敗, 文浮潛遣吾村權官具滉·安原權官姜文祐,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末守惶怯,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城邑盡復, 惟吉州, 爲倭所據。文孚乃安集軍民, 募兵至三千餘人, 衆咸欲擊賊自效。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受諸將齊進曰: "今將討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坐席, 執世弼, 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唱, 止此輩, 餘無問。" 此文孚本謀也。軍聲大振, 士氣十倍, 卽具啓遣崔配天, 聞行在, 上嘉之, 賜文孚衣履丸藥。府使鄭見龍欲住鏡城, 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 孰可孰不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劫。文孚率所部, 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覆於吉州城外, 以覘之。丙辰昧爽,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驅所掠而還, 忠恕率二百騎, 先馳邀之, 擊賊先導, 賊驚北。會, 賊大陣, 自城中繼援,忠恕退保山險。仁濟以具滉文佑等三百餘騎, 馳至與忠恕連兵大戰, 直正·都關·汝文, 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 擎天遣兵截其歸路, 官軍兩面夾擊大破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首八百, 軍裝器械, 千餘計, 盡奪所掠而歸。具滉·姜文佑, 北將中最驍勇者也。文孚乘勝, 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大至, 文孚邀于雙介浦敗之, 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剽掠, 阻其粮道, 以爲支久之計。先是, 宰臣尹卓然, 陪王子入北, 以詭計落留中道,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以卓然爲本道監司。至是, 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功以聞, 又奪文孚兵懽, 以鏡城府使鄭見龍, 代爲北兵將,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拊集軍民。蕃胡累寇邊, 文孚設伏破之, 胡蕃皆歸順, 又以蠟紙馳啓。儒生李希祿·金應福請卓然起義兵, 馳啓行朝, 設武科, 取百餘人, 武出身柳應秀·李惟一·朴中立·鄭海澤·生員韓敬商, 募兵得三千餘人, 屢戰皆捷, 卓然曰: "此輩尙能討賊, 賊不足憂也。" 以甲山府使成允文爲大將, 廟坡權管白應祥爲咸興判官, 統諸軍進于獨山下, 賊夜襲官軍, 允文不知所爲, 脫身逃走, 一軍盡陷。惟一·應秀·中立·海澤等, 別屯勦賊, 或突擊斬馘。韓仁濟·柳應秀·李惟一, 皆咸興人也。以戰功知名, 目爲咸興三傑, 仁濟以功爲北虞侯, 應祥, 延安人也, 勇果善戰, 竟殉於陣。當時北邊守土之臣, 莫不以退避爲得計, 而端川郡守姜燦, 介於南北之間, 四顧無援, 而能募兵討賊, 時論嘉之。尹卓然奪文孚兵, 數易將帥, 多誤戰機, 懼其得罪, 復起文孚爲將。將就職犒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 元忠恕又擊殺賊將於吉州城下。淸正聞行長敗報, 入京畿將謀撤還, 吉州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 文孚諜知之, 悉兵三千餘人, 先據臨溟, 設伏以待。癸未黎明, 賊兵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兵, 截其尾, 繞左右, 縱輕騎馳射, 殺傷甚衆, 流血被野。李鵬壽·李希唐,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戰鬪六十餘里。時, 道梗, 兩西消息隔絶, 文孚等見賊勢更盛, 疑其再逞, 退屯明川。是夜, 淸正積尸燒之, 潛撤兵, 乘夜跳城, 不暇炊爨而走, 恐南兵勦絶, 不敢踰咸關嶺, 循海走。李惟一勒兵追之, 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撤江原道諸屯, 俱聚于京城。文孚又馳啓, 請賞將士, 而卓然從中沮抑, 李惟一, 以軍功爲乶下僉使, 應秀得拜三水郡守, 文孚陞通政拜吉州牧使。北路壯士, 無不解體, 亂平, 無人言文孚事者。優遊散地, 至仁祖朝有北警, 命擧將才, 有以文孚應元帥薦, 文孚聞之歎曰: "吾其死矣。" 未幾, 有摭文孚詩句, 成案逮獄栲死, 北人無不冤之。後澤堂李植爲北評事, 採北人之頌, 聞于朝, 公議始行, 雪其冤而褒其功, 北人就鏡城, 建祠祭文, 賜額曰彰烈祠。 북방의 경계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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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창렬사지 외재 이단하 彰烈祠志 【畏齋李端夏】 성상 5년 갑진년(1664년)에 다시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내가 임금을 곁에서 모시다가 제일 먼저 뽑혀서 보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북방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장차 시행되지 않는 것을 정비하여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주와 식견이 졸렬하고 어두워 군막에 들어온 지 한 해가 되었어도 계책을 내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경영한 것이 있었다.대개 만력 병진년(1616년)에 나의 선친이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관찰사의 지휘에 의하여 남북도의 사적을 널리 탐문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저술하였는데, 한 본은 함경도 감영에 남겨 두었다가 잃어버렸으며 한 본은 집안의 화재에 불타버렸다. 다만 수초본(手草本) 잡기 두어 장만이 휴고(休稿)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왜란 때 이 지방에 사는 유생들과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죽이고 왜구를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정공 및 여러 의사가 큰 공을 수립하였는데 당시 도신(道臣, 관찰사)이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선발되어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도내의 사람들은 모두 다 억울해 하며, 국가에서 충신을 격려하는 도리로 보아도 일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여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선친의 문자가 마침 다시 유고에서 발견되어 오늘날 공안(公案)이 된 것은 마치 하늘의 뜻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북방에 들어온 후 곧 경성(鏡城) 유생과 더불어 상의하였으니, 즉 그 일을 드러내어 정공을 윤 문숙공(尹文肅公)18)의 사당에 배향하고자 하여 글로써 방백(方伯) 민정중(閔鼎重) 공에게 품의하였다. 그랬더니 민공(閔公)이 이를 즐겁게 듣고 회답을 보내 왔는데 처음 의병을 일으킨 어란리(禦亂里)에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난 뒤에, 조정에 계문(啓聞)을 하여 더욱 빛나려 한다고 하였다.돌아보건대 정공이 시안(詩案)에 연좌되어 죽었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의 원통함을 말하는데, 그것을 씻어주는 은전은 있지 않았다. 이제 만약 즉시 조정에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이 혹 허락하지 않는다면 일은 마침내 뜻대로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에 선비들이 방백에게 글을 올려서 이곳의 공론으로써 우선 사우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방백이 대신들에 통보하여 함께 의론하고서 좋다는 소식을 얻은 뒤에 선비들에게 허락하였고, 또 감영의 봉록에서 덜어 내어 공사의 비용으로 삼았다.이때 나의 벗 사문 홍석귀(錫龜)가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있었는데 원래 재주가 많아 감여술(堪輿術)까지 통달하였다. 나와 어란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드디어 사원의 터를 무계호(茂溪湖)가에 정하였다. 무계는 곧 감찰(監察)에 추증된 이붕수(李鵬壽)가 살던 곳으로, 이붕수는 실로 정공(鄭公)을 맞이하여 이 곳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반 같은데 한쪽 맞은편 두 산이 맞닿는 곳에 호수가 있어 산의 안팎이 모두 호수를 이루었는데, 내호수가에 구림(丘林)이 있다. 구림의 서남쪽 수백 보쯤에 산록이 평평하고 넓은 곳이 있는데 바로 사원의 터이다. 어란리는 일명 어랑(漁郞)이라고도 하는데 풍기(風氣)가 엉겨 모여 북쪽 지방의 명승지가 되며, 무계는 마을 가운데 가장 경치 좋은 곳이다.터는 모좌 모향으로, 을사년 4월 26일 터를 파서 처음 일을 시작했고 9월에 준공을 보았다. 그달 25일에 봉안제를 거행하여 정공이 주벽이 되고 감찰 이공을 배향하였다. 최배천(崔配天) 공, 지달원(池達源) 공, 강문우(姜文佑) 공 등은 모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로 또한 아울러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처음에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론이 펼쳐지지 못하였다고 여기니 내가 방백에게 의론하여 그들을 추가로 배향케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하여 보니 사우를 이미 완성한 뒤에 아마도 수호하는 사람이 없을까 싶어 이에 별도로 사원의 담밖에 서당을 지어 '촉룡(燭龍)'이라 명명하고서 마을 선비들이 여럿이 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을 삼고 제사 지낼 때면 제관들이 재숙할 곳으로 삼기로 했으니, 사우가 모두 두어 칸, 서당이 모두 두어 칸이었다.이 일을 감독한 사람은 유생 이순욱(李純郁)과 현이기(玄以機)이다. 또 유생 가운데 명망이 있는 이를 선발하여 서당의 유사(有司)로 삼았는데 이발영(李發榮)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목재를 명천부(明川府) 경내에서 벌목하는데 부사(府使) 영공 남숙(南淑)이 그 일을 힘써 주관하였고, 병사(兵使) 영공 이여발(李汝發)과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규진(李奎鎭) 공, 부령 부사(富寧府使) 임상유(林商儒) 군, 수성 찰방(輸城察訪) 조상한(趙相漢) · 길주 목사(吉州牧使) 강호(姜鎬) 공,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지온(李之馧) 공 및 단천(端川)에서 함께 일을 도왔다.이때 농사철을 당하여 거듭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기에 역사(役事)에는 경성(鏡城) · 명천(明川) · 길주(吉州) 세 고을의 승군을 동원하였으며, 역사하면서 양식으로 사용하고 남은 피곡(皮穀) 50석은 바로 서당 유사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옛 사창의 제도처럼 변리를 취하게 하여 여러 학생이 배우는 식량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이에 방백이 이를 듣고 감영의 곡식 1백 석을 희사하여 넉넉하게 해주었으며, 또한 관에 소속된 노비 다섯 사람을 주어 묘지기 겸 서당을 지키도록 했다. 병사가 또 둔전의 일부를 떼어 주어 제전(祭田)으로 삼았고, 판관(判官)도 어선 한 척을 주어 제수 및 여러 학생의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내가 또 방백과 상의한 뒤에 남북도의 임진년 때 의사의 사적을 채록하여 모두 20명의 성명을 얻었는데, 방백이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추가로 포상의 은전을 청하니 이를 묘당에 내려 의론하여 모두 청한 대로 해 주었다. 그 계문에 빠진 자는 방백이 자손들에게 면강첩19)을 주고 또 음식을 주었다.내가 또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온 뒤에 상소하여 정공의 원한을 씻어줄 것과 포상하여 높은 벼슬을 추증할 것을 청하니 임금도 허락하였다. 이에 도내 의사에게 증직의 은전을 일시에 거행하였다. 오직 사우(祠宇)의 사액만은 아울러 청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의론이 '너무 급하여 차근차근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일단 천천히 기다렸다. 생각하여 보건대 임진년에 왜구가 팔도에 상처를 입혔고 반민(叛民)이 아울러 일어나 높은 벼슬아치를 다투어 결박한 것은 오직 북로에만 그러했으니, 그들의 인심을 가히 알 수 있다. 만약 충성과 지략을 갖춘 선비가 의병을 규합한 거사가 아니었다면 관북 일대는 마땅히 우리 소유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공업을 이미 이룬 뒤 또 남에 의해 공이 가려져서 70년에 이르도록 업적이 가려졌으니, 이것이 내가 선친의 문자에 감동되어 이 일에 정성을 들이게 된 까닭이다.마침 현재의 걱정거리가 바야흐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의열을 밝게 빛나게 하고 교화를 수립하는 것은 실로 눈앞에 제일의 급선무이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우활하다고 여기지 않아 일을 마침내 성취하였다. 그러나 방백 민공(閔公)이 몸소 세도(世道)를 맡아서 평소 이런 일에 힘쓰지 않으며, 또 병상(兵相) 이하 여러 공들이 의를 좋아하여 협조한 힘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이 일을 급히 이룰 수 있겠는가?내가 이미 정공이 창의한 때의 장계(狀啓) 및 사우를 지을 때의 약간의 문자를 모아서 이를 편찬하여 한 책을 만들어 서당에 넘겨주었으며, 또한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뒷날 상고하도록 하였다.병오년 늦봄 하순에 쓴다. 聖上之五年甲辰, 復設咸鏡北道評事, 余從近侍, 首當差遣。維時朝廷有北顧憂, 將修擧廢墜, 而顧余才識劣昏, 入幕周年, 無所籌畫。第有一事所經營者, 蓋於萬曆丙辰, 維我先君爲北評事, 以方伯指, 博採南北道事蹟, 述〈北關志〉, 而一本留咸營, 見失, 一本燼於家火。惟手草雜記數紙, 見遺於休稿中, 卽記故評事鄭公文孚, 當壬辰之亂, 與土居儒生, 倡義誅叛賊, 討倭寇事者也。鄭公及諸義士樹此大功, 而爲當時道臣掩蔽, 未蒙甄賞, 誠爲道內人心所共憤惋, 其在國家激勸之道, 不可以事在旣往置之, 而先人文字, 適復見遺, 爲今之公案者, 似有天意存焉。故余入北後, 卽與鏡城儒生輩相議, 思欲表章其事, 欲以鄭公祀享于尹文肅之廟, 以書稟議于方伯閔公鼎重, 閔公樂聞而復之, 使別立祠宇於禦亂里首事之地, 而欲啓聞于朝廷, 以增重光耀。顧念鄭公坐詩案以死, 國人咸稱其冤, 而未有伸雪之典。今若遽請立祠于朝廷, 而朝議或不之許, 則事終難諧。故於是士人等呈文于方伯, 欲以此地公論, 先立祠宇, 方伯通議于大臣, 得其報可而後許之, 且捐營捧, 爲工役費。時余執友洪斯文錫龜守端川郡, 素多藝, 旁通堪輿術。余約會于禦亂里, 遂定祠基於茂溪湖之上, 茂溪, 卽故贈監察李公鵬壽所居, 而鵬壽實邀致鄭公, 仍謀起義兵於此地也。四山環擁如盤中, 而一面兩山合襟處, 有湖水, 山之內外皆成湖, 而內湖之上, 有丘林焉。丘之西南數百步許, 山麓平曠地, 卽祠基也。禦亂里, 一名漁郞, 風氣凝聚, 爲北土名勝之區, 而茂溪又里中之最勝處也。基用某坐某向, 乙巳四月二十六日, 開基始役, 九月告訖。以其月二十五日, 行奉安祭, 鄭公位主壁, 以監察李公配之。崔公配天池公達源姜公文佑, 俱是倡義之人, 亦有幷享之議, 初未敢輕擧, 僉議咸以爲屈, 余議于方伯, 使之追配。且念祠宇旣成之後, 恐無以守護, 於是別營書堂于祠墻之外, 名以燭龍, 爲里中士子羣居修業之所, 而祭時則爲祭官齋宿之處。祠宇凡幾間, 書堂凡幾間。監蕫其事者, 儒生李純郁玄以機也。又選儒士之望, 爲書堂有司, 李發英, 其人也。伐材于明川府境, 府使南令公淑, 力幹其役, 兵使李令公汝發·鏡城判官李公奎鎭·富寧府使林君商儒·輸城察訪趙君相漢·吉州牧使姜公鎬·鍾城府使李公之馧及端川, 幷有所助。時當農節, 重煩民力, 役用鏡明吉三邑僧軍, 役糧用餘, 有皮穀五十石, 仍付書堂有司, 使之取息, 如古社倉之制, 以備諸生學糧。方伯聞之, 又捐營穀一百石以贍之, 且給屬公奴婢五口, 爲廟直兼護書堂。兵使又割給屯田, 以爲祭田, 判官又給漁船一隻, 俾爲祭需及諸生之供。余又與方伯相議, 採訪南北道壬辰義士事蹟, 凡得二十人姓名, 方伯啓聞于朝, 請追加褒典, 下廟堂議, 悉如所請。其未與啓聞者, 方伯又給子孫免講帖, 且給食物。余又承召還朝, 上疏請伸鄭公之冤, 褒贈崇職, 上亦許之。與道內義士贈職之典, 一時擧行。獨惟祠宇賜額, 幷欲上請, 而朝議以爲'太遽無漸', 故姑徐以俟耳。 仍念壬辰倭寇創殘八路, 而叛民幷起, 爭縛長吏者, 惟北路爲然, 其人心可見也。若非忠智之士, 糾義之擧, 關北一道, 當不爲我有, 而功業旣就之後, 又被掩覆於人, 迄兹七十年間, 聲烈翳然, 此余所以有所感發於先人文字, 而惓惓於是事者也。適會時憂方軫北邊, 其所以昭揭義烈, 樹立風聲者, 實爲目今第一急務, 故聞者不以爲迂, 而事竟得就。然非方伯閔公身任世道, 素用力於此等事, 又非兵相以下諸公好義協助之力, 又安能就此之亟也。余旣裒集鄭公倡義時狀啓及經營祠宇時凡干文字, 編爲一冊, 付之書堂, 且記事之首末, 俾爲後考云。丙午暮春下浣, 志。 윤 문숙공(尹文肅公) 고려시대 숙종, 예종 시기에 활약했던 윤관(尹瓘)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하였다. 면강첩 조선시대 교생(校生)이 강경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져 군역에 나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강경을 면제해 주는 문서.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사 遺事 외재 이공이 북평사가 되었을 때 북방의 공론에 의하여 선생을 위해 사원을 세우고자 하여 편지로 선생의 유사를 서하 이공에게 물었다. 서하공이 선생의 사적을 그 자손에게 구하여 보고 대략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이윽고 《서하집》에 그 기록을 실었다.공은 젊어서 문명(文名)이 드러났으며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의 시문과 변려문[騈語]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온 뒤 항상 충절(忠節)을 다하는 것으로 평소의 뜻으로 삼았다. 만력 신묘년(1591)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나갔다. 임진년(1592) 왜구가 삼도(三都)를 함락한 뒤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가 멀리 북도까지 쳐들어와 열읍(列邑)이 와해되었다. 회령(會寧)의 역적 국경인(鞠景仁)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등이 난리를 일으켜 왜적을 인도하여, 두 왕자와 배신(陪臣)이 모두 왜적에게 붙잡혔지만, 직책을 맡은 관원과 수령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고 감히 대적할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이에 공이 처음 나라에 보답할 뜻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방략(方略)의 적절한 대책이나 사공(事功)의 전말은 나라 역사에 실려 전할 뿐 아니라 함경도 사람들이 전기(傳記)를 만들어 기록하여 잊지 않고 멸실되지 않을 자료로 삼았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려고 하였으나 공이 원통하게 죽었기 때문에 감히 실행하지 못하였다.응교(應敎) 민유중(閔維重)이 지난번 경성부에 있었을 때 공의 당시 사실을 상세히 들었으며 또 전기 기록을 얻어서 가져왔기에 뒤에 이를 한 통 베꼈다. 나라 역사의 경우에는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이 《선조실록》을 수정할 때, 공이 북관(北關)을 평정한 일을 특별히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서술하여 공의 충성과 노력을 매우 상세히 드러내었고 또한 일찍이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고 말했다고 한다.공이 전란에 임해서 능력을 펼친 사실이 이처럼 밝고 분명한데 당시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탁연(尹卓然)은 공의 공로가 자기의 업적을 가릴까 미워하여 행재소에 거짓 계문(啓聞)을 보냈다. 그러므로 공의 큰 업적은 세상에 드러내어 상격(賞格)을 받지 못하고 다만 국세필을 죽인 공으로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승진하였다. 그 뒤 함경도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상소를 올려 공적을 호소하였으므로 포상과 찬미가 비로소 이르러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고 남과 만날 때도 왜란 때 했던 북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 공을 아는 사람은 더욱 공에게 심복하였다. 공은 성품이 욕심이 없고 물러나기를 좋아하였고 당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높이거나 따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맑은 조정에서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광해군(光海君) 임자년(1612년) 이후 시대 상황이 크게 어긋나는 것을 목도하였으며 또한 흉적(兇賊) 정조(鄭造)27)가 불행하게도 가까운 집안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행적을 감추었다. 혹시 정조가 오는 것을 보면 크게 취해서 인사불성인 척 하거나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에게 대단히 배척받았다. 또 이이첨(李爾瞻)과는 한 동네 떨어져 살았는데, 이이첨이 공의 문재(文才)를 인정하여 항상 교유를 맺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한번도 그의 집에 인사를 가지 않았으므로 공이 재야에 있으면서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 모두 10여 년이었으며, 그 사이에 간혹 지방 수령을 맡기도 했지만 이 또한 부임지에서 1년을 머문 적이 없었다.기미년(1619년) 이후 폐모(廢母)의 변이 발생하자, 정청(廷請)이나 수의(收議)28)할 때에 공은 매번 지방으로 나가 피함으로써 한번도 반열을 따라 참여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술에 빠져 살았고 집안사람들도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으니, 이는 술로 자신을 더럽히고 스스로 폐인이 된 것이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상공(相公)은 바로 공의 중표(中表, 내외종 사촌) 형제이다. 계해년(1623년) 봄에 공의 거처를 자주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공이 취한 채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의 자제들에게 "대영공(大令公)께서는 앞으로 과음하지 마시고 내가 다시 오는 걸 기다리시게 하라."라 하였으니, 학곡의 의도를 알 수 있었지만 공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이해 3월에 인조께서 반정(反正)을 하셨다. 묘당(廟堂)에서는 공이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고 여겨 원수(元帥)의 천거를 받았고, 또 공이 혼조(昏朝, 광해군) 때 배척되었던 사람이라 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공이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을 요청하여 4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7월에 대부인(大夫人) 상을 당하여 한양 거처로 돌아와 여막에서 지냈는데, 거상(居喪) 기간 동안 질병이 계속 이어져 하체 쪽에 큰 종기가 생겨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갑자년(1624년) 1월,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상께서 장차 공산(公山, 공주)으로 가려고 할 때 공을 기복(起復, 상중에 관직에 임명함)하여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다. 공이 병든 몸을 끌고 따라가 용인(龍仁)에 도착했더니 종기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주상을 호종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공은 통탄하며 여러 날 동안 미음도 먹지 못하였다. 얼마 뒤 역적이 평정되자 상례를 마칠 수 있었다.이해 10월 박내장(朴來章) 등이 역적모의를 하면서 몰래 의논하기를 "정 아무개는 장수의 재주가 있어 대장에 적합하다. 듣자니, 의원(醫員) 이대검(李大儉)이 종기 치료로 정모의 집을 왕래한다고 하니, 이대검을 시켜 언질을 주자……."라 하였다. 그 일이 발각된 뒤에 이 말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공이 체포되었다. 이어 이대검과 대질심문을 하였는데, 이대검이 "이 말을 과연 박내장 등에게 들었지만, 한번 종기 치료를 위해 침을 놓은 의원이 어떻게 이런 말을 정모에게 발설하겠습니까."라고 했을 뿐이니, 공의 억울함이 여기에 이르러 밝혀져서 장차 석방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간의 시안(詩案)에 대한 논계가 뒤이어 일어나 공이 결국 원통하게 형장에서의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대개 공은 무오년(1618년) 무렵 창원(昌原) 임소에 있었는데, 고을이 한가롭고 일이 없어 〈영사(詠史)〉 10편을 지었고, 그중 하나가 초 회왕(楚懷王)에 대한 일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1)1)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2)2)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3)3) 여린……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孱孫何事又懷王이는 한때 읊었던 시로 난고(亂稿) 안에 있었는데, 갑자년(1624년) 상중에 휴지로 꺼내어 여막(廬幕)을 도배하면서 이 시도 벽 사이에 도배되어 붙어 있었다. 판서(判書) 최내길(崔來吉)은 공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또한 격의 없이 대하는 사이였다. 하루는 공을 방문하여 오래 앉아 있다가 그 시를 보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상세히 보고 간 뒤, 자기 형제와 친구들에게 전하여 외워 주었다.이 때가 되어 대간이 시의 의미에 저의가 있다고 하고서 논계하여 형신(刑訊)을 가하였다. 그 당시 택당(澤堂) 이 상공과 포저(浦渚) 조 상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있으면서 그 시를 가지고 위관(委官)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는 시인(詩人)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고 또한 담고 있는 의도가 없으니, 어떻게 이 시를 가지고 이 사람을 죄주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죄주라고 떠들어 대는 속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택당은 매번 공이 취조 당할 때의 원정(元情, 1차 진술) 문서를 외울 때마다 원통함을 품고 죽은 데 대해 슬퍼했기 때문에 역사를 편찬할 때에 또한 공의 충렬과 공적을 밝혔던 것이다.아! 공은 충효(忠孝)로 마음을 세우고 염정(恬靜)으로 지조를 삼았으며 평소 지닌 재략(才略)으로 일찍이 공적을 세웠으나, 한번도 시세(時勢)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결과 공을 구하려 논계하고 이치를 들어 신원한 일이 없었으니, 그 억울함을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단서(丹書)29)에 실린 모든 사람들이 두루 사면되는 은혜를 입었으니 공 또한 분명 그 가운데 들어가야 했는데, 공의 자손이 화란을 겪은 뒤에 영외(嶺外)로 유락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성대한 은전(恩典)을 베풀 적에 상고하여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이 형신(刑訊) 아래 운명했을 뿐, 특별히 단정할 만한 죄안(罪案)은 없다. 【畏齋李公爲北評事時, 因北地公論, 欲爲先生立祠, 以書訪先生遺事於西河李公。西河公求見先生事蹟於子孫, 故略記顚末, 因載《西河集》中。】公少著文名, 早登科第。其詩章騈語, 膾炙人口, 迄于今不已焉。公旣出身立朝, 常以效忠盡節爲平生志。萬曆辛卯, 出拜北評事, 壬辰, 倭寇旣覆三都, 賊將淸正長驅入北道, 列邑瓦解。會寧賊鞠景仁·鏡城賊鞠世弼等, 作亂導倭, 兩王子及陪臣皆就擒於賊, 而官守竄伏, 莫敢出氣。公於是始售報國之志, 其方略機宜, 事功顚末, 非徒垂載國乘, 北人立傳爲記, 以爲不忘不泯之地, 至欲立祠俎豆之, 以公冤死不敢焉。閔應敎維重頃在鏡府時, 詳聞公當時之事, 且得其傳敍而來, 故兹寫一通于後矣。至於國乘, 則澤堂太學士釐正《宣廟實錄》, 於公平定北關事, 特筆立綱敍目, 著公忠勤甚詳, 亦嘗稱道於人云。公之臨亂宣力, 若是其彰明, 而伊時咸鏡監司尹卓然, 惡公聲績掩己, 誣啓以聞行朝, 故公之大功, 不被顯賞, 只以誅鞠賊功, 陞拜吉州牧使。厥後北人爲公陳疏訟功, 褒美始到, 復陞嘉善階。公則終始不伐, 對人未嘗話北事, 知公者尤服公焉。公素性恬退, 不曾趨向時好, 故竟未大顯於淸朝。及光海壬子後, 目見時事大乖, 兇人鄭造又不幸近出門族, 故因杜門屛跡, 若見造來, 則或沈醉不省, 或瞑目不語, 以是大爲其黨所擠。且與李爾瞻, 隔洞而居, 爾瞻許公文才, 常亦納交, 而公一不造其門, 故邅廻不調者, 凡十餘年, 其間或佩郡紱, 而亦未曾一年淹於任所。己未後, 廢母之變旣發, 廷請收議之時, 公每出避在外, 一無隨參之累。自是縱酒沈湎, 雖族人罕得見其面, 蓋欲以酒自汚自廢也。洪鶴谷相公, 卽公中表兄弟也。癸亥春間, 數訪公居, 輒値公醉臥, 語公子弟曰: "大令公, 後勿過飮, 待我更來云", 則可見鶴谷之意, 而公竟不省悟。是年三月, 仁廟改玉, 廟堂以公有文武才, 被元帥薦, 且以公昏朝時屛斥人, 將大用, 而公爲親乞養, 四月拜全州府尹。七月丁大夫人喪, 歸洛居廬, 草土之中, 疾病連綿, 大腫發於下部, 久未完合。甲子正月, 李适叛, 上將幸公山, 命起復公, 爲副摠管。公力疾載曳, 追到龍仁, 腫勢添劇, 不得運身, 未果參執靮之列, 公痛恨不進粥飮者累日。俄而賊平, 得終喪制。是年十月, 朴來章等謀逆, 私相議曰: "鄭某有將才, 可合大將。聞醫人李大儉, 以治腫事往來鄭某家, 可使大儉言及云云。" 及事覺後, 此言出於賊招, 公被逮, 仍與大儉面質, 則大儉曰: "此言果聞於來章等, 而一番治腫下針之醫, 安得發此言於鄭某乎云爾。" 則公之冤, 至此乃白, 將爲放釋, 而臺論詩案繼發, 則公竟未免梧棘之冤矣。蓋公於戊午年間, 在昌原任所, 官閑無事, 賦〈咏史十絶〉, 其一乃楚懷王事也。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一時諷詠之作, 置在亂稿中, 甲子居憂時, 搜出休紙, 塗背廬幕, 此作亦爲背帖壁間矣。崔判書來吉, 卽公連家之人, 而亦無所嫌郤者也。一日來訪公, 坐久因見其詩, 近面詳視而去, 乃爲傳誦於其兄弟親友間矣。及是臺諫, 謂詩意有所指, 論啓刑訊。其時澤堂李相公及浦渚趙相公, 爲問事郞, 執其詩, 就委官前曰: "此乃詩人詠史之作, 且無包藏底意思, 何可以此詩罪此人也云。" 而安得見施於衆咻中耶。澤堂每誦公置對時原情文字, 哀其抱冤而死, 修史時, 亦發明公之忠烈功業也。噫, 公以忠孝立心, 恬靜爲操, 素有才略, 早建功業, 而曾不趨附時勢, 故當時知公者少, 不知公者多, 終無論救伸理之事, 而其冤枉, 則人到于今稱之也。丙丁亂後, 凡在丹書之類, 遍蒙宥澤, 則公名必在於其中, 而公之子孫, 禍變之後, 流落嶺外, 朝家霈典, 不得考明, 而第公殞於刑訊, 別無斷定罪案矣。 정조 1559~1623.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시지(始之)이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측근으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인조반정 후 세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청(庭請)이나 수의(收議) 정청은 백관들이 함께 궁정(宮庭)에 나아가 일을 계품(啓稟)하고 하교(下敎)를 기다리는 것이다. 수의는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해 임금이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견을 물어 수합(收合)한 문서이다. 단서(丹書) 쇳조각에 지워지지 않게 붉은 글씨를 써서 공신(功臣)에게 주어 그 자손(子孫)이 죄를 지어도 죄를 면하도록 하던 일종의 증서이다. 《漢書 高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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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城別曲次韻 錦城慶事不其誇賀鼓淵淵十二家如此嘉期稀振古懽忻朗咏六章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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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錦城別曲【二首】 樂育人才足可誇終敎英俊輔 王家錦城風景休煩問須聽陽宗醉後歌風流文雅兩堪誇禮樂由來自一家浩氣有時天地窄何妨醉聽遏雲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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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狂先生遺稿 先人遺我一間屋前對靑山後大洋富貴從來須莫問況於南野可耕桑全生恩意望全歸俯仰于心對夕暉稚子欣然來告報南山薇蕨雨餘肥桂林風月掛情人忠武當年委質身大丈夫才何處展張弓揮翰太平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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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賊适授首【甲子二月二十八日】 忽聞元惡自授首老氣衝冠喜欲狂安得羽翰生兩腋共隨鵷鷺賀明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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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樂堂李先生告由祭文 參判尹鳯朝恭惟歸樂堂李先生搢紳重望士林維則常懷休退士禍旋酷志符五恨義合孤狂志同義同宜配一室氣以類應德必有隣是以京外公議潝然爰卜辰良褥儀斯擧一體崇奉萬世無替謹玆齊沐用伸虔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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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坡先生遺稿【公當光海廢 大妣後杜門廢科有隣郡同硏人參廢毋科欲見公責而贈詩】 靑襟冑子盡爲土萬卷經書一炬燒莫道秦皇無道主當年惟不殺茅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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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翁先生丁享祝文 同人傳家禮法出天純行三世俎豆萬人瞻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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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樂堂李先生丁享祝文 參判尹鳳朝宏確峻潔領袖士林明薦在玆是顧是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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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恨先生丁享祝文 執義申命圭弊屣軒冕樂志丘壑一代淸風永世遺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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