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예조판서 민진후 諡狀 【禮曹判書閔鎭厚】 선조 때의 명신 전주 부윤(全州府尹) 농포(農圃) 정공(鄭公)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 만에, 그의 증손 전 주부(主簿) 삼(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의 증조부 문부(文孚)가 임진년 난리 때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을 무찌르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을 평정했건마는, 관찰사가 사실을 숨겨 공적과 포상이 실제에 걸맞지 아니하였습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한 처음에 불행히 횡액으로 옥사에 연루됨에 걸려들어 마침내 시안(詩案) 때문에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선왕조에 이르러 그 원통함을 씻어 주고 작위를 내리고 공로를 녹훈하였으며, 후에 그를 이어 사당의 편액을 특별히 하사하여 융숭한 보답의 은전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직 시호를 주는 일 한 가지만은 아직 실시되지 못했으니 어찌 성조의 한 가지 빠진 일이 아니오리까?"라 하였다. 이에 그것을 해당 관청에 내리니, 그곳에서 아뢰기를 "문부의 공렬과 절의는 선배 명신들이 말한 것이 많으니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옛 법에 실제 직함 정2품 이상이 아니면 시호를 얻지 못하는 것이 준례이오나, 취할 공적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거기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니 삼의 말이 옳습니다."라 하니, 주상께서 곧 그것을 허락해주었다.그 뒤 10년이 지나 삼의 재종제 되는 구(構)가 공의 문집과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선조(先祖)의 시호는 이미 임금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형 삼이 병으로 죽고 태상(太常)의 시장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나의 선조 사적을 아는 이로는 그대처럼 자세한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감히 부탁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나는 두 번 절하며 그것을 받고서 말하기를 "그렇다. 옛날 우리 선친 문정공(文貞公)39)이 경성 통판(鏡城通判)으로 계셨을 적에 공의 유풍을 듣고 충의를 사모함이 대단히 지극하여 제문을 지어 공과 더불어 같이 거의(擧義)한 이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고, 또 돌아가신 중부(仲父) 의정공(議政公)40)이 일찍이 북도를 안찰했을 적에 공의 사당을 세워 길이 교화의 터전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분발케 한 바 있었습니다. 진후는 비록 못났지마는 오히려 어진 부형 둔 것을 기뻐할 줄은 알거늘 이제 공에 대한 글 수고쯤이야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자는 자허(子虛)요, 농포(農圃)는 그의 호다. 계통은 해주(海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중(侍中) 숙(肅)의 후손이다. 조선 왕조에 와서는 찬성사(贊成事) 정도공(貞度公) 역(易)이 가장 현달하였으며, 그 아들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은 효성과 우애로써 널리 알려졌다. 동지의 아들은 참의(參議) 침(忱)이요, 참의의 아들은 부사(府使) 연경(延慶)이다. 부사로부터 3대가 지나 공의 아버지 신(愼)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부인 김씨로 장사랑(將仕郞) 흥례(興禮)의 따님이다.공은 가정(嘉靖) 을축년(명종 20, 1565년) 2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큰 뜻을 지녀 장난할 때도 반드시 편을 갈라 진을 치고 적을 마주하여 서로 싸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이 한가운데에서 호령하면 뭇 아이들은 모두 그 약속이나 한 듯 명령을 받들었다. 일찍이 범 잡는 것을 구경할 적에 포효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뭇 아이들은 엎어지며 피해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공만은 혼자 태연히 그대로 앉아 있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또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는데 한 번 눈을 거치기만 하면 외웠으며, 7~8세 때에 지은 시 구절은 당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간간이 활쏘기를 익혀 멀리서도 버들잎을 맞추는 솜씨41)가 있었고, 천문과 산수 같은 것도 모두 통달했다.을유년(1585년)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무자년(1588년)에 명경(明經) 갑과 제 2등에 올라, 예에 의하여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보직되었다. 만력 신묘년(1591년)에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니, 평사는 실로 학교를 관장하면서 모범을 보이는 책임을 겸하고 있다. 공이 부임하여 법으로써 가르치고 예로써 접대하여 모든 학생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듬해 여름에 왜구가 쳐들어와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적장 청정(淸正)은 승승장구하여 북쪽에 침입했을 때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키려 하다가 군사가 궤멸되어 달아나자, 적이 마침내 쳐들어와 강가 연해 여러 고을에 가득하니 인심은 소란해지고 반란자들이 몰래 일어났다.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목남(木南),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과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 등은 모두 반란한 역적들의 괴수인데, 국세필은 왜서(倭署)를 받아서 관호(官號)를 두었으니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그 당시 임해군(臨海君), 순화(順和君) 두 왕자와 대신 김귀영(金貴榮), 부원군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승지 혁(赫)이 병화를 피하여 북도에 있었는데 국경인이 잡아 묶어 왜적에게 넘겨주었으며, 남북의 병사(兵使)와 여러 고을 수령, 진보(鎭堡)의 변방 장수들도 거의 모두 반적에게 함락되었다. 공은 마침내 몰래 산 속에 숨었다가 길에서 반적을 만나 잡혀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한 서생이 농기구를 가지고 반적을 쳐 죽이고서 공을 탈출시켰으며, 또 토착민이 쏜 화살에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죽음은 면하기도 했다.공은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이 또한 피난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방을 두루 찾아 서로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같이 의논하고 인하여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 나 정언(羅廷彥), 수성 찰방 최동망(崔東望), 귀양 와 있던 한백겸(韓百謙),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경성에 들어갔으나 군중이 국세필의 위협에 겁내어 순식간에 궤멸되어 흩어지므로 공은 부득이 샛길로 남쪽으로 달아났다.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찾아들었는데, 한인간은 마음속으로 정공임을 알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국세필이 사람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끝까지 숨기고 고발하지 아니했다. 며칠을 묵고 있다가 마침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을 만나 함께 어랑리(漁郞里)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갔다. 이붕수는 의사라, 공이 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가산을 기울여 모셨다.공은 마침내 이붕수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자 이에 서로 전하고 부르며 차츰 호응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가 제일 먼저 왔고, 종성 부사 정현룡(鄭見龍) 및 각 진을 지키던 장수와 피난 와 있던 조정의 관리 서성(徐渻)과 이성길(李成吉) 등이 또한 모여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를 삼으려하자 공은 스스로 나이 젊고 지위가 낮음을 들어 정현룡에게 사양하였으나, 정현룡은 감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며 또 다른 장사들도 또한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하므로 이에 공은 대장이 되고 정현룡은 부장, 이붕수는 별장, 강문우는 척후장이 되어 부서가 정해진 다음 먼저 국세필에게 사람을 보내어 국가가 장차 중흥될 경사가 있음을 알리고 공을 세워 스스로 충절을 바치라는 뜻으로 타일렀다.9월 12일에 군사들을 이끌고 고을의 성에 이르니 국세필이 문을 걸고 항거하므로 협박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자, 비로소 맞아들이는데 공은 국세필의 군대 형세가 지극히 강성한 것을 보고도 조금도 겁내는 빛이 없이 천천히 반역과 순종에 대하여 변론하면서 되풀이하며 깨우쳤더니, 반적이 두려워 굴복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했었다. 국세필은 그의 심복 부하를 시켜 공의 좌우에서 모시며 모든 문서를 모두 몰래 보게 했는데, 공은 장계를 올릴 때 국세필의 일에 대해서는 짐짓 완곡한 말을 만들어 그 초본을 책상 위에 두었더니 국세필이 그것을 보고 과연 기뻐하였다. 이에 공은 국세필에게 명령하여 관청 일을 맡겼다.어떤 사람이 공에게 국세필을 일찍 없애버리라 권하자 국세필은 그 말을 듣고 겁을 내니, 공은 밤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국세필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며 의심하지 않는 기색을 보여 주었다. 마침 왜병 90여 명이 성 아래로 육박하므로 공은 장수와 병사에게 명령을 내려 공격하여 물리치게 하자 국세필은 그 아들과 함께 왜장 한 놈을 사로잡았다. 공은 국세필 부자의 공로를 기록하여 장계하니 국세필은 스스로 안심하였으며, 공이 또 일찍이 자기를 쏘았던 자의 죄를 용서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자, 이에 육진(六鎭) 사람들은 공이 배반자를 놓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다투어 투항하였다.회령의 아전과 선비들이 국경인과 그 무리 여섯 명을 목 베어 그것을 군문에 바쳤다. 명천 사람도 또한 말수의 목을 베려 하다가 도리어 적에게 패하였는데, 공이 강문우와 구황(具滉)을 보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여 목을 베었다. 이 두 역적의 목을 벤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여 징발한 군사가 점점 많이 모여 들게 되었으니, 고령(高嶺) 첨사 유경천(柳擎天) 등 여러 진장(鎭將)들도 또한 공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공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하여 군중이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어느 날 갑자기 두 역졸이 까닭 없이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는데, 공은 그것이 국세필의 흉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 곧바로 두 역졸을 목을 베고 이어서 영을 내려 성에 올라 전투를 훈련시키게 하되 밤중에야 파하며 이튿날에도 또 그렇게 했다. 공은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에 앉자 국세필이 모든 장수들과 함께 군례를 올렸는데, 공은 강문우에게 명령하여 국세필을 끌어내려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협박에 못 이겨 그의 명을 따른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서 훗날에 공을 세우게 하니 이에 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공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내어 왜적을 치기로 의논하였는데 정현룡은 경성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제 다만 자신만을 지키는 것이 어찌 당초 의병을 일으킨 뜻이겠는가. 그러나 대중에게 물어서 결정하자."라 하고서 다음날 군중을 남문 밖에 모으고 가부를 물으니 모두 다 공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에 동관(潼關) 첨사 이응성(李應星)으로 하여금 경성에 머무르게 하고, 정현룡은 중위장을 삼고 유경천은 좌위장, 오응태는 우위장, 방원(防垣) 만호 한인제(韓仁濟)와 사절동(斜卩洞) 권관 고경민(高敬民)을 좌우복병장으로 삼았다. 10월 21일에 삼위병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몇 리를 가니, 어떤 이가 공을 맞이하면서 고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드세니 싸우면 반드시 이롭지 못할 것이요, 아직은 성을 지켜 스스로 보전하는 것이 옳습니다."라 하므로 공은 "네가 감히 적을 위하여 우리 군사를 막으려 하느냐."라 하고는 곧 그 머리를 베어 깃대에 매어 달고 명천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서 모든 장수들에게 방략을 지휘했다.그믐날에 왜적을 길주(吉州) 장평(長坪)에서 만나 모든 군사가 양 옆에서 공격하고 복병이 번갈아 나오자 마부와 하졸들도 용기를 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적이 패하여 도망하므로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괴수 다섯 명을 죽였으며 8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산골로 도망간 자들도 사방으로 불을 놓아 모두 타죽게 하였으며, 또 화살에 맞아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말은 118 마리를 노획하고 적에게 노략당한 사람과 가축 및 군기 등 물건을 도로 빼앗아 온 것이 매우 많았으니 논하는 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여기에 비길 만한 승첩은 없었다고들 하였다.길주에 머무는 왜적이 성에 웅거하여 굳게 지키니 여러 위장들이 여러 번 포위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은 이르기를 "지금 만약 급히 뺏으려 하다가는 군사들이 많이 상할 터이니 군사를 영동(嶺東)으로 옮겨 먼저 책문 안에 있는 적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책문 안의 적이 평정되면 성안에 있는 적은 형세가 외롭고 후원이 끊어져 새장 속에서 새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로 영동으로 향해 옮겨 임명(臨溟)의 쌍포(雙浦)에 이르렀는데, 마침 책문 안에서 나와 노략질하는 왜적을 만나게 되자, 삼위의 날랜 기병이 한꺼번에 들이쳐 백여 명의 목을 베고 그들의 배를 갈라 창자를 내어 길가에 십여 리나 늘어놓았다. 그대로 진군하여 적의 책문을 포위하고 왜장에게 격문을 던졌는데, 그 안에 "장평에서 귀를 베인 무수한 놈들은 응당 죽은 뒤에도 도망 다닐 놈이요, 쌍포에서 거세당한 놈들은 다만 생전에서만 남자 구실한 놈들이다."라는 말이 있었다.이에 앞서 피난 온 사대부들이 토착민들에게서 무수히 약탈을 당했다가 공이 반적을 토벌하게 되자 모두 공에게로 와서 그것을 도로 찾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일체 들어주지 아니하였으며, 정현룡이 이 일로 백성을 소란케 하자 공이 꾸짖어 못하고 하고 곧 영을 내렸다. 정현룡은 본래 공의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유언비어를 만들어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의 귀에 들어가게 하자, 윤탁연도 본래부터 공의 명성과 업적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미워하며 마침내 공문을 발송하여 공의 죄를 따지고 대장을 바꾸어 정현룡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전후의 전공을 모두 속여 정현룡에게로 돌리고서 조정에 이를 아뢰니, 정현룡은 마침내 크게 승직되고 공은 다만 국적(鞠賊)을 죽인 것으로 당상관의 자급에 올랐다.윤탁연은 또 공을 포망장(捕亡將)으로 삼아 마천령에 머물게 했으나, 공은 사양하여 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길주의 적을 아직 소탕하지 못하였는데, 북방 적병들이 어찌 남쪽으로 도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북병사(北兵使)가 남도에 있으면서 공으로 하여금 멀리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들을 억누르라고 하니 공은 마침내 부하 약간 명을 거느리고 육진을 향해 출발하여 공 있는 사람은 표창하고 죄 있는 자는 목을 베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싸우고 지키는 것을 모두 마땅하게 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모두 경외하며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했다.정현룡이 대장 된 지 한 달이 못 되어 윤탁연은 그를 다시 겸절도사(兼節度使)로 옮기고, 오응태로써 대신하게 하더니 또 한달 남짓하여 도로 공으로 대장을 삼았다. 그것은 대개 군중이 공을 잃고부터는 분하게 여기며 불평하고 의사들 대부분 흩어져 떠나니, 왜적이 이를 갈며 틈을 엿보고 반역의 남은 무리들도 또 다시 일어날 기미가 있어서 식자들이 모두 허물을 윤탁연에게로 돌렸기 때문에 이런 조처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사퇴하지 못하겠는가."라 하니 공은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다만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죽을 곳을 얻었는데, 어찌 작은 혐의를 고려하여 위급한 국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계사년(1593년) 정월에 마침내 길주에 이르러 삼위장의 군사를 먹이고 위로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가 배나 솟아 흩어져 도망갔던 자들도 도로 모여들었다. 단천(端川) 군수 강찬(姜燦)이 달려와 공을 보고 말하기를 "단천에 남은 왜적들이 마음대로 횡행하니 군사를 나누어 칩시다."라고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방금 강병을 쉬고 있는 중이요, 단천은 같은 도인데 어찌 서로 구원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곧 정병 2백을 뽑아서 구황(具滉) 등 네 장수로 하여금 각각 50명씩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고개를 넘어가 성 밖 20리쯤에서 병사를 매복하고, 단천의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다가 거짓 패하는 척하게 하였다. 이에 왜적 2백여 명이 승세를 타고 멀리 쫓아 매복이 있는 곳까지 이르므로, 네 부대가 함께 나와 좌우로 내달려 돌격하여 도망하는 자를 추격, 거의 다 쏘아 죽이고 목을 베니, 부상을 입고 성으로 들어간 자는 겨우 30여명이었다.이윽고 남도의 왜적 한 개의 큰 부대가 영동의 왜적과 합세하여 마천령을 거쳐 북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도로 임명(臨溟)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정병 6백을 뽑아 요충지에 매복시켰는데, 과연 왜적이 들을 덮어 침입하여 오므로 복병이 모두 일어나 힘을 다해 싸우고, 공도 또한 삼위병을 지휘하여 말을 채찍질해 나가면서 "오늘 나는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라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그를 따르며 물러가는 자가 없었다. 60여 리를 옮겨가며 싸우다가 백탑교(白塔郊)에 이르러서는 화살이 비 오듯 하며 피는 흘러 길에 가득하였는데, 적의 목 9급을 베었으며 말 15필을 빼앗았다. 그 가운데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를 적이 싣고 성으로 들어가 한데 모아 불태워 버렸는데, 대개 그 수가 백여 명 정도 되었다. 청정(淸正)이 그 무리를 거두고 밤을 타고 도망하여 고개를 넘어 남으로 도망하면서 밥 지을 겨를도 없었는데, 공은 그들을 쫓아 영동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니, 이로부터 관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대개 공은 일을 처리하는 데 정밀하고 분명하였으며, 적정을 파악하는 데는 귀신 같았다. 더욱 사람 쓰는 데 능하여 각각 적재적소에 등용하므로 사람들이 죽음을 잊어버리고 공에게 기용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마침내 수천 명밖에 안 되는 고립된 군사로 한창 기세를 드날리는 정예의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으랴.윤탁연은 공이 자신 마음대로 제 공로를 기록하고서 이문(移文)했다고 하면서 성을 내어 공문으로 꾸짖으며 말이 몹시 이치가 없었으나, 공은 변론하고 분석하기를 밝게 하며 굴하지 않았다. 윤탁연은 더욱 크게 성내어 군법으로써 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며, 공의 보좌관을 잡아다가 고문하기까지 하였지만 죄를 얽을 단서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모함하는 말을 지어 사실과 반대되게 장계를 올렸다. 공은 본시 외로이 일어섰고, 또 그를 위해서 한 마디 말도 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공의 전후 공적이 저같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모두 알지 못했었다.길이 뚫리게 되자 병사가 비로소 북으로 오게 되니 공은 자기가 거느린 병마를 이끌고 가서 그에게 귀속했었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배수되고, 을미년(1595년)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옮겼으며, 병신년(1596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옮기고, 정유년(1597년)에 어사(御史)가 공의 치적을 위에 아뢰어 안팎의 옷감을 하사하여 포상하였으며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옮겼다가 다시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옮겼다. 당시 바야흐로 외방 진관(鎭管) 제도를 수정하는데, 상공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공이 먼저 공으로 하여금 군정을 정돈하게 하고서 열읍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라고 청하였다. 무술년(1598년) 봄에 부임하였다가 가을에 체임되어 돌아왔는데, 그 뒤 5~6년 동안은 잇달아 지방 고을로 나갔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군직을 맡거나 혹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신축년(1601년)에 북쪽 인사들이 상소하여 공의 공적을 칭송함으로 인하여, 가선 대부에 올랐다. 갑진년(1604년)에 부친상을 입었다가 탈상한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610년)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신해년(1611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 임자년(1612년)에 다시 길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광해의 정치가 어둡고 어지러웠는데, 흉인(凶人) 정조(鄭造)42)는 마침 공의 가까운 일가였다. 공은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정조가 오는 것을 보면 혹 취한 척 깊이 잠자고 또는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게 되자 항상 술만 마시니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부총관(副摠管)과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무오년(1618년)에는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되었다.계해년(1623년) 3월에 인조 대왕이 등극하여 정치의 계획을 세울 적에 조정의 의논이 공을 크게 쓰려고 하여 원수(元帥)에 추천되었고 또 장차 현달한 높은 자리에 두려고 하였는데, 공은 노모를 편하게 봉양하는데 급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원하였다. 그런지 몇 달이 못 되어 어머님이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공은 상(喪)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인하여 몸이 손상되어 병이 되었으며 또 큰 종기가 나서 오랫동안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었다. 갑자년(1624년) 정월에 이괄(李适)이 난리를 일으켜 임금이 공주로 행차하였는데, 공에게 기복(起復)43)을 명하여 부총관을 삼아 출전하게 하려다가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으며, 적이 평정된 이후 상례를 마치도록 허락했다.이 해에 박래장(朴來章) 등이 모반을 꾀하면서 공이 장수의 재질이 있다 하여 의원 이대검(李大儉)으로 하여금 모반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대검이 공을 대하여 감히 그 말을 발설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실지로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역옥이 이뤄지자, 공은 이름이 반역자들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체포되었으나 여러 죄수들의 공술(供述)이 서로 다르지 않아 공의 억울한 사정이 밝혀졌으니 으레 마땅히 석방되어야 하는데, 다시 시안(詩案)의 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공이 일찍이 창원 부사로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우연히 〈영사(詠史)〉 10절을 지었는데, 그 한 수는 다음과 같다.초에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4)4) 예언한 남공의 말 :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5)5) 무관에 들어가자 :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6)6) 여린……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孱孫何事又懷王그 시를 그대로 휴지 뭉치 속에 두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여막의 벽에 도배를 했는데, 어떤 공신이 찾아와서 벽을 눈 여겨 보고 간 뒤에 친구들 사이에 널리 전파하였다. 대관(臺官)이 '시의 뜻이 무엇을 지적한 바가 있다'고 논계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이 당시 문사낭청이 되었는데, 위관에게 말하기를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 깊은 뜻이 있지 않은데 무슨 죄가 되겠소."라 하고 힘써 무죄를 다투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마침내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바로 11월 19일이다. 원 근간에 이 소식을 들은 사람으로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대개 공은 평소에 말이 적었고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비록 친하게 잘 지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바르지 못한 곳이 있음을 보면 다시는 서로 사귀지를 아니하였다. 월사(月沙) 이 문충공(文忠公, 李廷龜)은 평소 공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자허의 인물과 재질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다만 그의 강직함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쉽다."라 하였으니 대개 공이 화를 입을까 걱정한 것인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고들 하였다. 광해 때에 어떤 권세 있는 대신이 그를 끌어 자기의 편을 삼으려 하여 공을 보고 풍자해 말하기를 "그대의 가난과 고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하거늘 어찌 스스로 그것을 견디는가."라 하자, 공은 곧 대답하기를 "나는 장차 활과 화살을 가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맹호를 쏘아 그것으로 살아갈지언정 분수 넘치는 부귀는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오."라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가 버렸다. 이이첨(李爾瞻)과는 한 동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그가 공의 문재(文才)를 사모하여 사람을 시켜 여러 번 공에게 뜻을 보냈으나, 공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또 서로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정인홍(鄭仁弘)에게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와서 그의 권세에 힘입으려 하므로 공은 매를 때려 쫓아 버렸다. 대개 훈신 귀족의 요청을 일체 들어 주지 아니하여 공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화를 부르게 된 까닭이었던 것이다.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난 성품이어서 부모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함을 다하였다. 판서공(공의 부친)은 자제 가르침이 매우 엄격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매를 치더니, 그가 돌아가신 뒤에 공은 항상 "내가 다시 매를 맞고자 한들 어디 가서 매를 맞겠는가?"라 하고 매양 흐느끼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었다. 큰 형이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았는데, 공은 여러 조카들 어루만지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들처럼 하였다. 몸가짐은 맑고 검소하게 하여 세상의 이익이나 탐하고 재물이나 좋아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겼다. 평생 살림을 경영하려는 생각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때는 그 행장이 쓸쓸하였으며 집에 이르는 날에는 또한 남에게서 꾸어다가 밥 짓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가법에 더욱 엄격하였으니 집안이 비록 화목했으나 안과 밖을 자른 듯이 구별하여 지금껏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실추하지 않아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들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처음에 택당공이 일찍이 북평사가 되었을 때에 그 곳 백성들의 말을 채록하여 공이 적을 토벌하던 내력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아직 업적을 드러내어 표창하지는 못하였다. 현종 갑진년(1664년) 무렵에 이단하(李端夏) 상공은 택당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북평사로 나갔는데, 공의 충의에 감격하였으나 그 원한을 드러내 밝히지 못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사우를 세워 제향할 것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또 소장을 올려 공을 위해 힘써 신원을 변론하였으며, 높은 품계의 벼슬을 추증하여 포상할 것을 주청하니 주상은 묘당에 명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대신 정태화(鄭太和) 공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이에 공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겸직은 정해진 규례대로 추증하였으며, 또한 자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사우의 편액을 내렸으니, 이것은 상공 여성제(呂聖齊)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나도 일찍이 외람되이 평사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에게 아뢰기를 "정문부, 이붕수와 같은 충절로도 조정에 벼슬하는 자손이 하나도 없는 것은 공을 갚고 선을 권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전조(銓曹)에 명을 내려 특별히 뽑아 쓰도록 하소서."라 하니, 주상께서 곧바로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제 20년이 거의 되었으되 아직도 명을 받들어 시행한 사람이 없으니 사뭇 개탄할 일이다. 생각하건대 공의 위대한 공적과 지극히 원통한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환히 드러나 있고, 또 절로 석실(역사)의 좋은 기록에도 있으니 도리어 어느 겨를에 구구하게 감탄하면서 찬양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감히 두드러진 사행과 이력을 대강 기록하여 유사(有司)에게 삼가 고하여 채택하는 자료로 삼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하였으니 이것 또한 옛 사람들이 시호를 청하는 체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살펴주기 바란다.승정 대부 행예조판서 민진후는 삼가 짓는다. 宣廟朝名臣全州府尹農圃鄭公, 旣沒之八十年, 其曾孫前主簿杉上疏言, "臣之曾祖父文孚, 當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破倭寇, 以克定關北, 而臬司掩蔽, 功賞未稱。仁祖反正之初, 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及至先王朝雪其冤枉, 而贈爵錄, 後又從而特宣賜額, 崇報之典大備, 惟是贈諡一事, 尙未之擧, 豈非聖朝之一闕事也。" 事下該曹, 覆奏曰: "文孚功烈節義, 前輩名臣多言之, 無復可議。國家故事, 非實職正二品以上, 例不得諡, 而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杉之言。是也。" 上亟許之。又其後十年, 杉之再從弟構, 袖公文集及家狀一通, 來謁于鎭厚曰: "先祖易名, 旣蒙聖允, 而未幾而兄杉病死, 太常之狀, 至于今未就。世之知吾祖事蹟者, 莫如子詳, 敢以爲托。" 鎭厚再拜而受之曰: "然。昔我先君子文貞公, 通判鏡城, 聞公之風而慕義特至, 至操文致酹於與公同事諸人之墓, 先仲父議政公, 嘗按北藩, 立公之遺祠, 以永樹風聲, 而使民有所興勵。鎭厚雖甚不肖, 猶知樂有賢父兄, 則今於公文字之役, 其烏敢辭之哉。" 謹按公字子虛, 農圃其號也。系出海州, 高麗侍中肅之後。入我朝, 有贊成事貞度公易, 最顯, 其子同知忠碩, 以孝友聞。同知之子曰, 參議忱。參議之子曰府使延慶, 自府使三世而至公之考愼, 大司諫, 贈禮曹判書, 妣, 貞夫人金氏, 將仕郞興禮之女。公以嘉靖乙丑二月十九日生, 幼而嶷然有大志, 其遊戲必分曹布陣, 爲對敵相戰狀。公居中號令, 而羣兒皆奉其約束。嘗往視捕虎, 咆哮之聲振天地, 羣兒無不顚仆辟易, 而公獨安坐自若, 見者異之。又聰穎絶人, 讀書過目成誦, 七八歲時所綴詩句, 已膾煑一世。間習射藝, 有穿楊之竗, 如天文籌數, 亦皆通曉焉。乙酉中生員進士兩試, 戊子登明經甲科第二名, 例付漢城參軍。萬曆辛卯除北評事, 評事實兼學校表率之任。公至則敎之有法, 而待之以禮, 甚得諸生之心。翌年夏, 倭寇陸梁, 乘輿西狩。賊將淸正長驅入北, 北兵使韓克諴, 欲守磨天嶺, 軍潰而走, 賊遂入瀰滿沿江諸郡, 人心壞亂, 兇徒竊發, 明川之末秀木男·會寧之鞠景仁·鏡城之鞠世弼, 皆叛賊之魁, 而世弼至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時, 臨海順和兩王子及大臣金貴榮·府院君黃廷彧·其子承旨赫, 避兵在北, 景仁縛之, 以給倭, 南北兵使·諸邑守宰·鎭堡邊將, 幾盡陷於叛賊。公遂潛匿於山中, 路遇叛卒, 將執之以去, 賴有一書生, 以所持農器, 擊殺叛卒, 脫公而送之。又爲土人所射, 幾死而免。公聞前監司李聖任, 亦在奔逬中, 窮尋往見, 共謀倡義, 仍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百謙·羅德明等, 起兵入鏡城, 衆畏世弼威脅, 俄皆潰散, 公不得已, 亦從間道南走。至龍城, 投宿巫覡韓仁侃之家, 仁侃心知爲公, 待之甚厚, 世弼遣人搜括, 而終匿不告。居數日, 適遇鏡城儒生崔配天·池達源俱行, 至漁郞里李鵬壽家。鵬壽, 義士也, 見公至大喜, 傾家以奉之。公遂與鵬壽等, 謀再擧義兵。於是傳相號召, 稍稍響應, 壯士姜文佑最先至, 鍾城府使鄭見龍及各鎭守將及避亂朝士徐渻·李成吉等亦來會, 衆皆推公主盟, 公自以年少位卑, 讓於見龍, 見龍不敢當, 諸壯士亦願屬公。於是公爲大將, 見龍爲副將, 鵬壽爲別將, 文佑爲斥候將, 部署略定, 先送人於世弼, 報以國家中興之慶, 諭以立功自效之意。九月十二日, 勒兵向府城, 世弼懸門而拒之, 且脅且諭, 始乃迎納。公見世弼兵勢甚盛, 而略無怖意, 徐以逆順之辨, 反復譬曉, 賊畏服不敢動。世弼使其親屬, 侍公左右, 凡諸文書, 輒皆偸視, 公將馳啓, 而於世弼事, 故作婉辭。以其草本置之案上, 世弼見之, 果喜, 公命世弼, 仍管官事。人有勸公早除世弼者, 世弼聞而懼, 公夜屛人獨坐, 招世弼與語, 示以不疑之色。適會倭兵九十餘薄城下, 公命將士擊退之, 世弼與其子擒一倭將。公一體錄功而啓之, 世弼乃自安, 公又赦嘗射己者罪, 以爲褊裨, 於是六鎭人聞公釋反側, 爭相送款。會寧吏士斬景仁及其黨六人, 獻馘軍門, 明川人亦欲誅末秀, 反敗於賊, 公遣姜文佑·具滉, 率精騎揜擊斬之。兩逆授首之後, 南北始通, 徵兵稍集, 而高嶺僉使柳擎天等諸鎭將, 亦皆受公節制, 公號令嚴肅, 賞罰明信, 軍中無敢有犯法者。一日忽有兩驛卒, 無端大呼, 公知其出於世弼之兇計, 卽斬兩卒, 而仍下令登城習戰, 夜分乃罷, 翌朝又如之。公建大將旗, 坐南門樓, 世弼與諸將行軍禮, 公命姜文佑拿下斬之以徇, 其脅從, 幷赦勿治, 俾立後功, 於是軍聲大振。公與諸將, 議出兵擊倭,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公曰: "今但自守, 豈當初起義兵之意耶。然當謀于衆以決之。" 明日聚衆于南門外, 詢其可否, 咸以公言爲是。乃使潼關僉使李應星留鏡城, 鄭見龍爲中衛將, 柳擎天爲左衛將, 吳應台爲右衛將, 防垣萬戶韓仁濟·斜卩洞權管高敬民爲左右伏兵將, 十月卄一日, 率三衛兵出城, 行數里, 有人迎告於公曰: "賊勢甚盛, 戰必不利, 宜且守城自保。" 公曰: "汝敢爲賊沮吾軍耶。" 卽斬其首, 懸旗竿, 進次明川, 指揮諸將方略。晦日, 遌倭於吉州長坪, 諸軍挾擊, 伏兵迭出, 廝徒下卒, 無不鼓勇, 賊潰而奔北, 追擊大破之, 殺其巨魁五人, 斬馘八百二十餘級。其逃竄山谷者, 四面縱火而盡燒之, 中箭墜崖而死者, 亦不知其數, 得馬一百十八匹奪, 其所擄人畜及軍器等物甚多, 論者謂中興以來, 未有此捷比云。吉州留倭, 據城堅守, 諸衛將累圍而不得拔, 公以謂'今若急取, 多傷士卒, 不如移兵嶺東, 先擊柵內之賊, 柵內之賊旣平, 則城中之賊, 勢孤援絶, 取之如籠中鳥耳。' 卽日移向嶺東, 到臨溟之雙浦, 適遇柵內賊出掠者, 三衛精騎, 一時奮擊, 斬首百餘級, 剖腹露腸, 列之路傍, 連亘十餘里。仍進圍賊柵, 以檄書投倭將, 有曰: "長坪之斬耳無數, 應作死後之逃奴, 雙浦之割勢甚多, 只是生前之男子云。" 先是避亂士夫, 多爲土民所掠奪, 及公討叛賊, 皆從公請推還, 公一切不聽, 鄭見龍以此事擾民, 公又呵止, 而仍下令。見龍本忌公成功, 乃與諸士夫共造飛語, 使入於觀察使尹卓然之耳, 卓然固嫉公聲績掩己, 乃移文數公罪, 而遞大將, 以見龍代之。因以前後戰功, 誣歸於見龍, 而聞于朝, 見龍遂大被陞擢, 而公只以誅鞠賊授堂上階。卓然又以公爲捕亡將, 使住磨天嶺, 公辭不行曰: "吉州之賊, 尙不掃蕩, 北地之卒, 豈有南逃之理乎。" 北兵使在南道, 遙令公巡行六鎭, 以定民心鎭虜情, 公乃率麾下若干人, 發向六鎭, 褒有功誅有罪, 撫禦戰守, 咸得其宜, 民夷畏愛, 不敢更謀爲亂。鄭見龍爲大將, 未滿一月, 卓然移授兼節度使, 而以吳應台代之, 又月餘, 還以公爲大將, 蓋軍中自失公, 憤惋不平, 義士多散去, 而倭賊狺然伺釁, 叛民餘黨, 亦有復起之幾, 識者皆歸咎於卓然, 故有是擧。或謂公曰: "公未可辭歟。" 公曰: "始吾出萬死起義兵, 只欲爲國家效忠耳。今得死所, 其何可顧小嫌, 而不念國事之危急哉。" 癸巳正月, 遂馳到吉州, 餉勞三衛將之軍, 將士見公來, 勇氣自倍, 散去者亦還集。端川郡守姜燦馳謁公曰: "端之留倭, 恣意橫行, 願分兵以擊之。" 公曰: "吾方坐休強兵, 而端是同道, 何可不爲之相救乎。" 卽抄精兵二百, 使具滉等四將, 各將五十, 逾嶺而去, 伏於城外二十里許, 使端軍三十, 挑戰佯敗, 賊二百餘名, 乘勝遠追, 至伏兵處, 四隊齊出, 左右馳突, 追亡逐北, 幾盡射斬, 其帶傷入城者, 僅餘三十矣。 俄聞南道倭一大隊, 與嶺東倭合勢, 由磨天北來, 公還住臨溟, 抄精兵六百, 潛伏於要衝處, 倭果蔽野而至, 伏兵盡起鏖戰, 公亦麾三衛兵, 策馬而進曰: "今日, 吾當爲國一死。" 將士從之, 莫有退者。轉鬪六十餘里, 至白塔郊, 射矢如雨, 流血滿道, 斬馘九級, 奪馬十五匹, 其中箭而死者, 賊皆載屍而入城, 收聚燒燼, 蓋亦百數矣。淸正盡撤其衆, 乘夜逃迍, 逾嶺南奔, 不暇炊飯, 公追至嶺東而還, 於是關北遂淸。蓋公慮事精明, 料敵如神, 尤善於知人, 用各當才, 故人皆忘死而樂爲用, 卒能以數千孤軍, 擊却方張之銳寇, 雖故名將, 何以過此哉。尹卓然怒公擅自錄功移文, 詰責語多無倫, 公辨析甚明而不爲屈, 卓然益大恚, 欲以軍法殺公, 拿公將佐, 至加榜掠, 而終不得搆罪之端, 乃作誣語, 反其實以啓。公本孤立, 又無爲之一言者, 是以公之前後所成就, 如彼卓爾, 而朝廷皆莫之知也。道旣通, 兵使始北來, 公乃以所率軍馬, 屬之以歸。三月除永興府使, 乙未, 移穩城, 丙申, 移吉州牧使, 丁酉, 御史上公治行, 賜表裏以褒之, 移安邊府使, 又移公州牧使。時方修外方鎭管之制, 西厓柳相公成龍, 請先使公整頓軍政, 使列邑取效。戊戌春赴任, 秋遞還, 是後五六年, 連出宰郡邑, 而入則或付軍銜, 或爲判決事。辛丑, 因北路人上疏, 頌公之功, 陞嘉善階。甲辰丁外憂, 服闋除長湍府使。庚戌, 以謝恩副使朝京。辛亥南原府使, 壬子再牧吉州。是時, 光海昏亂, 而凶人鄭造, 又公之至親也。公杜門屛跡, 見造來, 則或托醉沈眠, 或閉目不語, 及乙卯廢母之論起, 則居常縱酒, 人不得見其面, 除副摠管兵曹參判而皆不就。戊午爲昌原府使。癸亥三月, 仁祖大王御極圖治, 朝議欲大用公, 旣被元帥薦, 而又將置之通顯, 顧公急於便養, 求爲全州府尹。未數月, 大夫人歿於官舍, 公奉喪歸洛, 因毀成疾, 又生大腫, 久阽於危。甲子正月, 李适叛, 上將幸公山, 命起復公, 爲副摠管, 使出戰, 聞其病劇而止, 賊平許終喪。是歲朴來章等, 謀不軌, 以公有將才, 因醫人李大儉要令言及, 而大儉對公, 不敢發, 公實不聞。及事發獄成, 公以名出逆招被逮, 諸囚以實供無異辭, 公冤狀自白, 例當見原, 而詩案之禍, 又出矣。公曾在昌原, 公餘偶作〈詠史十絶〉, 其一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仍置之休紙軸, 至是塗壁於廬幕, 有一勳臣來訪, 就壁熟視而去, 傳播儕友間。臺官以'詩意有指', 啓請鞠問。澤堂李公植·浦渚趙公翼, 時爲問事郞, 言於委官曰: "詩人詠史之作, 非有深意, 何可爲罪也。" 力爭而不能得, 終至栲死於獄中, 卽十一月十九日也。遠近聞者, 莫不冤之。蓋公平居簡默, 未嘗論人長短, 而性本嚴毅, 雖所親善, 見其有不正處, 不復與之相款。月沙李文忠公素與公厚, 嘗謂人曰: "鄭子虛人物才器, 誠不可易得, 而獨恨其剛直太過。" 蓋以取禍爲慮, 而其言卒驗云。光海時有權臣, 欲引爲己援, 見公而諷之曰: "君之貧苦, 令人傷心, 其何以自堪。" 公卽應曰: "吾將帶弓矢, 入深山, 射猛虎, 以資生, 匪分富貴, 非吾願也。" 其人慚而去。李爾瞻隔洞而居, 慕公文才, 因人累致意於公, 而公終不答。有相識者, 受簡於鄭仁弘, 欲以藉重, 公杖而逐之, 凡勳貴請囑, 一切無所聽施, 公之峭直, 類如此, 而此其所以招禍之道也。公孝友出天, 事父母, 極其愛敬。判書公敎子弟甚嚴, 少失意輒撻之, 及大故之後, 公常曰: "吾雖欲復受杖, 尙可得乎。" 每嗚咽不自勝。伯兄喪耦獨居, 公撫視諸侄若己出。持身淸約, 聞世之貪利嗜貨者, 常唾鄙之。平生未嘗爲經營產業計, 其罷官而歸, 行李蕭然, 至家之日, 亦不免假貸而爲食, 尤嚴於家法, 閨門雖雍睦, 而內外截然有別, 至今子孫世守不墜, 而搢紳家亦皆傳誦焉。始澤堂公, 嘗爲北評事, 採訪遺民之言, 記公討賊始末甚詳, 而未有以褒顯之。顯廟甲辰間, 李相公端夏, 以澤堂之胤, 繼先躅出佐北幕, 感公忠義, 而心傷其冤恨之未暴, 旣倡議建祠而俎豆之, 歸又上封章, 爲公伸辨甚力, 且請褒贈崇秩, 上下廟堂議。大臣鄭公太和諸人, 咸一辭贊之, 乃贈公議政府左贊成, 兼如式, 而又命錄用子孫, 其祠額之宣, 則用呂相公聖齊之言也。鎭厚亦曾忝爲評事, 旣還朝而告于上曰: "以鄭文孚·李鵬壽之忠節, 其子孫無一立朝者, 甚非所以酬功興勸之道, 宜令銓曹, 別爲調用。" 上卽賜頷可, 而今幾二十年, 尙未有奉承者, 殊可慨然耳。竊惟公之豐功偉烈, 至冤深痛, 昭在人耳目, 而又自有石室之良筆, 顧奚暇區區贊歎而揄揚之哉。玆敢粗錄其事行履歷之表著者, 敬告有司, 以備採擇, 而餘皆略之, 蓋亦古人請諡之體然也, 幷冀垂察焉。崇政大夫行禮曹判書閔鎭厚謹狀。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킨다. 의정공(議政公)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활쏘기를……솜씨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에 "초(楚)나라에 사는 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다. 백 보(步)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에 화살을 쏘면 백 번 발사에 백 번을 맞힌다."라고 하였다. 정조 1559~1623.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시지(始之)이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측근으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인조반정 후 세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다. 기복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인데,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상중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것을 이른다.